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유투강(抱腰投江)
허리를 껴안고 강물에 뛰어 들었다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 된 뒤 원수를 갚고자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논개의 고사에서 유래하며, 자신을 희생하여 대의를 천명한 행동을 의미한다.
抱 : 안을 포(扌/5)
腰 : 허리 요(肉/9)
投 : 던질 투(扌/4)
江 : 강 강(氵/3)
왜장의 허리를 안고(抱腰) 푸르른 남강에 뛰어든(投江) 논개의 의(義)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의인(義人)이다. 그런데도 의(義)와는 관계없는 곳에, 너무 세속적인 곳에 사용하여 이름을 더럽힌 감이 있다.
논개라 하면 1922년 발표된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시인의 시(詩)가 바로 떠오른다. 충혼(忠魂)을 추모한 셋째 연은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로 끝난다.
숭고한 의분(義憤)을 적절한 비유어로 정감에 호소하여 더욱 애송되고 있다. 진주의 관기였던 논개가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 책은 광해군 때의 문신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이다. 그 후로도 민간서는 해마다 남강 변에서 논개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왔지만 공을 인정받지 못하다 18세기 들어서야 빛을 본다.
경상좌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임금에 상소한 내용이다.
선조(宣祖) 26년(1593년), 김천일(金千鎰)장군이 거느리는 창의군(倡義軍)이 진주성에서 왜적과 항전하다 결국 패하여 성이 함락되고 백성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러자 논개(論介)는 곱게 단장하고 화려한 의복을 입은 채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섰다. 그 아래는 만길 낭떠러지였다. 왜군들이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데 한 왜장이 다가오자 논개는 웃으며 맞이하여 곧바로 껴안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皆莫敢近, 而獨一倭, 挺然直前, 論介, 笑而迎之, 遂抱其倭, 直投于潭.
장부도 못할 일을 한 의기를 포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2년 조에 나온다. 그 후로 의암(義巖)사적비가 건립되고 1793년에는 부근에 의기사(義妓祠)가 세워졌다.
이를 주역팔괘로 작괘를 해보면 진위뢰(震爲雷)괘로 엄청나게 강한 팔자였다. 이렇게 회귀한 사주팔자를 지니고 태어난 논개가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라 어언 열세 살의 나이가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가 버리자 두 모녀는 당장 끼니 이을 걱정에 할 수 없이 작은아버지(숙부)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워낙 논개의 미색이 뛰어나고, 언행이 단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재물에 남다르게 욕심이 많은 작은아버지는 논개를 이웃마을 부잣집 며느리로 내줘버렸다. 논개의 신랑은 사람노릇을 도저히 할 수 없는 백치(白癡)병신이었다.
기가 막힌 논개는 이왕에 시집을 온 이상 마음을 굳게 먹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날마다 발작을 하는 신랑 병세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고통에 견디다 못한 논개는 울며불며 맨발로 외가에 피신해가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신랑집의 고발로 포졸들에게 잡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충절녀(忠節女) 논개(論介)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밤 여덟(時)시경 주진사(朱進士) 내외는 저녁밥을 먹고 내일에의 살림꾸리기와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 등을 다정하게 의논하고 있었다.
남편 주진사는 배가 남산만큼 부풀어 만삭이 된 부인을 바라보며, “여보, 해산달이 언제요?”하고 정중하게 묻자 부인은 수줍어하는 모습을 지으면서, “서방님, 별걸 다 물으세요. 그런 일은 우리 같은 아낙네가 관여할 일이지 서방님 같은 선비께서는 모른 체 하시는 거예요.” 하며 부인의 이 말이 막 끝나자마자. “아이구! 배야,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하며 진통이 시작되는 듯 부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부인은 묵지근한 아랫배를 자신의 손으로 쓰다듬으며 혹시나 해서 소피를 보았지만 그래도 양쪽 방광이 쏟아지는 듯 무겁고 진통은 더욱 심해갔다. 이상하다 싶어 배를 자세히 쳐다보았더니 뱃속에서 태아가 노는 냥 뱃가죽이 움직였다.
