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山上垂訓)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 위에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에 관하여 행한 설교이다.
山 : 메 산(山/0)
上 : 윗 상(一/2)
垂 : 드리울 수(土/5)
訓 : 가르칠 훈(言/3)
(유의어)
산상보훈((山上寶訓)
산상설교(山上說敎)
산상수훈(山上垂訓)은 기독교의 주요 경전인 신약 성경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다. 이 설교는 예수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산에 앉아 제자들과 군중 앞에서 선포한 것으로, 기독교 윤리의 근본적인 원리와 도덕적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주요 내용은 팔복(八福)으로 시작된다. 팔복은 ‘복이 있는 자’라고 선언하는 여덟 가지 가르침으로, 겸손, 의의 갈망, 자비, 마음의 청결, 화평을 이루는 자, 박해를 받는 자 등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대조되는 부분이 많아 기독교 신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계속해서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율법에 대한 예수의 해석, 즉 단순한 행동 규범을 넘어 마음의 상태와 동기를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살인에 대해서는 물리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분노와 증오의 마음가짐도 문제로 삼는다. 가늠에 대해서도 단순한 행위를 넘어서, 마음 속의 욕망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는 기도, 금식, 재물에 대한 가르침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진정한 마음가짐을 중요시하며,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은밀히 행하는 기도와 금식이 진정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산상수훈(山上垂訓)은 '황금률'로 알려진 가르침으로 끝난다. 이 가르침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내용으로, 인간 관계의 윤리를 요약한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이루며, 많은 신자들에게 도덕적 실천의 기준으로 여겨진다. 이 가르침은 시간과 문화의 제약을 넘어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다뤄지고 있다.
산상수훈(山上垂訓)
신약성경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산상설교(山上說敎)이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이란 산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설교를 가리키는 말로 때로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이런 설교를 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의 태도나 방법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산상설교(山上說敎) 또는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교활동 초기에 갈릴리(Galilee)의 작은 산 위에서 제자들과 군중에게 행한 설교로서, 성서(聖書) 중 성서로 일컬어지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인 주기도문(主祈禱文)도 이 산상수훈에서 연유한다.
그것은 8복(八福)에 대한 말씀과 신앙생활의 내적, 외적 실천규범을 담고 있는데 성경 전체, 나아가 세계 문화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가장 완벽한 수준의 윤리체계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히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산상수훈은 윤리적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약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초대 그리스교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그리스도 교도(敎徒)들의 윤리행위의 지침이 되고 있다.
그 내용은 유명한 팔복(八福)을 서두로 하여 사회적 의무, 자선행위, 기도, 금식, 이웃사랑 등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유대인들의 옛 율법 전통과는 잘 대조되어 나타난다.
끝으로 참된 종교적 신앙생활의 내면적 본질에 관한 가르침이 짤막한 비유로 제시되고 있다. 이 산상수훈은 중세 가톨릭에서는 수도생활의 전형적 규범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산의 위치에 관해서는 성서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전통적으로 갈릴리 호수 북쪽 타브가와 가파르나움(가버나움) 사이에 있는 한 야산이었다고 전해져 온다.
산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 아래 평원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傳承)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수훈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 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 신약(新約)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한다.
실로 예수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산상팔복(山上八福)
(마태복음 5:3~12)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산상팔복(山上八福)의 의미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려면 노숙자가 발생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고기잡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랑이라고 본다. 그래서 몇푼 도와주는 것 보다는 사회 정의를 행해주는 의인들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처럼 영복(永福)이 있는 것입니다.
참고할 것은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義人)이 될 뿐이지 마태복음 5장의 의인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의인이란 의롭든지 의를 행해야 의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산상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 만 의인됨의 기회를 국한하지 않으셨다. 누구든지이다. 누구든지 의를 행하는 사람이 산상팔복의 의인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어찌 의를 행하지도 않는 우리가 의인일까, 그냥 크리스챤일뿐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의인이란 아브라함이나 노아 그리고 욥처럼 생각이나 행동이 어느 한쪽으로 지우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흔히 의인을 태양에 비기는건 공의(公義)롭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순전(純全)하고 행실에 있어서도 다시 회개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도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토색(討索)하거나 불의(不義)하거나 간사(奸詐)하거나 음탕(淫蕩)하지도 않았다.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한탄하면서 살았다. 욥은 남에게 부당하게 뇌물을 받은 사실이 없는 사람이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불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려고 하지를 않자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초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의를 행하지 않는 불의한 크리스챤들을 초청 잔치에서 쫓아내는 경우도 있다.
