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유종(君子有終)
군자에게 마침이 있다는 뜻으로, 군자다운 사람이 자기 뜻을 다 이루고 생애를 마침을 이르는 말이다.
君 : 임금 군(口/4)
子 : 아들 자(子/0)
有 : 있을 유(月/2)
終 : 마칠 종(糹/5)
출전 : 주역(周易) 겸괘(謙卦)
주역(周易) 겸괘(謙卦)에 '군자유종(君子有終)'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다운 사람은 한평생을 살고 나면 이룩한 덕행이 있어 후세에 영원히 남는다. 그 영향이 후세에 지속되어 사람들이 계속 일컫는다. 소인은 만물과 함께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숨이 멎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다시는 일컫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사라져도 그 업적이나 명성은 영원히 남는 것이니, 바르게 착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왜 그럴까? 배우면 배울수록 배울 것이 많아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퇴계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학자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공부했다. 처음으로 저술다운 저술을 남긴 학자다. 성리학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시도 현재 전하는 것만도 2500수 정도다. 구절구절이 다 명언이다.
편지는 남아 있는 것이 3200통으로 주자(朱子)보다 거의 두 배나 많다. 편지마다 학문하는 방법, 처세하는 방법 등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13개의 서원을 창설하거나 창설하는 것을 도와 우리나라가 교육의 나라 학문의 나라가 되게 했다.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고 제자들과 같이 공부한다는 자세로 겸손했다. 배우겠다는 사람은 신분에 상관없이 지극한 정성으로 다 가르쳤다. 제자를 마루에서 내려가 맞이하고 대문 밖까지 전송하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서거 직전 가슴에 담이 결려 눕지도 못 할 때, 베개에 엎드려 제자 정곤수(鄭崑壽)가 보낸 14항의 질문지에 전부 다 답을 해서 보냈다.
돌아가시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견해를 고쳐 기대승(奇大升)에게 답을 보냈다. "늘 배운 대로 실천하였고, 남에게 군림하지 않고 배려하면서 살았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퇴계를 조선에 내린 것은 하늘의 뜻이다. 중국에 공자(孔子)가 있다면, 조선에는 이자(李子; 퇴계의 극존칭)가 있다"고 자주적인 주장을 했다.
퇴계의 시문을 단 한편도 안 읽어 본 자들이, '주자만 따랐다', '학문만 했지 실천은 중시하지 않았다'는 근거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서거 450주년을 계기로 성인(聖人)에 가까이 간 퇴계를 다시 새롭게 정확하게 알아, 자신을 바로잡고 세상을 바로잡는 바탕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 군자유종(君子有終)의 교육적 함의(含意)
인간의 삶은 양면성을 지닌다. 즉 인간은 삶과 죽음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生)의 의미를 긍정적인 개념으로, '죽음'이라는 의미를 부정적인 개념으로 바라본다.
'태어남'이 무의지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죽음'은 인간의 의지적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의 순간에서 인간의 모습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결국 生에 대한 마지막 귀결점은 死이며, 단순한 死가 아닌 아름다운 死가 되어야 그 삶의 평가도 긍정적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거유(巨儒) 퇴계의 고종기(考終記)를 토대로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퇴계의 고종기(考終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본다.
1570년 12월3일 병세가 위중하여 선생께서 설사를 하다. 이때 방안에 梅盆이 있었는데 '梅兄에게 불결하여 내 마음이 미안하다' 하시며 옮기라 하셨다. 자제들에게 빌려온 책을 기록하게 하고 잊지 말고 돌려 주라 명하셨다.
4일에는 조카에게 유계(遺戒)를 받아쓰게 하셨다.
1. 국가에서 예장(禮葬)을 하려 하거든 고사하고 예장을 하지 말라
2. 상사에 유밀과(油蜜菓; 약과와 강정류)를 쓰지 말라.
3.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 쓰고 鄕里와 世系, 志行과 出處 등을 간략히 쓸 것.
4. 장례 절차는 많은 사람에게 물어서, 시속에도 맞고 고례에도 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날 제자들에게 '내가 평소에 잘못된 소견으로 제군들과 더불어 종일 강론하였는데, 이 또한 범연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7일 제자 간재 이덕홍이 점을 치니 지산 겸괘(謙卦)의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점사가 나오자 김부륜 등이 곧 얼굴빛이 변하였다.
8일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 하셨고 이날 날씨는 맑았다. 오후 5시쯤 갑자기 지붕위로 구름이 몰리고 눈이 한치쯤 내렸다. 잠시 뒤 몸을 일으키자 앉아서 좌서(坐逝) 하였으며, 구름은 흩어지고 눈은 개였다.
사실 퇴계 고종기(考終記)에 대한기록은 아주 간략하다. 하지만 우리는 퇴계의 삶의 마무리와 죽음에 임하는 태도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삶과 죽음에 대한 긍정적 가치관이다. 흔히 '삶의 부정 = 죽음의 긍정', '삶의 긍정 = 죽음의 부정'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모순된 사고이다.