그때야 부인은 해산을 하게 될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곁에 있던 주진사는 부인이 해산할 기미를 보이자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방안에 혼자 남은 부인의 신음소리를 내며 문고리를 잡고 안간 힘을 주는 모습이 불빛 그림자로 비추어 나타났다.
부인이 그렇게 몸부림을 치자 밖에 있던 주진사는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리고 있는데 갑자기, “응애∼응애∼”하는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유난스럽게도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주진사는 아기 울음소리가 힘찬 것으로 보아‘ 사내아이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으나 실은 바로 저 유명한 논개(論介)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논개가 태어난 해는 갑술년(甲戌年)으로, 음력 9월이라서 달의 상징인 干支도 갑술(甲戌)이고 그 날이 마침 9월 9일이었으므로 낳은 날짜의 干支도 갑술이며, 낳은 시간이 밤 여덟시 종반이라 역시 甲戌이 되는, 그러니까 논개의 사주팔자가 甲戌年 甲戌月 甲戌日 甲戌時 등으로 갑자(甲字) 넷과 술자(戌字) 넷으로만 구성된 것이다.
이를 주역팔괘로 작괘를 해보면 진위뢰(震爲雷)괘로 엄청나게 강한 팔자였다. 이렇게 회귀한 사주팔자를 지니고 태어난 논개가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라 어언 열세 살의 나이가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가 버리자 두 모녀는 당장 끼니 이을 걱정에 할 수 없이 작은아버지(숙부)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워낙 논개의 미색이 뛰어나고, 언행이 단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재물에 남다르게 욕심이 많은 작은아버지는 논개를 이웃마을 부잣집 며느리로 내줘버렸다. 논개의 신랑은 사람노릇을 도저히 할 수 없는 백치(白癡)병신이었다.
기가 막힌 논개는 이왕에 시집을 온 이상 마음을 굳게 먹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날마다 발작을 하는 신랑 병세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고통에 견디다 못한 논개는 울며불며 맨발로 외가에 피신해가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신랑집의 고발로 포졸들에게 잡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수 현감에 의해서 문초를 받기 시작한 논개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뒤늦게야 논개 작은아버지의 간계(奸計)에 빠져들었음을 알게 된 현감 최경회(崔慶會)는 정상을 참작하여 논개에게는 무죄를 내리고, 대신 딸을 고생시킨 명목으로 논개 어머니에게 2년의 관청에서 종살이를 하라는 일종의 관비형(官婢形)을 내렸다.
갈 곳이 없게 된 논개는 현감 최경회의 보살핌으로 그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친 부녀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던 두 사람에게 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논개 나이 열아홉 살이 될 무렵 공교롭게도 최경회의 부인이 몸져눕고 얼마지 않아 그만 병사하고 말았다.
주위 정세가 이렇게 되자 논개는 최경회의 후실이 돼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여자로써 행복하게 살아가던 논개에게 엄청난 충격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임진왜란의 국난이 있자 최경회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로 임전케 됐는데 그만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한 전사(戰死)를 하고 말았다.
남편의 전사비보(戰死悲報)를 받은 논개는 그 자리에서 비장한 각오를 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한 왜놈들 두고 봐라! 이 소첩이 서방님의 원수를 갚고 말 것이다.’ 라고 분노를 하며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때마침 칠월칠석(七月七夕)을 맞은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대연회를 베풀고 흥청망청 놀고 있었다. 논개는 많은 조선 기생들이 왜장들 사이에서 춤과 노래로 그들을 즐겁게 하는 틈을 타 기생으로 변복을 하고 노래와 가야금 반주로 왜장들의 가슴을 들뜨게 하기 시작했다.
절세미인에다 노래와 가야금 솜씨가 뛰어난 논개는 왜장들끼리도 서로 질투하는 대상이 되었다. 논개는 이미 죽기로 결심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논개의 자태에 몸이 달은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논개에서 춤을 요청했다. 논개는 마음속으로, ‘이놈, 너는 오늘이 제삿날이다. 타향 이국 만리에 와서 죽는 게 불쌍하기도 하나 서방님의 원수를 갚고 나라에 충성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응했다.
