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설(視吾舌)
내 혀를 보아라는 뜻으로, 곧 혀만 있으면 천하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다.
視 : 볼 시(礻/8)
吾 : 나 오(口/4)
舌 : 혀 설(舌/0)
(유의의)
오설상재(吾舌尙在)
상존오설(尙存吾舌)
오설상재(吾舌尙在)는 ‘내 혀가 아직 살아 있소?’라는 뜻으로, 비록 몸이 망가졌어도 혀만 살아 있으면 뜻을 펼 수 있다는 말로 시오설(視吾舌)과 같은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나라에 장의(張儀)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언변(言辯)과 완력(腕力)과 재능(才能)이 뛰어나 변론술(辯論術)로 천하를 주름잡고 돌아다니던 장의(張儀)는 소진(蘇秦)과 함께 권모술수에 능한 귀곡선생(鬼谷先生)의 제자였다.
따라서 합종책(合從策)을 성공시켜 6국(六國)의 재상을 겸임한 소진과는 동문(同門)이 된다. 동문인 소진이 유명세를 탈 때까지도 장의는 뜻을 펴지 못하고 자기를 써 줄 사람을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초(楚)나라 재상 소양(昭陽)의 문객(門客)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때 소양(昭陽)은 위(魏)나라와 싸워 대승한 공로로 왕으로부터 귀중한 화씨벽(和氏壁)을 하사받았다. 소양을 그것을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 어느 날, 소양은 초왕(楚王)이 하사한 화씨벽이라는 진귀한 구슬을 부하들에게 피로(披露)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손님들은 소양에게 화씨벽을 구경시켜 달라고 청했다. 소양이 구슬상자를 가져오라 해서 모두들 감탄하고 있는데, 못에서 큰 물고기가 튀어올라, 모든 이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한 사이에 구슬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가 장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가난뱅이인 장의가 훔친 게 틀림없다고 그래서 수십대의 매질까지 당했으나 장의는 끝내 부인했다. 마침내 그가 실신하자 소양은 할 수 없이 방면했다.
장의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집으로 업혀 들어왔고 이를 본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이 글을 읽고 말을 할 줄 모른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기야 했겠소?” 그러자 장의가 말했다. “내 혀를 보시오. 아직 있소?(視吾舌 尙在否)”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혀야 있지요.”하니 장의는“그럼 됐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몸은 가령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상관없으나 혀만은 상해선 안된다. 혀가 건재해야 살아갈 수 있고 천하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장의는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어 연횡책(連衡策)으로 일찍이 소진이 이룩한 합종책(合縱策)을 깨는 데 성공했다. 그는 소공(蘇公)에게 이런 격문(檄文)을 써 보냈다.“지난 날 내가 그대와 술을 마실 때 나는 그대의 구슬을 훔치지 않았건만 내게 매질을 하였네. 이제 그대는 그대의 나라를 잘 지키게. 내가 그대 나라의 성읍(城邑)을 훔칠지니.”
뛰어난 언변과 설득력으로 각 나라의 실력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전략을 제공하고 그 기술로 권력과 명예를 차지할 수 있었던 변론가(辯論家)들에게는 세 치 혀야말로 그들의 생존 수단임을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
말은 사람을 이롭게도 하고 해롭게도 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시경(詩經)에 있는 말이다.
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백규지점 상가마야, 사언지점 불가위야.
백규(白圭)의 흠은 갈아서 없앨 수 있지만, 말의 실수는 어쩔 수 없도다.
시경 소아편(小雅篇)에
匪言勿言(비언물언)
匪由勿語(비유물어)
말해서 안될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이유 없는 말은 하지 말라.
또한 시경 대아편(大雅篇)에
無易由言(무이유언)
문제가 될 성싶은 말은 함부로 하지 말라.
뱉어 낸 말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며,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판단하여 말해야 된다는 것이다.
노자(老子) 5장에
多言數窮(다언수궁)
말이 많으면 궁지에 빠지는 일이 많다.
不如守中(불여수중)
묵묵히 중심을 지키는 것보다 못하다.
또한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無多言 多言多敗(무다언 다언다패)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다.
논어(論語)의 위영공편(衛靈公篇)에는
不可與言 而與之言 失言(불가여언 이여지언 실언)
말을 해서는 안 될 때 말을 하면 실언을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고 하여 자기가 한 말이 자기에게 현실로 나타난다고 했다. 또한‘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고 했다. 그래서 말은 신중히 해야 한다.
맹자(孟子)의 이루상편(離婁上篇)에
人之易其言也 無責耳矣.
인지이기언야 무책이의.
사람이 말을 쉽게 하는 것은 그 말에 대한 책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책임한 사람일수록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통상 일구이언(一口二言)하는 사람들이다.
장자(壯子)는 내편(內篇)에서
言者風也 行者實喪也.
언자풍야 행자실상야.
말은 평지풍파이고 행위는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다.
말을 하여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말로 인하여 행위가 이루어지고 잘못된 행위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접어들면서 천하의 판도(版圖)는 진(秦), 초(楚),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의 일곱 나라로 압축이 되었다. 역사에서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불리운 이들 나라는 천하를 얻기 위하여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서로 다투면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각국은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하여 천하의 현인들을 초빙하였고, 봉건제적 신분질서의 틀을 벗어 던지려는 새로운 사고를 가진 선비들은 자기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 다투어 세상에 몸을 드러냈다.
그 중에서도 언변이 뛰어나고 재주가 비상한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각국을 돌아다니며 군주를 설득하여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연합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은 주요한 정치적 책략의 하나였다.
합종(合縱)이란 약자들이 모여서 강자를 공격하는 방법이었고, 연횡(連橫)이란 약자들이 강자를 섬겨서 자신을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유세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종횡가는 전국시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슬한 가을 바람이 귀곡산(鬼谷山)에 불어온다. 홍백(紅白)이 아로 새겨진 나뭇잎을 떨구며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에 작은 파랑을 일으킨다. 소진(蘇秦)은 산꼭대기에서 동문수학하는 장의(張儀)와 만나기로 하였다.
해가 서서히 소진의 등뒤로 넘어갈 즈음에 장의가 숨을 헐떡이며 올라왔다. “소형(蘇兄),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소?” “집 생각을 하였소. 떠난지 3년이나 되었으니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게 아니겠소? 장형(張兄)은 어떻소?” “소형, 누구를 속이려고 그러오? 처음 귀곡산에 왔을때 소형은 나에게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과 비교해서 재산이 많지 않은 나의 처지를 미워하고, 아내는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벌어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니 늙어 죽을때까지 이 귀곡산에서 학문이나 배웠으면 좋겠다고 한 말을 벌써 잊었소? 소형은 고향 집이 있는 낙양(洛陽)을 그리워 하는게 아니라 방연형(龐涓兄)이 있는 대량(大梁)을 생각하고 있는게 틀림없소. 내 말이 틀렸다면 말해 보시오?”
소진은 장의에게 속마음이 틀켰다고 생각하자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장형(張兄), 우리는 이미 귀곡산에서 어느 정도 학문을 배웠는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썩어야 하겠소? 지난번에 방연형이 손빈형(孫臏兄)을 천거해 데리고 갔지 않았소? 나도 세상에 나가 이름을 떨치고 싶소.” “그렇지만 스승님께서 하산을 허락해 주실까요?” “문제가 없소. 방연형과 손빈형도 내려 보냈는데 우리라고 내보내지 않겠소.”
소진과 장의는 이튿날 귀곡선생에게 하산을 하겠다는 결심을 얘기하기로 다짐하였다. 귀곡산에서 공부는 주로 깊은 계곡이나 풍치가 좋은 바위에서 행해졌다. 이날의 학습도 계곡물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있었다.
소진이 귀곡선생의 눈치를 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옛말에‘좋은 목재는 바위 밑에서 썩지 않으며, 날랜 검은 결코 벽장에 감추어 두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와 장의는 상의하기를...”
소진이 다음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귀곡선생이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진아, 뒷 말은 하지 않아도 알겠다. 너희 두 사람은 자질이 우수하고 품성이 갸륵해서 언젠가는 세상에 내보낼 생각이었다. 일찌기 방연과 손빈을 보낼때도 나는 그들이 세상에 나가 나의 학문을 펼친다고 생각하니 매우 흐뭇했다. 이제 너희들도 두말할 것 없이 하산하거라. 다만 방연은 기량이 협소하고 질투심이 많으니 항상 조심하거라. 손빈을 보내면서 항상 그것이 걱정이 되었다. 너희들은 절대로 동문들 사이의 정분(情分)과 의리를 잊지 않도록 하여라. 나는 몸이 늙고 세상에 나아가 공명을 다투길 싫어하니 이곳에 남아 여생을 보내도록 하련다.”