삶의 애착이 死의 추함을 유발하고, 삶의 부정이 무의미한 死를 유발함은 분명 잘못된 사고이다. 生의 회피수단으로 死가 등장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고를 '生의 긍정=死의 긍정', '生의 부정=死의 추함'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삶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켜온 사람만이 죽음에 직면하여 아름다운 마무리(善終)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채움과 비움의 적절한 조화(調和)이다. 현대인들은 보다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갈구한다. 타인보다 더 많은 재력과 권력, 인간관계 등을 확보하고자 쟁탈의 현장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하지만 흔히 하는 말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다. 生의 출발에서도 빈손이었으니 死로 되돌아감도 빈손이니 이 얼마나 공평하지 아니한가.
물론 사회라는 시공간 속에서 경쟁과 화합은 필연이다. 이 둘 사이에는 적절한 조화가 요청된다. 비관자살의 대부분은 채움과 비움의 부조화의 결과이다.
인간은 천지자연 속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자연의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 군자유종(君子有終)
군자는 마침을 둔다. '마친다'는 뜻을 지닌 한자인 종(終)자를 보면 겨울 동(冬)자가 들어있다. 겨울은 한 해를 마치는 계절이기 때문에 의미가 부합한다.
겨울은 기운을 땅 속에 깊숙이 수렴하면서 한 해의 노고를 위로하는 때이기 때문에 위로의 계절이라 하였는데 한 해를 돌아보며 그 동안 한 일을 평가하고 위로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각종 단체나 직장에서 나름대로 종무식(終務式)을 한다.
그런데 겨울은 천간(天干)으로 임계(壬癸)에 해당하는데 임(壬)은 아이를 밴다는 '임(妊)'의 뜻이고, 계(癸)는 헤아린다는 '규(揆)'의 뜻이다. 겨울이 끝이 아니라 다시 새 생명을 잉태하여 품고 있다는 뜻이고 속에 품고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추측하고 헤아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칠 종(終)자에 있는 실 사(糸)자의 역할이다. 실이 사물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듯이 겨울은 감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새해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마친다는 '종(終)'은 그 자체에 '시(始)'를 품고 있다.
새해를 시작하고 마치기를 수십 번 해보아도 깔끔하게 만족스러운 적이 얼마나 있을까!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마침이 있듯이 이 세 가지 단계를 잘할 방법을 주역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마침을 잘하는 방법에 대한 충고가 군자유종(君子有終)이다. 마침을 잘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과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해서 겸손하다는 겸괘(謙卦)에 있는 말인데 다 이루어 놓고 자만하는 순간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뜻이다.
◼ 겸손의 미덕
○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복을 내리는 덕목
겸손(謙遜)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를 말한다. 요즘같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행복과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데 가장 필요한 덕목이 겸손의 미덕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겸손의 가치와 의미를 알고는 있지만 막상 실존적 사회생활에서는 나 자신의 못난 이기적인 마음과 자만심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결국은 세상 사람들이 야박한 인심과 메마른 세상을 한탄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이유는 우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만심으로 인한 교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겸손은 어떤 어려움도 해쳐갈 수 있는 아름다운 덕목이다.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으로 많은 고민을 한다. 더구나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수십만의 사회 초년생들은 각박한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를 두렵게 받아드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인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자만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겸손의 덕목을 생활화하기는 쉽지 않다, 겸손의 미덕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정말 미약한 존재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다수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족한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겸손으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배우려고 하는 성실한 마음일 것이다. '주역'에서 "소인(小人)은 이익을 보지 않으면 권면이 안 된다"고 한다. 교만한 사람은 하늘의 소리를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하며,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려고 한다.
이러한 겸손의 미덕과 진정 배우려는 겸허하고 진실한 마음들은 대인관계뿐 아니라 사회생활 속에서 어떠한 어려운 일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지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도가(道家) 철학의 창시자인 노자(老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것은 물은 만물을 생육하게 해주고, 세상의 더러운 것을 다 씻어주며, 가장 낮은 곳에 처해도 묵묵히 자기의 역할을 다하기 때문이다.
물이란 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물과 같은 친구를 사귀라고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물로 번뇌를 씻는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基督敎)에서는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노자(老子)는 '도덕경' 66장에서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가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故). 그러므로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能爲百谷王). 그런 까닭에 성인이 백성 위에 있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말로써 백성의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是以欲上民必以言下之欲先民必以身後之). 그런 까닭으로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들이 무거워하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이 방해된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處前而民不害).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고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是以天下樂推而不厭). 그는 다투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누구도 그와 다툴 수가 없는 것이다(以其不爭故, 天下莫能與之爭)"고 하였다.
즉 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낮추기 때문이며, 세상은 겸손한 사람을 추대하며, 겸손은 남과 다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겸손한 마음에 하늘은 복을 내린다.
