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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천애지기(天涯知己)

작성자장경식|작성시간22.02.02|조회수423 목록 댓글 0

 

천애지기(天涯知己)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알아주는 각별한 벗

天 : 하늘 천(大/1)
涯 : 끝 애(氵/8)
知 : 알 지(矢/3)
己 : 자기 기(己/0)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지원(朴趾源)은 혼천의(渾天儀)와 자명종(自鳴鐘)을 완성해 사설 천문대를 세웠던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의 묘지명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을 썼다. 다음은 그중 마지막 대목이다. 덕보(德保)는 홍대용의 자(字)다.

噫!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其墓, 以不朽德保也.
아아!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우뚝하여 옛사람들의 기이한 자취와도 같았기에, 지성(至性)의 벗이 있어 필시 그의 사적을 널리 전할 것이므로, 비단 이름이 양자강 이남에만 두루 퍼지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묘에 묘지를 묻을 것도 없이 덕보의 명성은 불후하게 되리라.

홍대용(洪大容)은 1742년 열두 살 때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으로 김원행(金元行)을 찾아가 수학했다. 석실서원은 노론(老論)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산실로, 같은 석실 출신의 홍대용과 박지원은 깊이 교유했다.

박지원은 이 묘지명 앞부분에서 홍대용의 행적을 순차로 기술하고 평하는 격식을 벗어나, 홍대용과 중국 항주 학자들과의 교유에 초점을 맞춰 그 자초지종을 적었다.

홍대용은 35세 때인 1765년(영조 41년) 서장관(書狀官)인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을 방문해 중국 학자들 및 독일계 선교사들을 만나 서양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때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에서 항주의 선비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와 사귀었는데, 이 세 선비와의 교유는 오래 지속됐다. 이들의 사귐은 홍대용의 손자 대까지 이어졌다.

박지원은 홍대용의 이런 교유에 부러움을 느껴 자신도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이나 만주인과 몽고인을 막론하고, 숙소를 몰래 빠져나가 밤새 필담을 나눴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홍대용과 박지원의 시선은 이미 중국을 넘어섰으며, 이후 미몽 속에 헤매는 조선 지식인들을 계도하고자 하였다.

홍대용(洪大容)과 엄성(嚴誠) 등의 이러한 교유를 천애지기(天涯知己;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알아주는 각별한 벗)라 하는데, 요즘 세상 어떠한지 생각해보게 된다.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 박지원(朴趾源)

뛰어난 능력에도 조선에선 인정받지 못하고 중국에서 인정받던 내 친구 홍대용


대용의 친구 용주에게 부고를 전하려 중국 가는 사람에게 전하다

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덕보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 객 중에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자가 있는데, 그 길은 마땅히 삼하(三河)를 지나게 되다.

* 연사(年使) : 해마다 가는 동지사(冬至使)를 말한다.
* 삼하(三河) : 직예성(直隸省) 순천부(順天府)의 현(縣) 이름이다. 당시 중국 북경에 간 우리나라 외교 사절단은 이곳을 거쳐 귀국하였다.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는데 손유의(孫有義)로 호는 용주다.

* 손유의(孫有義) : 삼하현(三河縣)에 살고 있던 한족(漢族)의 선비로, 자는 심재(心栽)이고, 호는 용주(蓉州)다. 일찍이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이 귀국길에 올라 삼하를 지났는데, 이때 손유의가 홍대용을 찾아와 서로 알게 됐으며,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하였다.

曩歲, 余自燕還, 爲訪蓉洲不遇, 留書俱道德保作官南土, 且留土物數事, 寄意而歸.
지난해 나는 북경으로부터 돌아올 적에 용주(蓉洲)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땅에서 벼슬한 것(당시 홍대용이 경상도 영천에서 고을 수령을 한 것을 이른다)을 갖추어 말하고, 또 토산물 몇 개를 남겨두고 뜻을 붙인 채 돌아왔다.

蓉洲發書, 當知吾德保友也.
용주(蓉洲)가 편지를 펴본다면 마땅히 내가 덕보의 친구인 걸 알리라.

乃屬客赴之曰:
그래서 손님을 위촉하여 그에게 부고했다.

乾隆癸卯月日, 朝鮮朴趾源頓首白蓉洲足下.
건륭(乾隆) 계묘(癸卯)년 모월 모일에, 조선인 박지원은 머리를 조아려 용주(蓉洲) 족하께 사룁니다.

* 건륭(乾隆) 계묘(癸卯) : 정조 7년인 1783년을 말한다. 이 해에 홍대용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건륭(乾隆)은 청나라 제6대 황제인 순황제(純皇帝)의 연호다.

敝邦前任榮川郡守南陽洪湛軒諱大容字德保, 以本年十月廿三日酉時不起.
우리나라 전직 영천군수 남양의 홍담헌의 이름은 대용, 자는 덕보가 올해 시월 23일 유시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 휘(諱): 이름을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큰 실례로 여겼기에 '꺼린다'는 뜻의 '휘' 자를 '이름'을 뜻하는 말로 쓰게 되었다.

平昔無恙, 忽風喎噤瘖, 須臾至此.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아무 말을 못하다가 잠깐 사이에 이런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得年五十三, 孤子薳, 哭擗未可手書自赴, 且大江以南, 便信無階.
쉰 다섯 해를 살았고 아들 원(薳)은 통곡하며 슬퍼하느라 손수 써서 스스로 부고치 못하고, 또 양자강 이남엔 곧 말할 계제(階梯;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당한 형편이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 고자(孤子) : 아버지를 잃은 자식을 이르는 말이다. 어머니를 잃은 자식은 '애자(哀子)'라고 한다.

並祈替此轉赴吳中, 使天下知己, 得其亡日, 幽明之間, 足以不恨.
아울러 비니 이를 대신하여 오중(吳中)에 전하여 부고하여, 천하의 지기들에게 사망한 날을 알도록 하고, 죽은 이와 산 이 사이에 한스럽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 오중(吳中) : 중국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는 연암의 착각이다. 홍대용의 중국인 벗들은 소주가 아니라 항주 사람들이기에 '오중(吳中)'이 아니라 '월중(越中)'이라고 해야 옳다. 예전에 중국 절강성 항주를 '월(越)'이라고 했다.

권력에 욕심도 없이 창의적으로 과학기구를 만든 대용

旣送客, 手自檢其杭人書畵尺牘諸詩文共十卷.
이윽고 손님을 보내고 손수 스스로 항주 사람들의 서화와 편지와 모든 시문을 점검하니 10권이었다.

陳設殯側, 撫柩而慟曰:
이것을 빈소 곁에 진설하고 널판을 어루만지며 통곡했다.

嗟乎德保, 通敏謙雅, 識遠解精.
아! 덕보는 통달했고 민첩했으며 겸손했고 우아했으며 식견이 원대하고 이해가 정밀했다.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慮, 刱出機智.
더욱 율력(律曆; 천문학)에 장점이 있어 혼천의(渾天儀) 등 여러 기구를 만들었고, 골똘히 생각하고 누적하듯 사려하여 창조적으로 기지를 내었다.

* 율력(律曆): 원래 악률(樂律; 음률에 관한 이론)과 역법(曆法)을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요즘의 천문학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담헌은 수학과 천문학에서 당대 제1인자였다.
* 혼천의(渾天儀) :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 시계의 구실을 한 기구인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제작되어 왔다. 홍대용은 전라도 동복(同福; 전남 화순 지역의 옛 지명)에 살고 있던 선배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의 도움을 받아 두 대의 혼천의를 제작하여 충청도 천원군의 향리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사설 천문대를 짓고 거기에 비치하였다. 조선 초기와 중기에 만들어진 혼천의들이 수력으로 작동된 데 반해,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는 톱니바퀴로 자명종과 연결되어 그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德保甞論地一轉爲一日, 其說渺微玄奧.
처음 유럽인이 지구를 이야기할 때 지구가 돈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자전하면 하루가 된다고 논했으니, 그 학설이 미묘하고도 현묘하고도 오묘했었다.

