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바퀴를 굴리며 지나온 길들이 저마다의 색으로 자리 잡아가는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전날 밤 잠자리의 머릿 속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분주했다.
뒷동산에 올라 시즈오카 시내와 푸른 스루가만을 내려다볼까?
운이 좋으면 후지산이 마중을 나와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힘을 모아 달려온 여정의 끝자락에서는 내 몸에 가장 필요한 선물을 해야 한다.
거창한 풍경보다 따스한 위로가 필요한 지점이다.
가벼운 산책으로 목욕탕을 찾아 아침 길을 나섰다.
숙소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숲속의 작은 동네 목욕탕이다.
온천도 아니고 그냥 탕인데 후기도 괜찮고 사진도 좋아 보였다.
더하여 아침 산책 삼아 오가며 걷기에 더없이 좋은 거리다.
이른 아침의 시골 동네 풍경은 싱그럽고 맑았다.
골목길을 걷다 산책을 나오신 민박집 어르신과 마주쳐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구글맵에서 찜해두었던 작은 동네 빵집의 위치를 확인하고
오는 길에 민박집 주인께 선물로 드릴 빵을 구입하려 했지만
오픈 전이라 결국 구입을 못해 아쉬움 가득이었다.
집집마다 정성스레 가꾼 작은 화단의 꽃잎들이
아침 이슬을 머금은 채 인사를 건네오는 마리코의 이른 아침 풍경에
평온함이 번져왔다.
목욕탕에 도착하니 오픈 시간인 7시 전이다.
서두를 것 없는 여행자의 걸음으로 자연스럽게 길을 이어 산자락으로 오르니 대나무 숲으로 이어졌다.
대나무숲의 바람소리를 듣고 내려오니 목욕탕 앞에
고즈넉해 보이는 사찰 하나가 눈에 들어와 담장 너머 살펴보았다.
돌아와 구글맵으로 찾아보니 토게츠호 시바야데라 정원(吐月峰柴屋寺庭園)이었다.
아쉽게도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낮게 두른 울타리와 담장 너머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본 정원의 풍경은 아늑했다.
가을이 깊어갈 때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붉게 물든 단풍 아래서
시즈오카의 깊은 차(茶) 문화와 정원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시즈오카마라톤도 괜찮다고 하던데 '언젠가'라는 기약을 던져둘까?
올 때 잠시 눈여겨보았던 공방 마을은 순푸의 공방 타쿠미주쿠(駿府の工房 匠宿)로
역시 다음 시즈오카여행 때 꼭 들러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보리라는
다짐과 함께 마음속 여행지도 하나를 그려 두었다.
마침내 목욕탕 여주인이 가게 문 앞에 오픈을 알리는 장막을 드리웠다.
오래 기다렸다는 듯 첫 손님으로 입장해 기념 사진을 담고 가장 깨끗한 '오늘의 첫물'에 몸을 담갔다.
'후키사라시유(ふきさらし湯)'.- '바람이 부는 대로 내맡긴 탕'
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탕 앞이 막힘 없이 공기 중으로 열린 노천탕의 형식을 갖췄다.
자연을 향해 온전히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산자락 경사면을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펼쳐진 초록빛 녹차밭,
그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산자락의 깊은 녹음이 그대로 탕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감으면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귀를 채우고,
눈을 뜨면 초록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으로 그야말로 최고의 휴식처가 되었다.
만오천원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음은 일본여행의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깔끔하고 은은한 편백나무(히노끼) 향이 감도는 한증막에서 땀을 흠뻑 흘린 뒤,
깊고 찬 냉탕에 몸을 담갔다가 밖으로 나와 평상에 누웠봤다.
그 순간, 사방이 뚫린 공간으로 싱그러운 산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아, 이것이 바로 후키사라시(ふきさらし)구나.'
지붕도 벽도 없이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다는 것은,
자연과 나 사이에 아무런 장벽이 없음을 의미했다.
물에서 하는 목욕을 넘어,
온몸으로 자연의 바람을 맞는 '풍욕(風浴)'이자 초록의 숨결을 들이마시는 '자연 수풀욕'이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이내 찾아오는 바람의 시원함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동안,
며칠간 페달을 밟으며 다리에 쌓였던 고단함과 긴장에 따른
여행의 피로가 온전하게 사라져 버렸다.
문을 닫아 아쉬움을 남겼던
시바야데라 정원의 고즈넉함, 다음을 기약하게 만든 타쿠미주쿠 공방의 설렘,
그리고 자전거 여행의 마침표를 완벽하게 찍어준 후키사라시탕의 바람까지.
소소한 동네라고 여겼던 이번 여정의 마지막날 시즈오카 마리코의 아침은
휴식 그 이상이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는 설렘보다 더 묵직하고 가슴 벅찬 기쁨이 있었다.
누군가의 '처음'을 곁에서 함께 했다는 일이다.
이번 후지산자전거여행에는 처음으로 해외 자전거 여행길에 오른
노다지님의 첫 페달에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었기에
나의 자전거 여행 역시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떠나기 전 남산에서 미니벨로 연습도 하며 호흡을 맞추었다.
낯선 이국의 도로 위를 달리는 떨림은 단순한 주행이 아닌 하나의 작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날 아침 '후키사라시유(ふきさらし湯)'의 비치벤치에 나란히 누웠을 때,
문득 곁에 누운 친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며칠간의 고단함에 지친 여행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지붕도 벽도 없는 공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낯선 세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줄 알게 된 한 인간의 당당하고도 평온한 얼굴이 보였다.
뜨거운 탕과 깊고 찬 냉탕을 오가며 여행의 피로를 씻어내듯,
우리는 이 번 여행을 통해 익숙했던 일상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고 있었다
첫 페달을 성공적으로 굴려 가며 맨몸으로 바람을 맞는 법을 배운 노다지님은
이제 일상이라는 거대한 길 위에 다시 서더라도,
'후키사라시'의 단단한 마음으로 어떤 바람이든 유연하게 맞는 느낌을 알 것이다.
두 바퀴로 세상의 지평을 넓힌 친구의 멋진 첫 시작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이 여행기를 마무리 한다.
더하여 지난 몇 년간 국내외 자전거여행의 든든한 동반자를
해주고 있는 덕규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의 '고.스톱'이 있었기에 순간순간 여행의 힘든 지점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