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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육투뇌호(肉投餒虎)

작성자장경식|작성시간18.01.06|조회수286 목록 댓글 0

육투뇌호(肉投餒虎)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진다는 뜻으로, 대책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肉 : 고기 육(肉/0)
投 : 던질 투(扌/4)
餒 : 주릴 뇌(食/7)
虎 : 범 호(虍/2)
 
출전 : 사기(史記) 卷07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속담에 ‘호랑이더러 날고기 봐 달란다’라는 것이 있다. 염치와 예의도 모르는 자에게 그가 좋아하는 물건을 갖다 놓으면 성할 리가 없다. '호랑이와 함께 가죽 벗기는 의논을 한다'는 여호모피(與虎謀皮)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가죽을 얻기는커녕 사람 목숨이 날아간다.

또 있다. 속담과 더 가까운 뜻의 굶주린 호랑이(餒虎) 앞에 고기를 던진다(肉投)는 비유인데 어느 것이나 앞뒤 재지 않고 대책 없이 행동한다는 뜻의 성어다. 주릴 뇌(餒)는 헐벗어 몸이 얼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동뇌(凍餒) 이외에는 쓰임이 적다.

사기(史記)의 열전 중 위공자(魏公子)에 관한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403년~221년, 전국시대(戰國時代) 위나라 소왕(昭王)의 막내아들인 무기無忌)는 배다른 형 안희왕(安釐王)이 즉위하면서 신릉군(信陵君)에 봉해졌다. 신릉군은 각 제후국에서 활약했던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 중의 한 사람으로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들을 예우해 지략, 술수를 갖춘 빈객들이 3000명에 이르렀다.

숨어사는 선비 후영(侯嬴)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나 찾아가 마음을 얻고, 또 그가 아는 푸줏간의 주해(朱亥)도 끌어들였다. 역시 사공자인 이웃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이 진(秦)의 침입을 받고 위에 구원을 청했다. 안희왕이 겁을 먹고 군사를 내지 않자 신릉군은 빈객들만 거느리고 도우러 나갔다.

후영이 이것을 보고 말했다. "공자께서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여 이렇다 할 계책도 없이 진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이는 굶주린 호랑이한테 고깃덩이를 던져주는 것과 같아 아무런 이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今有難 無他端而欲赴秦軍 譬若以肉投餒虎 何功之有哉)."
 
그러면서 계책을 알려준 대로 신릉군이 왕의 총희와 짜고 병부를 훔쳐냈고, 힘이 장사인 주해의 도움으로 군대를 지휘함으로써 조나라를 구했다.
 
 

육투뇌호(肉投餒虎)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진다는 뜻으로, 대책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성어는 전국시대 말엽 4공자(四公子; 제나라 맹산군, 조나라 평원군, 초나라 춘신군)의 한명인 위(魏)나라 신릉군 무기(無忌)의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위(魏)나라 공자 무기(無忌)는 위나라 소왕(昭王)의 막내아들로 위나라 안희왕(安釐王)의 배다른 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면서 공자를 신릉군(信陵君)에 봉했다. 신릉군 무기는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들을 예의로 대우했다. 그래서 그의 빈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
 
위나라에 숨어 사는 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후영(侯嬴)이며, 나이가 70에도 집이 가난해서 대량성 이문(夷門= 동문)을 지키기는 문지기로 있었다. 공자 무기가 후영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모시기 위해 그가 친구를 만나면 볼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연회를 열어 그를 상석에 모시고 예의를 다했다. 공자의 정성으로 후영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침공하여 조나라의 수도가 함락할 지경까지 되었다. 이에 조나라는 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위나라는 진나라가 무서워 군사를 일으키고도 진군하지 않고 업이라는 땅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공자 무기는 여러 번 왕에게 군사를 진군시켜 조나라를 구원하자고 했으나 왕이 거부했다.
 
공자 무기는 할 수 없이 빈객들과 의논하여 거기(車騎; 전차와 기마) 백여 대를 마련하여 조나라를 구원하러가기로 하였다. 공자가 가는 길에 동문에 들러 후영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 했으나, 후영은 인사만하고 돌아섰다. 공자는 얼마를 가다가 불쾌했다. 자기가 후영을 부족함 없이 대우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자기가 죽으로 가는데도 말 한 마디가 없다니? 공자는 수레를 돌려 후영에게 와서 물었다.
 
