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근종태(始勤終怠)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피운다는 말이다.
始 : 처음 시(女/5)
勤 : 부지런할 근(力/11)
終 : 마칠 종(糹/5)
怠 : 게으를 태(心/5)
처음에는 부지런하나 마칠때는 게을러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끝까지 신중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라는 말이다.
시근종태(始勤終怠)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원컨데(原) 종신(終愼) 할 것을 여시(如始) 하소서. 이 말은 한명회(韓明澮)가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귀이다. 즉, '처음에는 근면하고 나중에는 태만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바라옵건데 삼가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소서'라는 뜻이다.
원문에서 종신여시(終愼如始)란 끝까지 처음의 마음을 유지한다는 뜻으로 매사는 처음에는 잘하려고 다짐하나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그 마음이 흔들리고 퇴색되어 시류에 휩쓸리고 만다.
이 말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한 말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그를 임금으로 앉힌 뒤 영화를 누리다가 세조(世祖)의 손자인 성종(成宗)이 등극하고 한참 뒤 한명회가 병을 얻어 마침내 죽기 직전에 이르자 이를 안타까워 하던 성종(成宗)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과거 한명회로 부터 입은 은덕을 기리고자 성종 임금에게 당부하여 한명회로 부터 마지막 소원이라도 들어주라고 하였음에 성종 임금이 도승지를 보내어 소원을 물었으나 한명회는 끝내 개인과 가문의 영달을 위한 사사로운 소원을 이야기 하지 않고 서산대사가 한 말을 성종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는 도승지에게 이와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누구나 처음에는 잘 할려고 하나 나중에는 게울러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므로 성종 임금께서도 처음 등극했을 때의 그 마음으로 끝까지 조신하기를 처음과 같이하소서(始勤終怠, 人之常情, 原, 終愼如始)'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명회는 문종(文宗), 단종(端宗),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代의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부(富)와 귀(貴)를 누린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보기드문 권세를 누린 사람이다.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고 하는 영의정을 두번씩이나 했던 인물이나 그가 좌의정으로 재직하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까지 그의 아들 보(堡)는 미관말직에 머물러 있음에 성종이나 인수대비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의 아들에 대한 부탁이라도 들어줄까 하고 마지막 소원을 물었던 것인데 끝내 자식에 대한 부탁은 하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남다른 인물로 인수대비가 성종의 첫번째 왕비 윤씨(尹氏)를 축출할 때부터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였다고 판단 이를 극구 만류했으나 결국은 인수대비의 미움을 받았던 윤비가 폐비가 되고 나중에는 사약을 받고 죽을 때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화(禍)가 미칠것이란 점을 예측이라도 했던것 처럼 자기가 죽은뒤 빈관을 여러개 땅에 묻도록 하라는 유언을 하고 죽었다고 한다.
나중에 연산군(燕山君)이 생모(生母) 폐출(廢黜)과 사사(私事)에 연루된 당시의 관직에 있던 모든 이에게 보복을 할때 한명회(韓明澮)도 부관참시(副棺斬屍)의 화(禍)가 미쳤으나 한명회의 시신(屍身)은 어느것이 진짜 그의 묘(墓)인지 알수가 없어 결국은 부관참시를 면할수 있었다는 야사(野史)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보면 한명회도 부관참시를 면치 못했음을 알수 있으나 청주한씨(淸州韓氏) 문중(門中)에서는 위와같은 연유로 부관참시를 면했다고 주장한다. 그 정도로 앞날을 내다볼수 있는 혜안을 가졌던 인물이 바로 한명회(韓明澮)다.
인수대비와 한명회와는 나이어린 예종(睿宗)이 죽은 뒤 후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세조(世祖)의 왕비와 한명회가 예종(睿宗)의 나이어린 왕자를 제치고 예종의 큰 형인 의경세자(懿敬世子)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대를 잇게 한 장본인이 바로 한명회였기에 인수대비로서는 자기가 중전(中殿)을 하지 못한 원을 대비(大妃)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뒤 이같은 포부를 한명회한테 언급하기에 이르렀고 한명회도 또한 인수대비의 인품을 아는지라 나이 어린 예종의 아들을 제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예종의 조카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한 공헌이 있는 자로 인수대비로서는 시 어른인 세조(世祖) 보다도 한명회가 더큰 은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명회의 죽음에 남다른 애뜻함을 가질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인수대비의 시어른인 세조(世祖)의 황비 윤씨(尹氏)도 한명회가 없었다면 세조 또한 왕위를 이어받을수 없었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터라 한명화와는 각별한 정을 갖고 있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세조(世祖; 수양대군)와 한명회는 뗄래야 뗄수없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며 세조의 자식들은 한명회가 구세주나 다름없는 은인인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시작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속담에 나와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시작을 매우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결단이 필요 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일등과 꼴등의 차이는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에 있지 않을까.
