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리쇄(名繮利鎖)
명예의 고삐 줄과 이익의 쇠사슬이라는 뜻으로, 사람을 명예욕과 이익에 사로 잡히게 만드는 욕심을 오랏줄에 비유하는 말이다. 세상의 명리에 얽매여 있다는 의미이다.
名 : 이름 명(口/3)
繮 : 고삐 강(糹/13)
利 : 이익 리(刂/5)
鎖 : 쇠사슬 쇄(金/10)
출전 : 한서(漢書) 서전 상(敍傳上)
이 성어는 한서(漢書) 서전 상(敍傳上)에서 반고(班固)가 선조들 중 백부반사(班嗣)를 설명하는데서 나온 말이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嗣雖修儒學, 然貴老嚴之術.
사(嗣; 반고의 백부)는 비록 유학을 배웠지만 노장(老莊)의 술법을 귀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桓生欲借其書, 嗣報曰: 若夫嚴子者, 絶聖棄智, 修生保眞, 淸虛澹泊, 歸之自然, 獨師友造化, 而不爲世俗所役者也.
환담(桓譚)이 노장 사상에 관한 책을 빌리려 하자 사(嗣)는 이렇데 대답하였다. “대저 장자(莊子; 嚴子)라는 사람의 사상은 성현을 끊어버리고 지혜를 버리며, 생(生)을 수양하고 참된 것을 보존하며, 청허(淸虛)하고 담박하게 스스로 그러함에 귀부하며, 홀로 조화를 사우(師友)로 삼아 세속에 부려지는 바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漁釣於一壑, 則萬物不奸其志,
棲遲於一丘, 則天下不易其樂.
한 골짜기에서 낚시를 하면 곧 만물이라도 그 뜻을 어지럽힐 수 없고, 한 언덕에 살아가면 곧 천하라도 그 즐거움을 바꾸게 하지 못합니다.
不絓聖人之罔, 不嗅驕君之餌, 蕩然肆志, 談者不得而名焉, 故可貴也.
성인의 그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교만한 임금의 녹봉을 누리지 아니하면서, 구속됨 없이 살게 되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얻지는 못하면서도 이름이 나게 되므로, 귀하다 할 만합니다.
今吾子已貫仁誼之羈絆, 繫名聲之韁鎖, 伏周 孔之軌躅, 馳顏 閔之極摯, 既繫攣於世教矣. 何用大道爲自眩曜?
지금 그대는 이미 인의의 굴레에 꿰어져 있고, 명성의 고삐에 묶여 있으며,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규범을 쫒고,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의 지극함에 있으니, 이미 세교(世敎)에 얽혀 있음입니다. 어찌 대도(大道)를 써서 스스로 눈을 어지럽히려 하십니까?
昔有學步於邯鄲者, 曾未得其髣彿, 又復失其故步, 遂匍匐而歸耳!
옛날에 한단(邯鄲)에서 걸음걸이를 배운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그 흉내조차도 하지 못했고, 또 원래의 걸음걸이도 잊어버리게 되자, 마침내는 기어가서 돌아가게 될 따름이었습니다.
恐似此類, 故不進. 嗣之行己持論如此.
혹시라도 이와 같은 부류처럼 될 수 있는 까닭에 책을 빌려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嗣)의 행실과 지론은 이와 같았다.
⏹ 다음은 김성일의 명강리쇄(名繮利鎖)의 글이다.
당나라 덕종 때의 재상 노기(盧杞)는 못생긴 외모에다 음험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명리를 몹시 탐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명예의 노예라는 뜻의 명리노(名利奴)라 불렀다. 다음은 그가 높은 벼슬에 오르기 전에 있었던 일화이다.
大唐龍髓記曰.
대당용수기(大唐龍髓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盧杞與馮盛相遇於道, 各携一囊.
노기와 풍성(馮盛)이 길에서 만났는데 둘 다 자루를 지니고 있었다.
杞發盛囊, 有墨一枚. 杞大笑.
노기가 풍성의 자루를 열어 보니 먹 하나가 나왔다. 노기는 크게 웃었다.
盛正色曰: 天峰煤和針魚腦, 入金溪子手中, 錄離騷古本, 比公日提綾文刺三百, 爲名利奴, 顧當孰勝?
그러자 풍성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천봉매(먹)와 침어뇌(벼루)가 금계자의 수중에 들어가면 굴원의 '이소' 옛 판본이 기록되어 나오는데, 그대가 매일 능문자(비단 명함) 300장을 가지고 다니며 명리노가 되는 것과 비교하면 누가 더 낫겠소?”
已而搜杞囊, 果是三百刺.
말을 마치고는 노기의 자루를 뒤져 보자 과연 명함 300장이 나왔다.
이 이야기는 당(唐) 풍지(馮贄)의 운선잡기(雲仙雜記) 천봉매여능문자숙승(天峰煤與綾文刺孰勝)에 나오는데, 노기가 공명(功名)과 봉록(俸祿)에 눈이 먼 '명리노'였다는 말에서 명예의 고삐와 이익의 사슬이라는 뜻의 '명강리쇄(名繮利鎖)'가 유래했다.
천봉매(天峰煤)는 먹의 별칭이다. 옛날에는 먹을 주로 송연(松烟;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들었으므로 먹을 봉작(封爵) 칭호인 송자후(松滋侯)라고 했는데, 이 외에 원향(元香), 진현(陳玄), 오환(烏丸), 미매(麋煤), 오옥괴(烏玉塊), 수사진(洙四珍), 흑송사자(黑松使者), 원향태수(元香太守), 천봉매 등으로도 칭했다.
침어뇌(針魚腦)는 돌의 일종으로 벼루를 만드는 데 쓰이므로, 벼루의 별칭이 되었다. 금계자(金溪子)는 풍성의 별호이다.
명강리쇄(名繮利鎖)는 유영(柳永)의 사(詞) 하운봉(夏雲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向此免名繮利鎖, 虛費光陰.
이후로 명예의 고삐와 이익의 쇠사슬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네.
이 성어의 전고는 한서(漢書) 서전 상(敍傳上)의 다음 구절이다.
今吾子已貫仁誼之羈絆, 繫名聲之韁鎖.
지금 그대는 이미 인의도덕의 굴레에 꿰였고 명성의 고삐와 사슬에 매여 있소.
⏹ 班固 漢書 敍傳 (1)
한서의 가장 마지막 편인 서전(敍傳)의 원문 번역이다. 서전에는 반고의 집안 내력, 그의 일생 그리고 한서를 저술하게 된 계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班氏之先, 與楚同姓, 令尹子文之後也.
子文初生, 棄於瞢中, 而虎乳之.
楚人謂乳穀, 謂虎於檡, 故名穀於檡, 字子文. 楚人謂虎班, 其子以爲號.
秦之滅楚, 遷晉代之間, 因氏焉.
반씨의 조상은 초(楚)나라 왕실과 동성으로 영윤자문(令尹子文)의 후손이다. 자문이 갓 태어날을 때 운몽택(雲夢澤) 가운데에 버려졌는데 호랑이가 자문에게 젖을 주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젖 주는 것을 일러 '곡(穀)'이라 하였고 호랑이를 일러 오도(於檡)(한서의 주석을 집대성한 안사고(顔師古)에 따르면 '穀'은 원래 글자대로 읽거나 또는 '누'(乃苟反)로 읽는다고 하였다. 於의 음은 '烏', 檡는 莵라고도 쓰며 음은 '途'라고 하였다)이라고 하였으므로 '곡오도'이라고 이름 붙여지고 자(字)는 자문이라 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호랑이를 일러 '반(班)'이라고 하였으므로 그의 아들(안사고에 따르면 이름이 鬪班이라 한다)은 이것을 이름으로 삼았다. 진(秦)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킬 때 진(晉)나라와 대(代)나라 사이로 피난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반'이 씨(氏)가 되었다.
始皇之末, 班壹避墬於樓煩, 致馬牛羊數千群. 値漢初定, 與民無禁, 當孝惠高后時, 以財雄邊, 出入弋獵, 旌旗鼓吹, 年百餘歲, 以壽終, 故北方多以壹爲字者.