그러자 후영은 웃으면서 공자가 돌아올 줄 알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선비를 아껴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습니다.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여 이렇다 할 계책도 없이 진나라 군대를 향해 뛰어들려고 하니, 이는 비유하자면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 주는 것과 같으니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평소에 빈객을 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는 저를 두텁게 대해 주셨지만 공자께서 죽을 길을 떠나는데도 아무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 원망하여 되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공자가 두 번 절하고 방법을 물었다. 그 후 공자는 후생의 계책에 따라 병부(兵符; 왕이 병권을 신하에게 넘긴 표)를 훔쳐 군대를 출동시켜 조나라를 구했다.
 
 

史記列傳(사기열전) 권77 魏公子列傳(위공자열전)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은 위나라 공자 위무기(魏無忌)에 대한 전기로 위무기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저명한 군사가로 기원전 276년 신릉(信陵)에 봉해지면서 신릉군(信陵君)으로 불리었다.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과 함께 전국시대의 4공자로 불린다. 4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인물로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나라 평원군이 매형이었으며 조나라를 도와 초(楚), 조(趙), 한(韓)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 군대를 크게 격퇴했다. 위공자병법이 전해지고 있으며 진나라의 이간으로 위나라 왕의 미움을 사 술로 지내다 술독으로 죽었다. 
 
1
魏公子無忌者,魏昭王子少子而魏安釐王異母弟也。昭王薨,安釐王即位,封公子為信陵君。是時范睢亡魏相秦,以怨魏齊故,秦兵圍大梁,破魏華陽下軍,走芒卯。魏王及公子患之。
위나라 공자 위무기(魏無忌)는 위 소왕(魏 昭王)의 막내아들이며, 위 안리왕(魏 安釐王)의 이복동생이다. 위 소왕이 훙서(薨逝)하고 위 안리왕이 즉위하면서 위공자는 신릉군(信陵君)에 봉해졌다. 이때 범수(范睢)가 위나라에서 도망쳐 와서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고, 위제(魏齊)에 대한 원한으로 인하여 진나라 병사가 위나라 대량(大梁)을 포위하고, 화양(華陽)에서 주둔하고 있던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니 망묘(芒卯)는 달아났다. 위 안리왕과 공자 위무기는 이를 근심하였다.
 
2
公子為人仁而下士,士無賢不肖皆謙而禮交之,不敢以其富貴驕士。士以此方數千里爭往歸之,致食客三千人。當是時,諸侯以公子賢,多客,不敢加兵謀魏十餘年。
위 공자는 사람이 어질고 선비들에게 겸손하게 대했으며, 선비가 현명하지 않거나 어리석어도 모두에게 겸손하고 예의를 갖추고 사귀었으며, 부귀하다고 선비들에게 교만하게 굴지 않았다. 이에 선비들은 수천 리를 앞 다투며 모여와 몸을 의탁하니 식객이 3천 명에 달했다. 당시 제후들은 위공자가 현명하고 식객이 많아 10여 년간 감히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도모하지 못했다.
 
3
公子與魏王博,而北境傳舉烽,言「趙寇至,且入界」。魏王釋博,欲召大臣謀。公子止王曰:「趙王田獵耳,非為寇也。」復博如故。王恐,心不在博。居頃,復從北方來傳言曰:「趙王獵耳,非為寇也。」魏王大驚,曰:「公子何以知之?」公子曰:「臣之客有能深得趙王陰事者,趙王所為,客輒以報臣,臣以此知之。」是後魏王畏公子之賢能,不敢任公子以國政。
위공자와 위 안리왕이 박(博)을 하고 있을 때, 북쪽 국경에서 봉화가 올라왔다는 보고가 전해지기를 “조나라가 침략하여 국경으로 들어오려 합니다”라고 했다. 위 안리왕이 박(博)을 멈추고 대신들을 불러 상의하려고 했다. 위공자가 위 안리왕을 만류하며 말했다. “조나라 왕은 사냥을 하러 나온 것이지, 침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다시 박(博)을 하였다. 위 안리왕은 두려워 박(博)에 마음을 둘 수 없었다. 조금 뒤에 다시 북쪽 국경에서 전해왔다. “조나라 왕은 사냥을 하러 나온 것이지, 침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위 안리왕이 크게 놀라 말했다. “공자는 어찌 이를 알았소?” 위공자가 말했다. “신의 식객 중에 조나라 왕의 은밀한 일까지 깊이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조왕이 하는 일을 식객이 항상 신에게 알려주고 있기에, 신은 이 일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위 안리왕은 위공자의 현명함과 능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위공자에게 국정을 맡기지 않았다.
 
