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선종(善始善終)
시작도 잘하고 끝도 잘한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잘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善 : 착할 선(口/9)
始 : 처음 시(女/5)
善 : 착할 선(口/9)
終 : 끝날 종(糹/5)
(유의어)
관철시종(貫徹始終)
시종불해(始終不懈)
시종여일(始終如一)
시종일관(始終一貫)
신종여시(愼終如始)
초지일관(初志一貫)
출전 : 장자(莊子) 대종사편(大宗師篇)
성인(聖人)은 하늘을 본뜨고 하늘은 도(道)를 본뜨며, 도(道)는 자연을 본뜬다. 장자(莊子)의 대종사편(大宗師篇)은 곧 이 도(道)를 말한 글이다. 여기서 생(生)과 사(死)에 관한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무릇 배(舟)를 골짜기에 숨기고, 산을 못(澤)에 숨기고서, 이를 고(固)라고 한다.
然以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
그러나 야반에 힘있는 자 이것을 지고서 달아난다. 그런데도 매자는 알지 못한다.
藏大小有宜, 猶有所遯. 若夫藏天下於天下, 而不得所遯. 是恒物之大情也.
대소를 숨기는 마땅한 곳이 있어도 역시 달아날 곳이 있다. 그러나 만일 천하를 천하에 숨긴다면 곧 달아난 곳을 얻지 못한다. 이는 항물의 대정이다.
特犯人之形, 而猶喜之.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其爲樂可勝計邪.
사람의 형체를 취하여 태어났어도 이것을 기뻐한다. 그러나 사람의 형체와 같은 것은 천변만화하여 처음부터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故聖人將游於物之所, 不得遯而皆存.
그러므로 성인은 장차 만물이 달아나지 못하는 곳에서 노닐면서 모두를 그대로 두려한다.
善夭善老, 善始善終.
그러나까 요절하는 것도 좋고 오래 살아도 좋으며, 생의 시작을 좋다 하고 끝남도 또한 좋다고 한다.
人猶效之, 又況萬物之所係, 而一化之所待乎.
사람들은 오히려 이것도 효(效)하려 하거든, 하물며 만물이 매이고 일화가 의거하는 것에 있어서랴.
(解說)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산을 못 속에 감추어 두고서, 이것으로 도둑맞을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밤중에 힘있는 자, 때의 변화가 이것을 지고서 달아난다. 어리석은 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크고 작은 물건들을 각각 적당한 곳에 감추어 두어도 때의 변화를 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역시 자기의 손에서 없어져 가는 것이다. 만일 천하를 그대로 고스란히 천하 속에 감추고 일체를 자연 그대로 해 둔다면, 자기의 손에서 달아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일에 통하는 큰 진리이다.
무한한 자연 속에서 오직 유일한 인간의 형체를 얻어 온 일에 대해서 조차 기쁨을 느끼는 제 보통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체라는 것은 천변만화하기 끝이 없는 것이다. 만일 다 하나의 모양에만 집착하지 않고 천변만화하는 전부를 즐긴다면 그 즐거움도 무한히 계속 되리라.
그러므로 성인은 아무것도 잃을 염려가 없는 경지, 일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지에서 놀고 모든 걸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다. 요절하는 것도 좋다 하고, 장수하는 것도 좋다 하고, 인생의 시작도 좋다 하고 인생의 끝남도 좋다고 한다.
원래 선종(善終)이란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선생복종이란 임종(臨終)할 때 성사(聖事)를 받아 대죄(大罪)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므로 선종(善終)은 ‘시작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잘함’이라는 뜻도 있으며 지켜내기 참 어려운 일이다.
