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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간신적자(奸臣賊子)

작성자장경식|작성시간18.01.31|조회수1,584 목록 댓글 0

 

간신적자(奸臣賊子)

 

간사한 신하와 부모를 거스르는 자식

 

: 간사할 간

: 신하 신

: 도둑 적

: 아들 자

 

[유의어]

난신적자(亂臣賊子)

무부무군(無父無君)

 

 

조선의 간신전 [1]

살아있는 정치가 낳은 사생아, 간신

 

누가 간신인가

바른 정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선을 풍미한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은 너나없이 간신과 충신의 구별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도전(鄭道傳)의 경제문감(經濟文鑑)에도,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도, 이이(李珥)의 성학집요(聖學輯要)에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조정 신하들이 왕에게 종종 올리는 정책 건의서인 시무책(時務策)도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에 반드시간신을 구별하라는 건의가 들어 있다. 그러면 왜 그토록 간신과 충신의 구별이 중요한가? 대체 누구를 간신이라 하는가?

 

간신이 중요한 이유는 전통 한국, 특히 조선의 정치체제가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였기 때문이다. 명목상 왕은 세상을 다 가지고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없다. 같은 군주라 해도 새로운 세금이라도 걷으려면 원로원이나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던 유럽의 왕들과는 다르다. 조선의 법령을 집대성했다는 경국대전(經國大典)도 사실 역대 임금이 내린 정책 결정을 편집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처럼 무한(無限) 권한을 가진 왕이었기에 그만큼 무한 책임을 져야 하기도 했다. 왕에게 모든 권한이 주어져 있는데 그 왕이 폭군이라도 되는 날에는?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다. 그래서 왕은 늘 성현의 말씀을 공부하고, 학식 높은 신하들과 토론해야 했으며, 사냥이나 여색, 기타 오락거리는 최소한으로 억제해야 했다.

 

왕이 나의 고유 권한을 내세우며 말을 듣지 않으면 어땠을까? 법적으로는 신하들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달랐다. 가볍게는 왕이 도무지 다른 업무를 볼 수 없을 만큼 줄기차게 상소를 올리고, 무겁게는 너도 나도 벼슬 자리를 내던지고 낙향했다. 그래도 안 되면 삐뚤어진 것을 바로잡는다(反正)는 이름을 내건 쿠데타가 터졌다. 무한권한이 곧 무한권력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조선의 왕권이 상대적으로 허약했다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그런데 왕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도 곁에서 모시는 신하가 사악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런 간사한 신하가 왕의 마음을 현혹하고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긴다면 왕은 폭군과 진배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왕은 스스로 인격 수양을 하고 유교적 성인군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한편 사악한 유혹자, 즉 간신을 주변에서 물리쳐야만 했다. 그러므로 간신을 구별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누가 간신일까? 간신이라고 머리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간신 스스로, 제가 바로 간신입니다라고 말할 리도 없고, 그래서 옛날 중국에서 쓰이던 변간법(辨姦法)이 유행하기도 했다. 육도(六韜)와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팔관법(八觀法)이 나와 있다.‘핵심을 찌르는 말로 그 덕을 살핀다, 돈을 다루는 일을 맡겨 그 청렴함을 살핀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을 쓰는지 살핀다, 실의나 좌절에 빠졌을 때 그의 지조를 살핀다등등이다.

 

또 한비자(韓非子)에는 관청법(觀聽法; 언행을 잘 보고 잘 들을 것), 도언법(倒言法; 말을 일부러 뒤집어 해서 반응을 살필 것), 반찰법(反察法; 그 행동의 동기를 뒤집어 생각해 볼 것) 등 다섯 가지 찰간술(察奸術)이 적혀 있다.

 

그런데 이런 변간법들은 모호한 구석이 있는 데다 기본적으로 도덕보다는 술수를 앞세우는 법가(法家)의 산물이라 해서 진지한 유학자들은 즐겨 쓰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간신과 충신을 구별하기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간신의 객관적 기준이 딱히 없다 보니, 결국 개인적 원한이 있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간신이라고 모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다. 그러면 당하는 쪽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저놈이 진짜 간신이라고 되받아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런 성향은 더 심해지고, 조직화되어 마침내 당쟁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남인이 집권했을 때는 서인이 통째로 간신배가 되었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 이번에는 남인이 남김없이 간신 소리를 들을 차례였다.

 

그러면 이처럼 간신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평범한 사람도 자칫 잘못하면 간신으로 몰려 벼슬을 잃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었으니, 조선조에는 진짜 간신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한명회(韓明澮), 유자광(柳子光), 임사홍(任士洪), 남곤(南袞), 김안로(金安老), 윤원형(尹元衡) 등등 조선왕조 500년은 어떻게 보면 간신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물급 간신들이 잇따라 나타나고, 그 간신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굽이쳐 온 시대였다.

 

왜 그랬을까? 우선 정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병이 들거나 털갈이를 하거나 하면서 생체 메커니즘이 평소와 달라질 때가 있듯 왕조국가의 메커니즘도 특수해질 때가 있다. 코흘리개가 새로 임금이 되거나, 정변을 통해 임금이 바뀌거나 해서 누군가 새 임금을 밀착 보호하고 보좌해 줄 사람이 필요해지는 때가 그렇다. 한편으로 워낙 간신을 죄악시하는 정치문화다 보니 정쟁에서 패배한 쪽에 간신이라는 낙인을 찍고 그 과정에서 역사에 간신으로 남는 사람이 많아지기도 한다.

 

그러면 지금, 왕조국가가 아닌 현대 민주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믿거나 말거나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원칙은 다르지만 사람 사는 사회, 사람이 만든 조직은 한결같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특정 정치인이나 회사 동료를 손가락질하며저 인간은 영락없이 간신배야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에게 큰 권한이 주어지고, 그 사람에게 빌붙어 실력보다는 간사한 술수와 아첨으로 이익을 챙기려 한다면 그는 현대판 간신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우리 조상이 발견했던 진리, 즉 제도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진리를 되새기게 한다. 물론 사람됨에 너무 치중하여 제도적인 틀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오늘도 우리 주변의 간신을, 또한 우리 가슴속에 숨은 간신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과거의 간신들 이야기를 읽어 보아야 한다.

 

 

조선의 간신전 [2]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

 

간신은 어떻게 출세하나

~왱~ 날아 다니는 날파리 하나, 어딜봐도 영 변변찮다. 그러나 어쩌다 앉은 곳이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千里馬)의 꼬리였다. 잠시 뒤히히힝하면서 기운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가는 천리마! 덕분에 파리도 말꼬리에 붙어 함께 천리를 갔다.

 

자기 스스로는 대단치 않지만 어쩌다 대단한 인물과 인연을 맺어 덩달아 출세한 사람을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라고 한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을 따랐던 공신들을 두고 이 말을 써먹었다.

 

유방(劉邦) 스스로도 젊은 시절에는 매일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건달이었지만, 그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운 공신들도 출신이 영 시원찮았다. 시골의 말단 관리(소하), 마부(하후영), 비단장수(관영), 개백정(번쾌), 날라리 백수(한신)...

 

이들이 우연히 유방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언감생심 한 나라의 승상이나 장군이 되고 역사책에까지 이름을 남길 깜냥이었겠는가. 아니, 당시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의 난세만 아니었어도 아마 유방 본인조차 그냥저냥 하류 인생을 살다 마쳤으리라.

 

한국사에서도 세상이 어지러울 때 천리마 꼬리의 파리처럼 졸지에 이름을 날리고 고관대작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령 수양대군, 즉 세조를 도왔던 한명회, 홍윤성, 양정 등이다. 한명회의 경우 사극에서는 제갈공명처럼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그려진다. 한명회가 짜낸 꾀로 세조가 김종서도 없애고, 안평대군도 물리치고 마침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한명회는 제법 괜찮은 집안 출신이지만, 글공부 재주는 없어 과거만 보면 번번이 낙방했다. 그래서 연줄로 얻은 궁궐지기라는 따분한 직책은 이름만 걸어 두고, 허구한 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쌈박질이나 즐기곤 했다. 그래도 리더십과 용기는 남달랐던지 왈짜패의 큰형님 노릇을 톡톡히 했던것 같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소개받았을 때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기개가 뛰어난 사람이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수양대군은 그렇게 기개가 뛰어난 골목대장이 아쉬웠다.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려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무력이 꼭 필요한데, 그에게 공식 병권은 없고 사병(私兵)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 곤란했다. 그래서 한명회가 한양 바닥에서 힘깨나 쓴다는 어깨들을 모아다 주니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수양대군은 마침내 이들을 이끌고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때려죽이고는 실권을 잡으니,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이다. 하늘 천() 따 지()도 모르던 사람들, 어제까지 시장통에서 주먹질이나 일삼던 사람들이 우르르 정난공신(定難功臣)의 이름을 얻고 벼슬 자리를 받았다.