4 은사(隱士) 후영(侯嬴)
魏有隱士曰侯嬴,年七十,家貧,為大梁夷門監者。公子聞之,往請,欲厚遺之。不肯受,曰:「臣修身絜行數十年,終不以監門困故而受公子財。」公子於是乃置酒大會賓客。坐定,公子從車騎,虛左,自迎夷門侯生。侯生攝敝衣冠,直上載公子上坐,不讓,欲以觀公子。公子執轡愈恭。侯生又謂公子曰:「臣有客在市屠中,願枉車騎過之。」公子引車入市,侯生下見其客朱亥,俾倪故久立,與其客語,微察公子。公子顏色愈和。當是時,魏將相宗室賓客滿堂,待公子舉酒。市人皆觀公子執轡。從騎皆竊罵侯生。侯生視公子色終不變,乃謝客就車。至家,公子引侯生坐上坐,遍贊賓客,賓客皆驚。酒酣,公子起,為壽侯生前。侯生因謂公子曰:「今日嬴之為公子亦足矣。嬴乃夷門抱關者也,而公子親枉車騎,自迎嬴於眾人廣坐之中,不宜有所過,今公子故過之。然嬴欲就公子之名,故久立公子車騎市中,過客以觀公子,公子愈恭。市人皆以嬴為小人,而以公子為長者能下士也。」於是罷酒,侯生遂為上客。
위나라에 후영(侯嬴)이라는 은사(隱士)가 있는데 일흔 살에 집이 가난해 대량성의 동쪽 문인 이문(夷門)의 문지기로 있었다. 위공자가 소문을 듣고 모시기를 청하며 후한 예물을 보냈다. 후영이 이를 받지 않고 말했다. “신은 몸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면서 수십 년을 지냈으나 끝내 문지기가 되었는데 곤궁하다고 해도 위공자의 재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위공자는 이에 주연을 크게 열고 빈객들을 모았다. 자리가 정해지자 위공자는 수레와 기마를 거느리고 상석인 왼쪽 자리를 비운 채로 몸소 이문으로 후영 선생을 맞이하러 갔다. 후생은 다 해진 옷차림으로 바로 수레에 올라 공자의 상석에 앉으며, 사양하지 않고 위공자의 태도를 살펴보려고 했다. 위공자는 말고삐를 잡고 더욱 공손하게 대했다. 후생은 또 위공자에게 말했다. “신에게는 시장 푸줏간에 친구가 있는데, 수레와 기마를 돌려 그곳에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위공자가 수레를 몰아서 시장에 들어가니 후생이 수레에서 내려 그의 친구 주해(朱亥)를 만나 곁눈질로 보면서 일부러 오랫동안 서서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위공자를 몰래 살폈다. 위공자의 안색은 더욱 온화해졌다. 그때 위공자의 집에는 위나라의 장수, 재상, 왕족, 빈객이 방에 가득 모여 위공자가 돌아와 술잔을 들어 연회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위공자가 고삐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기마를 타고 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후생을 욕했다. 후생은 위공자의 얼굴빛이 끝내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친구와 작별인사를 하고 수레에 올랐다. 집에 이르자 위공자는 후생을 상석으로 이끌어 앉히고 빈객들에게 칭찬하며 두루 소개하니 빈객들이 모두 놀랐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위공자가 일어나 후생의 장수를 기원했다. 그러자 후생이 위공자에게 말했다. “오늘 저 역시도 위공자를 위한 일을 충분히 했습니다. 저는 이문의 문지기에 지나지 않으나 위공자께서 친히 수레와 기마를 몰고 오셔서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로 저를 맞이해주셨으며, 들르지 않아도 좋은 곳까지 오늘 위공자께서 일부러 들려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위공자의 명성을 높이고자 일부러 오랫동안 서서 위공자의 수레와 기마를 시장 안에 세워두고 친구를 방문하며 위공자를 살펴보았는데 위공자께서 더욱 태도를 공손히 하셨습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저를 소인배라 여기고, 위공자는 고상한 인품으로 겸손하신 분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윽고 주연이 끝나자 후생은 마침내 상객(上客)이 되었다.
 
5
侯生謂公子曰:「臣所過屠者朱亥,此子賢者,世莫能知,故隱屠閒耳。」公子往數請之,朱亥故不復謝,公子怪之。
후생이 위공자에게 말했다. “신이 들렀던 곳의 백정인 주해는 현명한 사람이나,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푸줏간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위공자는 몇 번이나 찾아가 그에게 청했으나 주해는 일부러 거듭 답례조차 하지 않으니, 위공자는 이를 괴이하게 여겼다.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은 위나라 공자 위무기(魏無忌)에 대한 전기로 위무기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저명한 군사가로 기원전 276년 신릉(信陵)에 봉해지면서 신릉군(信陵君)으로 불리었다.
 