'주역'에서는 겸손에 대하여 '지산겸괘(地山謙卦) 괘사(卦辭)'에서 "겸손하면 형통하고 군자는 끝이 있다(謙亨, 君子有終)"고 하며,
이에 공자(孔子)는 "겸손이 형통한 것은 하늘의 도(道)가 아래로 내려와서 광명하고, 땅의 도가 낮은데서 위로 행함이라(彖曰: 謙亨 天道下濟而光明, 地道 卑而上行.).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며, 겸손한데는 더하고(天道 虧盈而益謙),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며 겸손한데로 흐르게 하고(地道 變盈而流謙),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롭게 하며 겸손함에는 복을 주고(鬼神 害盈而福謙),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며 겸손한 것을 좋아하나니(人道 惡盈而好謙), 겸손은 상대방을 높여서 더불어 빛나며, 나를 낮추어도 사람들이 넘지 아니하니 군자의 마침이니라(謙 尊而光, 卑而不可踰 君子之終也)"고 하였다.
하늘도 땅도, 귀신도, 사람도 가득 찬 것을 해롭게 하고 겸손함에 복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나를 낮추는 겸손함을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넘어서지 못한다고 밝히고 있다.
'중풍손괘(重風巽卦) 상사(象辭)'에서는 "겸손은 하늘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명(命)을 거듭해서 일을 행하나니라(象曰: 隨風 巽, 君子 以 申命行事)"고 하여, 우리가 겸손을 행하는 것이 천명(天命)을 실천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구약성서 '잠언' 29:23에서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비단 복(福)을 받기 위해서 겸손하기 보다는 겸손함으로써 복을 받는 것이 아닌가한다.
○ 겸손의 실천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잘난 사람들만(?) 가득한 세상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문제들을 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세상의 짐을 말없이 지고 가는 겸손한 사람은 매우 적다.
만약에 사회 지도층에 계신 분들이 겸손하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그러한 미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소학집주'에서 "사람의 덕행은 겸손과 사양이 제일이다(人之德行, 謙讓爲上)"고 하여, 겸손의 미덕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덕목이라고 말한다.
또한 겸손의 미덕을 실천함에 대하여 '가언(嘉言)' 편에서는 "평생토록 길을 양보해도 백 보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평생토록 밭두렁을 양보해도 한마지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終身讓路, 不枉百步. 終身讓畔, 不失一段)"고 한다.
이 구절들은 우리 모두가 겸손을 실천하는데 얼마나 인색했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구약성서, '잠언' 18:12 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편안함에 안주하거나 자만이나 방심하지 않고 늘 겸손함으로써 어떤 어려움도 해쳐나갈 수 있고 존귀함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당위의 법칙을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겸손의 가치와 의미 잘 알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겸손을 실천하는데 주저하고, 순간순간 인식한 이기적 마음을 내 보이게 된다.
우리 모두 겸손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그리고 신념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보자.
'주역' 계사상 12장에서는 겸손의 미덕을 자각하고 신념화하기 위해서 우선 "성현(聖賢)들의 말씀을 숭상하고 이것을 믿고 순종하고 따를 것을 생각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늘이 도와 길(吉)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자각의 과정을 통해서 하늘도, 땅도, 사람들도 좋아하는 겸손을 신념화하여 일상화한다면 필연코 우리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성현(聖賢)들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관한 철학적 고찰
현대인의 죽음은 삭막하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의 과정과 장례는 대개의 경우 망자가 살아 온 삶의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을 나눈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이별이 되지 못하고 차갑기 그지없다.
이는 한국사회가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되면서 야기되는 결과이며, 무엇보다 당장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문명의 소산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과정이다. 떠나는 사람은 존엄하게 삶의 최후를 맞고 떠나보내는 사람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이 삶의 의미로 살아나야 한다.
노화는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진행되며 다른 어느 시기보다 노년은 죽음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 대화를 회피하며, 자기 죽음의 의미에 대해 직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죽음에 대해 어떤 인식과 태도를 지니는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의 핵심이며, 정신생활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한국사회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다. 따라서 노년 인구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노화 및 죽음과 관련된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의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 논자는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질적 연구를 통해 알아보려 했다. 관련 학자나 전문가의 시각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관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태도를 보이는 지를 살펴보았다.
청년기의 대학생과 중·장년기의 일반 성인 표본을 대상으로 한조사 결과를 분석, 조망하면서 한국인의 죽음관이 유래하고 있는 사상적 근거와 그것이 담고 있는 철학적 함의를 찾아보고 이를 '좋은 죽음'과 관련시켜서 논의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서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나 인생의 고난에 봉착하면서 죽음을 연상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인들에게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인 생명의 단절로서의 끝이 아니라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인 측면이 통합적으로 얽혀 있는 복합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죽음의 원인으로는 노화나 수명이 다함 혹은 자연의 섭리와 같은 천명의식과 질병이나 사고와 같은 개인적으로 통제 가능한 요인을 비슷하게 많이 들고 있었다.