 

이보다는 출신이 나은 편이지만, 역시 평소라면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했을 2, 3류 인사들이 하루아침에 정승, 판서를 꿰차고 앉은 예도 있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이다. 여기 참여한 반정공신 중에서 김류(金瑬), 이귀(李龜), 최명길(崔鳴吉)은 그럭저럭 얼굴이 섰지만,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등은 가문으로나 재능으로나 요즘 말로 듣보잡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 수 있었던 까닭은 거물부터 차례차례 찍어내 버리는 당쟁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직전부터 불이 제대로 붙은 당쟁은 전쟁보다 훨씬 길게 끌었다. 마침내 정인홍(鄭仁弘), 유희분(柳希奮) 등의 북인(北人)이 승리하여 북인 독재정권을 꾸미니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등 서인과 남인의 인물들은 그 통에 죽거나 귀양 가 버리고 일을 꾸밀 사람은 2류 아니면 3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북인의 후원자였던 광해군조차 노성(老成)한 신하들은 모조리 조정에서 내쫓고, 뭣도 모르면서 목소리만 큰 사람들만 남겼으니 나랏일을 의논하려 해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을까. 결국 북인조차 인조반정으로 내몰리고 나니 가뜩이나 부실한 정부의 업무 능력은 더욱 한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조선이 병자호란(丙子胡亂)에서 그토록 어이없이 쓰러진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세에 영웅이 난다던가? 또 고인 물은 썩는다던가? 과거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태평천하가 계속되다 보면 부와 권력이 소수 문벌에 집중된다. 재능 있는 사람도 집안이 딸리면 기를 못 펴게 된다. 또한 자유로운 발상, 창조적 파괴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화되고 만다. 그래서 이따금 난세를 틈타 천리마가 기운차게 달려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꼬리에 듣보잡 파리가 몇 마리 붙어 갈지라도.

 

그런데 한왕조의 통일은 중국의 부흥을 가져온 성공적 프로젝트였다고 하는 반면, 계유정난이나 인조반정은 별로 좋은 말을 못 듣는다. 그 주역들도 평가가 엇갈린다. 왜 그럴까? 우선 한고조 유방은 천하통일 후 대부분의 공신을 숙청해 자신이 죽은 뒤 그들이 날뛸 근거를 없앴다.

 

반면 세조(世祖)는 사육신 사건 이후 한명회 등 정난공신에게 더욱 의지했으며, 엉겁결에 왕이 된 인조(仁祖) 역시 끝까지 공신들을 두둔했다. 공신들 스스로도, 이를테면 한명회나 김자점 등은 용케 얻은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꿔 보자,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자는 등의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 튼튼히 하려고 암투를 벌였으며, 권력의 맛에 취해 사치와 방탕에 빠졌을 뿐.

 

그래서 역사는 그들을 혁명가라 부르지 않고, 간신(奸臣)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물갈이는 필요하다. 그러나 바뀐 물이 단지 개인의 욕망에만 급급하다면 기대는 환멸로 바뀐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밀려나고야 만다. 간신은 정규 코스와 달리 출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권력을 어떻게 잡았느냐가 아니라 권력을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간신 여부가 결정된다.

 

요즘 신문 보기가 편하지 않다.‘설마 했는데, 이럴 줄이야소리가 나오는 기사가 매번 실려 있기 때문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만 털어 보니 재채기가 날 정도로 먼지가 휘날리는 옛 권력자의 측근들, 그들도 천리마 꼬리에 붙어 파란 지붕 집까지 뛰어들었던 파리였을까.

 

간신을 경계하면서도 어느 틈에 간신을 양산했던 조선 사람들. 기성 정치인에 실망해 부패 척결을 부르짖는 참신한 인물을 뽑아 주고, 또 실망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러는 우리를 보면 그들은 뭐라 할까.

 

 

조선의 간신전 [3]

바짓가랑이보다 치맛자락을 잡아라

 

군주가 외척(外戚)을 가까이하고 신임하면 반드시 권력을 위임하게 되고, 외척이 권력을 가지면 반드시 은총을 믿고 공의와 어긋나는 짓을 합니다.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을 쓰고 의견이 다른 사람을 쫓아내며,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므로 아무도 그 뜻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실권이 은밀히 그에게 옮겨져도 군주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미 재화(災禍)가 일어난 뒤에는 깨달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고금의 공통된 걱정입니다. ()

 

연산군 8(1502) 12, 아직 건실한 청년 군주였던 연산군이 경연 자리에서 외척을 기용하는 폐단을 묻자 영사(領事) 이극균(李克均)이 대답한 말이다. 외척이란 대비, 왕비, 세자빈의 친정 식구들, 즉 왕의 처가 사람들이다. 이극균의 고금의 공통된 걱정이라는 말마따나 중국이든 조선이든 유교가 정치의 중심 이념이던 곳에서는 항상 외척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 간신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 못지않게 나돌았다.

 

그러면 왜 외척이 그토록 문제인가? 먼저 왕의 입장에서 외척은 편하다. 누구나 엄마 손잡고 외갓집에 가면우리 강아지 왔구나하며 맛있는 것도 주고 용돈도 쥐여 주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기억이 있으리라. 왕의 경우에는 특별히 더 편할 수밖에 없다. 친가 쪽 사람들, 즉 왕실 어르신과 달리 그들은 아랫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왕(父王)이나 대비(大妃)는 자식으로서의 효()와 신하로서의 충()을 바쳐야 하는 어려운 대상이지만, 외척은 인간적으로나 서열로나 편하게 대해도 좋다. 더구나 세자나 왕자는 궁궐 밖에서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주로 머무는 곳이 외갓집이었다.

 

자연히 인간적인 정이 새록새록 쌓인다. 왕실 어른들이나 신하들과는 감히 의논하지 못할 일도 의논할 수 있게 된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비행을 도운 사람도 장인인 김한로(金漢老)였고, 홍봉한(洪鳳漢)은 사위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고민을 들어 주는 유일한 상대였다.

 

그렇게 외척, 특히 국구(國舅; 왕의 장인)에 대한 왕의 신임이 두텁다 보니 그토록 외척을 경계하는 말이 많았음에도 조선 후기에는 국구가 영의정이나 호위대장이 되어 사위인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나중에는 패턴이 되면서 하나의 가문에서 계속해 왕비를 배출하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움켜잡았으니, 조선 말기의 세도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또 신하의 입장에서 외척은 특별한 존재다. 왕의 신임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신하들은 집무 시간이 끝나면 모두 퇴궐해야 하지만 외척은 왕의 곁에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심복(心腹)을 남겨 놓는다. 자신의 딸이거나 누이인 왕비를! 그러므로 왕비를 통해 왕을 움직이거나, 궁궐 깊숙한 곳에서 뭔가 일을 꾸미거나 할 수 있다. 만약 왕의 나이가 어려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대비와 연결된 외척의 손에 국권이 통째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러다 보니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처럼 어쩌다가 줄을 잘 서서 입신출세한 간신들도 외척이 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공신 또는 총신으로서 왕의 총애는 잠깐일 수 있다. 더구나 왕이 죽고 나면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연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권력을 대대로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외척이 되어야 했다.

 

이 점에서 가장 성공했던 사람은 한명회였다. 그는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에게는 줄을 대지 못했는데, 그가 다행히도 일찍 병사(病死)했다. 그 다음으로 세자가 된 사람은 예종(睿宗)이다. 한명회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여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 몇 달 만에 병사하고 만다. 예종은 세조를 이어 왕이 되더니, 새로 중전을 얻어서 그런지 한때의 장인에게 자못 까칠했다. 이대로라면 한명회의 하늘을 찌를 듯하던 세도(勢道)도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예종 역시 1년여 만에 숨을 거둔다.

 

그 다음 왕이 될 사람으로는 예종의 원자가 적합했지만, 한명회는 죽은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아들, 그것도 맏아들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아니라 둘째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왕위에 앉혔다(성종이다). 누가 봐도 자을산군에게 자신의 막내딸을 시집 보냈다는 점이 이유였다. 이렇게 한명회는 조선왕조에 둘도 없는 국구(國舅) 두번을 하면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한명회보다 더 운이 좋았던 사람은 윤원형(尹元衡)이었다. 그는 누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중종의 왕비가 되면서 일약 나는 새도 떨어뜨릴 세도를 쥐었다. 사실 문정왕후의 차례는 오지 않을 뻔했다. 중종(中宗)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 하여 폐출되었고, 두 번째로 얻은 장경왕후(章敬王后)는 후일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죽었기에 세 번째로 맞아들인 사람이 문정왕후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운이 좋았다고 할까. 게다가 중종이 죽고 대를 이은 인종마저 1년을 못 넘기고 죽은 후 보위에 오른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明宗)은 겨우 열두 살이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은 윤원형의, 윤원형에 의한, 윤원형을 위한 조선이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 이후도 준비했다고 한다. 명종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세자빈으로 그의 먼 친척인 소녀를 들여보냈는데, 혼약을 맺고 보니 중병 환자였던 것이다. 이를 숨기고 억지로 국구가 되려 했다고 윤원형에 대한 손가락질이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어차피 순회세자도 얼마 못 살고 죽었으니 노상 운이 좋던 윤원형으로서는 마지막엔 똥패를 쥔 셈이었지만.

 

그처럼 외척이 되어 미래의 권력을 보장받으려다 실패한 경우가 또 있다. 정조 즉위 후 4년 동안 왕의 오른팔로 활약했던 홍국영(洪國榮)이다. 그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영의정도 우습게 여기는 몸이 되고 보니 언제까지나 이 권력을 맛볼 수 있을지 한편으로 걱정이었다. 그래서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앉혔는데, 빨리 후사를 보아야 하건만 중전에게 태기가 없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중전이 아직 젊은 데다 누이동생 원빈은 겨우 열세 살이어서 후사 어쩌고 할 깜냥이 아닌지라 누가 봐도 가소로웠다. 그런데 이렇게 미래의 꿈을 걸었던 누이가 몇 달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미칠 것처럼 된 홍국영은 중전이 손을 쓴 게 아니냐며 중궁전 나인을 직접 문초하는 등 도에 지나친 행동을 했고, 이 때문에 결국 권력을 잃게 된다.

 

정치란 늘 공명정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늘 그러기가 힘든 법이다. 현실정치가 살벌하거나 답답할수록 편하고 비공식적인 관계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최고권력자가 지나치게 그러다 보면 권력이 왜곡되며, 간신이 날뛸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조선의 간신전 [4]

충신 죽이기

 

군사정권 시절, 찔러바이트라는 말이 나돈 적이 있다. 당시 경찰과 정보부의 수사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활동하는 대학생 시위주동자들의 거처를 넌지시 찔러 주고, 대가로 현상금을 챙기는 아르바이트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법정 현상금은 아니다.

