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탑(金字塔)
이집트의 피라밋을 번역한 말로, 그 모양이 금(金)자와 비슷한 데서 온 말이다. 길이 후세에 전(傳)하여질 만한 가치가 있는 불멸의 업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金 : 쇠 금(金/0)
字 : 글자 자(子/3)
塔 : 탑 탑(土/10)
흔히 금자탑(金字塔)은 영원히 전해질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하고 위대한 업적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그런 훌륭하고 위대한 업적을 금자탑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금자탑이란 피라미드(pyramid)를 상형문자인 한자로 옮긴 말이다.
피라미드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양을 가만히 보면 한자 金의 모양처럼 생겼다. 밑면은 사각형이고, 옆면은 삼각형인데, 삼각형 옆면 네 개가 경사지게 올라가서 맨 위가 뾰족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금자탑(金字塔)이란 금자(金字) 모양의 탑(塔)이라는 말이다.
고대 이집트 제왕의 묘로 사용되었던 대형 피라미드는 10만 명 이상의 인부가 끊임없이 30여년 동안 노동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엄청난 인력 동원, 기나긴 공사 기간, 인부들의 천신만고 끝에 대규모 공사가 완성되어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 이에 빗대어 어떤 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것을 ‘금자탑을 세웠다’고 한다.
금자탑은 피라미드을 뜻한다. 피라미드의 어원은 그리스어 pyramis에서 따온 말인데, 피라미드를 가장 잘 활용한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메르라 불렀다고 한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와 수단을 비롯해 이디오피아,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등에서 만들어졌으며 대표적인 피라미드로는 고대 이집트의 왕이나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만들어 졌다.
금자탑(金字塔)이란 말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즉, 한자어인 금(金)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말 그대로 금자모양을 하고 있는 탑이라 해서 금자탑(金字塔)이 되었다.
금자탑(金字塔)이 글에서 사용되는 것으로는 예를 들어 ‘금자탑과 같다’라는 식으로 쓰곤 하는데 그 뜻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란 뜻을 가지게 된 배경은 피라미드의 신비로움에서 따왔다. 피라미드는 평균 2.5t의 거대한 돌들을 약 230만개에서 250만개 정도 쌓아올린 건축물로 그 덕분에 약 오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도 그 장대함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기중기나 지게차가 없던 그시절에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은 대략 10만여명의 인부가 30년이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빗대어 어떤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것이라 해서 금자탑(金字塔)을 세웠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금자탑(金字塔)
'금자탑(金字塔)을 번쩍이던 애급 문명' 여기에서 금자탑(金字塔)은 '피라미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금자탑(金字塔)을 '피라미드'의 대역어로 등재한 것은 로브샤이트(W. Lobscheid)의 영화자전(英華字典)이 처음인데, 이런 사실로 보아 이 말은 중국에서 만들어져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왜 '피라미드'라는 원어의 소리를 흉내 내지도 않고, 이전의 번역어 첨판체(尖瓣體)를 마다하고, 굳이 새로운 번역어 금자탑(金字塔)을 만들어 쓴 것일까? 피라미드의 모양을 나타내면서도 인상적인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일 터. 그러던 차에 피라미드의 모습이 한자 금(金)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누군가 새삼 깨달았을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금(金) 자(字) 모양의 탑(塔)이라는 뜻의 금자탑(金字塔)이 탄생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때는 20세기 초로 짐작되는데, 1920년대 말까지 금자탑(金字塔)은 대부분 건축물 피라미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런데 1930년대에는 금자탑(金字塔)이 '후세에 남을 뛰어난 업적'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 빈도가 높아졌다.
대부분 '조선 여성 교육에 금자탑을 쌓아 오늘의 25주년을 맞음에...'나 '우리 문화사의 찬란한 금자탑인 한글을...'과 같은 문맥에서 금자탑이란 말을 쓰다 보니, 금자탑(金字塔)이 피라미드의 번역어라는 사실은 점점 언중의 뇌리에서 희미해져 갔다.
금자탑(金字塔)을 막연히 '찬란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금자탑(金字塔)의 뜻을 '금으로 만든 탑'으로 생각하는 것도 '찬란한'과 '금'의 어울림 때문인 듯하다. 이젠 금자탑(金字塔)을 '금짜탑'이 아니라 금자탑(金字塔)이라 읽는다. 원어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지며 발음이 변했을 것이다.
피라미드(pyramid)
피라미드(pyramid)는 각뿔, 특히 사각뿔 도형 또는 돌이나 벽돌 등을 층층이 쌓아 만든 뿔 형상의 거대 구조물을 총칭하는 말이다. 한자로는 금자탑(金字塔)이라고도 부르는데, 뾰족한 모양이 한자의 쇠 금(金)자를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흔히 역사에 길이 남는 대상이나 행동을 '금자탑', '금자탑을 쌓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피라미드를 비유한 것이다. 이 밖에 '다단계 구조' 혹은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를 나타낼 때도 피라미드라 부른다.
흔히 피라미드라고 하면 이집트의 사각 피라미드를 연상하지만, 실제로는 삼각뿔은 물론, 각뿔 형태가 아닌 원뿔(콘)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러한 형태의 건축물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마야 문명의 치첸 이트사, 아즈텍 등 남미 문명들의 제단으로 쓰인 계단식 돌 피라미드나 중국 고대 황제의 무덤, 고구려의 장군총 같은 무덤들도 피라미드이며, 넓게 보면 지구라트도 피라미드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보스니아에 있는 거대한 흙 피라미드나 요나구니 수중 유적 등 피라미드라고 '추정'되는 것들도 있다. 피라미드 비슷한 형태의 건물로는 서하왕릉이 있으나 이쪽은 원래 탑 모양에 더 가까웠다.
넓은 밑면과 하나의 정점으로 모이는 형태는 고대 건축의 기술적인 제약 때문에 발생했다. 이렇게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형태는 무게중심이 아래로 몰리기 때문에 매우 안정적인 형태인데, 고대에는 대형 건축물들을 붕괴의 위험 없이 높게 짓기 위해서 윗부분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결과 고대 대형건물들의 상당수는 피라미드 같은 모양이 되었다. 물론 중력 법칙은 건축술이 더욱 발전한 현대에도 여전히 무시할 수가 없으므로 지금도 피라미드식으로 건물을 만들면 가장 내진 등에 안전하고, 이론적으로는 에베레스트산 높이로 만들기도 가능할 정도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 초기에 왕릉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 건축물이다. 무덤이란 것이 중론이지만 아래 단락에 나오듯 단순히 무덤 용도만 지어진 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사후세계로 가기 전 영혼의 임시 거처라는 주장 등 여러 가설이 난무하지만, 현재까지 남은 피라미드 중 도굴당하지 않고 내부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가설 검증이 불가능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전 세계의 피라미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특히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고대로부터 매우 유명해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기도 하는데, 연대 자체는 이미 사라진 7대 불가사의의 6개 건축물보다 2천 년가량 더 오래됐다. 현대를 기준으로 대략 4000년에서 4700년 전의 유적이다.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 콜로세움이 2천 년 전의 고대유적이듯, 고대 로마인들이 보기에도 이집트 피라미드는 2천 년 전의 고대유적이었다. 쉽게 말해서 고대 로마 시대의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7세 입장에서는 피라미드를 짓던 시기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부르즈 할리파를 건설한 시기가 더 가깝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엄청나게 크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모습이며,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사각돌의 크기부터가 장난 아닌 데다가 건축물의 수평 등이 매우 정밀해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인상이 매우 압도적이라 동시대 이집트인은 물론이고, 주변 국가와 후대의 문명, 특히 유럽에 큰 영향을 남겼다. 특히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쿠푸의 대피라미드는 2.5톤 무게 사각돌 300만 개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피라미드가 기원전 2560년에 146 m 높이를 달성한 이후로 인류는 무려 3871년 동안 이보다 높은 구조물을 짓지 못했다. 기원후 1311년에 이르러서야 높이 160 m인 영국 '링컨 대성당'의 첨탑을 지음으로써 이 수치를 넘어섰다.
이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수천 년 동안 보존된 이유는 건축물에 치명적인 강수와 식물이 적은 환경 덕분이다. 그래서 미국의 후버 댐에 이어서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가장 오래 보존될 건축물로 손꼽힌다. 게다가 구조물 크기나 각 부재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풍화를 상당히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다. 벽돌로 지은 초기 피라미드는 거대한 돌로 지어진 피라미드보다 보존 상태가 안 좋다.
사실 맨 처음 지어질 때에는 저렇게 우둘투둘하지 않았으며 매끈하게 다듬은 흰색 석회석을 외장으로 사용하여 번쩍였다는데, 세월이 지나며 약한 외장은 떨어져 나가고, 후대 사람들이 돌을 떼어내서 다른 곳에 쓰는 바람에 저렇게 거친 표면이 되었다. 심지어 피라미드가 지어진 고왕국 당시에도 후대 왕들이 선대 왕들의 피라미드에서 석재를 약탈해 자신의 피라미드를 짓는 일이 있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옛 석조물에서 새 석조물의 자재를 마련하는 일이 빈번했다.
가령, 기념물을 많이 건설했기로 유명한 람세스 2세의 경우 명백히 피라미드에서 석회석을 채취해 사용했다. 심지어 신왕국 말기 즈음 되면 민간인들조차도 (재력이 되면 석회석을, 그렇지 못한 이들은 벽돌을 가져가며) 피라미드를 채석장처럼 사용했다. 또한 카이로를 세우는 와중에도 바로 옆에 있는 기자 3대 피라미드에서 그때까지 남았던 외장재 대부분을 벗겨내어 카이로 공공건물의 자재로 전용하였다.
원래 고왕국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피라미드'가 아니라 마르(Mar)라고 불렀다. 하지만 기원전 그리스의 관광객들이 본국에 돌아가 피라미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먹는 삼각형 모양의 과자 피라미스에 비교했기 때문에 '피라미드'란 명칭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현재 이집트에서 이집트어는 그 후신인 콥트어가 거의 쓰이지 않으므로 마르라는 용어도 잘 쓰이지 않는다. 현대 한국어에서 '산'을 뜻하는 '뫼'라는 어휘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현대 이집트 아랍어로 피라미드는 el-harram이라고 부른다. 어간은 '늙은'이란 뜻이므로 어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래된 것' 정도 의미이다.
사실 피라미드의 위상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집트 석조 건축의 수준과 의의는 피라미드 외의 것들도 대단히 놀라운 수준이다. 신전 유적 등을 보면 이집트인이 석조 건축의 기본을 스스로 개발했음을 볼 수 있다. 원래 피라미드 주위에는 장례나 제사를 위한 신전과 부대시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한 긴 벽 등을 세웠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돌기둥을 벽에 연결시킨 구조가 나오고 차근차근 더 발전해 벽에서 독립되어 세워진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구현하였다. 이집트 건축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크레타 섬의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것도, 이집트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원과 건축 양식의 발달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에서 되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파라오가 살 사후세계의 왕궁을 짓는다는 개념에서 만들었다. 즉, 기본적으로는 무덤으로 설계된 것이다. 지금은 거의 피라미드만 남았지만 건설 당시에는 근처에 신전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 피라미드를 둘러싼 긴 벽 등 부대시설이 함께 있었다.
피라미드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개선되고 발전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원래 이집트에는 마스타바(mastaba)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을 지어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다. 여기에는 완성된 양식의 피라미드에 사용한 거대한 돌과 달리 비교적 크기가 작은 벽돌을 사용했다.
조세르(Djoser)라는 파라오 시대에 이르러 그 유명한 임호텝은 조세르의 마스타바를 공사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당시 이집트에는 파라오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그의 무덤을 공사해야 하는 법도가 있었는데, 마스타바가 완성되어도 조세르는 멀쩡했던 것. 그래서 이모텝은 공사를 확장시키기 위해 마스타바 위에 작은 마스타바를 올리는 계단식 마스타바를 구상하고 실행했다. 이로써 마스타바는 다층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되었다. 심지어는 위로 층을 올렸는데도 여전히 왕이 죽지를 않으니 옆으로 확장한 흔적도 있다. 원래 지하에 석실이 있는 마스타바의 구조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지하에 석실이 몰렸다.
후대의 파라오인 스네프루(Sneferu, Snefru)는 매우 야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계단식 피라미드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고자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매끈한 삼각형 모양 사각뿔 피라미드 건축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내부에 좁고 높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쌓고, 외부에 벽돌을 덧붙여 매끈하게 사각뿔로 마무리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횡력에 취약한 작은 벽돌을 사용한 탓에 피라미드는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전체가 무너지진 않았지만 공사 도중에 외벽이 붕괴한 것 같다. 이런 실패작이 스네프루를 만족시킬 리가 없었는지 결국 완성도 안 하고 그냥 버렸다. 당연히 이 피라미드에는 스네프루가 묻히지 않았다. 이를 '메이둠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스네프루의 건축가들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여 벽돌보다 크고 단단한 돌을 사용해 건축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사 도중에 하중 때문에 돌에 금이 가버렸다. 돌의 크기가 필요치보다 너무 작았고, 바닥 면적에 비해서 경사가 너무 급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하게 주변에 돌을 더 쌓아 바닥 면적을 늘리고, 피라미드 높이의 절반 정도에서 경사를 확 낮춰 쉽게 마무리해 버렸다.
그 결과물이 유명한 굴절 피라미드. 물론 스네프루는 만족하지 않았다. 참고로 굴절 피라미드는 특이하게도 초창기 피라미드임에도 불구하고 매끈매끈한 외장 석회암이 상당히 많이 남았는데, 당시에는 아직 기술이 부족해 석회암 블럭과 내장 바위 블럭 사이에 상당히 큰 틈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틈 덕분에 열팽창으로 인한 구조약화를 잘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의 미숙함 때문에 더 오래 보존된 특이한 사례.
결국 지금의 완성된 피라미드 수준의 거대한 석재를 사용하고, 처음부터 안정된 각도를 추구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피라미드의 형태를 만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엄청난 하중을 견디기 위해 내부의 천장 역시 역 계단식으로 쌓아 가장 상부의 하중이 벽으로 분산되도록 하였다. 흡족한 스네프루는 아마도 이 안에 묻혔겠지만... 미라가 발견되지 않은 탓에 진실은 모른다.
