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
영계기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자족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즐거움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榮 : 영화 영(木/10)
啓 : 열 계(口/8)
期 : 기약할 기(月/8)
三 : 석 삼(一/2)
樂 : 즐길 락(木/11)
출전 : 열자(列子) 제1권 1편 천서(天瑞), 공자가어(孔子家語)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자만이 또한 행복을 얻는다고 서양 철인은 말한다. 동양에선 서경(書經)에 나오는 대로 오복(五福)을 갖춘 사람이 행복할 것이다.
장수, 부귀, 건강을 뜻하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에다 덕을 좋아하고 행하는 유호덕(攸好德),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눈을 감는 고종명(考終命)이다. 이런 것을 갖춰 남이 볼 때 더없이 행복할 사람도 자기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불행하다.
오복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모자란 듯 자족(自足)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영계기(榮啓期)가 가장 행복을 누린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공자(孔子)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은둔 현자로 음률에 정통하고 박학다식했으며 사상이 자유분방했다. 그는 사슴가죽 옷에 새끼줄로 허리를 두른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언제나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자가 어느 때 태산(泰山)에서 노닐다가 이런 영계기를 보고 무슨 일로 그렇게 즐거워하는지 물어보았다. 도가(道家)의 전설적인 사상가 열어구(列禦寇)가 서술했다는 열자(列子)의 천서(天瑞)에 대답이 나온다.
영계기는 즐거움이 아주 많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것(吾得爲人)이 일락, 남자로 태어난 것(吾既得爲男)이 이락, 이미 90세가 되었으니(吾既已行年九十) 이것이 삼락이라 했다.
그러면서 가난이란 선비에게 늘 있는 일이고, 죽음은 마지막인데 그것을 기다리는데 무슨 근심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공자는 참으로 여유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왕숙(王肅)이 편찬한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영성기(榮聲期)로 되어 있다.
동진(東晉)의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은 유명한 음주(飮酒) 2수에서 그를 부러워한다. ‘구십 노인 허리띠 줄이며 가난하게 살았거늘, 젊은 내가 어찌 이를 못 참겠는가(九十行帶索 飢寒況當年).’
영계기가 남자로 태어난 것을 이락으로 치면서 남존여비(男尊女卑)란 말이 나온다. 오늘날 평등한 사회에서 보면 90노인이 무슨 망발인가 하는 페미니스트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차별로 보지 않고 태어난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거움을 찾았던 영계기로서는 여자로 태어났어도 즐거웠을 것이 틀림없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고 잘 하는 일이 다르게 태어났을 뿐이다. 남자가 큰일을 이뤘어도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다. 남녀 조화를 잘 이뤄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
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
영계기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자족(自足)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즐거움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열자(列子) 등에서 유래되었다.
공자(孔子)가 태산(泰山)에서 노닐다가 성(주나라 무왕이 동생 숙무를 봉한 땅)이라는 곳의 들판을 지나가는 영계기라는 은자(隱者)를 만났다. 그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새끼줄로 허리를 두른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자가 다가가 "선생께서는 무슨 일로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인지요?"라고 묻자, 영계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즐거움이 매우 많아 세 가지나 되오이다. 하늘이 낳은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귀한데,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오. 남녀의 차이가 있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으므로 남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데, 나는 이미 남자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오다. 사람이 태어나서 해와 달을 보지 못하고 강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이미 95세가 되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오. 가난이란 선비에게는 늘상 있는 일이요, 죽음이란 사람의 최후인 것이오. 늘상 있는 일에 처하여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이니 무슨 근심이 있겠소?"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훌륭하다. 능히 스스로 여유로운 사람이로다"라고 칭찬하였다.
이 고사(故事)는 열자의 천서(天瑞) 편과,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실려 있는데, 공자가어에서는 영계기를 영성기(榮聲期)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영계기삼락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즐거움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한편,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말도 이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
흔히 다른 문화나 사회, 집단의 경계에 있으면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을 '경계인(境界人)'이라 하는데, 노자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경계인이다.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나아감과 물러남, 이것과 저것 따위 '경계'에서 살며 그 경계에서 늘 판단과 선택, 결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경계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사람은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닌, 애매(曖昧)하고 모호(模糊)한 존재 아닌가?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孔子)가 태산(太山)에 놀러 갔다가 영계기(榮啓期)라는 인물이 성(郕) 땅의 들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사슴 갖옷을 입고 새끼로 띠를 두르고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고 있었다.
공자가 물었다. '선생께서 즐거워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先生所以樂, 何也)?'
영계기가 대답했다. '내게는 즐거움이 꽤 많소. 하늘이 온갖 것을 낳음에 오로지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오(吾樂甚多. 天生萬物, 唯人爲貴, 而吾得爲人, 是一樂也).
남자와 여자는 달라서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므로 남자가 귀한데, 나는 이미 남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둘째 즐거움이오(男女之別, 男尊女卑, 故以男爲貴, 吾旣得爲男矣, 是二樂也).'
'개 팔자가 상팔자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첫째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사람도 드물다. 그렇다면 남자로 태어나 살면서 참으로 즐거워하는 이는 더 드물 터. 물론 여성의 삶에 빗대 '그래도 남자로 태어난 내가 더 행복하다'고 말할 사내도 있겠지만, 좀스러울 따름이다.
왜 영계기가 즐거움으로 삼은 것을 다른 이들은 즐거움으로 삼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으로 누구로 태어난들 삶은 고정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 위에서 진동(振動)하고 유동(流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즐거움
살다보면 때때로 삶의 즐거움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삶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칠십이 넘은 나이에 부모님이 살아 계실리 없고 누님 마저 사경을 헤매고 계시니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서 일락(一樂)부터 이미 어긋나 있다. 요즈음 내 생활에 즐거움이란 있는 것인가?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춘추 시대 때 은사(隱士) 영겨기(榮啓期)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자(孔子)가 태산(泰山)을 지날 때 그는 사슴 가죽 옷에다가 노끈으로 허리를 묶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鹿裘帶索 鼓琴而歌). 그 모양을 보고 이상해서 공자가 물었다. “선생님 무엇이 그렇게 즐거우십니까?”
그랬더니 “내 즐거움 참 많지. 하늘이 만물을 냈는데, 오직 사람이 귀한 것인데 내가 사람이 됐으니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요(吾樂甚多, 天生萬物, 唯人爲貴, 吾得爲人, 是一樂也). 사내 계집 사이에 사내가 높고 계집이 낮은데 그래서 사내를 귀하다는 것인데, 내가 이미 사내로 태어 났으니 이것이 둘째 즐거움이요(男女之別, 男尊女卑, 故以男爲貴, 吾旣得爲男矣 是二樂也).
사람이 났어도 해, 달을 볼 새도 없이 기저귀에서 죽어 버리는 것도 있는데, 나는 벌써 아흔을 살아왔으니 이것이 셋째 즐거움이지(人生有不見日月, 不免襁褓者, 吾旣已行年九十矣, 是三樂也). 가난은 선비에게 늘 있는 일이고, 죽음은 사람살이의 끝이 아닌가. 늘 있는 일에 머물면서 그 끝을 기다리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貧者, 士之常, 死者, 人之終. 處常待終, 何不樂)!” 라고 했다.
그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자연과 하나 되어 살자는 사람이다. 이것을 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이라 한다. 공자가 그의 여유 있는 성품을 칭송했다.
또 증자(曾子)의 삼락(三樂)이란 것이 있다.
有親可畏, 有君可事, 有子可遺, 此一樂也.
어버이 있어 두려워할 수 있고, 임금 있어 섬길 수 있고, 아들 있어 남겨 놓을 수 있으면 첫째 즐거움이요.
有親可諫, 有君可去, 有子可怒, 此二樂也.
어버이 있어 잘못이 있을 때 말해 드릴 수 있고, 임금 있어 뜻 맞지 않을 때 버리고 갈 수 있고, 아들 있어 잘못할 때 노해줄 수 있으면 둘째 즐거움이요.
有君可喩, 有友可助此三樂也.
임금 있어 잘못 있을 때 바른 길을 일러줄 수 있고, 벗 있어 도와줄 수 있으면 셋째 즐거움이다.
증자는 인간관계를 존중하여 의리에 살자는 생각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쪽에 잘못이 있어 말이라도 해주고, 노하고, 항의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의무요 따라서 오히려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맹자(孟子)의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이다.
孟子曰 :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在焉.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통일된 천하의 임금이 되는 것은 여기에 끼지 못한다.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부모가 살아 계시며 형제들이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이 첫번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땅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의 즐거움이요,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번째의 즐거움이다.