논개는 금방이라도 왜장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왜장을 촉석루 난간으로 점점 유인했다.
수백 척이나 되는 촉석루 절벽 아래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파도가 출렁이는데, 논개에게 완전히 넋이 빠진 왜장은 한 치라도 더 논개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기려 추태를 부렸다.
논개는 “서방님, 왜 그러시나이까? 제가 이렇게 껴안아 드리면 되질 않습니까?” 하면서 있는 힘을 다 하여 왜장을 껴안고는 재빠르게 왜장을 난간 쪽으로 위치를 바꾸어 복수의 괴력을 다해 밀어붙였다.
처음에는 왜장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그것은 최후의 발악으로 발버둥치는 몸짓일 뿐이었다. 그리고 미리 논개는 계획적으로 열 손가락 마디마다 반지를 끼고 이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술에 취한 왜장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논개는 왜장을 껴안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들어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내렸던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碑文)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촉석의기논개생장향견명패)”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이 날은 장수군에서 논개 아가씨를 선발하고 기념탑을 참배하는 등 논개의 정신을 되새기는 각종 민속행사를 가진다.
[註] 기록에 따라 논개가 의기였다는 설과 또는 남편의 복수를 위하여 기생으로 변복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것이 진설인지는 차제하고 여기서는 다만 논개의 행적만을 다루기로 한다.
논개(論介)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로운 여인
오랑캐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며 /
숱한 세월 흘러, /
붉은 누각 우뚝이 /
산과 언덕을 베고 있네. /
그 옛날 꽃다운 물위론 /
가인의 춤 추는 모습 비추었고, /
단청 매긴 기둥엔 / 길이 장사가 남아 있네. /
전장터로 봄바람 불어 /
초목을 휘어감고 /
황성에 밤비 내려 /
안개 낀 물살에 부딪히네. /
지금도 영롱한 영혼이 /
남아 있는 듯 /
삼경에 촛불 밝히고 /
강신제를 올리네.
- 정약용, [촉석루에서 회고] -
논개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위는 1779년(정조 3년) 진주 남강 변에 논개(論介, ? ~ 1593)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의기사(義妓祠)를 보수하면서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정약용이 쓴 추모 시이다.
흔히 논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끌어안고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하여 전공을 세운 의로운 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 직후 바로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출신과 삶, 그녀가 죽인 왜장의 이름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논개의 순국 사실은 임난 직후에는 민간에서만 전해지다가 1620년경에 가서야 마침내 문헌으로 기록되었다. 그녀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문헌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이다. 유몽인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미처 그 의로운 죽음이 기록되지 못하고 신분상의 문제로 나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 논개에게 측은함을 느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자신의 문집에 실었다.
논개(論介)는 진주 관기(官妓)였다. 계사년(癸巳年)에 김천일(金千溢)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은 모두 죽고 말았다.
임진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러나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火)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충(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유몽인은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논개의 공이 안타까워 이런 글을 썼지만 이로 인해 논개는 오랫동안 그녀의 삶 자체가 묻힌 채 진주의 관기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전반까지 논개는 나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진주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제사가 해마다 남강 변에서 일반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왜장을 안고 떨어졌던 남강의 바위에 의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이를 보면 당시 진주성 백성들은 진주성 함락 후, 완전히 절망상태에 빠졌던 상황에서 여인의 몸으로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그녀의 복수에 통쾌함을 느끼고 승리의 희망 속에서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결국 왜적을 내몰 수 있는 기운을 준 논개에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논개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18세기 초 경종대에 가서야 가까스로 이루어졌다. 진주성민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비변사에 건의하여 논개를 기리고 그 자손들에게 포상을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1세기가 넘은 상황에서 논개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띄워 수소문했지만,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 나라에서는 의암사적비를 세워 그녀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녀를 의로운 기생이라 하여 의기(義妓)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739년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논개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나라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졌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약용이 논개를 기리는 시를 쓴 것은 정조 초의 일이었다. 근 2세기 간 기생으로 알려졌던 논개는 그간 그 자취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19세기 들어서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논개가 2차 진주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최경희(崔慶會, 1532~1593)의 첩이었다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최경회의 삶을 기리는 '일휴당실기'에 논개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부실이란 정실 부인이 아닌 첩을 뜻한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최경회의 첩이었던 여인을 조사하게 되었고 이는 '호남절의록', '호남상강', '동감강목' 등에서 고증과 민간에 떠도는 구전까지 포함하여 기록하면서 대략 논개라는 인물의 가계와 일생이 재구성되게 되었다.