이 말의 처음 유래는 좀 다른 것 같다. 이탈리아 예수회 로벨리선교사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선생복종정로(善生福從正路)로 옮기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선종(善終)이라는 천주교 용어가 쓰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선종(善終)은 선시선종(善始善終)의 준말로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에 붙이는 천주교식 수사(修辭)다. 기독교에서는 신(新), 구교(舊敎)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으로 소천(召天)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예기(禮記)의 곡예하(曲禮下)에는 천자사일붕 제후일훙(天子死曰崩 諸侯曰薨) 대부일졸 사일불록(大夫曰卒 士曰不祿) 서인일사(庶人曰死)라고 했다. 풀어보면 임금의 죽음을 붕(崩)이라 하고, 제후의 죽음을 훙(薨)이라 하며, 대부의 죽음은 졸(卒)이라 부르고, 선비의 죽음을 불록(不祿)이라 말하고, 서인(庶人)들의 죽음을 사(死)라고 했다.
옛 주(周)나라의 죽음에 대한 예법(禮法)이 오늘과 같을 수는 없으나 오늘날에도 죽음은 생시(生時)의 신분에 따라 격위(格位)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임금의 죽음은 승하(昇遐) 혹은 훙(薨)이라 했고, 중전이나 대비의 죽음은 훙(薨)이나 서거(逝去)라 했으며, 서거(逝去)라는 말은 최근에는 국가나 세계적인 인물이나 혹은 훌륭한 분의 죽음에 흔히 쓰는 말이다.
선시선종(善始善終), 즉 유종(有終)의 미(美)를 강조한 중국 고대의 시(詩)를 보자
시(詩) 대아(大雅) 탕(荡)
蕩蕩上帝, 下民之辟.
무도하신 하느님이지만, 천하 백성을 이끄시는 임금님이라네.
疾威上帝, 其命多辟.
포학한 하느님이시여, 그 명령이 치우신 바가 크시네.
天生烝民, 其命匪谌.
하늘이 무수한 백성을 낳으셨지만, 그 명령이 믿음이 가질 않네요.
靡不有初, 鲜克有终.
시작이 있지 아니한 것이 없거늘, 유종의 미를 얻기란 참으로 드물다오.
이 시(詩)는 시경(詩經)에서 유명한 역사를 경계하여 읊은 영사시(詠史詩)에 속한다.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은(殷)나라의 걸(桀)임금이 포학하고 무도한 정치를 행하여 이에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앞장서서 폐단을 제지하고 혁명의 시작을 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신흥 왕조를 일으켰지만, 주(紂)임금에 이르러 타락과 말세의 정치를 행하여 그 끝이 좋지 못하였다. 주(周)나라 무왕(武王)과 문왕(文王)이 선정을 베풀었으나 결국 말대(末代)의 여왕(厲王)에 이르러 은(殷)나라와 상(商)나라의 전철(前轍)로부터 다시 경계를 삼아야 할 결과를 낳았다.
참으로 인간의 역사는 과오를 지나치게 반복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나의 과오를 후대의 사람이 따라 하지 말 것을 거듭 당부 하였지만 그러나 후대 사람은 그러한 과오를 거울로 삼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짧은 안목에 집착과 탐욕으로 물들어 자승자박(自繩自縛), 자기기인(自欺欺人)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할 것이다.
조선의 한명회(韓明澮)가 노자(老子)의 명언인 신종여시(愼終如始)란 말을 세조(世祖)에게 전한 일은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종여시(愼終如始)는 ‘끝을 신중하게 하는 것을 마치 처음 같이 한다’는 뜻으로, 일의 종말에 이르러서도 처음과 같이 마음을 늦추지 않고 애쓴다는 의미이다.
官怠於宦成, 病加於小癒.
관직에 있으면 지위가 높아질수록 게을러지고, 병(病)은 조금 낫는 듯 싶으면 더해진다.
禍生於懈怠, 孝衰於妻子.
화(禍)는 게으름에서 비롯되고, 효도하는 마음은 처자식 때문에 줄어든다.
察此四者, 愼終如始.
이 네 가지를 잘 살펴서, 마지막을 처음과 같이 하라.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현상을 보인다. 무슨 일이건 처음에는 성심껏 하다가 점차 게으름과 방심으로 일을 그르치고 만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효자라는 말을 듣다가도 차자식이 생기면 그 쪽으로 정이 더 많이 쏠리므로 부모에 대해서는 등한해 진다.