(孟子 盡心上篇)
맹자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에 들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말을 이어서 더 설명한다.
廣土衆民, 君子欲之, 所樂不存焉.
땅을 넓히고 사람을 많게 하는 것을 군자가 원하지만 군자가 즐거워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中天下而立, 定四海之民, 君子樂之, 所性不存焉.
천하의 가운데 서서 온 사방의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을 군자는 즐거워 하지만 군자의 본성에는 들지 않는다.
君子所性, 雖大行不加焉. 雖窮居不損焉, 分定故也.
군자의 본성이 비록 크게 행해진다 해도 더 보태지 않고 살기가 궁하다 해도 덜어내지 않는다. 마땅히 할 바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군자의 본성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마음에 뿌리 내리고 있다.
장자(莊子)는, “지금 세속에서 하는 일이나 즐기는 것을 볼 때, 나는 그 즐거움이 과연 즐거움인지 즐거움이 아닌지 잘 모르겠다(今俗之所爲與其所樂, 吾又未知樂之果樂邪, 果不樂邪). 내가 세속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관찰해 볼 때, 떼거리로 몰려가면서 죽더라도 그만둘 순 없다며 모두가 즐거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즐거운 일인지 즐겁지 않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吾觀夫俗之所樂, 舉群趣者, 誙誙然如將不得已, 而皆曰樂者, 吾未之樂也, 亦未之不樂也). 과연 즐거움이란 있는걸까, 없는걸까? 나는 무위(無爲)야말로 참된 즐거움이라 여기고 있지만, 세속 사람들은 그것을 큰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果有樂無有哉? 吾以無爲誠樂矣, 又俗之所大苦也). 그러므로 말하길, '지극한 즐거움은 세속의 즐거움을 초월하는데 있고, 지극한 명예는 세속의 명예를 초월하는데 있다'라고 한다(故曰; 至樂無樂, 至譽無譽)." <莊子 外篇 第18 至樂 1-2>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은 인생삼락을 이렇게 꼽았다. "문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문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는 것, 문을 나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閉門閱會心書 開門迎會心客 出門尋會心境 此乃人間三樂)."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유수종사기(游水鐘寺記)'에서 세 가지 즐거움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것, 나 혼자 외롭게 찾던 곳을 마음 맞는 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 이때 다산은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었다. 진사가 된 21세 때의 글이다.
추사 김정희는 일독(一讀), 이호색(二好色) ,삼음주(三飮酒)를 세 가지 즐거움이라고 했다. 책 읽고 글 쓰며 항상 배우는 선비정신, 사랑하는 이와의 변함없는 애정, 벗과 함께 어울리는 풍류를 말한 것이리라. 그의 멋진 글씨가 남아 있다.
2,500여년 전에 이 세상을 살고 간 공자는 사람으로 태어남 자체에 비중을 두었고 그보다 200여 년 후에 태어난 맹자는 벌써 자신보다 부모형제의 생존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또 남을 가르친다는 일에 의미를 부여했다. 일에서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맹자로부터 또 2천여 년이 흐른 지금, 삼락은 어떻게 변했을까. 20세기를 지칭하는 한자(漢字)는 '바쁠 망(忙)' 자였는데 21세기 한자는 '즐거울 락(樂)’자란다. 20세기는 모두들 바쁘게 살았다면 21세기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 같다. 주 5일제가 시작된지도 몇년이 지났으니...
식도락을 위시하여 오감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여러가지 락(樂)이 생겨났다. 공자의 '가난해도 즐거워한다(貧而樂)'는 말에서 온 안빈락도(安貧樂道)를 지금에 얘기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딱한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지만 정녕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이야말로 참된 즐거움이 아닐까.
인공지능이니 AlphaGo니 하는 세상이라지만 분명 장자(莊子)는 '지극한 즐거움은 세속의 즐거움을 초월하는데 있고, 지극한 명예는 세속의 명예를 초월하는데 있다'라고 했으니.
공자 이르시기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마침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닌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하며 살아가는 것도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아니할 수는 없을 진대...
맹자(孟子)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에 들어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거늘 금뱃지를 달려고, 권력을 잡으려고, 놓지 않으려고 벌어지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역겨운 공천 추태를 보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다시 생각해 본다.
군자삼락 이렇게 즐길수 있기를 기대하며...
맹자(孟子)는 진심(盡心) 장에서 군자삼락(君子三樂), 즉 군자의 세 즐거움에 대해 말했다.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에 굽어봐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맹자는 이 앞에 '천하의 왕 노릇 하는 것은 세 가지 즐거움에 들어 있지 않다'고 전제했다. 이것이 유가(儒家)의 삼락(三樂)이라면 도가(道家)의 삼락은 영계기(榮啓期)가 정의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와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나온다.
공자가 태산(泰山)을 유람할 때 영계기가 사슴 갖옷[鹿皮]에 띠는 새끼줄[索]을 하고 거문고를 타자 공자가 "뭐가 그리 즐거운가?"라고 물었다. 영계기는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사람이 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낮은데 남자가 된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사람이 태어나서 강보(襁褓)를 면치 못하고 죽기도 하는데 아흔 다섯까지 살았으니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어긋난 인식도 있지만 나름대로 세상을 달관하며 사는 처세술이었다. 그러나 삼락(三樂)을 누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조선 초기 문신 권오복(權五福)은 "만 가지 일 중에 삼락 외에 구할 것이 없다(萬事不求三樂外)"고 말했지만 연산군 4년(1498)의 무오사화 때 서른한 살의 나이로 사형당했다. 자신이 왕 노릇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수양대군이 천하의 왕 노릇 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 임금의 손자였던 조선 중기의 이건(李健)은 '어머니 생신 때 취해서 짓다(慈親生辰, 醉後作)'라는 시에 '어찌 사람이 세상 살면서 삼락을 다 갖추랴(何人處世俱三樂)'라고 읊었다.
이건의 부친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었는데, 인조 6년(1628) 북인 유효립(柳孝立)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진도(珍島)에 안치된 후 자결해야 했다. 이건도 형제들과 제주로 안치됐다가 풀려 나와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집안이 풍비박산 난 다음에야 군자삼락도 그리 쉽지 않은 복임을 느꼈던 것이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천하의 왕 노릇 하려는 욕심 때문에 그런 일을 만든다. 꼭 한번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이건처럼 어머니라도 살아계신 것을 기뻐할까?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
열자(列子: 기원전 4세기경)는 중국 전국 시대의 도가(道家) 사상가로, 이름은 어구(禦寇)이다. 정(鄭: 806~375)나라의 은자로서 기원전 4세기경의 인물로 알려진다. 오늘날 열자(列子) 8권 8편 이 남아 있으며, 이 책에 대해서는 그가 서술한 것을 문인 ·후생들이 보완했다 하거나 또는 후세의 위작이다 하는 견해가 대립된다.
제1권 1편 천서(天瑞)에서는 "정(靜)하고 허(虛)하면 그 거(居)를 얻으리라(貴虛說 귀허설)"고 했다. 이에 대해 잡가(雜家)의 대표작인 '여씨춘추'의 제 99편 불이(不二)에서는 "열자는 허(虛)를 귀히 여긴다"라고 평가한다.
유명한 고사들 우공이산(愚公移山), 남존여비"(男尊女卑),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기우(杞憂) 등은 열자(列子)에 실린 우화(寓話)로서, 이 책은 장자(莊子)와 함께 도가적 우화가 풍부한 서적이다.
천서편(天瑞篇)
천서(天瑞)는 '하늘의 상서로운 징조'라는 뜻으로, 천서편에서는 만물의 생성 변화와 도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죽음이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다. 열자(列子)는 도가서(道家書)이지만 잡다한 학설이 혼용되어 있고 많은 우화로 이루어져 있다. 천서편 7장에서의 영계기(榮啓期)의 삼락(三樂), 11장의 열자의 귀허설(貴虛說), 13장의 기우(杞憂)는 많이 회자되고 있는 내용이다.
子列子居鄭圃,四十年人无識者.
열자는 정(鄭)나라의 포(圃) 지방에서 40년 동안 살았는데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國君卿大夫眎之,猶眾庶也.
임금이나 경대부(卿大夫)들도 그를 보기를 일반 백성과 다름없이 보았다.
國不足,將嫁於衛.
정나라에 기근이 들자 가솔을 이끌고 위나라로 가려고 하였다.