 

또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찔러바이트를 했다는 학생을 보지는 못했으니, 정말로 학우를 돈 몇 푼에 팔아 넘긴 학생들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우정과 양심을 파는 값이 과연 얼마면 되었는지 알 길이 막연하다.

 

그런데 조선의 간신들은 이 찔러바이트가 장기였다. 사극을 보면 곧잘 나온다. 쥐 같은 눈에 염소수염을 기른 늙은 대신들이 뭔가 속닥속닥하며 청렴결백한 충신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 장면이.

 

세월이 지나고 권력이 바뀌며 다소 과장이나 윤색된 점이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의 간신들은 실제로 누군가를 모해함으로써 라이벌을 제거하고, 스스로의 몸값을 높이는 일석이조의 술수를 곧잘 부렸다.

 

유명한 예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김질(金礩)일 것이다. 명문의 후예이자 글 잘 하는 선비로 이름이 높았던 김질은 세조의 즉위 후, 친구였던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변심하고 장인인 우찬성 정창손(鄭昌孫)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정창손은 김질과 나란히 세조에게 역모(逆謀)를 고하였다.

 

이 일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이 비명에 갔으며 이후 세조는 집현전을 혁파하고 한명회, 홍윤성 등 훈구공신들 위주의 정치를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친구이자 동지를 판 김질도 그 공신의 대열에 끼어, 23년간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며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고, 좌익공신과 좌리공신에 제수되었다.

 

김질은 한 차례 양심을 팔아서 출세한 경우지만, 이를 상습화해서 밀고 전문가가 된 사람으로 유자광(柳子光)이 있다. 그에게는 두 가지 불만이 있었다. 서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며, 내로라하는 주먹꾼이었음에도 계유정난의 주역들보다 조금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공신 대열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둘째였다.

 

다행히 그의 남다른 무재(武才)가 세조(世祖)의 눈에 띄어 특별히 벼슬길에 올랐지만, 기본적으로 문()을 무()보다 앞세우고 출신 성분을 따지는 조선 사회에서 유자광은 늘 주변인이었다.

 

유자광은 예종 즉위년에 당시 떠오르는 별이던 남이를 역모로 엮음으로써 화려한 출세의 꿈을 되살렸다. 남이(南怡)는 구성군(龜城郡) 이준(李浚), 강순(康純) 등과 함께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삼십도 못 된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그러나 옛 공신세력인 한명회, 신숙주 등의 견제를 받아 한직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자 울적한 마음을 유자광과 술을 마시며 토로했는데, 이것을 기초로 남이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한 것이다. 천금 같은 기회를 잡은 한명회 등은 남이뿐 아니라 구성군과 강순 등까지 라이벌 세력을 일거에 쓸어버린다. 이 공로로 유자광도 익대공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2프로 부족했다. 공신의 명호와 봉록은 얻었지만 염원하던 고위 관직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유자광이 서자(庶子)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으리라. 울분을 삼키던 그는 연산군대에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킴으로써 다시 한번 밀고의 힘으로 출세하려 한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쓰던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로 세조를 에둘러 비난했음을 사초(史草)에 적자, 그냥 덮어두자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끝내 들춰내어 일대 피바람이 불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로써 유자광은 연산군의 호감을 샀으며, 연산군 말기의 폭정 속에서도 유유히 지냈는데 마지막으로 연산군에서 중종으로 말을 갈아타려다 그를 혐오하고 있던 젊은 선비들의 집중 탄핵을 받고 야망과 배신으로 점철된 일생을 끝낸다.

 

유자광은 이 대표적인 밀고 외에도 항상 누군가를 비판하고 잘못을 들춰내는 상소로 조정을 시끄럽게 했다. 어쩌면 그의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살릴 기회를 주지 않고 출신만 보고 따돌렸던 당시의 사회도 잘못이었겠지만, 유자광의 처세술에 본받을 점은 찾기 힘들 것이다.

 

유자광이 밀고 전문가라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 플레이로 일관했다. 반면 하나의 조직, 또는 시스템을 정쟁과 누명 씌우기의 도구로 사용한 사람이 있었다. 광해군대의 이이첨(李爾瞻)이다. 그는 서자는 아니었어도 유자광만큼 출신이 보잘것없었는데, 세자 시절 친했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고개를 쳐들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동인(東人), 서인(西人)의 붕당이 다시 북인(北人), 남인(南人)으로 또 대북(大北), 소북(小北)으로 연쇄 분열하면서 당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던 때였다. 이이첨의 진가는 여기서 발휘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사헌부(司憲府)와 왕에게 간쟁하는 사간원(司諫院)을 오가며 반대 당파 사람들에게 독화살 같은 비난을 쏘아댔다. 거지반 그의 힘으로 앞서 광해군의 세자 폐위를 거론했던 유영경(柳永慶)이 쓰러지자, 이이첨은 정운공신(定運功臣)이 되었다.

 

그 다음은 광해군의 친형이면서 정치적 경쟁자였던 임해군(臨海君), 그를 역모로 몰아 귀양 보내고 결국 죽인 대가로 익사공신(翼社功臣)의 자리를 챙겼다. 그리고 4년 만에 또다시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死). 사소한 공문 위조 사건을 역모 사건으로 뻥튀기해 낸 이이첨의 천재적 재능이 한껏 발휘되고, 왕의 조카 진릉군의 목을 제물로 다시 형난공신(亨難功臣)으로!

 

다시 1년 뒤에는 칠서(七庶)의 옥(), 이것으로 왕의 장인인 김제남(金悌南)이 처형되고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은 의문사하며, 결국 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까지 유폐되고, 반대당의 영수인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등도 제거됨으로써 이이첨은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다.

 

실로 노리고, 때리고, 꾸미는 재주만으로 이룩한 위업(偉業)이었으며, 또한 그 재주를 혼자 힘으로만이 아니라 조직 감찰 시스템을 최대한 사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달성한 목표였다. 이이첨이 이렇게 언론, 감찰 기구의 명색을 버려 놨는지라 조선 후기의 뜻 있는 학자들은 언론기관 폐지 또는 축소론을 거듭 제기하고는 했다.

 

하지만 결국 죄는 죄대로 가는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왕권을 노리는 불측한 무리들을 모조리 제거해 주었으니 고마워도 할 법하지만, 광해군은 허구한 날 남의 잘못만 캐고 음모만 꾸미는 이이첨에게 질려버렸다. 그래서 정작 진짜로 역모가, 즉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는이이첨이 또 뭔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군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무하게 왕위를 잃었고, 이이첨 역시 고생해서 얻은 지위와 영화를 하루 아침에 잃고 저잣거리에서 사지(四肢)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적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전쟁이 아니다. 나와 경쟁하고 있는 상대도 적은 아니다. 남의 뒤통수를 쳐서 일시적으로 승리자의 기쁨을 만끽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희생자의, 주변 사람의, 그리고 나 자신의 양심의 비난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 비난은 불안을 빚고, 불안은 또 다른 음모를 부른다. 정도(正道)는 가장 느려 보여도, 결국 가장 빠른 길이 된다.

 

 

조선의 간신전 [5]

변신의 귀재들

 

제때에 말 갈아타야 살아남는다

간신이 대를 이어 살아남는 법은 왕실의 외척이 되는 것이었다고 앞서 말했다. 한명회도, 윤원형도, 정후겸도, 민겸호도 내명부에 우군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 동안은 하늘 높이 널을 뛰었고, 그 끈이 떨어지자 곧바로 추락했다.

 

하지만 아무나 치맛자락을 잘 잡아서 외척이 될 수는 없는 법.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처럼 운을 잘 타서 출세했어도 그 천리마가 힘이 다한 듯싶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간신짓을 해서 온갖 원성을 다 들었으니 오죽 불안하겠는가. 외척이라는 부귀와 생명 연장의 줄을 잡지 못한 간신들은 결국 모험을 했다. 이 말에서 저 말로, 제때에 건너뛰기!

 

자칫 일찍 건너뛰거나 잘못 건너뛰면 아직 죽지 않은 권력에 보복당하거나, 새로운 권력에 된서리를 맞을 터. 실로 남사당패와도 같은 재주가 있어야 가능한 모험이었다. 지조? 그런 것은 필요 없고.

 

개인적 능력은 뛰어나면서도 천한 출신 때문에 늘 권력의 주변에서만 맴돌아야 했던 유자광은 세조에서 예종, 성종을 거치며 거침없는 입바른 소리로 번번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늘 남의 흠만 잡고, 화합보다 분열을 일삼는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달리 보면 권력이 정체되지 않게 계속 자극을 주는 일종의 악역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남이(南怡)의 옥사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 벌인 일도 워낙 입이 험한 사람이라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을 적당히 덮어둘 줄 몰랐다는 식의 변명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연산군에서 중종으로 말을 갈아탄 일은 결국 그의 평판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렸다. 연산군에게 밥상을 직접 들어다 바치며 아부했던 유자광, 중종반정이 있기 한 달 전만 해도 인정전 앞뜰에서 다른 중신들과 함께 머리를 조아리며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던 유자광이 박원종, 성희안 등과 작당해 임금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 덕에 반정공신 제1등에 버젓이 이름을 올리자, 이건 참다 참다 못 참겠다는 소리가 소장파들 중심으로 높아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반정 동지들도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을라는 생각에서 유자광을 외면, 그는 유배지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치고야 만다.