대를 이은 쿠푸 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보고는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두고 더 크게 지었는데, 그것이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인 쿠푸의 대피라미드다. 하지만 너무 크기가 커서 내부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돌에 금이 가고야 말았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처음으로 화강석을 왕이 안치되는 석실 천장으로 사용했는데, 계속해서 금이 가는 것을 보고 5중겹까지 쌓아서 겨우 하중을 분산하였다. 7대 불가사의의 피라미드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보통 최종적인 피라미드의 완성형은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라고 말한다. 이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보다는 3 m 작지만, 내부가 안정되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서 사용한 화강석 석실도 버렸다. 이렇게 해서 피라미드 건축술이 완성되었다. 특히 이 피라미드의 윗부분은 건축 초기의 매끈한 모습이 풍화나 석재 떼어가기를 견디고 비교적 많이 남았다. 직접 올라가본 관광객들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맨위쪽의 석재를 도둑질해갈 사람은 없으리라고 할 만큼 크다.
물론 이 외에도 멘카우라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많은 이집트 피라미드가 있으며, 사실 스네프루의 피라미드 이후에도 계단식 피라미드거나 마스타바를 만든 파라오들도 있다.
몰락
이러한 피라미드는 한동안 무덤으로 쓰인 모양이지만, 5, 6왕조 시기로 넘어오면서 재정 악화나 다른 건축물의 건축 증가 등으로 인해 규모는 4왕조 시기보다 축소되었고, 건축 기법 또한 큰 돌만을 이용해 쌓는 방식에서 내부를 작은 돌로 채우고 바깥쪽에만 큰 돌을 쓰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런 구조는 큰 돌만 사용한 피라미드보다 붕괴에 취약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다수 남아있는 5, 6왕조 시기의 피라미드는 기자의 피라미드에 비하면 돌무더기처럼 보일 정도로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피라미드 건축방식의 변화와 반대로 장제전 등의 부속시설은 이 시기에 들어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내부 역시 벽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던 이전 시기와 달리, 문구를 새기거나 벽화, 부조를 이용한 장식을 하는 변화가 나타난다.
6왕조 직후 고왕국이 멸망하면서(이집트 제1중간기) '귀족의 자식이 노예가 되고 노예의 자식이 귀족이 되는 세상'이라는 당대의 기록을 볼 때 엄청난 사회혼란이 있었던 듯하다. 당시 기준으로 고대 이집트 5천 년 역사상 최악의 가뭄이 닥쳐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을 구워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역병과 정치적 혼란은 덤. 이집트는 근 2백 년간 혼란에 휩싸였다.
이 때문에 피라미드같이 복잡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기존의 피라미드를 훼손하기까지 했다. 결국 중왕국 시대에 이르면 단단한 석재 대신 진흙 벽돌로 속을 채우고 외벽은 포장용 석회암으로 만든 콘크리트로 마감한 피라미드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내부 자재가 부실하고 포장용 석회 가루로 만든 콘크리트도 기술적 한계로 인해 외벽의 일부가 파괴되어 침식되면서 내부 벽에서는 물이 흐르는 일까지 발생해서 오늘날 남은 모든 중왕국시대 피라미드들은 붕괴위기의 콘크리트 덩어리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 그나마도 중왕국 후기에 이르면 힉소스인의 침입으로 인해 피라미드를 만들 시간도 없어서 그냥 바위산에 굴을 파고 매장했다.
이집트가 다시 국력을 회복한 신왕국 시대에 와서는 지난 세월의 환란 속에 피라미드 건축법을 이미 유실한 상태인데다가 정치적, 종교적 상황도 변화하였고, 수도를 고왕국 시대의 북부 이집트 멤피스에서 남부 이집트 룩소르로 옮기면서 최고신도 태양신 라에서 창조신 아문으로 바뀌게 되는 등, 피라미드를 건축할 이유도 사라졌기 때문에 왕의 시신은 주로 왕가의 계곡이라는 곳에 매장했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도 피라미드가 아닌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왕가의 계곡은 오랜 세월 비밀이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발견됐는데 대부분 도굴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예부터 쓰였던 무덤 마스타바와 피라미드는 눈에 띄어도 너무 띈다. 그래서 수백~수천 년간 도굴꾼에게 시달렸다.
그래서 아예 사막 속 암반 계곡에 굴을 파고 거기에 왕족의 미라와 부장품들을 안장한 것. 왕족들 입장에서는 잊힌 기술인 피라미드 건축법을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지출을 할 이유가 없었을 뿐 아니라 도굴로부터 그나마 더 안전한 사후세계가 보장된 새로운 장례지 선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노동력 확보
헤로도투스는 쿠푸 왕이 대피라미드를 지을 때 노예 20만 명을 동원해 지었다고 적었지만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로는 노예가 아닌 농부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며 그 이유는 나일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동안 대체 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공익 사업을 겸한 것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 중이다.
쓸데없어 보일지라도 억지로나마 부를 재분배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사회적으로도 입증되었고, 지배층도 대형 건축물을 통해 본인 위신을 세우며 백성들 일자리도 제공하는 게 사회 안정에 좋다. 이집트의 인구는 프톨레마이오스 생전에도 300만 명 정도였으므로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는 인구가 더 적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몇몇 피라미드에 긁적여놓은 낙서에서 오늘은 돈을 얼마 받았고 생필품으로 뭐가 제공되었다고 적혀있다든지, 감독관과 싸워서 며칠 동안 일 안 나갔다가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혀서 결국 다시 일 나갔다고 투덜거린다는 것처럼 별별 낙서가 발견되었고, 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된 석판 중에는 노동자들의 출결 현황과 결근 사유가 적힌 문서에서 결근 사유로 과음으로 인한 숙취, 전갈에 물려서, 죽은 형의 미라를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해서 같은 비교적 사소한 사례까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자유민이 다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집트의 종교는 파라오를 신으로 여기고 있었고, 피라미드는 바로 그 파라오의 무덤이었으므로 건설의 명분은 충분했다. 실제로 파라오에 대한 신앙심과 경외심이 약해진 후대의 왕조들에서는 피라미드처럼 파라오 개인에게 헌사하는 건축물은 더 이상 짓지 않고, 대신 파라오보다 격이 높은 신들을 모시는 신전을 건설하는 형태로 바뀌어갔다.
또한 하인리히 야콥의 명저 '빵의 역사'에 의하면 이들에게는 급료로 빵과 맥주가 지급되었는데, 감독관이 이를 지급하지 않았을 경우 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록상의 '세계 최초로 기록된 파업'은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피라미드 자체는 아니고 기원전 12세기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시절 파라오의 신전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급료를 받지 못하자 시원한 그늘에 누워서 급료를 받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버틴 것. 결국 그들은 급료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런 파업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시대에까지 계속되어서 지역 총독들이 이런 지역 특성 문제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또한 피라미드 주변을 보면 피라미드 건설에 자원했던 사람들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하며, 관리자급이나 기술자들뿐만 아니라 단순 노동자들의 무덤 역시 발견되고 있다. 신으로까지 숭배받을 정도로 위대한 존재로 여겨졌던 파라오의 무덤 근처에 천한 노예나 강제 노역을 당하는 평민들의 무덤을 대놓고 짓는 것은 비상식적이라 볼 때, 피라미드는 강제동원된 노예가 짓지 않았다는 쪽이 유력하다.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의 유골 중 부러졌다가 나은 경우는 물론이고 심하게 다친 다리를 절단한 자국이 있는 유골까지 나타난 것으로 보아 당시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의료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감독관, 조리장, 보수 지급을 위한 회계사 등의 무덤도 발굴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노동조합이 있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한다.
피라미드 노동자들의 삶 그리고 이들이 자유민이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외과 수술을 받은 흔적이 있는 유골과 임신한 여성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노예라면 수술 같은 고급 의료따윈 기대하기 어려운데다 가족, 특히 노동력을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임신한 여성을 건설 현장 근처까지 데려와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민 신분이었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또 다른 근거로는, 노예 경제의 대표선수 격인 고대 로마마저도 대형 공공건축물을 짓는 데까지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로마가 남긴 수많은 대형 건축물들은 대개 로마 군단병이나 임금 노동자들이 만들었고, 노예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노예들도 대부분 급료를 받는 노예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채찍과 함께 움직이는 노예들은 아니었다.
고대 로마에는 신분만 노예로서 직업 선택의 자유나 신변의 자유만 없었을 뿐 제대로 임금을 받고 사는 전문기술직 노예들도 많았기 때문. 로마 사람들도 생산성이 극도로 낮고 전문적인 기술을 축적하기 어려운 하급노예들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동원하는 것은 위험할 뿐더러 능률까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최고 수준의 육체노동을 하는 노예들에게 채찍질까지 해가며 일을 시켰다간 문자 그대로 노예들이 죽어나간다. 고대 시대에서 인간의 목숨은 무한히 존재하는 게 아니었고, 노예의 죽음은 주인의 입장에선 엄청난 재산적 타격이었다. 지금도 전문기술자들이 작정하고 일하는 와중에도 삐끗하면 온갖 사고가 터지기 십상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되려 최소한의 대우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흔히 바벨탑이라고 불리는 신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는 노예 노동으로도 90m가 넘는 높이로 만들어진 신전이었지만, 이 경우 건축물의 특성을 살펴봐야 하는데 좋은 석재가 없어서 진흙 벽돌을 쌓아 올린 지구라트는 단순 노동인 벽돌을 만드는 작업의 비중이 매우 컸고 반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화강암을 깎아서 쌓아 만들었으니 전문직인 석공의 비중이 컸던 차이가 있다.
여담이지만 한국의 언론인이자 학자인 리영희 교수가 이집트를 방문하여 피라미드를 구경한 뒤 피라미드가 노예들이 아닌 자유민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설을 지지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근거는 '자유의지에 기반한 창조성 없이 피라미드와 같이 웅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수는 없다'는 것. 뭔 뻘소리냐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노예노동이라는 게 지극히 비효율적이라 몇십 년씩 걸리는 대역사를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기회만 나면 땡땡이치고 대충 일하는 게 당연한 노예의 손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도 아주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역사학적 근거는 없어도 합리적인 추론이다.
사실 대부분 고대 문화에서 저런 거대 건축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나름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노예란 기본적으로 불경한 존재로 여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정탄다는 의식적인 문제도 있고, 강제 노역자들은 조금만 감시가 소홀해지면 도망가거나 심지어 사보타주의 가능성까지 있으니 동시대 관점에서도 기념비적 거대 건축물들은 자발적인 자유 노동자들을 쓸만한 당위성이 있었다. 즉 노동자들에게 '너희가 짓는 이 웅장한 건축물은 후대의 인류에게까지 오르내릴 위대한 건축물이다!'라고 설득해 어쩌면 그들 중 강제 부역을 원치 않았을 이들에게 동기 부여를 줬다는 소리.
이처럼 요즘에는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자료가 흥밋거리로 제법 알려져 있지만, 피라미드가 지어진 기간이 워낙 길고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넉넉하지 않은 사정에서 무리하게 백성들을 쥐어짜 피라미드를 짓게 한 파라오도 분명 존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억지로 지은 피라미드일수록 후한 대우를 받은 노동자들이 건설한 피라미드에 비해 규모나 완성도 면에서 뒤쳐지는 물건들이 많다는 것이다.
반박
고고학적으로 피라미드 공사에 자유민이 대거 동원되었다는 것은 이미 밝혀져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것이 공익 사업을 겸하는 일종의 뉴딜 정책과도 같았다는 주장은 비약이라는 비판도 있다.
뉴딜 정책과 비슷한 공익 사업이 효과를 보려면 화폐 경제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당시 이집트는 물물교환을 바탕으로 한 분배 경제였기 때문에 이런 정책이 효과가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애초에 어떤 경제였냐를 논하기 이전에 20세기 초의 뉴딜 정책도 실제로 실효성이 있었는지 논란이 있는 와중에 기원전 수십세기의 이집트에서 공익 목적으로 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납득하기 다소 어렵다. 이와 관련된 논란은 출애굽기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또한 노동자의 복지가 좋았다고 보는 주장에도 맹점이 있는데, 피라미드 건설에는 건설노동자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재 운송을 위한 땟목을 제작하는 노동자도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그 땟목 제작을 위한 목재와 밧줄을 조달하는 노동자도 있었을 것이며, 노동자들이 머무를 막사를 관리하는 노동자와 이 모든 관계자들을 먹여살릴 식량과 조리를 담당하는 노동자도 있었을 것이다. 건설과는 달리 이런 단순반복노동의 비중이 높은 잡일에까지 노예를 쓰지 않았다고는 장담하기 힘들고 이런 분야에서는 거칠게 다뤄지는 노예 노동이 더 효율성이 높았을 것이다.
건설 기술
피라미드는 거의 다 석회석이 많은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피라미드의 구조 대부분이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는건 이런 이유. 지금이야 피라미드에 의한 관광 산업 때문에 피라미드 주변까지 시가지가 확장되었지만, 당시(4000년 전!)엔 외따로 떨어진 석회석 산지를 골라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석회석의 경도는 2로 인간 손톱의 경도 2.5보다도 약하여 굉장히 가공하기 쉽다. 그래서 쐐기 등을 이용하여 쉽게 가공하였다. 그리고 내부의 석실은 화강암과 나무로 만들었는데, 화강암은 겉에 나타난 암석의 결에 따라 절개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피라미드에 쓰인 대형 화강암을 절개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끌이나 정 등으로 암석에 일렬로 구멍을 낸다. 구멍마다 나무 쐐기를 박는다. 나무 쐐기에 물을 뿌리면 쐐기가 물을 빨아들여 팽창하면서 돌을 쪼갠다. 이때 일렬로 박아둔 쐐기구멍이 마치 절취선처럼 일렬로 돌을 쪼개게 되는 것이다. (우표 가장자리 절취선이나 영화 티켓 생각하면 된다.) 이 방법은 고대 이집트뿐만 아니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도 화강암 석재를 자를 때 썼던 방법이다.
채석장에서 피라미드 건설 현장까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중간에 나일 강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나일 강은 장애물은커녕 오히려 좋은 통로가 되었다. 나일 강이 범람하기 전, 절개한 석재를 끈으로 묶고 그것을 땟목 위에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하면 그 땟목이 석재를 운반해 주면서 강을 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몇십만 개가 넘는 석재를 운반한 기록도 있다고 한다.