진나라가 조나라 한단을 포위하자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후생(侯生)의 계책으로 여희(如姬)를 통해 호부(虎符)를 훔쳐 주해(朱亥)로 하여금 진비를 살해하게 하여 위나라의 병권을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하였다.
 
6
魏安釐王二十年,秦昭王已破趙長平軍,又進兵圍邯鄲。公子姊為趙惠文王弟平原君夫人,數遺魏王及公子書,請救於魏。魏王使將軍晉鄙將十萬眾救趙。秦王使使者告魏王曰:「吾攻趙旦暮且下,而諸侯敢救者,已拔趙,必移兵先擊之。」魏王恐,使人止晉鄙,留軍壁鄴,名為救趙,實持兩端以觀望。平原君使者冠蓋相屬於魏,讓魏公子曰:「勝所以自附為婚姻者,以公子之高義,為能急人之困。今邯鄲旦暮降秦而魏救不至,安在公子能急人之困也!且公子縱輕勝,棄之降秦,獨不憐公子姊邪?」公子患之,數請魏王,及賓客辯士說王萬端。魏王畏秦,終不聽公子。公子自度終不能得之於王,計不獨生而令趙亡,乃請賓客,約車騎百餘乘,欲以客往赴秦軍,與趙俱死。
위 안리왕 20년(기원전 257년), 진 소왕(秦 昭王)은 이미 조나라 군대를 장평(長平)에서 무찌르고, 또 군대를 진격하여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위공자의 누이는 조 혜문왕(趙 惠文王)의 동생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부인이었는데, 수차례 위 안리왕과 위공자에게 편지를 전해 위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위 안리왕은 장군 진비(晉鄙)를 장수로 삼아 1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하게 했다. 진 소양왕은 사자를 보내 위 안리왕에게 고했다. “내가 짧은 시간 내에 조나라를 공격해 함락시키려 하니, 제후 중에 감히 조나라를 구하려는 자가 있다면 조나라를 치고난 후 반드시 군사를 이동시켜 먼저 그 나라를 치겠다.” 위 안리왕은 두려워하며 사람을 보내 진비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군대는 업성(鄴城)에 머물러 군루를 쌓으며, 말로는 조나라를 구한다면서 실제로는 두 나라의 형세를 관망하려고 했다. 평원군이 위나라에 사자로 관리를 끊임없이 보내면서 위공자를 꾸짖었다. “내가 스스로 그대의 누이와 혼인한 이유는 공자가 의로움을 높이 여기고 위급한 사람의 곤란함을 열성껏 도와주리라 여겼기 때문이오. 지금 한단이 곧 진나라에 항복할 지경인데 위나라의 구원이 이르지 않으니, 어찌 위공자가 위급한 사람의 곤란함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소! 또한, 위공자는 나를 가볍게 여기고 진나라에 항복하도록 버려두고 있는데,  어찌 공자의 누이를 불쌍해하지 않는 것이오?” 위공자는 이를 근심하며 몇 번이나 위 안리왕에게 청했으며, 빈객과 변사를 시켜 온갖 수단으로 왕을 설득했다. 위 안리왕은 진나라를 두려워하며 끝내 공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은 끝내 왕의 허락을 얻을 수 없다고 여기고, 홀로 살아서 조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없다고 헤아려, 빈객에게 청하여 수레와 기마 백여 대를 준비해 빈객들과 진나라 군대로 달려가 조나라와 함께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다.
 