시황제 통치 말기 반일(班壹)은 누번(樓煩)으로 피난하였는데, 거기에서 말, 소, 양을 수 천마리나 길렀다. 한(漢)나라가 갓 세워지고 기틀을 잡을 무렵 그는 백성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혜제(惠帝), 고후(高后) 시기에는 막대한 재산으로 변방의 큰 세력을 이루었다. 그가 사냥을 나갈 때는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었다고 하며, 백 세를 사는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북방에서는 '일(壹)'을 이름으로 삼는 자가 많았다.
壹生孺. 孺爲任俠, 州郡歌之.
孺生長, 官至上谷守.
長生回, 以茂材爲長子令.
回生況, 擧孝廉爲郞, 積功勞, 至上河農都尉, 大司農奏課連最, 入爲左曹越騎校尉. 成帝之初, 女爲婕妤, 致仕就第, 貲累千金, 徙昌陵.
昌陵後罷, 大臣名家皆占數于長安.
반일은 유(孺)를 낳았다. 유는 의협심이 강하여 다른 이들을 많이 도왔으므로 주(州)과 군(郡)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유는 장(長)을 낳았는데, 장의 관직은 상곡(上谷)의 태수에 이르렀다. 장은 회(回)를 낳았는데, 그는 무재(茂材=秀材)라는 명목으로 추천 받아 장자(長子)의 현령이 되었다. 회는 황(況)을 낳았는데 효렴(孝廉)이라는 명목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되었는데 공적을 쌓아서 상하농도위(上河農都尉)가 되었다. 대사농(大司農)이 그의 공적이 가장 뛰어나다고 상주하여 조정에 들어와 좌조월기교위(左曹越騎校尉)가 되었다. 성제(成帝)가 갖 즉위했을 때 회의 딸이 첩여(婕妤)가 되었다. 은퇴하여 고향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 그의 재산이 천금이 되었는데 그는 창릉(昌陵)으로 이사하였다. 창릉이 나중에 폐(廢)해지자 대신들과 명가들 모두 장안에 옮겨 살게 되었다.
況生三子: 伯斿稺. 伯少受詩於師丹.
大將軍王鳳薦伯宜勸學, 召見宴昵殿, 容貌甚麗, 誦說有法, 拜爲中常侍.
時上方鄕學, 鄭寬中, 張禹朝夕入說尙書, 論語於金華殿中, 詔伯受焉.
旣通大義, 又講異同於許商, 遷奉車都尉. 數年, 金華之業絶, 出與王許子弟爲群, 在於綺襦紈褲之間, 非其好也.
황은 세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각각 백(伯), 유(斿), 치(稺=稚)였다. 백은 어려서 사단(師丹)에게 시경을 전수 받았다. 대장군 왕봉(王鳳)은 백을 황제에게 학문을 권하게 하기에 적절한 이라고 천거하였다. 황제는 그를 연니전(宴昵殿)에서 만나보았는데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경전을 외고 해설하는 것이 법도가 있으니 그를 중상시(中常侍)로 임명하였다. 당시의 황제는 바야흐로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方;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 鄕; 向 편애하다, 좋아하다) 정관중(鄭寬中), 장우(張禹)가 아침 저녁으로 들어와 금화전(金華殿) 가운데에서 상서(尙書)와 논어(論語)를 강의하였다. 황제는 백에게 정관중, 장우의 학문을 전수받으라 명하였다. 오래지 않아 대의(大義)를 통달하게 되자 허상(許商)에게 경전의 다르고 같음을 강의하였으며, 봉거도위(奉車都尉)로 승진하였다. 수 년이 지나 금화전의 일(정관중, 장우가 황제에게 강의하는 일)이 끝나게 되자 백은 궁 밖으로 나와 왕봉, 허상의 자제들과 더불어 무리를 이루고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家本北邊, 志節忼慨, 數求使匈奴.
河平中, 單于來朝, 上使伯持節迎於塞下. 會定襄大姓石, 李群輩報怨, 殺追捕吏, 伯上狀, 因自請願試守期月.
上遣侍中中郞將王舜馳傳代伯護單于, 竝奉璽書印綬, 即拜伯爲定襄太守.
定襄聞伯素貴, 年少, 自請治劇, 畏其下車作威, 吏民竦息.
伯至, 請問耆老父祖故人有舊恩者, 迎延滿堂, 日爲供具, 執子孫禮. 郡中益弛.
諸所賓禮皆名豪, 懷恩醉酒, 共諫伯宜頗攝錄盜賊, 具言本謀亡匿處.
伯曰: 是所望於父師矣.
乃召屬縣長吏, 選精進掾史, 分部收捕, 及它隱伏, 旬日盡得.
郡中震栗, 咸稱神明. 歲餘, 上徵伯.
伯上書願過故郡上父祖冢.
有詔, 太守都尉以下會.
因召宗族, 各以親疏加恩施, 散數百金.
北州以爲榮, 長老紀焉.
道病中風, 旣至, 以侍中光祿大夫養病, 賞賜甚厚, 數年未能起.
가문이 북쪽 변방에 근본이 있어서 지향(志向)과 절조(節操)에 강개(慷慨)함이 있었으므로 여러 차례 흉노에 사신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하평(河平) 연간에 선우(흉노의 지도자)가 와서 조견(朝見)하게 되니 황제는 백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지니고 변방에서 맞아하게 하였다. 그 무렵 정양군(定襄郡)의 큰 가문인 석(石)씨와 이(李)씨 무리들이 사사로이 복수를 하고 잡으러 온 관리들을 죽이고 쫓아낸 일이 있었다. 백은 황제에게 이 일을 상주하고 이 기회에 스스로 1개월 간 정양군의 임시 태수가 되기를 청하였다. 황제는 시중 중랑장 왕순(王舜)을 보내 백을 대신해 선우를 경호하게하고 더불어 그에게 옥새가 찍힌 임명장과 인수(印綬)를 받들게 하여 백을 정양 태수로 임명하였다. 정양군 사람들은 백이 본래 신분이 귀하고 나이가 어리며 스스로 청하여 큰 군(郡)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백이 수레에서 내려서 위엄 있게 꾸민 모습을 두렵게 여기고 불안해하였다. 백이 도착해서는 나이든 이들을 부르고 안부를 마치 집안 어른들이나 옛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던 것처럼 하고 관청이 가득 차도록 초청하여 매일같이 음식을 대접하면서 아들과 손자의 예를 올렸다. 그러자 정양군의 긴장된 분위기가 완화되었다. 빈례(賓禮)를 입은 자들은 모두 이름 있는 호족들이었는데, 이들은 은혜를 입고 술에 취해서 모두 백에게 간하기를 마땅히 도적들을 체포해야 한다고 하며 본래 도적들과 모의하여 도망가서 숨기로 한 곳을 모두 말하였다. 백이 말하기를 “이는 어르신들께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내 정양군에 속해있는 현(縣)의 고위 관료들을 소집하고 뛰어난 이들을 선발하고 연사(掾史 -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를 진격시켜 각 지역별로 나누어 잡아들이게 하고 도적들이 숨은 곳에 이르러서는 열흘 만에 일망타진하였다. 정양군 사람들은 그 신속함에 전율하고 모두 신명스럽다 칭하였다. 1년여쯤 지나자 황제는 백을 불러들였다. 백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연고지가 있는 군(郡)의 조상들 묘를 방문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는 조서를 내리자 태수(太守) 도위(都尉) 이하 관리들이 그를 동행하였다. 이 기회에 백은 집안 친척들을 물러 모으고 각각 친소(親疎)에 따라 은혜를 베풀었으며 수 백금을 나누어 주었다. 북쪽 고을에서는 이를 영예롭게 여기고 장로(長老)들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장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풍에 걸렸으며 이내 장안으로 돌아오자 황제는 시중(侍中) 광록대부(光祿大夫)의 녹봉으로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황제로부터 받은 상과 재물이 매우 후하였으나 수년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會許皇后廢, 班婕妤供養東宮, 進侍者李平爲婕妤, 而趙飛燕爲皇后, 伯遂稱篤. 久之, 上出過臨候伯, 伯惶恐, 起視事.