게으르지만 않으면 높아지는 지위를 지킬 수 있고 질병은 보다 일찍 고칠 수 있으며 모든 화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리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효의 근본인 부모의 마음을 편안히 해 드릴수가 있다. 게으르지만 않다면 누구라도 마지막을 처음과 같이 할 수가 있다.
愼終如始, 則無敗事.
종말에 가서 조심하기를 처음 시작할 때 같이 한다면 실패하는 일은 없다. 즉 일 마무리를 할 때 그 일을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이 조심성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사례)
모든 일은 시작이 있다. 그러나 끝이 좋아야 한다. 시작과 끝이 모두 좋기를 바라는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진말(秦末) 한초(漢初)의 인물인 진평(陳平)은 임기응변에 뛰어났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궐기했을 때, 그가 위왕(魏王) 구(咎)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후에 항우(項羽)를 따라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유방(劉邦)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유방에게 이간책을 써서 항우와 범증(范增)이 멀어지게 하고, 대장(大將) 한신(韓信)을 작위(爵位)로 구슬리라고 건의하였다. 여후(呂后)가 죽자 계책을 써서 조정안의 여씨(呂氏) 세력을 소멸시키고 유가(劉家)의 세력을 회복시켰다.
진평은 책략을 절절히 사용하여 한혜제(漢惠帝), 여후(呂后), 한무제(漢武帝) 시대에 계속 승상(丞相)을 역임하면서 영예롭게 일생을 마쳤다. 이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잘 마무리 하였다(善始善終)'라고 그를 평가하였다.
물론 진평(陳平) 개인의 삶을 이야기 하자면 어쩌면 구차한 내용일 수도 있다. 허나 진평이 모진 세파를 견디고 자신의 삶을 의미있는 삶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선시선종(善始善終)
연초 훌륭한 목표를 세우시고 연말에 그 목표를 무리 없이 마무리 하시면 아마 그 일 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선시선종(善始善終)이라 한다. 이 말은 장자(莊子) 第6 대종사편(大宗師編)에 나오는 말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결 같이 잘 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힘을 다 한다’는 뜻의 시종불해(始終不懈),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는 시종여일(始終如一), 시종일관(始終一貫) 등의 말이 있다.
장자의 대종사편에 나오는 말이다. ‘성인은 하늘을 본뜨고, 하늘은 도를 본뜨며, 도는 자연을 본뜬다.’
사람들은 어쩌다가 사람의 모양을 얻게 된 것을 몹시 기뻐한다. 그러나 사람의 모양은 수 없이 변해서 끝이 없는 것이니, 그때 그때의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特犯人之形, 而猶喜之.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其爲樂可勝計邪.
그러므로 성인은 아무것도 빠져나갈수 없는 곳에서 노닐며 모든 것을 그대로 둔다.
故聖人將遊於物之所, 不得遯而皆存.
그는 일찍 죽는 것도 오래 사는 것도 좋다고 하고,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좋다고 한다.
善夭善老, 善始善終.
사람들은 이런 성인을 존경하는데, 더구나 만물이 다 그에게 매이고 큰 조화가 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어찌 본받으려 하지 않겠는가.
人猶效之, 又況萬物之所係, 而一化之所待乎.
우리들이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일을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시작한 일도 중도에 수많은 걸림돌을 만나 목적한 결실을 보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많은 문제를 안고 시작한 일들이 대부분 결실을 맺기는커녕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다. 이러한 관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우리의 삶 자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모습이 이런 비관론으로 뒤덮인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 중에 성공률이 열중에서 한둘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 삶의 대부분이 늘 이러한 십중팔구 실패의 반복이다. 그래서 성공하는 한둘의 가치보다 실패하는 팔구가 있어 살아갈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에겐 당장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당장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절망한다. 그것은 지금 당장 이루어 낼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장 할 수 없는 일 중 대부분의 일들이 시일을 두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 나간다면 거의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할 수 없다는 절망은 바로 우리 마음의 성급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당장 하려하는 성급함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믿는 부정적 사고 때문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목표와 계획조차 세워보지 못한다.