7. 육투뇌호(肉投餒虎) : 굶주린 호랑이에 고기를 던져주다.
行過夷門,見侯生,具告所以欲死秦軍狀。辭決而行,侯生曰:「公子勉之矣,老臣不能從。」公子行數里,心不快,曰:「吾所以待侯生者備矣,天下莫不聞,今吾且死而侯生曾無一言半辭送我,我豈有所失哉?」復引車還,問侯生。侯生笑曰:「臣固知公子之還也。」曰:「公子喜士,名聞天下。今有難,無他端而欲赴秦軍,譬若以肉投餒虎,何功之有哉?尚安事客?然公子遇臣厚,公子往而臣不送,以是知公子恨之復返也。」公子再拜,因問。侯生乃屏人閒語,曰:「嬴聞晉鄙之兵符常在王臥內,而如姬最幸,出入王臥內,力能竊之。嬴聞如姬父為人所殺,如姬資之三年,自王以下欲求報其父仇,莫能得。如姬為公子泣,公子使客斬其仇頭,敬進如姬。如姬之欲為公子死,無所辭,顧未有路耳。公子誠一開口請如姬,如姬必許諾,則得虎符奪晉鄙軍,北救趙而西卻秦,此五霸之伐也。」公子從其計,請如姬。如姬果盜晉鄙兵符與公子。
(위공자가) 가면서 이문을 지나다가 후생을 만나니, 진나라 군사와 죽기로 싸우기로 한 정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작별하고 떠나려고 하자 후생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힘껏 해보시지요, 노신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공자가 몇 리를 가다가 마음이 불쾌하여 말했다. “내가 후생을 후하게 대접한 이유는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이제 내가 죽으려고 할 때 후생이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나를 보내니,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인가?” 다시 수레를 이끌고 돌아와서 후생에게 물었다. 후생이 웃으며 말했다. “신은 본래 공자께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했다. “공자께서 선비를 아껴 그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습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해 어떤 계책도 없이 진나라 군대에 달려들고자 하시니, 비유하자면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것과 같은데 어찌 공을 세우겠습니까? 어찌하여 항상 빈객을 기른 것입니까? 공자께서 신을 후하게 대접해주셨으나 공자께서 가시는 것을 신이 전송하지도 않으니, 이에 공자께서 한스러운 마음에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위공자가 두 번 절하며 계책을 물었다. 후생은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조용히 말했다. “제가 들으니 진비의 병부(兵符)가 언제나 왕의 침실 안에 있다고 하며, 여희(如姬)는 왕에게 가장 총애를 받아 왕의 침실에 드나들 수 있으니, 그녀의 힘이라면 병부를 훔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여희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에게 살해당했을 때, 여희가 3년 동안 재물을 써서 원수를 찾으니 왕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보복하려고 했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희가 위공자께 눈물로 호소하자 위공자께서 빈객을 시켜 그 원수의 목을 베어서 여희에게 주셨다지요. 여희는 공자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치 않을 것인데,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은 지금껏 은혜를 갚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자께서 진실로 한 번 입을 열어 여희에게 청하면 여희는 반드시 허락할 것이고, 병부를 얻어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북쪽으로 조나라를 구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물리치면, 이는 춘추오패(春秋五霸)의 공에 버금갈 것입니다.” 공자는 그 계략을 따라 여희에게 청했다. 여희는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 위공자에게 주었다.
 
8. 백정 주해(朱亥)
公子行,侯生曰:「將在外,主令有所不受,以便國家。公子即合符,而晉鄙不授公子兵而復請之,事必危矣。臣客屠者朱亥可與俱,此人力士。晉鄙聽,大善;不聽,可使擊之。」於是公子泣。侯生曰:「公子畏死邪?何泣也?」公子曰:「晉鄙嚄唶宿將,往恐不聽,必當殺之,是以泣耳,豈畏死哉?」於是公子請朱亥。朱亥笑曰:「臣乃市井鼓刀屠者,而公子親數存之,所以不報謝者,以為小禮無所用。今公子有急,此乃臣效命之秋也。」遂與公子俱。公子過謝侯生。侯生曰:「臣宜從,老不能。請數公子行日,以至晉鄙軍之日,北鄉自剄,以送公子。」公子遂行。
위공자가 떠나려 하자 후생이 말했다. “장수가 전쟁터에 있을 때는 군주의 명령도 듣지 않을 수 있으니, 이는 곧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병부를 맞췄음에도 진비가 공자에게 군사를 넘겨주지 않고 다시 왕에게 청하면 일은 틀림없이 위태롭게 됩니다. 신의 친구인 백정 주해(朱亥)와 함께 가십시오. 그는 역사(力士)입니다. 진비가 말을 들으면 매우 좋으나, 듣지 않으면 주해를 시켜 그를 때려죽이게 하십시오.” 이에 위공자가 울었다. 후생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어째서 우십니까?” 위공자가 말했다. “진비는 용맹스러운 노장(老將)인데, 내가 가서 명령해도 듣지 않으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하기에 우는 것이지, 어찌 죽음 따위가 두렵겠소?” 이에 위공자가 주해에게 함께 가기를 청했다. 주해가 웃으며 말했다. “신은 시장에서 칼로 소리 내며 살생을 하는 백정으로 공자께서 친히 몇 번이고 찾아와주셨는데, 사양하며 답례하지 않은 이유는 작은 예절은 쓸모가 없다고 여겨서입니다. 지금 공자께서 위급해 지셨으니 이때가 신이 목숨을 바쳐 일할 때입니다.” 마침내 위공자와 함께 가기로 했다. 위공자가 후생에게 들려서 작별인사를 했다. 후생이 말했다. “신도 마땅히 따라가야 하지만, 늙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청하기를, 공자의 일정을 헤아려서 진비의 군영에 도착하는 날에 북쪽을 바라보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함으로써 공자를 전송하겠습니다.” 위공자가 마침내 떠났다.
 
