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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하느님 나라와 평균의 오류, 공리주의의 함정

작성자jamesha|작성시간26.06.06|조회수15 목록 댓글 0

현대 사회는 숫자를 사랑한다. 성장률, 평균 소득, 만족도 조사, 다수결, 비용 대비 효율. 정치와 경제, 심지어 교육과 의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이 평균값과 다수의 이익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철학적 토대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리주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원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음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평균의 세계가 아니라,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사랑의 세계이다. 루카 복음 15장에서 예수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경제적 효율성으로만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에 맡기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체의 행복을 위해 한 마리를 포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논리는 다르다. 하느님에게는 아흔아홉과 한 마리가 모두 소중하며, 특히 잃어버린 한 존재가 결코 평균 속에 묻혀 사라져서는 안 된다.

 

평균의 오류는 현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한 나라의 평균 소득이 증가했다고 해서 모든 국민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병원에서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서 중증 환자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신자 수가 늘어났다고 해서 공동체 안의 외로운 이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평균은 전체의 상태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눈물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평균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셨다. 세리 자캐오,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 병든 사람들, 과부와 고아, 사마리아인과 이방인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소수였고, 효율의 관점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예수에게 그들은 결코 통계 속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의미있는 존재였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한 사람 때문에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희생한다. 공리주의적 계산이라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낯선 사람을 돕는 일은 비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그 행동을 통해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 역시 공리주의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은 손익 계산의 결과가 아니다. 십자가는 가장 비효율적인 사랑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된다. 물론 공리주의가 지닌 사회적 가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공공 정책과 제도 운영에는 효율성과 다수의 이익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마저 평균과 숫자로 환산하기 시작할 때, 사회는 가장 약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평균은 좋아졌는데, 그 안에서 누가 울고 있는가?" 하느님 나라는 평균값의 승리가 아니라, 잊힌 사람을 기억하는 나라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나라가 아니라, 가장 작은 이 하나를 위해서도 기꺼이 발걸음을 멈추는 나라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몇 명이 혜택을 받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가 소외되고 있는가?"를 물으신다. 통계는 사람들을 평균으로 묶지만, 사랑은 사람을 이름으로 부른다.

 

아마도 하느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상은 숫자를 계산하지만, 하느님은 얼굴을 기억하신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가장 작은 이 하나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신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하느님 나라의 철칙은 변치않는다. 복음적인 삶이란 말이 아닌 행동이다. 과연 지금 한국 천주교회와 신자가 이런 복음적인 삶을 구현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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