 

또 다른 반정의 주역인 김자점은 유자광보다 훨씬 변신에 능했다. 광해군을 섬기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것은 그래도 폭군을 제거한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병자호란 때 왕이 남한산성에서 절망적인 농성을 하고 있는데도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구원하기에는 병력이 충분치 않다는 변명만 늘어놓으며.

 

이쯤 되면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이후 그는 첫 번째로 처형당해 마땅했지만, 약간의 처벌만 받고는 곧바로 전보다 더한 세도를 누린다. 청나라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본래 청나라를 앞장서서 막아야 할 책임자였던 그가 대표적인 친청파로 변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가 조선을 대하는 태도가 누그러지자 김자점은 더 이상 북쪽만 보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조선 조정의 권력에 몸을 붙들어 매야 했다. 그래서 처음 그가 택한 기둥은 소현세자(昭顯世子)였다.

 

치욕적인 전쟁으로 인조는 이미 민심을 잃었고, 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 그러면 장차 돌아올 때 부왕 대신 곤욕을 치렀다는 점에서 조선에서는 존경을 받을 것이고, 청나라에서도 인조보다는 더 신뢰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인조를 버리고 소현을 택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변신일 성싶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볼모생활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상황이 변했다. 예상과는 달리 세자는 청나라와 조선 조정 사이에 끼어 양쪽에서 불신을 받았던 것이다. 김자점은 다시 생각을 바꾸고, 이번에는 인조의 심복을 자처했다. 정치적으로 불리했던 인조는 그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귀국했을 때 그를 냉대하고, 세자의 죽음 뒤 남겨진 세자빈(강빈)과 아이들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이는 과정에서 김자점을 앞세웠다. 떳떳지 못한 일을 맡은 대가로 신임을 얻은 김자점은 후계자로 봉림대군을 세우는 일에도 관여함으로써 인조 이후의 보장까지 얻은 듯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북벌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던 효종(孝宗)은 간에 붙고 쓸개에 붙어 영화를 누려온 그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삭탈관직(削奪官職)에 이어 귀양에 처해진 김자점은 마지막 변신을 시도했다. 청나라에 효종의 불온함을 고해 바쳐 제2의 병자호란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좌절되고, 결국 그의 목숨만 재촉했다.

 

조선의 마지막 시기, 세상이 어지럽고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김자점 이상으로 화려한 변신의 귀재가 나타났다. 바로 이완용(李完用)이었다. 그는 골수 친일파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의 숨통을 끊은 대가로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한일병합 이전에 그는 친청파,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으며 친일파로 지낸 것은 25년의 공직 생활 중 5(1905년에서 1910년까지)에 불과했다.

 

친러파의 일원일 때는 친일파 관료들을 숙청하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 그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세라 보고 일본 측에 붙었을 때, 어떻게 신뢰받을 수 있었을까? 김자점이 궂은 일을 떠맡아 인조의 신임을 얻은 것과 같았다. 을사늑약, 한일신협약, 고종 퇴위,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 군주와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는 무시무시한 일에 태연하게 총대를 메었던 것이다.

 

유자광이나 김자점과 달리 이완용은 끝까지 별 탈 없이 살다가 갔다. 그의 남은 수명보다 일제의 지배가 오래갔기 때문이지만, 매국노 중 매국노인 그를 앞에 세움으로써 조선 민중의 분노가 총독부보다는 이완용에게 먼저 주어지게 한다는 계략의 결과이기도 했다. 원칙도 지조도 없이 남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사람은, 자신도 끝까지 이용당한다.

 

정치는 생물이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죽는다. 간신들만큼 이를 더 잘 이해하고 활용한 정치인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에는 최소한의 원칙이라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당장 손해를 보면서도 우직하게 자기 원칙을 지켜 나가는 사람이 결국 민심을 얻고, 승리한다. 살아서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역사 속에서는.

 

 

조선의 간신전 [6]

이용하되 믿지 않는 용인술

 

어제의 동지, 오늘의 쓰레기

간신이란 임금에게 늘나만 바라봐라는 메시지를 주는 사람이다. 자기 목소리를 들어주고 신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야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간신은 정도와 원칙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임금의 신뢰를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그리고 사적인 이해관계를 공적(公的)의 대의명분과 헷갈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함이든 당쟁이든 암살이든 있는 대로 동원하여 조정 안에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못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일인자의 눈과 귀를 가려서 잘못된 신뢰를 이끌어 내고도, 간신은 정작 자기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신뢰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함께 거사를 치른 동지나 자신에게 충성을 다 바친 부하라 해도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 싶으면, 또는 너무 커졌다 싶으면 가차없이 배신하고 외면하는 것이 간신의 속성이다.

 

중종 시절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안로(金安老)는 본래 행동하는 양심의 대표였다. 그는 훈구공신의 자제였지만 기묘사화에서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젊은 선비들이 많이 희생될 때 얼결에 연루돼 유배되었다 풀려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이 경력을 한껏 미화하는 한편, 기묘사화의 원흉인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을 몰아내야 한다고 나섬으로써 조광조(趙光祖)의 복권을 염원하던 젊은 개혁파 선비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김안로의 진심은 당시 남곤, 심정 등의 세력이 쇠퇴하고 있고 언론기관에 있는 젊은 선비들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음을 알고, 언론의 힘을 자기 힘처럼 이용해 정적을 제거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심정 등이 몰락한 뒤로는 태도를 바꾸어 조광조를 따르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으며,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두둔했던 정광필(鄭光弼)이나 대표적인 조광조 복권파였던 홍언필(洪彦弼), 홍섬(洪暹) 등을 모함해 유배를 보내버린다.

 

신진사류의 힘을 빌려 구 공신세력을 무너뜨리고, 다시 신진사류마저 억제한 김안로는 바야흐로 조정이 외척세력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파악했다. 스스로도 부마의 아버지로서 외척 축에 들었지만 급이 높은 외척은 못 되었던 그는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중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안로의 선택은 죽은 장경왕후의 오빠인 대윤의 윤임이었다. 며느리가 되는 효혜공주가 장경왕후의 딸이며, 형인 김안세의 딸이 윤임의 첩이 되었기에 친인척 관계가 있었던 데다 아직 풋내기 문관인 윤원형(현 왕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은 오랫동안 병권을 잡아온 윤임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진사류를 이용하고 버렸던 김안로도 끝내는 윤임에게 이용당하고 만다. 윤임과 김안로는 은밀히 문정왕후를 없애거나 폐위시킬 음모를 꾸몄고, 그 과정에서 김안로가 주도해 작서(灼鼠)의 변()이라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사건의 후유증이 크자 윤임이 김안로를 잘라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윤원형의 친형이면서 윤임과 통하고 있었던 윤원로가 김안로의 여러 비리를 고발하고, 윤임이 조종하는 신료들이 일제히 김안로 탄핵을 외침으로써 김안로의 세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윤임의 실수였던 것 같다. 김안로의 공백을 틈타 소윤이 빠르게 약진했기 때문이다. 중종이 승하하고 장경왕후의 소생인 인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윤씨들의 싸움은 대윤의 승리로 끝나려나도 싶었으나, 인종이 1년도 못 되어 승하하자 윤임은 역모 혐의로 몰려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 이제야말로 윤원형의 세상이었다.

 

윤원형은 기묘사화에서 을사사화에 이르기까지 한때의 동지가 서로를 배신하고 죽이는 과정을 물릴 만큼 보았다. 그래서 그 자신은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한때의 심복도 언젠가 힘을 기르면 자기 손을 물어뜯을 거라고 의심해 실컷 이용한 뒤 일찌감치 없애곤 했다.

 

처음에는 이기와 힘을 합쳤다가 얼마 후 이기를 탄핵해서 밀어내고, 그 이기 탄핵의 선봉장이었던 구수담을 얼마 뒤에 또 진복창을 내세워 제거했으며, 다시 적당한 때에 진복창을 찍어내 버렸다. 이런 식으로 한때의 우군까지 포함해 조정에서 제법 힘깨나 쓸 만한 사람은 모조리 제거하고는, 아첨과 잡일밖에 모르는 잔챙이들로 조정을 채워서 독재체제로 끌고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거칠 것이 없던 윤원형의 세도도 20년 만에 급작스레 무너졌다. 문정왕후가 승하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모후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숨도 못 쉬던 명종이 비로소 기지개를 켜자, 이젠 윤원형이라는 천리마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 싶은 날파리들은 윤원형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죽어가야 했다.

 

수십 년 뒤, 광해군(光海君)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이첨은 김안로나 윤원형에 비해 청렴하고 성실했다. 또한 정인홍, 허균 등 그와 뜻을 같이했던 대북 일파는 주자학의 공리공론(空理空論)적 면에 비판적이었으며 체제개혁적인 면마저 갖추어, 그들을 패역무도한 간신들로 폄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역사적 평가가 곧잘 제기된다.

 

그러나 1618, 이이첨이 허균(許筠)을 역모로 몰아 죽임으로써 그런 재조명은 난처하게 된다. 허균은 청년 시절부터 이이첨과 어울렸으며 그를 친형처럼 따랐다. 서인, 남인들과의 권력투쟁 때 일치단결해 싸워온 동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허균의 딸이 세자전에 들어감에 따라 그의 권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이이첨이 그를 어이없이 배신했던 것이다.

 

형행의 관행도 무시하고 피의자에게 소명할 기회조차 안 주었던 억지 역모, 사법 살인이었다. 이것으로 대북파 중에서 적어도 이이첨만은 간신의 오명을 벗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한 신뢰를 접었으며, 그중에는 왕인 광해군도 있었다. 광해군과 이이첨이 서로 불신하지 않았다면 인조반정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은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주식 투자를 할 때도 물건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미련없이 팔아 버려야 현명한 투자자 소리를 듣지 않던가. 그러나 사람은 주식과 같은 물건이 아니다. 자기를 믿었던 사람, 한편이었던 사람을 버리는 일은 그 사람에게서나 주위 사람들에게서나 불신과 증오를 일으킨다.