어리석은 자 일수록 결단을 많이 하게 된다. 결단을 많이 한다는 소리는 시작은 그만큼 많이 한다는 소리와 같다. 우리는 시작을 너무도 중시한다. 시작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쓸모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시작과 결단을 남발하지 말고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노력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현대인은 너무 할일이 많아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에 지쳐 포기하기도 한다. 너무도 할일이 많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 하지만 동시에 많은 일을 한다고 해서 꼭 많은 해낼 수 있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가지씩 끝내면서 서서히 하는것이 빠른 길일 경우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설프게 사귄 많은 사람들보다 끝까지 사귄 한사람의 친구가 더 값질때가 더 많다.
우리는 또한 사람을 너무 첫 인상이나 외모만을 가지고 판단한다. 이것은 아직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더 깊숙이 숨은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진정 그 사람을 아는 것이고 그럴때 진정으로 가까워 지는것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것이 시작과 끝의 이론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또한 사람은 즐거운 일을 먼저하고 싶고, 맛있는 것을 먼저 먹고 싶고, 좋고 멋진 옷부터 입어보고 싶고, 아름다운 장소에 먼저 가보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음식은 먹기도 싫고, 남은 옷은 입기도 싫게 되며, 남아있는 장소를 찾는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고, 단정하게 마무리 해야 할 남은 일이 하기 싫게 된다.
늘 인생을 그렇게 살다가는 어려운 일에 지치고 늘어져 삶에 실증을 느끼게 된다. 살맛나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렇게 하지 말고 거꾸로 해보자. 좋은 일은 나중에 신나게 하고, 맛있는 것을 나중에 입에 넣고,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최후에 찾아 구경하는 순서가 어떨까? 이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유종의 미'라는 격언이 있다. 끝이 좋아야 모두가 좋게 된다는 말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먼저 고생스러운 노력 끝에 좋은 결과의 기쁨이 배가 되고, 잃어버린 입맛을 찾기 위해 쓴 나물을 먹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생활을 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게, 아주 어려서부터 습관화 되도록 자녀들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
재미있는 놀이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차례를 기다린 만큼 후에 더욱 재미있게 많이 즐길 수 있고, 숙제를 먼저 해야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TV도 보고 즐거운 게임(game)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양보할 줄 알고, 기획을 세우면서 시간관리도 할 줄 알고, 참을성도 길러진다.
그렇지 못하면 쉬운 것부터 골라하고 어려운 일을 회피하며 적당히 빨리 끝내려고 하다보면 마무리가 허술해진다. 끝이 단정해질 수 없다. 인내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행동과 어른들의 지도에 반항하게 된다. 여기서 자신의 실리(實利)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찾아온 좋은 기회를 남에게 양보하고 뒤로 물러서라는 의미가 아니다. 응당 자신이 맡아할 일은 쉬운 것부터 먼저 하게 되면 어려운 일이 더 힘들고 지처서 좋은 결실을 맺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음은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 있는 말이다.
說苑曰 : 官怠於宦成, 病加於小愈, 禍生於懈惰, 孝衰於妻子, 察此四者, 愼終如始.
설원(說苑)에 말하기를, 관리는 지위가 성취되는 데서 게을러지고, 병은 조금 나아진 데서 심해지며, 재앙은 게으른 데서 생기고, 효도는 처자(妻子)에서 약해지니, 이 네 가지를 살펴서 끝까지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할지니라.
이와같이 시경(詩經)에서는 ‘시작없는 일은 없으나 끝을 맺는 일은 드물다’라고 하였다. 누구나 새로운 결심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결심을 끝까지 지켜 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꾸준히 노력하려는 자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꾸준한 노력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결과를 너무 초조하게 기다리기 때문이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결과를 멀리 두고 한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이라는 말이 있다. 行(행)은 원래 ‘네거리’라는 뜻이다. 네거리는 반듯하게 일정한 방향으로 열을 지은 길이다. 여기에서 행렬(行列) 혹은 항렬(行列)이라는 의미가 나온다. 네거리에는 또한 상점(商店)이 많았으므로 가게, 상점이라는 뜻도 갖게 된다.
오늘날의 은행은 은(銀)을 사고 파는 상점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이 물건은 은(銀) 몇 냥짜리다’와 같이 은(銀)이 가격의 기준이었다. 양행(洋行)은 서양식 상점, 신식 상점이라는 뜻이다. 네거리에는 또한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므로 行(행)은 ‘가다, 돌아다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가운데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의 行(행)은 ‘가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행백리자(行百里者)는 ‘백 리를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半(반)은 원래 ‘절반’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절반으로 여기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구십(九十)의 뜻은 ‘구십’이지만 앞에 ‘백 리’라는 말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구십 리’가 된다. 그러므로 반구십(半九十)은 ‘구십 리를 절반으로 여기다’라는 의미가 된다. 의미를 모으면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은 ‘백 리를 가려는 사람은 구십 리를 가고 나서 이제 절반쯤 왔다고 여긴다’가 된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면 백 리를 다 갈 때까지 꾸준한 노력이 이어질 것이며, 눈앞의 결과에 초조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하고 어려우므로 끝마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젊었을 때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진(秦)나라 무왕(武王)의 교만함을 걱정한 신하가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충고한데서 비롯된 말로 ‘백 리를 가려는 사람은 구십 리를 가고서 이제 절반쯤 왔다고 여긴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하고 어려우므로 끝마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성어이며, 행백리자 반어구십(行百里者 半於九十), 행백리자반구십리(行百里者半九十里)라고도 한다.