귀곡선생은 품에서 음부경(陰符經)이라는 책을 꺼내 소진과 장의에게 각각 주면서 말했다. “이 책은 지난날 주무왕(周武王)을 도와 천하를 낚은 강태공망(姜太公望) 여상선생(呂尙先生)이 지은 경세서(經世書)이다. 너희들이 유세를 하다가 실패하면, 이 책의 구절을 하나씩 다시 음미하며 곰곰히 반추하면 해결의 열쇠를 얻을 것이다. 이제 너희 둘은 오늘 당장에 하산하도록 하여라.”
귀곡선생의 혼쾌한 승낙을 얻어낸 소진과 장의는 동문들과 고별을 하고 그 날로 귀곡산을 내려왔다. “장형, 여기서 헤어져야겠소. 나는 낙양의 집에 들렀다가 어디로 가야할지 진로를 결정하겠소.” “나도 고향인 위(魏)나라로 갔다가 거기에서 진로를 결정하겠소. 소형이 먼저 뜻을 이루면 동학(同學)인 나를 잊지 말고 불러 주시오.” “장형의 재주라면 어디에서 빛을 뿜지 않으리오? 먼저 세상에 이름을 날리거든 나나 잊지 말아 주시오.”
두 사람은 고향을 향해 등을 돌린 채 각자가 권모술수와 야망이 꿈틀거리는 역사의 험로로 첫발을 힘차게 내딛었다.
소진은 낙양이 내려다 보이는 산마루에 올라 도성의 전경을 굽어 보았다. 성벽은 이미 쇠락하여 곳곳이 무너졌고, 깃발도 여기저기가 찢겨져 제왕의 도성이라는 풍도는 꺾인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성내로 들어서니 저자거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흥청거렸다.
고관대작의 으리으리한 저택이 즐비하게 처마의 끝을 맞대었고, 거리에는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진열하고 손님을 끌어들이는 장사치들의 도야지 멱따는 소리가 귀를 쟁쟁 울렸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 말을 타고 두리번 거리는 사람, 수레에 물건을 가득 싣고 저택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쉽게 눈에 띄었다.
소진은 낙양성을 둘러보고 비록 주 왕실이 힘을 잃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명의 상으로는 천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는 먼저 주 왕실에 나아가 자신의 경륜을 펼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주현왕(周顯王)은 소진의 자강(自强)에 관한 유세를 듣고난 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듯 소진을 객관에 머물도록 하였다. 소진은 며칠동안 주현왕의 부름을 기다렸으나 어떠한 소식도 오지 않았다. 객관에서 일년동안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낸 소진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소진은 어머니와 형수에게 그 동안 주 왕실에서 겪은 이야기를 전하고 천하를 주유하며 유세를 하겠다는 의사를 말하였다. 집안의 대다수가 반대를 하였고 그의 어머니 조차 고개를 설레였다. “지난번 네가 귀곡산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면서 많은 가산을 처분 하더니만, 이제 와서 또 다시 희망없는 유세의 길을 떠나려고 하다니 너는 정말로 집안 일은 걱정하지 않는구나. 네게 만일 재주가 있었다면 주왕실에서 쓰지 않으려 했겠느냐? 쓸만한 재주가 없으니 너를 거들떠보지 않은 거겠지. 차라리 네 형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 집안 일을 거드는게 좋겠구나.”
소진은 어머니와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번에는 결코 소가(蘇家)의 가산을 처분하지 않고 다만 제게 남겨진 전답을 팔아 여비로 쓰겠습니다.”
소진은 자신의 전답을 팔아 백(百) 일(鎰;스물 넉량에 해당되는 무게)이나 되는 황금을 여비로 만들고, 그 돈으로 잘 가죽의 검은 털 옷과 마차 한 대, 마부 1명을 사서 낙양을 떠났다. 하지만 만사가 소진의 마음처럼 풀리지는 않았다. 그는 수년에 걸쳐 각국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각국을 돌아다니며 그 지역의 인정(仁政) 풍토(風土)와 정세는 물론이고 경대부(卿大夫)나 귀족 사이의 경쟁관계와 각국의 산천(山川) 경계를 한 눈에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을 경험으로 터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것은 향후에 소진이 합종책(合縱策)을 성사시키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소진은 의지를 꺾지 않고 계속해서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 이때에 서쪽에 위치한 진(秦)나라의 진효공(秦孝公)은 상앙(商鞅)의 의견을 받아들여 법치에 의거한 부국강병책을 꾀하고 있었다. 소진은 드디어 진(秦)나라의 효공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소진이 함양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효공이 죽고 상앙은 정적에 의해서 거열형(車裂刑;수레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한 이후였다.
새로운 왕위에 오른 진혜왕(秦惠王)은 왕자 시절에 재상이었던 상앙으로부터 수모를 받은 기억을 떠올리며 일체의 유세객을 받아 들이지 않았으나, 마침 소진이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귀곡선생의 제자라는 말에 마지못해 알현을 수락하였다. “선생은 무슨 가르침이 있어 이 먼 함양까지 오시었소?”
소진이 말하기를 “우선 대왕의 패업이 조만간 이루어지게 되어 경하(慶賀)의 말씀을 올립니다. 진(秦)나라는 서쪽으로 파촉(巴蜀)과 한중(漢中)의 풍요로운 대지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호(胡)에서 나는 여우털과 천리마가 풍부하며, 남쪽으로는 무산(巫山)과 검중(黔中)이라는 험지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하늘을 찌를듯한 효산(효山)과 함곡관(函谷關)이 천연의 방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게다가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아서 전차만 만승(萬乘)이고 사졸이 백만이니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모두 갖추었습니다. 이처럼 천하의 요새와 풍부한 산물을 갖춘 진(秦)나라를 두고 하늘이 내린 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대왕의 현명함과 수많은 병마(兵馬)와 수레, 그리고 뛰어난 병법과 훈련이 가세하면 족히 천하의 제후를 아우르고 제업(帝業)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대왕께서 천하의 패자(覇者)를 꿈꾸신다면 신으로 하여금 미력하나마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대왕을 도와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진혜황은 유세객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소진의 말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듯 귀찮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인이 들은 바에 의하면 털이 많지 않은 새는 높이 날지 못하고, 성문화된 법령이 없으면 만사를 시행하기가 불가능하며, 도덕이 높지 않은 사람은 백성을 부릴 수가 없다고 하였소. 정치의 교화가 민심에 거슬리면 대신들이 따르지 않고 그렇게 된다면 어떠한 재능도 소용이 없는 법이라오. 선생께서는 먼 곳에서 오셨는데 내 어찌 하루 아침에 모든 가르침을 들을 수가 있겠소. 다음에 다시 기회를 만들어 가르침을 듣도록 하겠소.”
소진은 진혜왕의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저는 대왕께서 저의 주장을 쉽게 받아 들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회고하면, 하(夏)나라의 우왕(禑王)은 공공을 공격했으며,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은 하걸(夏桀)을,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은주(殷紂)를 응징했으며, 제환공(齊桓公)은 전쟁을 통해 천하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이에서 보다시피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천하의 패자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예로부터 성인도 전쟁과 타협은 물론이고 협박과 공갈로 천하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합종과 연횡의 계책입니다. 이제 지금은 문(文)이 아니라 무(武)로 세상을 다스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병마(兵馬)를 늘리고 무기와 갑옷을 챙겨서 언제든지 전쟁을 할 수 있는 대비책을 강구해야만 살아 남습니다.”
진혜왕은 여전히 의자에 깊숙히 몸을 누이고 소진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소진은 유세를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거나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인력을 가졌다고 느긋해 있다가는, 설사 삼황오제(三皇五帝)나 춘추오패(春秋五覇)라도 천하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수단을 쓰지 않으면 결코 천하는 수중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국외에 대해서는 전쟁으로 승리를 취하고, 국내에 대해서는 인의(仁義)로 다스려 부국강병을 꾀해야 합니다. 위로는 권위를 세우고 아래로는 백성을 복종케 하는게 우선입니다. 6국을 굴복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백성을 안녕시키는 일은 오로지 전쟁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대왕께서 진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를 하나도 모르고, 백성을 교화하는 방법을 조금도 쓰지 않으면, 국가의 기강은 흔들리고 백성의 믿음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진(秦)나라에서 추구하는 연횡의 계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소진은 마지막으로 진혜왕을 자극하였지만 효과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진혜왕은 소진의 말에 격동조차 하지 않은채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의 가르침은 마음속 깊이 새겨 두겠소. 지금 우리 진(秦)나라는 국력이 약하니 선생의 견해는 나중에 다시 듣도록 하는게 좋겠소.”