弟子曰:先生往无反期,弟子敢有所謁;先生將何以教?先生不聞壺丘子林之言乎?
제자들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이제 가신다면 다시 돌아오실 기약이 없습니다. 제자로서 감히 여쭈오니 선생님께서 무엇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호구자림(壺丘子林)의 말씀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子列子笑曰:壺子何言哉?雖然,夫子嘗語伯昏瞀人,吾側聞之,試以告女。其言曰:有生不生,有化不化。不生者能生生,不化者能化化。生者不能不生,化者不能不化,故常生常化。常生常化者,无時不生,无時不化。陰陽爾,四時爾,不生者疑獨,不化者往復。往復,其際不可終;疑獨,其道不可窮。黃帝書曰:谷神不死,是謂玄牝。玄牝之門,是謂天地之根。綿綿若存,用之不勤。故生物者不生,化物者不化。自生自化,自形自色,自智自力,自消自息。謂之生化、形色、智力、消息者,非也.
자열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호구자림 선생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선생께서 일찍이 나의 친구인 백혼무인(伯昏瞀人)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으니, 그것을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그 말씀에 이르시기를 ‘자라는 것[事物]과 자라지 않는 것[道]이 있고 변화하는 것이 있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 자라지 않는 것은 자라는 것을 잘 자라나게 해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하는 것을 잘 변화하게 해준다. 자라는 것은 자라지 않을 수가 없으며, 변화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항상 자라고 항상 변화한다. 항상 자라고 항상 변화하는 것은 어느 때이건 자라지 않은 때가 없으며, 변화하지 않은 때가 없다. 음기와 양기가 그렇고 네 계절도 이와 같다. 자라지 않는 것은 독립적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순환하는 것이다. 순환함은 그 끝이 없으며, 독립적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그 규칙이 없어지지 않는다. 황제서(黃帝書)에 이르기를 ‘도는 텅 빈 산골짜기의 신과 같고 영원히 존재하며, 이것을 현빈(玄牝)이라고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 만물의 근본이라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같고 천지만물이 아무도 써도 지쳐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물을 자라게 하는 그 본질은 자라지 않으며, 만물을 변화하게 하는 규칙은 변화하지 않는다. 만물은 저절로 자라고 저절로 변화하며, 저절로 형성되고 저절로 색깔을 띠며, 저절로 지혜로워지며 저절로 힘을 지니며, 저절로 소멸하고 저절로 자라난다. 그런데 이것을 자라게 하고 변화하게 하며, 형성되게 하고 색깔을 띠게 하며, 지혜를 쓰게 하고 힘을 갖게 하며, 소멸하게 하고 자라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셨다.
子列子曰:昔者聖人因陰陽以統天地。夫有形者生於无形,則天地安從生?故曰:有太易,有太初,有太始,有太素。太易者,未見氣也:太初者,氣之始也;太始者,形之始也;太素者,質之始也。氣形質具而未相離,故曰渾淪。渾淪者,言萬物相渾淪而未相離也。視之不見,聽之不聞,循之不得,故曰易也。易无形埒,易變而為一,一變而為七,七變而為九。九變者,究也,乃復變而為一。一者,形變之始也。清輕者上為天,濁重者下為地,沖和氣者為人;故天地含精,萬物化生。
열자가 말하였다. "옛날에 성인(聖人)은 음양 2기(二氣)를 빌어 천지를 다스렸다. 형체가 있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면 천지[乾坤]는 어디로부터 생겼겠는가? 그러므로 이르기를, ‘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태역이라는 것은 아직 기(氣)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다. 태초라는 것은 기(氣)가 나타난 시초이며, 태시라는 것은 형체가 나타난 시초이며, 태소라는 것은 물질의 시초이다. 기와 형체와 물질이 갖추어져서 서로 분리되지 않음을 혼륜(渾淪:혼돈)이라고 한다. 혼륜[혼돈]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서로 뒤섞여 있어서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그것을 들어도 들리지 않고 거기에 따르려 해도 따를 수가 없어 이를 일러 역(易)이라고 한다. 역(易)에는 형상과 경계가 없다. 역이 변하여 一이 되고, 一이 변하여 七이 되고, 七이 변하여 九가 된다. 九로 변한 것은 궁극에 이른 것이어서, 곧 다시 변하여 一이 된다. 一은 형체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맑고 가벼운 것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내려와서 땅이 되고, 충화(沖和)의 기운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는 정기(精氣)를 머금어서 만물을 변화시켜 자라게 하는 것이다.”
子列子曰:「天地无全功,聖人无全能,萬物无全用。故天職生覆,地職形載,聖職教化,物職所宜。然則天有所短,地有所長,聖有所否,物有所通。何則?生覆者不能形載,形載者不能教化,教化者不能違所宜,宜定者不出所位。故天地之道,非陰則陽;聖人之教,非仁則義;萬物之宜,非柔則剛:此皆隨所宜而不能出所位者也。故有生者,有生生者;有形者,有形形者;有聲者,有聲聲者;有色者,有色色者;有味者,有味味者。生之所生者死矣,而生生者未嘗終;形之所形者實矣,而形形者未嘗有;聲之所聲者聞矣,而聲聲者未嘗發;色之所色者彰矣,而色色者未嘗顯;味之所味者嘗矣,而味味者未嘗呈:皆无為之識也。能陰能陽,能柔能剛,能短能長,能員能方,能生能死,能暑能涼,能浮能沈,能宮能商,能出能沒,能玄能黃,能甘能苦,能羶能香。无知也,无能也,而无不知也,而无不能也。
열자가 말하였다. “천지에는 완전한 작용은 없고, 성인에게는 전능함이 없으며, 만물에는 완전한 쓰임은 없다. 그러므로 하늘이 하는 일은 생명들을 덮어주는 것이고, 땅이 하는 일은 형체를 지닌 것을 싣는 데 있고, 성인이 하는 일은 만인을 교화하는 것이고, 사물은 그에 마땅한 용도에 쓰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에는 단점이 있으며, 땅에도 장점이 있고, 성인도 막히는 때가 있고, 사물도 잘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어찌 그러한가? 뭇 생명들을 덮어주는 하늘은 형체를 지닌 것을 실을 수 없으며, 형체를 지닌 것을 실어주는 땅은 사람들을 가르쳐 감화시킬 수 없으며, 교화하는 성인은 사물의 적합한 쓰임을 어길 수 없으며, 적합한 쓰임이 정해진 사물은 그의 위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도는 음(陰)이 아니면 양(陽)이요, 성인의 가르침은 인(仁)이 아니면 의로움(義)이다. 만물의 본질은 부드러움이 아니면 굳셈이다. 이것은 모두 각자의 적합함을 따르며 그 위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가진 것이 있고, 그 생명을 자라게 해주는 것이 있고, 형체가 있는 것이 있고, 그 형체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있으며, 소리가 나는 것이 있고, 그 소리를 소리 나게 해주는 것이 있으며, 색깔을 띠는 것이 있고, 그 색깔을 색깔이 나게 해주는 것이 있으며, 맛이 나는 것이 있고, 그 맛을 맛이 나게 해주는 것이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이 나타난 것에서 죽게 되지만, 그 생명을 자라게 해주는 것은 종말이 있던 적이 없다. 형체는 형체를 지니는 것에서 실제로 나타나지만, 그 형체를 형체가 있게 한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소리는 소리 나는 것에서 들리지만, 그 소리를 소리 나게 해주는 것은 소리를 낸 적이 없다. 색은 색깔을 띠는 것에서 드러나지만, 그 색을 색깔 나게 해주는 것은 나타낸 적이 없다. 맛은 맛이 나는 것에서 맛볼 수 있지만, 그 맛을 맛이 나게 해주는 것은 드러난 적이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무위(無爲)의 작용이다. 음이 될 수도 있고 양이 될 수도 있으며, 부드러울 수도 있고 굳셀 수도 있으며,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으며, 둥글 수도 있고 모날 수도 있으며,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으며, 더울 수도 있고 서늘할 수도 있으며, 뜰 수도 있고 가라앉을 수도 있으며, 궁음(宮音)을 낼 수도 있고 상음(商音)을 낼 수도 있으며, 나타낼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으며, 검을 수도 있고 누럴 수도 있으며, 단맛 일수도 있고 쓴맛 일수도 있으며, 노린내가 날 수도 있고 향기로울 수도 있다. 아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또한 알지 못하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다.”
子列子適衛,食於道,從者見百歲髑髏,攓蓬而指,顧謂弟子百豐曰:唯予與彼知而未嘗生未嘗死也。此過養乎?此過歡乎?