 

약게 군답시고 한때의 동지들을 쳐내버렸던 김안로, 윤임, 윤원형, 이이첨의 마지막은 어떠했던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눈을 떼고 오늘날의 신문을 뒤적여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간에 붙고 쓸개에 붙는 일이 과거에만 있었을까.

 

 

조선의 간신전 [7]

나라를 망치는 방식 1

 

조선시대 정치론에서 가장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간신. 그러나 정치는 생물이기에 언제고 발톱을 드러내고야 말았던 간신.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나라에 얼마나 해를 끼쳤을까?

 

흔히 기생충이라고 부르는 생물군이 있다.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며 다른 생물체의 힘을 빌려 살아가지만, 그 생물에게 공생의 대가는 전혀 주지 않고 오직 빼앗기만 한다. 많은 경우 이런 기생충은 기생하는 생물체의 생체 회로를 멋대로 왜곡해 자신을 위한 회로로 만들어 버리며, 그리하여 영양실조나 질병, 장애를 일으킨다.

 

간신이 나라를 망치는 방식은 바로 기생충과 같다.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국법에 따라 정해진 제도의 기능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하거나 변형시킨다. 한명회의 경우를 보자. 그는 세조의 쿠데타를 거든 덕으로 공신이 됐다. 한동안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일을 맡다가 이조나 예조에 잠시 있었는데, 별로 성과를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병조에 들어간 이후로는 실력을 발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누비고 다니며 국방 부문에서 기대 이상의 공을 세웠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가 점점 병조를 자신의 막부(幕府)처럼 바꾸어 갔다는 점이었다. 병조판서는 무관의 인사를 담당하기 때문에 이조판서와 더불어 가장 관심이 집중되는 요직이었다. 그런데 한명회는 자신의 권력과 술수를 이용해 병조에서 이조의 인사행정까지 전담하게끔 해버렸다. 한명회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면서도 병조판서의 자리는 그대로 겸임함으로써 10년이 넘도록 한 국가의 군사력과 인사행정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무력과 인사권, 이 이상의 권력이 있을까?

 

이렇게 되니 자연히 그의 집 앞에는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겠다고 금은보화를 싸 들고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실록은 당시의 한명회를 두고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 등의 뇌물이 잇따랐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그 호부(豪富)함이 일시에 떨쳤다고 적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과거제도 그 빛을 많이 잃었고, 한명회와 연줄이 있거나 뇌물의 대가로 벼슬을 얻는 경우가 정식으로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르는 경우를 압도할 정도였다. 고려시대 말 권문세족 체제가 조선시대에 재현되었다고 할까.

 

윤원형은 한명회처럼 제도 자체를 노골적으로 왜곡하지는 않았지만, 권력의 사유화와 부패는 한명회의 수준을 뛰어넘어 조선왕조 500년에 단연 으뜸이었다. 위로는 누이 문정왕후의 위세에 기대고, 아래로는 을사사화를 비롯한 숙청으로 경쟁세력을 일소하고 조정을 자신의 심복으로 채운 윤원형은 굳이 제도를 바꿀 필요도 느끼지 않을 만큼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한명회처럼 벼슬을 돈 받고 파는 일은 기본이었고, 국가 소유의 땅을 멋대로 점거해서 목장을 만들고, 죄수나 주변 농민을 강제로 징발해 일을 시켰다. 그래도 땅이 모자랐던지 아예 간척사업까지 벌여 사유지를 넓혔다.

 

명나라로 가는 사신들은 비밀 장부를 끼고 다녔다. 윤원형이 몰래 맡긴 물건으로 밀무역을 하기 위한 장부였다. 큰 강에는 가라앉을 정도로 물건을 가득 실은 배들이 떴는데, 지방에서 거둬들인 뇌물을 윤원형에게 전하러 가는 뇌물 운반선이었다. 당연히 국가의 조운선과 관리들을 불법으로 차출시킨 것이었다. 윤원형이 세도를 부린 20년 동안 국가의 혈맥은 윤원형이라는 거대한 기생충을 먹여 살리는 데 동원되었다.

 

한명회나 윤원형에 비해 조선 중기의 이이첨은 개인적인 부정부패 의혹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제도를 왜곡하기로는 그들 이상이었는데, 사복을 채우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과 자신의 당파의 권력을 위해서였다.

 

그는 제도의 본 취지를 뜯어고쳐 자신의 뜻대로 써먹었다. 부정부패나 월권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사헌부, 사간원, 그리고 홍문관의 언론 3사였는데 이이첨은 대사헌과 대제학을 번갈아 맡으며 언론기관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었다.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한답시고 적대 정파의 잘못을 캐거나 과장, 날조하는 정치 무기로 활용한 것이다. 당시 이이첨이 언론기관의 공신력을 하도 떨어뜨려서, 이후 뜻있는 사람들은 언론을 견제하거나 아예 폐지하는 것을 중요한 개혁안으로 내세운다.

 

이이첨은 또 성균관 대사성을 맡으며 과거와 교육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답안지에 표시를 하는 방법 등을 써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로 관직을 충원했다. 학술사업, 외교문서 작성 등을 맡은 예문관, 승문원 등도 그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한명회가 무()의 국가기능을 독점하고 사유화했다면 이이첨은 문()의 기능을 독차지했던 셈이다.

 

정조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던 홍국영도 독특한 방식으로 권력을 사유화했다. 이제 겨우 이십대를 지난 그는 정승이나 판서가 되기에는 많이 부적절했다. 하지만 결국 3정승 6판서를 모두 합친 것 이상의 힘을 거머쥔다. 도승지로서 왕을 측근에서 보좌할 뿐만 아니라 어영대장을 비롯한 5군영 대장을 동시에, 또는 번갈아 맡으며 병권을 장악하고, 또한 각 부서의 제조(提調)를 두루 겸임했던 것이다.

 

제조란 판서, 참판급보다 직급상 아래지만 각 관청의 실무를 맡는 직책인데, 이것을 겸임함으로써 홍국영은 모든 부처의 정보를 장악하고 모든 부처의 실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대통령 비서실장이 경호실장과 수도경비사령관 등을 겸직할 뿐만 아니라 중앙부처의 실무 국장직을 망라해 겸임하는 셈이다. 기존 관료제도를 왜곡하지는 않으면서 허깨비로 만들고, 밀실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체제였다.

 

진정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된 홍국영은 권력에 취하기 시작한다. 임금의 수라상과 똑같이 상을 차려 먹고, 궁궐의 의녀를 첩처럼 끼고 놀았다. 뒤늦게 경각심을 가진 정조의 조치로 불과 4년 만에 권력을 잃지 않았다면, 한명회나 윤원형을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국영의 권력 장악 방식은 이후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에게 답습되었다. 곧 세도정치의 모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런 권력의 사유화, 제도의 왜곡은 그 폐해가 심각할 수밖에 없다. 국가기능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고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위부터 아래까지 탈법과 부패가 판을 치게 된다. 이때 가장 괴로운 것이 일반 백성이다. 참다 못한 백성들은 저항했다.

 

윤원형 때 임꺽정이 출현하고, 세도정치가 심할 때 민란도 가장 심했다는 것은 명분과 실질을 잃어버린 정치는 반드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의 간신전 [8]

나라를 망치는 방식 2

 

서민들 정치 혐오증의 뿌리

앞서 간신이 나라에 끼친 피해를 권력의 사유화, 제도의 왜곡으로 제시했다. 이것만으로도 무조건 간신을 때려잡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라던 조선의 정치론에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또 다른 폐해가,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할지 모르는 폐해가 간신을 둘러싸고 퍼져 나갔다.

 

대개 간신이라는 악명이 자자한 인물을 보면 그 앞에는 충신 또는 영웅의 이름이 있다. 사육신을 배신한 김질, 남이를 모해한 유자광, 조광조를 죽인 남곤, 이순신을 모함한 원균, 임경업을 제거한 김자점, 정조를 없애려 한 정후겸. 충신이나 영웅의 이름이 빛나는 만큼 그들의 적이었던 간신들의 이름은 어두워진다.

 

역사적 사실을 찬찬히 뜯어보면 개중에는 흔히 알려진 것과 달랐던 예도, 소위 간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도 할 말이 많은 경우도 눈에 띈다. 하지만 이처럼 뚜렷한 흑백논리로 충신과 간신을 갈라서 보는 관점이 마냥 부적절하지는 않다. 그런 관점에는 정의란 존재한다는 믿음, 정치는 정의를 실현하고 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는 믿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육신은 단지 입바른 소리나 잘할 뿐, 행동력은 없는 나약한 지식인 집단이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단종을 복위시켜 그 공로로 훗날의 반정공신들 같은 권력을 움켜쥐려는 야심에 불탔을지도?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뜻과 죽음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떳떳한 의리를 지키려는 정신, 불의와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읽는다. 그리고 그들의 뜻을 꺾은 장본인인 김질을 그만큼 증오한다.

 

마찬가지로 조광조도 다만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였을 수 있고, 임경업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고집불통 군인이었을 수 있다. 정조도 개혁 군주이기에 앞서 왕권 강화에 골몰했던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경우 보는 사람을 역겹게만 하는 정치, 그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고 싶은 열망이 그들의 머리에 후광을 씌워준다. 그리고 그들의 높은 뜻을 해쳤다고 여겨지는 장본인을 욕하고, 그들을 직접 혼내줄 수 없음을 한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간신이 나라에 끼친 그야말로 치명적인 피해, 그것은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꿈을 깨트리고, 그들의 믿음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그들은 권력정치의 정글 속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움직인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정치판은 이상도 뭣도 없는, 단지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싸움터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내 버렸다.