허황후가 왕비의 자리에서 폐해지자 반첩여가 동궁을 받들어 모시게 되었고 시자(侍者) 였던 이평(李平)이 진급하여 첩여가 되었으며, 조비연(趙飛燕)은 황후가 되었는데, 백은 병세가 악화되었다 칭하였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자 황제가 궁을 나와 백을 병문안 하였다. 백은 황공해 하며 병석에서 일어나 사무를 보았다.
自大將軍薨後, 富平, 定陵侯張放, 淳于長等始愛幸, 出爲微行, 行則同輿執轡; 入侍禁中, 設宴飮之會, 及趙, 李諸侍中皆引滿擧白, 談笑大噱. 時乘輿幄坐張畫屏風, 畫紂醉踞妲己作長夜之樂.
上以伯新起, 數目禮之, 因顧指畫而問伯: 紂爲無道, 至於是虖?
伯對曰: 書云 乃用婦人之言, 何有踞肆於朝? 所謂眾惡歸之, 不如是之甚者也.
上曰: 苟不若此, 此圖何戒?
伯曰: 沈湎于酒, 微子所以告去也; 式號式謼, 大雅所以流連也. 詩書淫亂之戒, 其原皆在於酒.
上乃謂然歎曰: 吾久不見班生, 今日復聞讜言!
放等不懌, 稍自引起更衣, 因罷出.
時長信庭林表適使來, 聞見之.
대장군(왕봉(王鳳)을 가리킴)이 세상을 떠나자 부평후(富平侯) 장방(張放)과 정릉후(定陵侯) 순우장(淳于長) 등이 비로서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황제가 궁을 떠나 미행을 할 때 같이 다니면서 함께 수레의 말고삐를 잡았다. 이들은 궁궐의 황제가 거처하는 곳[禁中]까지 모시고 들어와서 술 마시는 연회를 열었는데 이 연회에서는 조비연, 이평 등 왕을 모시는 모든 이들도 술잔을 가득 채우고 한 번에 잔을 비웠으며 담소하며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었다. 이 때 황제가 가마를 타니 앉은 자리의 장막에는 그림이 병풍처럼 펼처져 있는데, 바로 은나라 주(紂) 임금이 취해 달기(妲己)에 기대어 긴 밤의 쾌락을 즐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황제는 백에게 새로 일어나게 하고 여러차례 눈의로 경의를 표하고 그림을 돌아보고 가리켜 백에게 물었다. "주 임금은 무도(無道)하였는데, (그 정도가) 여기에 까지 이르렀습니까?" 백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상서>에 이르기를 "아녀자의 말을 채용하였다."(<상서> <태서(泰誓)>에 나오는 말) 라고 했다지만 어찌 조정에서 그러한 방자함이 펼쳐졌겠습니까? 이른 바 모든 악행이 주 임금에게 귀속된 것이지 이와 같이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황제가 말하였다."진실로 그러하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무엇을 경계하는 것입니까?" 백이 말하였다. " '술에 탐닉하다'는(<상서> <미자(微子)>에 나옴) 미자(微子)께서 떠남을 고하게 한 연고인 바 였으며, '술에 취해 큰 소리로 떠드는 구나'는(<시경> <대아(大雅)>에나오는 말) <대아>의 작자께서 눈물을 흘리게 한 연고인 바 였습니다. <시경>과 <상서>에서 말한 음란함에 대한 경계는 그 근본이 모두 술에 있습니다." 황제는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오랬동안 반백(班伯)을 만나지 않았는데 오늘에야 다시 옳은 말을 듣는 구나!" 장방 등은 기뻐하지 않았으며 눈에 띄지 않게 스스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곧 궁을 떠났다. 이때 장신궁(長信宮 - 태후의 거처) 정(庭)의 임표(林表 - 궁녀 관직의 이름) (안사고의 설에 따름)가 금중(禁中)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갔는데 이러한 일을 모두 보고 들었다.
後上朝東宮,太后泣曰:「帝間顔色瘦黑,班侍中本大將軍所擧,宜寵異之,益求其比,以輔聖德。宜遣富平侯且就國。」
上曰:「諾。」車騎將軍王音聞之,以風丞相御史奏富平侯罪過,上乃出放爲邊都尉。後復徵入,太后與
上書曰:「前所道尚未效,富平侯反復來,其能默虖?」
上謝曰:「請今奉詔。」是時許商爲少府,師丹爲光祿勳,上於是引商、丹入爲光祿大夫,伯遷水衡都尉,與兩師並侍中,皆秩中二千石。
每朝東宮,常從;及有大政,俱使諭指於公卿。
上亦稍厭游宴,復修經書之業,太后甚悅。
丞相方進復奏,富平侯竟就國。
會伯病卒,年三十八,朝廷愍惜焉。
나중에 황제가 동궁(東宮)에가서 태후를 알현하자 태후가 울면서 말했다. "황제가 최근 안색이 파리해지고 검게 되었습니다. 반시중은 본래 대장군이 추천했던 이로 마땅히 그를 총애하고 그와 비슷한 이들을 더 발탁하여 성덕(聖德)을 돕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부평후를 떠나보내 봉토로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황제는 말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거기장군(車騎將軍) 왕음(王音)이 이를 듣고 승상(丞相), 어사(御史)에게 간(諫)하니 (승상이) 부평후의 죄와 잘못을 상주하게 되었고 황제는 이내 변경의 도위(都尉)로 추방시켰다. 나중에 다시 황제가 부평후를 불러들이니 태후는 황제에게 글을 상주하여 말하였다. "전에 말했던 바가 여전히 효과가 없습니다. 부평후가 다시 돌아오면 제가 아무 말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사죄하며 말하였다. "청컨데 지금은 조서를 받들게 해 주십시요."(조서대로 시행하는 것을 허용해 달라는 의미) 이 때에 허상은 소부(少府)가 되었고 사단(師丹)은 광록훈(光祿勛) 되었다. 황제는 이에 허상, 사단을 불러들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았고, 백은 수형도위(水衡都尉)가 되었다. 백은 허상, 사단 두 선생과 더불어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모두 봉록이 2천석에 이르렀으며, 황제가 매번 동궁에 태후를 알현할 때마다 항상 황제를 따랐다. 마침내 백은 국가대사의 정치에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는 황제의 의견을 두루 잘 갖추고 조정에 파견되어 공경들에게 황제의 뜻을 알리고 해설하였다.황제는 또한 점점 연회를 싫어하게 되었다. 다시 경서를 공부하는 일을 하게 되니 태후는 매우 기뻐하였다. 승상은 이 때에 나아가 다시 상주하니 부평후는 마침내 봉토로 돌아게 되었다. 이 시기 백은 병들어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38세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斿博學有俊材,左將軍師丹擧賢良方正,以對策爲議郎,遷諫大夫、右曹中郎將,與劉向校祕書。
每奏事,斿以選受詔進讀群書。
上器其能,賜以祕書之副。
時書不布,自東平思王以叔父求太史公、諸子書,大將軍白不許。
語在東平王傳。
斿亦早卒,有子曰嗣,顯名當世。
유(斿)는 박학하고 뛰어난 자질이 있어 좌장군 사단이 현량방정(賢良方正)이라는 명목으로 천거하였는데, 황제가 직접 한 질문에 대답을 잘함으로서[對策] 의랑(議郞)에 임명되었다. 간대부(諫大夫), 우조중랑장(右曹中郞將)으로 승진하였고 유향(劉向)과 더불어 황실의 장서를 교감하는 일을 하였다. 매번 교감했던 일을 보고[奏事]할 일이 있을 때마다 유가 선발되어 어명을 받아 황제 앞에서 교감했던 책의 내용을 낭독하였다. 황제는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황실 장서의 부본을 하사하였다. 이 당시 서책은 간행되어 반포되지 않았었는데, 동평국(東平國)의 사왕(思王)이 숙부에게 <태사공서(太史公書)>(사마천의 <사기>를 가리킴)와 제자백가들의 책을 구하려고 했으나 대장군 왕봉이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 이야기는 <동평왕전(東平王傳)>에 실려있다. 유 또한 일씩 세상을 떠났는데 사(嗣)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사 또한 당시 세상에서 이름을 날었다.