열자가 위(衛)나라로 가는 중에 길에서 밥을 먹다가 이어서 백 년 묵은 해골을 보고 쑥대를 뽑아 해골을 가리키면서, 제자인 백풍(百豐)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오직 나와 저것만이 아직 전생(轉生)하지도 않고 아직 완전히 죽지도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과연 슬퍼하겠는가? 이것을 과연 기뻐하겠는가?
種有幾:若䵷為鶉,得水為藚,得水土之際,則為䵷蠙之衣。生於陵屯,則為陵舄。陵舄得鬱栖,則為烏足。
씨에는 미묘한 작용이 있다. 마치 개구리가 메추라기로 되는 것과 같아서, (씨가) 물을 얻으면 계(藚)라는 수초가 되고, 물가의 습지에서는 청태(靑苔:갈파래)가 된다. 언덕에 생기면 질경이가 된다. 질경이가 거름더미 속에서 자라면 오족(烏足)이라는 독초(毒草)가 된다.
烏足之根為蠐螬,其葉為胡蝶。胡蝶胥也,化而為蟲,生竈下,其狀若脫,其名曰鴝掇。鴝掇千日,化而為鳥,其名曰乾餘骨。
오족(烏足)의 뿌리는 (땅 속에서) 나무굼벵이가 되고, 그 잎사귀는 (땅 위에서) 나비가 된다. 나비는 얼마 있다가 변화해서 벌레가 되어 부뚜막 밑에서 생겨나는데, 그 모양이 막 껍질을 벗은 것과 같고 그 이름을 귀뚜라미(鴝掇)라고 한다. 이 귀뚜라미는 천 일 정도 지나면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건여골(乾余骨)이라 한다.
乾餘骨之沫為斯彌。斯彌為食醯頤輅。食醯頤輅生乎食醯黃軦,食醯黃軦生乎九猷。九猷生乎瞀芮,瞀芮生乎腐蠸。
건여골의 침은 시미(斯彌:쌀벌레)가 되고, 시미는 식혜이로(食醯:눈에놀이 벌레)가 된다. 식혜이로(頤輅) 벌레는 눈에놀이 벌레에서 생겨나고, 식혜황황 벌레는 구유(九猷) 벌레에서 생겨난다. 구유벌레는 무예(瞀芮) 벌레에서 생겨나며, 무예는 부권(腐蠸) 벌레에서 생겨난다.
羊肝化為地皋,馬血之為轉鄰也,人血之為野火也。
양의 간은 지고(地皐)라는 진흙이 되고, 말의 피는 귀신불(轉鄰)이 되고, 사람의 피는 도깨비불(野火)이 된다.
鷂之為鸇,鸇之為布穀,布穀久復為鷂也。
매(鷂)는 새매(鸇)가 되고, 새매는 뻐꾸기가 되며 뻐꾸기는 오래 있다가 다시 매가 된다.
鷰之為蛤也,田鼠之為鶉也,朽瓜之為魚也,老韭之為莧也。
제비는 조개가 되고 두더지는 메추라기가 되고, 썩은 오이는 물고기가 되고, 오래 된 부추는 비름이 된다.
老羭之為猨也,魚卵之為蟲。
늙은 검은 암양은 원숭이가 되고, 물고기의 알은 벌레가 된다.
亶爰之獸,自孕而生,曰類。
선원산(亶爰山)의 짐승은 스스로 새끼를 배고 낳으며 이것을 유(類)라 한다.
河澤之鳥,視而生,曰鶂。
개울이나 못의 새는 보기만 하여도 새끼를 낳는데 이것을 역(鶂)이라 한다.
純雌其名大腰,純雄其名稺蜂。
순수한 암컷의 이름은 대요(大腰)라 하고 순수한 수컷의 이름은 치봉(穉蜂)이라 한다.
思士不妻而感,思女不夫而孕。
사사(思士)는 아내 없이 정을 통하고, 사녀(思女)는 남편 없이 잉태한다.
后稷生乎巨跡,伊尹生乎空桑。
후직(后稷)은 거인의 발자국에서 태어났고, 이윤(伊尹)은 공상(空桑)에 의해 태어났다.
厥昭生乎濕,醯雞生乎酒。
궐소(厥昭)는 습한 데서 생겨나고, 초파리(醯雞)는 술에서 생긴다.
羊奚比乎不筍,久竹生青寧,青寧生程,程生馬,馬生人。
양해(羊奚) 풀은 더 이상 죽순이 돋지 않는 오래 묵은 대나무와 교접하여 청녕(靑寧)을 낳고, 청녕은 정(程)이라는 짐승을 낳고, 정은 말(馬)을 낳고 말은 사람을 낳는다.
人久入於機。萬物皆出於機,皆入於機。
사람은 오래 되면 틀(機)로 들어간다. 이처럼 만물은 모두 틀(機)에서 나와서 모두 틀로 들어가는 것이다.”
黃帝書曰:形動不生形而生影,聲動不生聲而生響,无動不生无而生有。
황제서(黃帝書)에 이르기를, “형체가 움직이면 형체는 생기지 않으나 그림자가 생기며, 소리가 움직이면 소리는 생기지 않으나 메아리가 생기며, 무(無)가 움직이면 무(無)가 생기지 않으나 유(有)가 생긴다”라고 하였다.
形,必終者也;天地終乎?與我偕終。
형체는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천지는 끝이 있는가? 나와 함께 끝이 날 것이다.
終進乎?不知也。
끝은 다함이 있는 것인가? 알 수가 없다.
道終乎本无始,進乎本不久。
도는 끝이 있는가, 본래부터 시작이 없었다. 다함이 있는가, 본래 오래됨도 없었다.
有生則復於不生,有形則復於无形。
생명이 있는 것은 곧 생명이 없는 것으로 돌아가고, 유형(有形)은 곧 무형(無形)으로 돌아간다.
不生者,非本不生者也;无形者,非本无形者也。
생명이 없는 것은 본래 생명이 없던 것이 아니요, 형체가 없는 것은 본래 형체가 없던 것은 아니다.
生者,理之必終者也。
생명이 있는 것은 이치에 따르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다.
終者不得不終,亦如生者之不得不生。
끝이 있는 것이 끝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은 또한 삶이 있는 것이 삶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而欲恆其生,盡其終,惑於數也。
그런데도 그 삶을 영원히 하려하며, 그 끝을 없애려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精神者,天之分;骨骸者,地之分。
정신은 하늘의 몫이요, 육체란 땅의 몫이다.
屬天清而散,屬地濁而聚。
하늘에 속하는 것은 맑아서 흩어지게 되고 땅에 속하는 것은 혼탁하여 모이게 된다.
精神離形,各歸其真,故謂之鬼。
정신은 형체에서 분리되면 각각 그의 본원으로 돌아가므로 그것을 귀(鬼)라고 이른다.
鬼,歸也,歸其真宅。
귀(鬼)는 돌아가는 것(歸)이며 그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黃帝曰:精神入其門,骨骸反其根,我尚何存?
황제가 말하였다. “정신은 그의 문으로 들어가고 육체는 그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나는 또한 무엇이 존재하게 되겠는가?”
人自生至終,大化有四:嬰孩也,少壯也,老耄也,死亡也。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네 번 있으니, 어린아이 때와 젊을 때와 늙었을 때와 죽을 때이다.
其在嬰孩,氣專志一,和之至也;物不傷焉,德莫加焉。
어린아이 때에는 기운과 뜻이 한결같아 지극히 조화로운 상태를 이룬다. 외물이 그를 해치지 않고 덕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其在少壯,則血氣飄溢,欲慮充起;物所攻焉,德故衰焉。
젊을 때에는 곧 혈기가 왕성히 넘치고 욕망과 생각이 가득히 일어나서 외물이 그에게 공격을 가하게 되고 덕은 그 때문에 쇠약하게 된다.
其在老耄,則欲慮柔焉;禮將休焉,物莫先焉;雖未及嬰孩之全,方於少壯,間矣。
늙은 때에는 곧 욕망과 생각이 여려지고 육체가 휴식하려 하므로 외물이 앞서지 못하게 한다. 비록 갓난아기처럼 완벽한 상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젊을 때와 비교해 본다면 차이가 있다.
其在死亡也,則之於息焉,反其極矣。
죽을 때는 곧 종식으로 나아가서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孔子遊於大山,見榮啟期行乎郕之野,鹿裘帶索,鼓琴而歌。
공자가 태산에 놀러갔다가 영계기(榮啓期)가 성(郕)땅의 들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남루한 갖옷을 입고 허리에 새끼를 두르고는,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노래 부르고 있었다.