불법자(不法者)라고 꾸짖기까지 한다. 나와 상관없는 자라고 말한다. 의를 행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의 상속자라고까지 한다. 즉 의인들이 하늘나라의 주인공들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이 의인이 아니라 의를 행하는 자가 의인이다.
한국에서도 의를 행하다가 희생된 사람이 의인이다. 옳은 일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누구든지 예비된 나라의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일지라도 의인들을 죽게 내버려둔 사람들은 결코 의인이 아니다. 그럼으로 성경을 엄청나게 인용을 하고 온갖 미사려구를 총동원해서 천사의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리고 백만명의 성도를 거느리고 있어도, 사랑이 없는 복음은 산상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할 수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마치 산상팔복의 의인들을 마치 직계 가족등으로 부터 받는 교회 못 다니게 하는 핍박 정도로 축소시키거나 말씀을 크리스챤만을 위한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왜곡시키는 거짓사도들이 많은데 이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할것이다.
말 그대로 의인들이란 의를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고작 교회에 십일조나 바치면서 자기들이 산상팔복의 의인들이라 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당신네들이 아브라함처럼, 노아처럼 욥처럼, 불의한 현실(세상)을 보고 심령(心靈)이 상한자들인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산상수훈(山上垂訓) 그 배경과 장면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이다.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 있는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있으며 언급하고 있다. 약 2,000년 전에 제공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연설이 현대인을 위한 교훈도 되는가?
현재도 사람들은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서로간의 행실에 지침이 되는 올바른 원칙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오늘날 하나님께 가납될 숭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분이 요구하시는 바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참된 지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다. 이러한 점들이 산상수훈에서 토론되고 있기 때문에 산상수훈은 그것이 제공된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 20세기에도 참신한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유명한 연설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조사해 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먼저 그 위대한 연설의 배경과 환경을 고려해 보자.
두 개의 조화되는 기록
산상 수훈은 두 복음서에 나온다. 마태 5-7장과 누가 6:20-49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 연설은 누가복음에 들어 있는 것보다 약 네배나 더 길다.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으면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귀절은 단지 다섯 귀절 반 밖에 안된다. 두 개의 기록이 평행적인 곳에서 종종 문체가 상당히 다름을 보게 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의 성서에 나오는 그 연설의 확실성을 의심해야 하는가?
누가복음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연설의 상당 부분을 생략한 사실 때문에 제기되는 이의에 관하여 'A. T. 로버트슨'은 '그리스도의 생애 연구생들을 위한 복음서의 조화'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러한 이의는 동일한 내용의 몇가지 큰 부분을 ‘누가’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거나 예수께서 다른 경우에 반복하셨던 사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비교: 마태 6:9-13과 누가 11:2-4; 마태 6:25-34과 누가 12:22-31) 예수께서는 모든 선생들이 그러하며 또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다른 경우에 자기 말을 종종 반복하셨다 ··· 전반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록한 '누가'가 특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그 연설 처음 부분을 많이 생략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마태 5:17-27; 6:1-18 참조)."
그 다음에 로버트슨은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더우기 설명의 여지가 있는 이러한 변경을 보충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 연설이 비슷하게 시작하여 비슷하게 끝나고, 각 부분이 전반적으로 비슷한 순서로 되어 있고 그 두 연설이 전반적으로 동일하며 종종 표현이 완전히 일치된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 연설이 행해진 시기와 장소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의 지상 봉사 중 어느 때에 이 연설을 하셨는가? 성경은 유대인의 명절(아마 기원 31년의 유월절일 것이다)을 지키시기 위하여 그분의 첫 번째 갈릴리 여행을 중단하셨음을 보고한다(요한 4:46-5:1).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갈릴리’로 다시 돌아오신 후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치셨다고 바리새인들로 부터 비난을 받으셨다(누가 6:6-11). 그 직후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누가 6:12, 13)."
그 후에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다(누가 6:17-20).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12 사도들을 택하신 직후에 하신 것이다. 그 때는 그의 3년 반 지상 봉사의 중간쯤인 기원 31년이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온 많은 백성이 그 연설을 들었지만 성경 기록은 예수께서 주로 자기 제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말씀하셨다고 지적하고 있다(마태 5:1, 2; 누가 6:17, 20).