소진은 더 이상 얘기를 할 수 없다고 여기고서 곧바로 궁에서 나와 역관(驛館)으로 돌아왔다. 소진은 차를 마시면서 역관의 주인에게 물었다. “지금 진왕(秦王)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거야 당연히 승상으로 있는 공손연(公孫衍)이지요.”
소진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이튿날 승상부(丞相部)에 연락을 띄우고 느긋한 마음으로 대문에 도착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문지기는 소진의 출입을 막았다. “승상께서는 오늘 아침에 분부를 내려 일체의 잡상인이나 손님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소진은 기가막혀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재차 문지기에게 귀곡선생의 제자인 소진이 찾아왔으니 승상에게 전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문지기는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소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안쪽을 향해 크게 소리 질렀다. “소진은 어제도 진왕(秦王)을 만났는데 이곳의 승상은 어깨가 대왕보다 높단 말이오? 무엇이 그리도 높기에 뻐기는거요?”
마침 공손연은 손님을 배웅하러 나왔다가 소진의 야유를 듣고 문지기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공손연은 귀곡선생의 제자인 소진이 자신을 찾와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잠시후 소진은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공손연을 만날 수 있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문지기가 제 말을 무조건 따르느라 선생이 왕림하신줄 몰랐습니다. 제가 도와줄 일은 무엇입니까?”
소진은 공손연에게 자신을 진왕에게 천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공손연은 혼쾌히 승낙을 하였다. 소진은 객관으로 돌아와 공손연의 통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소진이 승상부에 가니 문지기는 승상이 부재중이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일주일 동안 승상부에 갔으나 대답은 여전히 부재중이라는 한마디 뿐이었다.
소진은 모르고 있었지만 공손연도 진헤왕과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온 객경(客卿)이나 유세객을 극히 싫어하였다. 따라서 그가 소진을 추천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소진은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십만 자(字)에 달하는 부국강병책을 진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역시 회답은 오지 않았다. 여비도 떨어지고 실의에 빠진 소진은 더 이상 기다릴 힘조차 없었다. 소진은 마차와 마부를 처분한 돈으로 함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진은 낙양성을 휘돌아 시원스럽게 흐르는 낙수(洛水)를 바라보며 깊은 탄식을 하였다. 소진의 옷차림과 행색은 거지와 다를 바 없었지만 낙양의 소가(蘇家)는 여전하였다. 소진은 얼굴을 떨어뜨린채 대문을 열고 들어가 형수에게 인사를 하고 밥상을 차려달라고 하였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소진을 너무나 비참하게 만들었다. “제가 바쁜것 보이지 않나요? 도련님은 손도 발도 없나요? 나는 어느 나라의 재상이 나타난 줄 알았네.”
소진의 형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소진은 하는 수 없이 부얶에 들어가 직접 밥상을 차려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이때 부억 밖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진의 형, 형수, 동생, 누이, 아내가 소진의 행색을 두고 비꼬는 말이었다.
소진은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떨군채 탄식하였다. “사람이 빈천하니 아내는 나를 남편으로 취급하지 않고, 형수는 나를 시동생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는 나를 아들로 여기시지 않고, 형님과 동생은 형제로 보아주지 않는구나. 이게 모두 나의 부덕(不德)과 어리석음 때문이야.”
소진은 가족들의 냉담한 반응을 받아가면서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귀곡산을 떠날때 귀곡선생이 건네준 음부경(陰符經)은 서너번이나 독파하면서 한구절 한구절을 음미하였다. 1년여의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소진은 각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배우고 익힌 각지의 풍속과 인심은 물론이고 지형을 비교하면서 더욱 연구에 힘을 쏟았다.
어느 정도 자신을 얻은 소진은 드디어 1년여 만에 소가(蘇家)의 대문을 나섰다. 소진은 여전히 힘차게 흐르는 낙수를 바라보며 가슴에 품은 야망을 다시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이날 저녁에 소진은 큰동생 소대(蘇代)와 작은 동생 소려(蘇勵)를 방으로 불렀다. “두 동생, 이제 나는 세상으로 다시 나가련다. 하지만 나의 전답은 지난번에 모두 팔았으니 여비를 만들 수가 없구나. 그러하니 두 동생이 도와 주어야겠다. 뜻을 이루면 결코 너희의 공을 잊지 않겠다.”
소대와 소려는 처음에 소진의 계획에 고개를 저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의 학문이 전과는 무척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동생으로부터 넉넉한 여비를 받아낸 소진은 이렇게 해서 두번째로 세상에 다시 나아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매일 방에서 밥만 축내던 소진이 집을 떠난다고 하지 아무런 조건없이 찬성하였다.
소진은 낙양성을 빠져나와 낙수를 굽어보며 지난번에 실패한 경험을 곰곰히 되씹었다. “지금 천하에는 진(秦)나라가 가장 강하다. 따라서 진왕을 보좌하면 천하를 움켜쥘 수가 있다. 하지만 진왕은 나를 거들떠 보지 않으려 하니 차라리 6국을 유세하는게 낫겠다. 남북으로 합종하여 서쪽의 진(秦)을 공격하면 진(秦)나라는 함곡관(函谷關)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삼진(三晉) 중에서 가장 강한 조(趙)나라를 찾아가자.”
소진이 조(趙)나라의 도성인 한단(邯鄲)에 이르렀을 때 조(趙)나라의 임금은 조숙후(趙肅侯)로 바뀐 뒤였다. 조숙후는 왕위에 오르고 곧 바로 자기의 동생인 조성(趙成)을 승상으로 중용하고 봉양군(奉陽君)으로 삼았다.
봉양군 조성은 남의 아첨을 좋아하는 소인(小人)이었다. 소진과 같은 가난한 서생은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소진은 조성과 같은 사람이 조(趙)나라의 승상으로 있는 한 자기는 천거될 꿈도 꿀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더욱 북상하여 연(燕)나라의 도성인 계성(桂省)으로 떠났다.
소진은 계성에 있으면서 연문공(燕文公)을 만나려고 갖은 힘을 썼지만 1년여의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다. 하루 세끼를 한 끼로 줄이면서 겨우 생활하고 있던 소진은 어느날 묵고 있던 객관의 주인으로부터 연문공을 만날 수 있는 계책을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연문공을 만나려면 이른 아침에 궁성의 대문으로 가보십시오. 그는 이른 아침에 사냥 하기를 좋아하므로 그 시간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소진은 너무나 감격하여 객관의 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물었다. “어찌하여 이제야 그 말을 해주는 것이지요?” “처음에 저는 손님이 그냥 장사치인줄 알았지, 귀곡선생의 제자인 소진 선생인줄 몰랐습니다. 일찍 저에게 귀뜸이라도 해주셨다면 이렇게까지 시간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날 소진은 오경(五更)에 일어나 궁성의 정문에서 연문공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연문공이 말을 몰면서 시위들을 대동하고 궁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소진은 죽을 각오를 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대는 누구기에 갑자기 대왕(大王)의 앞길을 막는가?”
소진이 고개를 들고 연문공에게 말했다. “신은 귀곡선생의 제자인 소진으로 대왕을 알현하려고 나왔습니다.” “아, 그대가 진혜왕에게 십만서(十萬書)를 올렸다는 소진 선생이구려. 일찌기 선생의 명성을 듣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만나다니 참으로 반갑기 그지 없구려. 자, 과인의 뒤를 따라 궁으로 들어 갑시다.”
연문공은 사냥을 중지하고 궁으로 돌아와 소진을 상좌(윗자리)에 모시고 가르침을 청했다. “연(燕)나라는 동쪽으로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으며,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남쪽으로는 호타하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 토지는 비옥하고, 크기는 사방 둘레가 이천여리이며 병갑(兵甲)은 수십만, 전차는 6백대, 전마(戰馬)는 6천필, 양식은 십년을 쓸 수 있는 양이 저축된 전국의 칠웅(七雄)입니다. 물산(物産)을 논하자면 남쪽에는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부(豊富)한 곡창(穀倉)이 있고, 북쪽에는 특산물인 붉은 대추와 곡물이 나서, 천하의 사람들이 은혜받은 땅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연나라는 중원의 제후들과 비교한다면 그 물산과 인구, 병마의 수는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만일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진다면, 연나라에는 편안한 날이 하루도 그치지 않고 온종일 말발굽 소리만 날 것입니다. 지금 연나라에는 평화를 구가하도록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연문공은 소진의 말에 관심을 갖고 물었다. “과인은 아직 그것을 모르오.”