죽음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나 '끝'이라는 생각과 내세나 천국과 같은 다른 생으로 넘어간다는 인식이 비슷한 정도로 공존하고 있었다.
끝으로, 한국인들은 좋은 '죽어 가는 과정' 및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고통 없이 육체적으로 편안한 죽음이어야 한다. 둘째, 후회와 집착이 없는 죽음이어야 한다. 셋째, 내 집 내 방 혹은 좋아하는 장소에서 죽는 죽음이어야 한다. 넷째, 가족들 가운데 죽는 죽음이어야 한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실존이다. 좋은 '죽어가는 과정'과 '죽음'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준비가 필요하고, 준비된 죽음은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일반인들의 인식에 바탕을 둔 실천적인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다.
◼ 묘비명에서 깨달은 삶의 지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관련이 깊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는다. 해서 나도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들지만 당장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슬프게 살거나 무력감에 허덕이지는 않는다. 어쩔 때는 당당하기조차 하다.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현실을 보며 삶의 문제에 대해 수없이 고뇌하고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지는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심리일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과 같다.
우리 누구나가 안고 살아야 할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우리보다 앞서 고민한 이들이 있다. 그들이 남긴 짧고 긴 묘비명에는 인생, 사랑, 행복, 자유, 정의, 예술, 명예, 성공. 수신, 희망 등 그 사람의 삶과 추구했던 가치관이 담겨 있다.
이들이 남긴 묘비명의 글을 음미해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우리의 삶이 진지하고 품위를 유지하며 진실되고 바르게 살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묘비명은 말 그대로 고인을 기념하기 위해 묘비에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나 사자를 그리워하거나 존경하는 누군가가 명문이나 시문을 새긴 것으로, 단지 슬픔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냉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고인을 기린다.
죽음을 맞이하며 갖는 느낌은 같은 시대의 같은 환경에서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끼리도 다 다르다. 이는 모두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묘비명에 새긴 글은 본인이 죽음을 생각하며 작성한 자기의 진실을 토해낸 집약된 말이기 때문에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하여 윤색한 글보다 짧지만 감동을 준다. 묘비명 글은 본인이 아니고 고인을 먼저 보내고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사람이 쓴 것도 많다.
다만 고인의 삶이 영향력 있는 유의미하고 진실된 삶을 살았을 때이다. 여하튼 지구촌에 살다 간 명사들의 묘비명에 얽힌 흔적을 편력하며 우리의 삶을 성찰해 본다.
1.
따뜻한 여름 햇볕이여,
다정하게 이곳을 비춰라
따뜻한 남풍이여,
부드럽게 이곳에 불어라
위의 푸른 잔디밭이여,
가볍게 누워라, 가볍게 누워라
잘 자라, 내 사랑아,
잘 자라, 잘 자라
올리비아 수잔 클레멘스의 묘비명이다. 이 글에는 다분히 문학적 포근함이 깃들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명한 문학가 '톰소여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내고 쓴 글이기 때문이다. 올리비아 수잔 클레멘스는 마크 투웨인의 딸이고 톰소여 모험의 저자 마크 투웨인은 필명이고 본명은 사뮈엘 랭혼 클레멘스이다.
2.
"네가 먼저 변하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명이며 긴 부연설명이 있는 묘비명 글이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무한한 상상력을 가졌을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는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마지막 시도로,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누가 아는가, 그러면 세상까지도 변화 되었을지!...
3.
"괜히 왔다 간다"
중광의 묘비명이다. 승려화가인 중광은 자기가 살던 세상이 자못 못마땅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천상병이란 시인은 그의 시 '귀천'에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썼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군사정권 때 죄 없이 그 많은 고초를 당했는데도 말이다. 삶을 느끼고 섭렵하는데 엄청난 시각차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4.
"바음자리표 별이 총총한 드넓은 하늘 아래 무덤 하나 파고 나를 눕게 하소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묘비명이다. 왜 하필이면 별을 낮은 음자리표에 비유했는지 궁굼하나 어쨋건 자기가 묻힐 이 세상이 음악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세상임을 비유하고 있는 인상적인 묘비명이다. 그는 영국의 소설가, 시인이며 그 유명한 보물섬의 작가이다.
5.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묘비명으로 쓴 많은 글 중 가장 인상적이며 널리 알려진 글이다. 그가 죽기전에 미리 써놓은 것으로 알려진 이 글은 영어로도 잘 알려져 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소설가이며 평론가인 그는 아카데미상과 노벨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작가이다. 세계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과의 편지 일화에 얽힌 유머로도 유명하다.
6.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고뇌는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
그가 죽은 후 누군가가 쓴 프란츠 카프카의 묘비명도 인상적이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의 독일 소설가이며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파헤친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였다.
7.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죽기전에 자신이 쓴 묘비명이다. 힘차고 자신감 넘치는 표현은 우리의 흐리멍텅한 삶에 커다란 자극을 준다.
8.