논개의 생애
최경회의 첩을 논개라고 상정하고 보면 그녀의 삶과 가계는 대개 이러하였다. 논개의 성은 주씨이며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주달문,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나름 양반가의 딸이었던 것이다.
논개가 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한다.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부자이던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났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돈을 낸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들의 재판을 맡은 것이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였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죄방면했으며 모녀가 살 길이 막연하자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며 살게 하였다.
최경회는 해주최씨로 전라도 능주 사람이었다. 양응정,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67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장성한 논개는 최경회의 첩으로 들어갔고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뒷바라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쌓아 경상도우병사가 된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전황에서 진주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성이었다. 진주는 왜병들이 많이 주둔해있던 경상도의 주요성일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넘어가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주성은 일본입장에서는 꼭 차지하고 싶은 성이었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내어주면 안 되는 성이었다. 1592년 10월 왜군의 1차 진주성 공격은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을 중심으로 관군과 민간인, 의병들까지 합세해 이를 물리쳤다. 이를 진주대첩이라고 부른다.
조선에 들어와 매 전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왜군으로서는 진주에서의 패배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기 위해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593년 7월 조선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일본군을 동원한 10만 병력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이때 조선의 중앙정부는 명나라 군이 진주성을 지키는 원병을 보내주지 않기로 하자, 진주를 포기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1차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의병들과 민간인들은 다시 한번 똘똘 뭉쳐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전투는 7일간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진주성은 7월 29일 왜군의 거대한 병력이 휩쓸고 들어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던 날 논개의 남자였던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보복이라도 하듯이 성안의 민간인과 살아 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그리고 왜장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남강 변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들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중 게야무라 로코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내어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를 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였다.
논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후, 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거기에다가 왜군도 7일간의 전투 동안 진주성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에 큰 손실을보아 진주에 계속 점령할 힘이 모자랐다. 그들은 어렵게 진주성을 차지했지만 병력손실이 커,주변 지역 약탈에 그쳤을 뿐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지도 못했고, 조선군이 거점을 부산 방향으로 옮겨가자 이를 막아내느라 서둘러 진주에서 떠났다.
논개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은 왜장의 존재
그렇다면 논개가 물에 함께 빠져 죽은 왜장은 누구일까?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 장수가 게야무라 로쿠스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농민 출신으로 카토 키요마사에게 발탁되어 사무라이가 된 자로서 사무라이가 된 후 이름을 기다 마고베(木田孫兵衛)로 바꾸었다.
그는 카토 키요마사의 중요한 부장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 때 철포 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를 소재로 한 가부키가 있을 정도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인데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함경도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62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대한 기록이 가토 키유마사의 함경도 진출 후에도 계속 나오다가 2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기록 후, 그의 이름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점, 일본에 있는 그의 무덤이 가부키의 소재가 된 이후 조성되었다는 점, 그의 죽음에 대한 한 이야기로 조선에서 한 여성의 복수로 죽었다는 것이 있어 논개가 함께 죽은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 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들어와 일본의 어느 건축가가 자신의 땅에서 발견한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관한 비석에 근거하여 논개의 영정을 모셔가 함께 전시하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 하나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 번듯한 가문의 아녀자가 아니고 기생이라고 전해지면서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고 외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의 일반 백성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자발적으로 기리고 있었다.