소진왈 “연나라가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는 까닭은 조(趙)나라라고 하는 방패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秦)나라와 조(趙)나라는 이미 다섯차례나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진(秦)나라가 두 번 이기고 조(趙)나라가 세 번 이긴 처참한 다섯번의 전쟁에서 오히려 연(燕)나라는 평화와 안전을 보장 받았습니다. 조(趙)나라라는 튼튼한 방어벽, 이것이 바로 연(燕)나라가 침략을 받지 않는 진정한 원인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근래에 진(秦)나라와 연맹을 맺고 토지를 할양하여 안녕을 구한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연문공은 조금도 거짓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것은 사실이오.”
소진왈 “그렇다면 그것은 대왕의 실책입니다. 연나라는 근본적으로 진(秦)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침략하더라도 반드시 운중, 구원, 대(代), 상곡(上谷)을 지나야 하며, 도처에서 저항에 부딫혀 결코 이곳 계성까지는 올 수 없습니다. 더욱이 연나라의 토지를 점령하더라도 너무 멀고 지키기가 쉽지 않아 곧바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연나라가 조나라와 관계가 악화되어 조나라가 연나라를 침략하면 십여일이 걸리지 않아 수십만의 대군이 동원(東垣)을 압박하고, 다시 호타하와 역수를 건너면 사오일만에 계성에 도착합니다. 따라서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천리의 전쟁이고,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백리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백리의 전쟁은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천리의 전쟁을 겁내고 있으니 실책 중의 실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문공은 소진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며 진심으로 가르침을 구하였다. “선생께서 과인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는구려. 신하들의 건의를 거절할 수 없어 진(秦)나라와 연맹하고 조나라를 버렸던 것이오. 이제야 깨달았으니 선생께서 연나라가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가르쳐 주소서.”
소진은 그제서야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이 합종의 계책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연나라는 조나라와 연맹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秦)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제후국들과도 연맹을 이루어야 합니다.” “선생의 뜻은 알겠으니 우리 연나라는 소국이라 다른 제후국들이 따르겠소?” “신을 특사로 파견하신다면 조나라에 가서 합종의 연맹을 타협해 보겠습니다.”
연문공왈 “사실 우리 연나라는 서쪽의 조나라와 남쪽의 제나라로부터 압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진(秦)나라와 연맹을 맺으려고 하였소. 그런데 만일 선생의 계책대로 합종책만 이루어진다면 천금이 아깝겠소?”
연문공은 그날로 수 천금을 들여 훌륭한 마차와 하인들을 소진에게 내리고 연나라의 특사로 임명하여 조나라로 유세를 떠나도록 조치하였다.
소진은 연나라의 특사자격으로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에 도착하였다. 조숙후(趙肅侯)는 한단에서 삼십리나 떨어진 곳에 영접관(迎接館)을 세우고 연나라의 특사인 소진을 극진하게 모셔오도록 하였다. 궁에 도착하니 조숙후가 대신들을 이끌고 궁문에서 소진을 기다렸다.
그는 상석에 소진을 앉히고 가르침을 청했다. “상객께서 조나라에 오신 것은 과인에게 어떤 교훈을 내려주기 위함이 아니오?”
소진왈 “조나라에 들어오니 공경대부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도 모두 대왕의 인의도덕을 칭송해 마지 않는걸 보았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대왕께 저의 충심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습니다. 지날 날 봉양군은 세상의 현사를 미워하고 질투하여, 대왕을 만나 충성을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막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현사들이 조나라에 모여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봉양군이 세상을 떠나고, 대왕께서 이렇게 미천한 저를 극진히 대접해 주시니 많은 현사들이 구름처럼 조나라에 모여들 것입니다. 신은 비록 재주는 없지만 조나라와 대왕을 위해 계책을 하나 올리고자 합니다.”
조왕왈 “상객이 지난 번에 조나라에 왔을때 과인은 우둔하여 실례를 범했소. 선생께서 과인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면 가르침을 내려주오.”
소진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민심을 안정시키는 근본은 훌륭한 외교정책을 세우는데 있습니다. 연맹을 하려는 국가를 제대로 선택해야 백성들이 편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나라의 가장 큰 외환은 제(齊)나라와 진(秦)나라 입니다. 지금 조나라의 백성들이 불안해 하는 원인은 이 두 나라에 있습니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의지하면 진(秦)나라가 쳐들어올까 불안하고, 조나라가 진(秦)나라에 의지하면 제나라가 침략할까 불안하니 어떻게 마음놓고 생업에 임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한 나라의 외교정책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를 공격하려면 구실을 붙이거나, 연맹을 맺은 다른 나라를 이간질시켜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조나라의 부국강병책을 듣기 원하신다면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
소진은 조왕과 단둘이 있게 되자 천하의 형세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합종책을 유세하기 시작하였다. “대왕께서 만일 저의 의견을 받아 들이신다면, 신은 각국을 유세하여 반드시 연나라는 값진 털옷과 구마(狗馬)가 풍성한 토지를, 제나라는 양질의 어염(魚鹽)이 가득한 해변가의 토지를, 초(楚)나라는 길유(桔柚;도라지와 유자)가 가득한 숲을, 한(漢), 위(魏), 중산(中山) 세나라는 비옥한 토지를 조나라에 바치도록 만들겠습니다. 오백(五伯)과 탕왕(湯王), 무왕(武王)은 성군임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장수들과 병력을 소모하고 백성을 어려움에 빠트렸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대왕은 그렇게 힘을 쓰지 않고도 두가지의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대왕께 해드릴 수 있는 조치입니다.”
조왕왈 “선생은 과인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두가지 이익을 줄 수 있다는 말이오?”
소진은 각국의 정세를 분석하며 계속 설명했다. “만일 대왕께서 진나라와 수교를 맺으면 진나라는 반드시 한(漢), 위(魏) 두 나라를 침략할 것입니다. 만일 제나라와 연합하면 제나라는 반드시 초(楚), 위(魏) 두 나라를 침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위(魏)나라는 하외(河外)를, 한(韓)나라는 의양(宜陽)을 진(秦)나라나 제나라에 할양해야 합니다. 두 땅이 할양되면 조나라는 상군(上郡)의 길이 막히게 됩니다. 또한 초(楚)나라가 약해진다면 조나라는 더욱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한(韓), 위(魏), 초(楚)의 세나라에 대한 대책은 자세하고 치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만일 진(秦)이 치도를 따라 남하하면 남양(南陽)이 위험하며, 주왕실을 감싸고 있는 한(韓)나라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다면, 주왕실을 보호하는 임무를 조나라가 떠맡아야 하는 부담을 안습니다. 진나라가 다시 복양(濮陽)을 쳐서 기(淇)를 취한다면, 제나라는 반드시 진나라에 굴복하고 신하를 자처할 것입니다. 진나라가 드디어 태행산(太行山) 동쪽으로 나아갈 길을 확보하면 이어서 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때 진나라는 황하(黃河)를 건너고 임장(林墻)을 지나 번오(番吾)를 점거하고 한단(邯鄲)에서 전쟁을 벌일게 확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왕이 걱정해야 할 일이고 사실은 내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일일 것입니다.”
조왕(趙王)은 소진의 설명에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소진이 이어서 “현재 태행산(太行山) 동쪽에 있는 나라 중에서 조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조나라는 주위가 이천 여리이고, 갑옷을 걸친 병사만도 이십여만명, 전차는 천 여대, 전마(戰馬)는 만 필이 넘습니다. 또한 수년동안 전쟁에 쓰일 양식도 비축하고 있습니다. 지리를 살펴보면, 서쪽에는 상산(常山), 남쪽에는 황하와 장수, 동쪽에는 청하(淸河), 북쪽에는 연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연나라는 약소국이라 조나라를 위협할 힘이 없습니다. 열국중에서 조나라가 가장 싫어하며 두려워 하는 진나라는 유일하게 조나라보다 국력이 강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진나라가 조나라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韓)과 위(魏)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하여 후방에서 진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한(韓)과 위(魏) 두 나라는 조나라의 남쪽 울타리가 되는 셈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한(韓)과 위(魏)나라를 공격하면 이러한 형세는 금방 바뀌게 됩니다. 한(韓)과 위(魏)나라는 진나라의 침입을 방어할 큰 산과 하천이 없습니다. 진나라는 쉽게 두 나라를 잠식하여 그 도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韓)과 위(魏)나라는 진나라가 병사를 일으키면 곧바로 신하를 자청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후방의 걱정이 사라지면 두말할 필요없이 즉각 조나라를 침입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韓)과 위(魏)나라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면 진나라라는 재앙은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邯鄲)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조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소진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다. “과인이 걱정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오.”
