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를 찾다 ‘마리코(マリコ)’라는 세 글자를 보았을 때,
내 머릿속의 이야기 회로는 서너 번 회전을 하더니 꿈같은 시나리오 하나를 완성해 내었다.
젊은 시절 세계를 무대로 떠돌던 자유로운 영혼.
이제는 고향 같은 시골집으로 내려와 민박을 운영하며,
찾아오는 세계여행자들과 깊이 교감하는 50대의 세련된 코스폴리탄 여성.’
이 달콤한 오해가 바로 이번 일본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숙소로 ‘민박 마리코(民泊マリコ)’를 선택한 이유였다.
게다가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울 수 있다니,
자전거 여행자의 마지막 밤을 장식하기엔 이보다 더 완벽한 설정은 없다.
지난 규슈 자전거 여행 때 쿠마모토에서 보낸 하룻밤에 이어 두 번째로 경험하는 일본의 민박.
온전히 주인의 생활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진짜 ‘집’ 같은 민박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녁이면 세련된 마리코씨와 불멍하며 ‘인터내셔널’한 대화를 나누며 여행의 낭만을 논하리라.
즐거운 상상 덕분에 시즈오카의 푸른 바닷길을 달리는 페달은 가벼웠다.
하니가 부르는 푸른산호초가 페달에서 흘러나왔다.
'南の風に乗って走るわ (미나미노 카제니 놋-테 하시루와)
남쪽 바람을 타고 달릴거에요'
들어오는 마을 입구 마트에서 삼겹살과 술을 고르는 손길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민박 마리코’에 도착했다.
환한 미소로 문을 열고 나와줄 ‘그녀’를 기대하며 숨을 죽인 순간,
우리를 반긴 것은 80대로 보이는 노부부였다.
"마리코 따님은 어디에, 나의 마리코는 어디에 있는 걸까? "
속으로 외친 허망한 질문은 이내 머쓱한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리코’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 동네의 지명인 ‘마리코(丸子)’였던 것이다.
상상 속의 마리코 씨는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실망할 겨를도 없이
현실의 즐거운 판이 열리기 시작되었다.
마당에서는 주인장 어르신이 종이를 태우며 골판지를 가냘프게 흔들며 삼겹살을 구울
숯불을 피우려 애쓰고 계셨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나는 직접 나서서 불을 피워냈다.
삼겹살과 소주가 간절했던 터라 마음이 급하기도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마리코의 마당에서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어갔고,
시원한 맥주와 소주가 잔을 채우며 즐겁게 달린 우리들의 후지산자전거여행을 축하했다.
마지막은 칼칼한 신라면에 김치. 완벽한 우리들만의 축제였다.
그렇게 밤이 깊어만 가는 것이 아쉬워 숙소 뒷동산 입구까지 밤산책을 나섰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탐스럽게 열린 자두나무가 보였다.
상품으로 기르는 과수가 아닌 듯해 양쪽 주머니 가득 개자두를 따와 베어 무니,
새콤달콤한 즙이 입안 가득 퍼지며 여정의 피로를 달래주었다.
다음 날 아침,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동네 산책을 마친 뒤 돌아와
주인아주머니가 마음으로 끓여내 주신 따뜻한 미소 된장국에
전날 챙겨둔 햇반을 말아 먹으니 속이 확 풀리며 온몸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노부부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문득 나이를 여쭈어보니 여주인 분은 70세, 남주인 분은 75세라고 하셨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으셔서 놀랐는데, 이내 아주머니께서 척수가 흐르는 병을 앓고 계신다는 사연을 들려주셨다.
거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이번 6월은 우리 팀을 포함해 고작 세 팀만이 예약되어 있었다.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왜 민박을 하시는지 조심스레 여쭈었다.
" 그냥 이렇게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게 좋아요. 남은 평생도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주머니의 담담하고도 따뜻한 고백에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우리는 스마트폰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인연의 소중함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니 언어의 장벽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즈오카 중심가에서 약 7km 떨어진 한적하고 고즈넉한 외곽 동네, 마리코.
비록 내가 상상했던 젊고 세련된 '마리코 씨'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미소국을 끓여주신 '마리코 아주머님'이 계셨다.
낯선 이들을 기꺼이 품어주고 온기를 나누어준
노부부와의 만남은 2026년 일본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을 가장 완벽하게 매듭지어 주었다.
마리코에서의 하룻밤은 앞으로 이어질 내 일본자전거여행의 반경을
'민박'이라는 정겨운 새로운 공간으로 넓혀준 소중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언젠가'라는 마음으로 기약하며 돌아서는 길,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리코의 바람이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