논개가 기생이었든 아니었든, 그녀가 죽인 왜장이 왜군의 병력에 손실을 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정자의 역사기록이 그녀를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 살아남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논개의 죽음이 전쟁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일반 백성들에게 전쟁의 극복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약하고 미천한 위치에 있던 한 여인의 결연한 행동으로, 임진왜란 시기 백성들은 위안과 위로 속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 抱(안을 포/던질 포)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包(포; 싸다)로 이루어졌다. 손으로 싸안는다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抱자는 '안다'나 '품다', '가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抱자는 手(손 수)자와 包(쌀 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包자는 태아가 태보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싸다'나 '감싸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抱자는 이렇게 '감싸다'라는 뜻을 가진 包자에 手자를 결합한 것으로 '손으로 감싸 안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즉, 가슴에 품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抱(포)는 ①안다, 품다 ②둘러싸다, 위요(圍繞)하다(어떤 지역이나 현상을 둘러싸다) ③가지다, 손에 넣다 ④지키다 ⑤받들다 ⑥던지다, 버리다 ⑦되돌리다, 되돌아오다 ⑧아름 ⑨품, 가슴 ⑩마음, 생각,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품을 회(懷), 낄 옹(擁)이다. 용례로는 마음속에 지닌 앞날에 대한 생각이나 계획이나 희망을 포부(抱負), 품에 껴안음을 포옹(抱擁), 암새가 알을 품어 따스하게 하는 일을 포란(抱卵), 마음속에 지덕智德을 품음을 포옥(抱玉), 아주 우스워서 배를 안음을 포복(抱腹),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회포(懷抱), 객지에서 품게 되는 울적한 느낌을 여포(旅抱), 마음속에 품은 시름을 숙포(宿抱), 배를 안고 넘어진다는 뜻으로 몹시 우스워서 배를 안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웃는다는 말을 포복절도(抱腹絶倒), 땔나무를 안고 불을 끄러 간다는 뜻으로 재해를 방지하려다가 자기도 말려들어가 자멸하거나 도리어 크게 손해를 입음을 이르는 말을 포신구화(抱薪救火), 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죄가 된다는 뜻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귀한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훗날 재앙을 부를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포벽유죄(抱璧有罪), 부모가 자식을 잃고 슬퍼함을 이르는 말을 포통서하(抱痛西河), 숯불을 안고 서늘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행동과 목적이 상치됨을 이르는 말을 포탄희량(抱炭希凉), 무서워서 몰골 사납게 얼른 숨는다는 말을 포두서찬(抱頭鼠竄), 옷을 벗고 불을 안는다는 뜻으로 재난을 자초함을 이르는 말을 해의포화(解衣抱火), 한결 같은 마음으로 원한을 품는다는 말을 일념포한(一念抱恨) 등에 쓰인다.
▶️ 腰(허리 요)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허리를 뜻하는 要(요)가 주로 구하다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으므로 月(월)을 보태어 腰(요)를 만들고, 허리의 전용자(專用字)로 했다. ❷회의문자로 腰자는 '허리'나 '중요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腰자는 ⺼(육달 월)자와 要(구할 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要자는 여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소전까지만 하더라도 要자가 '허리'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要자가 '구하다'나 '원하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해서에서는 여기에 ⺼자를 더한 腰자가 '허리'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腰(요)는 ①허리 ②신장, 콩팥 ③중요한 곳 ④기슭 ⑤밑동(긴 물건의 맨 아랫동아리) ⑥(허리에)차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허리가 아픈 병을 요통(腰痛), 허리띠로 바지 따위가 흘러내리지 아니하게 옷의 허리 부분에 둘러매는 띠를 요대(腰帶), 오줌을 검사함을 요검(腰劍), 