소진왈 “대왕께서는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사(古史)를 살펴보면, 옛날 요(堯)임금은 세 명의 농부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땅조차 없었고, 순(舜)임금은 한 평의 땅도 없이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우왕(禹王)은 백 인으로 구성하는 부락조차 하나 없었는데 제후의 장(長)이 되었으며, 은(殷)나라를 세운 탕왕(湯王)과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은 3천도 되지 않는 병사와 3백대의 전차를 가지고 천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바로 천하를 쥘 수 있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명한 군주는 밖으로는 적국의 강약을 계산하고, 안으로는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병력과 인재가 있는지의 여부를 헤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쪽의 군대는 대치하기 이전에 이미 승패의 결과가 군주의 가슴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의 분분한 의견에 가려진 진실을 구하지 않고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논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신이 여섯 제후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펴본 바에 따르면 여섯 제후의 토지는 진나라의 다섯 배에 이르면 병사는 열 배에 이릅니다. 만일 이 여섯 제후국이 연합하여 합종을 이루고 진나라를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진나라에 의해서 각개격파가 되고 있으며, 제후국들은 너도 나도 할것없이 앞다투어 서쪽으로 달려가 진나라의 신하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격파하는 것과 다른 나라에 격파 당하는 것이 같은 뜻입니까?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것과 다른 나라에게 정복 당하는 것이 같은 의미입니까?”
조왕은 매우 감동한 눈치였다. 소진의 유세는 점차로 격앙되어 갔다. “이른바 연횡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후의 토지를 일부 진나라에 떼어주고 수교를 맺어서 나라의 안녕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달콤한 목소리로 진나라와 주종(主從)을 맺으면 아름다운 궁궐과 우아한 연못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고, 우와 슬(瑟)의 빼어난 소리와 풍성한 음식을 즐길 수 있으며, 자손대대로 안녕과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꼬득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강대한 진나라가 마음을 바꾼다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인심(人心)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진정한 방비책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소진의 입술은 높은 산에서 굽이치는 계곡 물과 같았다. 그의 유세는 쉬지 않고 조왕의 귓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영명한 군주는 아첨하는 신하를 뿌리뽑고, 유언비어의 근원지를 쓸어버리며, 붕당을 조직하고 가문의 사욕을 채우는 문벌을 폐쇄하여,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백성의 신임을 얻어냅니다. 그래서 신은 대왕께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나라의 토지를 확대하며, 강병의 양성과 백성의 신망을 획득하는 계책을 올리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한(韓), 위(魏), 제(齊), 초(楚), 연(燕), 조(趙)의 육국(六國)을 합종책으로 묶어 서로 전쟁을 방지하고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합니다. 이것보다 나은 계책이나 전략은 없습니다. 천하의 제후와 장군을 항수에 불러들여 연맹을 해야 합니다. 천하의 백성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백마(白馬)를 잡아 제(祭)를 올려 하늘에 고하고, 서로 인질 파견하면 연맹은 이루어집니다. 맹약의 서약문에는 이렇게 쓰십시오.
만일 진(秦)이 초(楚)를 공격하면 제(齊)와 위(魏)는 출병하여 초(楚)를 도우고, 한(韓)은 진(秦)의 양식로를 끊으며, 조(趙)는 장수와 황하를 건너 진(秦)을 위협하고, 연(燕)은 상산의 서북을 지킨다.
만일 진(秦)이 한(韓)과 위(魏)를 공격하면 초(楚)는 진(秦)의 후방을 끊고, 제(齊)는 출병하여 한(韓)과 위(魏)를 도우며, 조(趙)는 황하와 장수를 건너 진(秦)의 측면을 강타하고 연(燕)은 운중으로 나아가 진(秦)에 압박을 가한다.
만일 진(秦)이 제(齊)를 공격하면 초(楚)는 진(秦)의 후방을 끊고, 한(韓)은 성고를 굳게 지키며, 위(魏)는 진(秦)의 교통로를 가로막고, 조(趙)는 황하와 장수를 건너 박관에서 진(秦)을 압박하며, 연(燕)은 제(齊)에 원병을 보낸다.
만일 진(秦)이 연(燕)을 공격하면 조군(趙軍)은 상수를 굳게 지키고, 초군(楚軍)은 무관으로 나아가며, 제(齊)는 우회하여 진(秦)의 측면을 압박하고, 한(韓)과 위(魏)는 연(燕)에 원병을 보낸다.
만일 진(秦)이 조(趙)를 공격하면 한(韓)은 출병하여 의양을 지키고, 초(楚)는 무관으로 나아가 진(秦)을 압박하며, 위(魏)는 하외를 굳게 지키고, 제(齊)는 진(秦)의 측면을 압박하고, 연(燕)은 원병을 보낸다.
만일 제후국 중에서 이러한 맹약을 어기면 나머지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공격한다.’
이상과 같이 여섯 제후국이 합종을 이루면 진나라는 결코 육국이 두려워 함곡관을 벗어나 침략하는 일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대왕의 제업은 곧 성취될 것입니다.”
소진의 대하와 같은 유세가 끝나자 조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진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시하고 말했다. “과인은 나이가 어리고 친히 조정의 일을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아 경험이 없소. 장기적인 계획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부국강병을 꾀하는 경륜도 없소. 다행히 상객은 천하를 구하고 백성을 안녕케 하는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소. 과인은 삼가 이 조나라의 국정을 상객께 맡기고 상객의 의견과 지시를 존중하겠으니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조왕은 그 자리에서 재상의 인(印)을 소진에게 주고, 대신들을 불러 소진을 극진하게 존중하도록 조치하였다. 이튿날 조왕은 소진에게 일백여대의 화려한 마차와 황금 이천 일(鎰), 흰 구슬 백쌍, 비단 1천 필을 내리고, 종약장(縱約長; 합종책을 추진하는 수장)으로 봉하였다.
소진은 10여년의 유세끝에 그 뜻을 진정으로 이루었다. 그는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자신을 도와준 여러 사람에게 합당한 선물과 감사를 표하였다. 따라서 육국(六國)의 백성들은 의리와 정분을 잊지않고 반드시 보답하는 소진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소진이 한단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즈음에 천하의 형세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주(周)나라의 천자는 진나라의 공세를 두려워하여 진왕에게 천자의 상징적인 의례인 주문왕(周文王)과 주무왕(周武王)에 대한 제사권을 바쳤다.
진혜왕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공손연을 장군으로 삼아 위나라를 침략하였다. 진나라와 위나라의 전쟁에서 위나라는 5만여명이 전몰하는 참패를 당하였고, 위나라의 대장군 용가(龍賈)는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다. 사태가 급박하자 위왕(魏王)은 토지를 할양하고 강화를 요청하였다.
진나라는 위나라를 굴복시킨 후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조나라를 침략할 준비를 하였다. 진나라의 침략이 임박하였다는 첩보를 받은 조왕은 급히 소진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였다. “어떻게 해야 진나라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겠소?”
소진은 합종의 맹약이 이루어지기 전에 진나라의 침략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각국의 정세를 분석하고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던터라 두루 막힘없이 견해를 내놓았다. “대왕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나라는 위나라를 친 후 많은 병사가 피로에 지쳐 있으므로 빠른 시일내에 조나라를 칠 수 없습니다. 제가 대책을 마련 하였으니 우선 3군(三軍)을 장하로 보내 진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시켜 주시시오.”
소진은 이튿날 심복을 장의(張義)에게 보내 그를 한단으로 초청하였다. 장의는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하였지만 연횡책이 받아들이지 않아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동문인 소진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에 한단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진은 장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며칠동안 소진의 저택을 방문한 장의는 계속해서 면담을 거절당하자 소진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난 어느날 소진이 장의의 면담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소진은 장의에게 참담한 무시를 하고 쫒아냈다.
소진에 대한 장의의 분노와 원한은 극에 이르렀다. 동문에게 당한 수치가 너무나도 억울했다. 객관으로 다시 돌아온 장의는 술잔을 기울이며 복수를 다짐했다. 이때에 장의의 곁에서 술을 마시던 어느 장사꾼이 장의의 억울하고 분한 사정을 듣고 장의를 꼬득여 진나라로 떠났다. 진나라의 도성인 함양에 도착한 후 장사꾼은 거액을 들여 장의와 진나라의 대신 사이에 다리를 놓아 장의를 함양의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진혜왕(秦惠王)은 장의를 면담한 자리에서 그를 객경으로 우대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장의는 자신을 출세시킨 장사꾼에게 보답을 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에도 장사꾼은 장의에게 절을 하며 사실을 고하였다. “저는 소진 어른의 밀명을 받아 어르신을 함양으로 모신 것입니다. 소진 어른께서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어르신께서 진헤왕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 하시었습니다.”