전국책(戰國策) 진책편(秦策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秦)나라 무왕(武王)은 나라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점차 자만심에 빠지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주(周)나라 난왕(赧王) 8년에 한 신하가 무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왜 대왕이 제(齊)와 초(楚) 두 나라를 가벼이 여기고 한(韓)나라를 업신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자(王者)는 싸움에 이겨도 교만하지 않고, 패자(覇者)는 맹주가 되어도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기고도 교만하지 않기에 이웃나라가 복종하는 법입니다.
지금 대왕은 위(魏), 조(趙) 두 나라를 얻은 것에 만족하여 제(齊)나라를 잃은 것을 너무 가벼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의양(宜陽) 싸움에서 승리한 뒤 초(楚)나라와의 국교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쉽게 분노를 드러낸 것입니다. 교만과 분노는 패왕(覇王)이 지녀야 할 바가 아닙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처음은 누구나 잘하지만 끝을 잘 마무리하는 사람은 적다(靡不有初, 鮮克有終)’는 말이 있습니다. 선왕(先王)들은 시작과 끝을 다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역사에는 처음에는 잘하다가도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해 멸망한 경우가 많습니다.
춘추시대 말기 진(晉)나라에서 공경(公卿)들의 세력 다툼이 일어났을 때 지백(智伯) 요(瑤)는 범(范)과 중행(中行)을 물리치고 조양자(趙襄子)를 진양(晋陽)에 몰아넣고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한(韓), 위(魏), 조(趙)의 연합군에게 멸망되어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도 회계(會稽)에서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항복(降服)을 받고 애릉(艾陵)에서 제(齊)를 대파(大破)하였지만, 황지(黃池)의 회맹(會盟)에서 송(宋)나라에 무례(無禮)하게 굴다가 결국 구천(句踐)에게 사로잡혀 간수(干隨)에서 죽었습니다.
양혜왕(梁惠王)도 초(楚)와 제(齊) 두 나라를 물리치고, 조(趙)와 한(韓) 두 나라의 군사를 제압한 뒤 12제후를 이끌고 맹진(孟津)에서 천자에게 조회하였지만, 결국 태자 신(申)은 죽고 자신은 제(齊)나라로 끌려가 억류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공(功)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작은 잘했지만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러한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은 의양(宜陽)에서 승리하고 삼천(三川) 일대를 점령하면서 제후들로 하여금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하였고, 한(韓)과 초(楚) 두 나라의 군사들이 감히 진격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일 대왕이 마무리만 잘하면 삼왕(三王; 중국 고대의 세 임금인 夏의 禹王, 商의 湯王, 周의 文王)과 나란히 사왕(四王)으로 칭송되고, 오백(五伯; 春秋五覇)이 육백(六伯)으로 되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멸망의 화(禍)를 입을 것입니다. 신은 제후들과 선비들이 장차 대왕을 오왕(吳王) 부차(夫差)나, 지백(智伯) 요(瑤)처럼 여기게 될까 두렵습니다. 시경(詩經)에서는 ‘1백리를 가는 사람은 90리를 절반으로 여긴다(行百里者 半於九十 행백리자 반어구십)’고 했습니다. 이는 마무리의 어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과 초왕(楚王)은 교만한 기색이 뚜렷합니다. 신이 생각건대 천하의 패업은 제후들의 선택에 따라 초(楚)나라 아니면 진(秦)나라가 반드시 병화(兵禍)를 입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진(秦), 위(魏), 초(楚), 한(韓) 네 나라의 병력은 균형을 이루고 있어 다시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齊)와 송(宋) 두 나라가 저울추의 역할을 하게 되어 이들을 먼저 손에 넣는 쪽이 공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이란 말이 비롯되었으며, 일을 마치기 전에 교만(驕慢)하지 말고 끝마무리를 잘 지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나 시작이 반이다 라는 속담이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은 마무리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어라고 할 수 있다.
자라는 다리가 짧아서 엉금엉금 기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라도 천리를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백리를 가려는 사람은 구십리를 가고 나서야 이제 반쯤 왔다고 말한다. 말을 하기는 쉬워도 끝맺기는 어렵다(行百里者半九十, 此言末路之難)는 뜻이다. 이는 끝길이 어렵다는 것을 경고함이다. 진(晋)나라 영공(靈公)을 간(諫)하는 사계(士季)의 말 가운데 나오는 시경(詩經)에 있는 말이다. 시경은 대아(大雅) 탕편(蕩篇)을 말한다.
