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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폭력

죄인들의 공동체, 성화를 향한 여정

작성자jamesha|작성시간26.06.20|조회수13 목록 댓글 0

교회는 흔히 성인(聖人)들의 모임으로 오해받곤 한다. 그래서 성직자의 실수나 신자들의 위선이 드러날 때마다 세상은 "교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교회는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로 자신을 정의한 적이 없다. 오히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2)

 

교회는 죄인이 없는 곳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한계와 상처, 죄성과 폭력성을 하느님 앞에서 직면하고 치유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성경은 인간을 지나치게 낙관하지 않는다. 카인의 살인에서 시작하여 바벨탑의 교만, 형제들의 질투, 전쟁과 억압, 그리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 안에는 사랑의 가능성과 함께 질투와 탐욕, 분노와 배제의 본능이 공존한다. 문제는 교회 밖에만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동일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는 의로운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완전함을 확인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리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공동체이다. 가톨릭 전례가 미사의 시작마다 참회 예식을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이 고백은 형식적인 문구가 아니다. 인간 안에 자리 잡은 죄성과 폭력성을 인정하는 겸손의 행위이다. 교회는 자신이 죄인임을 잊을 때 가장 위험해진다. 반대로 자신 역시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기억할 때 비로소 자비의 공동체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는 바로 이러한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은총의 수단이다. 말씀은 우리의 자기기만을 비추어 주고, 성체성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식탁에 모여 화해와 친교를 배우게 한다. 고해성사는 죄를 숨기는 문화가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전례는 인간 안의 폭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마술이 아니라, 폭력의 충동을 사랑과 용서, 연민과 섬김으로 조금씩 변화시키는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화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며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여정이다.

 

교회는 천사들의 집단이 아니다. 또한 세상과 자신을 정죄하는 의인들의 클럽도 아니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다시 용서를 배우고, 경쟁과 배제의 본능을 넘어 사랑과 연대를 배워 가는 순례자의 공동체이다. 어쩌면 교회의 가장 큰 기적은 완전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죄인들이 한 아버지의 자녀로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가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은 성인들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교회의 희망은 인간의 선함에 있지 않다. 인간 안에 깊이 자리한 죄성과 폭력성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있다.

 

결국 교회란, 죄인들이 모여 하느님의 말씀과 전례를 통해 자신의 폭력성을 조금씩 내려놓고, 사랑하는 존재로 성화되어 가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 한가운데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복음이 오늘도 계속 선포되는 이유이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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