예수께서 연설하신 장소는 어디였는가? 그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다. 어떤 사람들은 '다볼' 산과 같은 갈릴리의 높은 산일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볼산과 가버나움 사이의 '해틴’의 뿔'이라는 곳을 지적한다. 그러나 성서는 산상수훈을 하신 정확한 장소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하여 제임스 해스팅이 편집한 '성서 사전'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 연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전도 무대인 ‘갈릴리’에서 있었다(마태 423-25, 누가 617 참조). 마태 85, 누가 71에 그 장소가 가버나움 근처였다는 암시가 있다 할지라도 정확한 장소는 명백히 지적되어 있지 않다 ··· 마태 51, 81, 누가 612에 나오는 산은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알아낼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산상수훈을 하신 장소는 인구가 밀집되어 사는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수의 서쪽 지방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방식
당신은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방식은 세상적인 지성인들의 교수 방법과 다르다는 점을 유의하였는가? '해스팅'이 지은 그 동일한 참고 서적은 예수의 가르치는 방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이 많은 사람들을 회당에서, 도로에서, 해변에서 갈릴리 산허리에서 가르치실 때 그분은 자기의 종교적인 진리와 윤리적인 원칙을 구체적이고 사람들이 잘 아는 말로 설명하셨으며, 자기의 생활의 이상을 전통적인 개념 및 습관과 여러 가지 간단한 방법으로 대조하셨으며, 자기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직업, 경험, 그리고 환경에서 예를 끌어내어 가르치셨다. 까다로운 학문적인 냄새를 풍기거나 지성 편중적인 점이 전혀 없었다. ··· 그분은 이러한 내용들을 고대나 현대의 학교들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분은 자기의 지식을 보편적인 것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사상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진지하게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호소력이 있도록 통찰력을 가지고 소박하고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다."
산상수훈에 들어 있는 진리를 당신은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아마 주기도문 혹은 '천주경'과 같은 내용이나 '황금률'로 알려진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금언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마태 6:9-13; 7:12).
▶️ 山(메 산)은 ❶상형문자로 산의 봉우리가 뾰족뾰족하게 이어지는 모양을 본떴다. 옛 자형(字形)은 火(화; 불)와 닮아 옛 사람은 산과 불이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 듯하다. ❷상형문자로 山자는 ‘뫼’나 ‘산’, ‘무덤’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山자는 육지에 우뚝 솟은 3개의 봉우리를 그린 것으로 ‘산’을 형상화한 상형문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山자를 보면 가파른 능선이 그려져 있어서 한눈에도 이것이 산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山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산의 이름’이나 ‘산의 기세’나 ‘높다’와 같이 ‘산’에서 연상되는 여러 의미로 활용된다. 그래서 山(산)은 (1)둘레의 평평(平平)한 땅보다 우뚝하게 높이 솟아 있는 땅의 부분(部分). 메 (2)산소(山所) (3)사물이 많이 쌓여 겹치거나, 아주 크거나, 매우 많은 것에 비유한 말, 또는 그것 (4)산이나 들에 절로 나는 것을 뜻하는 말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메(산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뫼 ②산신(山神: 산신령), 산의 신(神) ③무덤, 분묘(墳墓) ④절, 사찰(寺刹) ⑤임금의 상(象) ⑥산처럼 움직이지 아니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큰 산 악(岳),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내 천(川), 강 강(江), 물 하(河), 바다 해(海), 물 수(水)이다. 용례로는 여러 산악이 잇달아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지대를 산맥(山脈), 들이 적고 산이 많은 지대를 산지(山地), 산과 물으로 자연의 산천을 일컫는 말을 산수(山水), 물건이나 일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임을 산적(山積), 산과 숲 또는 산에 있는 수풀을 산림(山林), 크고 작은 모든 산을 산악(山岳), 산 꼭대기를 산정(山頂), 산 위에 쌓은 성을 산성(山城), 무덤을 높이어 이르는 말을 산소(山所), 산 속에 있는 절을 산사(山寺), 산과 산 사이로 골짜기가 많은 산으로 된 땅을 산간(山間), 산의 생긴 형세나 모양을 산세(山勢), 산 속에 있는 마을을 산촌(山村), 산에 오름을 등산(登山), 강과 산으로 자연이나 나라의 영토를 강산(江山), 높고 큰 산으로 크고 많음을 가리키는 말을 태산(泰山), 높은 산을 고산(高山),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신령스러운 산을 영산(靈山), 연달아 잇닿은 많은 산을 군산(群山), 조상의 무덤이나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선산(先山), 산에 들어감을 입산(入山), 나무가 무성하여 푸른 산을 청산(靑山), 돌이나 바위가 없이 흙으로만 이루어진 산을 토산(土山), 유용한 광물을 캐어 내는 산을 광산(鑛山), 눈이 쌓인 산을 설산(雪山), 들 가까이에 있는 나지막한 산을 야산(野山), 산을 좋아함을 요산(樂山),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뜻으로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산류천석(山溜穿石), 산에서의 싸움과 물에서의 싸움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온갖 고난을 다 겪어 세상일에 경험이 많음을 산전수전(山戰水戰), 산빛이 곱고 강물이 맑다는 뜻으로 산수가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을 산자수명(山紫水明), 산과 바다의 산물을 다 갖추어 아주 잘 차린 진귀한 음식을 산해진미(山海珍味), 경치가 옛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음을 산천의구(山川依舊) 등에 쓰인다.