 

한때 들떴던 민초들은 결국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 어느 놈이 권력을 잡든 힘없는 자들은 그들의 먹이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주의를 비웃고, 개혁을 말하는 사람을 의심하며, 정치 자체를 영혼부터 불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가.‘정치의 요체는 충분한 국방력(足兵), 충분한 경제력(足食), 그리고 백성들의 믿음(民信之)을 갖추는 데 있다.’그는 계속해서 부득이하여 이 셋 중 하나를 포기한다면 먼저 국방을 포기하고, 다음에는 경제를 포기하라고,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백성의 믿음을 얻으려는 노력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백성의 믿음을 잃어버린 정치란 이미 정치라고 할 수 없기에.

 

임금이라는 자가 섬기던 임금을 내쫓고 그 자리에 앉은 역적인데, 나라에 충성할 마음이 들겠는가? 정승 판서라는 자들이 하나같이 도둑놈인데, 내가 적당히 돈을 먹고 부정을 눈감아 준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공동체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부는 떼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후쿠야마의 말처럼,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메마른 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뢰의 고갈은 결국 나라 자체에의 충성심을 약화시킨다. 도덕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이 다 헛소리일 뿐이고 오직 나 개인의 이익이 관건이라면, 굳이 이 나라에 충성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실제로 김자점은 병자호란 때 한번 나라를 배신하여 임금과 백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기고, 한동안 청나라에 아부한 대가로 조선에서 거들먹거렸다. 그리고 끝내 다시 한번 나라를 팔아먹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아 몰락했었다.

 

그보다 더한 매국노는 이완용이었다. 청나라에서 미국으로,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때마다 더 힘있어 보이는 쪽으로 말 갈아타기를 해온 그는 결국 오천년 민족사를 거리낌없이 출세의 제물로 바치고 만다.

 

이렇게 간신은 말라죽은 양심의 소유자로서, 자신의 이익만을 노린 행동으로 사회 전체의 양심을 말려 죽인다. 그리고 끝내는 영혼이 없는 인간, 어떤 무서운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간신은 언제고 처단되거나 죽어서 사라지지만, 그 후유증은 많은 세월을 뛰어넘어 영향을 준다.

 

오늘날 정치라고 하면 왠지 더럽고 정당하지 못한 일로, 정치인이라면 파렴치한 모리배들로 여기는 풍조가 있는가? 그것은 아직까지도 간신 문화의 후유증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한편 오늘날 그런 간신들의 역사를 바로 규명하고, 그 잔재를 말끔히 해소해 버려야만 한다는 움직임이 있는가? 그것은 간신에 맞선 충신과 영웅을 바라는 민초들의 열망이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처럼 정치를 간신과 충신의 차원에서만 보는 것, 너무 인물 위주로 접근하는 관점 자체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간신이 아닌 사람도 간신이 아니냐고 자꾸 의심받다 보면 결국 간신이 된다는 정약용의 말처럼, 지나친 간신 노이로제가 도리어 간신을 양산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마련해 어떤 사람이 권좌에 앉더라도 큰 차이가 없게 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야 하리라.

 

하지만 결국 정치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시스템이 훌륭해도 사람의 실수나 사악한 뜻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과거 충신과 간신의 정치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조선의 간신전 [9]

시스템의 희생자

 

임사홍, 원균도 할 말은 있다

나라의 기생충 같은 간신. 하지만 그들 중에는 별 대단치 않은 잘못을 했지만 분위기에 떠밀려 간신의 오명을 쓰고 만 경우도 있다. 또 체제의 모순, 시대의 모순 때문에 간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도 있다.

 

임사홍(任士洪)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엘리트 문관이었다. 시문과 학술에 능했고, 중국어 실력이 발군이어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대활약을 했다. 서예 솜씨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희대의 간신으로서, 재판을 받을 기회조차 없이 척살되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발단은 아주 단순한, 하찮아 보이는 말 실수였다.

 

성종 9(1478) 4, 약간의 흙비가 내리는 변괴(變怪)가 생겼다. 언론3사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술을 일절 금지해야 한다는 합동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그리 대단치 않은 변괴인데, 이제 곧 국가의 제사가 연이을 지금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게 왕과 승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언론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다. 이때 도승지를 맡고 있던 임사홍이무조건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발언한 것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언론기관은 국정의 폐단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지만, 무조건 언론이 하라는 대로 한다면 정부가 불필요하지 않은가? 게다가 언론의 주장이 추상적인 명분론에 치우쳐 있음에랴.

 

임사홍이 가볍게 던진 말은 사실 대부분 공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말하는 것은 차이가 컸다. 문치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당시, 언론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현대의 군사정권 때사회주의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거나, 요즘 세상에민주주의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았다.

 

언론3사는 곧바로 맹렬한 임사홍 성토에 들어갔다. 그의 발언은 트집잡을 여지가 더 있었다. 술을 금해야 한다는 요구를 반대했으니 퇴폐 향락 풍조를 부추겼다는 혐의를 걸기 좋았고, 흙비의 중대성을 낮춰 보았으니 하늘의 뜻을 우습게 알았다고 비난하기 알맞았다. 더구나 임사홍이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은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야 한다는 조선 정치론의 원칙을 상기시켰다.

 

임사홍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자, 성종은 결국 그를 저버리고 만다. 말 실수 한 번으로 정해진 귀양살이는 그 뒤 22년이나 이어졌다. 연산군 6년 그의 귀양이 풀린 것은 그의 아들 임숭재(任崇載)가 연산군의 놀이 상대로 총애를 받은 덕택이었다.

 

이때껏 그 누구도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늘 말만 앞세우고 멀쩡한 사람을 간신으로 모는 선비들에게 한이 맺혔을 법한 임사홍. 그리하여 그는 연산군을 충동질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따져보면 확실하진 않다. 당시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따로 생모(폐비 윤씨)가 있음을 알리고 복수를 부추겼다고 하는데, 실록에 보면 연산군은 이미 즉위 당시부터 폐비 윤씨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왜 재위 10년이 돼서야 윤씨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 일에 임사홍이 관여했다 해도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증거로 갑자사화 이후에도 임사홍의 입지는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방방곡곡을 다니며 얼굴 반반한 여자를 찾아내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採紅使)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제 노인이 된 한때의 엘리트에게는 오히려 모욕적인 일거리였다. 연산군은 그가 미녀를 데려오는 실적이 신통치 않다면서죽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 신세에서 구해줬거늘, 쓸모없는 늙은이가 은혜도 모르는구나하며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따라서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을 임사홍의 책임으로 돌릴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반정군에게 죽은 이래로어째서 연산군은 폭군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임사홍이라는 간신이 부추겼기 때문이라는 말이 정답처럼 따라다녔다. 잘못된 정치는 간신이 임금을 잘못 인도해 빚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유교 정치론의 공식이었고, 그런 간신의 실례로 그럴듯한 대상은 임사홍뿐이었기 때문이다.

 

조광조를 죽인 자, 중종 때의 남곤(南袞) 역시 억울함이 많은 사람이다. 흔히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개혁에 반발한 훈구 공신세력이 일으킨 정변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곤은 공신이 아니었으며 왕실과의 인척관계도 없었다. 연산군 때에는 바른말을 하다가 숙청되기도 했다. 그는 조광조와 동문에 속했으며, 애초에 조광조를 중종에게 천거해 개혁정책을 펴게끔 길을 열어준 사람도 바로 남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갈수록 대립하게 되는데, 개혁 노선에 대한 견해차 때문이었다. 가령 조광조가 문학은 선비의 일이 못 되며, 경전 공부에 전념토록 하자고 하면 남곤은 참된 선비라면 학술과 문예에 모두 능해야 한다고 했고, 남곤이 과거제를 보완해 천거로도 일부 관리를 뽑자고 하면 조광조는 아예 과거제를 천거제로 대체하자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 다 개혁을 주장했으나, 조광조에 비해 남곤은 중도적이고 온건했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정쟁이 과격해지면 온건파가 먼저 피해를 본다. 두 진영에서 모두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남곤의 뜨뜻미지근함을 두고 조광조 일파에서남곤은 소인이다라는 비판이 점점 커져 갔다. 남곤에게는 이것이 훈구파들에게 받는 의심보다 더 큰 상처였다. 스스로 진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너는 수구꼴통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심정이 어떨까? 결국 이성을 잃은 남곤은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는 일에 가담한다.

 

하지만 곧 후회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조광조의 사형만은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젊은 선비들의 사초에서 나온 중종실록은 남곤에 대한 비방으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조광조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린 사람은 남곤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순신을 모함해 끌어내리고, 나라의 운명을 풍전등화에 놓이게 했다고 비난을 받는 원균 역시 할 말이 없지 않다. 그가 이순신을 비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도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전쟁의 와중에서도 무인들을 신뢰하지 않으며, 무인들이 밀려나지 않으려면 자신의 공을 부풀리고 동료를 깎아내리게 했던 당시의 체제에 있었으리라.

 

간신과 충신이란 시스템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정치문화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나친 흑백논리로 사람을 평가하게끔 한다. 선인 아니면 악인, 영웅 아니면 소인배로. 오늘날에는 그런 흑백논리가 없을까.

 

 

조선의 간신전 [10]

정치에서 소외된 그들, 여자. 내시

 

악녀, 요부일 뿐, 간신 이름은 못 붙여

조선 역사를 읽다 보면 새삼 간신이 참 많았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한명회, 유자광, 윤원형, 김자점 등 굵직굵직한 간신이 시대별로 최소한 하나씩은 머리를 치켜든다. 여기에 잔챙이들, 그리고 다소 억울한 간신들까지 치면 마치 범죄와의 전쟁을 외치는 나라에서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듯 간신 척결을 외쳤던 나라가 오히려 간신들을 막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기도 한다. 왜 이 간신들은 하나같이 남자일까? 그리고 극히 일부(가령 원균)를 제외하면 왜 다들 양반 집안의 문관들일까?