장의는 비로소 소진의 우정과 뜻을 알 수 있었다. 소진이 장의를 진나라에 보낸 까닭은 단 하나였다. 조나라를 치려는 계획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장의는 진혜왕에게 조나라를 쳐서는 안되는 이유를 유세하였다. “진나라가 만일 조나라를 침략한다면 한(韓), 초(楚), 제(齊) 세 나라의 연합군이 후방에서 공격할 것이며, 진나라는 쉽게 위나라를 굴복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육국으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켜 합종을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 것입니다. 그보다는 조나라의 국경에 있는 병력을 물리고, 장기적으로 육국을 분열하는 정책을 써야 합니다. 그것은 연횡의 계책입니다. 연횡의 계책은...”
진혜왕은 장의의 연횡책을 받아들여 조나라를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바꾸고 육국의 분열책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진나라의 병력이 물러났다는 보고를 받은 조왕은 소진을 더욱 신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진은 장의의 도움으로 합종책의 1단계가 성공하자 곧 바로 2단계의 계책을 추진하였다.
삼진(三晉)의 하나인 한(韓)나라는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3진 중에서는 가장 약한 나라이다. 따라서 소진은 유세의 첫번째로 한나라를 선택하였다. 한왕은 소진을 국빈으로 대접하고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소진은 자신만만한 어투로 그의 합종책을 유세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는 북쪽에 공, 낙(洛), 성고(成皐)와 같은 견고한 방어성이 있으며, 서쪽에는 의양과 상판(常阪)의 요새가 있습니다. 토지는 사방으로 일천여리에 달하고, 갑병(甲兵)은 수십만에 이릅니다. 천하에 이름난 강궁(强弓)과 경노(硬弩)의 출산지도 한나라입니다. 강궁은 사거리가 육백여보이며, 경노는 한번에 수십발을 연속으로 쏠 수가 있습니다. 한나라에는 용감한 병사, 우수한 무기, 견고 방어벽, 그리고 영명한 군주가 있는데 무엇이 두려운게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대왕은 진나라에 머리를 숙이고 신하를 자처하려고 합니다. 이는 나라의 치욕이고 세상의 웃음거리에 다름 아닙니다. 신은 대왕께서 다시한번 심사숙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왕왈 “객경의 뜻은 이해 하겠오만, 우리 한나라는 약소국이라 어쩔 수가 없소.”
소진왈 “만일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게 된다면 진나라는 한나라의 의양과 성고를 할양해 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것을 준다면 이듬해는 또 다른 토지를 달라고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구한다면 대왕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거절한다면 진나라는 갖가지 구실을 붙혀 힘으로 빼았을게 틀림없습니다. 한나라의 토지는 유한하고 진나라의 욕심은 무한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의 돈을 들여서 재앙과 불행을 사는 꼴과 같습니다. 옛 말에도 닭의 벼슬은 되어도 용의 꼬리는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한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육국의 합종입니다. 육국 힘을 합쳐 진나라를 상대한다면 진나라는 감히 한나라를 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진나라를 섬겨서 용의 꼬리가 되지말고, 합종을 해서 닭의 벼슬이 되십시오.”
한왕은 드디어 소진의 합종책을 받아들여 맹약에 서명을 하고, 소에게 황금 백 일(鎰)과 수레 한 대를 선물로 주었다. 소진은 며칠 후 위나라의 도성인 대량으로 떠났다.
위왕은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소진의 온다는 소식에 궁문으로 나와 영접하였다. “선생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렸소. 우리 위나라가 회생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시오.”
소진은 위나라가 처한 상황과 산천의 형세를 분석하면서 합종책을 유세하였다. “대왕께서는 연횡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진나라와 연합하여 동쪽의 제후국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위나라는 이웃나라와 관계가 험악해졌습니다. 진나라는 이것을 기화로 위나라를 치고, 위나라는 이웃 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진나라와 연횡해서 위나라가 얻은게 무엇이 있습니까? 오히려 재앙과 패배만 얻었지 않았습니까?”
위왕은 매우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위나라는 강대한 진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며, 병사도 많지 않소. 만일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더욱 비참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오. 선생께서는 이 난국을 타개할 방책이 있으면 가르침을 주시오.”
소진왈 “병사의 수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일찌기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3천의 병사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수 만 군대를 물리쳤고, 주무왕(周武王)은 3백여대의 전차를 가지고 목야(牧野)에서 은주(殷紂)를 토벌하였습니다. 이에서 알 수 있듯 전쟁의 승패는 숫자에 있지 않고 병사의 용맹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위나라에는 전차가 6백대, 전마는 5천필,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용맹한 병사만도 60만이 넘습니다. 이러한 무력은 지난날의 월왕 구천이나 주무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다고 진나라에 신하를 자처합니까? 만일 진나라에 토지를 할양하고 평화를 구하려고 한다면 위나라의 땅을 모두 주어도 얻을 수 없습니다. 탐욕한 진나라가 한 두개의 성채를 할양받고 그치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 가장 급하게 해야 할 일은 육국(六國)의 신뢰를 회복하고 합종의 맹약을 맺는 것입니다. 빠르면 빠를 수록 위나라에 득이 될 것입니다.”
위왕은 소진의 유세에 점차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소진의 목소리는 더욱 우렁차게 울렸다. “위나라에서 연횡책을 주장하는 사람은 간신입니다. 그들은 조상의 땅을 남에게 주고서 자신들의 안락을 추구하려는 무리들입니다. 땅을 진나라에 주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있으니 간신이 아니면 그들이 충신입니까?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가녀린 싹도 자라면 도끼자루를 만드는 기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위나라는 합종의 맹약을 통해서 기둥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진나라가 두렵습니까?”
위왕은 소진의 유세에 완전히 설복당하고 맹약에 서명하였다. 소진은 조왕(趙王), 한왕(韓王), 위왕(魏王)이 내린 수레와 선물을 지니고 급히 제나라로 떠났다. 제선왕(齊宣王)은 소진을 국빈으로 예우하고 조회에 불렀다.
소진의 유세는 더욱 세련되고 예리해져 갔다. “제나라는 남쪽에 태산이 있고, 동쪽에는 낭야가 있으며, 남쪽에는 청하(淸河)가, 북쪽에는 발해가 있어 사방이 튼튼한 장벽입니다. 토지는 사방이 이천여리이고, 갑병은 십만에 이르며 비옥한 토지에는 물산이 풍부하여 어느 제후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일 다섯 나라의 도움만 받는다면 어떠한 적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도성인 임치에는 병사가 20만이 넘어 이곳만 지켜도 사직을 충분히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진나라에 스스로 나아가 신하를 자처하려고 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선왕(齊宣王)은 미간을 찌푸린채 길게 탄식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한(韓)과 위(魏)나라는 국력이 그리 약하지도 않은데 서쪽의 진나라를 섬겨서 평화를 보장 받으려고 하오. 그런데 만일 우리 제나라가 진나라에 대항한다면 결코 제나라는 진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수가 없소. 우리가 진나라를 섬기려는 까닭은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이오.”
소진은 제선왕의 변명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과 위나라가 진나라를 두려워 하는 까닭은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만일 진나라가 쳐들어 온다면 10일 이내에 도성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설사 싸워서 이긴다해도 병력의 태반을 잃게되고 계속되는 진나라의 공격을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만일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려고 한다면 형세는 한과 위나라와는 전혀 다릅니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면 후방에는 한과 위나라의 위협이 있으며, 우회해서 위와 양진을 지난다해도 항부(亢父)의 천험을 넘어야 하는데 이곳은 백 명이 일천명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입니다. 이처럼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는 일은 쉬운게 아닙니다. 따라서 진나라는 제나라에 대해서 허장성세의 위협만 가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침략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이미 조왕(趙王)의 명을 받아 합종의 맹약을 유세하여 한과 위나라로부터 서명을 받고 제나라에 왔습니다. 대왕께서는 진나라를 섬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는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합종을 맺어 떳떳한 안녕을 구하는게 좋겠습니까?”
제선왕은 소진의 유세에 깊이 감동하고 그 자리에서 합종의 맹약을 서명하였다. 소진은 임치에서 며칠에 걸쳐 제선왕의 뜨거운 환대를 받고 다음의 유세국인 초나라로 떠났다.
소진은 초나라의 도성인 영성에 가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감이 충만하여 조금도 낮설거나 망설임이 없었다. 소진은 객점에 자리를 잡고 초왕(楚王)을 알현한다는 통지를 궁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사흘째가 되어도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는 한(韓), 위(魏), 제(齊)나라에 걸쳐 유세를 하는동안 분에 넘치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초나라에서 뜻밖에도 냉대를 받자 화가 난 소진은 짐을 꾸리고 영성을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소진이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 초위왕(楚威王)은 급히 소진(蘇秦)을 궁성으로 불러들였다. “선생께서는 천리를 멀다않고 영성에 오시었는데 어찌하여 과인을 보지 않고 그냥 떠나려고 하시오?”