피라미드의 외벽을 구성하는 석회석 블럭 하나는 측정 결과 보통 2톤 정도로 계산되며, 벽돌이나 흙을 이용하여 경사로를 만들고, 돌 밑에 둥근 나무를 깔고 끌어올리면 10명 내외로 끌어올릴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대학 건축학과에서 5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3주일 만에 돌 186개를 쌓아 8층짜리 피라미드를 만든 적이 있다. 또한 피라미드를 쌓기 위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안쪽에 만들어서 서서히 외벽을 만들어 가면서 올라가는 구조로 만들면 훨씬 더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국내의 한 건축학자 겸 고고학자는 자신의 서적에서 기중기 사용을 주장하였다. 기중기는 기존의 이론인 경사로에 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술과 효율성을 지녔는데 당시의 이집트인들이 이집트 특유의 단단한 나무를 이용하여 기중기를 제작하여 사용했을 거라는 이론. 기중기 이론에 의하면 3천 명이 기중기 60여 개로 7년 동안 작업하면 대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중기의 흔적은 나무가 재질인 만큼 사용이 끝나면 흔적이 남지 않고 이집트가 쇠퇴기에 접어들자 제작 기술이 소실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기중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기중기의 부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이 피라미드 부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주변의 무덤이나 각종 자료에 의하면 주민 1만 명 미만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돌 230만 여 개인 피라미드는 대충 7년 정도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피라미드의 건설이 농한기에만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피라미드를 파라오가 즉위하자마자 건설하기 시작해서, 죽기 전에만 완공되면 되니까 요절하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래 산 왕의 경우에는 재위 기간 동안 피라미드 여러 채를 짓기도 했다.
화강암으로 일단 계단식으로 쌓은 뒤 맨 꼭대기에는 캡 스톤(피라미디온)이라 하여 사각뿔의 돌을 하나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도 석회석으로 반듯하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사각뿔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쿠푸 왕의 피라미드 등 대부분의 피라미드는 석회석이 일부 떨어져 나가 높이가 좀 줄었다.
꽃가루 화석을 이용한 환경 분석을 통해 기자 피라미드 인근을 흐르던 나일강 지류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나일강 지류를 이용해서 공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구조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위로 올라가면 왕의 묘실이 있고 왕의 묘실 바로 아래에 왕비의 묘실이 있다. 하지만 왕의 묘실로 가려면 천장에 있는 통로를 통해서 가야 하며 이 통로를 마개로 막아 놓았다. 통로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기만 하면 막다른 곳으로 빠지는데 그 아래에 함정이 있다.
피라미드 내부의 통로는 극히 좁다. 건물 자체의 하중이 무지막지할뿐더러, 아치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목적부터가 자주 드나들라고 만든 곳이 아니다. 확실한 건 사람이 편하게 들어가는 것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이집트인들이 아치를 몰라서 피라미드에 아치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아치 구조물이 사용되었고, 수메르의 도시 니푸르 유적에서도 기원전 380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치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간 교류가 있었고, 심지어 햇볕에 말린 벽돌과 조적건축을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배워왔을 확률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집트인들이 아치 구조를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피라미드, 신전 등의 석조 건축물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문명의 여명기인 만큼 이집트인의 눈에 자신들이 가진 아치 기술이 만족스럽지 않았을 수도 있고, 스핑크스 같은 조각상을 제외한 나머지 건축물을 딱딱 각지게 지어야 하는 규정이나 종교적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정형화된 신전 양식이 있고, 이 때문에 아치를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 건축되거나 크게 개보수된 신전에도 아치는 딱히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기원전 185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치형 구조물인 가나안 문이 아슈켈론에 있는데, 아치가 무엇인지 이집트인들이, 그것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의 이집트인들이 몰랐을 리 없다.
이 사람은 1947년생으로 언론에 나올 때는 늘 저렇게 중절모를 쓰고 다닌다. 고대 이집트 전문가이자 유물 수호자로도 불리며 이집트 고고학계 및 여론에서는 인기가 높다. 그럴 만한 게 2000년대에 와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도난당한 파라오시대 고분벽화 5점을 돌려받았으며. 영국 런던 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던 석기시대 유물 등 2만 5천 점, 미국이 보유한 3000년 된 목관 등 유럽과 미국에게 3만 점이 넘는 이집트 고대 유물을 되찾아오는 데 큰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자이며 언플도 자주하는 등 정치적인 행동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래 봬도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자타공인 최고의 고대 이집트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만든, 그의 네페르티티의 미라를 찾는 연구 과정을 취재한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네페르티티 본인이거나, 그 친족일 가능성이 유력한 미라를 찾는데 성공한 모습이 나왔는데, 이 와중에 그는 각 미라의 안치 방식과 관의 형태 등을 보고 네페르티티의 생존 시기와 상관없는 미라들을 정확하게 판별해내는 위엄 넘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하와스는 이집트 유물의 출입과 유적지 발굴을 허가하는 권한을 가져서 국내외 관계자들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유물과 유적지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작업하는 외국 고고학자는 발굴 결과를 공개하기 전에 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추방당한다. 여하튼 문화재에 대한 애착은 엄청나서 2011년 이집트 시위 이후 몇몇 이집트 문화재가 도난당하자 그야말로 분노하여 비난 인터뷰를 하고 도난 방지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초고대문명설을 아주 싫어해서 그런 주장을 따르는 자칭 연구자들에게는 연구 허가도 내어주지 않는다. 이집트인의 능력을 근간부터 부정하는 인종차별적인 관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심지어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2005년부터 방사성 비파괴검사로 탐사해 온 결과 200석짜리 협동체 비행기가 들어갈 만한 공간도 있다고 나타났다. 다만 처음 세울 때부터 의도하여 만든 공간인지 아니면 하중이 내려앉아 생긴 공간인지는 더 탐사해 봐야 알 수 있을 듯.
오해
워낙 엄청나게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대 인류의 솜씨가 아닌 더 이전 시기의 알려지지 않은 고도의 문명이 피라미드를 제작했다는 초고대문명설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그 중 제대로 된 근거가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 독특한 건축 스타일과 정교한 기술로 인해서 과연 이집트인들이 세운 것이 맞냐는 의혹에서 초고대문명설의 떡밥이 시작된다. 이런 떡밥이 존재하는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마야 등 곳곳에서 발견되는 피라미드의 보편성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 교류가 없는 문화권끼리 비슷한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은 원형이 따로 있었지 않았겠냐는 것.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초창기 마스타바부터의 발전상이 뚜렷하게 남아있으며, 처음부터 사각뿔 형태로 지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기둥의 자립과 아치도 모르던 건축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는 피라미드와 같은 사각뿔 구조는 거대건축물을 지을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즉,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형태가 우연히 비슷해진 것이지 어떠한 원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피라미드 구조 자체는 완벽한 건물 형태도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피라미드를 지을 당시 이집트의 건축 기술에는 아치라는 개념이 없었다.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아치 구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라미드는 막대한 자체 하중을 효율적으로 분산시킬 수가 없었다. 웅장한 건물 규모에 비해 내부 구조가 지극히 협소한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초고대문명설이나 외계인설 등은 여기서 간단하게 반박된다.
정상적인 대다수 학자들은 이런 초고대문명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당시 이집트가 바로 그 초고대문명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충분히 당대 이집트의 능력으로 피라미드의 건설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집트는 사막으로 둘러싸인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은 사막밖에 없지만, 기원전 북아프리카는 수풀이 대부분을 덮은 사바나 지역이었다. 사바나에서는 인간이 자체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당시 그곳에서는 농업도 굉장히 발달했다. 기후변화로 지금은 모두 사막으로 변했지만.
게다가 매년 일어나는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극복하기 위해 기하학, 천문학, 측량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덕분에 당대 이집트는 그야말로 초월적인 기술력이 있는 나라였다. 나일강 범람이 왜 기하학과 측량술에 영향을 주었냐면, 나일 강이 한번 범람하면 새로운 흙으로 그 일대가 뒤덮이게 되는데 그러면 땅 소유주들은 땅의 어느 부분이 자기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것을 측량해 주는 전문가가 나서서 각 땅 소유주의 명확한 영토 크기를 알려주게 되는데, 이런 짓을 수천 년간 반복하다 보니 측량 기술과 이에 필요한 기하학이 엄청나게 발달한 것이었다. 애초에 기하학(γεωμετρία, geometry)의 어원이 땅(γεω, geo)+측정(μετρία, metria)의 그리스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하면서 놀라지만 땅 한 뼘만 손해 봐도 난리나는 땅 주인들을 상대로 정확히 그들의 땅의 크기와 경계를 측정해주는 일을 몇천 년간 매년 해온 이집트의 측량사들에겐 이런 방위계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일강의 범람은 해마다 일정한 주기로 계속되었는데 이때에 맞춰 대피하고 돌아오는 걸 반복하다 보니 1년과 하루의 길이를 계산하는 것이 엄청나게 정확해졌다. 1년은 지구의 공전주기인데 이걸 지구 위에서 알아내려면 태양과 별의 운동을 계산해야 하므로 일년을 계산하려면 천문학을 알아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천문학도 매우 발달하게 되었다. 즉 이집트의 나일강의 범람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측량술, 기하학, 천문학의 전문가로 만든 것이었다.
거기다 더해 나일강이 범람할 때마다 일년간의 농사로 영양분이 소비된 흙을 다시 새로운 흙으로 교체해 주었기에 다른 지역의 농업과 달리 휴식기를 가질 필요 없이 매년 농사가 가능했다. 나일강이 범람하고 난 다음에 농사를 시작하는 것이 고대 이집트 번영의 이유로, 나일강의 범람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수위가 낮으면 재앙이 닥쳤다며 부디 범람이 일어나기를(…) 신관들이 나서서 기도하던 나라가 이집트였다.
수천 년이 지난 중세 유럽에서도 땅을 셋으로 나누어서 돌아가면서 1년에 하나씩 쉬게 하는 3포 농업을 실시했고, 그마저도 쟁기가 발달하기 이전엔 1년 농사짓고 1년 쉬는 2포 농법을 실시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 근변 지역은 단순 계산으로도 최소 1.5배 이상의 생산력을 매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 때문에 수천 년 동안 반복된 나일강의 범람은 이집트인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천문학, 기하학적 지식과 풍부한 노동력을 제동해 주었고, 이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이런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고대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걸 지을 기술력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은 굉장히 오만한 오류이다.
또한 초고대문명설의 주장처럼 피라미드가 누가 기술을 준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지도 않았다. 피라미드의 원형인 마스타바와 그걸 쌓아올린 계단식 피라미드가 뚜렷이 남아 있다. 그 다음 지어진 굴절 피라미드는 원래 그냥 피라미드로 지으려다가 너무 가파르게 지어서 무너지려 하자 급히 각도를 낮춘 거다. 경험이 없어 나타난 시행착오의 명백한 흔적. 굴절 피라미드 바로 다음 지어진 제대로 된 피라미드를 보면 경사가 현격하게 낮다. 그 후 여러 차례 각도를 높혔다 낮췄다 하면서 여러 피라미드를 짓다가 최적의 각도가 정해졌고, 그 이후에야 대피라미드가 건설되었다.
게다가 현대에도 피라미드를 재현할 수 없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위의 류경호텔 등의 예가 있지만, 이미 현대인은 피라미드보다 훨씬 큰 건물을 더 빠르고 정교하게 만들 기술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당장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에 있는, 피라미드 모양을 그대로 재현한 호텔 '룩소르 호텔 앤 카지노'만 봐도 실제 이집트인들이 쌓은 어지간한 피라미드보다 크고, 내부 구조도 그때에 비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으며 복잡하다.
오히려 피라미드를 쌓는 작업은 현대 건축물들을 만드는 작업에 비해 훨씬 간단하다. 단지 굳이 피라미드 구조를 안 쓰더라도 하중을 견디면서 공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피라미드형으로 건축자재를 쌓을 필요가 없을 뿐이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인들의 계단식 피라미드나 쿠푸 왕의 피라미드 등에서 보이는 많은 시행착오와 설계변경, 하중을 견디지 못한 실패의 흔적들을 보면 '완벽한 건물'이란 인식은 다소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이 현대인만의 오만은 아니다. 고대 로마 시절 이집트로 단체 관광을 갔다 와서 써 놓은 수기를 읽어보면 관광지의 바가지, 추가 수수료를 요구하는 가이드에 대한 불평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것이 "고대인들이 어떻게 저런 것을 지었지?"라는 내용이다. 로마 시대를 기준으로 해도 피라미드는 이미 수천 년이 넘은 고대 유적이었다. 쿠푸 왕 피라미드를 세울 당시 시베리아에는 아직 매머드가 살아있었다. 이미 헤로도토스 시절부터 고대 유적 관광지로 인식되었다. 즉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사람들에게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대문명의 놀라운 미스테리 역사유적이었다.
서기 120년 경 로마인 관광객 테렌티아가 죽은 동생 데키무스 겐티아누스를 애도하며 피라미드에 라틴어로 낙서를 해놓았던 것을 1335년 독일인 순례자 빌헬름 폰 볼덴젤이 발견하여 옮겨적은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놀라움의 연속이다
미스터리
위에 상세하게 피라미드의 발전과정 및 쇠퇴에 대해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오래 전의 일이고 제작 방법 등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미스터리라는 이름을 달고 온갖 괴이한 학설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서는 미스터리에 대해 언급하고 비판은 몰아서 하겠다.
에리히 폰 데니켄은 "신들의 전차"에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람들이 지은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데니켄은 당시 이집트의 기술력과 인원동원 능력으로는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 건축물을 짓기는 무리이며 결국 피라미드를 세운 고도의 건축술과 각종 과학, 수학적 사항들이 외계인들에게서 온 것이라 주장했다.
에리히 폰 데니켄처럼 외계인 개입설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그레이엄 핸콕은 로버트 보발과 함께 한 연구에서 피라미드가 오리온자리의 소위 "오시리스 벨트"의 위치와 일치한다고 주장하였고, 정확하게 오리온 자리의 별의 위치와 피라미드의 위치가 들어맞는 시기를 추적해 피라미드가 2만여 년 전에 건축된 것이라 주장했다. 간혹 무덤으로 사용된건 맞으나, 원래 거기 있던거에 후대에 이집트 왕들이 발견해 자기들 무덤으로 개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아닌 게 아니라, 구글링 해보면 각종 아마추어 연구인들의 여러 가설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피라미드 주위에 담만 살짝 올리면 완벽한 지하수 펌프가 된다라거나, 피라미드 자체가 일종의 수력발전소라거나 하는 주장들이 있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고 참고만 하자.
초고대문명설이나 외계문명기원설 혹은 외계인 개입설은 앞서 설명한 내용만 봐도 충분히 논파된다. 사실 상단의 신비주의적 해석과 초고대문명설은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매우 부족할 뿐더러, 이러한 해석이 주로 근대 서구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것은 결국 위에서 서술했듯이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것을 지을 수 있을 리 없다.'라는 제국주의적 오만함에 의거한 오리엔탈리즘과도 통한다.