 

조선과 비슷한 체제였던 중국에는 예부터 환관 출신 간신이 많았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단 2대만에 무너지는데 누구보다 책임이 컸다는 조고, 역시 2대만에 한나라 부흥의 꿈을 날려 버린 황호, 환관이면서 왕이라는 지위를 거머쥐었고 정치를 온통 어지럽혀 북송의 몰락을 재촉한 동관, 황제를 우습게 여길 만한 권세를 휘두르며 스스로를 만세 하나 아래인 구천세로 부르게 했다는 명나라 말기의 위충현... 중국의 대표적인 간신들을 얼추 헤아려 보면 환관 출신이 절반에 육박한다.

 

이처럼 내시 간신이 많았던 까닭은 그들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반 벼슬아치들이 들어올 수 없는 궁궐의 깊숙한 곳에도 환관의 발길은 거침없이 미친다. 황제는 물론 황후, 후궁들과도 수시로 대면할 수 있다. 왕권 강화를 꾀한 중국의 군주들은 믿을 만한 환관에게 은밀히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캐는 역할을 맡겼고, 때로는 대신들보다 더 큰 실권을 부여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환관 내각을 만들어 궁궐 깊숙한 곳에서 국정을 처리하며, 공식 내각을 허수아비로 만들기도 했다. 영락제의 명을 받들어 해외 원정에 나서서 멀리 아프리카까지 다녀온 정화 역시 환관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환관들은 그런 일을 꿈도 꿀 수 없었다. 고려조까지만 해도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환관들은 조선조에 들어 궁궐의 하인 신세로 확실히 전락했다. 중국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문신 관료들은 환관에게 권력을 나눠 주는 일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일종의 인종차별처럼 불완전한 몸인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했다.

 

여러 임금을 섬긴 늙은 환관도 새파랗게 젊은 관료 앞에서 감히 허리를 펼 수 없었다. 물론 약간의 농간을 부려 재물을 축적하는 예도 있었지만 간신이라고 불릴 건더기가 전혀 없는 사소한 비리였을 뿐이다.

 

연산군은 조선왕조의 원리원칙을 거의 전부 거꾸로 뒤집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조차 환관을 천대하는 방침만은 뒤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관을 매질하고 괴롭히는 일을 일종의 취미 생활로 여겼다. 연산군과 관련해 환관 한 사람은 간신은 커녕 바른 말을 하는 충신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고, 그 대가로 사지를 베인 뒤 짐승의 먹이로 던져졌다는 김처선(金處善)이다.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환관의 힘이 철저히 억제된 반면 천리마 꼬리에 날파리처럼 달라붙어 한때 세상을 쥐고 흔들었던 여성의 예는 조선에도 많다. 연산군의 장녹수, 윤원형의 정난정, 광해군의 김개시 등은 숙종대의 장희빈과 함께 사극에 단골로 등장한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비극 뒤에는 화완옹주와 문숙의가 있다. 또 나라가 위태로워진 조선 말에는 특히 여자 간신의 이야기가 많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으로 충주에 피해 있을 때 환궁할 날짜를 맞힌 인연으로 입궁한 진령군이라는 무녀는 관성제군(관우)의 딸이라 자처하며 명성의 총애를 무기로 벼슬을 팔고 공금을 횡령하는 등 온갖 비리를 다 저질렀다 한다. 당시 궁궐에는 천하장안(天下長安)이 버티고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 (), (), ()씨 성의 네 상궁을 가리키는 천하장안이란, 이들 상궁의 힘이 워낙 막강해 그녀들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소 과장과 헛소문이 섞여 있을지 모르나, 민심이 흉흉하고 앞날이 아득할수록 집권자의 약해진 마음을 노리고 꼬여 드는 교활한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들을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그녀들에게 간신이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한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 임금 외에는 모두 신하()인 법이니 간신이라 부를 만도 하련만 여성은 근본적으로 정치와는 별개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여겨졌기에 그녀들은 단지 요녀, 음녀, 악녀라 불릴 뿐 간신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간신이란 공적 영역에서 발생한 부정적 존재이니 관념상 공적 영역과는 동떨어진 여성들은 충신도, 간신도 될 수 없었다. 왕후에서 여염집 아낙까지 그들은 남편에게 부속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여성은 일부 재능과 신분이 뛰어난 이조차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실제로는 왕비나 후궁의 베갯머리 송사 덕분에 현명한 판단을 내리곤 했던 무능한 임금도 적지 않았던 듯하나 그녀들의 공헌은 그 누구도 평가해 주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당분간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관례였지만 이 경우에도 대비는 나는 어리석은 여인네로 나랏일은 아는 것이 없으니...’ 하는 말을 앞세우며 원로대신이나 친정의 외척들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간신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데 그쳤을 뿐 스스로 정치의 중심이 되어 뜻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 한계를 넘어 보았던 극소수의 여성, 가령 문정왕후와 명성황후의 경우 온갖 비난을 들으며 있는 소문, 없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간신은 측근정치라는 온상에서 피는 독버섯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환관과 비빈의 권력 확보를 철저히 차단한 조선의 정치는 바람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왕권이 미약했음을 의미한다. 자기 주변에 밤이고 낮이고 자신을 도와줄 심복을 둘 수 없었던 왕들은 궁궐 밖에서 벌어지는 당파 활동과 역모에 힘을 쓸 수 없었다.

 

최근 나온 정조의 간찰에서도 드러나듯 왕은 일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적대적인 당파의 영수와도 긴밀히 연락하며 간곡히 구슬려야 했다. 환관들이 중심이 된 동창을 통해 고위 관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들의 약점을 하나하나 손에 쥘 수 있었던 명나라 황제들과는 전혀 딴판인 조선 임금들이었다. 부부가 나란히 국정에 참여하며 권력을 공유했던 유럽이나 신라, 고려 군주들의 모습 역시 꿈도 못 꾸었다.

 

중앙권력이 지나치게 강하면 독재의 폐단이 생기지만 지나치게 약해도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권세가들이 날뛰는 세상이 된다. 그리고 환관도, 여성도, 상민(常民), 그리고 양반 중에서 무반들조차 배제하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충신과 간신을 논했던 조선의 사대부 관료들. 그런 편협함과 폐쇄성이야말로 나라의 힘과 정당성을 길이 갉아먹는 폐단이 아니었을까.

 

 

조선의 간신전 [11]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자식된 도리가 얽어맨 죄업

부자유친(父子有親), 조선시대만큼 이 말이 절절했던 때는 없었다. 요즘에야 땅에 떨어진 아버지의 존재가치가 식상할 정도로 거론되지만, 조선시대에 아버지란 신처럼 숭배해 마땅할 대상이었다. 임금에서 천민까지,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신 후에나, 아버지를 제대로 공경하지 않으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어찌 조선의 아버지들이 하나같이 위대했을까. 자식보다 불초한 아버지들도 많았다. 하지만 신분도 명예도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아야 하는 조선의 자식들로서는 아버지가 간신의 이름을 얻었다면 자신도 밝고 바른 길을 걷는 인생을 포기해야 했다.

 

자포자기해서일까, 이왕 뒷공론을 피할 수 없는 바에야 어떻게든 끝까지 아버지를 승자로 남게 하려 함일까. 아니면 단지 그 아비에 그 아들로서 스스로 간신 기질이 뻗쳐서일까. 유명한 간신의 자식 중에는 아버지의 간신질을 발벗고 나서서 도운 사람이 적지 않다.

 

광해군대를 풍미한 이이첨에게는 이원엽과 이홍엽, 두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먼저 병조의 관직을, 나중에는 지방 수령직을 맡으며 중앙에서 문() 관련 직능을 장악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보탬이 되었다. 이들은 평판이 나쁘기가 아버지 이상이었다. 이이첨의 피붙이이자 가장 신임하는 심복으로서 인목대비 유폐 등 여러 사건에 깊이 관여했기에, 인조반정 후 아버지와 함께 길거리에서 처형당했다.

 

실록에는 이들이 거의 일자무식이었고, 아버지의 부정행위로 과거에 합격하고 실무는 대부분 아랫사람들에게 맡겼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토록 무능했다면 이이첨의 손발 노릇을 해낼 수 있었을까? 이 부분은 뒷날 만들어진 나쁜 소문으로 여겨진다.

 

김자점의 아들 김이익 역시 아버지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앞장섰다. 조선이 청나라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일과 이후의 역모 사건 모두 김자점이 유배지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사이에 김이익이 동분서주하며 추진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 역시 아버지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 중 역모 사건은 그 내용이 좀 억지스러운 데가 있어서, 김자점을 제거하기 위해 위에서 조작한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랬다면 김자점으로서는 그때껏 실제로 벌인 일만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기에 남음이 있었지만, 그 아들은 어쩌면 억울하게 휘말려든 것일지도 모른다.

 

임사홍과 김안로는 만약 아들이 아니었다면 간신으로 길이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임사홍은 임숭재가, 김안로는 김희가 공주와 혼인하여 왕실의 사돈이 된 덕분에 조정에서 고개를 쳐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임숭재와 김희 모두 둘째 아들이었다. 특히 임숭재는 연산군과의 친교를 이용해 아버지를 오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하고, 연산군대의 대표 간신으로 지목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잘난 아들 말고도 평생의 유감이 될 아들이 있었다. 김안로의 셋째 김시는 14세의 나이로 장가를 가는데, 바로 그날이 아버지의 세도가 무너지는 날이었다. 조정의 부름을 받고 끌려간 김안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때껏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장차 과거를 보고 조정대신이 되리라 청운의 꿈을 꾸던 일도 영영 끝장났다.