소진은 초위왕의 말에 매우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초나라의 음식은 보물보다 비싸고, 초나라의 땔감은 향목보다 귀하며,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귀신보다 보기가 어려우니, 미천한 소진은 이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왕왈 “과인이 눈이 멀어 선생이 왕림한 줄 몰랐소. 진심으로 사죄를 표하고 내일 정중하게 국빈으로 맞이하도록 하겠으니 노여움을 푸시기 바라오.”
초위왕은 이튿날 국빈의 예로 소진을 궁성으로 맞아들이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께서는 합종책을 유세한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우리 초나라에 어떠한 도움이 되오이까?”
소진은 이제까지 한(韓), 위(魏), 제(齊)나라를 돌아다니며 발휘한 합종의 이치를 일사천리로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초나라는 사방이 오천여리이며 갑병(甲兵)이 일백만에 이르는 강국입니다, 십여년을 버틸 양식이 비축되어 있고, 전차는 일천여대가 넘으며 전마(戰馬)는 일만 필에 이르고, 현명한 군주께서 나라를 다스리니 천하에 견즐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워 서쪽의 진나라를 섬기려 하십니까? 천하의 정세를 놓고 볼 떄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 하는 나라는 초나라입니다. 예로부터 진나라가 강하면 초나라가 약해지고, 초나라가 강하면 진나라가 약해져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연횡의 계책을 버리고 당연히 합종의 계책을 따라야 합니다. 연횡책은 진나라의 침입을 잠시는 막을 수 있어도 진나라의 야욕을 근본적으로 꺾을 수가 없습니다.”
초왕왈 “그렇지만 우리 초나라가 합종을 한다면 진나라는 그것을 빌미로 주력군을 무관(武關)과 검중으로 보내 언과 도성인 영을 압박할 것이오.”
소진이 답하기를 “그것은 염려할게 못됩니다. 만일 육국이 합종을 한다면 나머지 다섯 나라는 진나라에 보내는 공물을 초나라에 보낼 것입니다. 합종책은 초나라를 육국의 맹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나라가 감히 초나라를 칠 수 있겠습니까? 연횡책은 원수를 섬기며 원수의 보호를 받는 하책입니다. 연횡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밖으로는 강대한 진나라에 아부하고 안쪽으로는 군주를 핍박하는 간신에 불과합니다. 이들을 물리치고 초나라의 자존심을 찾는게 우선입니다. 설사 연횡책으로 진나라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만일 진나라가 태도를 갑자기 바꾸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초왕왈 “선생의 말씀은 너무나도 지당하오. 진나라는 이리와 같은 금수의 나라로 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놈들이요. 과인은 본디 진나라와는 화친을 맺고 싶지 않았지만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과 위나라가 언제 태도를 바꾸어 진나라에 의지할지 몰라 어쩔 수 없이 연횡을 생각한 것이오. 만일 한과 위나라가 진나라의 위협에 굴복하고 복종한다면 우리는 진나라와 정면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우리 초나라는 아직 진나라를 이길 힘이 없소. 하지만 선생의 합종을 따른다면 그런 걱정이 사라지니 우리 초나라는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소.”
초위왕은 한(韓), 위(魏), 제(齊) 세 나라의 군주와는 한 차원 높은 식견과 전망을 가졌다. 초위왕은 합종의 맹약을 받아들이고 소진을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소진은 육국의 재상이 되었다.
역사상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초(楚)의 여섯 재상의 인(印)을 수여받은 사람이 누가 있었던가. 낙양의 한벽한 농촌에서 태어난 소진은 드디어 귀곡산장을 떠난 십수년만에 그의 원대한 포부를 이룰 수 있었다.
소진은 육국의 유세를 마치고 초나라의 영성에서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으로 화려한 귀환을 하였다. 소진은 고향에 들러 그리운 가족을 만나보고 싶었다. 다행히 그의 고향인 낙양은 영성에서 한단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소진의 일행은 화려하고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육국의 군주와 각지의 제후들이 선물한 수백대의 마차가 십리에 걸쳐 늘어섰고, 수레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일찌기 소진을 홀대했던 주현왕(周顯王)은 종약장(縱約長)이 되어 금의환향을 하는 소진을 맞기 위하여 낙양성의 삼십리 밖에까지 대신을 파견하여 소진을 영접하였다.
소진은 마중나온 가족에게 발길을 옮겼다. 일찌기 소진을 박대하였던 그의 형수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도련님, 지난날 박대하였던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진은 한걸음에 뛰어와 형수를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그때 형수의 그러한 박대와 비난이 없었다면 오늘의 소진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건 저를 채찍질하고 모질게 단련시킨 가족의 공입니다.”
소진은 지난날의 고초와 치욕이 자신을 단련시키고 성공을 하겠다는 의지를 북돋아 준 믿거름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과거는 오늘의 소진을 만든 가장 큰 공로자인 셈이었다.
낙양을 떠나 한단에 도착한 소진은 조왕(趙王)에게 육국의 맹약이 이루어졌음을 보고하고 서명한 명부를 건네주었다. 조왕은 소진을 무안군(武安君)에 봉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15년동안 함곡관의 동쪽을 한번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육국의 합종책은 충실하게 지켜졌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난다는 말처럼 세상의 변화는 예측할 수가 없다. 합종이 이루어진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육국은 각자의 이익이 돌출되면서 점차 사이가 벌어졌다. 진나라는 그동안 육국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시키며 합종을 깨부수고자 하였다. 드디어 진나라는 연(燕), 제(齊), 위(魏) 세 나라와 연합하여 조나라를 치는데 성공한다.
조왕은 소진에게 해결책을 구하였다. 소진은 연나라로 향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를 움직여 제나라를 치게하면 조나라로 향한 제나라의 군대가 물러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진이 연나라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소진을 중용하였던 연문후(燕文侯)가 죽고 역왕(易王)이 등극하였다. 제나라는 갑자기 조나라를 공격하던 군대를 빼내 국상(國喪)중인 연나라를 침략하여 십개 성을 빼앗았다.
연역왕(燕易王)은 소진이 궁에 도착하자 크게 질책하였다. “지난날 선생이 연나라에 왔을때 선왕께서는 선생을 도와 조나라에 보냈고, 선생은 그 힘으로 육국의 합종을 이루어 냈소. 아직도 맹약이 살아있는데 제나라는 맹약을 어기고 먼저 조나라를 치고 그 다음에는 우리 연나라를 쳤소. 우리는 선생의 말을 따랐다가 10개성을 잃었소. 선생께서는 잃어버린 우리의 10개성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단 말이오?”
소진은 침통한 표정으로 극구 죄를 청하고 기회를 요청하였다. “신이 다시 제나라로 가서 성을 돌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소진은 곧바로 제나라의 도성인 임치로 달려와 제선왕(齊宣王)을 알현하였다. 소진은 제선왕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채 축하를 한 후 다시 고개를 뻣뻣히 들고 곡(哭)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왕왈 “선생은 어찌하여 축하를 하다가 갑자기 곡(哭)을 한단 말이오?”
소진왈 “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배가 고픈 사람은 차라리 굶을지언정 독초를 먹지는 않습니다. 독초를 먹으면 배는 부를지 몰라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연나라는 비록 약소국이지만 진나라의 사위국입니다. 대왕은 열 개 성의 이익을 얻었지만 그것은 진나라라는 원수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만일 연나라가 맹약을 버리고 진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면 제나라는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가 고파서 독초를 먹은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선왕은 소진의 말에 수긍을 하고 연나라에게서 빼앗은 열개 성을 돌려주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연역왕은 소진을 더욱 중용하고 편애하였다.
이때에 연역왕에게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연문후의 부인이었다. 일찌기 그녀는 소진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녀는 연문후가 살아 있을때는 멀리서 소진을 바라만 보며 가슴을 조리고 있었지만 남편이 죽자 노골적으로 소진을 유혹하였다. 두 사람의 추문은 어느덧 연역왕의 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연역왕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소진을 아꼈다. 소진은 그런 연역왕이 점점 두려워졌다.
어느날 소진은 연역왕에게 나아가 하나의 계책을 올렸다. “신은 대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전혀 연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지난날 제나라로부터 받은 치욕조차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저를 제나라에 보내신다면 반간계(反間計)를 서서 제나라를 약하게 만들겠습니다.”
연역왕은 소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얼마후 소진은 제나라로 도망가고 연나라에서는 소진을 잡아들이라는 방문이 곳곳에 나붙었다. 소진이 제나라로 도망오자 제선왕(齊宣王)은 그를 여전히 객경(客卿)으로 우대하였다.