顧未及著書, 然其晩歲益自信地轉無疑.
다만 책을 쓰진 못했지만 만년에 더욱 스스로 지전설을 믿으며 의심치 않았다.

世之慕德保者, 見其早自廢擧, 絶意名利, 閒居爇名香皷琴瑟, 謂將泊然自喜, 玩心世外.
세상에서 덕보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일찍이 스스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뜻에서 명성이나 이익을 끊고 한가롭게 살며 이름난 향을 사르고 비파를 타는 걸 보고, '장차 골똘히 절로 기뻐하며 마음을 세상 밖에서 놀게 하겠구나'라고 생각하리라.

而殊不識德保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특수하게 덕보가 뭇 사물을 종합하여 정리하여 어지러운 걸 베어내고 섞인 것을 잘라내며, 나라의 재정을 맡기고 먼 지역에 사신을 보낼 만하며, 군대 통제의 기이한 책략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謹簿書, 先期會, 不過使吏拱民馴而已.
홀로 밝디 밝게 남에게 드러나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 지방의 군수를 지내며, 문서를 잘 정리해 기회에 앞서 처리하여, 아전이 공손해지고 백성이 순해지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연행에서 만난 세 명의 중국친구

甞隨其叔父書狀之行, 遇陸飛, 嚴誠, 潘庭筠於琉璃廠.
일찍이 숙부가 서장관으로 연행 갈 때 따라가, 육비(陸飛),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琉璃廠)에서 만났다.

* 육비(陸飛) : 자가 기잠(起潛)이고 호는 소음(篠飮)이며 1719년생이다.
* 엄성(嚴誠) : 자가 역암(力闇)이고 호는 철교(鐵橋)임 1732년생이다.
* 반정균(潘庭筠) : 자가 난공(蘭公)이고 호는 추루(秋루)이며 1742년생이다.
* 유리창(琉璃廠) : 현재 중국 북경시(北京市)에 있는 문화의 거리다. 화평문 남쪽과 호방교(虎坊橋) 북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 선무구(宣武區)에 속한다. 원(元)과 명(明) 때 이곳에 유리가마 공장이 있었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북경 외성(外城)의 상업이 날로 번창하여 한족 관리들이 선무문(宣武門) 밖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로써 외지고 쓸쓸했던 유리 공장 일대가 점차 번성하여 고서적, 골동품, 그림, 탁본, 문방사구 등을 판매하는 상점 거리가 형성되었으며, 상인, 관리, 학자, 서생 등이 끊이지 않는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

三人者俱家錢塘, 皆文章藝術之士, 交遊皆海內知名, 然咸推服德保爲大儒.
세 사람은 모두 전당(錢塘)에 집에 있었고 모두 문장과 예술이 있는 선비였으며, 그들이 교유한 이들도 모두 중국 내의 알려진 명사들이었지만, 다 덕보를 높이 받들어 섬기며 대유(大儒)라 여겼다.

* 전당(錢塘) : 지금의 절강성 항주시(杭州市)의 옛 이름이다. '민(閩)'은 지금의 복건성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所與筆談累萬言, 皆辨析經旨, 天人性命, 古今出處大義, 宏肆儁傑, 樂不可勝.
함께 필담했던 여러 말들은, 모두 경전의 뜻과 천인이나 성명에 대한 것 고금 출처의 큰 뜻에 대한 판별과 분석으로, 굉징하고 거리낌이 없으며 탁월하여 즐거움이 끝이 없었다.

及將訣去, 相視泣下曰; 一別千古矣, 泉下相逢, 誓無愧色.
장차 헤어지려 할 때가 되어 서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고 말했다. '한 번 헤어지면 천고토록 지날 테니, 황천에서 서로 만난다면 부끄럽지 않도록 맹세합시다.'

與誠尤相契可, 則微諷君子顯晦隨時, 誠大悟, 决意南歸.
엄성과는 더욱 서로 잘 맞아 은밀히 '군자는 드러내고 감춤은 때에 따라야 한다'고 알려주었고, 엄성은 크게 깨달아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결정했다.

엄성과의 심금을 터놓던 우정

後數歲, 客死閩中, 潘庭筠爲書赴德保.
수년 후에 민(閩)이란 땅에서 객사하자, 반정균(潘庭筠)은 편지를 써서 덕보(德保)에게 부고했다.

德保作哀辭具香幣, 寄蓉洲, 轉入錢塘, 乃其夕將大祥也.
덕보는 애사(哀辭)를 짓고 향과 지폐를 갖추어 용주(蓉洲)에게 부쳐, 전하여 전당으로 들어오니, 곧 그날 저녁이 대상(大祥) 날이었다.

* 애사(哀辭) : 일찍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는 글이다. 엄성은 홍대용이 귀국한 2년 뒤인 1768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당시 홍대용은 부친상 중이었지만 엄성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몹시 애통해하였다.
* 대상(大祥) : 죽은 지 2년 만에 지내는 제삿날로, 이날 삼년상이 끝난다.

會祭者環西湖數郡, 莫不驚歎, 謂冥感所致.
제사에 모인 사람들은 서호(西湖) 여러 군의 사람들로 경탄해마지 않으며, '유명의 감응이 지극해서이다'라고 말했다.

* 서호(西湖) : 항주에 있는 유명한 호수 이름이다.

誠兄果, 焚香幣, 讀其辭, 爲初獻.
엄성의 형인 엄과(嚴果)가 향과 지폐를 사르고, 애사를 읽으며 초헌(初獻)을 지냈다.

* 초헌(初獻) : 제사에서 첫 번째 술을 올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子昂, 書稱伯父, 寄其父鐵橋遺集, 轉傳九年始至.
엄성의 아들 엄앙(嚴昂)은 글로 덕보를 백부라 말하고 아버지의 '철교유집(鐵橋遺集)'을 부쳐왔는데, 우여곡절 끝에 9년 만에 도착했다.

集中有誠手畵德保小影.
문집 속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영정(影幀)이 있었다.

誠之在閩, 病篤, 猶出德保所贈鄕墨嗅香, 置胷間而逝, 遂以墨殉于柩中.
엄성이 민땅(閩)에 있을 적에 병이 위독해지자, 오히려 덕보가 보내온 조선의 먹과 향기로운 향을 꺼내 가슴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마침내 먹은 관 속에 넣었다.

吳下盛傳爲異事, 爭撰述詩文.
오중에선 성대하게 전해져 기이한 일로 여겨졌으며 다투어 시문으로 지어졌다.

有朱文藻者, 寄書言狀.
주문조(朱文藻)라는 사람이 편지를 보내 상황을 말해줬다.

덕보의 내역

噫!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其墓, 以不朽德保也.
아! 덕보가 살아있을 때 이미 대범하여 지난 옛날의 기이한 자취가 있는 듯했으니, 벗 중에 지극한 성품을 지닌 이가 반드시 장차 널리 전한다면, 이름이 강남에만 알려질 뿐만 아니리니, 묘지명을 기록하길 기다리지 않아도, 덕보의 명성은 썩어 없어지지 않으리라."

* 락락(落落) : ① 대범하고 솔직하다 ②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다 ③ 많은 모양

考諱櫟牧使, 祖諱龍祚大司諫, 曾祖諱潚參判, 母淸風金氏, 郡守枋之女.
돌아가신 아버지 성함은 역(櫟)이고 목사였으며, 돌아가신 할아버지 성함은 용조(龍祚)이고 대사관이었으며, 증조부의 성함은 숙(潚)으로 참판이었으며, 어머님은 청풍김씨로 군수 방(枋)의 딸이다.