 

그는 연좌 처벌되지는 않았으나, 평생 간신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림과 글씨에만 모든 기력을 쏟았는데, 이것이 결실을 보아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로서 한국미술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김시로서는 그런 명성보다 간신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더 마음에 무겁게 얹혔을 것이다.

 

그래도 김안로의 아들은 그림이라는 탈출구가 있었지만, 임사홍의 셋째 임희재는 악운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는 무오사화에 희생된 이목과 친했다는 사실 때문에 끝내 처형되고 만다. 나름대로 연산군에게 발언권이 있는가 싶던 임사홍은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야사에는 오히려 못된 아들을 잘 죽이셨다며 연산군에게 아첨했다지만, 역시 후대에 생겨난 간신 전설일 것으로 보인다. 평생 아버지의 업보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아들, 그보다는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채 구차히 살아남은 아버지가 더 한이 사무치지 않았을까.

 

친일파 중의 친일파, 이완용 아들들 운명도 크게 엇갈린다. 그의 큰아들 이승구는 을사조약 체결 직전 젊은 나이로 숨졌는데, 그게 다 금수만도 못한 아버지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아버지가 친일 매국의 길을 걷는 것도 고민스러웠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부인, 즉 이완용의 며느리와 이완용이 밀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어느 날 두 사람이 밀회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 이승구는 나라와 집안이 모두 망했으니 더 살아서 무엇하랴!” 외치고는 자살했다고 한다.

 

이완용은 아들의 죽음으로도 전혀 뉘우침이 없이, 과부가 된 며느리를 아예 첩처럼 끼고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확실한 근거가 있지는 않고, 소문의 일부가 사실과 차이가 있다. 가령 이승구의 일본 유학 중에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이 시작 되었다는데, 이승구는 일본에 유학한 적이 없다는 점을 미루어 낭설일 뿐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승구가 일찍 죽고 그의 부인이 시아버지와 통상보다는 가까운 듯 지낸 점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완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차가운 피의 소유자라고 주장했으리라. 어쨌든 이처럼 맏아들이 한을 남기고 세상을 등진 반면, 둘째 이항구는 아버지가 친일의 대가로 축적한 거대한 부 덕분에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했다.

 

그리고 이항구의 맏아들 이병길은 이완용에 의해 일찍 죽은 이승구의 아들로 입적되고,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완용은 그렇게 해서 죽은 아들에게 속죄하고 싶었을까. 이승구가 지하에서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기뻐했을까.

 

어쨌든 이항구, 이병길 모두 이완용의 아들과 손자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병길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났다. 아버지의 자리가 지금보다 몇 배나 컸던 과거, 간신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휘말려 처형되거나 평생을, 그리고 죽어서까지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일을 도왔으며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그런 오명을 쓰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던 자식이라도, 결국 아버지를 잘못된 길에서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들이 물려받고 만 간신의 죄업은 진정 자식 된 도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성찰하지 않고, 충분한 용기를 내지 않은 대가일지도 모른다.

 

 

조선 간신전 [12]

이기붕과 차지철

 

권력에 붙어 권력의 눈을 가리다

소인(간신)의 악은 세상에 뚜렷하다. 이권에 얽매여 추한 짓을 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태연히 범하며, 사리사욕에 어두워 공익을 말살하고, 현명한 정책을 방해해 나라가 병들게 한다. 그 모든 허물을, 그 모든 죄악을, 어찌 다 셀 수가 있으랴? (...) 간신을 남김없이 소탕하여 나라의 원기를 보호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군자는 나라를 믿을 수 없어 충성하지 않으며, 평민은 기강을 업신여겨 자기 이익에만 골몰할 것이니, 나라이지만 나라가 아니게 되고 말리라.”

 

율곡 이이가 피를 토하는 듯 동호문답(東湖問答)에 썼던 간신 성토론. 그러나 그의 시대에나 이후에나 간신은 끊이지 않았다. 수백 년 지나 결국 나라를 팔아먹고, 충신도 간신도 없는 시대가 되고서야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 과연 그럴까? 왕조가 사라진 현대에는 당연히 간신도 없는 것일까?

 

분명히 그렇다. 형식적으로는. 하지만 전통 정치체제의 간신과 비슷한 역할을 한 인물상은 현대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체제는 민주화되었으나 사람은 왕조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유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그가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인물이 호가호위(狐假虎威), 이권에 얽매여 추한 짓을 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태연히 범하며, 사리사욕에 어두워 공익을 말살하고, 현명한 정책을 방해해 나라가 병들게 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의 정치인생에는 이기붕이라는 동반자가 있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어렵게 자라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고, 어려운 미국 유학까지 했던 그는 어쩌면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대한민국 학술의 초기를 담당했던 지식인의 하나로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학 시절 해외독립운동에 잠깐 발을 들여놓았다가 이승만을, 그리고 부인이 될 박마리아를 만난 것이 그를 정치라는 마도(魔道)로 이끌었다.

 

귀국해서 일제 지배하의 서울에 살림을 차린 이기붕 부부는 다방을 차리거나 광산을 경영하는 등 잡다한 일을 하며 간신히 살림을 꾸려갔다. 광복 후 귀국한 이승만을 만난 이기붕은 그의 비서로 일하게 되는데, 단지 비서에 그치지 않고 점차 정치 거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이기붕의 모사 기질도 힘이 되었지만, 부인 박마리아의 역할이 더 컸다. 이승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부인 프란체스카였는데,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해 한국 생활이 더없이 불편했던 그녀에게 통역이자 말벗 역할을 해준 사람이 박마리아였던 것이다.

 

이승만의 권력이 커질수록 프란체스카의 권력도 커졌고, 연달아 박마리아와 이기붕의 힘도 세졌다. 이승만이 마침내 대통령이 된 19488월 이후에는 이기붕도 단지 개인 비서가 아니라 비서실장,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등의 공식 직함을 달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어 갔다.

 

특히 이승만이 정당정치를 초월한 국부(國父)의 지위를 포기하고 집권당을 만들기로 했을 때 이기붕은 자유당 창당의 주역이 되어 각료에서 정치인으로 다시금 변신했다. 한편 박마리아도 이화여대 교수이자 YWCA 간부라는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남편과 주군의 권력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이기붕이 단지 독재자의 오른팔 정도가 아니라 현대판 간신으로 불림직한 까닭은 그가 사적인 친분을 활용해 천리마 꼬리에 달라붙듯 권력을 얻은 방식이나, 고령에다 자의식 과잉이었던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려 진정한 민심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 점이나, 비열하고 도의에 어긋난 수법으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한 점 등이 하나같이 간신에 걸맞기 때문이다. 이기붕의 가장 큰 죄업은 54년의 사사오입 개헌과 60년의 3,15 부정선거를 기획하고 추진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시궁창에 처박은 행동이다.

 

4.19 당시 성난 국민이 무서워 잠시 지방의 군부대로 피신해 있다가 다시 귀경해 경무대의 36호실에 쥐 죽은 듯 숨어 있던 이기붕 부부, 그리고 아들 이강욱을 권총으로 사살한 사람은 바로 그들의 친아들이자 이승만에 대한 아부의 일환으로 그에게 양자로 주었던 황태자 이강석이었다.

 

이강석은 부모와 동생을 쏘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다. 형의 손으로 죽음을 맞은 이강욱은 3.15 부정선거 당시 아버지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하고, 낙선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묘하게도 부정한 당선의 결과 망한 것은 그의 집안과 타락한 정권이며, 나라는 살아 남았다.

 

이승만에게 이기붕이 있었다면 박정희에게는 차지철이 있었다. 미국 육사 출신으로 나름대로 군에서 대접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불만이던 그는 61년에 대위 계급장을 단 채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성미가 급하고 드셌던 그는 전형적인 무인(武人) 체질이었고, 문사(文士) 체질의 이기붕과는 뚜렷이 대조되었다. 이기붕이 윤원형이나 이이첨 스타일이라면, 차지철은 유자광이나 김자점을 연상케 했다. 다만 권력에 대한 집요한 집착, 그리고 목표를 위해 원칙이나 도리 따위는 무시해 버리는 후안무치함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 차지철도 군복을 벗고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지만 국회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말싸움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정당 내에서의 암투 역시 지략은 떨어지고 성격은 불 같은 차지철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는가 싶었으나 74년에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면서 운이 트이는 듯했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고 점점 자기 자신을 창살 없는 감옥으로 가둬 가면서, 차지철의 성가는 더욱 높아졌다.

 

마침내 그는 군의 대선배이자 직급상 상위에 해당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유신 반대 시위가 잇따랐으며 김재규는 유화책을 주장했지만, 차지철은 까짓것 탱크로 밀어버립시다. 한 몇 천 놈 죽여버리면 그때부터 찍소리도 못할 겁니다고 무시무시한 말을 뱉으며 강경일변도였다. 차지철의 경호실이 정보부의 업무까지 일부 가져가는 상황에 이르자 김재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791026일 궁정동의 술자리에서 김재규는 차지철을 손가락질하며 박정희에게각하, 이런 버러지 같은 놈과 일을 하니 되겠습니까라고 외쳤다. 그리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두 사람만이 아니다. 정치인이든 대기업 총수든 이제까지의 대한민국사에서 풍운의 주역이었던 인물은 성향에 상관없이 대부분 간신을 하나 둘씩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한 비리나 정변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나 제도에 앞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의 약한 본성이 간신을 탄생시킨다. 그 폐해를 막는 길은 보다 민주적인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 그리고 국민 모두가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의식을 분명히 갖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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