영공의 무도함을 간하기 위해 내전으로 들어간 사계는 지나가는 영공의 앞으로 다가가서 넙죽히 엎드렸다. 영공은 못본 체하며 발길을 옭겼다. 세번째 처마 밑까지 가서 엎드리자 그제야 거우 알아 차린 체했다. 사계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영공은 “알았소, 내가 잘못 했소. 앞으로 그러지 않겠소”하고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사계는 영공의 그 말을 받아 이렇게 간곡히 호소했다.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잘못하고 능히 고친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습니다. 시경에도 말하기를 ‘처음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능히 끝을 얻는 사람이 적다(靡不有初 鮮克有終)’고 했습니다. 이 말만 보더라도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이 드물 것 같습니다. 만일 임금께서 능히 끝을 맺으신다면 이는 이 나라의 복입니다.”
불교에서는 초발심시도(初發心是道)라 하여 끝까지 초발심(初發心)을 지키도록 경고하고 있다.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일구월심(日久月深) 노력하는 자만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란 ‘처음엔 누구나 잘 하지만, 끝까지 잘 하는 예는 드물다’는 뜻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시경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누구나 새 일을 시작 할 때는 처음이라 긴장하고 열정을 쏟는다. 계획했던 대로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 가면 마음이 저절로 느슨해지고 조금은 나태해진다.
대개는 이럴 때 실수나 변수가 뒤따른다. 이때 바로 깨닫고 처음처럼 마음을 다잡아서 최선을 다하면 새롭게 질서를 잡아 나가지만 아예 포기하고 방심해 버리면 영 벼랑길이다. 최초의 긴장감, 그 초심으로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쏟으면, 그 결과는 당연지사이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그 차이는 포기하느냐, 포기하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두느냐 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주변에서도 끝 마무리를 잘못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집안에 중환자가 생기면 병원으로 달려가 입원 치료를 받는다. 그런데 며칠 동안 계속 입원해서 차도가 있으면,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나 ‘이젠 집으로 가서 안정을 취하면 되겠지’하고 퇴원을 서둔다. 이렇게 의사가 지시한 기일을 무시하고 회복기의 병간호를 소홀히 하다 보면 거의 완치되어 가던 병조차 악화되거나 재발되어 다시 병원에 입원하는 실례가 많다.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끝마무리 소홀로 곤경에 빠지는 사례를 우리는 현장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처음의 계획과 결심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고, 또 증원(增員)에서도 신입을 처음 대할 때 도와주려 했던 결의와 관심을 끝까지 마무리 못 한 것은 초심을 지탱해 줄 지주대로 삼을 그 무엇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시작과는 달리 끝 마무리가 소홀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 이제 이런 일은 사라져야 한다. 시작은 반이 아니다. 시작은 시작이다. 처음 마음 그대로 끝까지 마무리를 하는 사람,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을 지주(支柱)대로 삼고 변치 않는 마음으로 끝까지 달려가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성공 사업자이다.
시작과 끝이 한결 같기를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라. '시작이 있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능히 끝을 맺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시근종태 인지상정(始勤終怠 人之常情),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종국에 가선 게을러지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는 말도 나온다. 둘 다 처음의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아직 12월 한 달이 남았다며 스스로 위로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돌아보며 한숨 쉬는 사람이 많다. 올해는 살을 빼야지, 금연해야지, 어학공부를 해야지,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지 하는 새해 첫날의 굳은 결심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남은 것이라곤 '또'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시간만 덧없이 흘려보냈구나라는 자책뿐.
물론 처음을 유지하는 일이 쉬웠다면 시종일관이니 시종불투니 시종여일이니 하는,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라고 경계하는 수많은 사자성어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내 나태해지고, 흐지부지해 버리는 것, '내일부터 열심히 하지'라고 미뤄 버리는 것은 사람의 보편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평생 작심삼일만 하다 끝나고 말 것이다. 속성을 극복해야 비로소 업그레이드되는 법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내 마음부터 단속해야 한다.
일찍이 공자는 "붙잡으면 간직할 수 있으나 놓치면 없어지고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방심(求放心), 놓쳐버린 마음을 붙잡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당부다. 뻔한 주문인듯 하지만 이 길밖에 없다. 나를 타성에 젖게 하는 것, 편안함만 좇고 나태해지게 만드는 것, 방종하게 하는 것, 모두 내 마음이 원인이다. 그러니 마음이 흐트러지는 순간을 늘 주시하고 있다가, 잘못된 싹이 움트는 순간 이를 신속하게 뽑아내야 한다.
특히 조심할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자신에게 변명을 하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나중에 해도 돼', '이 정도면 괜찮아', '지금은 바쁘니까' 하고 핑계를 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 나를 속인 것이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감추려고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 나는 점점 나의 목표를 낮추게 된다. 미루고 회피하게 된다. 처음 시작할 때 꿈꿨던 내 모습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설령 마음의 중심을 잡고 유지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람은 끝으로 갈수록 긴장의 끈을 놓게 된다.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이라. '백리를 가는 사람은 구십리를 절반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처럼, 마치는 그 순간까지 마음을 다잡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도 바로 지금, 남은 한달 동안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속이지 않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면 매일매일 작은 차이를 더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시작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속담에 나와있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시작을 매우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결단이 필요 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맞는 말이지만, 필자의 짧은 생각엔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일등과 꼴등의 차이는 시작에 있는것이 아니라 끝에 있지 않을까. 어리석은 자일 수록 결단을 많이 하게 된다. 결단을 많이 한다는 소리는 시작은 그만큼 많이 한다는 소리와 같다.
