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무려(三紙無驢)
세 장의 종이를 썼으나 나귀 려(驢)자가 없다는 뜻으로, 재주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三 : 석 삼(一/2)
紙 : 종이 지(糸/4)
無 : 없을 무(灬/8)
驢 : 나귀 려(馬/16)
(유의어)
박사매려(博士賣驢)
출전 : 안씨가훈(顔氏家訓) 면학편(勉學篇)
‘밤새도록 울다가 누가 죽었느냐고 한다’는 속담이 있다. 남의 집 문상을 가서 슬피 곡을 했으나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하니 황당하다. 애써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의 내용이나 영문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하는 행동을 비꼴 때 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데도 정작 핵심이 무엇인지 모를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송장 빼 놓고 장사 지낸다’고 비아냥댄다.
여기에 적합한 말이 종이를 석장이나 없애고도 나귀 려(驢)자를 쓰지 못한다. ‘세 장의 종이를 썼으나 나귀 려(廬)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재주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 말기의 문학가 안지추(顔之推)가 자손을 위해 저술한 안씨가훈(顔氏家訓) 면학편(勉學篇)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예전에 한 선비가 글재주도 없는데 항상 붓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재주가 있는 체하며 자랑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박사라고 부르면서 공경하는 척했지만 비웃었다. 어느 날 박사 선비가 나귀 한 마리를 샀는데 당시에는 물건을 사는 사람이 파는 사람에게 매매계약서를 써주어야만 했다.
관습대로 선비는 계약서를 쓰기 위해 세 장의 종이를 다 썼으나 마지막 려(驪)자를 쓰지 못하였다. 나귀를 판 사람이 선비에게 계약서를 써 달라고 하자. 선비는 "왜 그다지 급하게 그러는가 무식한 사람아, 지금 나귀 ‘려’자를 쓰려고 하는데"라고 화를 내면서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귀를 산 박사 선비가 종이를 세 장이나 낭비했지만 결국 계약서에 나귀라는 글자를 쓰지 못했다는 것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요령 없이 허튼 소리만 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성어는 중국 육조시대 말기의 문학가 안씨가훈(顔氏家訓) 면학편(勉學篇)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면학편'에는 본질과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학문의 관건임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다른 학자들이 풀어놓은 것만을 지키고, 가르쳐 준 말만을 되풀이하며, 세상일에 그것을 풀어 먹고 있는데, 이러한 것에는 쓸 만한 게 거의 없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물으면 순식간에 수 백 마디로 응수하지만, 요지가 무엇인지를 따져 물으면 요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업하(鄴下: 지금의 하남성 임장현 서쪽)의 속담에 '박사가 나귀를 사는데 계약서를 세 장이나 쓰면서도 계약서에는 나귀라는 글자가 아직 없다'라는 말이 있다(鄴下諺云,博士買驢,書券三紙,未有驢字), 혹시라도 너희들을 하여금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게 한다면, 너희들은 기가 막히게 될 것이다.
나귀는 산 ‘박사선비’가 종이를 세 장이나 낭비했지만 결국 계약서에 나귀라는 글자를 쓰지 못했다는 것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요령 없이 허튼 소리만 하는 경우를 말한다. 한 해의 마지막 쯤에 삼지무려 같은 일이 남아있지 않도록 해 보자.
삼지무려(三紙無驢)
나귀와 당나귀는 같은 말이다. 일반 말과 비교해 체구가 작고 귀는 길다. 나귀가 체구는 작지만 강하고 튼튼한 동물이기에, 산업혁명 이전에 짐을 운반하는 데에 많이 활용됐다. 영어권에선 수컷 당나귀를 ‘Jack’, 암컷 당나귀를 ‘Jennet’으로도 부른다. 영어 어원을 보면, 동키(donkey)는 ‘작은 갈색 말’을 뜻한다.
이번 사자성어는 삼지무려(三紙無驢. 석 삼, 종이 지, 없을 무, 나귀 려)다. 앞의 두 글자 ‘삼지(三紙)’는 ‘종이 세 장’이다. ‘무려(無驢)’는 ‘나귀가 없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종이 석 장에 글을 썼는데 정작 주인공인 나귀는 없다’라는 뜻이 된다.