이러니 위에서 나온 자히 하와스 이집트 문화재청장은 이따위 개소리로 이집트 모독하지 말라며 극도로 이런 주장을 혐오하고 이런 연구한답시고 이집트 유적지 발굴하겠다는 이들은 절대로 발굴 및 연구허가를 안 내준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 고고학계에서도 당연히 미친 자들이라며 혐오한다.
오리온자리와 유사하다고 이를 근거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사실 '비슷해 보인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중요한 점은, 오리온이 지평선 위로 막 올라왔을 때는 배치가 비슷해 보이지만 정작 피라미드 상공에 올라왔을 때 천구 밖에서 피라미드를 바라본다면 오리온 벨트와 피라미드 배치는 X자 모양으로 어긋난다. 그레이엄 핸콕은 이후에도 세계의 다른 고대 유적지를 별자리와 억지로 연관지어 보려고 하는데 모두 근거가 부족하고 무리한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비밀통로로 알려진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여러 번 언급했듯이 부실공사의 산물이다. 항상 이런 미스테리를 언급할 때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언급되는데, 부실공사의 산물인 건물에 균열이 많은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물론 단순히 오래되어서 갈라진 틈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찌되었든 당장 바로 옆에 있는 피라미드의 정점인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는 미스터리의 소재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위의 미스터리들은 그냥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라 솔직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위의 반박에서 다 반박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피라미드에 관한 의문이 아예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고대 이집트 전문 고고학자들이 의문스러워하는 부분은 전성기 피라미드들, 특히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정말 왕의 무덤이 맞긴 하냐는 것. 제일 의문인 게 쿠푸왕이지만 쿠푸왕의 피라미드만 문제는 아니다. 사실 피라미드라는 건축물의 목적 자체가 상당히 모호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성기 피라미드들 중에서 매장의 흔적이 있는 건 위에서 말한 조세르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팔 하나가 전부다. 다만 다른 피라미드들은 멀쩡한 피라미드를 일부러 허물어 볼 수도 없고 해서 아직 조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후 조사가 더 진행되면 왕의 미이라가 발견될 가능성은 있다.
이런 의문이 나오는 이유는 피라미드 내에서 '이건 왕의 무덤이다'라고 납득할 만한 증거물이 석관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는 왕의 방이니 왕비의 방이니 하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이건 처음 들어가봤던 아랍인들이 자기들 보기에 이건 남자 방같이 생겼으니 왕의 자리 같고 이건 여자들 방 같이 생겼으니 왕비의 자리 같다면서 왕의 방, 왕비의 방이라는 식으로 대충 끼워맞춰 붙인 이름이다.
문제는 이런 방에 어떤 이름을 붙이건 어쨌건, 통로 입구보다 큰 석관(마침 적절히 파라오의 미이라가 딱 들어갈 만큼 큰)이 있긴 하니 분명히 피라미드 건설 당시에 설치된 석관이 분명하고 따라서 매장 공간임이 확실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유해는커녕 그 흔해빠진 부장품 유물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설사 유해가 죄다 썩어 없어졌다고 해도 '여기에 유해가 있었다'는 흔적 정도는 당연히 남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매장의 흔적이 없는 것이다.
도굴돼서 없는 거라는 말도 있는데, 역사 기록상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제일 먼저 파고 들어간 인물로,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였던 알 마문이 피라미드에 들어갔을 때도 완전히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도굴당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알 마문 본인이 도굴해놓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본래부터 비어있었다는 드립을 쳤다는 말도 있지만 도굴당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알 마문은 몰래 도굴하려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당시의 풍설에 있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보물과 기술'을 얻으려는 '공식적인 탐사'였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숨길지언정 무엇인가 나왔다면 숨길 이유가 없다.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는 보물의 일부를 얻은 것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결코 많은 보물은 아니고 '탐사비용만큼의 재물'을 얻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알 마문 이래 아랍 지식인들이 피라미드에 관해 언급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것이 알 마문의 이야기이며 후대 이집트 민담에도 반드시 언급됨을 고려하면 알 마문은 피라미드에 들어간 것은 숨길 의도조차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칼리프 시대보다 고고학에 대한 기술이 월등히 발전된 지금은 도굴 당했다고 해도 도굴 당했다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다. 도굴꾼은 당연히 돈 되는 물건만 훔쳐가기 마련이며 돈 안 되는 잡다한 쪼가리 유물들은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 아닌 도굴된 무덤에서도 발견되는 게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설사 싹쓸이를 했다고 해도 도굴 과정에서 반드시 뭔가는 부서지기 마련이고, 그 흔적은 남게 되어 있다.
그리고 고고학자는 이런 흔적들을 찾아내는 것을 자신의 전문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한 예로 당신이 박물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박살난 도자기나 토기 파편 같은 유물은 도굴꾼들이 무덤에서 깽판친 흔적일 확률이 꽤나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는 그런 도굴의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혹자는 훗날 계속되는 도굴에 견디지 못하고 왕가의 무덤에 묻혔던 미라들을 다 따로 모아두었듯이 쿠푸왕의 미라를 따로 모셔두고 피라미드를 싹 청소했다고도 하지만 그런 청소를 했으면 청소의 흔적이라도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흔적 따위도 전혀 없다. 때문에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대세임에도 불구하고 무덤이면 당연히 있어야 할 유해가 없는 점은 여전히 이집트 고고학계의 크나큰 의문점이다.
실제로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정체불명의 공간만 세 군데고,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아직 발견되지 못한 (유적과 유물이 있는) 진정한 왕의 자리가 있다는 설 심지어 피라미드 자체가 왕의 무덤이 아닌 무언가 다른 목적으로 지은 거라는 설도 있지만 가설 단계일 뿐이다.
하지만, 무덤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쿠푸 왕 시기에 만들어진 피라미드들에 국한된 얘기이다. 그 이후 왕조의 피라미드들의 경우 왕의 무덤이라는 증거물이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따라서, 쿠푸 왕의 피라미드도 무덤이라고 여김이 자연스러운 추론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피라미드는 기본적으로 왕릉이고 이렇게 공을 들여놓고 지은 왕 본인이 안 묻혔다는건 어불성설이다.
잠정적인 결론은 이집트 왕조가 잘 돌아가던 시절 후대 파라오들이 피라미드를 비웠다는 것이다. 부장품을 탐냈거나, 도굴당해 개판이 된 것을 확인하고 그냥 깨끗이 치웠을 거란 가설이다. 대피라미드는 건설 이래 언제나 이집트 왕국의 독보적인 랜드마크였으니 후대 파라오들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관심을 가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처음 열였을 때부터 비어있었다는 말은 과장인 것이, 앞에 나온 알 마문이 기록에서 직접 ‘중왕국대에 열리고 비워졌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대피라미드 자체가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가 없는 위대한 건축물이니 지어지고 수천년 간 많은 파라오들이 관리를 했고 불법적으로 드나들었을 자들도 매우 많다. 많은 학자들은 대피라미드가 다른 이의 무덤으로 재사용되기도 했을거라 추측하며, 용도가 무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피라미드의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근세에 세워진 그리니치 천문대는 9분[46] 정도 기울어져 있는데 반해 피라미드의 남북 방위는 겨우 3분 오차가 있을 뿐이다. 나침반도 없던 4500년 전 고대에 방위를 어떻게 정밀측정했을지는 추측의 영역이다.
또한 실무적인 관점에서 본 피라미드 건설 과정의 의문점은 여전히 있다. 단순히 돌을 캐고 옮겨서 깎아 쌓아 올린다고 생각하면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려면 현재 발견된 채석장보다 규모가 3배는 커야 한다. 이는 피라미드 규모 = 채석장에서 캐간 돌의 양이라는 착각에서 일어난 일인데, 문제는 모양을 다듬는 과정에서 더 많은 돌이 필요하고 부산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산에 따르면 피라미드의 2배 이상 크기의 버려진 돌무더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피라미드 건설 방법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아직 없는 것도 미스터리이다. 수년간 가장 유력했던 이론은 피라미드 한쪽면을 따라 설치된 별도의 경사로로 돌이 운반되었다는 것이지만 현재는 주류 학계에서 부정되는 추세. 피라미드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경사는 급격해지고 경사로는 길어지게 된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돌을 운반할 만한 경사로의 길이는 2km가 넘게 되는데 이는 피라미드보다 더 큰 구조물이 된다는 것이 문제. 나중에는 피라미드 외부면을 돌아가는 훨씬 작은 경사로가 나선형으로 설치되는 방식도 제시되었지만# 돌의 규모와 모퉁이의 존재까지 생각하면 경사로를 지탱하기도, 돌을 효율적으로 옮기기도 힘든 방법이다.
시간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피라미드 건설에 걸리는 시간은 약 20~30년인데 추정대로 석재가 250만 개 사용되었다면 25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6분에 1개씩 쌓았다는 뜻이 된다. 처음에는 여러 군데에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지만, 몇 단만 올라가도 힘들게 된다.
건축학자 피터 제임스의 주장에 따르면 피라미드 내부의 돌들은 다듬은 석재가 아니라 잡석으로 채우고 외부면 몇 단만을 석재로 쌓았을 것이라는 기존의 의문점을 해소하는 이론을 제시 했지만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건설방식에 대한 증거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당시 이집트인 종교관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건설방식이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사막 한가운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매체에서 피라미드는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에 있고 낙타를 타고 한참 가야하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위 사진처럼 사실은 시가지 바로 옆에 위치한다. 일단 가장 유명한 3대 피라미드부터가 기자 시의 외곽에 있고,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서도 매우 가깝다.
카이로 공항에서 자동차타고 가면 1시간 이내에 도착한다. 피라미드를 보려면 지하철 타고 기자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근교의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같은 셈. 무엇보다도 이 피라미드는 수도고속도로 안에 있는데, 그 수도고속도로의 남측 구간은 사막 한가운데를 지난다.
구한말(1883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보빙사 일행들도 방문했다고 한다. 동행한 서양인들은 당시 유행이었던 피라미드 등반과 탐사를 보빙사에게 권했으나, 전원 거부했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보빙사 사람들이 대담하지 못하고 겁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예법 때문이다.
선비된 입장에서 천민의 무덤이라도 함부로 하지 않는데 하물며 남의 나라 왕릉을 밟고 올라가거나 들어가볼 리가 없었다....라고 인터넷에서 뭔가 이상한 짤방까지 만들어져서 많이 돌아다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왜곡해놓은 가짜 정보로 의심된다.
애초에 보빙사들이 현재까지 남겨놓은 기록물은 단 하나 뿐이다. 보빙사 대표 중 2명(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에 휘말려서 보빙사 관련 기록들이 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1981년에 김원모 단국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이름을 모르는 수집가들로부터 찾았다고 주장하는 '견미사절홍영식복명문답기' 하나 뿐이다.
그리고 그 하나 남은 자료에도 위와 같이 남의 나라 왕릉이라는 이유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애굽민수로 널리 알려진 곽민수 소장도 사람들이 하도 많이 물어보길래 진짠가 하고 찾아봤는데 성리학적인 문제로 인해 피라미드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의 박종인 역사전문기자는 당시 보빙사들이 세계여행에 대해 단 한 글자도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으나 이들과 동행한 미국인 포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이들은 고대인이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직접 올라가거나 들어가 구경하는 것은 거부하는 소심함을 보였다'라고 적었는데 이를 토대로 이 설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요약하면, 보빙사 일행이 피라미드 탐사와 등반을 거부한 것은 사실로 보이나, 그 거절의 이유가 제대로 적혀있는 기록은 없다.
한편,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피라미드를 부른 말은 '금자탑(金字塔)'이다. 한자 '金' 자 모양으로 생긴 탑이라는 뜻이며, 이 말이 처음 보이는 기록은 1866년 간행된 중국의 영화자전(英華字典)이다. '금자탑'이란 말은 1930년대 이후에 '후세에 남을 뛰어난 업적'이라는 뜻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되었고, 현재에는 대개 후자의 의미로만 쓰이게 되었다. '금자탑' 대신 영어 '피라미드'가 본 항목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된 탓이 크다.
세계 곳곳에 유사한 건물이 있는 것도 간단히 그 대답을 낼 수 있다. 피라미드 형태는 무게 분산에 유리하고 매우 안정적인 구조이며, 그래서 고대의 미숙한 건축기술로 거대한 건물을 만들려 한다면 피라미드 형태로 만드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의 진짜 입구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있는 입구는 일꾼 탈출용 입구를 완력으로 찾아낸 것이며, 석실도 진짜 석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1990년에 독일 고고학 연구소 팀이 환기갱이라 알려진 곳에 로봇을 투입하여 탐사를 했는데 그 안에 문이 또 있었다. 이 문 너머에 대한 탐사는 이집트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 무산되었다.
이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정말로 비밀에 가득 찬 피라미드라는 설도 있으며, 혹은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설계 미스로 인해 석실을 끊임없이 증/개축 했다는 설로 나뉘어 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는 설은 피라미드 내부에 밝혀지지 않은 비밀 공간이 여럿 존재하며 기존의 왕의 방, 왕비의 방으로 불리는 공간은 도굴꾼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시설이고 진짜 쿠푸왕이 묻힌 공간은 따로 있다는 가설이다.
설계 미스 설은 석실에 7중겹의 천장을 올리고도 그 천장이 다 균열이 가서 반쯤 박살난 상태라는 것과 석실의 구조도 천장이 어긋나고 기울어진 등 영 어설프고, 상기한 일꾼 탈출용 통로가 사실은 그냥 잘못 만들어진 틈이라는 주장 등으로 뒷받침된다. 즉 칼 같은 동서남북 방향과 별자리 등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설계 미스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가설이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Pyramid of Khufu) 또는 기자의 대피라미드(The Great Pyramid of Giza)
개요
쿠푸 왕의 피라미드(Pyramid of Khufu) 또는 기자의 대피라미드(The Great Pyramid of Giza)는 이집트 제3의 도시인 기자 소재의 피라미드로,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 쿠푸 왕의 무덤이다. 일대 피라미드 3개 가운데 가장 크기가 거대할 뿐만 아니라 기자와 이집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피라미드로서 '대(大) 피라미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축조시기는 기원전 26세기으로 2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공되었는데, 하술하듯 당시에는 외벽이 반죽한 백색 석회암으로 덮여 있어 더욱 완전한 각뿔 형상이었으며,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피라미디온'(캡스톤)을 씌워 화려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대 이집트 왕조의 쇠퇴 이후 여러 차례 뜯겨 건축 자재로 전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울퉁불퉁한 암석들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피라미드는 링컨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3800년 넘게 인간이 세운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들은 기원전의 학자와 예술가들에게도 이미 현대인이 생각하는 수준의 고대 유적으로 여겨졌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스트라보, 로마의 대 플리니우스 등이 대피라미드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소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곳이며, 오늘날에도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이집트에 막대한 외화를 벌어주는 랜드마크이자 관광지로, 매년 147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곳을 다녀간다.