⏹ 班固 漢書 敍傳 (2)
王莽少與稺兄弟同列友善, 兄事斿而弟畜稺。
왕망(王莽)은 어려서 치(稺; 稚, 班稚)의 형제와는 같은 시기에 벼슬길에 올랐으므로 친하게 지냈다. 왕망은 유(斿; 班斿)를 형처럼 모셨으며 치에게는 동생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斿之卒也, 修緦麻, 賻賵甚厚。
유가 세상을 떠나자, 왕망은 친척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시마(緦麻)로 된 상복을 입었으며, 부의금도 매우 많이 내었다.
平帝即位, 太后臨朝, 莽秉政。
평제(平帝)가 즉위하자 태후가 조정에서 와서 정사를 보았고 왕망이 정권을 장악했다.
方欲文致太平, 使使者分行風俗, 采頌聲, 而稺無所上。
그는 바야흐로 태평한 세상이 된 것처럼 꾸미려고 사자(使者)들을 하여금 지역을 나누어 풍속을 살피게 하고 임금을 칭송하는 노래를 채집하게 했는데, 치는 이런 노래를 올리지 않았다.
琅邪太守, 公孫閎, 言災害於公府。
낭야군(琅邪郡) 태수 공손굉(公孫閎)은 공부(公府)에 재해가 발생했다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大司空, 甄豐, 遣屬馳至兩郡諷吏民, 而劾閎空造不祥, 稺絶嘉應, 嫉害聖政, 皆不道。
대사공 견풍(甄豐)은 수하의 사람들을 보내, 낭야군과 광평국의 관리와 백성들을 꼬드겨, 공손굉은 거짓으로 상서롭지 못한 일을 꾸미고, 치는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지 않은 것은, 황제의 훌륭한 정치를 시기하고 해하려 한 것으로, 모두 부도(不道)한 일이라고 탄핵하게 하였다.
太后曰:不宣德美, 宜與言災害者異罰。且後宮賢家, 我所哀也。
태후가 말하기를 “덕과 아름다움을 선양하지 않은 것은 마땅히 재해를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벌을 해야 합니다. 또한 후궁 반첩여의 현명한 집안은 내가 아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閎獨下獄誅。
공손굉은 홀로 하옥되고 참수 당했다.
稺懼, 上書陳恩謝罪, 願歸相印, 入補延陵園郎, 太后許焉。
치는 두려움을 느끼고 글을 올려 용서해준 은혜를 진술하고 사죄하였으며 광평국 재상의 인장을 반납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연릉원(延陵園)의 일을 보좌하는 낭관(郎官)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자, 황후가 허락하였다.
食故祿終身。由是班氏不顯莽朝, 亦不罹咎。
이리하여 낭관의 녹봉을 평생 받게 되었다. 때문에 반씨(班氏)는 왕망의 왕조에는 전혀 각광받지 못하였지만 또한 왕망으로 인한 재앙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녹봉 : 귀족 자제들이 처음 벼슬길에 입문할 때 역임하는 관직이 바로 낭관이다. 낭관의 녹봉은 다른 고위 관리에 비한다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다. 이상의 내용은 황제의 총애를 받던 집안이 일반 관리 정도의 대접을 받을 정도로 격이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初, 成帝性寬, 進入直言。
당초 성제(成帝)의 성품은 관대하여 직언을 잘 받아들였다.
是以王音, 翟方進等繩法擧過。
때문에 왕음(王音), 적방진(翟方進) 등은 과거의 법을 계승하여 잘못된 점들을 들었다.
而劉向, 杜鄴, 王章, 朱雲之徒肆意犯上, 故自帝師安昌侯, 諸舅大將軍兄弟及公卿大夫, 後宮外屬史許之家有貴寵者, 莫不被文傷詆。
그러나 유향(劉向), 두업(杜鄴), 왕장(王章), 주운(朱雲) 등의 무리들은 제 멋대로 황제를 범하니, 스승 안창후(安昌侯)부터 시작하여 장인인 대장군의 형제 및 공경대부, 후궁 외척 사씨와 허씨 집안 모두 귀함과 총애를 입은 자들에게까지 중상과 비방을 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唯穀永嘗言 ; 建始, 河平之際, 許, 班之貴, 傾動前朝, 熏灼四方, 賞賜無量, 空虛內臧, 女寵至極, 不可尙矣. 今之後起, 天所不饗, 什倍於前。
오직 곡영(穀永) 만이 일찍이 말하길 “건시(建始), 하평(河平) 연간에 허씨와 반씨가 귀해지자 선황제가 살아 계실 적 당시에는 그 위세가 진동하고 사방에 크게 드러났으며 황제로부터 상을 받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니 국고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여자를 총애함이 극에 달하는 것은 숭상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지금의 새로 일어난 권세 있는 가문들은 하늘이라도 그들에게 내려진 상을 감당할 수 없는 바이니, (이들에게 내려진 상들은) 선황제가 살아계실 적 당시의 10배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永指以駮譏趙, 李, 亦無間云。
곡영은 조(趙)씨(조비연 외척), 이씨(이부인 외척)의 사례를 비판하고 풍자함으로서 지금의 일을 지적하고 또한 지금도 그 때와 차이가 없음을 말하였다.
稺生彪。彪字叔皮, 幼與從兄嗣共遊學, 家有賜書, 內足於財, 好古之士自遠方至, 父黨揚子雲以下莫不造門。
치는 표(彪)를 낳았다. 표의 자(字) 숙피(叔皮)이며, 어려서 사촌 형 사(嗣)와 더불어 같이 학문을 배웠는데, 집에는 황제께서 하사하신 책이 있고 집안에도 재물에 있어서도 풍족한 형편이니, 옛 것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멀리 서부터 찾아왔는데, 아버지 연배의 양웅(揚雄) 이하 여러 선비들이 집에 찾아오지 않음이 없었다.
嗣雖修儒學, 然貴老嚴之術。
사는 비록 유학을 배웠지만 노장(老莊)의 술법을 귀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桓生欲借其書, 嗣報曰:若夫嚴子者, 絶聖棄智, 修生保眞, 淸虛澹泊, 歸之自然, 獨師友造化, 而不爲世俗所役者也。漁釣於一壑, 則萬物不奸其志, 棲遲於一丘, 則天下不易其樂。不絓聖人之罔, 不嗅驕君之餌, 蕩然肆志, 談者不得而名焉, 故可貴也。今吾子已貫仁誼之羈絆, 繫名聲之韁鎖, 伏周孔之軌躅, 馳顏閔之極摯, 既繫攣於世教矣, 何用大道爲自眩曜? 昔有學步於邯鄲者, 曾未得其髣彿, 又復失其故步, 遂匍匐而歸耳! 恐似此類, 故不進。嗣之行己持論如此。
환담(桓譚)이 노장 사상에 관한 책을 빌리려 하자 사는 이렇데 대답하였다. “대저 장자라는 사람의 사상은 성현을 끊어버리고 지혜를 버리며, 생(生)을 수양하고 참된 것[眞]을 보존하며, 청허(淸虛)하고 담박(澹泊)하게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귀부하며, 홀로 조화(造化)를 사우(師友)로 삼아 세속에 부려지는 바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한 골짜기에서 낚시를 하면 곧 만물이라도 그 뜻을 어지럽힐 수 없고 한 언덕에 살아가면 곧 천하라도 그 즐거움을 바꾸게 하지 못합니다. 성인의 그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교만한 임금의 녹봉을 누리지 아니하면서 구속됨 없이 살게 되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얻지는 못하면서도 이름이 나게 되므로, 귀하다 할 만합니다. 지금 그대는 이미 인의의 굴레에 꿰어져 있고 명성의 고삐에 묶여있으며,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규범에 거하고 있고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의 지극함에 거하고 있으니 이미 세교(世敎)에 얽혀 있음입니다. 어찌 대도(大道)를 써서 스스로 눈을 어지럽히려 하십니까? 옛날에 한단(邯鄲)에서 걸음걸이를 배운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그 흉내조차도 하지 못했고 또 원래의 걸음걸이도 잊어버리게 되자 마침내는 기어가서 돌아가게 될 따름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이와 같은 부류처럼 될 수 있는 까닭게 책을 빌려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의 행실과 지론은 이와 같았다.