안지추(顔之推)가 안씨가훈(顔氏家訓)의 면학(勉學)편에 소개한 일화에서 유래했다. 고루한 유생이 어느 날 장터에 가서 나귀 한 마리를 샀다. 비교적 중요한 거래였기에 계약서도 스스로 작성했다. 달필인 그가 우쭐한 표정으로 붓을 들어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종이 세 장에 글씨를 가득 채웠지만, 계약서의 핵심인 ‘나귀’라는 단어가 없었다.
나귀를 판 농부가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이 계약서에 왜 ‘나귀’라는 글자가 없소?” 그가 답한다. “조금만 기다려주게.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적으려는 참이네.” 머리에 지식은 가득하지만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유형의 지식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묵직한 교훈이 담긴 풍자다.
안지추는 왕조 교체가 잦던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남쪽 양(梁. 502~557) 나라에서 태어났다. 서예에도 뛰어났던 부친을 9세에 여의고 두 형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벼슬길에 나섰으나 내란과 외침으로 포로 생활을 했다. 양나라가 멸망하고 북제(北齊. 550~577)에서 재기해 고위 관료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북제가 북주(北周. 557~581)에 의해 멸망하자 다시 포로가 됐다. 훗날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 양견이 태자 교육을 위해 그를 기용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그즈음 병을 얻어 향년 66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서예가 안진경(顔眞卿)이 그의 5대손이다.
안지추는 평생 난세를 겪으며 깨우친 바를 ‘안씨가훈’에 기록해 후손들에게 전했다. 흔히 가훈이라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처럼 짧은 글을 떠올린다. 안씨가훈은 총 20편으로 구성된 딱딱하지 않은 저서다. 따분한 느낌을 주는 글귀는 최소화하고, 직접 경험했거나 전해 들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많이 소개했다. 후손들이 자연스럽게 교훈을 깨치거나 성찰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안씨가훈에 심히 어리석고 얼굴까지 두꺼운 인물이 주인공인 일화도 나온다. 북제에 시작(詩作)을 즐기는 한 사대부가 있었다. 대부분이 시(詩)라고 부를 수도 없는 글들이었지만, 그는 대단한 시인으로 자부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최고 시인들의 시를 형편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지인들이 속마음을 감추고 ‘대단하다’고 칭찬하면 사실로 믿었다.
하루는 그가 용기를 낸다. 소를 잡고 큰 잔치를 열어 자신의 작품들과 필명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지켜보던 아내가 울면서 그를 말렸다. 그러자 땅이 꺼지도록 탄식하며 그가 말한다. “나의 뛰어난 재능을 아내조차도 못 알아보는데, 하물며 세상 사람들은 오죽할까!” 안지추는 후손들이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 정도는 갖추길 바라며 이 일화를 기록해 전했다.
최근 들어, 고급 학문이 탁상공론에 빠지는 사례를 오히려 더 자주 접하게 된다. 아이러니다. 동서고금에 나귀와 관련된 우화가 많다. 이솝 우화에서 당나귀는 매우 어리석거나 고집이 센 동물로, 부정적 이미지로 자주 묘사된다. 근면한 이미지가 강해 미국 정치권에서 당의 상징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중국어권에선 누군가에게 ‘나귀’라고 하면 바로 욕설이 된다.
안지추가 안씨가훈에 소개한 앞 에피소드 주인공을 다시 떠올려보자. 자신이 구매한 나귀보다도 더 어리석게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학문을 익히되, ‘왜 학문을 하는가’도 자주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우치기 위해 그가 굳이 이 삼지무려(三紙無驢) 일화를 후손들에게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까 싶다.
삼지무려(三紙無驢)
재주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보다 지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보라.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길 때가 있다. 경력으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내가 할 일이 아닌데도 자구 나에게 ‘그딴 일’을 시킨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당혹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당혹스러움은 가슴에 화로 샇인다. '그딴 일'이란 '성과는 없고 신경만 쓰는 일'들이다. 부서의 각종 비용을 정산하고 사업별 비용을 관리하는 등등이 이런 일에 속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딱히 정해진 담당자는 없다. 상사의 입장에서 보면 누군든 처리하면 된다. 문제는 자구만 그 일이 나에게 떨어진다는 데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경우의 수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상사가 나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때, 두 번째는 내가 그런 일을 해도 되는 사람처럼 보일 때다. 첫 번째 경우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상사의 앙심을 풀어 주거나, 계속 허접한 일을 맡으면서 이를 갈면 된다. 나중에 복수를 해 주리라 생각하며 넓은 마음으로 계속해서 참아내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인내가 더 큰 투자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 오히려 직장 생활의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심각한 것은 두 번째 경우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회사 내에서의 내 위상과 상사가 생각하는 내 위상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결국 상사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나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러니 당연히 ‘그딴 일’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가를 따져 보아야겠지만, 그런 문제들은 나중에 따져 봐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이냐 하는 것이다.