孔子問曰:先生所以樂,何也?
공자가 물었다. "선생이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對曰:吾樂甚多。天生萬物,唯人為貴。而吾得為人,是一樂也。男女之別,男尊女卑,故以男為貴;吾既得為男矣,是二樂也。人生有不見日月、不免襁褓者,吾既已行年九十矣,是三樂也。貧者士之常也,死者人之終也,處常得終,當何憂哉?
영계기가 대답하였다. “나의 즐거움은 매우 많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나게 함에 오직 사람만을 귀하게 하였는데,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첫째의 즐거움입니다. 남녀의 구별은 남자가 존귀하고 여자가 비천하므로 남자를 귀하게 여깁니다. 나는 이미 남자의 몸을 얻었으니 이것이 둘째의 즐거움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해와 달을 보지 못하고, 강보에 싸인 채 죽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이미 90세이니, 이것이 셋째의 즐거움입니다. 가난한 것은 선비에게 늘 있는 일이요, 죽는 것은 인생의 끝입니다. 평범한 상태에 처하다가 죽음을 얻는 것이니, 마땅히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孔子曰:善乎!能自寬者也。
공자가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정말 자신에게 관대하신 분이군요."
林類年且百歲,底春被裘,拾遺穗於故畦,並歌並進。
임류(林類)의 나이가 거의 백 살이 다 되었는데, 봄이 되어도 갖옷을 입고 묵은 밭 이랑에서 이삭을 주우면서 노래를 부르며 다니고 있었다.
孔子適衛,望之於野。顧謂弟子曰:彼叟可與言者,試往訊之!
공자가 위(衛)나라로 가다가 들에서 그를 바라보고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저 노인은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 같으니, 시험 삼아 누가 가서 그에게 물어 보아라!”
子貢請行。
자공(子貢)이 자청하여 갔다.
逆之壠端,面之而歎曰:先生曾不悔乎,而行歌拾穗?
그를 밭이랑 끝에서 그를 만나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후회한 일이 없으십니까? 그렇게 노래 부르고 이삭만 주으시니.”
林類行不留。歌不輟。
임류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노래를 그치지도 않았다.
子貢叩之不已,乃仰而應,曰:吾何悔邪?
자공이 묻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니, 이에 노인이 허리를 젖히며 대답하였다. “내가 무엇을 후회한단 말이오?"
子貢曰:先生少不勤行,長不競時,老无妻子,死期將至,亦有何樂而拾穗行歌乎?
자공이 말했다. “선생은 젊어서는 부지런히 힘써 행실을 닦지 아니 하셨고, 성장한 뒤에도 시운(時運)을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늙어서는 처자도 없이 이제 죽을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 무슨 즐거움이 있어서 이삭을 줍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십니까?"
林類笑曰:吾之所以為樂,人皆有之,而反以為憂。少不勤行,長不競時,故能壽若此。老无妻子,死期將至,故能樂若此。
임류(林類)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즐거움으로 삼는 이유를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건만 사람들은 도리어 그것을 근심으로 여기고 있지요. 젊어서는 힘써 행실을 닦지 아니하고, 장성하여 시운을 잡으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오. 늙어서 처자가 없고 죽을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 때문에 이처럼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오.“
子貢曰:壽者人之情,死者人之惡。子以死為樂,何也?
자공이 말했다. “장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의 정이요, 죽음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죽음을 즐거움으로 여기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林類曰:死之與生,一往一反。故死於是者,安知不生於彼?故吾知其不相若矣。吾又安知營營而求生非惑乎?亦又安知吾今之死不愈昔之生乎?
임류가 말하였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은 한 번 가고 한 번 되돌아오는 것이오. 그러니 여기에서 죽은 사람이 어찌 저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음을 어찌 알겠소? 나는 죽고 사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오. 내가 또 악착같이 삶을 구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소? 또 내가 지금의 죽음이 전생의 삶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어찌 알겠소?"
子貢聞之,不喻其意,還以告夫子。夫子曰:吾知其可與言,果然;然彼得之而不盡者也。
자공은 그 말을 듣고도 그 말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돌아와서 그 말을 공자에게 전하니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과연 그렇구나. 그러나 그는 도리를 깨닫고는 있지만 충분하지는 못한 사람이로다.”
子貢倦於學,告仲尼曰:願有所息 。
자공이 학문에 권태를 느껴 공자에게 말하였다. “휴식을 취할 곳이 있었으면 합니다.”
仲尼曰:生无所息。
공자가 말했다. “살아서는 휴식할 곳이 없다.”
子貢曰:然則賜息无所乎?
자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제게는 휴식할 곳이 없는 것입니까?"
仲尼曰:有焉耳,望其壙,睪如也,宰如也,墳如也,鬲如也,則知所息矣。
공자가 말했다. “있지. 저 무덤을 바라보아라. 불룩하고 우뚝하며 봉곳하게 불쑥 솟아오른 것이 네가 쉴 곳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子貢曰:大哉死乎!君子息焉,小人伏焉。
자공이 말했다. "위대하군요, 죽음이라는 것은! 군자는 휴식을 하고 소인은 굴복하는 것이군요."
仲尼曰:賜!汝知之矣。人胥知生之樂,未知生之苦;知老之憊,未知老之佚;知死之惡,未知死之息也。
공자가 말했다. "사(賜)야! 네가 그것을 알았구나. 사람들은 모두 삶의 즐거움을 알고 있으나 삶의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늙음의 고달픔을 알고 늙음의 편안함을 모른다. 죽음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죽음이 휴식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晏子曰:善哉,古之有死也!仁者息焉,不仁者伏焉。
안자(晏子)가 말하였다. “훌륭하다, 옛날에 있던 죽음이여! 어진 사람은 휴식을 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굴복을 한다.
死也者,德之徼也。古者謂死人為歸人。
죽음이라는 것은 덕이 돌아갈 곳이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일러 ‘돌아간 사람’이라 하였다.
夫言死人為歸人,則生人為行人矣。
무릇 죽은 사람을 돌아간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곧 산 사람은 ‘행인(行人)’이라 한다.
行而不知歸,失家者也。
길을 가면서 돌아갈 줄 모른다면 그는 집을 잃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一人失家,一世非之;天下失家,莫知非焉。
한 사람이 집을 잃으면 온 세상이 그를 비방하지만, 천하가 집을 잃으면 비난할 줄 모른다.
有人去鄉土,離六親,廢家業,遊於四方而不歸者,何人哉?世必謂之為狂蕩之人矣。
어떤 사람이 고향을 떠나 육친을 버리고 집안일을 내던지고 사방으로 유랑하면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라 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반드시 그를 일러 방탕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又有人鍾賢世,矜巧能,脩名譽,誇張於世,而不知己者,亦何人哉?世必以為智謀之士。
또 어떤 사람이 육체적인 삶을 중히 여기고, 교묘한 능력을 뽐내고, 명예를 닦아 세상에 과장된 자랑을 하면서도 그칠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어떠한 사람이라 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반드시 그를 지혜와 꾀가 있는 사람이라 여길 것이다.
此二者,胥失者也。而世與一不與一,唯聖人知所與,知所去。
이 두 사람은 모두 다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한쪽 편은 들어 주면서도 다른 한쪽 편은 들어주지 않지만, 오직 성인(聖人)만이 편들어 줄 것을 알고 버릴 것을 안다.”
或謂子列子曰:子奚貴虛?
어떤 사람이 열자에게 말하였다. "선생은 어찌하여 공허함(虛)을 귀하게 여기십니까?”
列子曰:虛者无貴也。
열자가 대답 하였다. “공허함이란 것에는 귀할 것이 없습니다."