물체의 허리 부분을 묶거나 동이거나 하는 데 쓰는 새끼나 끈을 요삭(腰索), 나무를 접 붙일 때 대목의 허리 부분에 다른 나무의 가지나 눈을 붙이는 일을 요접(腰接), 허리에 띠는 가죽띠를 요정(腰鞓),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는 뒤웅박을 요주(腰舟), 상복의 허리에 띠는 띠를 요질(腰絰), 허리의 둘레를 요간(腰間), 요긴한 길 또는 중요한 길을 요도(腰刀), 허리 부분을 요부(腰部), 허리 부분의 살을 요육(腰肉), 허리 근처를 요하(腰下), 허리의 둘레를 요위(腰圍), 허리가 부러진다는 뜻으로 몹시 우스워서 허리가 부러질 듯함을 요절(腰絶), 어린아이의 허리가 뻣뻣하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을 요경(腰硬), 중죄인의 허리를 베어 죽이던 형벌 또는 그리 하는 일을 요참(腰斬), 허리를 폄을 신요(伸腰), !가느다란 허리를 세요(細腰), 버들가지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미인의 허리를 유요(柳腰), 활등처럼 굽은 허리를 궁요(弓腰), 벌의 허리 모양으로 잘록하게 생긴 허리를 봉요(蜂腰), 산허리로 산 둘레의 중턱을 산요(山腰), 바지나 치마의 맨 위에 둘러 댄 허리에 닿는 부분을 대요(帶腰), 말이 배가 아파서 허리를 구부림을 준요(蹲腰), 허리를 꺾음 또는 허리를 굽혀서 남에게 절을 함을 절요(折腰), 가냘프고 연약한 여자의 허리로 곧 미인을 형용하는 말을 섬요(纖腰), 버들 같은 눈썹에 개미 같은 허리를 이르는 말을 유미봉요(柳尾蜂腰) 등에 쓰인다.
▶️ 投(던질 투, 머무를 두)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殳(수, 투; 치다)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投자는 '던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投자는 手(손 수)자와 殳(몽둥이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投자의 갑골문을 보면 手자가 아닌 豆(콩 두)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제기 그릇을 두드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投자의 본래 의미도 '두드리다'였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豆자가 手자로 바뀌게 되면서 '던지다'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投(투, 두)는 손으로 던지다의 뜻으로 ①던지다 ②뛰어들다 ③가담하다, 편이 되다 ④합치다, 서로 잘 맞다 ⑤의탁하다, 의지하다 ⑥주다 ⑦보내다 ⑧받아들이다 ⑨임하다,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닿다 ⑩떨치다 ⑪버리다 ⑫투호(投壺), 그리고 ⓐ머무르다, 멈추다(두) ⓑ구두(句讀)(두)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던질 포(抛), 던질 척(擲),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칠 타(打)이다. 용례로는 사업에 자금을 투입함을 투자(投資), 기회를 엿보아 큰 이익을 보려는 것을 투기(投機), 정한 인원 외의 사람을 더 넣음을 투입(投入), 적에게 항복함을 투항(投降), 내던져 버림을 투기(投棄), 지면이나 수면 등에 물체의 그림자가 비침 또는 그 그림자를 투영(投影), 공을 던짐 또는 그 공을 투구(投球), 남에게 줌으로 특히 약 등을 줌을 투여(投與), 병에 알맞은 약제를 투여함을 투약(投藥), 돌을 던짐 또는 그 돌을 투석(投石), 던지어 아래로 떨어뜨림을 투하(投下), 비교적 무거운 물체를 힘껏 던지는 것을 투척(投擲), 배에서 닻을 내림을 투묘(投錨), 강물에 던짐을 투강(投江), 어떤 일에 몸을 던져 관계함 또는 높은 곳에서 밑으로 몸을 던짐을 투신(投身), 옥에 가둠을 투옥(投獄), 원고를 신문사나 잡지사 등에 보냄 또는 그 원고를 투고(投稿), 야구에서 앞 투수의 뒤를 이어 던짐을 계투(繼投), 야구에서 자기편이 못 받을 정도로 함부로 공을 던지는 일을 악투(惡投),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잘 던짐을 호투(好投), 야구 따위에서 잘못 던짐을 실투(失投), 농구에서 자유투 이외의 모든 슛을 야투(野投), 힘껏 던짐을 역투(力投), 투항하여 옴을 내투(來投), 베틀의 북을 내던지는 의심이라는 뜻으로 여러 번 말을 들으면 곧이듣게 된다는 말을 투저의(投杼疑), 붓을 던지고 창을 쫓는다는 뜻으로 학문을 포기하고 전쟁터로 나아감을 비유하는 말을 투필종융(投筆從戎), 채찍을 던져 강의 흐름을 가로막는다는 뜻으로 물을 건너는 군사가 극히 많음을 이르는 말을 투편단류(投鞭斷流), 쥐를 잡으려다가 그 옆에 있는 그릇을 깨뜨릴까 염려한다는 뜻으로 임금 가까이 있는 간신을 없애려다가 임금께 해를 끼칠까 두려워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투서공기(投鼠恐器), 글씨에 능한 사람은 정신을 들이지 아니하고 붓을 던져도 글씨가 잘 된다는 말을 투필성자(投筆成字), 모과를 선물하고 구슬을 얻는다는 뜻으로 사소한 선물에 대해 훌륭한 답례를 받음을 두고 이르는 말을 투과득경(投瓜得瓊), 봉숭아에 대한 보답으로 오얏(자두)을 보낸다는 뜻으로 내가 은덕을 베풀면 남도 이를 본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투도보리(投挑報李) 등에 쓰인다.