자신을 업신여기고 하대하는 상사를 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참고 기다리다 보면 주변의 정의로운 선배가 나서서 한마디 해 줄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정의로운 선배에게 현재 자신의 사정과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봐야 근우너적인 문제는 쉽게 변하지 않는 다. 그동안 당신이 타인의 위상을 높여 주기 위해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처럼, 타인들 역시 당신의 위상을 높여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에게 물어볼 차례다.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직장 생활은 괜찮은 것이었나? 앞으로 어떻게 하면 보다 확고하게 나의 위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나는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는가?
‘나는 회사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 이남훈 저, 처신 3장 호구(虎口) : 입장 바꿔 생각하면 반드시 이기는 포지셔닝 중에서
삼지무려(三紙無驢)
종이 3장을 썼는데 나귀가 없다.
지나치게 잘난 척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선비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잘난 척하는 선비 앞에서는 굽신거렸지만, 뒤에서는 놀려댔다. 어느 날 선비가 지나가던 나귀 장수로부터 나귀 한 마리를 사게 되었는데 그 매매 확인서를 자신이 쓰겠다고 한다. 나귀 장수는 그러라고 하고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선비가 확인서를 주지 않는다.
슬쩍 쳐다보니 두세 문장이면 되는 확인서를 종이 3장에 걸쳐 길게 써 놓고 있다. “다 되셨습니까?” 물어보니, “이제 막 나귀 려(驢)자를 쓰려고 하는데 왜 이리 급하게 재촉하나?”라고 버럭 화를 낸다. 나귀를 사고파는 글을 3장이나 썼지만, 나귀라는 글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니, 길게 글을 썼지만, 본론으로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이야기다.
종이 3장을 썼는데 나귀가 없다는 사자성어 삼지무려(三紙無驢)는 잘난 척하거나 핵심을 말하지 못하는 지식인을 비꼴 때 쓰는 말이다. 연구자로서 보고서를 쓰면서 저 말을 되뇌곤 한다. 보고서에 나귀는 나와 있는 것인지 반성한다. 능력이 모자라 핵심은 쓰지 못하고 주변만 건드리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핵심은 알지만 쓸 용기가 없어 빙빙 돌아가는 이야기만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에라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나귀의 꼬리라도 보여줘야 할 텐데.
ChatGPT가 요란하게 세상에 등장했다. 이를 써 보니 삼지무려(三紙無驢)는 더는 못할 것 같다.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없고, 허락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모르겠으나, AI가 세상에 있는 글들을 열심히 공부해 정리해준다. 논쟁이 되는 이슈에 대해서는 찬반 양쪽의 의견을 모아 주기도 하고, AI가 학습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소신을 주장하기도 한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포장 없이 싫든 좋든, 옳든 틀리든 나귀라는 글자를 써준다. 좀 더 인간과 가까워지면 삼지무려를 즐거이 하는 AI도 등장하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AI가 틀리게 쓴 나귀를 우리는 구분할 수 있을까?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AI와의 논쟁에서 이겨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ChatGPT 초기에 저자가 연구하는 분야의 내용을 질문하니 전체적으로는 잘 설명하지만, 중요 세부 사항 중 하나는 잘못되게 답한다. 나머지 부분은 맞게 답하기 때문에 이쪽을 모르는 사람은 전체가 다 맞는다고 잘못 판단할 수 있다.
틀린 부분을 지적하니 혼란을 줘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자기의 답도 여러 답 중 하나라고 변명한다. 다시 정답을 가르쳐줬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가 틀렸고 저자가 쓴 답이 정답이라고 답변한다. 1주일 뒤 같은 질문을 다시 물어보니 해당 부분에서 또 다른 틀린 답을 한다. 아마 저자가 알려준 정답과 또 다른 답들을 학습하면서 답이 변했나 보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확인해보니 정답에 좀 더 가까워졌으나 아직도 틀린 답을 한다. 언젠가는 정답을 맞힐 날이 오겠지?