子列子曰:非其名也,莫如靜,莫如虛。靜也虛也,得其居矣;取也與也,失其所矣。事之破䃣,而後有舞仁義者,弗能復也。
열자가 또 말하였다. “그것은 명분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靜)만한 것이 없고, 공허함(虛)만한 것은 없습니다. 고요하고 공허하게 산다면 살 방법을 터득한 것이요, 그것을 받거나 준다면 그의 처신을 잃은 것입니다. 일이 그릇된 뒤에 인의(仁義)를 고무하는 사람은 도를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粥熊曰:運轉亡已,天地密移,疇覺之哉?故物損於彼者盈於此,成於此者虧於彼。損盈成虧,隨世隨死。往來相接,閒不可省,疇覺之哉?凡一氣不頓進,一形不頓虧;亦不覺其成,不覺其虧。亦如人自世至老,貌色智態,亡日不異;皮膚爪髮,隨世隨落,非嬰孩時有停而不易也。閒不可覺,俟至後知。
주 문왕의 스승인 육웅(粥熊)이 말하였다. “자연의 운전은 그침이 없고 하늘과 땅도 남모르게 옮겨 가고 있으니, 누가 그것을 깨닫겠는가? 그러므로 만물은 저쪽에서 줄어들면 이쪽에서 가득하게 되며, 이쪽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저쪽에서는 이지러진다. 줄어들고 가득차고 이루어지고 이지러지며, 따라서 태어나고 따라서 죽는 것이다. 오고 가며 서로 접하면서 그 틈을 살필 수도 없는데 누가 그것을 깨달을 것인가? 무릇 한 가지 기운은 갑자기 나오는 것이 아니며, 한 가지 형체는 갑자기 이지러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한 그 이지러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또한 사람이 태어나서 늙을 때까지, 얼굴의 모양과 지혜의 상태가 하루도 다르지 않은 날이 없고, 피부와 손톱과 머리카락이 나는 대로 떨어지며, 젖먹이 때부터 멈추어 있어 바뀌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잠깐 사이에 깨달을 수가 없고 뒤에 가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杞國有人,憂天地崩墜,身亡所寄,廢寢食者。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과 땅이 무너져서 떨어지면, 몸이 의지할 데가 없어질 것을 근심하여 침식을 폐하는 자가 있었다.
又有憂彼之所憂者,因往曉之,曰:天,積氣耳,亡處亡氣。若屈伸呼吸,終日在天中行止,奈何憂崩墜乎?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근심하는 것을 근심하는 사람이 있어 그를 찾아가 깨우쳐주려고 말했다. “하늘은 기운이 쌓여 있을 뿐이며, 기운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몸을 움직이고 호흡하는 것들은 하루 종일 하늘 안에서 행동하고 그치는 것이니, 어찌하여 무너져서 떨어질 것을 근심하십니까?"
其人曰:天果積氣,日月星宿不當墜邪?
그 사람이 말했다. “하늘이 과연 기가 쌓인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지게 마련 아닙니까?”
曉之者曰:日月星宿,亦積氣中之有光耀者,只使墜,亦不能有所中傷。
그를 깨우치려는 사람이 말하였다. “해와 달과 별들 또한 기운이 쌓인 것 중에서 빛을 내는 것이오. 비록 떨어지게 하여 맞는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이오.”
其人曰:奈地壞何?
걱정하는 자가 말했다. “땅이 꺼지는 것은 어찌합니까?”
曉者曰:地積塊耳,充塞四虛,亡處亡塊。若躇步跐蹈,終日在地上行止,奈何憂其壞?
깨우치는 자가 말했다. “땅은 흙덩이가 쌓인 것일 뿐이오. 사방의 빈 곳에 가득 차있어서 흙덩이가 아닌 데가 없소이다. 당신이 머뭇거리고 걷고 밟고 뛰는 것은 하루 종일 땅위에서 행동하고 그치는 것이니, 어찌하여 땅이 꺼질 것을 근심하십니까?”
其人舍然大喜,曉之者亦舍然大喜。
그 사람이 마음이 환하게 풀려 크게 기뻐하였고, 그를 깨우쳐 준 사람도 또한 마음이 환하게 풀려 크게 기뻐하였다.
長廬子聞而笑之曰:虹蜺也,雲霧也,風雨也,四時也,此積氣之成乎天者也。山岳也,河海也;金石也,火木也,此積形之成乎地者也。知積氣也,知積塊也,奚謂不壞?夫天地,空中之一細物,有中之最巨者。難終難窮,此固然矣;難測難識,此固然矣。憂其壞者,誠為大遠;言其不壞者,亦為未是。天地不得不壞,則會歸於壞。遇其壞時,奚為不憂哉?
장려자(長廬子)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무지개나 구름, 안개, 바람, 비, 사철 등과 같은 것은 기운이 쌓여서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산악, 강, 바다, 쇠, 돌, 불, 나무 등과 같은 것은 그것이 형체가 쌓여서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기가 쌓이는 것을 알고 흙덩이가 쌓이는 것을 알면 어찌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무릇 하늘과 땅은 공중의 한 작은 물건으로 있는 것 가운데서는 가장 큰 것이다. 끝나기도 어렵고 없어지기도 어려운 것은 그것이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다. 그것을 이루 헤아리기 어렵고 인식하기도 어려운 것은 그것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 그것이 무너질 것을 근심하는 자는 진실로 너무나 멀리 생각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 또한 아직 옳다고 할 수 없다. 하늘과 땅도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언젠가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무너질 때가 된다면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子列子聞而笑曰:言天地壞者亦謬,言天地不壞者亦謬。壞與不壞,吾所不能知也。雖然,彼一也,此一也。故生不知死,死不知生;來不知去,去不知來。壞與不壞,吾何容心哉?
열자(列子)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하늘과 땅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잘못이지만, 하늘과 땅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또한 잘못이다. 무너질지 무너지지 않을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리돼도 한가지요, 이리돼도 한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죽은 후를 알지 못하며, 죽어서는 사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올 때는 가는 것을 알지 못하며, 갈 때에는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너지는 것과 무너지지 않는 것에 대해 내 어찌 마음에 둘 것인가?”
舜問乎烝曰:道可得而有乎?
순(舜)임금이 뒤에서 보필하는 승(丞)에게 물었다. “도를 가질 수 있습니까?”
曰:汝身非汝有也,汝何得有夫道?
승(丞)이 말했다. “당신의 몸뚱이도 당신의 차지가 아닌데 당신이 어떻게 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舜曰:吾身非吾有,孰有之哉?
순임금이 말했다. “내 몸뚱이가 내 것이 아니라면 누구 것이란 말이오?”
曰:是天地之委形也。生非汝有,是天地之委和也。性命非汝有,是天地之委順也。孫子非汝有,是天地之委蛻也。故行不知所往,處不知所持,食不知所以。天地,強陽氣也,又胡可得而有邪?
승이 말했다. “그것은 천지자연이 모습을 맡긴 것입니다. 삶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천지자연이 조화로움을 맡긴 것이며,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性命)이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천지자연이 순조로움을 맡긴 것이며 자손들이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천지자연이 허물을 맡긴 것입니다. 그 때문에 길을 갈 때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며 머물 때에도 무엇을 지켜야 할지 알 수 없으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천지자연의 강건한 양기가 작용한 것이니 또 어찌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齊之國氏大富,宋之向氏大貧;自宋之齊,請其術。
제(齊)나라에 사는 국씨(國氏)는 큰 부자였고 송(宋)나라에 사는 향씨(向氏)는 무척 가난하였다. 향씨가 송나라에서 제나라로 가서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國氏告之曰:吾善為盜。始吾為盜也,一年而給,二年而足,三年大壤。自此以往,施及州閭。
국씨는 향씨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도둑질을 잘 합니다. 처음 내가 도둑질을 시작하자, 1년을 하고 나니 먹고 살게 되고, 2년을 하고 나니 넉넉해지고, 3년 만에 크게 번성해졌습니다. 그로부터는 고을 사람들에게까지 재물을 베풀었습니다.”
向氏大喜,喻其為盜之言,而不喻其為盜之道,遂踰垣鑿室,手目所及,亡不探也。
향씨는 매우 기뻐하였는데 도둑질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가 도둑질하는 도리를 깨닫지 못하였다. 마침내 남의 집 담을 넘고 방을 뚫고 들어가 손과 눈이 닿는 대로 훔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未及時,以贓獲罪,沒其先居之財。
얼마 안 되어 도둑질한 죄로 잡혀 그 조상들이 살던 집 재물까지 모두 몰수당하고 말았다.
向氏以國氏之謬己也,往而怨之。
향씨는 국씨가 자기를 속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국씨에게 가서 그것을 원망하였다.
國氏曰:若為盜若何?
국씨가 말했다. “당신은 도둑질을 어떻게 하였소?"
向氏言其狀。
향씨는 자신이 한대로 말하였다.
國氏曰:嘻!若失為盜之道至此乎?今將告若矣。吾聞天有時,地有利。吾盜天地之時利,雲雨之滂潤,山澤之產育,以生吾禾,殖吾稼,築吾垣,建吾舍。陸盜禽獸,水盜魚鱉,亡非盜也。夫禾稼、土木、禽獸、魚鱉,皆天之所生,豈吾之所有?然吾盜天而亡殃。夫金玉珍寶穀帛財貨,人之所聚,豈天之所與?若盜之而獲罪,孰怨哉?
