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후지산자전거여행02- 태풍의 아침, 하네다 마을을 걷다

작성자권 오 중|작성시간26.06.09|조회수46 목록 댓글 4

 


늦은 밤 숙소에 들어와 씻고 몸을 눕히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우여곡절을 안고 떠나온 피로 때문이었을까, 눈을 뜨니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창밖에서는 더욱 거칠어진 태풍이 지나는 비가 세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함께할 벗을 깨워 우산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태풍이 지나가는 거리 한가운데 서는 쾌감이 괜찮았던 기억이 오래 전 태풍 곤파스 때 있었다. 


 
거친 빗소리에는 사람을 과거로 데려가는 힘이 있다.
처마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순간 현제는 잠시 멈추고
어린 시절 양철지붕 위를 요란하게 두드리던 장맛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여름의 나무잎들이 비를 맞으며 더욱 짙은 초록빛으로 일렁이는 풍경도 함께 따라왔다.
 
태풍은 바람과 비를 몰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시간들을 깨워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찬 빗소리를 조금 더 오래 담아두고 싶어 걷다가 걸음을 멈춰 소리를 담았다. 
골목 한켠에 놓인 넓은 수반에는 빗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연잎들은 비를 맞으며 더욱 싱그럽게 빛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개구리 한 마리 퐁당."이라는 말을 던져두고 싶은 마음의 순간을 기다렸다.
실제로 개구리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길을 따라 걷다 붉은 에너지로 가득한 신사 앞에 섰다.
굵은 금줄과 함께 매달린 하얀 종이 장식, 시데(紙垂)가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번개 모양으로 접은 종이는 신성한 영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식이지만,
그 근원에는 자연을 향한 농경사회의 소박한 기도가 담겨 있는 듯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린다.
비를 먹은 곡식이 자라고, 사람들은 가을에 그것을 거둔다.
추수 후 남은 볏짚으로 굵은 동아줄을 꼬고, 다시 그것을 신사의 금줄로 사용하며 
다음 해를 기원하고 다음 세대의 풍요로움을 기대하며 시간이 이어간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의 삶은 하나의 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비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금줄과 시데를 바라보며 그 순환의 풍경을 보고 있는 듯했다.
태풍은 파괴의 얼굴만 가진 것이 아니라, 순환을 일깨우는 존재이기도 하다. 
 


비를 맞으며 걷다가 오래된 분위기의 커피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 의자와 누렇게 빛바랜 조명은 시간이 늦게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형적인 일본의 커피숍인 킷사텐(喫茶店)이었다.
모닝구(モーニング)를 주문했다.
따뜻한 커피와 갓 구운 토스트 한 조각이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아침 풍경인 것 같다.
지난 나고야 코메다 커피숍에서 처음 맛본 모닝구가 떠올랐다.
 
유럽 여행 때 이른 아침 조깅 뒤 카페에서 즐겼던 에스프레소 한 잔과 크루아상 하나도 생각났다.
나라와 문화는 달라도 아침을 여는 방식에는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는 것.
 
그런  킷사텐에는 오래된 시간이 머물고 있었다.
아직도 실내 흡연이 가능한 곳인지 담배 연기가 은은하게 떠다녔다.
담배 냄새가 싫어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었지만 과거의 향수 때문인지 
커피향과 어울어지는 담배 냄새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옆자리의 중년 여성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담배를 물고 창밖의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지, 번잡한 하루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열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커피를 마시며 주변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혼자 온 사람들.
신문을 읽는 노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직장인, 창밖만 바라보는 여성.
그들은 모두 평범해 보였지만 각자의 삶 속에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여행자는 그런 풍경 속에서 잠시 타인의 인생을 상상하며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커피를 마신 뒤 다시 거리로 나왔다.
붉은 색이 유난히 선명한 이나리 신사를 둘러본 뒤 공항 마을의 골목들을 천천히 걸었다.
태풍이 점점 가까와지는지라 비는 강해졌고 , 바람은 간간이 우산을 뒤흔들었다. 



태풍이 지나가는 빗속에서 마주한 골목과 신사, 킷사텐과 사람들은
여행이란 결국 유명한 장소를 보는 일이 아니라,
낯선 동네의 평범한 아침을 자기만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일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는 하네다의 거친 빗물은 내 몸을 적셨지만,
동시에 오래된 기억들과 새로운 풍경들을 조용히 깨워주고 있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nodazy114114 | 작성시간 26.06.09 비오는 날 아침 이국땅에서 모닝커피와 계란바른 샌드위치 맛이 일품이었드랬어요.
  • 답댓글 작성자프란 | 작성시간 26.06.09 딴건 잘모르겠는데,
    <커피,(색갈도 맛져보이는) 토스트>
    요건 땡기네요.
  • 작성자띠네ddine | 작성시간 26.06.10 태풍을 뚫고 입성한 라이더 3인방 어마무시한 비바람속의 여행 첫날 시작이로군요
  • 작성자디아나 | 작성시간 26.06.10
    비가 엄청 많이 왔네요.
    나고야에서 갔던 코메다 커피숍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여행자같지 않고 일상을 보내는 것 처럼 모닝구 커피를 드셨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