9
至鄴,矯魏王令代晉鄙。晉鄙合符,疑之,舉手視公子曰:「今吾擁十萬之眾,屯於境上,國之重任,今單車來代之,何如哉?」欲無聽。朱亥袖四十斤鐵椎,椎殺晉鄙,公子遂將晉鄙軍。勒兵下令軍中曰:「父子俱在軍中,父歸;兄弟俱在軍中,兄歸;獨子無兄弟,歸養。」得選兵八萬人,進兵擊秦軍。秦軍解去,遂救邯鄲,存趙。趙王及平原君自迎公子於界,平原君負韊矢為公子先引。趙王再拜曰:「自古賢人未有及公子者也。」當此之時,平原君不敢自比於人。公子與侯生決,至軍,侯生果北鄉自剄。
업성(鄴城)에 이르자 위왕(魏王)의 명이라고 속여서 진비를 대체한다고 하였다. 진비가 병부를 맞춰보고도 이를 의심하면서 손을 들고 공자를 보며 말했다. “지금 저는 10만의 무리를 데리고 국경에 주둔하며 나라의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데, 지금 수레 한 대로 와서 나를 대신하겠다고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며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주해가 소매에 감춘 40근의 철퇴로 진비를 때려죽이자, 위공자는 마침내 진비의 군대를 이끌었다. 병사들을 점검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렸다. “부자가 함께 군중에 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다면 형이 돌아가고, 외아들로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 부모를 모셔라.” 병사 8만 명을 선발해 군사를 진격시켜 진나라 군대를 쳤다. 진나라 군대는 포위를 풀고 물러갔으며, 마침내 한단을 구하고 조나라를 보존했다. 조왕과 평원군이 몸소 국경까지 공자를 마중 나왔으며, 평원군은 등에 화살 통을 메고 앞에서 위공자를 이끌었다. 조왕이 두 번 절하며 말했다. “예로부터 현인으로 공자에 미치는 자는 없습니다.” 이 당시 평원군은 감히 자신을 위공자와 비교하지 않았다. 위공자가 후생과 결별하고 업성의 군영에 이르렀을 때, 후생은 과연 북쪽을 바라보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下略]
 
 

▶️ 肉(고기 육, 둘레 유)은 ❶상형문자로 宍(육)은 고자(古字)이다. 신에게 바치는 동물의 고기의 썬 조각, 俎(조) 따위의 글자에 포함되는 夕(석) 비슷한 모양은 肉(육)의 옛 자형(字形)이지만 나중에 月(월)로 쓰는 일이 많아지면서 이것을 日月(일월)의 月(월; 달)과 구별하여 月(육달월)部라 부른다. 육이란 음은 부드럽다의 뜻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❷상형문자로 肉자는 ‘고기’나 ‘살’, ‘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肉자는 고깃덩어리에 칼집을 낸 모양을 그린 것으로 ‘고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肉자는 단독으로 쓰일 때만 고기를 뜻하고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주로 사람의 신체와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肉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달’을 뜻하는 月(달 월)자로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본래 肉자의 부수자로는 ⺼(고기 육)자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편의상 月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을 뜻하는 月(달 월)자와 혼동이 생길 수 있지만 月(달 월)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期(기약할 기)자처럼 우측 변에 위치하고 ⺼(육달 월)자일 경우에는 肝(간 간)자처럼 좌측이나 하단, 상단에 위치하게 되니 구분할 수 있기는 하다. 이렇게 肉자가 月자로 쓰일 때는 ‘육달 월’이라고 읽는다. 그래서 肉(육, 유)은 (1)짐승의 고기 (2)살 등의 뜻으로 ①고기 ②살 ③몸 ④혈연(血緣) 그리고 ⓐ둘레(유) ⓑ저울추(유)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고기의 맛을 육미(肉味), 육체에 대하여 과하는 형벌을 육형(肉刑), 육체에서 풍기는 느낌을 육감(肉感), 고기가 많이 있는 호사한 모양을 육림(肉林), 적진에 돌진 육박하는 일을 육탄(肉彈), 식용할 목적으로 사육하는 소를 육우(肉牛), 구체적인 물체로서의 인간의 몸뚱이를 육체(肉體), 육질로 되어 단단하지 않은 몸을 육신(肉身), 높거나 대단한 기준이나 수치에 거의 가깝게 다가가는 것 또는 공격하기 위해 몸으로 돌진하는 것을 육박(肉薄), 식육의 고기 종류를 육류(肉類), 남녀의 교접을 육교(肉交), 적에게 몸으로 다가감을 육박(肉迫), 쇠고기를 얇게 저미어 만든 포를 육포(肉脯), 고기가 산을 이루고 말린 고기가 수풀을 이룬다는 육산포림(肉山脯林), 웃옷 한쪽을 벗고 가시 나무를 짐 곧 잘못을 크게 뉘우침이라는 육단부형(肉袒負荊), 살이 썩어 벌레가 꾄다는 뜻으로 모든 일은 근본이 잘못되면 그 폐해가 계속하여 발생함을 육부출충(肉腐出蟲), 살이 많고 뼈가 적음을 육다골소(肉多骨少), 고기와 술이 많음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을 육산주해(肉山酒海), 몸이 몹시 여위어 뼈만 남도록 마름을 육탈골립(肉脫骨立) 등에 쓰인다.