德保以英宗辛亥生, 得蔭除繕工監監役, 尋移敦寧府參奉, 改授世孫翊衛司侍直, 叙陞司憲府監察, 轉宗親府典簿.
덕보는 영종 신해(1731)에 태어나 음직(蔭職; 蔭補)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고, 이윽고 돈녕부(敦寧府) 참봉에 전직되었다가 고쳐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 侍直)에 제수되었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차례로 올랐으며 종친부 전부에 전직되었다.

* 음직(蔭職; 음보/蔭補) :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함을 이르는 말이다.
*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 侍直) : 세손(世孫)을 시위(侍衛)하는 직책이다. 당시 세손은 훗날의 정조(正祖)다. 홍대용은 이 벼슬에 있으면서 학문적으로 정조를 가르치며 정조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홍대용은 당시 정조와 주고 받았던 말을 일기로 자세히 기록해두었는데, 그것이 지금 전하는 '계방일기(桂坊日記; 계방은 세손익위사의 별칭)'이다.

出爲泰仁縣監, 陞榮川郡守, 數年以母老辭歸.
외직으론 태인현감이 되었다가 영천 군수로 승진했으며, 몇 해 지나 어머니의 늙으심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 영천 군수로 승진하여 두어 해 재임하다 : 홍대용은 1780년 영천 군수가 되었다가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내관(內官) 3년, 고을 원으로 6년, 도합 9년의 벼슬살이를 했다. 김태준 교수가 작성한 홍대용 연보에 의하면 홍대용은 이해 10월 22일 중풍으로 상반신에 마비가 왔고 이튿날 별세하였다.

配韓山李弘重女, 生一男三女, 婿曰趙宇喆, 閔致謙, 兪春柱.
배필은 한산 이홍중(李弘重)의 딸로 1남 3녀를 낳았으니, 사위의 이름은 조우철, 민치겸, 유춘주이다.

以其年十二月八日, 葬于淸州某坐之原.
그 해 12월 8일에 청주의 아무개 자리(某坐) 언덕에 장례 지냈다.

* 모좌(某坐) : 무슨 방향이라는 뜻인데, 무덤이 향하는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홍대용은 향리인 충남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촉칭 구미들 기슭에 묻혔다.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명은 다음과 같다.
宜笑舞歌呼
마땅히 웃고 춤추며 노래하고 환호하리.
相逢西子湖
서로 서쪽 호수에서 만나리니
知君不羞吾
그대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줄 안다네.
口中不含珠
입속에 구슬을 머금지 않은 건(飯含)
空悲咏麥儒
부질없이 보리 읊조린 유학자 슬퍼해서지.
(燕巖集 卷之二)

* 반함(飯含) : 옛날에 염습(殮襲,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리는 일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 이런 말이 보인다. "담헌공(홍대용)은 평소 주장하기를, 장례 때 반함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으며, 또한 아버지(연암)에게 자신의 장례를 돌봐 달라고 당부하셨다. 급기야 공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이 사실을 그 아들 원薳에게 일러 주었다. 원 또한 부친의 유지(遺旨)를 들은 터라, 부친이 쓰시던 물건들을 무덤에 묻었을 뿐 반함하지는 않았으니 그 뜻에 따른 것이다." 연암 역시 담헌이 한 것처럼 자신의 장례 때 반함을 하지 말라는 말을 죽기 전에 자식에게 남겼다.
* 보리 읊조린 유학자 : 장자 외물(外物)편에 보면, 유자(儒者)란 입만 열면 시(詩)와 예(禮)를 거론하지만 실제로는 남의 무덤을 몰래 파헤쳐 시체의 입안에 있는 구슬을 빼내는 도둑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유자는 가증스럽게도 이런 시를 읊고 있다. "푸릇푸릇한 보리 / 무덤가 언덕에 무성하네. / 생전에 남에게 보시한 적 없으면서 / 죽어서 어찌 구슬을 머금고 있나?"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점잖은 체하면서 실제로는 더없이 위선적인 유자를 야유하고 있다. 연암은 '장자'의 이 고사를 끌어들여 양심적인 실학자 홍대용을 당시 조선의 위선적인 유자들과 대비하고 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고증과 박학의 대가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가지를 형성한 이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이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박물학에 정통한 이덕무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정조에게 발탁된 서자 출신의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는 정종(定宗, 조선의 제2대왕)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 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특히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청장은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 박씨는 토산현감 사렴(師濂)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6살에 아버지가 아들인 이덕무에게 한문을 가르치고자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혔는데, 1편도 채 끝나기 전에 훤히 깨우친 영재였다.

16세에 동지중추부사 백사굉의 딸 수원 백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현재 종로구 부근)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덕무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묘지명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이덕무를 두고 "밖으로는 쌀쌀한 것 같으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세(利勢)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라 평했다.

이덕무는 1766년 그의 나이 26세 때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1779년 그의 나이 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중화(中華)시단의 조선시인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사가 시인으로 중국 청나라 문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시가 중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77년부터이다.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이기도 한 유련(柳璉, 柳琴으로 개명)이 1776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훗날 사가(四家)로 불린 이덕무를 비롯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청나라 시인이자 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에게 소개하였고, 1777년 청나라에서 '한객건연집'이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 실린 이덕무의 시는 총 99수로 그 내용은 자연과 여정, 인물, 송별, 역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매우 다양하다. 중국에 가 본적도 없던 이덕무였지만, 그의 시는 중국 시단에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한객건연집'이 소개되고 2년 뒤 이덕무는 연행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이미 지명도를 쌓은 이덕무는 반정균을 비롯하여 이조원의 동생인 이정원, 기균, 옹방강, 축덕린 등 청조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고, 이들을 통해 그의 시명(詩名)은 청조 시단에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조원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건실하고 격조를 갖추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노련하다"고 평했다.

시에 대한 그의 재주는 정조도 익히 인정한 바였다. 한번은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놓고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짓게 하고는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했다.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평했다.

정조는 이덕무의 시권(詩卷)에 우아하다는 의미의 '아(雅)'자를 썼는데, 이후로 이덕무는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였다.

18세기 그들이 나누었던 우정

청나라에 소개된 '한객건연집'의 저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백탑파 혹은 이용후생파로 불리는 실학자이며, 지기(知己)의 정을 쌓은 벗이기도 하다. 특히 박제가, 유득공과는 서자라는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신분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덕무가 천애지기(天涯知己) 박제가를 알게 된 것은 24세 되던 1764년이다. 이덕무의 처남인 무인 출신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박제가의 '초어정(樵漁亭)'이라는 글씨를 인상 깊게 본 것이다.

3년 후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의 첫 만남을 두고 "너무 맘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뻐했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은 1793년 이덕무가 죽을 때까지 근 30년간 이어졌다. 30년 동안 이덕무가 있는 곳엔 박제가가 있었고 박제가가 있는 곳엔 항상 이덕무가 있었다.

가녀리고 큰 키의 이덕무는 고상하고 조용했던 반면에, 박제가는 작은 키에 박력있고 자기 주장과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외모와 성격은 달랐지만, 뜻이 맞았고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착암 유연옥의 집에서 해금 연주를 듣던 박제가는 한밤중에 자신의 벗 이덕무가 보고 싶어졌다.

올 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취중에 눈은 깊이도 쌓였네. 이러한 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 박제가의 '정유각집(貞蕤閣集)' 中에서

두 사람은 1778년 중국 연행에도 함께 갔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1779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에 동시에 등용되어 십수년간 동료의 정을 나눴다.

잦은 숙직과 힘든 근무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의지해가며 규장각 도서들을 편찬해 갔다. 사실 이덕무는 박제가 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으나, 이들에게 나이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하루는 빈곤을 겪던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제일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맹자(孟子)'였다. 글을 하는 선비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크게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유득공 또한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박장대소했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했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만 한다고 해서 살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의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말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가 자조적으로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기구한 현실은 유쾌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승화되었고, 세상의 출세와 명예로부터 한 꺼풀 벗어난 자유인으로서의 경지로 나아갔다.