叔皮唯聖人之道然後盡心焉。
숙피는 오직 성인지도(聖人之道)인 연후에야 마음을 다하였다.
年二十, 遭王莽敗, 世祖即位於冀州。
그의 나이 20에 왕망의 패배와 세조(世祖)께서 기주(冀州)에서 즉위하신 일을 겪게 되었다.
時隗囂據壟擁眾, 招輯英俊。
而公孫述稱帝於蜀漢。
이때 외효(隗囂)는 농서(隴西) 지방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으며 영준(英俊)한 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공손술(公孫述)은 촉한(蜀漢)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天下雲擾, 大者連州郡, 小者據縣邑。
천하에는 전운이 감돌았으며 세력이 큰 자들은 여러 군(郡)을 차지하였고, 세력이 작은이들은 현읍(縣邑)을 차지했다.
囂問彪曰:往者周亡, 戰國並爭. 天下分裂, 數世然後乃定, 其抑者從橫之事復起於今乎? 將承運迭興在於一人也? 願先生論之。
외효가 표에게 물었다. “옛날 주나라가 망하고 전국시대가 되자 나라들이 서로 전쟁하였습니다. 천하가 분열되고 여러 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안정되었는데 혹시 전국시대와 같이 여러 나라들이 합종연횡(合縱連橫)을 하는 일이 지금에 다시 일어나겠습니까? 장차 한 사람에게 천명을 이어지게 하여 이전 시대를 대체하고 흥하게 되겠습니까? 선생께서 논해 주기를 바랍니다.”
對曰:周之廢興與漢異。昔周立爵五等, 諸侯從政, 本根旣微, 枝葉强大, 故其末流有從橫之事, 其勢然也。漢家承秦之制, 並立郡縣, 主有專己之威, 臣無百年之柄, 至於成帝, 假借外家, 哀平短祚, 國嗣三絶, 危自上起, 傷不及下。故王氏之貴, 傾擅朝廷, 能竊號位, 而不根於民。是以即真之後, 天下莫不引領而歎, 十餘年間, 外內騷擾, 遠近俱發, 假號雲合, 咸稱劉氏, 不謀而同辭。方今雄桀帶州城者, 皆無七國世業之資。詩云:皇矣上帝, 臨下有赫, 鑒觀四方, 求民之莫。今民皆謳吟思漢, 鄕仰劉氏, 已可知矣。
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나라의 흥망은 한나라와 다릅니다. 옛날의 주나라가 5등급의 작위를 세워주니 제후들이 각자 자신의 봉토를 다스렸습니다.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고 제후국들이 강대해진 까닭에 그 제후국들 사이에 합종연횡의 일이 있게 되었는데 그 역사가 변화한 추세[勢]라는 것이 그러하였습니다. 한나라 황실은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군과 현을 설치 하였습니다. 중앙의 황실은 오로지 자신에게 비롯된 위세가 있었으며 신하들에게는 백년을 버티어 나갈 기반이 세력이 없었습니다. 성제(成帝)의 시기에는 외척이 황실의 권위를 등에 엎게 되었고 애제(哀帝), 평제(平帝)의 치세는 짧았습니다. 거기에 성제, 애제, 평제가 후사를 두지 못하자 위태로움이 위에서부터 일어났지만, 그 위기는 아래까지 미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왕씨가 귀하게 되고 조정을 장악하고 황제의 호칭과 제위를 훔칠 수 있었지만 백성들에게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왕망이 황제에 즉위한 이후 천하가 목을 빼고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십 여년간 나라의 안과 밖이 소란해지고 먼 곳과 가까운 데에서 세력 있는 이들이 모두 일어나자 황제를 칭하는 자들이 많아졌지만 모두 유씨를 칭하고 서로 모의하지 않았음에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의 영웅들이 여러 고을과 성을 차지하고 있지만 모두 전국7웅과 같은 기반 바탕이 없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느님께서 아래에 임하시니 위엄이 밝게 빛나고 사방을 비추어 보시니 백성들이 안정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백성들은 모두 한나라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유씨를 향하고 우러러 본다는 것을 이미 알 수 있습니다.”
囂曰:先生言周, 漢之勢可也, 至於但見愚民習識劉氏姓號之故, 而謂漢家復興, 疏矣。昔秦失其鹿, 劉季逐而掎之, 時民復知漢虖。
외효가 말하였다. “선생께서 주나라, 한나라의 형세를 이야기하신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단지 어리석인 백성들이 유씨의 이름을 익숙하게 아는 것을 보았던 연고로 한나라 황실이 다시 부흥할거라 말씀하는 것은 근거가 약합니다. 옛날 진나라가 천하쟁패(天下爭覇)에서 패하여 나라가 망하고 유방(劉邦)이 쫓김을 당해 (항우에게) 견제당하던 시절의 백성들이 또한 한나라를 알았겠습니까?”
既感囂言, 又愍狂狡之不息, 乃著王命論以救時難。
이 외효의 말에 느낀 것이 있고 또한 세력 있는 이들이 미치고 날뜀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근심하여 왕명론(王命論)을 지음으로서 이 시기의 어려움을 구하려 하였다.
⏹ 班固 漢書 敍傳 (3)
반표(班彪)의 왕명론(王命論)이다.
昔在帝堯之禪曰: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舜亦以命禹。
옛날 요(堯)임금께서 선위하시면서 말씀하기를 “순(舜)이여, 하늘의 대명(大命)이 네 몸에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순임금 또한 우(禹)임금에게 천명을 양위하셨다.
曁于稷契, 咸佐唐虞, 光濟四海, 奕世載德, 至于湯武, 而有天下。
후직(后稷, 주나라 시조)과 설(契, 은나라 시조)의 시기에는 이들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을 보좌하고 사해를 두루 구제하고 여러 세대 동안 덕을 쌓으니,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시기에 이르자 천하를 소유하게 되었다.
雖其遭遇異時, 禪代不同, 至于應天順民, 其揆一也。
비록 서로 다른 시기였으며 선위(禪位)하는 방식도 달랐지만 하늘의 뜻에 응하고 백성들이 순종하게 한 그 다스림은 한결 같았다.
是故劉氏承堯之祚, 氏族之世, 著乎春秋。
때문에 유씨(劉氏)가 요임금의 제위를 계승한 씨족의 후손임은 춘추(春秋)에 드러나 있다.
*춘추(春秋)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昭公 29年 “요임금의 나라가 이미 쇠하였으나 그 후손 중에 유루(劉累)가 있어서 환룡씨(豢龍氏)에게 용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고 사공갑(姒孔甲; 하나라 14대 왕)을 섬겼다(陶唐氏旣衰, 其後有劉累, 學擾龍于豢龍氏, 以事孔甲).”
唐據火德, 而漢紹之, 始起沛澤, 則神母夜號, 以章赤帝之符。
요임금은 화덕(火德)에 근거하였고, 한(漢)나라는 이를 계승하였는데, 패현(沛縣)의 연못에서 처음 일어나니 곧 신모(神母)의 밤 울음소리가 있었으며, 적제(赤帝)의 징표가 드러났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漢高祖酒醉, 夜行澤中, 見白蛇當道, 斬之. 乃有神母號哭曰 : 赤帝子殺吾白帝子.
