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본질적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행위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쉽게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언제나 희생양을 만드는 일이었다. 공동체 내부의 불안과 분노, 실망과 좌절은 한 사람에게 집중될 때 가장 간단하게 정리된다. 그래서 정치는 때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떠넘길 대상을 찾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그 과정에서 적과 동지, 진영과 진영의 경계마저 무너진다. 희생양 앞에서는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는다.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의 환호를 받았던 예수의 운명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은 불과 며칠 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다. 사람들의 열광과 지지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 구세주였던 사람은 순식간에 혐오와 낙인의 대상이 되었다. 권력자들은 군중의 분노를 이용했고, 군중은 자신들의 불안과 좌절을 한 사람에게 투사함으로써 안정을 찾으려 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의 본성은 놀랍도록 닮은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오늘의 정치 역시 다르지 않다. 변방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정치적 시련을 넘어 집권에 성공한 대통령 이재명 역시 스스로 "언젠가는 나 또한 희생양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은 단순한 엄살이 아니라, 권력의 정상에 선 사람일수록 더욱 쉽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정치의 냉혹함에 대한 자각일 것이다.
실제로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필연적으로 비판과 견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건강한 일이다. 그러나 견제와 희생양 만들기는 다르다. 비판은 정책과 책임을 묻지만, 희생양 만들기는 모든 문제를 한 사람에게 덮어씌우고 공동체 내부의 모순을 외면하려 한다. 그 순간 정치는 성찰을 멈추고 집단적 분노의 제의(祭儀)가 된다(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
그렇다면 "어떻게 이재명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한 정치인을 보호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어떤 지도자도 무오류의 존재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성공과 실패, 공과 과를 함께 남길 것이다. 따라서 그를 지키는 길은 맹목적인 추종이나 우상화에 있지 않다. 잘한 것은 지지하고, 잘못한 것은 비판하되, 공동체의 모든 문제를 한 사람에게 전가하는 집단적 광기에 휩쓸리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 속에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인간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한 사건이었다면, 민주주의 역시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들어내려는 본능과 싸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을 악마로 만들면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동체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한 정치인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을 무조건 감싸는 것이 아니라, 환호와 증오 사이를 오가는 군중심리로부터 민주주의 자체를 지키는 일이다. 어제의 영웅을 하루아침에 악마로 만들고, 오늘의 희생양을 내일 또 다른 희생양으로 대체하는 정치가 반복된다면, 결국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군중의 환호 속에서도, 그리고 군중의 저주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민주주의 역시 특정 인물에 대한 열광이나 혐오가 아니라, 제도와 상식, 책임과 연대 위에서 지속될 때 비로소 건강해질 수 있다. 지도자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사람에게 모든 기대와 모든 증오를 집중시키지 않는 성숙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K-브랜드의 영광과 분열의 그림자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불과 몇 세대 만에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폐허 속에서 시작한 작은 나라가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이루었고, 반도체와 조선, 자동차와 배터리 산업은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K-팝과 K-드라마, K-푸드와 K-뷰티는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교육 수준에서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냈다.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도움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가 배우고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K-브랜드의 성공 뒤편에는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깊은 균열이 존재한다. 밖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경이의 대상이지만, 안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경제 성장의 과실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고, 세대 간·계층 간·지역 간 갈등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다. 부동산과 교육, 일자리와 복지 문제를 둘러싼 경쟁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구조적인 갈등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문제는 갈등 그 자체보다, 그것을 해결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갈등을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고 공통의 해법을 찾기 위한 제도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는 갈등을 완화하기보다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대를 설득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나누어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것이 더 쉬운 정치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국민들 역시 점점 진영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과 논리보다 소속감이 우선되고, 정책의 내용보다 누가 말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전혀 다른 현실을 본다. 상대방의 주장 속에서 옳은 부분을 찾기보다, 어떻게든 흠을 찾아 공격하려 한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가족과 친구 사이가 멀어지고, 인터넷 공간은 혐오와 조롱으로 가득 찬다.
이러한 모습은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을 정당화하고, 다른 집단을 위협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치는 이를 이용하고, 미디어와 소셜미디어는 이를 더욱 증폭시킨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결국 공동체 전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커질수록 정작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사실이다. 저출산과 고령화, 양극화와 지방 소멸, 기후위기와 국제 질서의 변화처럼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영 간의 전쟁 속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조차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소재로 소비될 뿐이다.
예수 시대의 군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로마 제국과 현실의 고통 속에서 분노와 좌절을 안고 살았고, 결국 서로를 향한 증오와 희생양 찾기에 빠져들었다. 군중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는 며칠 뒤 군중의 외면과 저주를 받으며 십자가로 향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안정을 얻으려는 유혹에 빠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경제적 위기나 안보 위기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를 시민이 아니라 적으로 바라보는 마음, 상대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문화, 그리고 공동체보다 진영을 우선하는 사고야말로 더 깊은 위기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힘은 K-팝이나 반도체에만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하고 타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에 있다. 민주주의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제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는 기술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K-브랜드의 성공이 진정한 자부심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경제적 번영 못지않게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의 연대가 회복되어야 한다. 밖으로는 세계인의 존경을 받으면서도 안에서는 서로를 증오하는 사회라면, 그 화려함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국가의 품격은 얼마나 강한 경제력을 가졌는가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진영의 승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할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를 넘어 세계가 본받고 싶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밑바탕에는 기독교 복음이 지닌 화해와 사랑, 용서와 연대의 정신이 자리하기를 희망한다. 복음은 적을 만들기보다 이웃을 발견하도록 가르치며, 승자와 패자를 나누기보다 함께 살아갈 길을 찾도록 초대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는 예수의 가르침은 비현실적인 이상이 아니라, 분열과 적대가 일상이 된 시대일수록 더욱 절실한 공동체의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