갑작스런 죽음과 남긴 저술

1793년 1월 25일 이덕무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본래 체력이 약한 데다가 규장각 검서관 생활에서 오는 고된 직무와 생활고를 겪다가 감기와 함께 폐렴 증상이 겹치면서 타계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박제가와 이서구, 박지원, 남공철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정조는 내탕금(內帑金; 임금이 개인적 용도로 쓰는 돈) 5백냥을 하사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고 아들 광규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차했다.

이덕무의 박학다식은 이용후생파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어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으나, 책을 쌓아 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승두세자(蠅頭細字; 파리만큼 작은 글자) 또한 수백 권으로서 자획이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 원래 글자보다 획을 간단하게 만든 글자) 하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책은 10여 종에 달하는데, "나의 글이 진귀하지 못한 것이라, 한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여 처음 쓴 초집(初集)의 이름을 '영처고(嬰處稿)'라 하였다 한다.

또한 청장이라는 물새 이름을 자호(自號)한 뜻을 삼아 두 번째 문집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이름 지었다.

또한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는 의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예절에 관한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고, 그 외에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청정국지(蜻蜓國志), 앙엽기(盎葉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예기억(禮記臆), 송사보전(宋史補傳),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이 있다.

북학을 거부한 자국 중심의 세계관

조선후기 특히 18세기는 실학자들의 중국 방문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홍대용과 연암 무리의 문인들인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모두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는데,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라는 연행록을 남겼다. '입연기'는 1778년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하여, 윤6월 14일 의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연행록이다.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온 연암파 실학자들과 달리 청 왕조의 지배체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박제가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덕무는 그의 친청적(親淸的)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다녀왔지만, 조선 선비들이 청을 오랑캐로 폄하하는 것을 비판한 박지원, 박제가와는 서로 다른 중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무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망정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와는 또 다른 자국 중심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청나라와 조선을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였다. 사실 청나라에 대한 이덕무의 생각은 전통적인 보수성을 띠면서도 자국 중심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점차 변화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생각이 팽배했던 시기에 조선 선비들이 가졌던 청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이덕무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고전환담(古傳幻談)
살인자를 쫓는 밤


정조 재위 13년째 되던 1790년 겨울은 몹시 추웠다. 희미한 달빛을 받은 창덕궁 전각은 살짝 내린 눈에 덮여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규장각 우측에 자리 잡은 검서청에서 처남 백동수(白東修)를 기다리던 이덕무(李德懋)는 피곤에 겨워 자주 졸았다.

서자 출신으로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된 지 벌써 11년, 지천명을 코앞에 둔 그는 기이한 혼란에 사로잡혀 부쩍 더 늙은 기분이었다. 그는 왕을 의심하고 있었다.

등잔불 심지를 자르고 외알 안경을 코에 걸친 그가 형조로부터 넘겨받은 기록을 다시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시신 검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서류 묶음을 펼쳐 초검에서 삼검에 이르도록 뭔가 오류가 있지 않은지 살폈다.

수백 번을 들여다봐도 오류 따윈 없었다. 살인은 한 사람에 의해 같은 시간대에 이뤄졌고 찌른 각도나 솜씨 또한 일관됐다. 따로 공범이 존재하긴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검서청 입구 쪽에 인기척이 일었다.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壯勇營)의 창검술 교관 백동수는 왕명으로 이덕무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는 중이어서 창덕궁 출입이 자유로웠다.

두 사람은 밀담을 나누기 위해 금천(錦川) 쪽으로 낸 누마루인 동이루(東二樓)로 서둘러 이동했다. 금천 너머 홍문관 쪽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백동수가 겉옷 오른팔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강진에서 막 도착한 길이요. 근데 매부, 이 상처를 보오."

백동수의 오른 팔뚝에 칼이 세로로 지나며 낸 듯한 상흔이 보였다. 피부 아래를 가르지 않아 큰 출혈을 일으키진 않았음에 분명했다. ​"천하의 백동수를 이리 벨 자가 조선에 있단 말인가?"

싱긋 웃은 백동수가 옷을 내리며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라도 강진 구석에 그런 칼잡이가 숨어 살 리 있소? 이건 장용영 솜씨요. 내가 가르친 놈들이었어."

놀란 표정의 이덕무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신음처럼 속삭였다. "장용영 무관들이 처남을 강진까지 따라가 습격했다? 그렇다면 이는 필시…."

침묵에 잠긴 두 사람은 동이루 아래로 흐르는 금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백동수를 먼저 퇴청시킨 이덕무는 사색에 잠겼다. 그가 백동수를 강진으로 밀파한 목적은 단 하나,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김은애(金銀愛)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 해 전 5월, 강진 탑마을의 18세 유부녀이던 김은애는 처녀 시절부터 자신을 끈질기게 무고해온 동네 노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문제는 이 사건의 기괴한 처결 과정이었다.

탐정 이덕무

넓은 소매 안에 지필묵을 넣고 두꺼운 누비솜 옷을 걸친 이덕무는 검서청을 나선 뒤 미끄러운 규장각 앞 전돌길을 조심스레 걸어 출입문으로 향했다. 교정 업무를 맡은 각신(궐내각사 소속 신료) 서너 명이 눈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잽싸게 금호문(金虎門)을 나오며 수문장청 경비병들과 맞닥뜨렸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왕은 그의 개인적 수사를 이상한 방식으로 방해했지만 추가 제재 조치를 취하진 않은 것 같았다.

광화문 앞 의정부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마침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기다리는 정본당(政本堂)에 도착한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승들 집무실인 정본당 안채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던 채제공은 앞자리에 앉는 상대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며 물었다. "이 검서도 참 끈질긴 사람일세. 뭘 더 알고 싶어 이러나?"

잠시 뜸을 들이던 이덕무가 강진을 다녀온 백동수 얘기를 꺼내자 책을 덮은 채제공이 비로소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벌였군. 주상의 뜻을 거스를 순 없네. 이미 사면령을 내리셔서 김은애를 다시 잡아들일 수도 없어. 그냥 묻어버리세."

이덕무가 말했다. "재심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좌상 영감. 소신에게 사건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해 널리 알리고 내각(규장각)에도 보관하라는 명을 내리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주상이십니다. 청사에 남을 기록이온데 어찌 소홀히 처리하겠습니까?"

담뱃대를 입에 물고 길게 한 모금 빤 채제공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자네의 지나친 호기심이 자칫 주상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어. 물론 이 사건은 이상해. 그래서 나도 여러 차례 사면 불가를 주청했지 않았는가? 형조의 판결도, 의정부의 건의도 다 묵살하신 분일세. 그리고 백 초관(哨官)을 공격한 게 진정 장용영 쪽이라면, 그건 이 문제를 더 파고들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일세. 멈추게."

의정부를 나선 이덕무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경복궁 쪽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처남이 사는 남산 아래 장흥방을 향해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왕의 행동은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규장각 안에서 가장 엄밀하고 깐깐한 자신에게 사건 기록을 맡기고도 중립적으로 서술한 초고를 올리면 곧바로 수정하라는 어명이 내려오곤 했다. 진정 왕이 바라는 건 무엇일까?

김은애 사건

1년 전인 1789년 윤5월 26일 초경 무렵, 강진 탑마을의 김은애는 처녀 시절부터 자신에 관한 거짓 소문을 퍼뜨려온 같은 동네 안 노파 집에 침입해 노파를 난자했다. 무고의 내용인즉슨 그녀가 처녀 시절부터 안 노파 시댁 쪽 소년과 밀통하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평소 허언증이 심하던 노파는 창기 출신에 자식도 없었으며 남편의 삯일로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신세였다. 정숙한 양갓집 규수에겐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지만 살해 수법이 잔학하며 치밀했다.

사건을 처음 접한 강진현감 박재순(朴載淳)은 김은애의 어미를 의심했다. 강한 힘으로 베이고 찢긴 시신 상태로 볼 때 작고 유약한 은애의 짓으로 보기 힘든 데다 어미와 노파 사이엔 채무관계도 있었다.

