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점심을 먹으며 나마비루 한 잔도 걸쳤다.
비 내리는 신주쿠 거리를 느긋하게 산책하여 도쿄도청사에 도착한 뒤 전망대에 올랐다.
유리너머로 흐린 도쿄가 들어왔다.
일전에 왔을 땐 전망대에서 후지산으로 떨어지는 황홀한 일몰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은
회색빛 구름 아래 펼쳐진 도쿄의 건물들이 비에 젖은 채 드러났다.
맑은 날의 전망이 시야를 멀리 열어준다면,
비 오는 날의 전망은 도시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안으로 열어준다.
유리창 너머 비에 젖은 도쿄를 바라본다.
한때 도쿄는 아시아의 유일한 꽃과 같은 도시였다.
전후 폐허를 딛고 일어나 세계가 놀랄 만큼 성장했고, 아시아의 미래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도시였다.
일본 경제의 전성기와 함께 도쿄는 부와 문화, 기술과 소비의 중심으로 자리했다.
아시아의 수많은 도시들이 도쿄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미래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도쿄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눈부신 성장의 중심이라는 자리를 이제는 홍콩과 상하이, 서울과 싱가포르 같은 도시들과 나누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다른 도시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위치에 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 오는 창밖의 도쿄는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빗속에서 조용히 젖어 있는 도시.
그러나 몇 차례 도쿄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은
도쿄가 결코 멈춰 있는 도시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변화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서울처럼 한 구역을 통째로 밀어내고 초고층 아파트를 세우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도쿄는 오래된 시간을 정리하고 다듬어 가며 조금씩 새로운 모습을 덧입혀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 힐스(Hills)'라는 이름의 복합 개발 지역들이 생겨나고
오래된 상업지구가 천천히 재생되는 모습으로 보였다.
작은 건물 하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며,
골목은 유지한 채 도시의 기능을 바꾸어 나간다.
크고 화려하게 변화하기 보다 섬세하게 접근해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도라노몬 힐스, 아자부다이 힐스 같은
도심 기능과 시민 문화가 조화로운 도심형 공간이 생겨나고
주요 역들은 더욱 편리하게 정비되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 사이사이에는 오래된 신사와 크고 작은 공원, 수십 년 된 상점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도쿄는 미래를 만들면서도 과거를 지워버리지는 않는 도시처럼 보였다.
나에게 도쿄는 초현대적인 도시의 삭막함보다 방문할수록 친밀한 도시로 다가온다.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권이면서도 골목을 느리게 걷다 보면 사람의 생활이 느껴진다.
거대한 빌딩 숲 사이에서도 작은 커피 가게와 동네 식당, 재즈클럽, 신사의 숲이 숨을 쉬고 있다.
누구나 무료로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오픈된 빌딩 전망 공간도 많았다.
이 도시를 함께 즐기며 가꾸자는 마음으로 읽혔다.
어느 정도 높이의 도심의 빌딩 테라스에 올라 도심을 보면
도시인의 답답함은 한결 가셔질 것이다.
비 오는 날 도쿄도청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도쿄 역시 그런 모습이었다.
거대한 도시지만 사람의 체온이 남아 있는 도시.
성장을 멈춘 것이 아니라 성장의 방식을 바꾸어 가고 있는 도시로 느껴진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서울을 떠올렸다.
서울 또한 지난 수십 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어쩌면 지금의 서울은 과거 아시아가 바라보던 도쿄의 위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의 서울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꾸어야 할까.
더 높은 건물을 짓는 것만으로는 도시가 성숙해지지 않는다.
오래된 골목과 기억,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품어낼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쿄는 서울보다 조금 먼저 미래를 경험하고 있는 도시처럼 보인다.
고령화와 저성장을 겪으며 도시를 유지하고 변화시키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지금의 도쿄는 만개한 꽃이라기보다 비를 맞고 있는 정원 같다.
화려함은 잠시 가라앉아 있고,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가지를 다듬고 흙을 고르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창밖의 회색 하늘 아래 도시 전체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도쿄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갈까?
비가 그치고 햇빛이 다시 비추는 날,
지금보다 더 단정해진 거리와 새롭게 자라난 숲,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도쿄는 아직 비에 젖어 있다.
그러나 그 빗속에서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도시의 움직임이 보였다.
오래지나 다시 찾았을 때, 빗물을 털어내고 한층 더 깊어진 모습으로 피어날 도쿄를 기대하게 되었다.
서울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