국씨가 말했다. “아! 당신은 도둑질하는 도리를 그토록 몰랐단 말입니까? 이제 내가 당신에게 그 방법을 말해드리죠. 내가 듣건대 하늘에는 때가 있고, 땅에는 이로움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때와 이로움을 도둑질하였소. 구름과 비가 넓은 땅을 윤택하게 하고, 산과 연못이 산물을 키우니, 나는 그것으로 벼를 심어서 가꾸고, 나의 곡식을 불리면서, 나의 담을 쌓고 나의 집을 지었습니다. 땅에서는 금수(禽獸)를 훔치고, 물에서는 고기와 자라를 훔쳤으니 도둑질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무릇 벼와 곡식, 흙과 나무 , 날짐승과 들짐승, 물고기와 자라, 이들 모두 하늘이 키운 것이니 어찌 나의 소유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하늘의 것을 훔쳤기 때문에 재앙이 없었소. 금과 옥, 진기한 보물, 곡식과 비단, 재화(財貨)는 사람이 모으는 것이니 어찌 하늘이 준 것이라 할 수 있겠소? 당신이 그것들을 도둑질하여 죄를 졌다면 그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向氏大惑,以為國氏之重罔己也,遇東郭先生問焉。
향씨는 크게 당황하여 국씨가 또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동곽(東郭) 선생을 찾아가서 물었다.
東郭先生曰:若一身庸非盜乎?盜陰陽之和以成若生,載若形;況外物而非盜哉?誠然,天地萬物不相離也;仞而有之,皆惑也。國氏之盜,公道也,故亡殃;若之盜,私心也,故得罪。有公私者,亦盜也;亡公私者,亦盜也。公公私私,天地之德。知天地之德者,孰為盜邪?孰為不盜邪?
동곽 선생이 말하였다. “그대의 한 몸뚱이도 어찌 도둑질이 아니겠는가? 음양의 화합을 도둑질하여 그대의 삶을 이루고 그대의 육체를 이루었소. 하물며 그 밖의 물건이야 도둑질이 아닌 게 있겠는가? 진실로 그러하다면 천지와 만물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오. 그것을 알면서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모두 미혹된 짓이오. 국씨의 도둑질은 공도(公道)이므로 재앙이 없는 것이고, 그대의 도둑질은 사심(私心)이므로 죄를 졌던 것이오. 공(公)과 사(私)가 있는 것 또한 도둑질이요, 공과 사가 없는 것 또한 도둑질인 것이오. 공을 공이라 하고 사를 사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덕이니, 천지의 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도둑질을 하겠는가? 또 누가 도둑질을 하지 않고 있는가?”
[終]
▶️ 榮(영화 영/꽃 영)은 ❶형성문자로 栄(영)의 본자(本字), 荣(영)은 통자(通字), 荣(영)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영(熒에서 아래火를 뺀 글자, 등불의 둘레, 무엇이든지 둥글게 에워싸는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나무(木)에 꽃이 무성(茂盛)하게 피어 아름답다는 뜻이 합하여 영화(榮華)를 뜻한다. 꽃이 만발한 벽오동, 또 옛날엔 식물을 나무와 풀로 나누어 나무에 꽃이 많이 피는 것을 榮(영)이라 하고, 풀에 피는 것을 華(화)라 하였다. ❷회의문자로 榮자는 '영예'나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榮자는 木(나무 목)자와 冖(덮을 멱)자, 火(불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 나온 榮자에는 두 개의 횃불만이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이렇게 여러 개의 횃불을 그려 '밝다'라는 뜻을 표현했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木자와 冖자가 더해지면서 횃불의 재질과 불빛이 온몸을 감싼다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다만 지금의 榮자는 단순히 '밝다'라는 뜻보다는 사람의 '영예'나 '명예'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榮(영)은 ①영화(榮華) ②영예(榮譽) ③영광(榮光) ④명예(名譽) ⑤피, 혈액 ⑥꽃 ⑦영광(榮光)스럽다 ⑧영예(榮譽)롭다 ⑨성(盛)하다(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⑩무성(茂盛)하다 ⑪싱싱하다 ⑫피다 ⑬나타나다 ⑭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빛날 화(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마를 고(枯), 욕될 욕(辱)이다. 용례로는 더 좋거나 높은 직위로 옮아감을 영전(榮轉), 경쟁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를 영광(榮光), 빛나는 명예를 영예(榮譽), 권력과 부귀를 마음껏 누리는 일을 영화(榮華), 영화와 치욕을 영욕(榮辱), 남을 칭찬하고 흠모함을 영모(榮募), 지체가 높고 귀함을 영귀(榮貴), 지위가 높고 귀하게 됨을 영달(榮達), 영화의 즐거움을 영락(榮樂), 초목의 무성함과 말라죽음을 사물의 번영과 쇠락에 비유하는 말을 영락(榮落), 영화롭게 대우함을 영우(榮遇), 벼슬이나 지위가 높아짐을 영진(榮進), 신분이 귀하고 재물이 넉넉함을 영윤(榮潤), 번성하고 영화롭게 됨을 번영(繁榮),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허영(虛榮), 서로 같이 번영함을 공영(共榮), 덧없는 세상의 헛된 영화를 부영(浮榮), 평안하고 영화로움을 안영(安榮), 영화롭고 마르고 성하고 쇠함이란 뜻으로 개인이나 사회의 성하고 쇠함이 서로 뒤바뀌는 현상을 이르는 말을 영고성쇠(榮枯盛衰), 인생이 꽃피고 시드는 것은 한번 밥짓는 순간같이 덧없고 부질없음을 이르는 말을 영고일취(榮枯一炊), 마귀와 세속과 육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올라간 곳이라는 뜻으로 천당을 일컫는 말을 영승지회(榮勝之會), 권력이나 부를 얻어서 번성한다는 뜻으로 사치를 다함이나 호화롭고 화려함을 일컫는 말을 영요영화(榮耀榮華), 고목에서 꽃이 핌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남의 비유를 이르는 말을 고목발영(枯木發榮), 비단 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가는 영광이라는 뜻으로 입신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의금지영(衣錦之榮), 여러 대를 누리는 부귀와 공명을 이르는 말을 만대영화(萬代榮華), 노력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불로무영(不勞無榮) 등에 쓰인다.
▶️ 啓(열 계)는 ❶형성문자로 启(계)는 통자(通字), 啟(계)는 본자(本字), 启(계)는 간자(簡字), 唘(계)는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문을 손으로 연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계)로 이루어졌다. 입으로 사람을 가르쳐 깨우침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啓자는 '열다'나 '일깨워주다', '여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啓자는 启(열 개)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서는 戶(지게 호)자와 又(또 우)자, 口(입 구)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戶자는 외닫이 문을 뜻하고 又자는 손을 그린 것이니 이것은 문을 열어젖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口자까지 더해진 것은 문을 열어 누군가를 깨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갑골문에서의 啓자는 '열다'나 '일깨워 주다'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전에서는 又자가 攵자로 바뀌게 되면서 마치 몽둥이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啓(열 계)는 (1)공식적인 기도문(祈禱文)이나 성가(聖歌)를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교송(交誦) 또는 교창(交唱)할 때의 그 첫 부분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열다 ②열리다 ③일깨워 주다 ④여쭈다 ⑤보도(報道)하다 ⑥사뢰다(웃어른에게 말씀을 올리다) ⑦책상다리를 하다 ⑧안내(案內)하다 ⑨인도(引導)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열 개(開), 열 벽(闢),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닫을 폐(閉)이다. 용례로는 무식한 사람이나 어린아이를 깨우쳐 가르침을 계몽(啓蒙), 슬기와 재능을 열어 깨우쳐 줌을 계발(啓發), 동면하던 벌레가 봄철을 맞아 나와서 움직이게 됨을 계칩(啓蟄), 계발하여 지도함 또는 깨우쳐 이끌어 지도함을 계도(啓導), 나아갈 길을 지적하여 가리켜 줌을 계시(啓示), 가르쳐 길을 열어줌을 계적(啓迪), 일에 대한 경위나 의견을 윗사람에게 말이나 글로 여쭘을 계고(啓告), 윗사람에게 말씀을 올림을 계상(啓上), 황무지를 일구어 농사 지을 땅을 넓힘을 계토(啓土), 여닫음을 계폐(啓閉), 앞장서서 인도함을 계행(啓行), 계발하여 기름을 계배(啓培), 깨우쳐 이끎을 계유(啓誘), 갑자기 일어남을 발계(勃啓), 도와서 계발함을 우계(佑啓), 공경하여 답장함이란 뜻으로 회답 편지의 첫머리에 쓰는 말을 복계(復啓), 편지에 첫머리에 쓰는 말로써 삼가 사뢴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을 경계(敬啓), 절하고 아뢴다는 뜻으로 한문 편지 첫머리에 의례적으로 쓰는 말을 배계(拜啓), 편지의 서두에 쓰는 말로 삼가 아룁니다의 뜻을 근계(謹啓), 편지의 사연을 다 적은 뒤에 또 적어야 할 일이 생겼을 경우에 다시 이야기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을 재계(再啓), 삼가 아뢴다는 뜻으로 편지의 첫 머리에 쓰는 말을 숙계(肅啓), 편지 겉봉에 받는 이의 이름 밑에 앞이란 뜻으로 쓰는 말을 승계(升啓), 정해진 절차를 밟지 않고 먼저 임금에게 아뢰어 재가를 받음을 일컫는 말을 경선계하(徑先啓下), 병사丙舍 곁에 통로를 열어 궁전 내를 출입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함을 일컫는 말을 병사방계(丙舍傍啓), 군율을 어긴 사람을 먼저 처형하고 나중에 임금에게 보고함을 일컫는 말을 선참후계(先斬後啓),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을 일깨워 줌을 일컫는 말을 소질계발(素質啓發) 등에 쓰인다.