"이 몸은 아니 죽고 살아남아 하나님의 음악을 노래하리라"
창작의 열정 때문에 죽지 않겠다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절규는 음악가로서의 그의 눈물겨운 책임감을 말해주고 있다.
9.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미국의 가수이며 영화배우인 프랭크 시나트라는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지향적인 인생의 희망을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이 말을 믿고 싶어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 최상의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말인가?
10.
"모두 다 버리니 이리도 편한 것을"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묘비명이다. 박경리가 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토지문학 관장인 그녀의 외동딸 김영주 씨? 그를 사지로 몰아간 발라드 오적을 쓴 비운의 작가 사위 김지하 시인? 한 없이 넓은 대지를 가진 그녀의 문학세계?
하여튼 그녀는 다 버렸다고 했다. 모두 다 소중했으니 버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버리고나니 편하단다. 내가 버려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11.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이런 명대사를 남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란 책 한 권만을 남긴 채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만 마가렛 미첼의 묘비명은 다가올 내일이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12.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스탕달신드롬이란 유명한 말을 탄생시킨
적과 흑의 프랑스의 저자 스탕달의 굳은 신념이 담긴 그의 묘비명에서 그의 삶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신념에 넘치는 자신감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영원한 휴식, 침묵의 무덤"이라고 쓴
프랑스의 평범한 우편배달부였던 슈바르의 묘비명도 있고,
"삶과 죽음에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마부여, 지나가라!"라고 쓴 서정시 '이니스프리의 호수섬'의 작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묘비명도 있다.
"나는 본래의 나보다 나아지려고
애썼다"고 자기의 삶의 고백을 쓴
스티븐 킹의 묘비명도 눈길을 끈다.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인가 보다!"는 묘비명을 남긴
일본을 통일하고 중국 대륙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백은 뜻밖의 여운을 남긴다.
"음악은 이곳에 소중한 보물을 묻었다"
누군가가 슈베르트의 묘비명으로 쓴 글은 적절한 묘사인 것 같다.
나는 죽을 때 어떤 묘비명을 남길까?
지금부터 여러분이 세상 뜨면서 남길 묘비명을 만들어 보십시오.
가장 쉬운 게 성경이나 불경 등에서 한 구절 갖다 쓰는 것이겠지만 그런 무성의한 방법 말고 좀더 진지하게 여러분이 살면서 아팠던 일, 즐거웠던 일, 바랐던 일을 바탕으로 해서 남은자들이 당신을 그리워 하며 삶의 목표를 설정할 만한 묘비명을 한 번 만들어 보세요.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 미미하고 선명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맞춤형 삶을 살면 어떨까요?
엘리엇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차라리 악을 행하는 것이 낫다. 그것은 적어도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라고 말했다. '사월은 잔인한 달'이란 그의 표현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과격한 표현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다간 흔적을 남기는 의미있는 삶을 살아라는 질책일 게다.
묘비명으로 새길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굳이 묘비명으로 새길 글을 남기지 않아도 됩니다. 묘비에 새길 말은 당신이 죽은 뒤 남은 사람이 쓰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대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윤동주의 서시에서 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는 없더라도 주위에 좋은 영향을 미치며 선하고 성실하게 산다면 당신이 죽은 후 누군가가 당신을 기릴 문구를 당신의 묘비에 새길 것입니다.
● 퇴계 묘비명
퇴계는 별세(別世)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 4일, 병세(病勢)가 위독해지자 조카 영을 불러서 4언(言) 24句의 자명(自銘)으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파란만장한 자신의 일생을 96글자의 한시(漢詩)로 압축한 것이다.
퇴계(退溪)가 특별히 스스로 묘비명(墓碑銘)을 쓴 것은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경우엔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여 장황하게 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묘비명은 퇴계가 어떤 사람이며 평생 놓지 않았던 학문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퇴계가 스스로 지은 묘명(墓銘)
生而大癡(생이대치)
나면서부터 크게 어리석었고
壯而多疾(장이다질)
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다
中何嗜學(중하기학)
중년에는 학문을 즐겼으며
晩何切爵(만하절작)
만년에는 벼슬을 하였던가
學求猶邈(학구유막)
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어지고
爵辭猶嬰(작사유영)
벼슬은 사양할수록 오히려 얽혀왔다
進行之跲(진행지겁)
나가서 행하는 데 서툴렀고
退藏 之貞(퇴장지정)
물러나 숨으려는 뜻을 굳혔다
深慙國恩(심참국운)
깊이 나라의 은혜를 부끄러워 했고
亶畏聖恩(단외성은)
진실로 성인의 은혜를 두려워
如山嶷嶷(여산의의)
높고 높은 산이 있고
有水源源(유수원원)
졸졸 흐르는 물 있는 데서
婆娑初服(파사초복)
초복(初服)으로 돌아가
脫若衆訕(탈약중산)
한가히 즐겨 뭇 비방을 벗어났다
我懷伊阻(아회이조)
내 회포가 막혔으니
我佩誰玩(아패수완)
나의 패물을 뉘 보리오
我思古人(아사고인)
내 옛 사람을 생각해 보니
實獲我心(실획아심)
실로 옛 사람이 이미 내 마음을 얻었거니
寧知來世(영지내세)
어찌 오는 세상에서
不獲今兮(부획금혜)
오늘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리
憂中有樂(우중유락)
근심 속에 즐거움이 있고
樂中有憂(낙중유우)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다
乘化歸盡(승화귀진)
조화(造化)를 타고 다 돌아감이여
復何求兮(복하구혜)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
● 어느 묘비명에 적힌 시
살아 있는 인간이여,
그대는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면서
자신이 얻지 못한 것,
돈과 아름다움과 사랑 따위를 갈망하며
그대를 뒤덮은 거친 하늘을 보면서 사느니
차라리 썩어 버린 주검이 되는 게
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축복받지 못한 비참한 영혼 중에서
그대 자신이 가장 비참하다 여겨
죽어서 편히 쉬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것을 알라.