하지만 피로 범벅이 된 은애의 옷과 달리 그녀 어미의 옷에선 많은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목격자들에 따르면 노파를 살해한 은애는 추문을 퍼뜨리는 데에 공모한 노파 시댁 쪽 소년 최정련(崔正連) 집을 향해 곧장 달려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 두 번째 살인을 중간에 막은 인물이 바로 은애 어미였다. 틀림없이 공범이 있을 것으로 여긴 현감이 은애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지만 그녀는 자복하지 않았고 별다른 추가 증거물도 찾을 수 없었다.

공범이 없다고 확신한 현감은 은애를 동정해 관찰사 윤행원(尹行元)에게 사건을 보고하며 사실을 다소 미화했다. 윤행원도 공범을 의심해 아홉 차례나 추가 신문을 진행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단독 범행으로 결론을 낸 그는 즉시 은애를 처형해야 했지만 망설였다.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묘한 매력이 있었고 사건은 윤상(倫常)을 지키기 위해 감행한 절개 있는 행동이란 명분도 갖추고 있었다. 처형은 이듬해로 미뤄졌다.

이듬해인 1790년 경술년, 원자가 태어나는 경사가 있자 특사 대상 사형수 명단을 올리라는 어명이 내려왔다. 그사이 바뀐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은 김은애 사건을 더욱 아름답게 포장해 조정에 올렸고, 6월 내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옥안(獄案)을 심리하던 왕에게 이 사건이 눈에 뜨이는 순간 잔인한 살인은 대단한 절행으로 뒤바뀌어 칭송되기에 이르렀다.

왕은 은애를 방면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 일을 미담으로 기록해 삼남 지역 방방곡곡에 알리라고 명했다. 검서관 이덕무와 왕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수사관 백동수

장흥방 집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이덕무를 본 백동수는 반색하며 주안상을 준비했다. 주당인 두 사람은 연거푸 잔을 비워댔다. 음률과 의학에 두루 밝은 백동수는 조선 최고의 책벌레 이덕무에게 썩 잘 어울리는 처남이었고, 같은 서자로서 젊은 날의 지독한 가난을 함께 견딘 동지이기도 했다.

술기운이 돈 백동수가 말했다. "김은애 말이요. 잘 살고 있었소. 남편과 행복해 보이더란 말이지."

팔짱을 낀 채 남산을 바라보던 이덕무가 웃으며 물었다. "그 남편, 김양준(金養俊)이란 자는 만나보지 못했다고?"

고개를 끄덕인 백동수가 씁쓸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그러기 직전 놈들이 들이닥쳤으니까. 객점 마당에서 세 녀석과 칼을 섞었는데, 아까 말했다시피 내 조금 방심했었지. 팔뚝을 베여 칼을 놓쳤는데도 그냥 조용히 사라집디다. 떠나라는 경고였던 거지. 주상이 왜 그런 것 같소?"

이덕무가 한 잔 더 들이켰다. 그가 보기에 범인은 김양준이었다. 칼의 달인 백동수에 따르면 범인은 반드시 한 명이어야 했고 힘이 강해야만 했다.

안 노파는 늙었지만 완력이 은애보다 두 배는 셌다. 다양한 저항흔을 고려할 때 잠들었다 당한 건 결코 아니었고 심한 격투를 벌였음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시신에 난 깊은 상처는 남성의 힘으로도 벅찬 것이었다.

이덕무가 말했다. "처남 말이 맞았던 거야. 김양준이 아내 옷을 입고 노파를 살해한 거지. 그리고 서로 옷을 갈아입고 연극을 한판 벌인 거네. 영리한 자들이야."

이덕무가 말을 마칠 때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곁말 한 마리를 더 몰고 나타난 자는 후배 검서관인 박제가(朴齊家)였다.

이덕무는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청나라에서 돌아왔단 얘긴 들었네, 박 검서. 원임(原任) 어른께서도 무탈하신가?"

원임(原任)이란 왕을 도와 규장각을 설계하고 창설했으며 오랫동안 직제학으로서 조직을 이끌던 서호수(徐浩修)를 지칭했다.

규장각을 상징하던 서호수에게 왕은 원임직제학(原任直提學)을 제수해 업적을 치하했다. 소론이던 서호수는 노론으로부터 왕을 보위하는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지만 서로 협력해야 했던 남인 채제공과는 알력을 빚고 말았다.

덕분에 정계를 떠나 있던 그를 다시 불러들인 왕은 청 황제(건륭제)의 팔순 생일을 축하하는 만수절(萬壽節) 사은부사(謝恩副使)로 파견했다. 박제가는 금년 5월에 출발한 이 사행단의 수행원이었다.

6개월여의 여정을 마치고 막 귀국한 사행단은 왕에게 복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터였다. 다급한 표정의 박제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말했다. "어서 규장각으로 갑시다. 원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놀라는 이덕무를 말에 태운 박제가가 앞장서 말을 몰며 이덕무를 돌아보고 외쳤다. "형님도 참 고집이 심하십니다. 몇 개월을 못 참고 일을 벌이시오?"

박제가가 한 말의 속뜻을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두 사람은 창덕궁에 당도했다. 이덕무는 착잡했다. 규장각 뜰 분위기가 이번엔 이상하게 을씨년스러웠다.

모든 게 불안하게 느껴졌다. 집무실 문을 열기 전 술기운을 떨쳐낼 겸 규장각 뒤편 향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크게 들이켰다.

혜경궁의 은밀한 초대

서호수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역학과 천문지리학은 물론 각종 측량기술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계산가였고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런 서호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오랜 사행으로 수척해진 얼굴엔 병색도 완연했다.

"이 검서. 번암공을 만났다지?"

서호수의 목소리는 갈라지기까지 했다. 번암은 채제공의 호였다.

"네. 원임 어른. 김은애 사건의 전모를 알아야겠기에 문의드리고 왔습니다."

잠시 눈을 감았던 서호수가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분노한 그가 야무지게 한 마디씩 끊어가며 말했다. "우리 존재 목적이 뭔가? 주상을 수호해 태평성대를 여는 걸세. 누가 우리 편이고 적인지는 알아야 않겠나? 번암이 어떤 자인가? 탕평의 명분으로 저 자리에 앉아 있지만 두루뭉술한 인간일세. 믿을 수 없는 자야."

이덕무는 등에 소름이 돋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머릿속은 하얘져 어떤 생각도 해낼 수 없었다. 서호수는 자신이 부재한 동안 벌어진 김은애 사건 처결 과정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채제공이 말한 역린이란 단어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바깥 뜨락에서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호수가 문을 열자 가마 두 대가 대기해 있었다. 앞쪽 가마에 먼저 올라탄 서호수가 두 검서관에게 뒤쪽 가마에 타라고 손짓했다.

가마는 검서청 뒤 운한문(雲漢門)을 지나 봉모당(奉謨堂)을 거쳐 책고(冊庫) 옆 은행나무 숲을 통과했다. 신료는 지나갈 수 없는 후원 비밀통로로 우회해 창경궁 궐역에 들어선 두 대의 가마는 자경전(慈慶殿) 앞에서 멈췄다. 왕의 모친 혜경궁 홍씨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가마 밖으로 나서던 이덕무는 마침내 근자에 벌어진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혜경궁 홍씨는 문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겨울누비옷 세 벌을 궁녀들을 통해 하사했다. 무한한 의미가 담긴 옷이었다. 옷을 받아 든 이덕무는 하례를 올리고 나서 불충을 용서해달라고 세 차례 외쳤다. 답은 없었지만 자경전의 모든 불빛이 꺼진 것으로 답이 돌아왔다. 알았으니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선물을 받아 든 세 사람은 다시 가마 안에 몸을 숨긴 채 규장각으로 은밀하게 이동했다. 가마 안에서 몸을 웅크린 이덕무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은혜를 저버리고 잠시나마 왕을 의심한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 탓이었다.