그 소극적 태도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들 때문에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현재의 안일함 속에서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일이 즐거우면 세상은 낙원이요, 일이 괴로우면 세상은 지옥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은 축복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힘이 있으며 게으른 자에게는 힘이 없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니까. 사람이 무슨 일을 시작하여 한 가지도 그르침이 없을 때에는 그 일을 잘 해보려는 정성이 계속된다. 그러나 중간에 한두 번 실수를 하고 보면 그만 본래 마음을 다 풀어버리고 되는대로 하는 수가 허다하다.
철저한 생각과 큰 경륜(經綸)을 가진 사람은 무슨 일을 하다가 어떠한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교훈삼아 미래를 더욱 개척할지언정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지난 해는 어차피 흘러간 과거이다. 밝아오는 새 해에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을 찾아 계획을 세우자. 그렇게 ‘선시(善始)’를 하는 것이다. 그럼 내년 세모(歲暮)에는 모두 ‘선종(善終)’을 거둘 수 있다. 선시선종!
선시선종(善始善終)
연초에 훌륭한 목표를 세우시고 연말에 그 목표를 무리 없이 마무리 하시면 아마 그 일 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선시선종(善始善終)이라 한다. 이 말은 장자(莊子) 제6 대종사편(大宗師編)에 나오는 얘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잘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한다는 뜻의 시종불해(始終不懈),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는 시종여일(始終如一), 시종일관(始終一貫) 등의 말이 있다. 장자(莊子) 제6 대종사편(大宗師編)에 나오는 말이다. ‘성인은 하늘을 본뜨고 하늘은 도를 본뜨며 도는 자연을 본뜬다.’
特犯人之形 而猶喜之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其爲樂可勝計邪! 故聖人將遊於物之所 不得遯而皆存 善夭善老 善始善終 人猶效之 又況萬物之所係 而一化之所待乎.
사람들은 어쩌다가 사람의 모양을 얻게 된 것을 몹시 기뻐한다. 그러나 사람의 모양은 수 없이 변해서 끝이 없는 것이니, 그때그때의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곳에서 노닐며 모든 것을 그대로 둔다. 그는 일찍 죽는 것도 오래 사는 것도 좋다고 하고,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좋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런 성인을 존경하는데, 더구나 만물이 다 그에게 매이고 큰 조화가 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어찌 본받으려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일을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시작한 일도 중도에 수많은 걸림돌을 만나 목적한 결실을 보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많은 문제를 안고 시작한 일들이 대부분 결실을 맺기는커녕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다. 이러한 관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우리의 삶 자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모습이 이런 비관론으로 뒤덮인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 중에 성공률이 열중에서 한둘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 삶의 대부분이 늘 이러한 십중팔구 실패의 반복이다. 그래서 성공하는 ‘한둘’의 가치보다 실패하는 팔구가 있어 살아갈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에겐 당장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당장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절망한다. 그것은 지금 당장 이루어 낼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장 할 수 없는 일 중 대부분의 일들이 시일을 두고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 나간다면 거의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할 수 없다는 절망은 바로 우리 마음의 성급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당장 하려하는 성급함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믿는 부정적 사고 때문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목표와 계획조차 세워보지 못한다. 그 소극적 태도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들 때문에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현재의 안일함 속에서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일이 즐거우면 세상은 낙원이요, 일이 괴로우면 세상은 지옥’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은 축복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힘이 있으며 게으른 자에게는 힘이 없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무슨 일을 시작하여 한 가지도 그르침이 없을 때에는 그 일을 잘 해보려는 정성이 계속된다. 그러나 중간에 한두 번 실수를 하고 보면 그만 본래 마음을 다 풀어버리고 되는대로 하는 수가 허다하다. 철저한 생각과 큰 경륜(經綸)을 가진 사람은 무슨 일을 하다가 어떠한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교훈삼아 미래를 더욱 개척할지언정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어차피 지난 시간들은 흘러간 과거이다. 다가오는 시간에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을 찾아 계획을 세워보자. 그렇게 선시(善始)를 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는 모두 선종(善終)을 거둘 수 있겠다.
