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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계시판

인간이란 무엇인가?

작성자jamesha|작성시간26.06.21|조회수18 목록 댓글 0

성서를 통해 바라본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나 이성적 존재를 넘어,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존재이며 동시에 선과 악의 가능성을 함께 지닌 존재입니다. 성경 전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인간을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에 따라 당신과 비슷하게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인간은 존엄과 가치를 지닌 존재, 사랑하고 창조하며 책임질 수 있는 존재,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리자로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치는 능력이나 재산, 성공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성경의 인간은 복제된 기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 때문에 사랑도 가능하지만 죄도 가능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간이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려는 유혹을 상징합니다. 죄란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파괴(Diablo), 이웃과의 관계 파괴, 자기 자신과의 분열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개인이 아닙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마태 22,37-39)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다움의 중심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했고, 모세는 사람을 죽였으며,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고,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죄인이지만 사랑받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회개하고 새로워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안에서 인간이 본래 어떠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참된 인간은 지배하기보다 섬기고, 미워하기보다 용서하며, 폭력보다 사랑을 선택하고, 죽음마저 사랑으로 이겨내는 존재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의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지만 하느님의 숨결을 받은 존재이며, 죄인이지만 사랑받는 존재이고, 폭력성을 지녔지만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경탄하며 묻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인간은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사랑받고 끊임없이 부름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폭력성과 악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 범죄 드라마보다 더 적나라하게 인간의 어두움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가진 존재를 창조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랑도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선행뿐 아니라 배신과 폭력, 착취의 가능성도 함께 열어 놓았습니다. 더 어려운 질문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하느님의 작품이라면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단순히 모두 용서하라거나 다 잘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악인들을 고발했고, 예수는 성전 상인을 쫓아내며 분노를 드러냈으며, 피해자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특히 시편에는 "주님, 언제까지입니까?"(시편 13)라는 탄식이 반복됩니다. 이는 악과 고통 앞에서 느끼는 회의와 분노가 신앙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 안에서 정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질문임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동시에 죄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완성된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자신의 폭력성과 죄성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변화되기를 배우는 죄인들의 모임으로 이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참교육같은 드라마를 보며 느끼는 불쾌감과 회의는, 단순히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을 직시할 때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원초적 불안함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기억해 주십니까?"(시편 8,5) 그리고 성경의 대답은 인간의 선함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악과 폭력 속에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끈질긴 사랑에 대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장 강하게 비판하신 대상은 세리나 창녀, 병자와 같은 사회적 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의롭다고 확신하며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또한, "너희는 잔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다."(루카 11,39)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마태 23,27)라고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예수의 분노는 단순히 기득권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성과 한계를 망각한 채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인간의 교만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 역시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창세 3,5) 인간의 원죄는 단순히 금지된 열매를 먹은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피조물임을 잊고 스스로 선과 악의 최종 심판자가 되려는 욕망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수께서 비판하신 바리사이주의는 특정 시대의 특정 집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은 옳고 타인은 틀렸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권력과 이념과 도덕을 절대화할 때 그 안에는 바리사이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그래서 복음의 역설은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은 구원받을 수 있지만,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가장 안타까워하신 사람들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핵심은 인간을 선인과 악인, 기득권과 약자로 단순하게 나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폭로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욕망의 반대편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 인간은 끊임없이 신이 되려 하지만, 하느님은 오히려 인간이 되어 종의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Cur Deus homo). 이 점에서 복음서는 단순히 죄인들을 위로하는 책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려는 모든 인간과 권력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서(불온서적)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심판하는 데 있지 않고, 상처 입은 세상 한가운데서 화해와 용서의 가능성을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진실과 정의 위에서 화해하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며 함께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세상,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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