피라미드의 높이는 지어질 당시에는 146.6m였으나 외벽의 석회암 석재가 뜯겨나가면서 높이가 138.5m 정도로 감소했다. 대부분은 석회암이나, 일부는 화강암으로 축조되었으며 사면의 경사는 약 51°50'40"이다. 바닥면의 길이는 230.33m이며 부피는 260만 m3에 달한다. 무게로만 치면 600만 톤에 달하는, 암석 230만 개가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내부에는 방 3개가 있다.
왕의 방과 왕비의 방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왕의 방 내부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제작된 빈 관이 하나 있다. 나머지 방 하나는 피라미드 하부 기단암을 파고 만들었는데 완공되지 않은 듯하다. 피라미드 근처에는 태양 방주를 보관하는 신전과 장제전 두 곳이 있어 석조 보도로 연결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 파괴되고 잔해와 터만 남았다.
역사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6세기 이집트 고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쿠푸 왕의 재위기간에 지어졌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상세한 축조년도를 특정하기는 힘들며, 고고학계에서는 대략 기원전 2700년과 기원전 2500년 사이의 어느 즈음에 대피라미드가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건축 목적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념비, 정교한 천문대 등 다양한 학설들이 쏟아져나왔지만, 학계에서는 현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쿠푸 왕의 무덤이 거의 확실하다고 여긴다.
쿠푸 왕 사후 카프레, 멘카우레 등의 후계 파라오들이 그의 피라미드 곁에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의 황금기였던 제4왕조가 끝난 이후, 더이상 이집트에서는 이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지어지지 않았다. 후대의 중왕국 및 신왕국의 파라오들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잡아먹는 피라미드 대신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파서 자신의 관과 미라를 안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기원전 5세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해 피라미드를 관광하고 돌아갔으며, 그가 집필한 기록이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헤로도토스는 곁의 이집트 신관 및 관리들의 증언을 취합해 자신의 저서인'역사'에 그대로 기록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대피라미드가 지어진 지 2천 년이 넘은 시점이었기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헤로도토스는 피라미드가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써놓았는데, 정작 쿠푸는 신왕국보다 몇천 년 전의 인물이었다. 또한 이집트 백성들을 강제노역장에 끌고 가고, 딸에게 매춘을 시켜 그 돈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폭군으로 쿠푸 왕을 묘사했다. 당시 민주정 체제를 채택하고 전제군주를 본능적으로 경계했던 그리스 출신의 헤로도토스는 거대한 대피라미드를 지으려면 틀림없이 평민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가 말기 왕조 시대에 들어 점차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피라미드는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파라오들이 자신의 건축물들을 짓기 위해 피라미드의 외벽 마감재들을 떼어가긴 했지만, 파라오를 제외하고는 남의 무덤에서 대놓고 돌을 채석해가는 것을 처벌했기에 원형 그대로는 아닐지언정 나름대로 보존되었었다. 하지만 말기 왕조 시대에 들어 왕권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피라미드가 말 그대로 질 좋은 채석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신전을 축조하기 위해 피라미드에서 돌들을 캐어갔고, 대피라미드는 차츰차츰 그 빛을 잃어갔다. 기원전 25년, 이집트가 로마 공화국에 병합된 직후에는 스트라본이 피라미드를 방문해 내부를 관람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기 1세기에는 대 플리니우스가 피라미드를 보고 '파라오가 제 보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만들었을 것', 그리고 '피라미드 주위에 벽돌로 만들어진 귀족들의 집이 있었고 그 곁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라는 감상평을 썼다.
중세시대에 들어서는 기자의 피라미드들이 요셉의 곡물 창고라는 민중 소문이 널리 퍼졌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이집트의 기근을 예언한 요셉이 미리 막대한 곡물을 쌓아두기 위해 창고들을 지었다는 창세기의 구절에서 유래한 이야기였다. 이같은 근거 없는 속설은 로마 제국이 이집트를 다스렸던 2세기부터 6세기까지 쭉 유지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라쉬둔 칼리파국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피라미드와 관련된 소문들이 엄청나게 부풀려졌다. 기본적으로 무슬림들은 피라미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바스 왕조의 제7대 칼리파였던 알 마문은 직접 피라미드의 벽을 뚫고 내부의 방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피라미드 내에 파라오가 고대 이집트의 모든 비밀을 써놓았다는 말도 있었고, 우물을 통해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 멋진 탐험을 펼친 사나이에 대한 전설도 떠돌았다. 중세시대가 끝날 즈음에는 내부의 박쥐나 날짐승들 때문에 귀신 들린 장소로 유명해졌다.
여담이지만 문화재 보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알 마문은 대피라미드 곳곳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알 마문은 외벽에 시작 포인트 총 7개를 잡아 굴을 여럿 뚫었고, 석회암을 쉽게 부수기 위해 불을 지펴 가열한 뒤 차가운 식초를 들이부어 암석을 깨버리는 등 보물을 찾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심지어 벽을 부수기 위해 공성용 병기까지 동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1798년에는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제1공화국군과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격돌했다. 나폴레옹이 지중해를 건너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다음, 1798년 7월 21일에 피라미드에서 약 9마일 정도 떨어진 엠바베 마을에서 오스만 대군과 큰 전투를 벌인 것이다.(엠바베 전투) 프랑스 군대는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오스만 군대는 황급히 퇴각해 남쪽으로 쫒겨나야만 했다.
역사상 이 전투를 '피라미드 전투'라고도 부른다. 참고로 나폴레옹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대피라미드가 보이는 위치에 프랑스 군대를 정렬시키고 사기를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 "제군, 이 피라미드 위에서 4천 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98년 이집트 원정 당시 벌어진 피라미드 전투 시작 연설)
이후 근현대까지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남았고, 현재까지 이르렀다. 이집트에 엄청난 외화를 벌어다주는 효자 건물인 셈이다. 가끔씩 이슬람 극단주의 신봉자들이 피라미드가 우상숭배의 상징이라면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긴 한데, 대피라미드가 벌어들이는 관광수입과 그 상징성이 워낙 어마어마해서 군부는 아예 들은 척도 안 한다.
대피라미드 덕분에 간접적으로 상당한 외화벌이를 하는 이집트 국민들도 이집트에서 관광수익이 중요하다는것은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에 피라미드 파괴 요구에 대해서는 정신나간 헛소리로 취급한다. 애당초 쿠란에서도 무함마드 이전, 즉 이슬람 등장 이전 시대의 타 종교 건축물들은 파괴하지 말라고 써 있기 때문에 다른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그렇듯이 피라미드 파괴를 요구하는 이들이야말로 전통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들이다.
축조
헤로도토스는 대피라미드를 지을 때 쿠푸가 노예 20만 명을 징집해서 지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노예를 통한 토목 공사라는 고대인의 자연스런 추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설은 오랜 시간 서구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며, 20세기까지만 해도 대피라미드는 노예의 피땀이 들어간 건축물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보급되고 피라미드 근처에서 노동자들이 살았던 마을이 발굴되었으며, 이에 따라 통념과 편견이 깨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로는 노예가 아닌 농부(자유민)들이 정부와 근로 계약을 맺고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며, 이들이 동원된 이유는 나일 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동안 대체 일거리를 제공한다는, 일종의 공익 사업을 겸한 것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었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몇몇 피라미드에 긁적여놓은 낙서에서는 '오늘은 돈을 얼마 받았고 생필품으로 뭐가 제공되었다'고 적혀있다든지, '감독관과 싸워서 며칠 동안 안 나갔다가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혀서 결국 나갔다'고 투덜거리는 듯한 낙서가 발견되었으며, 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된 석판 중에는 노동자들의 근태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결근 사유로써 과음으로 인한 숙취까지 허용되었다.
이들 자료를 토대로 추측하면, 노예가 아닌 자유민 혹은 반자유민 성격의 노동자가 다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 고고학자이자 전 이집트 유물부 장관 자히 하와스는 피라미드 주변에는 노동자들의 공동묘지 유적이 다수 발굴되며, 노예였다면 왕의 무덤 옆에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 해설하였다. 또한 무덤 벽에는 자신을 '쿠푸 왕의 친구'라고 쓴 낙서까지 발견되었으며, 이는 노예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하인리히 야콥의 명저 '빵의 역사'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급료로 보리 빵과 맥주가 지급되었는데, 감독관이 이를 지급하지 않았을 경우 노동자는 파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록상의 '세계 최초의 파업'은 고대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이 기록은 기자의 피라미드에 대한 내용은 아니고 기원전 12세기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시절 파라오의 신전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급료를 받지 못하자 시원한 그늘에 누워서 급료를 받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버틴 것인데, 결국 그들은 급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기자의 대피라미드에서도 같은 식의 노동 쟁의가 가능했을 거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참고로 이런 파업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시대에까지 계속되어서 지역 총독들이 이런 지역문화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이 있다.
헤로도토스는 또한 피라미드 공사에 필요한 인부 수를 지나치게 올려잡았다는 지적이 있다. 현대 학자들이 다시 분석해본 결과, 대피라미드를 짓기 위해서는 3만 6천~ 5만여 명 정도 인력이면 충분하고 20만 명이나 되는 대인력이 투입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집트학자 미로슬라프 베르너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숙련 인력 약 5천여 명과 나머지 막일꾼 3만여 명 정도면 대피라미드 하나 짓기는 거뜬하고, 서너 달쯤 교대로 일하면서 하루에 빵 10개와 맥주 1병 정도를 일당으로 받았을 것이라고. 10명 정도씩 조를 나누어 조장과 부장을 정하고 각자 정해진 작업만 해도 10년 정도면 공사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집트학자 마크 레너가 한 연구를 봐도 많아봤자 4~5만 명 남짓한 인부들이 한꺼번에 작업하면 충분히 이른 기일 내에 피라미드를 완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건축비용은 대략 1조 원 내외가 된다. 사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페르시아군 규모를 수백만으로 뻥튀기하는 등 다른 데서도 인구수를 뻥튀기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런 뻥튀기는 동양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라, 호왈백만이라는 사자성어도 있을 지경이다.
피라미드를 쌓기 위해서는 돌들이 엄청나게 필요하다. 대피라미드는 남쪽으로 몇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채석장에서 바로바로 석재를 공급했다. 다만 외벽에 쓸 고급 석회암의 경우 일부러 카이로의 채석장에서 돌을 채석한 다음 나일 강의 배에 옮겨싣고 왔다. 현대적인 채석 장비가 없었던 고대 이집트에서는 석재를 떼어낼 때도 상당히 힘을 쏟아야 했다.
인부들에게 주어진 도구는 철보다 한참 무른 구리로 만들어진 끌과 톱뿐이었다. 인부들이 일단 톱으로 미친듯이 돌을 줄질하면 홈이 약간 생긴다. 그 홈 사이에 나무로 만든 쐐기를 끼워넣은 다음, 그 위에 물을 부으면 쐐기가 물을 먹어 부피가 팽창한다. 이 과정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 쩍 소리가 나면서 단단한 화강암이 깨져나가는데, 채석장에서 이 화강암을 1차로 대강 다듬은 다음 공사 현장으로 옮겼던 것이다.
공사현장으로 옮기기도 문제였다. 평균 무게가 몇 톤에 나가는 거대한 암석을 공사현장으로 낑낑대며 옮기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아래에 통나무를 굴리기에는 사막 기후인 이집트에서 목재가 지나치게 귀했으므로, 이집트인들은 대신 썰매를 이용했다. 나무로 만든 썰매를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암석을 올린 다음 장정 몇십 명이 달라붙어 줄을 끌어서 옮겼다. 윤활 작용을 위해서 물을 중간중간 썰매 아래쪽에 부어주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피라미드를 쌓을 때 목재 골조를 사용했을 거라는 설, 임시 가벽을 쌓았을 거라는 설 등 다양한 학설들이 존재했지만 현대 학계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건 경사로설이다. 이 경사로설 사이에도 어떤 경사로를 이용했을지 학설이 분분한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자형 경사로였다는 것이 통설이었는지라 이 시기 출판된 역사서나 학습만화를 보면 이렇게 묘사한 책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나선형 경사로설이 가장 유력하다.
나선형으로 피라미드를 빙빙 둘러가며 경사로를 쌓아 그 위로 암석을 옮겨 쌓은 다음, 피라미드가 완성되면 경사로를 싹 치워버렸을 거라는 학설이다. 그나마 가장 경제적이고 필요한 시간이나 인력도 적어서 나선형 경사로설이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진다. 그 외에도 내부 경사로설, 대형 직선 경사로설 등의 이론도 존재하는데, 내부 경사로설은 지나치게 복잡해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고 있고 대형 직선 경사로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는 단점 때문에 학계에서 딱히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피라미드의 기본 암석들을 쌓는 일들이 다 끝나면, 마지막 단계는 석회암을 가공하는 것이었다. 내부의 암석들과는 다르게 외벽의 석회암들은 모래로 갈아서 반질반질하게 윤을 냈다. 이렇게 가공한 석회암을 피라미드 외벽에 입히면 태양빛이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황금 등으로 도금한 '피라미디온'을 올려서 마감했다. 하지만 비싼 귀금속으로 만들어졌던만큼 제일 먼저 도굴당했으며, 현재는 흔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금속 피라미디온이 사라진 것은 주변의 피라미드들도 마찬가지로 남아있는 유물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이는 이집트 쇠퇴기에 돌로 깎아 도굴 가치가 없었던 다른 피라미디온을 통해 그 형상을 추정한다.
형태
1번은 공식 입구, 2번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도굴꾼들이 파낸 입구, 3, 4번은 정식 입구에서 들어와 내려가는 하강 통로, 5번은 지하 방, 6번은 올라가는 상승 통로, 7번은 왕비의 방과 환기구, 8번은 수평 통로, 9번은 대회랑, 10번은 왕의 방과 환기구, 11번은 석재 환기구. 단 11번 통로의 용도에 대해서는 현재도 말이 많은데, 대회랑을 돌로 막은 후 인부들이 내려갔을 통로라는 설부터 단순히 부실공사로 인한 틈이라는 설까지 다양하다.