▶️ 江(강 강)은 ❶형성문자로 冮(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工(공, 강; 크다)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江자는 '강'이나 '양쯔강'을 뜻하는 글자로, 水(물 수)자와 工(장인 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工자는 땅을 단단하게 다지던 도구인 '달구'를 그린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범람하는 강을 다스리기 위해 둑을 쌓는 치수(治水) 사업을 했었다. 그러니 江자에 쓰인 工자는 흙을 높이 쌓아 물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江자는 본래 양쯔강으로도 불리는 중국의 장강(長江)을 지칭하던 글자였다. 예를 들면 중국 상서(尙書)에서는 민산도강(岷山導江)이라 하여 민산(岷山)에서부터 양쯔강(江)까지 물길을 잘 다스렸던 우 임금의 업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江자는 '양쯔강'을 이르던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江자는 큰 하류를 통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江(강)은 ①강, 큰 내 ②양자강(揚子江) ③나라의 이름 ④별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내 천(川), 물 하(河), 바다 해(海), 시내 계(溪), 물 수(水),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메 산(山), 큰산 악(岳)이다. 용례로는 강과 산을 강산(江山), 강의 남쪽을 강남(江南), 강의 북쪽을 강북(江北),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강풍(江風), 강물이 흐르는 가에 닿는 땅을 강변(江邊), 강물의 흐름을 강류(江流), 강에서 나는 모래를 강사(江沙), 강 기슭을 강안(江岸), 물 줄기가 길고 큰 강을 장강(長江), 강물에 던짐을 투강(投江),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음을 격강(隔江), 강물을 건넘을 도강(渡江), 가까운 곳에 있는 강을 근강(近江), 큰 물이 넘치는 것을 막거나 물을 저장하려고 돌이나 흙 따위로 막아 쌓은 언덕을 방강(防江), 맑게 흐르는 강을 청강(淸江), 세상을 피하여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강호지인(江湖之人), 자연을 벗삼아 누리는 즐거움을 이르는 말을 강호지락(江湖之樂),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사는 사람을이르는 말을 강호산인(江湖散人), 학문이 두각을 나타낸 후 퇴보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강랑재진(江郞才盡), 강이나 호수 위에 안개처럼 보얗게 이는 잔물결 또는 산수의 좋은 경치를 일컫는 말을 강호연파(江湖煙波), 강산은 늙지 않고 영구 불변이라는 뜻으로 불로장생을 비는 말을 강산불로(江山不老), 강과 산 그리고 바람과 달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경치를 일컫는 말을 강산풍월(江山風月), 강산의 도움이란 뜻으로 산수의 풍경이 사람의 시정을 도와 좋은 작품을 만들게 함을 이르는 말을 강산지조(江山之助), 조선시대에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하여 지내면서 일어난 시가 생활의 경향을 일컫는 말을 강호가도(江湖歌道)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