시작과 끝
사람의 일에 있어 시작과 끝이 중요함을 얘기한 것이 많으니 다음과 같다.
선시선종(善始善終)이라는 말은 ‘시작이 좋으면 결과도 좋다’는 뜻으로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선작자 불필선성(善作者不必善成)’이라 하여 ‘시작이 좋다고 반드시 대성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경계하는 말도 있다. 바둑과 관련하여 부자 몸조심 하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두지 말라며, ‘선작오십가필패(先作五十家必敗)’란 말이 있으니, 이는 ‘먼저 큰집을 지으면 그 판은 진다’는 뜻이다.
용두사미(龍頭蛇尾)라, 이는 시작은 화려하나 마무리는 흐지부지한 경우를 이르는 말이요, 초발심시도(初發心是道)라 하여 '처음 마음으로 끝까지 열심히 해야 뭔가 얻어낼 수 있다'고도 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강조한다. 신종여시 즉무패사(愼終如始則無敗事) 곧 ‘마무리도 처음처럼 신중하게 하면 그르칠 일이 없다’고.
이어 합포지목 생어호말(合抱之木生於毫末) 즉 ‘아름드리 나무도 털끝만한데서 자랐고’, 구층지대 기어누토(九層之臺起於累土)라 하여 ‘9층 높은 집도 한줌 흙에서 시작한다’하며, 천리행 시어족하(千里行始於足下)이니 ‘천리 길도 첫걸음부터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숲은 도토리 한 알부터 시작한다’는 서양 속담도 있다.
특히 끝의 중요함을 이르는 말을 보자. 시경 탕편은 ‘처음은 누구나 노력하지만 마무리까지 잘하는 사람은 적다’는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을 말해 놓았다. 전국시대에 진(晉)나라 영공(靈公)이 오만해지자 사계라는 신하가 엎드려 호소하는데, 이때 원용한 말이 바로 시경의 이 말이었다.
또 전국책은 유시자 필유종(有始者必有終)이라 하여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하였으니, 이에 진시황은 “100 리를 갈 때 90 리를 가서도 이제 절반쯤 왔다고 여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 않는가. 결국 이들은 유시지중(有始之重)과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이르는 말들이다. 처음도 중요하거니와 마무리도 잘하라는 얘기들이다.
▶️ 善(착할 선)은 ❶회의문자로 양(羊)처럼 순하고 온순하며 부드럽게 말(口)하는 사람을 나타내어 착하다를 뜻한다. 옛날 재판에는 양 비슷한 신성한 짐승을 썼다. 신에게 맹세하고 한 재판이란데서 나중에 훌륭한 말이 훌륭함, 좋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善자는 ‘착하다’나 ‘사이좋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善자를 보면 양과 눈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답은 ‘양의 눈망울과 같은’이다. 뜻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식으로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해석될 수 있겠다. 보통 착하고 선한 사람을 일컬어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졌다고 말하곤 한다. 善자는 그러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금문에서는 目자 대신 言(말씀 언)자가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감 있는 대화를 나눈다는 의미였다. 이후 善자는 변화를 거듭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善(선)은 (1)착하고 올바르고 어질고 좋음 (2)정리(正理)를 따름. 양심이 있고 도덕을 갖춤 (3)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理想)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착하다 ②좋다 ③훌륭하다 ④잘하다 ⑤옳게 여기다 ⑥아끼다 ⑦친하다 ⑧사이좋다 ⑨착하고 정당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는 것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악할 악(惡)이다. 