우리가 종교 용어로 자주 쓰는 말중에 이단(異端)이란 말이 있다. 이 단어에는 종교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를 이(異)'에 '바를 단(端)' 자를 사용하는데 '단(端)'에는 '끝'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대로 해석해 보자면 '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구약도 믿고 신약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다 똑같지만 마지막에 가서 '알고보니 내가 하나님이더라', '알고보니 우리 아버지가 쓴 성경책이 한권 더 있더라' 등등 끝이 다르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즉, 시작은 다른 정통 종교와 똑같은데 뒤에 가서 달라지면 이단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시작을 보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이단을 얘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시작의 결단보다 끝맺음의 어려움, 시작의 중요성 보다 끝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등과 꼴등의 차이는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에 있다. 항상 끝이 중요하다는 얘기 이다. 시작은 일등이든지 꼴등이든지 동시에 같이 한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끝은 일등만 할 수 있다. 너무 극단적인 말인가?
그렇다면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학창시절 수학공부를 예로 들면 쉽게 이해가 가겠다. 일등은 정석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더럽다. 하지만 꼴등은 집합(1단원)만 일등보다 더 더럽다. 시작은 일등보다 많이 했다는 얘기다. 더 이상 얘기 않하더라도 우리의 똑똑한 독자분들은 이해하셨으리라 본다.
어떤 일이던지 99%를 마치고 1%가 남았다고 해서 마친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1%만 해놓고도 마치 많은 것을 한 것처럼 떠들어 댄다. '나 컴퓨터 공부한다' '나 다이어트 한다' '나 담배 끊었다' 등등 심지어 시작도 하지 않은 일 조차도... '나 테니스 배울꺼다' '나 홈페이지 만들꺼다' 등등 말이다. 그들의 결단의 선의를 충분히 감안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노력하는 성실함에 비할바가 아니다.
한명회가 남긴 유명한 말중에 '시근종태(始勤終怠)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종신여시(終愼如始)하라'는 말이 있다. 처음 시작은 부지런하고 일의 끝을 태만히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처음과 끝을 똑같이 근면하게 하라는 뜻이다. 하루쯤은 감동의 도가니에 사로잡혀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멋진 말 아닌가.
우리는 시작을 너무도 중시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시작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쓸모 없다는 얘기가 전혀 아니다. 다만 시작과 결단을 남발하지 말고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노력하는 자세를 갖자는 얘기다. 현대인은 너무 할일이 많아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동시에 동시 다발적으로 일에 지쳐 포기 하기도 한다. 너무도 할일이 많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 하지만 동시에 많은 일을 한다고 해서 꼭 많은 해낼 수 있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가지씩 끝내면서 서서히 하는것이 빠른 길일 경우도 있다.
마무리 지을때가 온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설프게 사귄 많은 사람들보다 끝까지 사귄 한사람의 친구가 더 값질때가 더 많다. 우리는 또한 사람을 너무 첫 인상이나 외모만을 가지고 판단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필자가 설명한 데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더 깊숙이 숨은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진정 그 사람을 아는 것이고 그럴때 진정으로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의 이론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물론 어디까지나 필자의 의견일 뿐이고 선택은 스스로 하기 바란다.
초심을 지키려면 귀를 열자
유학(儒學)에선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두 가지로 구분해 부른다. 인심은 기질, 즉 신체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다. 도심은 순수하고 선한 본성의 측면이다. 도심은 선하지만 인심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인심은 욕구나 감정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욕구를 다스리고 감정을 잘 제어하면 선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악으로 흐른다.
철학 개념이라 다소 복잡한데, 쉽게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인간의 내면에는 순수하고 선한 본성이 자리하고 있다. 동시에 인간은 희로애락(喜怒哀樂)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으며 힘이나 명예, 재물, 편안함에 대한 욕망을 소유하고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원초적 욕구도 존재한다. 인간으로서 이런 감정, 욕망, 욕구가 없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부정할 필요도 없지만 이를 잘 다스려서 올바르게 작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은 매우 강력해서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한 번 욕망을 극복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라도 싹트고 샘솟는 것이다. 그만큼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노력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도(道)인 중도(中道)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가령 내가 왕위에 올랐다고 상상해 보자. 당연히 처음엔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길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각오를 다지겠지만 많은 군주가 이 다짐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초반에는 훌륭한 업적을 이룬 이들도 뒤로 갈수록 흐트러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당나라의 태종과 현종을 들 수 있다. 태종과 현종은 각각 정관지치(貞觀之治) 개원지치(開元之治)라고 기록되는 번영기를 이룩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후반기에 가서는 여러 과오와 실책을 범했고, 특히 현종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간신을 총애해 나라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사실 군주는 애초부터 욕망에 물들기 좋은 환경에 놓여 있다.