소진은 제선왕을 꼬득여 오락과 호색에 빠지도록 유도하였다. 제선왕은 소진의 반간계에 걸려 정사는 돌보지 않고 세금을 늘려 궁궐을 화려하게 꾸미고 여색과 음주가무에 빠져 제나라를 점점 엉망으로 만들었다.
제선왕이 주색잡기에 빠져 일찍 죽자 그의 아들인 왕위를 이어 제민왕(齊閔王)이 되었다. 제민왕은 제선왕보다 한 수 더 떠서 더욱 크고 화려한 궁궐과 연못을 수축하였다.
제나라의 충신들은 이 모든 원인을 소진에게 돌렸다. 그러나 제민왕은 대신들이 그럴수록 소진을 편애하였다. 보다못한 어느 충신이 조회에 나오는 소진을 급습하여 찔러 죽이고 달아났다.
제민왕이 “누가 경(卿)을 이렇게 만들었소?” 제민왕의 통곡을 들으면서 소진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계책을 일러주었다. “대왕, 범인을 반드시 잡아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거짓으로 조서를 내려 소진은 만고의 역적이라 거열형(車裂刑)에 처한다고 하면 범인은 틀림없이 제발로 나타날 것입니다.”
소진이 죽고나자 제민왕은 소진을 거열형에 처하도록 하고 역적을 죽인 자에게 포상을 내린다고 공고하였다. 그러자 소진의 예측대로 범인이 제발로 나타났다. 제민왕 자객을 사주하여 소진을 죽이게 한 대부와 그 잔당들을 색출하여 모두 목을 베었다. 그리고 소진의 주검을 수습하여 낙양에 보내 장례를 치루게 하였다.
육국을 유세하며 종약장의 지위를 차지하였던 소진은 말년에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자신을 처음으로 받아준 연문후의 은혜, 그리고 연문후의 부인과 사통한 죄를 눈감아 준 연역왕의 아량에 보답하고자 제나라로 들어가 반간계를 써서 제나라를 약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후에 연나라는 소진의 반간계에 힘입어 약화된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나라의 태반을 차지하는 전승을 올리게 된다. 죽은 소진의 약효가 이때까지 위력을 떨쳤으니 세치 혀의 위력을 얕잡아 볼 수가 없으리라.
▶ 視(볼 시)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볼 견(見;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示(시)는 신이 사람에게 보이다, 見(견)은 눈에 보이는 일이라는 뜻으로 視(시)는 똑똑히 보이다, 가만히 계속하여 보다, 자세히 조사함으 말한다. 見(견)은 저쪽에서 보여오는 일, 視(시)는 이쪽에서 가만히 보는 일을 말한다. 그래서 視(볼 시)는 ①보다 ②엿보다 ③보이다 ④간주하다 ⑤맡아보다 ⑥본받다 ⑦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살필 찰(察), 살필 심(審), 조사할 사(査), 검사할 검(檢), 볼 감(監), 벼슬 감(監), 바라볼 조(眺), 보일 시(示), 볼 견(見), 볼 람(覽), 볼 관(觀), 볼 열(閱), 나타날 현(顯)이다. 용례로는 빛의 자극을 받아 눈으로 느끼는 것을 시각(視覺), 눈이 가는 방향을 시선(視線), 눈으로 봄과 귀로 들음을 시청(視聽), 눈의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야(視野), 눈이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계(視界), 돌아다니며 실지 사정을 살펴 봄을 시찰(視察), 물체의 존재나 형상을 인식하는 눈의 능력을 시력(視力),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시정(視程), 사무를 봄을 시무(視務), 존재나 있는 값어치를 알아주지 아니함을 무시(無視), 경계하기 위하여 미리 감독하고 살피어 봄을 감시(監視), 주의해서 봄이나 자세히 눈여겨 봄을 주시(注視), 가볍게 봄이나 가볍게 여김을 경시(輕視), 착각으로 잘못 봄을 착시(錯視),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아도 먼 데 것은 잘못 보는 눈을 근시(近視), 먼 데 것은 잘 보이고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이지 않는 시력을 원시(遠視),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내쏘아 봄을 직시(直視),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음을 좌시(坐視), 눈길을 주어 한동안 바라보는 것을 응시(凝視), 돌아다니며 보살핌을 순시(巡視), 백성을 제 자식처럼 여김을 시민여자(視民如子), 죽음을 삶같이 여기고 두려워하지 아니함을 시사여생(視死如生),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시사여귀(視死如歸), 보고도 보지 못한 체하는 일을 시약불견(視若不見), 보기는 하되 보이지 않음을 시이불시(視而不視) 등에 쓰인다.
▶ 吾(나 오, 친하지 않을 어, 땅 이름 아)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五(오)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吾(오, 어, 아)는 ①나 ②그대 ③우리 ④글 읽는 소리 ⑤짐승의 이름 ⑥막다, 멈추게 하다 그리고 ⓐ친하지 않다(어) ⓑ친하려고 하지 않다(어) ⓒ소원(疏遠)한 모양(어) ⓓ땅의 이름(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글 읽는 소리 오(唔), 나 아(我)이다. 용례로는 우리들을 오등(吾等), 우리네를 오제(吾儕), 나 또는 우리 인류를 오인(吾人), 우리의 무리를 오배(吾輩), 나의 집을 오가(吾家), 우리 임금을 오군(吾君), 우리 문중을 오문(吾門), 우리 당을 오당(吾黨), 옛날에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일컫던 말을 오동(吾東), 나의 형이라는 뜻으로 정다운 벗 사이의 편지에서 쓰는 말을 오형(吾兄), 맞서 겨우 버티어 나감을 지오(枝吾), 참된 자기를 진오(眞吾), 나는 그 일에 상관하지 아니함 또는 그런 태도를 오불관언(吾不關焉), 우리 집의 기린이라는 뜻으로 부모가 자기 자식의 준수함을 칭찬하는 말을 오가기린(吾家麒麟), 자기가 도와서 출세시켜 준 사람이라는 오가소립(吾家所立), 내 집의 걸출한 자식을 이르는 말을 오문표수(吾門標秀), 나도 또한 모른다는 오역부지(吾亦不知), 나의 혀는 아직 살아 있오? 라는 뜻으로 몸이 망가졌어도 혀만 살아 있으면 천하를 움질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오설상재(吾舌尙在), 맞부딪치기를 꺼리어 자기가 스스로 슬그머니 피함을 오근피지(吾謹避之) 등에 쓰인다.
▶ 舌(혀 설)은 상형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입으로 내민 혀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혀의 뜻을 나타낸다. 또는 음(音)을 나타내는 干(간; 내미는 일, 실)과 口(구)의 합자(合字)이다. 그래서 舌(설)은 혀의 뜻으로 ①혀 ②말, 언어(言語) ③과녁의 부분(部分)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말다툼이나 입씨름을 설전(舌戰)말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다툼을 설론(舌論), 혀가 굳어서 뻣뻣함을 설강(舌强), 혀를 움직여서 내는 자음을 설음(舌音), 남을 해하려는 뜻이 담긴 말을 칼에 비유해서 일컫는 말을 설검(舌劍), 칼과 같은 혀라는 뜻에서 날카로운 말을 설도(舌刀), 말을 잘못한 때문에 받게 되는 해를 설화(舌禍), 서슬이 선 말로 날카롭고 매서운 변설을 설봉(舌鋒), 혀를 이루고 그 주질이 되는 근육을 설근(舌筋), 혀의 상태를 보아서 병이 있고 없음을 진단하는 일을 설진(舌診), 악독하게 혀를 놀려 남을 해치는 말을 독설(毒舌), 입담 좋게 말을 잘 하는 재주를 언설(言舌), 붓과 혀 곧 글로 씀과 말로 말함을 이르는 말을 필설(筆舌), 나쁘게 욕하는 말을 악설(惡舌), 시비하고 비방하는 말을 구설(口舌), 쓸데없는 말을 자꾸 지껄임을 농설(弄舌), 재치 있게 하는 교묘한 말을 교설(巧舌)말이 많음이나 수다스러움을 장설(長舌), 입담 좋게 말을 잘 하는 재주를 변설(辯舌), 혀를 가두어 둔다는 뜻으로 말을 하지 아니함을 수설(囚舌), 말로 이러쿵 저러쿵 다투는 일을 각설(角舌), 혀 아래나 밑에 도끼 들었다는 설저유부(舌疽有斧),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으로 논봉論鋒의 날카로움을 이르는 말을 설망어검(舌芒於劍), 혀가 꼬부라지고 불알이 오그라진다는 뜻으로 병세가 몹시 위급하다는 설권낭축(舌卷囊縮),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뜻으로 항상 말조심을 해야한다는 설참신도(舌斬身刀)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