대피라미드는 암석 총 230만 개로 이루어졌다. 개중 석회암이 550만 톤, 화강암이 8천 톤, 회반죽 50만 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는 지어진 직후에는 백색 석회암으로 외장재를 덮어놓아 굉장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피라미드를 이루는 돌들 사이사이에는 회반죽을 발라 고정했고, 겉면을 사포나 모래 등으로 문질러 윤이 나게 만들었다.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피라미디온'이라는 캡스톤을 얹어 마감했다. 대피라미드의 피라미디온은 이미 그 상징성 혹은 금붙이 때문에 기원전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이 건물을 짓거나 자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손질이 한 차례 끝난 피라미드에서 석재를 골라 빼가면서 현재의 거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1303년에는 크레타 섬 인근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피라미드 외벽 상당수가 떨어져 나갔고, 맘루크 왕조의 역대 술탄들이 카이로를 지으려 피라미드 외벽의 석재들을 끝없이 빼갔다. 마지막으로는 19세기 이집트 왕국의 창업군주 무함마드 알리 파샤가 알라바스터 모스크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대피라미드에서 막대한 석회암을 가져갔고 현대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의 돈을 빼오고 있다.
입구
피라미드 입구는 북쪽 면, 피라미드면의 중심 축에서 동쪽으로 15m 정도 벗어난 지점 13층계 정도 높이에 있다.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가 쌍을 지어 맞대어 서있는 입구로, 원래는 거대한 암석으로 막혔으나 현재는 모조리 파괴되어 달려있던 문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입구 근처에 가보면 수많은 낙서들이 가득하다. 낙서들은 대부분 근현대 들어서 적힌 것들인데, 가장 대표적으로 1842년 프로이센의 이집트 원정을 기념해 새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기념용 상형문자 등이 있다.
정식 입구는 여기지만 관광객들이 들어가는 입구는 따로 있다. 관광객들은 9세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이 파놓은 통로를 통해서 들어가는데, 이 입구는 5층계 정도에 있고 너비는 상당히 좁다. 이 입구로 들어가 약간 아래로 경사진 도굴용 통로를 따라 쭉 걸어가면 정식 입구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던 내부 복도와 연결된다.
이 입구를 발견할 당시 이 곳에 금화 몇 개와 열쇠가 떨어져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 알 마문이 몰래 숨겨놓은 것이라 추정된다. 피라미드에서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으면 인부들이 실망할까 우려한 알 마문이 미리 금화 몇 개를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2023년 2월 경에는 대피라미드 정문 근처에서 새로운 복도형 공간이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왕의 방
피라미드 내부의 방 3곳 중 가장 위쪽에 있으며, 크기는 10.5m × 5.2m에 높이는 5.8m이다. 천장을 포함해 모조리 거대한 화강암 암석들로 만들어졌으며 위쪽에는 하중을 받치기 위해 층층이 쌓인 화강암들이 막대한 압력을 분산시킨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큰 압력을 몇천 년에 걸쳐 지탱하다보니 지붕의 화강암들 모두에 2.5cm에서 5cm 정도 금이 쩍쩍 갈라졌다.
석실의 벽에는 제4왕조의 전통에 따라 그 어떠한 상형문자나 장식도 새기지 않았고, 벽을 이루는 암석의 뒤쪽은 손질되지 않았다. 실제 왕의 방인지는 알 수 없고 임의로 붙여진 명칭이다. 석실의 북쪽과 남쪽 벽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얕은 구멍이 1개씩 나있는데, 이를 '환기구'라 부른다. 남쪽 환기구는 대략 45도 각도로 외부까지 통한다. 현재는 습기 제거를 위해 이 구멍 둘 다에 환기기구를 설치했다.
환기구의 의도나 위치를 가지고 여러 말이 많았다. 예전에는 신비주의 학자들이 환기구가 별자리나 특정 천체를 가리킨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아니라고 밝혀졌다. 남쪽 환기구 통로는 약간 휘어 있고, 북쪽 환기구 통로는 어떤 각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이리저리 꼬여 외벽으로 통하기 때문. 이집트인들이 특정 천체를 가리키기 위해 이 환기구를 지었다면 곧은 일직선으로 만들었을 것이므로 현재는 거의 폐기된 학설이다.
화강암 석관
중세 시대에 발견되었을 때 이미 모조리 도굴당한 상태라 그 어떠한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토록 정교한 피라미드의 관치고는 제작 당시 표시한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마감도 끝나지 않은 등 미완성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길이는 2.28m × 0.98m × 1.05m의 사이즈에 두께는 15cm이다. 내부의 안치 공간의 크기는 1.98m × 0.68m 정도의 사이즈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평균 신장을 고려했을 때 왕의 미라가 넉넉하게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관의 모양은 고왕국 시대의 전형적인 관의 모습으로, (현재는 사라진) 위쪽 관뚜껑을 고정하기 위해 구멍 3개를 뚫었다. 또한 관의 크기는 왕의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보다 약간 더 크다. 따라서 방에 천장이 얹히기 이전, 즉 공사를 하면서 관도 함께 놓였다는 뜻이 된다.
대회랑
길이는 46.68m이며 높이는 8.6m에 이른다. 들어가는 기단부의 폭은 2.1m로 꽤나 넉넉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벽이 경사지게 들어오는 모습이기 때문에 가장 위쪽 부분은 폭이 1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목재로 계단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 대회랑의 천장은 벽보다 약간 더 경사진 모습으로 돌들이 맞대어져 있는데, 이는 대회랑에 가해지는 엄청난 하중을 견뎌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워낙에 건축학적으로 잘 만들어 놓은 장소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대회랑을 이집트 건축의 기념비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참고로 대회랑의 끝 동쪽 벽에는 피라미드 최하단의 방으로 향하는 조그만 터널이 있으나 물론 사람이 지나갈 만한 크기는 아니다. 대회랑을 지나면 왕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이 피라미드 내부는 매우 덥다.
왕비의 방
왕비의 방 역시 실제 왕비의 방인지는 알 수 없으며 임의로 붙여진 이름이다. 피라미드 내부의 방 3개 중 중간에 있으며, 크기는 5.8m × 5.2m다. 뾰족하게 경사진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높이는 6.3m이다. 정식 입구로 들어간 후 하강 통로를 지나 대회랑으로 올라가지 않고 수평 통로를 따라 쭉 이동하면 그대로 왕비의 방에 들어갈 수 있다. 왕비의 방으로 들어가는 수평 통로는 폭 1m, 높이는 1.17m에서 1.68m 정도로 상당히 낮고 좁아 이동하기 불편하다.
고고학자들은 왕의 방에 있는 것처럼 왕비의 방에도 환기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방을 샅샅이 조사했고, 결국 방 가까이에 있는 환기구 2개를 발견했다. 그러나 왕비의 방의 환기구는 구리 손잡이가 달린 석회암 덩어리로 막혀있었고, 다른 쪽 끝 역시 외벽 바깥으로 뚫려있지 않았다. 2011년에 한 고고학팀이 스네이크 카메라 기술을 이용해 환기구를 막은 석회암 덩어리를 파내본 결과, 붉은색 염료로 상형문자가 새겨진 좁다란 방을 찾았다고 한다. (현재는 출입불가)
지하 방
피라미드에 있는 방 3개 중 유일하게 기반암을 파고 들어가 설치된 방으로 지면 27m 아래에 있다. 대략 8.4m × 14.1m 정도의 투박한 직육면체 공간으로, 높이는 4m 정도로 꽤나 크다. 왕의 방이나 왕비의 왕과는 달리 확실히 미완성된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방이기도 하다. 입구는 동쪽 벽 쪽에 나있는데 입구와 멀어질 수록 완성되지 않은 티가 난다.
그래서 입구와 가장 멀리 떨어진 서쪽 벽의 경우에는 천장부터 시작해서 아직 채 치우지 못한 흙더미까지 가득 쌓여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나일 강과 폭우로 인해서 완전히 침수되어 있었으나 이후 고고학자들이 물을 빼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방이 원래 쿠푸가 묻힐 안치실이었으나 중간에 마음을 바꿨던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태양 방주
피라미드 동쪽에는 거대한 구덩이 3개가 있었다. 1954년 5월에 처음으로 이 구덩이의 존재를 발견했고, 이 구덩이에서 목재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덩이의 모습을 보고 목재들이 배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한 고고학자들은 1224개에 달하는 목재 조각들을 일일이 짜맞추기 시작했다. 조각들은 큰 것은 23m에서부터 작은 것은 10cm 까지 크기가 가지각색이었다.
학자들은 밧줄을 이용해 그 많던 조각들을 제자리에 이어붙였고, 그 결과 14년이라는 대작업 끝에 마침내 완벽한 배를 재조립할 수 있었다. 보존처리를 마친 후 한동안 대피라미드 옆에 건설된 전시관에 전시되다가 현재는 신설되는 이집트 대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이전되었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매일 낮에는 낮의 태양선 맘제트(Mamdjet)를 타고 하늘의 나일 강을 동에서 서로 여행했고 밤에는 밤의 태양선 메스케트(Mesket)를 타고 신 오시리스가 지배하는 지하에 있는 명계의 나일강을 서에서 동으로 여행했다. 따라서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태양 방주 또한 2척으로 구성되었으나 1980년에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팀이 발굴한 나머지 하나는 아직 조립 중이다.
미스터리 및 음모론
워낙 엄청난 건축물인 만큼 관련된 미스터리나 음모론도 넘쳐난다. 가장 대표적인 가설 중 하나가 쿠푸의 대피라미드, 카프레의 피라미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가 오리온자리의 별 배치를 따라서 지었다는 것이다. 오리온자리를 잘 보면 '오리온의 허리띠'라고 해서 별 3개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데, 피라미드가 지어졌을 기원전 1만년 전 무렵 이 별들의 배치가 기자의 3개 피라미드들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은 점점 살이 붙어가면서 나중에는 기자의 대스핑크스가 사자자리를, 나일 강이 은하수를 의미한다고까지 주장하는 데에 이르렀다. 사진을 서로 대조해보면 은근히 그럴 듯한 주장이라 많은 지지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리온자리의 별들이 풍요와 오시리스를 상징했기에 더더욱 그럴듯한 가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천문학이 발전하자 이 주장도 논박당하였다. 천문학자 에드 크루프와 토니 파이랄이 플라네타리움을 이용해 연구한 결과, 피라미드가 지어질 당시 별들 사이의 각도는 약 47-50도 정도 각이었던 것에 반해 피라미드 사이의 각도는 그에 한참 못미치는 38도 정도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3개 피라미드를 연결하는 선을 그으면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데에 반해 오리온자리 3개 별을 잇는 선을 그으면 정반대인 남쪽으로 치우치며, 만일 대스핑크스가 사자자리를 상징한다면 이는 은하수, 즉 나일 강의 정반대편에 있어야 한다고. 게다가 가장 결정적으로 별자리들의 이름과 그에 관련된 신화는 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애초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별자리를 '사자자리'라고 부르지도 않았을테니 현대의 사자자리와 대스핑크스를 연관 지음이 더 이상할 지경이라는 뜻. 따라서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이 학설을 거의 사장된 사이비 과학 수준으로 취급한다.
또다른 유명 미스터리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뚫린 환풍구 2개가 하늘의 별자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사실 이 미스터리는 위의 오리온자리와 관련된 가설처럼 신빙성없는 이야기는 아니고 오히려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다. 피라미드 가장 안쪽 왕의 방에는 정체 모를 구멍이 2개 있는데, 학자들은 처음에 이 구멍이 공기가 통하기 위한 환풍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환풍구라는 주장이 힘을 잃었다. 로봇을 통해 환풍구 내부에 카메라를 집어넣어본 결과 환풍구 중간에 돌이 지어져 막혀 있었기 때문.
그래서 힘이 실린 가설이 바로 별자리 가설인데, 환풍구가 용자리의 알파성 투반, 오리온자리의 벨트, 북극성, 작은곰자리의 코카브를 가리킨다는 학설이다. 별들을 가리키는 이 구멍들을 통해서 파라오의 영혼이 그대로 하늘의 별들을 향해 승천했다는 것. 하지만 추가적인 조사 결과 북쪽 환기구는 이리저리 꼬아진 모습인데다가, 남쪽 환기구가 약 20cm 가량 휘어진 것으로 밝혀져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왜 이집트인들이 이 환기구를 뚫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피라미드가 하늘의 별자리와 연관이 있다거나 고도의 기술을 사용한 건축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리엔탈리즘과 결합해 극단으로 치달으면 초고대 문명설이나 외계문명기원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고고학계에서는 헛소리로 취급하는 중. 이러한 가설은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미개한 이집트인 따위가 저런 것을 지을 수 있을 리 없다'라는 제국주의적 오만함에 의거한 백인 우월주의와도 상통한다.
이집트인들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초고대문명론이나 외계인 기원설 따위를 주장하는 학자들에게는 아예 이집트 현지의 발굴 및 연구 허가를 안 내준다고 한다. 이집트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이 초고대 문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아예 반쯤 미친 작자들로 취급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일부 사람들은 '대피라미드가 애초에 무덤으로 지어지긴 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미 9세기 경 아바스 왕조의 알 마문이 탐험을 빙자한 도굴 작업을 벌였을 때부터 피라미드 내부는 텅 비었기 때문이다. 무덤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부장품, 도굴당했다고는 해도 하다못해 깨진 도자기 파편이라도 하나 남아있을 법이라도 한데 그것조차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이다. 파라오의 미라도 부장품도 나오지 않았으니 대피라미드를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지었던 게 아니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기자의 피라미드들에만 이 것들이 왕의 무덤이라는 확증이 없을 뿐, 다른 피라미드들에는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기록이 대놓고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조세르의 피라미드에는 관과 부장품이 발견된 바 있고 그 외에 파라오 테티의 피라미드에서는 수 백여구의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다. 따라서 현대 학계에서는 피라미드를 천문대 용도로 지었다거나 요새로 지었다는 둥 대부분의 이야기를 근거 없는 소리로 취급한다.
다만 건축학적으로 미스터리한 점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피라미드의 네 면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근세에 세워진 그리니치 천문대마저도 약 9분 정도 틀어져 있는데 수천 년 전에 세워진 대피라미드가 정확하게 방위를 맞추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틀림없다. 미스터리라기 보다는 당시 고대 이집트의 놀라운 건축 기술 성취도를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피라미드를 쌓으려면 주위에서 발견된 채석장보다 최소 3배는 더 큰 채석장이 필요하다는 의문이 있었으나 나일 강을 통해 외부에서 돌을 실어왔다는 지적에 논파당했고, 피라미드 건설방법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의문도 있는데 이건 아마 위에서 언급한 경사로설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누비아 피라미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이집트 남쪽의 수단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던 누비아 문명의 쿠시 왕국에서는 기원전에 '누비아 피라미드'(Nubian pyramid)를 무덤으로 지었는데 이집트의 장례 방식이 바뀐 뒤에도 1000년 동안 계속 피라미드를 지어올렸다. 쿠시 왕국은 신왕국 멸망 후 찾아온 이집트의 극심한 혼란기인 이집트 제3중간기에 상이집트를 거쳐 하이집트까지 전부 정복하고 일시적으로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잠시나마 번영을 누리며 이집트 제25왕조를 개창하여 파라오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누비아 피라미드들은 양식적으로 전성기의 이집트 피라미드와 유사하지만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이런 이유는 쿠시 왕국이 이집트 신왕국 시절의 고위 귀족들이 가족묘지로 작게 지어서 쓰던 방식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피라미드 중 제일 높은 게 40 m이고 웬만한 것들은 20 m 미만으로 훨씬 작다. 경사 역시 훨씬 급하고 돌에 철분이 함유되어서 전체적으로 색상이 어두운 편이다. 이집트와는 달리 나일강의 동서쪽에 다 있다.