사람의 마음에서 욕망보다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그래도 일반인들은 법이 무서워서 혹은 자신의 처지가 따라주지 않아서 욕망이 시키는 대로 선뜻 행동하지 못한다. 욕심을 부리고 싶어도 내가 욕심을 부릴 만한 위치가 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군주는 어떠한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고 법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마음만 먹으면 즐기고 누릴 것이 천지다. 그러니 나태해지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쉬워진다. 자만하고 아집을 부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임금은 무엇보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마음을 지켜야 하며, 잘못된 생각이 싹트기라도 하면 즉각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문제는 혼자 힘으로 마음을 다잡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반성하고, 스스로 마음을 맑고 바르게 만드는 것은 군자나 성인(聖人)의 경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성찰의 계기가 있어야 하고, 주위에서 자극을 줘야 한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의 직언을 들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간언을 일부러라도 들으며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를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
임금의 입장에서 설명하긴 했지만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교훈이다. 직장에 첫 출근을 할 때,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이때부터 게으른 사람은 없다. 남들이 놀랄 만큼 잘해보겠다고, 꼭 성공해 좋은 결과를 거두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다 점차 타성에 젖어들고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드높았던 초심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시근종태 인지상정(始勤終怠 人之常情)이라.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지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에서는 성과급을 주고 승진과 연봉 인상으로 동기를 부여한다. 징계 절차를 마련해 긴장을 유지시킨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내 마음의 방종을 막기 어렵다. 매일매일 성찰하고 반성하는 노력과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청이 병행돼야 한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야 비로소 처음의 시작도 잘하고 끝맺음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 始(비로소 시)는 ❶형성문자로 乨(시)는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계집 녀(女; 여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台(태, 이, 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台(태, 이, 시)와 여자(女)의 뱃속에 아기가 생기는 일이 시초라는 데서 '비로소', '처음'을 뜻한다. 始(시)는 어머니 뱃속에 아이가 생기는 일, 또 한 집안의 시초, 시조(始祖), 나중에 '사물의 시작'이란 뜻으로도 쓴다. ❷회의문자로 始자는 '비로서'나 '일찍이', '옛날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始자는 女(여자 여)자와 台(별 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台자는 匕(비수 비)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것으로 수저를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女자가 더해진 始자는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이는 엄마가 주는 양분을 통해 삶을 시작하게 된다. 始자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아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始(시)는 ①비로소 ②바야흐로 ③먼저, 앞서서 ④일찍, 일찍부터 ⑤옛날에, 당초에 ⑥처음, 시초(始初) ⑦근본(根本), 근원(根源) ⑧시작(始作)하다 ⑨일으키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근본 본(本), 비롯할 창(創), 비롯할 조(肇),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끝 말(末), 마칠 종(終)이다. 용례로는 처음으로 함을 시작(始作), 한 족속의 맨 우두머리 조상을 시조(始祖), 시작한 처음 무렵을 시초(始初), 시작되는 처음을 시원(始原), 어떤 일을 맡아보기 시작함을 시무(始務), 일의 처음과 끝을 시말(始末), 직업 또는 학업 따위의 일을 시작함을 시업(始業),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함을 시동(始動), 일련의 동작 운동이 시작되는 점을 시점(始點), 어떤 일이 시작되는 때를 시기(始期), 맨 처음 출발 또는 발차함을 시발(始發), 처음으로 자연 그대로 사람의 손이 가해지지 않음을 원시(原始), 처음으로 시작함을 개시(開始), 천지가 비롯된 무렵이나 만물이 시작된 때를 태시(太始), 어떤 사상이나 학설 등을 처음 내세움을 창시(創始), 맨 처음을 본시(本始),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아무리 돌아도 처음 비롯한 곳이 없음을 무시(無始),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한다는 말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 같아서 변함없다는 말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다는 말을 종시일관(終始一貫), 한 해의 마지막 때와 새해의 첫머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연말연시(年末年始),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으로 불변의 진리나 윤회의 무한성을 이르는 말을 무시무종(無始無終), 살고 죽는 윤회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일컫는 말을 무시범부(無始凡夫),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천지와 선조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말을 보본반시(報本反始),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들음을 일컫는 말을 금시초문(今始初聞),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등에 쓰인다.
