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타 신주쿠(バスタ新宿), 신주쿠 버스터미널의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버스 터미널이라는 뜻이다.
도쿄 인근과 일본 전역을 향한 버스들이 쉼 없이 드나드는 곳이다.
오전에는 미로 같은 신주쿠역에서 길을 찾느라 진을 빼고,
오후에는 메이지의 숲과 하라주쿠의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후지산으로 향할 시간이 되었다.
오후 5시 30분.
가와구치코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터미널 한쪽에 방치하다시피 세워 두었던 자전거는 다행히 무사히 살아남아 있었다.
불법 적치물 경고 딱지는 붙어 있었지만 아직 경찰의 손길까지는 닿지 않았다.
짐을 싣고 좌석에 앉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가와구치코까지는 약 1시간 40분 가량 소요된다.
서울보다 도쿄지역은 일출과 일몰이 1시간 가량 빠른 탓에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해가 기울어 있을 시간이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으로 젖은 도쿄의 풍경이 뒤로 흘러갔다.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물러가고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석양빛이 산 정상에 내려앉는 풍경.
그런 장면이 펼쳐진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어떤 기대'라는 것은 여행자의 가장 값싼 사치이자 가장 풍요로운 재산이다.
웅장한 일몰을 품은 후지산을 가슴 한편에 품은 채
도쿄를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버스의 흔들림 속에서 눈을 떴다.
창밖으로 산자락들과 들판이 보였고,
저녁빛이 희미하게 돌고 있었다.
그때 버스 복도 건너편 좌석에 앉은 금발의 서양 여성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기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은 반가운 무언가를 본 사람의 표정이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후지산이다."
구름 사이로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온전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잠시 보였다가 구름 속으로 숨고,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후지산을 보려면 복도 건너편 창문을 통해 봐야 했다.
여성의 금빛 머리결이 시야를 가려 사라졌다가
후지산은 보였다가 사라지고,
머리카락이 펼쳐졌다가 흩어지고,
다시 산이 나타났다.
속으로
"머리 좀 옆으로 치워주세요."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목소리도 들려온다.
"아냐, 아냐. 이 장면도 괜찮은데,
금빛 머리결 너머로 드러나는 후지산, 멋진데!"
후지산이 이번 여행의 처음부터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오히려 큰 기억으로 오래 남지 않았을 것이다.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나고,
낯선 여행자의 머리결 사이로 비치고,
먼 길 끝에서 지친 여행자에게 조금씩 드러내는 모습으로 다가서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설레임 있었기에 더욱 인상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번 여행의 후지산은 금빛 머리결 사이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가 가와구치코역 앞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비 내리는 하네다의 불빛과는 다른 종류의 어둠이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어둠.
작은 시골역의 불빛들은 정겹게 느껴졌다.
짐을 내리고 자전거를 펼쳤다.
드디어 후지산 아래까지 왔다는 실감이 조금씩 밀려왔다.
오늘 후지산을 뚜렷하게 보지 못했다라도 괜찮았다.
내일 아침이면 분명 또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남겼다.
마치 희미하게 처음 만난 사람이 내일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것처럼.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시계는 이미 아홉 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곳의 해의 시간은 서울보다 한 시간쯤 앞서 흐른다.
관광객이 많아도 결국은 지방의 작은 마을일 뿐이다.
대부분의 식당은 이미 문을 닫고 있었다.
결국 편의점으로 향했다.
간단한 먹거리와 캔맥주 몇 개를 사 들고 나왔다.
부족한 저녁이라고 하지만
후지산 아래, 해발 약 900미터의 호숫가 마을에서 맞는 첫 날 저녁이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캔맥주를 부딪히며 선선한 가와구치코의 밤을 축복했다.
숙소는 10인실 혼성 도미토리였다.
이미 몇몇 여행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한국인 여성이 먼저 인사를 건네온다.
"안녕하세요"
자전거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내일 라이딩하세요?"
그녀는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지산 업힐을 하겠군'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일 아침 일찍 나선단다.
날씨가 개어 후지산이 환하게 모습을 드러낸다면 우리도 산을 오를 것이고,
그녀도 어딘가에서 페달을 밟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산길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즐거워졌다.
여행에서는 이런 작은 가능성조차 하나의 설렘이 된다.
편안한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창밖에는 밤공기가 어둠 속으로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의 후지산은 구름과 금빛 머리결 사이에서 잠시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것으로 됐다. 앞으로의 시간을 열고 나갈 것이고
산은 그곳에 그대로 있고.
내일 아침이면, 화들짝 피어난 얼굴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를 품은 채 후지산 아래 첫 번째 밤은 깊어갔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nodazy114114 작성시간 26.06.11 여기 숙소 사물함에 자전거 포장용 백을 고이 모셔 놓고 비오는 날 밤 색깔처럼 새까맣게 잊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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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덕규 작성시간 26.06.11 버스 터미널에
자전거 방치 경고장이 붙어 있긴 했지만
덕분에 도쿄 시내를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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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프란 작성시간 26.06.12 요즘 젊은이들,
숏폼 마이크로 드라마를 선호한다네요
1~3분 짜리 초단편 콘텐츠로
진행되며
끝무렵에 다음편을 안 볼수 없도록
각본이 진행된데요.
대략 3편까지는 무료,
그 후는 유료로 전환한다네요.
노다지님의 자극적인 도입부로
시작했으니
권원장님이 이어받고,
4편이후로는
유료로 진행해도 될듯
추신>
유료로 진행되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무료때 공개하지 않은)
앞태꺄지 공개해야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