그 운명이 아무리
내 상태를 부러워할 만큼
암울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기, 가까이 자신의 운명을 벗어던지고
그대의 운명을 짊어질 사람이 누워 있으니,
그대의 외투를 내게 주고,
그대는 내 것을 입으라.
-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
▶️ 君(임금 군)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은 손에 무엇인가를 갖는 모양으로 천하를 다스리다는 뜻과, 口(구)는 입으로 말, 기도하다의 뜻의 합(合)으로, 君(군)은 하늘에 기도하여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君자는 '임금'이나 '영주', '군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君자는 尹(다스릴 윤)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尹자는 권력을 상징하던 지휘봉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직책이 높은 사람을 뜻하는 尹자에 口자가 결합한 君자는 군주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君(군)은 (1)친구나 손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에 그 성이나 이름 아래에 붙여 쓰는 말 (2)조선시대, 고려 때, 서자(庶子) 출신인 왕자나 가까운 종친이나 공로가 있는 산하(傘下)에게 주던 작위(爵位). 고려 때는 종1품(從一品), 조선시대 때는 정1품(正一品)에서 종2품(從二品)까지였으며, 왕위(王位)에 있다가도 쫓겨나게 되면 군으로 강칭(降稱)되었음. 이를테면,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 등이다. 이와같은 뜻으로 ①임금, 영주(領主) ②남편(男便) ③부모(父母) ④아내 ⑤군자(君子) ⑥어진 이, 현자(賢者) ⑦조상(祖上)의 경칭(敬稱) ⑧그대, 자네 ⑨봉작(封爵) ⑩군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백성 민(民), 신하 신(臣)이다. 용례로는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을 군주(君主),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를 군국(君國), 임금의 명령을 군령(君令), 임금의 자리를 군위(君位),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군자(君子), 처방에 가장 주되는 약을 군제(君劑), 임금의 총애를 군총(君寵), 임금의 덕을 군덕(君德), 임금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를 군도(君道),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군림(君臨), 임금과 신하를 군신(君臣),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군(家君), 엄하게 길러 주는 어버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자기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을 엄군(嚴君), 남의 남편의 높임말을 부군(夫君), 남의 부인의 높임말을 내군(內君), 거룩한 임금을 성군(聖君), 어진 임금을 인군(仁君), 재상을 달리 일컫는 말을 상군(相君), 임금께 충성을 다함을 충군(忠君), 포악한 군주를 폭군(暴君),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됨을 득군(得君), 덕행을 베푸는 어진 임금을 현군(賢君),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첫째는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둘째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자삼락(君子三樂), 임금과 신하와 물과 물고기란 뜻으로 떨어질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 말을 군신수어(君臣水魚), 임금은 그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똑같다는 말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큰 의리를 일컫는 말을 군신대의(君臣大義),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는 말을 군자무본(君子務本), 군자는 큰길을 택해서 간다는 뜻으로 군자는 숨어서 일을 도모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옳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말을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을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는 뜻으로 가을에 새로 나는 표범의 털이 아름답듯이 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아주 빠르고 뚜렷하며 선으로 옮겨가는 행위가 빛난다는 군자표변(君子豹變),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아서 백성은 모두 그 풍화를 입는다는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을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욕신사(君辱臣死) 등에 쓰인다.