그는 왕이 폭군 기질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하고 넘겨짚었다. 의심이야말로 그의 삶을 지탱해온 힘이었다. 한데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신과 남편의 명예를 위해 살인마저 감행한 김은애는 남편인 사도세자를 잃고 아들인 금상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모든 모욕을 겪어낸 혜경궁 홍씨의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김은애의 석방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도 오랜 세월 숨죽이며 은인자중해야 했던 혜경궁 홍씨가 이제 세상 밖으로 당당히 나설 것임을 예고하는 왕의 전교이자 선포였던 셈이다.

책을 베껴쓰며 공부하고, 책을 얻다

조선시대 책의 가격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비쌌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자니 책을 안 볼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책을 베껴쓰는 것이다.

필사로 책을 만드는 방법은 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인쇄술이 등장한 후에도 책의 유통방식으로 쓰였다. 특히 조선의 경우 금속활자의 비용대비 편익이 낮았고, 목판의 값도 상당했기 때문에 필사의 형태로 책이 많이 유포되었다.

이렇게 책을 베껴쓰면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박제가(朴齊家)는 어린 시절 아버지 박평이 매달 종이를 주면 수첩 크기로 작게 오려 제본을 하고, 여기에 유교 경전을 비롯한 고전을 베껴넣었다. 11살 때까지 그 책들은 '대학', '맹자'를 포함해 9종으로 불어났는데, 그는 이 책에 직접 비점을 찍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연들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아마 이덕무(李德懋)일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책에 미친 사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덕무는 18세 때 자신의 집을 구서재(九書齋)라고 이름 붙였다. 여기서 구서(九書)는 책에 관련된 9가지 행동인데 다음과 같다.

○독서(讀書) : 책을 소리내어 읽음
○간서(看書) : 책을 눈으로 읽음
○장서(藏書) : 책을 보관
○초서(鈔書) : 책을 보며 중요한 부분을 필사
○교서(校書) : 책을 교열해 가며 읽음
○평서(評書) :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이나 전체에 대한 감상이나 평을 남김
○저서(著書) : 다른 사람의 책을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듦
○차서(借書) : 다른 사람에게서 책을 빌려 읽음
○포서(曝書) : 책을 햍볕에 쬐어 말려서 습기와 책벌레를 제거함

한마디로 책에 관한 모든 행동을 자신의 집에 이름으로 붙인 것이니, 이 정도면 책에 미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가난했다. 자신이 아끼던 '맹자'를 처분하고 유득공과 더불어 서글퍼한 사연이 자주 인용되지만 다음 사연을 보면 실감이 날 것이다.

한번은 이덕무가 빚쟁이에게 고발을 당했다. 당장 구속되게 생겼는데, 이덕무는 서얼이었지만 신분은 사대부여서 역모죄나 살인죄가 아닌 한 구속할 수 없었다. 이럴 경우에는 차지수금(次知囚禁)이라고 해서 사대부 대신 종을 가두는데, 이 제도를 적용해 그의 여종이 감옥에 들어갔다.

이덕무의 사정을 들은 서상수가 그에게 명 초에 만들어진 고급 화로를 빌려주었다. 이덕무는 이 화로를 전당포에 저당으로 1천 전(錢)을 빌리려고 했지만 흥정에 실패했다.

(참고로 100문=10전=1냥. 1,000전을 빌리려고 한 걸 보니 빚이 이 정도였던 모양인데, 이를 환산하면 100냥이 된다. 조선시대에 쌀 한 가마에 5냥이라는 걸 감안하면 고발이 들어올 법한 액수라는 생각이 든다)

이덕무는 시를 지어 웅얼거리는 심정을 달랬다.

徐君假我坎離爐
서군이 나에게 감리로를 빌려 주었으나

富室千錢未肯輸
돈놀이 하는 사람 천 전을 주려 하지 않네

仄想歐邏西國俗
얼핏 생각하건대 서쪽 유럽의 풍속은

百金許典一根鬚
수염 한가닥 잡고서 백금도 준다고 하던데

(청장관전서 9권 아정유고 권1)

생활이 이 모양이니 제대로 인쇄된 책을 사서 보는 것은 아무리 돈을 아끼고 아껴 책에 쓴다 해도 무리였다. 그래서 이덕무가 선택한 방법이 책을 필사해서 소장하는 것이었다.

이덕무가 이서구(李書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전에 용서(傭書)하는 사람을 보고 나는 그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문득 나도 그를 답습하여 눈이 어둡고 손이 부르트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참으로 사람은 자신을 요량하지 못하는 것이오. '유계외전(留溪外傳)' 첫 권을 보내니 저녁에 한 번 읽어 보고 내일 이른 아침에는 돌려 주오. 이는 모두가 효자(孝子), 충신(忠臣), 열처(烈妻), 기부(畸夫)에 관한 것인데 세도(世道)에 보탬이 되는 책이오. 매양 갑신년(1644년, 명이 멸망한 해) 대목을 읽을 때에는 눈물이 어리고 뼈가 아프며 간담이 서늘하오.
(아정유고 권6 이서구李洛瑞에게 주는 편지들)

여기서 용(傭)은 '품팔이하다' 뜻의 한자인데, 용서(傭書)는 '사례를 받고 책을 베껴써서 주는 것'이다. 책이 워낙 귀하다 보니 베껴서라도 간직해 두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필사를 자신이 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많이 들고 힘이 들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어 베껴오게 하는 것이다.

이덕무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아는 사람들 중에 이 일로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 많은 걸로 봐서 이덕무도 이 일을 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필사는 시간과 노동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때 자기 것까지 만들려면 작업량은 2배가 된다. 하지만 이덕무는 이 일을 꾸준히 하며 자신의 장서량을 늘렸다.

다행인 점은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이서구가 그에게 계속 빈 공책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덕무는 여기에 중요한 책을 베껴적어 이서구에게 주기도 했다.

​'일지록(日知錄)'을 3년 동안이나 고심하면서 구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남이 비장(祕藏)해 둔 것을 얻어 읽어봤소. 육예(六藝)의 글, 백왕(百王)의 제도 및 당세의 사무를 근거를 살펴 분명하게 분석하였소. 아아! 고영인(顧寧人; 고염무顧炎武)은 참으로 옛날의 기풍이 있는 큰 선비요.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그대가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이며 내가 아니면 누가 다시 이를 베껴쓰겠소. 4책을 우선 보내니 잘 간수하여 보기 바라오. 전에 보내 준 작은 공책은 아미 다 썼으니 계속 보내 주어 내가 이 책을 베껴 쓸 수 있도록 해주길 바라오.
(아정유고 권6 이서구李洛瑞에게 주는 편지들)

이서구는 생활이 변변치 않았던 이덕무에게 꾸준히 빈 공책을 마련해 주었고, 이덕무는 여기에 베껴쓴 책을 종종 이서구에게 주었다. 이서구는 백탑파로 불리는 인물들 중에서 가문과 가정환경이 제일 유복한 인물이었고, 나중에 정승까지 역임했다.

나중에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 권의 책을 얻으면 반드시 보고 또 베껴 써서 잠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섭렵한 책이 수만 권이 넘고 베껴 쓴 책도 거의 수백 권이 된다. 여행을 할 때도 반드시 수중에 책을 휴대하고, 심지어는 종이, 벼루, 붓, 먹까지 싸가지고 다녔다. 주막이나 배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기이한 말이나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듣는 즉시 기록하였다.
(아정유고 권8 선고부군유사先考府君遺事)

오늘날에는 책을 구하기가 예전보다 쉽게 되었다. 책의 가격이 많이 싸졌고, 복사기술이 좋아져서 비싸고 구하기 힘든 책도 제본을 맡기면 깔끔한 형태로 얻을 수 있다. 대신 예전에 비해 책을 소중히 다루는 모습은 보기 힘들어졌다.