ChatGPT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구글에 대한 반격이다. 크롬, 검색엔진, 유튜브 등 이용자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앞쪽 끝(front-end)을 모두 장악한 구글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글의 앞쪽 끝이 알고리즘에 기반한 선택적 정보 채택을 통해 확증 편향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면, ChatGPT는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편 가르게 될지 궁금하다.
풍부한 지식기반의 서술을 통해 논리적으로 완벽한 거짓말을 할 때 세상은 더 강하게 나눠질지도 모른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만 소통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강하게 배척하는 현재의 풍토가 더 강화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다 안 좋은 상황만을 생각할 때의 이야기다. 긍정적으로 보면 인간의 생산성 향상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아직은 공정한 연구자가 세상에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좀 더 논리적이고 우회하지 않으면서 설득력 있게 나귀를 써야 하는 어려움이 더 많이 늘어났지만 말이다. AI의 공부 거리를 생산하는 자로서라도, AI의 편향을 막아주는 자로서라도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삼지무려(三紙無驢)
종이 세 장에다 글을 쓰고도 ‘려(驢:당나귀)’자 한 자도 못 쓴다는 뜻으로. 허세만 부릴 뿐 실제 재주는 없는 사람이거나 그런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안씨가훈(顔氏家訓) 면학편(勉學篇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에 어떤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재주가 전혀 없으면서도 늘 붓을 들고 어깨에 힘을 주면서 글재주 자랑만하고 다녔다. 이런 짓 때문에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를 공경하는 척하면서, 박사라고 놀려 주곤 했다. 그래도 멍청한 선비는 몹시 기뻐할 뿐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속 내용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 선비네 집에서 나귀를 한 마리 샀다. 당시 관습에 따르자면 물건을 사는 쪽에서 파는 사람에게 매매 계약서를 써 주게 되어 있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남에게 대필을 시켜서라도 계약서를 써 주어야 했다. 그런 연유로 나귀를 파는 사람이 글을 몰라서 선비가 직접 계약서를 쓸 수밖에 없었는데, 선비는 종이를 펼쳐 놓고 석 장이나 썼지만 글을 마무리할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귀를 판 사람이 하도 갑갑해서 빨리 써 달라고 재촉하자 선비는 “무식한 사람 같으니라고. 뭐가 그렇게 급한가! 지금 막 나귀 려(驢)를 쓰려는 중인데” 하며 되레 화를 벌컥 냈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종이를 석 장이나 허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나귀 려(驢)자도 못 썼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부터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전혀 요령도 없고 허튼소리나 늘어놓는 것을 가리켜 삼지 무려 또는 박사매려(博士賣驢: 박사가 산 나귀)라고 하게 되었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후대의 유식한 선비들이 일컬어 ‘붓을 찍어 천 마디 말을 했는데 제목과 벗어난 거리는 만리(萬里)나 된다(하필천언 이제만리: 下筆千言 離題萬里)’라고도 표현하여 재주도 없고 무식하면서도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조롱하는 말로 쓰게 되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교양(敎養)은 그 사람의 진가(眞價)를 표현한다고 하였다. 또 잘 자란 벼와 같다고 하는데 그것은 논에서 잘 자란 벼(도: 稻)는 가정과 국가에서 종요(宗饒)로운 양식이 되고 세상의 풍요(豊饒)를 주는 보배이기 때문에, 배운 사람을 중히 여기고, 못 배운 사람은 잡초와 같아서 밭을 가는 사람이나, 김을 매는 사람들이 꺼리고 귀찮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훗날 절벽 앞에 서서 답답함을 느껴도 때는 이미 지나간 다음이다.
사람이 사는 동안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지런히 노력 하면 성취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학문을 배워 익혀서 이를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의 집이 가난하여 그 가난하다는 핑계로 배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와는 반대로 집이 넉넉하여 그 넉넉함을 믿고 배움을 개을리 해서도 안 된다.
우리 속담(俗談)에 ‘자식에게 재물을 물려주지 말고 학문을 익혀 주라’라는 말이 있다. 재물은 천재지변이나 불가항력이 닥치면 하루 아침에 없어지지만, 머리에 든 지식은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배움을 부지런히 한다면 입신양명(立身揚名)할 기회를 잡을 수 있고, 집안 살림이 넉넉한 사람이 배움을 더욱 부지런히 한다면 더욱 광영(光榮)된 것을 보았고, 현달(顯達)하여 세상을 빛내고 성취한 것을 보는 까닭도 이런 이치에 있다.