▶️ 子(아들 자)는 ❶상형문자로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들을 뜻한다. 지금의 子(자)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글자가 합쳐져 하나가 된 듯하다. 지지(地支)의 첫째인 子와 지지(地支)의 여섯째인 巳(사)와 자손의 뜻이나 사람의 신분이나 호칭 따위에 쓰인 子가 합침이다. 음(音)을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첫째 글자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子자는 '아들'이나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子자는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양팔과 머리만이 그려져 있다. 고대에는 子자가 '아이'나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중국이 부계사회로 전환된 이후부터는 '남자 아이'를 뜻하게 되었고 후에 '자식'이나 '사람', '당신'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子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아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子(자)는 (1)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 (2)신문(新聞), 잡지(雜誌) 따위 간행물(刊行物)의 어느 난을 맡은 기자(記者)가 자칭(自稱)할 때 쓰는 말 (3)십이지(十二支)의 첫째 쥐를 상징함 (4)자방(子方) (5)자시(子時) (6)글체에서, 그대의 뜻으로 쓰이는 구투(舊套) (7)글체에서, 아들의 뜻으로 쓰이는 말 (8)민법상에 있어서는 적출자(嫡出子), 서자(庶子), 사생자, 양자(養子)의 통틀어 일컬음 (9)공자(孔子)의 높임말 (10)성도(聖道)를 전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사람의 높임말, 또는 그 사람들이 자기의 학설을 말한 책 (11)자작(子爵) 등의 뜻으로 ①아들 ②자식(子息) ③첫째 지지(地支) ④남자(男子) ⑤사람 ⑥당신(當身) ⑦경칭(敬稱) ⑧스승 ⑨열매 ⑩이자(利子) ⑪작위(爵位)의 이름 ⑫접미사(接尾辭) ⑬어조사(語助辭) ⑭번식하다 ⑮양자로 삼다 ⑯어리다 ⑰사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녀/여(女), 어머니 모(母), 아버지 부(父)이다. 용례로는 아들과 딸의 높임말을 자녀(子女), 며느리 또는 아들의 아내를 자부(子婦), 아들과 사위를 자서(子壻), 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을 자손(子孫), 아들과 딸의 총칭을 자식(子息), 남의 아들의 높임말을 자제(子弟), 십이시의 첫째 시를 자시(子時), 밤 12시를 자정(子正), 새끼 고양이를 자묘(子猫), 다른 나라의 법률을 이어받거나 본떠서 만든 법률을 자법(子法), 모선에 딸린 배를 자선(子船), 자손의 여러 대나 자손의 끝까지 또는 대대 손손을 일컫는 말을 자자손손(子子孫孫), 자자손손의 썩 많은 세대를 자손만대(子孫萬代),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뜻으로 부자지간의 천륜을 이르는 말을 자위부은(子爲父隱),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막집중(子莫執中),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일컫는 말을 자모지심(子母之心), 듣고 본 것이 아주 좁고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성제인(子誠齊人),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말을 자위부은(子爲父隱),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도 남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을 공자천주(孔子穿珠), 묵자가 실을 보고 울었다는 뜻으로 사람은 습관이나 환경에 따라 그 성품이 착해지기도 악해지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죽은 자식 나이 세기라는 뜻으로 이미 지나간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망자계치(亡子計齒),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함을 이르는 말을 부자자효(父慈子孝) 등에 쓰인다.
▶️ 有(있을 유)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𠂇(우; 又의 변형)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有자는 '있다, '존재하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有자는 又(또 우)자와 月(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月자는 肉(고기 육)자가 변형된 것이다. 有자의 금문을 보면 마치 손으로 고기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고기(肉)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有자는 값비싼 고기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소유하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有(유)는 (1)있는 것. 존재하는 것 (2)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소유 (3)또의 뜻 (4)미(迷)로서의 존재. 십이 인연(十二因緣)의 하나 (5)존재(存在)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②존재하다 ③가지다, 소지하다 ④독차지하다 ⑤많다, 넉넉하다 ⑥친하게 지내다 ⑦알다 ⑧소유(所有) ⑨자재(資財), 소유물(所有物) ⑩경역(境域: 경계 안의 지역) ⑪어조사 ⑫혹, 또 ⑬어떤 ⑭12인연(因緣)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존(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유명(有名), 효력이나 효과가 있음을 유효(有效), 이익이 있음이나 이로움을 유리(有利), 소용이 됨이나 이용할 데가 있음을 유용(有用), 해가 있음을 유해(有害), 이롭거나 이익이 있음을 유익(有益), 세력이 있음을 유력(有力), 죄가 있음을 유죄(有罪), 재능이 있음을 유능(有能), 느끼는 바가 있음을 유감(有感), 관계가 있음을 유관(有關), 있음과 없음을 유무(有無), 여럿 중에 특히 두드러짐을 유표(有表), 간직하고 있음을 보유(保有), 가지고 있음을 소유(所有), 본디부터 있음을 고유(固有), 공동으로 소유함을 공유(共有),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의 말을 유비무환(有備無患),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구무언(有口無言),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이나 흐지부지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유야무야(有耶無耶),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일컫는 말을 유상무상(有象無象),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명무실(有名無實), 머리는 있어도 꼬리가 없다는 뜻으로 일이 흐지부지 끝나 버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유두무미(有頭無尾), 다리가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박식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서주(有脚書廚), 만물은 조물주가 만드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일컫는 말을 유생불생(有生不生), 다리가 있는 양춘이라는 뜻으로 널리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양춘(有脚陽春),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유지경성(有志竟成),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온다는 뜻으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가 먼 데서 찾아오는 기쁨을 이르는 말을 유붕원래(有朋遠來),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무슨 일이든 운수가 있어야 됨을 이르는 말을 유수존언(有數存焉),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있으나 마나 함을 이르는 말을 유불여무(有不如無), 말하면 실지로 행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함 또는 각별히 말을 내 세우고 일을 행함을 이르는 말을 유언실행(有言實行), 끝을 잘 맺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결과가 좋음을 이르는 말을 유종지미(有終之美), 입은 있으되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정이 거북하거나 따분하여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유구불언(有口不言), 행동이나 사물에 처음과 끝이 분명함 또는 앞뒤의 조리가 맞음을 일컫는 말을 유두유미(有頭有尾),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융통함을 이르는 말을 유무상통(有無相通),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는 재능 또는 그 사람을 일컫는 말을 유위지재(有爲之才), 끝까지 일을 잘 처리하여 일의 결과가 훌륭함을 이르는 말을 유종완미(有終完美),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대로 있지 않고 인연에 의하여 변해 가는 것이라는 말로 세상사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유위전변(有爲轉變), 가기에 잎을 더한다는 뜻으로 이야기에 꼬리와 지느러미를 달아서 일부러 과장함을 이르는 말을 유지첨엽(有枝添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이 개방되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교무류(有敎無類) 등에 쓰인다.