빌린 책에 밑줄, 낙서하는 모습은 하도 많이 봐서 이젠 놀랍지도 않다. 심한 경우 페이지를 뜯거나 잘라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서구더러 "송준길의 중후함을 본받았으면 좋겠소. 하물며 내가 못된 소년처럼 책을 밟고 문지르지 않음에야?"라고 했던 이덕무가 이런 풍경을 보면 뭐라고 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송준길은 빌려준 책에 보풀이 일거나 손때가 묻지 않으면 책 열심히 안 읽었다고 책망하면서 다시 빌려줬다. 이에 어떤 못된 소년이 책을 빌려다가 읽지 않고 돌려주면서, 꾸중을 피하기 위해 책을 밟고 문질러 많이 읽은 것처럼 꾸몄다고 한다)

이덕무, 맹자가 내게 밥을 지어 먹였소

본래 이덕무는 독서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서얼의 처지기에 벼슬을 할 수도 없었고, 오로지 책을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덕무는 '간서치전(看書痴傳)'에서 목멱산 아래 바보가 있다고 하여 자신을 독서에 미친 매니아 곧 '독서광(讀書狂)'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그의 벗 이서구(李書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내 집에서 가장 좋은 물건은 단지 '맹자(孟子)' 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잎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冷齋) 유득공(柳得恭)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소. 이는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러고는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칭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겠소?"

이덕무처럼 유득공도 서얼 신분으로 가난에 굶주리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유득공이 이덕무를 나무라지 않고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이덕무에게 술을 마시도록 한 것은 벗의 속마음을 헤아렸기에 기꺼이 같이 한 것이다.

이들은 선비 사회의 바탕이 되는 경전(經典)마저 팔아, 밥 사 먹고 술 마신 것에서 더 나아가 맹자와 좌구명이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 술까지 먹여 주었다고 칭송까지 하고 있다.

서얼을 차별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이러한 자조 섞인 칭송이야말로 그들이 당시대를 향해 던지는 강한 외침이자, 시대에 맞서서 할 수 있었던 그들의 가장 강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또 가난했던 이덕무는 이러한 엉뚱함에 공감할 줄 아는 벗이 있기에 부조리한 세상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고 행복했을지 모른다.

▶️ 天(하늘 천)은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서 있는 모양(大)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一)의 뜻을 합(合)한 글자로 하늘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天자는 '하늘'이나 '하느님', '천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天자는 大(큰 대)자와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天자를 보면 大자 위로 동그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 위에 하늘이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天자는 사람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 '하늘'을 뜻했었지만 소전에서는 단순히 획을 하나 그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天(천)은 (1)하늘 (2)범 인도(印度)에서 모든 신을 통들어 이르는 말. 천지 만물을 주재 하는 사람, 곧 조물주(造物主)나 상제(上帝) 등 (3)인간세계보다 훨씬 나은 과보(果報)를 받는 좋은 곳. 곧 욕계친(欲界責), 색계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등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늘 ②하느님 ③임금, 제왕(帝王), 천자(天子) ④자연(自然) ⑤천체(天體), 천체(天體)의 운행(運行) ⑥성질(性質), 타고난 천성(天性) ⑦운명(運命) ⑧의지(意志) ⑨아버지, 남편(男便) ⑩형벌(刑罰)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하늘 건(乾), 하늘 민(旻), 하늘 호(昊), 하늘 궁(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흙 토(土), 땅 지(地), 땅 곤(坤), 흙덩이 양(壤)이다. 용례로는 타고난 수명을 천수(天壽), 하늘과 땅 또는 온 세상이나 대단히 많음을 천지(天地), 타고난 수명 또는 하늘의 명령을 천명(天命),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를 천연(天然),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이 곧 황제나 하느님의 아들을 천자(天子),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의 총칭을 천체(天體), 부자나 형제 사이의 마땅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천륜(天倫), 타고난 성품을 천성(天性), 하늘 아래의 온 세상을 천하(天下), 천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천문(天文), 하늘과 땅을 천양(天壤),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재주를 천재(天才), 하늘에 나타난 조짐을 천기(天氣), 하늘이 정한 운수를 천운(天運), 자연 현상으로 일어나는 재난을 천재(天災),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이 썩 좋은 절기임을 일컫는 말을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를 일컫는 말을 천양지차(天壤之差),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성격이나 언동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천의무봉(天衣無縫), 세상에 뛰어난 미인을 일컫는 말을 천하일색(天下一色),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임금이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르는 말을 천붕지통(天崩之痛), 온 세상이 태평함 또는 근심 걱정이 없거나 성질이 느긋하여 세상 근심을 모르고 편안함 또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을 천하태평(天下泰平), 하늘과 땅 사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을 이르는 말을 천지지간(天地之間), 하늘 방향이 어디이고 땅의 축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으로 너무 바빠서 두서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 또는 어리석은 사람이 갈 바를 몰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일컫는 말을 천방지축(天方地軸),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 오래오래 계속됨을 이르는 말을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분노할 만큼 증오스러움 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음의 비유를 이르는 말을 천인공노(天人共怒), 하늘에서 정해 준 연분을 일컫는 말을 천생연분(天生緣分), 하늘이 날아가고 땅이 뒤집힌다는 뜻으로 천지에 큰 이변이 일어남을 이르는 말을 천번지복(天翻地覆), 하늘에서 궂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화평한 나라와 태평한 시대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천무음우(天無淫雨),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길이라는 뜻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떳떳한 이치를 일컫는 말을 천경지위(天經地緯), 천장을 모른다는 뜻으로 물건의 값 따위가 자꾸 오르기만 함을 이르는 말을 천정부지(天井不知),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열린다는 뜻으로 이 세상의 시작을 이르는 말을 천지개벽(天地開闢), 하늘은 그 끝이 없고 바다는 매우 넓다는 뜻으로 도량이 넓고 그 기상이 웅대함을 이르는 말을 천공해활(天空海闊), 하늘에 두 개의 해는 없다는 뜻으로 한 나라에 통치자는 오직 한 사람 뿐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천무이일(天無二日), 멀리 떨어진 낯선 고장에서 혼자 쓸슬히 지낸다는 뜻으로 의지할 곳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천애고독(天涯孤獨), 천진함이 넘친다는 뜻으로 조금도 꾸밈없이 아주 순진하고 참됨을 일컫는 말을 천진난만(天眞爛漫) 등에 쓰인다.

▶️ 涯(물가 애)는 ❶형성문자로 漄는 동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厓(애; 깎아 세운 듯한 벼랑을 뜻함)로 이루어졌다. '물가'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涯자는 '물가'나 '끝', '한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涯자는 水(물 수)자와 厓(언덕 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厓자는 강기슭에 있는 돌덩어리들을 그린 것으로 '언덕'이나 '물가', '끝'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에 水자가 더해진 涯자는 본래의 의미를 더욱 강조한 글자이다. 다만 涯자는 우리말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涯(애)는 ①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②끝, 한계(限界) ③근처(近處) ④어느 곳 ⑤단속하다(團束--), 잡도리하다 ⑥헤아리다, 가늠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墺(물가 오, 물가 욱), 汀(물가 정), 沚(물가 지), 洙(물가 수), 洲(물가 주), 湄(물가 미, 더운 물 난), 滸(물가 호), 濱(물가 빈), 瀕(물가 빈/가까울 빈), 磯(물가 기) 등이다. 용례로는 살아 있는 한평생 동안 또는 생활하는 형편이나 생계를 생애(生涯), 하늘 끝이나 먼 변방 또는 아득히 떨어진 타향이나 이승에 살아 있는 핏줄이나 부모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천애(天涯), 궁벽하고 먼 땅을 애각(涯角), 물가 또는 끝 근처로 바다나 강이나 못 따위의 가장자리를 애제(涯際), 분수로 분을 바를 때에 분을 개어서 쓰는 물을 애분(涯分), 물가를 이르는 말을 수애(水涯), 바다나 강이나 못 따위의 가장자리를 애안(涯岸), 끝닿는 곳으로 광대한 물의 맨 가를 제애(際涯), 자기 자신이 처하여 있는 환경과 생애를 경애(境涯), 넓고 멀어서 끝이 없음을 무애(無涯), 전변하여 상주하지 않는 세계 곧 이승을 유애(有涯), 하늘의 끝이나 밖을 구애(九涯), 하늘 끝과 땅의 귀퉁이의 뜻으로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이르는 말을 천애지각(天涯地角), 멀리 떨어진 낯선 고장에서 혼자 쓸슬히 지낸다는 뜻으로 의지할 곳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천애고독(天涯孤獨), 아득하게 넓고 멀어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망무제애(茫無際涯), 땅의 끝과 하늘의 끝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서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지각천애(地角天涯), 하늘 끝의 이역이라는 뜻으로 매우 먼 남의 나라를 이르는 말을 천애이역(天涯異域), 아득하게 넓고 멀어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망무애반(茫無涯畔), 친지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마치 이웃에 있는 것처럼 생각함을 이르는 말을 천애여비린(天涯如比鄰) 등에 쓰인다.