용례로는 착한 것과 악한 것을 선악(善惡), 선량한 마음이나 착한 마음을 선의(善意), 좋은 길로 올바르게 인도함을 선도(善道), 착하고 어진 벗을 선우(善友), 깨우치고 이끌어서 착하게 되도록 만듦을 선화(善化), 친절하게 잘 대접함을 선대(善待), 착하고 바른 덕행을 선덕(善德), 착한 마음을 선심(善心), 이웃 또는 이웃 나라와 사이 좋게 지냄을 선린(善隣), 잘 막아냄을 선방(善防), 착하고 어짐을 선량(善良), 좋은 방법으로 알맞게 처리함을 선처(善處), 착하고 어진 행실을 선행(善行),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잘못을 고쳐 좋게 함을 개선(改善), 가장 좋음이나 가장 적합함을 최선(最善), 자기 혼자만이 선으로 생각되는 바를 행하는 일을 독선(獨善), 본심에서가 아니라 겉으로만 하는 착한 일 또는 그것을 함을 위선(僞善), 착한 일을 여러 번 함을 적선(積善), 최선의 다음 정도를 차선(次善), 더할 수 없이 착함이나 지극히 착함을 지선(至善), 선의를 베풂을 자선(慈善), 서로 친하고 사이가 좋음을 친선(親善), 착하지 아니함을 불선(不善), 친구 사이에 옳은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함을 책선(責善), 나쁜 짓을 고쳐 착하게 됨을 천선(遷善),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어 착하게 됨을 개과천선(改過遷善),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다다익선(多多益善),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라는 선남선녀(善男善女), 착한 행실을 권장하고 악한 행실을 징계함을 권선징악(勸善懲惡), 잘한 뒤에 처리한다는 선후처치(善後處置) 등에 쓰인다.
▶️ 始(비로소 시)는 ❶형성문자로 乨(시)는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계집 녀(女; 여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台(태, 이, 시)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台(태, 이, 시)와 여자(女)의 뱃속에 아기가 생기는 일이 시초라는 데서 '비로소', '처음'을 뜻한다. 始(시)는 어머니 뱃속에 아이가 생기는 일, 또 한 집안의 시초, 시조(始祖), 나중에 '사물의 시작'이란 뜻으로도 쓴다. ❷회의문자로 始자는 '비로서'나 '일찍이', '옛날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始자는 女(여자 여)자와 台(별 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台자는 匕(비수 비)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것으로 수저를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女자가 더해진 始자는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이는 엄마가 주는 양분을 통해 삶을 시작하게 된다. 始자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아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始(시)는 ①비로소 ②바야흐로 ③먼저, 앞서서 ④일찍, 일찍부터 ⑤옛날에, 당초에 ⑥처음, 시초(始初) ⑦근본(根本), 근원(根源) ⑧시작(始作)하다 ⑨일으키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근본 본(本), 비롯할 창(創), 비롯할 조(肇),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끝 말(末), 마칠 종(終)이다. 용례로는 처음으로 함을 시작(始作), 한 족속의 맨 우두머리 조상을 시조(始祖), 시작한 처음 무렵을 시초(始初), 시작되는 처음을 시원(始原), 어떤 일을 맡아보기 시작함을 시무(始務), 일의 처음과 끝을 시말(始末), 직업 또는 학업 따위의 일을 시작함을 시업(始業),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함을 시동(始動), 일련의 동작 운동이 시작되는 점을 시점(始點), 어떤 일이 시작되는 때를 시기(始期), 맨 처음 출발 또는 발차함을 시발(始發), 처음으로 자연 그대로 사람의 손이 가해지지 않음을 원시(原始), 처음으로 시작함을 개시(開始), 천지가 비롯된 무렵이나 만물이 시작된 때를 태시(太始), 어떤 사상이나 학설 등을 처음 내세움을 창시(創始), 맨 처음을 본시(本始),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아무리 돌아도 처음 비롯한 곳이 없음을 무시(無始),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한다는 말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 같아서 변함없다는 말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다는 말을 종시일관(終始一貫), 한 해의 마지막 때와 새해의 첫머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연말연시(年末年始),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으로 불변의 진리나 윤회의 무한성을 이르는 말을 무시무종(無始無終), 살고 죽는 윤회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일컫는 말을 무시범부(無始凡夫),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천지와 선조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말을 보본반시(報本反始),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들음을 일컫는 말을 금시초문(今始初聞),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등에 쓰인다.