한고조가 술에 취해 밤에 연못 가운데를 가는데, 흰 뱀이 길에 있는 것을 보고 베어버렸다. 이내 신모(神母)가 통곡하며 말하기를 “적제(赤帝)의 아들이 나의 백제(白帝) 아들을 죽였다.”라고 하였다.
由是言之, 帝王之祚, 必有明聖顯懿之德, 豐功厚利積累之業, 然後精誠通於神明, 流澤加於生民, 故能爲鬼神所福饗, 天下所歸往。
이러한 연유를 말하자면, 제왕의 자리는 반드시 성(聖)스럽고, 아름다움을 밝게 드러내는 덕(德)과, 공명(功名)과, 이록(利祿)을 풍성하게 쌓은 업(業)이 있은 연후에야, 신명(神明)에 정성이 통하고 백성들에게 풍족함을 더할 수 있으니, 고로 귀신이 능히 복을 주는 바가 되고 천하가 귀속되는 바가 된다.
未見運世無本, 功德不紀, 而得屈起在此位者也。
운세가 아직 드러나지 않아 근본이 없고, 공덕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도, 굴기(屈起)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世俗見高祖興於布衣, 不達其故, 以爲適遭暴亂, 得奮其劍, 游說之士至比天下於逐鹿, 幸捷而得之, 不知神器有命, 不可以智力求也。
세속에서는 한고조가 일반 백성의 지위에서 흥기한 것만을 보고, 그 까닭을 통달하지 못하여 천하가 어지러운 시기를 만나 그 검을 들고일어날 수 있었고, 유세하는 선비들이 와서 쟁패(爭覇)하는 싸움 중에 천하를 편을 짓게 만들었는데, 요행히 전쟁에 이겨서 제위를 얻었다고 여긴다. 이는 제위에는 천명이 있고 지력으로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悲夫! 此世所以多亂臣賊子者也。
슬프도다! 이것이 세상에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많아지게 한 연유인 바인 것이로다.
若然者, 豈徒闇於天道哉? 又不睹之於人事矣。
이러한 자들은 설마 단지 천도(天道)에만 어두운 것인가? (그런 사람들은) 또한 인사(人事)에서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리라.
夫餓饉流隸, 飢寒道路, 思有裋褐之褻, 儋石之畜, 所願不過一金, 然終於轉死溝壑。
대저 굶주리고 유랑하는 하층민이 길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되면 헤진 베옷의 겹쳐 입음과 돌이 섞인 곡식이라도 쌓임이 있기를 생각하며, 바라는 바가 일금(一金)을 넘지 않음에도, 마침내는 고랑과 골짜기에서 굴러 넘어져 죽게 된다.
*베옷의 겹쳐 입음 : 안사고(顔師古)는 '안에 입는 옷'으로 해석하고, 전대흔(錢大昕)은 '옷을 겹쳐 입음'으로 해석, 여기서는 전대흔의 해석에 따른다. 서울역 앞 노숙자만 보아도 전대흔의 해석이 옳음을 알 수 있다.
何則? 貧窮亦有命也。
왜 그런가? 빈궁(貧窮) 또한 천명이 있기 때문이다.
況虖天子之貴, 四海之富, 神明之祚, 可得而妄處哉?
하물며 천하의 귀한 자리, 사해(四海)의 부유함, 신명(神明)의 복에 있어서는 (사람의 뜻 대로) 취득할 수 있고 망령되이 처(處)하겠는가?
故雖遭罹阨會, 竊其權柄, 勇如信布, 彊如梁籍, 成如王莽, 然卒潤鑊伏質, 亨醢分裂, 又況幺麽, 尙不及數子, 而欲闇奸天位者虖。
비록 고난과 재앙을 만나 그 권력을 훔친 이는, 용기가 한신(韓信), 경포(黥布)와 같고, 강하기가 항량(項梁), 항적(項籍)과 같고, 성공하기가 왕망(王莽)과 같을 지라도, 결국은 팽형과 참수형을 당하여 삶아지고 몸이 나누어졌다. 더구나 하물며 보잘 것 없는 능력을 가진 자가 오히려 운수(運數)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자리를 음모로 찬탈하기를 바라겠는가.
是故駑蹇之乘不騁千里之塗, 燕雀之疇, 不奮六翮之用, 楶梲之材不荷棟梁之任, 斗筲之子不秉帝王之重。
이런 까닭에 약한 말을 타면 천리의 길을 가지 못하고, 제비와 참새의 부류는 큰 깃털을 가진 새처럼 날지 못하고, 한 말과 둥구미(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와 같은 재능을 가진 이는 제왕의 중대한 역할을 처리하지 못한다.
易曰 : 鼎折足, 覆公餗。不勝其任也。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솥의 다리가 부러져 귀중한 음식을 엎지른다.’라고 하였으니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當秦之末, 豪桀共推陳嬰而王之。
진나라 말기 호걸들이 모두 진영(陳嬰)을 추천하여 왕으로 삼았다.
嬰母止之曰:自吾爲子家婦, 而世貧賤. 卒富貴不祥, 不如以兵屬人. 事成少受其利, 不成禍有所歸。
진영의 어머니가 그를 만류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의 집안에 며느리 노릇을 하기 시작한 이래 일평생 빈천(貧賤)하였다. 창졸간에 부귀하게 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며, 병사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 같지 못하다. 일이 성공하면 그 이익을 적게 받을 뿐이지만, 이루지 못하면 재앙이 귀속되는 바가 있다.”라고 하였다.
嬰從其言, 而陳氏以寧。
진영은 그 말을 따르니, 진씨 가문이 평안할 수 있었다.
王陵之母亦見項氏之必亡, 而劉氏之將興也。
왕릉(王陵)의 어머니는 또한 항우의 반드시 멸망함과, 유방의 장차 흥함을 알았다.
是時陵爲漢將, 而母獲於楚。
이 때 왕릉이 한나라의 장군이 되었는데, 왕릉의 어머니는 초나라에 포로로 잡혔다.
有漢使來, 陵母見之, 謂曰:願告吾子, 漢王長者, 必得天下, 子謹事之, 無有二心。
한나라의 사신이 와서 왕릉의 어머니를 만나보니, (왕릉의 어머니가 사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아들에게 이 말을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한나라의 왕은 덕이 높고 명망이 있는 사람이니 반드시 천하를 얻을 것이다. 아들은 삼가 그를 섬기고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된다.”
遂對漢使伏劍而死, 以固勉陵。
그리고 한나라 사신 앞에서 칼에 엎드려 죽어서, 굳건히 왕릉을 권면하였다.
其後果定於漢, 陵爲宰相封侯。
그 후 과연 한나라로 (천하가) 평정 되었으며, 왕릉은 재상이 되고 제후에 봉해졌다.
夫以匹婦之明, 猶能推事理之致, 探禍福之機, 而全宗祀於無窮, 垂策書於春秋. 而況大丈夫之事虖。
대저 일개 아녀자의 지혜만으로도, 여전히 능히 사리의 도리를 추측하고, 화복(禍福)의 관건을 찾을 수 있으니 무궁(無窮)히 가문과 제사를 보전하고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하물며 대장부의 일이랴.
是故窮達有命, 吉凶由人, 嬰母知廢, 陵母知興. 審此四者, 帝王之分決矣。
때문에 곤궁함과 현달(顯達)함은 천명(天命)에 있고, 길흉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며, 진영의 어머니는 폐(廢)함을 알았고, 왕릉의 어머니는 흥(興)함을 알았다. 이 4가지 것을 살핀다면 제왕의 본분을 감당할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蓋在高祖, 其興也有五。
대저 한고조가 그렇게 흥하게 된 것에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一曰帝堯之苗裔。
첫째는 요임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二曰體貌多奇異。
둘째는 신체에 기이함이 많았기 때문이다.
三曰神武有徵應。
셋째는 신명(神明)스런 위무(威武)가 실재로도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四曰寬明而仁恕。
네 번째는 관대하고 현명하며 인자하고 용서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五曰知人善任使。
다섯 번째는 다른 사람의 잘하는 점을 알고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加之以信誠好謀, 達於聽受。
이에 더하여 믿음과 정성으로서 좋은 계획을 세우고 듣고 받아들이기를 잘 하였다.