▶️ 投(던질 투, 머무를 두)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殳(수, 투; 치다)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投자는 '던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投자는 手(손 수)자와 殳(몽둥이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投자의 갑골문을 보면 手자가 아닌 豆(콩 두)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제기 그릇을 두드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投자의 본래 의미도 '두드리다'였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豆자가 手자로 바뀌게 되면서 '던지다'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投(투, 두)는 손으로 던지다의 뜻으로 ①던지다 ②뛰어들다 ③가담하다, 편이 되다 ④합치다, 서로 잘 맞다 ⑤의탁하다, 의지하다 ⑥주다 ⑦보내다 ⑧받아들이다 ⑨임하다,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닿다 ⑩떨치다 ⑪버리다 ⑫투호(投壺), 그리고 ⓐ머무르다, 멈추다(두) ⓑ구두(句讀)(두)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던질 포(抛), 던질 척(擲),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칠 타(打)이다. 용례로는 사업에 자금을 투입함을 투자(投資), 기회를 엿보아 큰 이익을 보려는 것을 투기(投機), 정한 인원 외의 사람을 더 넣음을 투입(投入), 적에게 항복함을 투항(投降), 내던져 버림을 투기(投棄), 지면이나 수면 등에 물체의 그림자가 비침 또는 그 그림자를 투영(投影), 공을 던짐 또는 그 공을 투구(投球), 남에게 줌으로 특히 약 등을 줌을 투여(投與), 병에 알맞은 약제를 투여함을 투약(投藥), 돌을 던짐 또는 그 돌을 투석(投石), 던지어 아래로 떨어뜨림을 투하(投下), 비교적 무거운 물체를 힘껏 던지는 것을 투척(投擲), 배에서 닻을 내림을 투묘(投錨), 강물에 던짐을 투강(投江), 어떤 일에 몸을 던져 관계함 또는 높은 곳에서 밑으로 몸을 던짐을 투신(投身), 옥에 가둠을 투옥(投獄), 원고를 신문사나 잡지사 등에 보냄 또는 그 원고를 투고(投稿), 야구에서 앞 투수의 뒤를 이어 던짐을 계투(繼投), 야구에서 자기편이 못 받을 정도로 함부로 공을 던지는 일을 악투(惡投),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잘 던짐을 호투(好投), 야구 따위에서 잘못 던짐을 실투(失投), 농구에서 자유투 이외의 모든 슛을 야투(野投), 힘껏 던짐을 역투(力投), 투항하여 옴을 내투(來投), 베틀의 북을 내던지는 의심이라는 뜻으로 여러 번 말을 들으면 곧이듣게 된다는 말을 투저의(投杼疑), 붓을 던지고 창을 쫓는다는 뜻으로 학문을 포기하고 전쟁터로 나아감을 비유하는 말을 투필종융(投筆從戎), 채찍을 던져 강의 흐름을 가로막는다는 뜻으로 물을 건너는 군사가 극히 많음을 이르는 말을 투편단류(投鞭斷流), 쥐를 잡으려다가 그 옆에 있는 그릇을 깨뜨릴까 염려한다는 뜻으로 임금 가까이 있는 간신을 없애려다가 임금께 해를 끼칠까 두려워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투서공기(投鼠恐器), 글씨에 능한 사람은 정신을 들이지 아니하고 붓을 던져도 글씨가 잘 된다는 말을 투필성자(投筆成字), 모과를 선물하고 구슬을 얻는다는 뜻으로 사소한 선물에 대해 훌륭한 답례를 받음을 두고 이르는 말을 투과득경(投瓜得瓊), 봉숭아에 대한 보답으로 오얏(자두)을 보낸다는 뜻으로 내가 은덕을 베풀면 남도 이를 본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투도보리(投挑報李) 등에 쓰인다.