▶️ 勤(부지런할 근/근심할 근)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힘 력(力; 팔의 모양,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堇(근; 동물의 가죽을 불에 말리는 모양 같은데 나중에는 말릴 때 가죽에 바르는 흙으로, 점토粘土로 생각하고 자체도 火 부분을 土로 쓰게 되었음)의 뜻이 합(合)하여 '부지런하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勤자는 '부지런하다'나 '힘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勤자는 堇(진흙 근)자와 力(힘 력)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堇자는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진흙'이라는 뜻이 있다. 물이 젖은 진흙은 매우 무겁다. 이렇게 축축한 땅을 다지려면 몇 배의 힘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축축한 진흙을 뜻하는 堇자에 力자가 결합한 勤자는 쟁기로 열심히 진흙을 다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勤자는 그런 의미에서 '부지런하다'나 '힘쓰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勤(근)은 부지런한 성질(性質), 또는 부지런함의 뜻으로 ①부지런하다, 부지런히 일하다, 임무(任務)를 행하다 ②근무(勤務)하다 ③힘쓰다 ④위로(慰勞)하다, 수고를 치하(致賀)하다 ⑤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걱정하다 ⑥괴롭다, 괴로워하다 ⑦은근(慇懃)하다(깊고 그윽하다) ⑧일, 직책(職責), 임무(任務) ⑨괴로움, 고생 ⑩근심,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게으를 권(倦), 게으를 타(惰), 거만할 만(慢), 게으를 태(怠)이다. 용례로는 직장에 적을 두고 직무에 종사하는 것을 근무(勤務), 일정한 시간 동안 일정한 노무에 종사하는 일을 근로(勤勞), 부지런히 노력함을 근면(勤勉), 자기가 맡은 일에 부지런히 힘써서 일함을 근사(勤仕),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근검(勤儉), 근무를 한 곳에서 오래 계속함을 근속(勤續), 부지런하고 온후함을 근후(勤厚), 부지런함과 게으름 또는 출근과 결근을 근태(勤怠), 농사에 매우 힘을 기울임 또는 부지런히 짓는 농부를 근농(勤農), 부지런하고 착실함을 근실(勤實), 학문에 힘씀이나 부지런히 공부함을 근학(勤學), 열심히 힘들여서 공부함을 근공(勤工), 부지런하고 성실함을 근간(勤幹), 힘써 삼감을 근신(勤愼), 부지런한 백성을 근민(勤民), 밤에 하는 일을 야근(夜勤), 낮에 하는 일을 주근(晝勤), 직장 안에서 하는 근무를 내근(內勤), 관청이나 회사나 상점 등의 직원으로서 외부에 나가서 하는 근무를 외근(外勤), 매일 일정한 시간 근무함을 상근(常勤), 근무처로 일하러 나가거나 나옴을 출근(出勤), 직장에서 근무를 마치고 물러 나옴을 퇴근(退勤), 출근하지 않음이나 일을 쉬고 안 나감을 결근(缺勤), 일정한 기간 동안에 휴일 외에는 하루도 빠짐 없이 출석 또는 출근함을 개근(皆勤), 집에서 직장에 근무하러 다님을 통근(通勤), 근무 시간 외에 더하는 근무를 특근(特勤), 어느 직장에 근무하는 일을 재근(在勤), 어떤 일에 오랫동안 힘써 옴을 구근(久勤), 몹시 힘이 드는 일에 종사함을 복근(服勤), 대신 근무함을 대근(代勤), 같은 근무나 같은 역할을 동근(同勤), 자기가 맡은 본디의 근무 이외에 다른 근무를 겸함을 겸근(兼勤), 공손하고 부지런함을 공근(恭勤), 고된 일을 맡아 부지런히 일함 또는 고된 근무를 신근(辛勤),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을 근로자(勤勞者), 근무하는 사람을 근무자(勤務者), 부지런히 힘쓰는 성격을 근면성(勤勉性), 부지런하고 알뜰하여 재물을 모음을 일컫는 말을 근검저축(勤儉貯蓄),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재물을 아낌을 일컫는 말을 근검절약(勤儉節約), 공공을 위해 봉사하는 여러 가지 근로를 일컫는 말을 근로봉사(勤勞奉仕), 직장에서 일한 햇수를 일컫는 말을 근무연한(勤務年限), 국민은 누구나 부지런히 일해야 할 의무를 이르는 말을 근로의무(勤勞義務), 매우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움을 이르는 말을 근근자자(勤勤孜孜), 매우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운 모양을 이르는 말을 근근간간(勤勤懇懇), 서투른 것을 보충하는 데에는 부지런함이 으뜸임을 일컫는 말을 근장보졸(勤將補拙), 적은 논밭이나마 농사에 힘씀을 이르는 말을 근력기중(勤力其中), 사람의 근본은 부지런함에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재근(人生在勤), 삼가 게을리 하지 않고 일에 힘씀을 이르는 말을 정려각근(精勵恪勤), 성공의 열매는 부지런함 속에 있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성실재근(成實在勤), 하느님을 받들고 백성을 통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경천근민(敬天勤民),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등에 쓰인다.