손상이 심한 이유는 근처에 살던 주민들이 집을 지으려고 자재를 재활용한 이유도 있고 진흙 벽돌과 석재를 혼합해서 축조했는데 진흙 벽돌은 쉽게 손상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이 이집트 중왕조 시기에 지은 진흙 벽돌 피라미드들은 고왕국 시절에 통짜 돌을 깎아 만든 피라미드보다 더 후대에 지어졌지만 손상이 더 심하다.
누비아 피라미드는 전부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무덤 자체는 피라미드 안이 아니라 피라미드의 밑에(지하에) 있고, 피라미드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대신 피라미드 앞에는 작은 사각형 석실이 있는데 제사를 지내기 위한 방이다. 즉 누비아 피라미드는 제사용 시설, 묘비의 성격이다.
크기가 작아 모래바람에 묻혀버리기가 쉽고, 수단이 상대적으로 고고학계와 여행객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 보니 아직도 느리게 발굴하는 중이다. 피라미드들이 모여있는 곳이 여태까지 4군데 발견되었고(Meroe, Jebel Barkal, Nuri, El-Kurru), 2018년에 수단 북부에서 다섯 번째로 피라미드가 모인 장소가 발견되었다. 앞의 4군데는 왕실 묘지로 쓰였지만 새로 발견된 세데인가(Sedeinga)의 피라미드는 부유한 일반 시민들을 안치했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
세데인가가 수도인 메로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도 피라미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누비아 고유의 양식이 강한 메로에의 것과 달리 세데인가는 중부 이집트와 쿠시 왕국을 잇는 주요한 교역도시라는 위치에 더해 교역하러 온 이집트인들이 제일 먼저 도달하는 누비아 도시이기도 해서 이집트 본토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 예로 피라미드 꼭대기에 얻는 캡스톤의 형상이 태양 원반에서 나오는 연꽃이나 새를 조각했는데 이는 이집트 신화의 영향이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여성들을 위한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어 여성의 지위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진은 이들 중 제일 유명한 메로(Meroe)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피라미드의 윗부분들이 파괴되었다. 수단도 강수량이 적은 사막지대이고 근처에 큰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2천 년 넘게 피라미드들이 세월을 잘 견뎌내었는데, 1830년대에 주세프 페를리니(Giuseppe Ferlini)라는 이탈리아인 도굴꾼이 보물을 찾으러 와서 다이너마이트로 많은 피라미드의 윗부분을 파괴하거나, 어떤 피라미드들은 피라미드째로 파괴해버렸다. 더욱이 경악스러운 사실은 페를리니의 이런 행태들은 그 당시에 이 지역을 통치하던 토후의 허락을 받고 벌인 짓이라는 거다.
당시 사람들의 고고 유적의 가치에 대한 어리석은 무지에서 생겨난 비극이다. 페를리니는 결국 장신구 등의 부장품을 조금 찾기는 했고, 그것들을 유럽으로 가져가서 팔려고 했지만, 그 시대 유럽인들의 생각으로는 '미개한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에서 몇천 년 전에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고로 이것들은 가짜다'였기 때문에 팔리지 않다가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1세가 일부를 사서 현재는 뮌헨에 있는 이집트 예술 국립 박물관에 있고, 나머지는 현재 보관중인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에서 매입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엘-쿠루(El-Kurru)는 나파타 왕조 시기의 쿠시 왕국이 왕실 묘지로 조성한 장소이다. 여기에는 이집트 제25왕조의 시조인 카슈타(제25왕조의 창건자인 피이의 아버지), 피이, 셰비쿠, 타누타멘, 그들의 왕비들의 피라미드 무덤이 있고 누비아 고유의 방식으로 조성한 더 오래된 봉분들이 흩어져있는데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주인을 모르는 무덤이 많다.
1910년대에 최초로 발굴을 시작했을 때 진작에 다 도굴당한 상태였으나 도굴꾼들의 손길을 운좋게 벗어난 유물들이 조금씩 출토되어 쿠시 왕국의 화려한 시절을 알려주고 있다. 엘 쿠루에서 가장 거대한 1번 피라미드는 특이하게도 미완성 상태고 무덤으로 쓰인 흔적도 없다. 이 피라미드를 축조한 왕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나파타 왕조의 20대 왕인데 그의 왕비를 위한 피라미드도 그 옆에 지어졌으나 똑같이 미완성이고 무덤으로 쓰이지 않았다.
18번 피라미드에는 남성의 유골이 현대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그 무덤의 주인인 셰비쿠의 것으로 추정한다. 그 외에 피이, 셰비쿠, 샤바카, 타누타멘이 기르던 말들을 매장한 무덤이 있다. 묻힌 말들은 바로 선 자세로 마구를 전부 착용한 상태로 묻혔는데 역시 도굴꾼들의 손길을 피하지 못해 발굴된 유물은 거의 없다.
누리(Nuri)는 본래 쿠시 왕국의 왕실 묘지로 조성한 엘-쿠루가 가득 차자 타하르카가 대체장소로 조성했다.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누비아 피라미드인 1번 피라미드가 타하르카의 것으로 고대 이집트력으로 1월 1일 일출이 됐을 때 해가 지평선에서 수직으로 뜨는 위치에 있다. 후계자인 타누타멘은 마지막으로 엘-쿠루에 묻혔으나 그 이후의 쿠시 국왕들과 왕비들은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누리에 자신의 피라미드 무덤을 조성했고 이는 기원전 4세기 말의 왕인 나스타센 때까지 이어졌다.
엘-쿠루와 누리 모두 1916~1919년에 하버드 대학교 출신 고고학자인 조지 레이스너(George Reisner)가 처음으로 부분적인 발굴을 했는데 발굴 작업 중에 지하수가 계속 차오르는데다가 계단이 무너져 인부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더 이상의 발굴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작업은 중지되었고, 발굴 성과는 1950년대에 논문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2018년에 재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제벨 바르칼은 본래 이집트 신왕조의 파라오인 투트모세 3세가 누비아를 점령한 후 이집트의 최남부 거점으로 요새를 지었던 곳으로, 이집트인들이 주변에 정착하고 테베의 아문 신을 모신 거대한 신전을 건축했으며 쿠시 총독의 거처이기도 했다. 신왕국이 멸망하고 이집트의 국력이 줄어들던 이집트 제3중간기때 쿠시 왕국은 세력을 키워 나파타 왕조를 창건했고, 이집트인들이 물러난 제벨 바르칼을 수도로 삼고 각종 시설의 증축과 개축을 이어갔다.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이집트에서 축출된 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서 궁전과 신전들이 계속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고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사이의 시기에 피라미드가 8개 조성되었는데 왕실 무덤으로 쓰던 메로에를 두고 굳이 이곳에 무덤을 조성한 이유는 불명이지만 아마도 무덤의 주인이 제벨 바르칼 출신이었기에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손상이 심한 다른 곳과 달리 제벨 바르칼의 피라미드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현대에서는 파괴된 피라미드 근처에 널린 벽돌을 모아서 복원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 근방에 살던 사람들이 집 등을 지을 때 사용하느라 없어진 돌들도 많아서 어떤 것들은 복원했다는 티가 너무 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터만 남았을 뿐 영영 없어지기도 했다. 좌우간 아쉽게도 현대시대에 메로의 파라미드를 상징하는 것은 윗부분이 날아가버린 피라미드이다.
문명 6에서는 누비아 문명의 고유 시설물로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식량과 신앙을 제공하며 인접한 지구의 종류에 따라 추가적인 산출을 제공한다. 또 아마니토레의 지도자 특성으로 도심부에 인접한 타일에 건설하면 지구를 건설할 때 강력한 생산력 보너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다만 사막에만 지을 수 있다는 것이 흠.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
북아메리카 : 미국
9세기부터 17세기까지 미국 동부 및 중부에 자리잡았던 미시시피 문화에선 둔덕이라는 피라미드의 일종이 널리 건축되었다. 해당 문화의 대도시였던 카호키아 중앙에 있는 몽크스 마운드 (Monk's Mound, 수도승의 둔덕)은 멕시코 이북 북아메리카의 최대 피라미드이다. 몽크스 마운드의 정상에는 본래 큰 신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소실되고 없다.
메소아메리카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훨씬 더 유명하고 위 항목도 훨씬 더 길지만 사실 아메리카 대륙에도 피라미드가 상당히 많이 세워져 있다. 메소아메리카 문명권 멕시코 중부부터 동부, 그리고 중미가 과테말라나 온두라스에 걸친 지역에 대부분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집트 피라미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덤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신전이라는 것이다.
팔렝케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처럼 지배자의 무덤으로 사용된 공간이 발견되어서 메소아메리카의 피라미드가 무조건 신전으로만 쓰였다는 설은 부정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팔렝케만의 특이사항인지, 다른 피라미드에서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즈텍 제국을 비롯한 여러 중미 문명의 악명높은 인신공양이 피라미드 위에서 행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제단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이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힘들지만 올라가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치안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2022년부터 올라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가장 거대한 위 사진의 테오티우아칸의 태양의 피라미드. 멕시코시티 인근에 있어서 접근성도 좋은 편이며, 어마어마하게 거대하지만 아쉽게도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인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아서 덜 유명하게 되어버렸다.
특이하게도 이 유적은 기원전 200년부터 건립되어 10~2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였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7세기경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폐허가 되었다. 사라진 이유가 수년간 계속된 가뭄 때문이었다는게 밝혀졌다고 한다. 식량이 없어서 제국은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아서 지금 살고있는 사람들이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다.
그 후 14세기 유적을 찾게된 아즈텍인들이 거주하였고, 현재 붙여진 이름들은 전부 아즈텍인들이 명명한 것이다. 태양의 피라미드 외에도 달의 피라미드 및 크고 작은 11개의 피라미드가 있으며 현재 1/10 정도 발굴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세계에서 부피로 가장 큰 피라미드도 멕시코에 있다. 멕시코시티 근처에 있는 푸에블라라는 도시 근처에 있는 Cholula pyramid. 피라미드의 거의 모든 부분이 흙으로 덮여있고, 피라미드의 윗부분에는 성당이 있어서 멀리서 보면 그냥 성당에 있는 낮은 언덕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흙으로 덮혀있지 않은 부분은 돌로 만든 피라미드의 일부가 보이고 피라미드의 안으로 들어가볼 수도 있다.
남아메리카
기원전 35세기부터 기원전 18세기까지 페루에 있었던 카랄-수페 문명 (Civilización caral)에서도 거대 피라미드가 축조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이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시기가 겹친다.
귀마르의 피라미드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에도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 피라미드는 귀마르의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원래는 현지의 농부들이 김을 매다가 골라내어진 돌을 버린 장소이거나, 바람막이용으로 조성한 구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토르 헤이에르달이 귀마르의 피라미드는 현지 원주민들인 관체족들이 종교의례를 목적으로 지었음을 밝혀내었다.
물론 토르 헤이에르달은 무턱대고 '그래서 관체족들의 조상은 마야인이다'라는 설을 제기했다가 주류 학계로부터 외면당하긴 했지만, 이 건축물이 종교적인 이유로 세워졌음은 확실히 입증했다. 피라미드의 서쪽 계단이 동지 때 뜨는 아침 해의 방향을 따라 나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피라미드
적석총(積石塚) 또는 돌무지무덤은 돌을 쌓아 올려만든 무덤을 말한다. 적석총의 범주에는 고구려의 적석총을 포함하여, 백제의 초기 묘제로 추정되는 북한강, 남한강, 한탄강 등지에 분포하는 즙석분구묘들도 이에 해당한다.
적석총도 정의상으로 피라미드에 속한다. 고구려의 경우 태왕릉, 천추총, 서대총 등 거대한 것들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현재 장군총 외에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적석총이 사실상 없다. 백제의 적석총은 석촌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보스니아의 피라미드
2005년, 샘 새미르가 발견한 구조물들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인위적인 모양과 주변에서 발굴된 전돌들 때문에 새미르는 이 구조물을 피라미드 라고 주장하고 있다. 새미르의 주장에 따르면 피라미드의 높이는 무려 220 m, 년도 측정결과 무려 12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만약 위의 주장이 전부 사실이라면 보스니아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피라미드임과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 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고고학자와 지질학자들의 조사결과 플랫아이언(Flatiron)이라고 불리는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가파르게 선 지층이 차별적 풍화작용을 받아 형성된 바위를 가진 지형이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피라미드 발굴이라는 명목하에 가해지는 자연경관 훼손 및 주변의 실제 역사 유적 훼손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물론 괴베클리 테페같은 말도 안될 정도의 편년을 지닌 유적이 존재하기는 하다.
현재 샘 새미르는 주변마을들과 협력하여 이곳을 관광단지로 개발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새미르가 인부들을 시켜 발굴이 아닌 인위적으로 지형을 다듬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보스니아 정부는 고고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권고 및 자연 훼손에 대한 책임을 물러 조사 및 발굴을 중단시켰다. 그럼에도 보스니아 피라미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현재까지 미스테리 매니아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남극의 피라미드
2012년, 미국 및 유럽 일부 국가가 참여한 8명의 국제 연구진이 남극을 탐사하던 중 눈으로 뒤덮인 사면체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것은 총 3개이며 높이는 약 400m 정도 되고 사면으로 평평하고 4개의 모서리가 존재한다. 발견된 3개의 피라미드 중 2개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16km 들어간 곳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해안선에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피라미드를 발견한 탐사팀은 발표된 사실 외에 어떠한 추가 정보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미정부가 탐사팀을 입막음시켰다',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등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게 남극에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글 어스를 통해 남극 곳곳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2016년에 어느 남성이 피라미드의 좌표를 찾아내는데 성공하며 남극에 피라미드형 지형물 자체는 실존한다는 것이 확실시 되었다.