▶️ 餒(주릴 뇌)는 형성문자로 馁(뇌)는 간체자, 腇(연약할 뇌/주릴 뇌)와 餧(먹일 위, 주릴 뇌)는 동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밥식변(𩙿=食; 먹다, 음식)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妥(타→뇌)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餒(뇌)는 ①주리다(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를 곯다) ②굶기다 ③썩다 ④굶주림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굶주리어 지침을 뇌핍(餒乏), 헐벗어 몸이 얼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을 동뇌(凍餒),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진다는 뜻으로 대책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을 육투뇌호(肉投餒虎) 등에 쓰인다.

▶️ 虎(범 호)는 ❶상형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갑골문의 호(虎)자는 머리는 위로 향하고 꼬리는 아래로 향하며 몸에는 무늬가 있다. 중국인들은 호랑이의 머리에 왕(王)자가 크게 쓰여 있어서 호랑이가 바로 동물의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❷상형문자로 虎자는 '호랑이'나 '용맹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호랑이는 예나 지금이나 용맹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신비의 영물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문자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虎자가 쓰인 글자 대부분은 '용맹함'이나 '두려움'이 반영되어 있다. 갑골문에 나온 虎자를 보면 호랑이의 몸집과 얼룩무늬가 그대로 표현되어있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획이 변형되면서 지금의 虎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참고로 虎자는 폰트에 따라 다리 부분이 儿자나 几자가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虎(호)는 虍(범호 엄)부수로 ①범, 호랑이 ②용맹스럽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범의 꼬리를 호미(虎尾), 용맹스러운 장수를 호장(虎將), 호랑이와 이리를 호랑(虎狼), 털이 붙은 범의 가죽이라는 호피(虎皮), 범에게 당하는 재앙을 호환(虎患), 범의 위세란 뜻으로 권세 있는 사람의 위력을 호위(虎威), 매우 용맹스러운 병사를 호병(虎兵), 범과 같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 봄을 호시(虎視), 사나운 범을 맹호(猛虎), 큰 호랑이를 대호(大虎), 엎드려 앉은 범을 복호(伏虎), 다른 산에서 온 호랑이를 객호(客虎), 용맹스럽고 날래다는 비유를 비호(飛虎), 소금처럼 흰 눈으로 만든 호랑이를 염호(鹽虎),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도 죽은 뒤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호사유피(虎死留皮), 범이 먹이를 노린다는 뜻으로 기회를 노리며 형세를 살핌을 비유하는 말을 호시탐탐(虎視眈眈), 용이 도사리고 범이 웅크리고 앉았다는 뜻으로 웅장한 산세를 이르는 말을 호거용반(虎踞龍盤), 범과 용이 맞잡고 친다는 뜻으로 영웅끼리 다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호척용나(虎擲龍拏), 범에게 고기 달라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어림도 없는 일을 하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호전걸육(虎前乞肉), 구사 일생으로 살아 남은 목숨을 일컫는 말을 호구여생(虎口餘生), 잡았던 범의 꼬리를 놓기가 어렵다는 뜻에서 위험성이 있는 일을 비롯한 바에 그대로 나가기도 어렵고 그만두기도 어려움을 가리키는 말을 호미난방(虎尾難放), 범의 꼬리와 봄에 어는 얼음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험한 지경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호미춘빙(虎尾春氷),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의 새끼를 잡는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지 큰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큰 수확을 얻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호혈호자(虎穴虎子), 호랑이같이 예리하고 무섭게 사물을 보고 소같이 신중하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함을 이르는 말을 호시우보(虎視牛步), 매우 위험한 참언이라는 뜻으로 남을 궁지에 몰아넣는 고자질이나 헐뜯는 말을 이르는 말을 호구참언(虎口讒言),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뜻으로 비슷한 상대끼리 맹렬히 다투는 것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용양호박(龍攘虎搏) 등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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