▶️ 終(마칠 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冬(동, 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冬(동, 종)과 바느질을 다 하고 나서 실(실사(糸; 실타래)部)을 매듭짓는다는 뜻이 합(合)하여 마치다를 뜻한다. 冬(동; 겨울)은 네 계절(季節)의 끝이므로 실 사(糸; 실타래)部를 덧붙여 감긴 실의 끝이 되고 널리 끝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終자는 ‘끝나다’나 ‘마치다’,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終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冬(겨울 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冬자는 새끼줄 양 끝에 매듭을 묶어 줄이 풀리지 않게 일을 마무리했다는 의미에서 ‘끝내다’나 ‘마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冬자가 ‘겨울’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자를 더한 終자가 ‘끝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終(종)은 끝,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①마치다 ②끝내다 ③사람이 죽다 ④다하다 ⑤이루어지다, 완성되다 ⑥채우다, 상당하다 ⑦끝, 마지막 ⑧사방 백 리의 땅 ⑨열두 해 ⑩윤(閏)달 ⑪항상(恒常), 늘 ⑫마침내, 결국(結局) ⑬비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마칠 졸(卒), 마칠 필(畢), 마칠 준(竣), 마칠 파(罷), 그칠 지(止), 끝 말(末), 끝 단(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비로소 시(始)이다. 용례로는 일을 마침을 종료(終了), 끝이나 끝판을 종말(終末), 끝을 냄을 종결(終結), 그 날의 업무를 마침을 종업(終業), 맡아보던 일을 끝냄을 종무(終務), 죽을 때까지를 종신(終身), 필경에 또는 마침내를 종내(終乃),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전쟁이 끝남을 종전(終戰), 한 때 매우 성하던 것이 주저앉아서 그침을 종식(終熄), 간행을 끝냄 또는 끝낸 그것을 종간(終刊), 마지막에 다다른 판국을 종국(終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사이를 종일(終日), 최종으로 도착함을 종착(終着), 끝을 냄이나 끝이 남을 종지(終止), 죽거나 없어져서 존재가 끝남을 종언(終焉), 결정이 내려짐을 종결(終決), 맨 끝이 되는 곳을 종점(終點),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를 임종(臨終), 단계나 차례에 있어서 맨 나중을 최종(最終), 오복의 하나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고종(考終),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종(年終), 끝을 완전히 맺음을 유종(有終), 나중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를 내종(乃終),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 때 또는 일의 마지막을 망종(亡終), 끝이 없음을 무종(無終), 좋지 않은 최후를 악종(惡終),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처음과 끝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음을 종시일관(終始一貫), 끝내 소식이 없음을 종무소식(終無消息),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사모의 정을 종천지모(終天之慕), 그 사람을 한평생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지 않는 일을 종신불치(終身不齒),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종신지질(終身之疾), 빚돈을 갚지 않음을 종불출급(終不出給), 끝내 방문하지 않음을 종불투족(終不投足), 어떤 일을 한번 끝내어 마쳤다가 다시 시작함을 종이부시(終而復始), 끝내 회개하지 않음을 종불회개(終不悔改),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을 종식지간(終食之間), 하루낮 동안 들이는 수고를 종일지역(終日之役), 영원히 계속되는 슬픔을 종천지통(終天之痛),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함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같아서 변함 없음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끝까지 굳게 참고 견딤을 견인지종(堅忍至終), 부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기를 원하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원걸종양(願乞終養), 우정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흉종극말(凶終隙末) 등에 쓰인다.
▶️ 怠(게으를 태, 안락할 이)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허물어지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台(태, 이)로 이루어졌다. 마음가짐이 허물어지다의 뜻이 전(轉)하여 게으름 피우다의 뜻이 되었다. 怠자는 ‘게으르다’나 ‘거만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怠자는 台(별 태)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된 모습이다. 台자는 수저를 입에 가져다대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발음 역할만을 하고 있다. 怠자는 게으른 성품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로 心자가 의미요소로 쓰였다. 怠자는 게으르다는 의미에서 ‘나태하다’나 ‘게으르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지만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의 태도는 거만함을 연상케 하기 때문에 ‘거만하다’나 깔보다‘와 같은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怠(태, 이)는 ①게으르다, 게을리하다 ②거만(倨慢)하다 ③업신여기다, 깔보다 ④맺힌 데가 없다, 느리다 ⑤그만두다, 물러서다 ⑥위태(危殆)하다, 위험하다 ⑦피곤(疲困)하다, 지치다 ⑧게으름, 그리고 ⓐ안락(安樂)하다(이) ⓑ게을리하다(이) ⓒ기쁘다, 기뻐하다(이) ⓓ새의 이름(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게으를 권(倦), 게으를 타(惰), 게으를 해(懈), 게으를 나(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부지런할 근(勤)이다. 용례로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움을 태만(怠慢), 몹시 게으름을 태타(怠惰), 태만하여 조세를 납부하지 않음을 태납(怠納), 나태한 마음을 태심(怠心), 거드름스러워 예법이 없음을 태오(怠傲), 관무에 태만함을 태관(怠官), 게으른 종을 태노(怠奴), 해야 할 일이나 맡은 임무를 게으름을 피고 하지 않음을 태공(怠工), 게으르고 느림을 나태(懶怠), 잘못과 태만을 과태(過怠), 점점 게을러짐을 침태(浸怠), 피로하여 게으름을 피태(疲怠),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을 권태(倦怠), 게으르고 느림을 타태(惰怠), 어떤 법률 행위를 해야 할 기일을 이유없이 넘겨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을 해태(懈怠),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근태(勤怠), 나무람을 받을 만한 태만을 과태(科怠), 어리석고 게으름을 혼태(昏怠), 안락을 즐기며 게으름을 피우는 일을 예태(豫怠), 마음이 풀어져 게으름을 피움을 완태(緩怠), 언행이 거칠고 일을 게을리함을 황태(荒怠), 교만하고 태만함을 교태(驕怠), 성질이 완악하고 행동이 게으름을 완태(頑怠), 좋은 때를 얻으면 태만함이 없이 근면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을 득시무태(得時無怠),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