그러므로 배우고 익히는 일은 자기 몸에 보배를 키우는 일이다. 이는 나아가서 사회의 보배 역할을 하고 국가와 인류를 위하여 보배역할을 한다. 이런 탓으로 예부터 배운 사람을 일컬어 군자(君子)라 하고, 못 배운 사람을 소인(小人)이라 부른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紙(종이 지)는 형성문자로 纸(지)는 간자(簡字), 帋(지)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氏(씨, 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氏(씨; 허물어져 가는 언덕, 지)와 실(糸; 실타래)같은 섬유질이 얽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종이를 뜻한다. 그래서 紙(지)는 고치의 지스러기나 헌솜을 물로 불려서 만든 종이를 말한다. (1)어떤 명사(名詞)에 붙어 종이의 뜻을 나타냄 (2)신문(新聞)의 뜻을 나타냄 등의 뜻으로 ①종이 ②장(종이를 세는 단위) ③신문(新聞)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종이 돈을 지폐(紙幣), 종이의 표면 또는 글이 실린 면을 지면(紙面), 종이와 먹을 지묵(紙墨), 종이 조각을 지편(紙片), 종이의 값을 지가(紙價), 종이의 품질을 지질(紙質), 서화에 쓰려고 마련한 종이를 지본(紙本), 벽에 바르는 종이를 벽지(壁紙), 소식을 서로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 보내는 글 또는 그리하는 일을 편지(便紙), 자기가 관계하고 있는 신문 또는 이 신문을 본지(本紙), 못 쓰게 된 종이를 휴지(休紙), 빛깔이 흰 종이를 백지(白紙), 일정한 절차를 밟았음을 증명하는 표를 증지(證紙), 종이를 만듦을 제지(製紙), 책뚜껑이나 책의 겉장을 표지(表紙), 서양에서 들어온 종이를 양지(洋紙), 어떤 일에 쓰이는 종이를 용지(用紙), 닥나무의 껍질로 만든 종이를 한지(韓紙),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들인 종이를 색지(色紙), 지면이 좀 거칠고 품질이 낮은 종이의 한 가지를 갱지(更紙), 찢어진 종이로 손상하여 못쓰게 된 종이를 파지(破紙), 종이로 그리 크지 않게 만든 주머니를 봉지(封紙), 종위 위에서 펼치는 용병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실현성이 없는 허황된 이론을 지상병담(紙上兵談),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되고 취한다는 뜻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비유하는 말을 지취금미(紙醉金迷), 말에 의지해 기다리는 사이에 일곱 장의 종이에 가득 쓴다는 뜻으로 글을 빨리 잘 짓는 것 대단히 훌륭한 문재를 의마칠지(倚馬七紙)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전무후무(前無後無),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학문과 지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학무식(無學無識), 아무 재능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재무능(無才無能), 해로울 것도 없고 이로울 것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해무득(無害無得), 모든 생각을 떠나 마음이 빈 상태를 이르는 말을 무상무념(無想無念), 하는 일이 없으니 탈도 없음이나 하는 일도 없고 할 일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위무사(無爲無事), 하는 일도 없고 일할 능력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위무능(無爲無能), 한도 끝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진무궁(無盡無窮), 사심이나 편파됨이 없다는 뜻으로 매우 공평함을 이르는 말을 무사무편(無私無偏),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유비무환(有備無患),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사람됨이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김 또는 태도가 몹시 거만하여 남을 사람같이 대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안하무인(眼下無人) 등에 쓰인다.
▶️ 驢(당나귀 려/여)는 형성문자로 馿(려/여)는 통자(通字), 驴(려/여)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 마(馬; 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盧(로, 려)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驢(려/여)는 ①당나귀 ②나귀,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기장의 한 가지를 여미(驢尾), 연자매를 끌어 돌리는 당나귀를 마려(磨驢), 털의 빛깔이 검푸른 당나귀를 청려(靑驢), 연자매를 끌어 돌리는 당나귀가 밟았던 발자국을 다시 밟는다는 뜻으로 같은 일을 자꾸 되풀이하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마려고적(磨驢故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 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아다닌다는 뜻으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도리어 먼 데서 구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기려멱려(騎驢覓驢)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