見善如不及, 用人如由己,
좋은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이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듯이 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부리는 것을 마치 자신의 몸을 쓰는 듯이 하였으며,
從諫如順流, 趣時如嚮赴。
간하는 말에 따르는 것이 마치 물이 흘러가듯이 하였으며, 때를 맞추기를 마치 응답하여 서둘러 달려가는 듯하였다.
當食吐哺, 納子房之策,
拔足揮洗, 揖酈生之說。
먹던 음식을 뱉어 가면서 장량(張良)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며, 발을 들어 올리고 발 씻는 것을 거두며, 역이기(酈食其)의 말에 읍(揖)을 하였다.
寤戍卒之言, 斷懷土之情,
高四皓之名, 割肌膚之愛。
수졸(戍卒) 출신 누경(婁敬)의 말에 깨달음이 있어 낙양에 도읍을 정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였으며, 상산사호(商山四皓)의 명성을 높이고, 태자로 삼았던 유여의(劉如意; 한고조 후궁인 척부인의 아들)에 대한 총애를 그만 두었다.
*상산사호(商山四皓) : 상산에 살았던 4명의 명사(名士)인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를 가리킨다. 이들 모두 머리카락이 하얗기 때문에 4호(皓)라고 불렸다.
擧韓信於行陳, 收陳平於亡命, 英雄陳力, 群策畢擧。
군진(軍陣)에서 낮은 직책에 있던 한신(韓信)을 발탁하고, 망명해온 진평(陳平)을 거둬들여 영웅들이 힘을 펼치게 하고, 여러 책략들이 남김없이 펼쳐지게 하였다.
此高祖之大略,所以成帝業也。
이것이 바로 한고조의 대략(大略)이었으며 제업을 이룬 까닭인 바였다.
若乃靈瑞符應, 又可略聞矣。
한고조의 신령스럽고 상서로움이 부응(符應)한 것에 대해서 전해들은 것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初劉媼任高祖而夢與神遇, 震電晦冥, 有龍蛇之怪。
처음 한고조의 어머니께서 한고조를 회임하자 태몽에 신령스러움이 더불었는데, 그 꿈에 번개가 치고 어두컴컴한 중에 용과 뱀의 괴기함이 있었다고 한다.
及其長而多靈, 有異於衆。
한고조는 장성해서 (신체에) 신령스러움이 많아서 뭇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是以王, 武感物而折券。
때문에 왕씨 할머니 주막과, 무부(武負)의 주막에서, 한고조가 술에 취하면 용이 나타나는 기이한 일이 있으니, 왕씨와 무씨는 한고조의 술 외상 장부를 꺾어 부수어 버렸다고 한다.(술 외상을 기록한 장부가 죽간이기 때문)
呂公睹形而進女, 秦皇東游以厭其氣, 呂后望雲而知所處。
여문숙평(呂文叔平; 여후의 아버지)은 한고조의 기이한 신체를 보고 딸과 결혼시켰으며, 진시황은 동쪽으로 순행을 가서 한고조의 기운을 느끼고 싫어했으며, 여후는 구름을 보고 한고조가 머무는 곳을 알았다.
始受命則白蛇分, 西入關則五星聚。
비로소 하늘의 명을 받아 백사(白蛇)를 참수하여 죽이고, 서쪽으로 관문(함곡관)을 들어가니 목성, 화성, 토성, 수성, 금성이 동쪽 하늘에 모였다.
故淮陰, 留侯謂之天授, 非人力也。
때문에 회음후(淮陰侯; 한신)와 유후(留侯; 장량)가 말하기를 ‘하늘이 내리신 것이며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했었다.
歷古今之得失, 驗行事之成敗, 稽帝王之世運, 考五者之所謂, 趣舍不厭斯位, 符瑞不同斯度, 而苟昧權利, 越次妄據, 外不量力, 內不知命, 則必喪保家之主, 失天年之壽, 遇折足之凶, 伏斧鑕之誅。
고금의 득실을 살피고 행사(行事)의 성패를 검증해보고 제왕의 세운(世運)을 고찰하고 5가지 언급했던 것들을 상고해보면, 마땅하지 않은 지위를 선택하고, 길상(吉祥)한 징조를 다르게 헤아리고, 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탐하고, 자신의 지위를 넘어 망령되이 행동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안으로는 천명을 알지 못하면, 곧 가문을 보전해야 하는 가장이 반드시 죽게 되고, 하늘이 내린 수명을 채우지 못하며, 다리를 부러뜨리는 형벌을 당하고, 도끼에 목을 베이게 될 것이다.
英雄誠知覺悟, 畏若禍戒, 超然遠覽, 淵然深識, 收嬰陵之明分, 絶信布之覬覦, 距逐鹿之瞽說, 審神器之授受, 無貪不可幾者, 爲二母之所笑, 則福祚流於子孫, 天祿永終矣。
영웅은 진실로 깨달았던 것을 이러한 재앙을 두려워하며 경계하고 초연하게 먼 곳을 바라보며 깊게 알아서 진영, 왕릉의 명석한 처분을 거두어 드리고 한신, 경포의 본분을 벗어난 희망을 끊어버리며 천하를 쟁패하자는 헛소리와 거리를 두고 제위의 주고받음을 잘 살펴 자신이 바랄 수 없는 것을 탐하지 않으며, 두 어머니들(진영, 왕릉의 어머니)이 즐거워하는 바를 실천하면 곧 복이 자손에게로 흘러가고 천록(天祿)이 영원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반표의 왕명론이다. 한서의 고제기(高帝紀) 내용을 알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관계로 특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知隗囂終不寤, 乃避地於河西。
(반표는) 외효가 끝내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고 바로 하서(河西)로 피난하였다.
河西大將軍竇融嘉其美德, 訪問焉。
하서대장군 두융(竇融)은 그의 미덕을 아름답게 여기고 반표를 방문하였다.
擧茂材, 爲徐令, 以病去官。
두융은 반표를 무재(茂才; 秀才)라고 추천하여 서(徐)의 현령(縣令)으로 삼았으나, 반표는 병으로 사임하였다.
後數應三公之召。
반표는 후에 여러 차례 삼공(三公)의 부름에 응하였다
仕不爲祿, 所如不合。
그는 출사(出仕)하였으나 녹봉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와 같은 행위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부합하지 않은 바 였다.
學不爲人, 博而不俗。
그의 학문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박학하면서도 속되지 않았다.
言不爲華, 述而不作。
그의 말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으며 다른 이의 것들을 서술하기만 했지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는 않았다.