▶️ 期(기약할 기)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 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其(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기(其; 구분하거나 골라서 꺼내는 일)와 달(月; 달이 한바퀴 도는 기간으로 한 달, 또 일 년, 나중에 일정한 시간을 말함)이 한바퀴 돌아오는 것처럼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 합(合)하여 '기약하다'를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期자는 '기약하다'나 '약속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期자는 其(그 기)자와 月(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其자는 '그'나 '그것'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달은 주기적으로 모양이 변하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달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 期자에 쓰인 月자는 시간의 흐름을 뜻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期(기)는 (1)일정한 기간씩 반복되는 일의 하나하나의 과정(科程) (2)어떤 시기를 몇으로 나눈 그 하나 (3)지질(地質) 시대의 구분의 하나. 세(世)를 다시 잘게 나눈 것 등의 뜻으로 ①기약(期約)하다, 약속(約束)하다 ②기다리다 ③바라다, 기대(期待)하다 ④모이다 ⑤정(定)하다, 결정(決定)하다 ⑥적합(適合)하다, 알맞다 ⑦가르치다 ⑧더듬거리다 ⑨기간(期間) ⑩기한(期限) ⑪기일(期日), 예정(豫定)된 날짜 ⑫돌, 1주년(周年) ⑬때, 기회(機會) ⑭기복(朞服), 기년복(朞年服: 일 년 동안 입는 상복) ⑮백 살 ⑯한정(限定)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희망을 가지고 기약한 것을 기다림을 기대(期待), 어느 일정한 시기에서 어떤 다른 일정한 시기까지의 사이를 기간(期間), 미리 어느 때까지라고 정함 또는 그 시기를 기한(期限), 시간을 정하고 약속함을 기약(期約), 어느 기간의 첫머리를 기초(期初), 기간이나 학기 따위의 끝을 기말(期末), 성취되기를 바람을 기망(期望), 꼭 이루기를 기약함을 기필(期必), 작정한 날짜를 기일(期日), 정해 놓은 기한이 다 참을 기만(期滿), 기약하여 꾀함을 기도(期圖), 어떤 기한이 빨리 옴 또는 빠른 시기를 조기(早期), 임무를 맡아보는 일정한 기한을 임기(任期), 정한 때를 뒤로 물림을 연기(延期), 처음 시기를 초기(初期), 오랜 기간을 장기(長期), 짧은 기간을 단기(短期), 한 해를 석 달씩 넷으로 나눈 각 기간을 분기(分期), 한 학년 동안을 규정에 따라 나눈 수업 기간을 학기(學期), 같은 시기나 같은 무렵을 동기(同期), 끝장의 때나 시기를 말기(末期), 다음의 시기를 차기(次期), 뒤의 시기 또는 뒤의 기간을 후기(後期), 정한 기한 또는 기간을 정기(定期), 기한이 다 참 또는 그 기한을 만기(滿期), 집회나 회의 따위가 열리는 시기를 회기(會期), 알맞은 시기를 적기(適期), 느즈막한 시기를 만기(晩期), 남편과 아내가 되어 한평생 같이 지내자는 아름다운 언약을 이르는 말을 백년가기(百年佳期), 뜻하지 아니한 때에 우연히 서로 만남을 이르는 말을 불기이회(不期而會), 평생에 단 한 번 만남 또는 그 일이 생애에 단 한 번 뿐인 일 이라는 말을 일기일회(一期一會), 형벌의 목적은 형벌이 없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는 말을 형기무형(刑期無刑) 등에 쓰인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樂(노래 악, 즐길 락/낙, 좋아할 요)은 ❶상형문자로 楽(락)의 본자(本字), 乐(락)은 간자(簡字)이다. 현악기를 본뜬 글자, 신을 모시는 춤을 출 때 손에 가지는 방울을 본뜬 글자, 북 따위의 타악기를 본뜬 글자 등의 유래가 존재한다.기본 음가는 악이고, 전주된 음가로 락과 요가 있다. 락은 주로 형용사로 사용될 때, 요는 좋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락이 두음법칙이 적용되면 낙으로 표기된다. ❷상형문자로 樂자는 '음악'이나 '즐겁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樂자는 본래 악기의 일종을 뜻했던 글자였다. 갑골문에 처음 등장한 樂자를 보면 木(나무 목)자에 絲(실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거문고처럼 실을 튕겨 소리를 내는 악기와 줄을 표현한 것이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白(흰 백)자가 더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줄을 튕길 때 사용하는 피크를 뜻하기 위해서였다. 또 음악을 들으면 즐거우므로 '즐겁다'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樂(악)의 경우는 ①노래, 음악(音樂) ②악기(樂器) ③연주하다 ④아뢰다(말씀드려 알리다) 등의 뜻이 있고, 樂(락/낙)의 경우는 ⓐ즐기다(락) ⓑ즐거워하다(락) ⓒ편안하다(락) ⓓ풍년(豐年)(락) ⓔ즐거움(락) 등의 뜻이 있고, 樂(요)의 경우는 ⓕ좋아하다(요) ⓖ바라다(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노래 가(歌), 노래 요(謠), 노래 구(謳)이다. 용례로는 인생을 즐겁게 여기거나 세상을 밝고 좋게 생각함을 낙관(樂觀), 아무런 걱정이나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을 낙원(樂園), 늘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을 낙토(樂土), 재미 붙일 만한 일을 낙사(樂事), 경기 등에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이기는 것을 낙승(樂勝), 세상이나 인생을 즐겁게 생각함을 낙천(樂天), 노래의 곡조를 악곡(樂曲), 음악 기구를 악기(樂器), 작곡에 관한 착상이나 구상을 악상(樂想), 음악에서 연주되는 음의 배열을 악보(樂譜), 노랫소리 또는 가락스런 소리를 악음(樂音), 음악을 연주하는 단체를 악단(樂團), 물을 좋아함을 요수(樂水), 산을 좋아함을 요산(樂山), 즐기기는 하나 음탕하지는 않게 한다는 뜻으로 즐거움의 도를 지나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낙이불음(樂而不淫), 즐거움도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는 말을 낙극애생(樂極哀生), 타향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낙이사촉(樂而思蜀), 즐거움은 언제나 걱정하는데서 나온다는 말을 낙생어우(樂生於憂), 안락은 고통의 원인이라는 말을 낙시고인(樂是苦因), 천명을 깨달아 즐기면서 이에 순응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낙천지명(樂天知命), 즐겨서 시름을 잊는다는 뜻으로 도를 행하기를 즐거워하여 가난 따위의 근심을 잊는다는 말을 낙이망우(樂而忘憂), 즐거움에 젖어 촉 땅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쾌락 또는 향락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을 낙불사촉(樂不思蜀), 즐거움 속에 삶이 있다는 뜻을 나타냄을 일컫는 말을 낙중지생(樂中之生),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요차불피(樂此不疲),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산수 경치를 좋아함을 이르는 말을 요산요수(樂山樂水)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