▶️ 知(알 지)는 ❶회의문자로 口(구; 말)와 矢(시; 화살)의 합자(合字)이다.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말한다. 많이 알고 있으면 화살(矢)처럼 말(口)이 빨리 나간다는 뜻을 합(合)하여 알다를 뜻한다. 또 화살이 꿰뚫듯이 마음속에 확실히 결정한 일이나, 말은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알다, 알리다, 지식 등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知자는 '알다'나 '나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知자는 矢(화살 시)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知자는 소전에서야 등장한 글자로 금문에서는 智(지혜 지)자가 '알다'나 '지혜'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슬기로운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智자는 '지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知자는 '알다'라는 뜻으로 분리되었다. 智자는 아는 것이 많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말을 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知자도 그러한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 知(지)는 (1)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정신의 작용하는 힘. 깨닫는 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알다 ②알리다, 알게 하다 ③나타내다, 드러내다 ④맡다, 주재하다 ⑤주관하다 ⑥대접하다 ⑦사귀다 ⑧병이 낫다 ⑨사귐 ⑩친한 친구 ⑪나를 알아주는 사람 ⑫짝, 배우자(配偶者) ⑬대접(待接), 대우(待遇) ⑭슬기, 지혜(智慧) ⑮지식(知識), 앎 ⑯지사(知事) ⑰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인(認), 살펴 알 량/양(諒), 알 식(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나 사물을 지식(知識),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知慧), 지적 활동의 능력을 지능(知能), 지혜로운 성품을 지성(知性), 지식이 있는 것 또는 지식에 관한 것을 지적(知的), 알아서 깨달음 또는 그 능력을 지각(知覺), 지식과 도덕을 지덕(知德), 아는 사람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봄을 지인(知人),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은혜를 앎을 지은(知恩), 지식이 많고 사물의 이치에 밝은 사람을 지자(知者), 제 분수를 알아 마음에 불만함이 없음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한 줄을 앎을 지족(知足), 자기 분에 지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앎을 지지(知止),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를 지음(知音), 여러 사람이 어떤 사실을 널리 아는 것을 주지(周知), 어떤 일을 느끼어 아는 것을 감지(感知),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붕지(朋知), 기별하여 알림을 통지(通知), 인정하여 앎을 인지(認知), 아는 것이 없음을 무지(無知), 고하여 알림을 고지(告知), 더듬어 살펴 알아냄을 탐지(探知), 세상 사람들이 다 알거나 알게 함을 공지(公知),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을 친지(親知), 나이 50세를 말함으로 50세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나이를 달리 이르는 말을 지천명(知天命), 천명을 알 나이라는 뜻으로 나이 오십을 이르는 말을 지명지년(知命之年),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 또는 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을 일컫는 말을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적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지피지기(知彼知己), 참 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는 말을 지행합일(知行合一),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한다는 말을 지과필개(知過必改),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을 일컫는 말을 지명인사(知名人士), 지식과 행동이 한결같이 서로 맞음 또는 지식과 행동이 일치함을 일컫는 말을 지행일치(知行一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뜻으로 믿는 사람에게서 배신당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지부작족(知斧斫足), 알면서 모르는 체함을 일컫는 말을 지이부지(知而不知),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물러서야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난이퇴(知難而退), 모든 일에 분수를 알고 만족하게 생각하면 모욕을 받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지족불욕(知足不辱),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함을 이르는 말을 지은보은(知恩報恩), 지자는 도리를 깊이 알고 있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미혹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지자불혹(知者不惑), 사리에 밝은 사람은 지식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함부로 지껄이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지자불언(知者不言), 밝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고 대우大愚의 덕을 지키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백수흑(知白守黑), 대우를 잘 받아서 후의에 감격하는 느낌을 이르는 말을 지우지감(知遇之感), 족한 줄을 알아 자기의 분수에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지족안분(知足安分),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지족지부(知足知富) 또는 지족자부(知足者富), 간악한 꾀가 많아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꾸며 대어 상대방을 곧이 듣게 함을 이르는 말을 지족식비(知足飾非) 등에 쓰인다.

▶️ 己(몸 기)는 ❶상형문자이나 지사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래 구불거리는 긴 끈의 모양을 본떴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모양에서 일으키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일으키다의 뜻은 나중에 起(기)로 쓰고, 己(기)는 천간(天干)의 여섯번째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己자는 '몸'이나 '자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나 자신'을 뜻한다. 己자의 유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사람이 몸을 구부린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굽의 있는 새끼줄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己자와 결합한 글자를 보면 새끼줄이 구부러져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다만 己자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己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상용한자에서는 뜻과 관련된 글자가 없다. 다만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새끼줄이나 구부러진 모양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니 상황에 따른 적절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己(기)는 ①몸 ②자기(自己), 자아(自我) ③여섯째 천간(天干) ④사욕(私慾) ⑤어조사(語助辭) ⑥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여섯 번째를 기사(己巳), 열여섯째를 기묘(己卯), 스물여섯째를 기축(己丑), 서른여섯째를 기해(己亥), 마흔여섯째 기유(己酉), 쉰여섯째를 기미(己未)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물건을 기물(己物), 자기 마음을 기심(己心), 자기가 낳은 자녀를 기출(己出), 자신의 의견이나 소견을 기견(己見), 자신의 초상을 기상(己喪), 자기의 소유를 기유(己有), 자기의 물건은 기물(己物), 제 몸이나 제 자신 또는 막연하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자기(自己), 자기 이익만 꾀함을 이기(利己), 자신의 몸을 닦음을 수기(修己), 안색을 바로잡아 엄정히 함 또는 자기자신을 다스림을 율기(律己), 자기 몸을 깨끗이 함을 결기(潔己), 몸을 가지거나 행동하는 일을 행기(行己), 신분이나 지위가 자기와 같음을 유기(類己), 자기를 사랑함을 애기(愛己), 자기 한 몸을 일기(一己), 자기에게 필요함 또는 그 일을 절기(切己), 자기가 굶주리고 자기가 물에 빠진 듯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일컫는 말을 기기기익(己飢己溺), 중종때 남곤 일파 조광조 등을 쫓아내어 죽인 사건을 일컫는 말을 기묘사화(己卯士禍), 기미년 3월1일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국의 독립운동을 일컫는 말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봄을 일컫는 말을 자기관찰(自己觀察),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본위(自己本位), 자기의 이해와 쾌락과 주장을 중심으로 삼고 남의 처지를 돌보지 않는 주의를 일컫는 말을 애기주의(愛己主義), 자기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심리적 경향을 일컫는 말을 자기과시(自己誇示), 스스로에게 황홀하게 빠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도취(自己陶醉), 자신의 생활은 검약하게 하고 남을 대접함에는 풍족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약기유물(約己裕物) 등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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