그러나 이 구글 어스에서 관측된 피라미드는 해안선과 가깝지도 않을 뿐더러 가장 가까운 해안에서 대략 800km 정도나 떨어져 있기에 이 탐사진들이 찾은 피라미드의 진위성 자체는 확인할 수 없게 됐다.
미스테리 매니아들은 남극의 산들은 대부분 험준한 산맥에 위치한데에 반해 남극 피라미드는 평평한 주변 지형에 혼자만 우뚝 솟아 있으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사면체의 구분이 매우 뚜렷하기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피라미드가 발견된 곳들의 공통점은 문명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남극은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환경이라 아직까지 문명이 존재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정말 피라미드가 맞다면 아주 오래전에는 남극에도 문명이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과거의 남극은 영상 20도 정도의 따뜻한 지역이라 고대 문명이 존재했을 거란 주장도 있지만 이때는 무려 5000만 ~ 3000만 년 전의 머나먼 과거로 아직 최초의 인류가 등장하기도 한참 이전인 지라 신빙성이 없다. 반쯤 농담으로 외계인이 만들었을 거라는 설도 돌고있다. 남극의 혹독한 기후로 인해 아직은 정확한 탐사도 할 수 없기에 현재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나 남극의 지리를 연구한 전문가들은 이 피라미드가 남극의 극심한 비바람으로 인해, 침식이 일어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산이라고 보고 있다. 누나타크(nunatak) 지형으로, 얼음산의 만년설이 침식되어 언덕이나 봉우리 끝이 빙하를 뚫고 나와 암반이 노출된 것을 가리킨다.
즉 애초에 그냥 자연적인 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형들은 침식으로 암반이 드러난 것이다보니 인간이 보기엔 마치 인위적으로 깎아낸 것과 같이 예리한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은데, 남극 피라미드 지형은 우연히 정사분면에 가까운 형태로 이뤄져 있다보니 피라미드란 오해를 산 것이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인공 구조물로 보기 힘든 한계로 지적하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이 산이 길이가 400km나 되는 남극의 엘스워스(Ellsworth) 산맥에 있는 봉우리 중 하나라는 것이다. 때문에 위에서 피라미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적하는 말과 달리 남극 피라미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형이 아니며, 눈에 묻혀 있을 뿐 실제로는 다른 산맥의 줄기와 다방면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이어진 산맥의 다른 봉우리들도 누나타크 지형으로 형성되어 지형 자체는 남극 피라미드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 金(쇠 금, 성씨 김)은 ❶형성문자로 钅(금)은 간자(簡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今(금)의 생략형(세월이 흐르고 쌓여 지금에 이르름)과 흙(土) 속에 광물(두 개의 점)을 담고 있다는 뜻을 합(合)하여 쇠, 금을 뜻한다. 金(금)은 처음에 주로 銅(동)을 가리켰으나 나중에 금속의 총칭이 되고 또 특히 황금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자의 부수가 되어 광물, 금속, 날붙이 따위에 관한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金자는 ‘금속’이나 ‘화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예전에는 金자가 금(金)이나 은(銀)·동(銅)·석(錫)·철(鐵)과 같은 다섯 가지 금속을 통칭했었다. 그러나 후에 다양한 금속이 발견되면서 지금은 모든 금속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금문에 나온 金자를 보면 상단에는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가는 연통과 아래로는 불을 피우던 가마가 묘사되어 있었다. 그래서 金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금속’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金(금, 김)은 성(姓)의 하나로 ①성(姓)의 하나 그리고 ⓐ쇠(금) ⓑ금(금) ⓒ돈, 화폐(금) ⓓ금나라(금) ⓔ누른빛(금) ⓕ귀하다(금)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돈의 융통을 금융(金融), 금전의 액수를 금액(金額), 금붙이나 쇠붙이를 금속(金屬), 빌려 준 돈의 이자를 금리(金利), 쇠붙이로 만든 돈을 금전(金錢), 돈과 물품을 금품(金品), 금으로 꾸민 누각을 금각(金閣), 임금이 타는 수레를 금여(金與), 궁궐의 문을 금문(金門), 돈이나 재물을 넣어 두는 창고를 금고(金庫), 생활의 본보기로 할 만한 귀중한 내용을 지닌 짧은 어구를 금언(金言), 황금을 파내는 광산을 금광(金鑛), 매우 단단하여 결코 파괴되지 않음 또는 그러한 물건을 금강(金剛), 단단하기가 황금과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향기와 같은 사귐이라는 뜻으로두 사람간에 서로 마음이 맞고 교분이 두터워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 나갈 만큼 우정이 깊은 사귐을 이르는 말을 금란지교(金蘭之交), 쇠처럼 단단하고 난초 향기처럼 그윽한 사귐의 의리를 맺는다는 뜻으로 사이 좋은 벗끼리 마음을 합치면 단단한 쇠도 자를 수 있고 우정의 아름다움은 난의 향기와 같이 아주 친밀한 친구 사이를 일컫는 말을 금란지계(金蘭之契),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이란 뜻으로 매우 견고한 성과 해자 또는 전하여 침해받기 어려운 장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금성탕지(金城湯池), 사이 좋은 벗끼리 마음을 합치면 단단한 쇠도 자를 수 있고 우정의 아름다움은 난의 향기와 같다는 뜻으로 아주 친밀한 친구 사이를 일컫는 말을 금란지의(金蘭之誼), 금 가지에 옥 잎사귀란 뜻으로 귀한 자손을 이르는 말 또는 아름다운 구름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을 금지옥엽(金枝玉葉), 금이나 돌과 같이 굳은 사귐을 이르는 말을 금석지계(金石之契), 금석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쇠와 돌처럼 변함없는 굳은 사귐을 일컫는 말을 금석지교(金石之交), 금과 돌같은 굳은 언약이라는 뜻으로 서로 언약함이 매우 굳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금석뇌약(金石牢約), 금옥과 같은 법률이라는 뜻으로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규칙이나 교훈을 일컫는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 귀중한 말을 할 수 있는 입을 다물고 혀를 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침묵함을 이르는 말을 금설폐구(金舌蔽口),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되고 취한다는 뜻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비유하는 말을 금미지취(金迷紙醉), 쇠와 돌을 열리게 한다는 뜻으로 강한 의지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금석위개(金石爲開), 흠집이 전혀 없는 황금 단지라는 뜻으로 외침을 받은 적이 없는 당당한 국가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금구무결(金甌無缺), 쇠줄로 단단히 봉하여 비서를 넣어두는 상자라는 뜻으로 억울하거나 비밀스런 일을 글로 남겨 후세에 그 진실을 전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을 금등지사(金縢之詞), 매미가 허물을 벗다라는 뜻으로 껍질은 그대로 있고 몸만 빠져나가는 것처럼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허세를 꾸며 벗어남을 이르는 말을 금선탈각(金蟬脫殼) 등에 쓰인다.
▶️ 字(글자 자)는 ❶형성문자로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아들자(子; 어린 아이)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한 집안에 자손이 붇는 일을 말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名(명) 또는 文(문)이라 알컫다가 진(秦) 나라의 시황제(始皇帝) 때 쯤부터 문자(文字)라는 말이 생겼다. 字(자)는 文(문자)과 文(문)이 합(合)하여 마치 사람의 가족이 붇듯이 계속하여 생기는 글자라는 뜻이다. 나중에는 글자 전부를 字(자)라 일컬었다. ❷회의문자로 字자는 '글자'나 '문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字자는 宀(집 면)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宀자는 지붕을 그린 것이기에 집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이렇게 집을 뜻하는 宀자에 子자가 결합한 字자는 '집에서 아이를 기른다'는 뜻으로 만들어졌었다. 字자에 아직도 '기르다'나 '양육하다'는 뜻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 때부터 字자를 '글자'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문자(文字)'와 관련된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字(자)는 (1)글자 (2)글자의 뜻으로, 그 수효(數爻)를 나타내는 말 (3)사람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 본 이름 외에 부르기 위하여 짓는 이름 흔히 장가든 뒤에 본이름 대신으로 부름 등의 뜻으로 ①글자, 문자(文字) ②자(字: 이름에 준하는 것) ③암컷 ④기르다, 양육하다 ⑤낳다 ⑥사랑하다 ⑦정혼(定婚)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글자의 음을 자음(字音), 활자를 부어 만드는 원형을 자형(字形), 표의 문자에서 글자의 뜻을 자의(字義), 많은 한자를 모아 낱낱이 그 뜻을 풀어놓은 책을 자전(字典), 글자와 글귀를 자구(字句), 글자의 근본 원리를 자학(字學), 글자의 새김을 자훈(字訓), 글자가 구성된 근원을 자원(字源), 영화에서 표제나 배역이나 설명 따위를 글자로 나타낸 것을 자막(字幕), 글자를 쓰는 법칙을 자격(字格), 글자와 글자 사이를 자간(字間), 글자의 모양을 자체(字體), 글자의 수효를 자수(字數), 활자의 대소를 나타내는 번호를 자호(字號), 수지 결산에서 지출이 수입보다 많은 일을 적자(赤字), 중국어를 표기하는 문자를 한자(漢字), 수를 나타내는 글자를 숫자(數字), 같은 문자를 동자(同字), 세간에서 두루 쓰이는 문자로서 정식의 자체가 아닌 한자를 속자(俗字),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 글자를 고자(古字), 한문 글자의 획수가 많은 것을 쉽게 줄여서 쓰는 글자를 약자(略字), 잘못 쓰이고 있는 글자를 와자(譌字), 둘 이상의 글자를 모아서 만든 글자를 합자(合字), 낱자를 늘어놓은 차례를 자모순(字母順), 수령을 달리 일컫는 말을 자목지임(字牧之任), 글자를 아는 것이 오히려 근심이 된다는 뜻으로 알기는 알아도 똑바로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오히려 걱정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을 식자우환(識字憂患), 한 글자도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일자무식(一字無識), 발음은 같으나 글자가 다름 또는 그 글자를 일컫는 말을 동음이자(同音異字), 한 글자의 값어치가 천금이다는 뜻으로 지극히 가치 있는 문장을 말함 또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맥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일자천금(一字千金), 큰 글자로 뚜렷이 드러나게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함을 이르는 말을 대자특서(大字特書), 미인의 고운 눈썹을 비유 형용하는 말을 팔자춘산(八字春山), 글씨를 쓰다가 그릇 쓰거나 글자를 빠뜨리고 씀 또는 그러한 글자를 일컫는 말을 오서낙자(誤書落字), 주견이 없이 남의 말을 좇아 이리저리 함을 이르는 말을 녹비왈자(鹿皮曰字), 글씨에 능한 사람은 정신을 들이지 아니하고 붓을 던져도 글씨가 잘 된다는 말을 투필성자(投筆成字), 한 글자를 가르친 스승이라는 뜻으로 시나 문장의 한 글자를 바로잡아 주어 명문이 되게 해준 사람을 존경해 이르는 말을 일자지사(一字之師), 팔자에 의해 운명적으로 겪는 바를 일컫는 말을 팔자소관(八字所關) 등에 쓰인다.
▶️ 塔(탑 탑)은 ❶형성문자로 嗒(탑), 墖(탑)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荅(답, 탑)으로 이루어졌다. 탑은 흙으로 만들므로 土(토)를 덧붙였다. ❷형성문자로 塔자는 '탑'이나 '층집', '사찰'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塔자는 土(흙 토)자와 荅(좀콩 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荅자는 '답→탑'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塔자는 사찰에 있는 탑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 부처님의 형상은 알려지지 않은 채 들어왔다. 그래서 열반하신 부처님의 사리를 탑에 봉안해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탑의 시초이다. 그러니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축조물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탑은 인도에 존재했던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유골을 매장한 무덤'이라는 뜻에서 스투파(stupa)라고 했는데, 塔자는 이 '스투파'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래서 塔(탑)은 (1)대개 절에 세워지는 부처의 유골(遺骨), 유품, 머리카락을 안치(安置)하고, 공양(供養)하기 위하여 세운, 좁고 높은 건축물(建築物). 목재(木材)나 석재(石材) 따위를 다듬어 만듦. 후에는 영지(靈地)임을 나타내거나 덕을 앙모하는 뜻으로 세워진 것들을 두루 일컫게 됨. 삼중탑(三重塔), 오중탑, 칠중탑 따위가 있음 (2)어떤 일을 선전(宣傳), 기념(紀念)하기 위하여 세워진 높고 좁은 부분. 공(功) 등의 뜻으로 ①탑(塔) ②층집 ③절, 사찰(寺刹) ④탑처럼 생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탑에 관한 기록을 탑지(塔誌), 탑의 등불을 탑등(塔燈), 동네 어귀에 세우거나 쌓아서 동네 수호신을 상징하는 돌탑이나 돌무더기를 탑신(塔神), 건물의 옥상에 돌출한 부분을 탑옥(塔屋), 뾰족탑에서 탑의 맨 위의 뾰족한 부분을 탑첨(塔尖), 탑이 우뚝 솟아 있는 모양을 탑세(塔勢), 탑의 맨 꼭대기를 탑정(塔頂), 탑처럼 생긴 모양을 탑형(塔型), 나무로 만든 탑을 목탑(木塔), 돌로 쌓은 탑을 석탑(石塔), 뾰족한 탑을 첨탑(尖塔), 절에 있는 탑을 사탑(寺塔), 절에 세운 탑으로 부처님의 유골 즉 사리를 모신 무덤을 불탑(佛塔), 귀한 보배로 장식한 탑 또는 미술적 가치가 많은 탑을 보탑(寶塔), 한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탑을 사탑(斜塔), 불경을 안에 넣고 쌓은 탑으로 경문을 새긴 탑을 경탑(經塔), 부처의 사리를 모셔 둔 탑을 골탑(骨塔), 다리의 입구나 다리의 기둥 위에 탑 또는 문같이 만든 구조물을 교탑(橋塔), 탑 모양으로 된 꼭대기에 등이 있는 높은 시설물을 등탑(燈塔), 달걀 모양의 탑이 있는 장소란 뜻에서 묘지를 이르는 말을 난탑장(卵塔場), 우골은 학비 마련을 위해 학부형이 내다 판 소의 유골의 뜻으로 학생의 등록비를 재원으로 하여 건물이 섰다 해서 대학을 빈정대어 이르는 말을 우골탑(牛骨塔), 이집트의 피라밋을 번역한 말로 그 모양이 金자와 비슷한 데서 온 말로 길이 후세에 전하여질 만한 가치가 있는 불멸의 업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금자탑(金字塔), 예술지상주의의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정적한 예술만을 즐기는 경지 또는 학자들의 현실 도피적이고 관념적인 학구 생활을 이르는 말을 상아탑(象牙塔)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