▶️ 終(마칠 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冬(동, 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冬(동, 종)과 바느질을 다 하고 나서 실(실사(糸; 실타래)部)을 매듭짓는다는 뜻이 합(合)하여 마치다를 뜻한다. 冬(동; 겨울)은 네 계절(季節)의 끝이므로 실 사(糸; 실타래)部를 덧붙여 감긴 실의 끝이 되고 널리 끝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終자는 '끝나다'나 '마치다',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終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冬(겨울 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冬자는 새끼줄 양 끝에 매듭을 묶어 줄이 풀리지 않게 일을 마무리했다는 의미에서 '끝내다'나 '마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冬자가 '겨울'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자를 더한 終자가 '끝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終(종)은 끝,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①마치다 ②끝내다 ③사람이 죽다 ④다하다 ⑤이루어지다, 완성되다 ⑥채우다, 상당하다 ⑦끝, 마지막 ⑧사방 백 리의 땅 ⑨열두 해 ⑩윤(閏)달 ⑪항상(恒常), 늘 ⑫마침내, 결국(結局) ⑬비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마칠 졸(卒), 마칠 필(畢), 마칠 준(竣), 마칠 파(罷), 그칠 지(止), 끝 말(末), 끝 단(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비로소 시(始)이다. 용례로는 일을 마침을 종료(終了), 끝이나 끝판을 종말(終末), 끝을 냄을 종결(終結), 그 날의 업무를 마침을 종업(終業), 맡아보던 일을 끝냄을 종무(終務), 죽을 때까지를 종신(終身), 필경에 또는 마침내를 종내(終乃),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전쟁이 끝남을 종전(終戰), 한 때 매우 성하던 것이 주저앉아서 그침을 종식(終熄), 간행을 끝냄 또는 끝낸 그것을 종간(終刊), 마지막에 다다른 판국을 종국(終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사이를 종일(終日), 최종으로 도착함을 종착(終着), 끝을 냄이나 끝이 남을 종지(終止), 죽거나 없어져서 존재가 끝남을 종언(終焉), 결정이 내려짐을 종결(終決), 맨 끝이 되는 곳을 종점(終點),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를 임종(臨終), 단계나 차례에 있어서 맨 나중을 최종(最終), 오복의 하나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고종(考終),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종(年終), 끝을 완전히 맺음을 유종(有終), 나중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를 내종(乃終),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 때 또는 일의 마지막을 망종(亡終), 끝이 없음을 무종(無終), 좋지 않은 최후를 악종(惡終),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처음과 끝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음을 일컫는 말을 종시일관(終始一貫), 끝내 소식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종무소식(終無消息),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사모의 정을 이르는 말을 종천지모(終天之慕), 그 사람을 한평생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지 않는 일을 이르는 말을 종신불치(終身不齒),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일컫는 말을 종신지질(終身之疾), 빚돈을 갚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종불출급(終不出給), 끝내 방문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종불투족(終不投足), 어떤 일을 한번 끝내어 마쳤다가 다시 시작함을 일컫는 말을 종이부시(終而復始), 끝내 회개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종불회개(終不悔改),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을 이르는 말을 종식지간(終食之間), 하루낮 동안 들이는 수고를 일컫는 말을 종일지역(終日之役), 영원히 계속되는 슬픔을 일컫는 말을 종천지통(終天之痛),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이르는 말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함을 일컫는 말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같아서 변함 없음을 이르는 말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끝까지 굳게 참고 견딤을 이르는 말을 견인지종(堅忍至終), 부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기를 원하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원걸종양(願乞終養), 우정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흉종극말(凶終隙末)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