▶ 名(이름 명)은 ❶회의문자로 夕(석; 초승달, 어두움)과 口(구; 입, 소리를 내다)의 합자(合字)이다. 저녁이 되어 어두우면 자기 이름을 말해서 알려야 했다. ❷회의문자로 名자는 ‘이름’이나 ‘평판’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名자는 夕(저녁 석)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夕자는 초승달을 그린 것으로 ‘저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요즘이야 한밤중에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어두운 저녁 저 멀리 오는 누군가를 식별하기 위해 이름을 불러본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名자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래서 名(명)은 (1)이름 (2)숫자 다음에 쓰이어 사람의 수효를 나타내는 말 (3)사람을 이르는 명사의 앞에 붙어서 뛰어난, 이름난, 훌륭한, 우수한 또는 무엇을 썩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이름 ②평판(評判), 소문(所聞) ③외관(外觀), 외형(外形) ④명분(名分) ⑤공적(功績) ⑥글자, 문자(文字) ⑦이름나다, 훌륭하다 ⑦이름하다, 지칭(指稱)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일컬을 칭(稱), 이름 호(號)이다. 용례로는 세상에서 인정 받는 좋은 이름이나 자랑을 명예(名譽), 명목이 구별된 대로 그 사이에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나 분수를 명분(名分), 사물이나 현상을 서로 다른 것 끼리 구별하여 부르는 이름을 명칭(名稱), 세상에 떨친 이름을 명성(名聲), 이름이나 주소나 직업 따위를 죽 적어 놓은 장부를 명부(名簿), 형식 상 표면에 내세우는 이름이나 구실을 명목(名目), 성명과 해당 사항을 간단히 적은 문건을 명단(名單), 훌륭하고 이름난 경치를 명승(名勝), 명분과 의리 또는 문서 상의 이름을 명의(名義), 이름난 의원이나 의사를 명의(名醫), 일년 동안의 명절날과 국경일의 통칭을 명일(名日), 뛰어나거나 이름이 난 물건 또는 작품을 명품(名品), 이름이나 직위 등을 적어 책상 따위의 위에 올려놓는 길고 세모진 나무의 패나 문패 또는 명찰을 명패(名牌), 잘 다스려서 이름이 난 관리를 명관(名官), 훌륭하고 이름난 경치를 명소(名所), 이름과 실상이 서로 들어맞음을 명실상부(名實相符), 이름난 큰 산과 큰 내로 경개 좋고 이름난 산천을 명산대천(名山大川), 남의 명예를 더럽히거나 깎는 일을 명예훼손(名譽毁損),이름은 헛되이 전해지는 법이 아니라는 뜻으로 명성이나 명예가 널리 알려진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이르는 말을 명불허전(名不虛傳), 명성이나 명예란 헛되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명불허득(名不虛得) 등에 쓰인다.
▶ 繮(고삐 강)은 형성문자로 韁(강)과 동자(同字), 缰(강)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실사변(糹; 가는 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畺(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繮(강)은 ①고삐(코뚜레, 굴레에 잡아매는 줄) ②말고삐(말굴레에 매어서 끄는 줄) ③굴레(마소의 머리에 씌워 고삐에 연결한 물건) ④속박(束縛)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명예의 고삐 줄과 이익의 쇠사슬이라는 뜻으로 사람을 명예욕과 이익에 사로 잡히게 만드는 욕심을 오랏줄에 비유하는 말을 명강리쇄(名繮利鎖)에 쓰인다.
▶ 利(이로울 리/이)는 ❶회의문자로 勿(물)은 여기에서는 쟁기와 흙을 나타내는 모양이며 논을 갈아 엎는 모양이다. 禾(화)는 벼라는 곡식을, 利(리)는 곡식을 만드는 밭을 가는 쟁기로, 쟁기날이 날카롭다, 나중에 날카롭다는 것과의 관계로 부터 勿(물)을 刀(도)로 쓰게 되고, 또 刀(도)는 돈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익의 뜻으로도 쓰여지게 된 듯하다. ❷회의문자로 利자는 ‘이롭다’나 ‘유익하다’, ‘날카롭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利자는 禾(벼 화)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벼와 칼을 함께 그린 것이니 利자는 벼를 베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利자는 본래 칼이 벼를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였다. 利자에 아직도 ‘날카롭다’나 ‘예리(銳利)하다’라는 뜻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利자는 후에 ‘이익’이나 ‘이롭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는데, 벼를 베어 추수하는 것은 농부들에게 수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利(리)는 ①이롭다, 이하다(이익이나 이득이 되다) ②이롭게 하다 ③유익하다 ④편리하다 ⑤통하다 ⑥날카롭다 ⑦이기다 ⑧날래다 ⑨탐하다 ⑩이자 ⑪이익(利益) ⑫승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더할 가(加), 더할 증(增), 더할 첨(沾), 더할 첨(添), 더할 익(益),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해할 해(害)이다. 용례로는 편리하게 씀을 이용(利用),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탬이 된 것을 이익(利益), 이익을 얻음을 이득(利得), 남에게 돈을 빌어 쓴 값으로 무는 일정한 비례의 돈을 이자(利子), 돈벌이를 하는 동안에 남는 돈을 이윤(利潤), 적을 이롭게 함을 이적(利敵), 자기 이익만 꾀함을 이기(利己), 이익을 탐내는 욕심을 이욕(利欲), 다른 이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이타(利他), 겨루어 이김을 승리(勝利), 이익이 있음을 유리(有利), 편하고 이로우며 이용하기 쉬움을 편리(便利), 빌려 준 돈의 이자를 금리(金利), 조건이나 입장 따위가 이롭지 못함을 불리(不利), 날이 서 있거나 끝이 뾰족함을 예리(銳利),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이익을 폭리(暴利), 이익을 얻음을 득리(得利), 실지로 얻은 이익을 실리(實利), 이해 관계를 이모저모 따져 헤아리는 일을 이해타산(利害打算),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나아지게 함을 이용후생(利用厚生), 이로움과 해로움, 얻음과 잃음을 이해득실(利害得失), 이익과 손해가 반반으로 맞섬을 이해상반(利害相半), 이욕은 사람의 밝은 지혜를 어둡게 만듦을 이령지혼(利令智昏), 이해에 관하여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따진다는 이석추호(利析秋毫) 등에 쓰인다.
▶ 鎖(쇠사슬 쇄)는 형성문자로 鎻(쇄)는 통자(通字), 锁(쇄)는 간자(簡字), 鏁(쇄)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쇠 금(金; 광물, 금속, 날붙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짜맞춘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肖(소, 쇠)로 이루어졌다. 금속(金屬)의 고리를 짜맞추어 이은 것의 뜻으로 쇠사슬을 말한다. 그래서 鎖(쇄)는 ①쇠사슬 ②자물쇠 ③항쇄(項鎖: 죄인에게 씌우던 형틀), 수갑(手匣) ④가두다 ⑤잠그다 ⑥(얼굴을)찡그리다, 찌푸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자물쇠를 쇄금(鎖金), 문을 걸어 잠금을 쇄문(鎖門), 쇠사슬의 무늬를 새긴 창문을 쇄창(鎖窓), 쓸모없고 사소한 일을 쇄사(鎖事), 앞쪽은 흉골에 뒤쪽은 견갑골에 잇대어 어깨를 형성하는 뼈를 쇄골(鎖骨), 쇠고리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방식을 쇄식(鎖式), 계속되는 숙직 때문에 여러 날 외출을 못함을 쇄직(鎖直), 쇠고리를 길게 이어 놓은 모양을 쇄상(鎖狀), 외국과의 통상을 끊고 외국 배의 입항을 금함을 쇄항(鎖港), 여닫게 되어 있는 물건을 잠그는 장치를 쇄약(鎖鑰), 봉하고 잠금 또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음을 봉쇄(封鎖),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움을 폐쇄(閉鎖), 두 쪽을 맞걸어서 매는 사슬 또는 서로 잇대어 관련을 맺는 사물을 연쇄(連鎖), 죄인의 발에 채우는 쇠사슬을 족쇄(足鎖), 쇠로 만든 자물쇠를 철쇄(鐵鎖), 문 따위를 열고 닫음을 개쇄(開鎖), 문을 잠금을 관쇄(關鎖), 자물쇠 따위를 꼭 잠금을 심쇄(深鎖), 쇠사슬로 매어 둠을 계쇄(繫鎖), 자물쇠 따위를 단단히 잠금을 뇌쇄(牢鎖), 문을 걸어 잠그고 살며시 도망간다는 말을 쇄문도주(鎖門逃走), 외국과의 통상과 교역을 하지 않거나 극히 제한하는 정책을 쇄국정책(鎖國政策), 하나의 화학 반응이 다른 반응을 일으키고 그것이 다른 것으로 번져서 계속되는 반응을 연쇄반응(連鎖反應), 어떤 기업이 쓰러질 때 그 영향으로 다른 기업이 차례로 쓰러지는 일을 연쇄도산(連鎖倒産), 적의 배나 밀수하는 배 따위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함선으로 바다를 차단하는 일을 해상봉쇄(海上封鎖), 목에는 칼을 씌우고 발에는 족쇄나 차꼬를 채움으로 곧 죄인을 단단히 잡죔을 이르는 말을 항쇄족쇄(項鎖足鎖)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