▶️ 終(마칠 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冬(동, 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冬(동, 종)과 바느질을 다 하고 나서 실(실사(糸; 실타래)部)을 매듭짓는다는 뜻이 합(合)하여 마치다를 뜻한다. 冬(동; 겨울)은 네 계절(季節)의 끝이므로 실 사(糸; 실타래)部를 덧붙여 감긴 실의 끝이 되고 널리 끝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終자는 ‘끝나다’나 ‘마치다’,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終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冬(겨울 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冬자는 새끼줄 양 끝에 매듭을 묶어 줄이 풀리지 않게 일을 마무리했다는 의미에서 ‘끝내다’나 ‘마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冬자가 ‘겨울’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자를 더한 終자가 ‘끝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終(종)은 끝,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①마치다 ②끝내다 ③사람이 죽다 ④다하다 ⑤이루어지다, 완성되다 ⑥채우다, 상당하다 ⑦끝, 마지막 ⑧사방 백 리의 땅 ⑨열두 해 ⑩윤(閏)달 ⑪항상(恒常), 늘 ⑫마침내, 결국(結局) ⑬비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마칠 졸(卒), 마칠 필(畢), 마칠 준(竣), 마칠 파(罷), 그칠 지(止), 끝 말(末), 끝 단(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비로소 시(始)이다. 용례로는 일을 마침을 종료(終了), 끝이나 끝판을 종말(終末), 끝을 냄을 종결(終結), 그 날의 업무를 마침을 종업(終業), 맡아보던 일을 끝냄을 종무(終務), 죽을 때까지를 종신(終身), 필경에 또는 마침내를 종내(終乃),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전쟁이 끝남을 종전(終戰), 한 때 매우 성하던 것이 주저앉아서 그침을 종식(終熄), 간행을 끝냄 또는 끝낸 그것을 종간(終刊), 마지막에 다다른 판국을 종국(終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사이를 종일(終日), 최종으로 도착함을 종착(終着), 끝을 냄이나 끝이 남을 종지(終止), 죽거나 없어져서 존재가 끝남을 종언(終焉), 결정이 내려짐을 종결(終決), 맨 끝이 되는 곳을 종점(終點),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를 임종(臨終), 단계나 차례에 있어서 맨 나중을 최종(最終), 오복의 하나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고종(考終),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종(年終), 끝을 완전히 맺음을 유종(有終), 나중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를 내종(乃終),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 때 또는 일의 마지막을 망종(亡終), 끝이 없음을 무종(無終), 좋지 않은 최후를 악종(惡終),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처음과 끝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음을 종시일관(終始一貫), 끝내 소식이 없음을 종무소식(終無消息),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사모의 정을 종천지모(終天之慕), 그 사람을 한평생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지 않는 일을 종신불치(終身不齒),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종신지질(終身之疾), 빚돈을 갚지 않음을 종불출급(終不出給), 끝내 방문하지 않음을 종불투족(終不投足), 어떤 일을 한번 끝내어 마쳤다가 다시 시작함을 종이부시(終而復始), 끝내 회개하지 않음을 종불회개(終不悔改),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을 종식지간(終食之間), 하루낮 동안 들이는 수고를 종일지역(終日之役), 영원히 계속되는 슬픔을 종천지통(終天之痛),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함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같아서 변함 없음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끝까지 굳게 참고 견딤을 견인지종(堅忍至終), 부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기를 원하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원걸종양(願乞終養), 우정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흉종극말(凶終隙末)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