▶️ 上(윗 상)은 ❶지사문자로 丄(상)은 고자(古字)이다. 上(상)은 一(일)위에 짧은 一(일)을 쓰기도 하고, 또는 긴 一(일)위에 (ㆍ)을 쓰기도 하여 어떤 위치보다도 높은 곳을 나타낸다고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본디는 무엇엔가 얹은 물건의 모양을 나타내며 下(하)에 대한 上(상), 위에 얹다, 위쪽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❷지사문자로 上자는 ‘위’나 ‘앞’, ‘이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上자는 하늘을 뜻하기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上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二(두 이)자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다만 아랫부분은 오목하게 윗부분은 짧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다. 上자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위’나 ‘윗’을 뜻하고 있다. 다만 소전에서는 二자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윗부분의 획을 세운 형태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上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上(상)은 (1)상감(上監) (2)위나 상부 (3)등급이나 차례 따위를 상(上), 중(中), 하(下) 또는 상, 하로 나눌 경우의 맨 첫째 , 중(中), 하(下) (4)무엇에서 무엇을 하는데 있어서 따위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위, 윗 ②앞 ③첫째 ④옛날 ⑤이전 ⑥임금 ⑦군주(君主) ⑧사성의 일종 ⑨높다 ⑩올리다 ⑪드리다 ⑫진헌하다(임금께 예물을 바치다) ⑬오르다 ⑭탈것을 타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높을 항(亢), 높을 탁(卓), 높을 교(喬), 높을 준(埈), 높을 존(尊), 높을 아(峨), 높을 준(峻), 높을 숭(崇), 높을 외(嵬), 높을 요(嶢), 높을 륭(隆), 밝을 앙(昻), 귀할 귀(貴), 무거울 중(重), 높을 고(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래 하(下), 낮을 저(低), 낮을 비(卑)이다. 용례로는 위로 올라감을 상승(上昇), 토의할 안건을 회의에 내어놓음을 상정(上程), 윗 등급이나 계급을 상급(上級), 높은 지위나 윗자리를 상위(上位), 위와 아래를 상하(上下), 정부에 세금을 냄 또는 진상품을 윗사람 에게 받침을 상납(上納),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오름을 상륙(上陸), 물의 근원이 되는 곳의 부근을 상류(上流), 높은 하늘이나 어떤 지역에 수직되는 공중을 상공(上空), 윗자리의 관원을 상관(上官), 위쪽의 부분을 상부(上部),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손을 상객(上客), 퍽 오랜 옛날을 상고(上古), 아래쪽으로부터 위쪽으로 향함을 상향(上向), 가장 좋은 대책 또는 방책을 상책(上策), 보통 사람보다 아주 많은 나이 또는 그 사람을 (上壽), 가장 좋은 계교를 상계(上計), 지붕 위를 옥상(屋上), 맨 위나 정상을 최상(最上), 책상이나 식탁 등 탁자의 위를 탁상(卓上), 상품을 사들임을 매상(買上), 더할 수 없이 가장 높은 위를 지상(至上), 위치나 차례로 보아 어느 기준보다 위를 이상(以上), 끌어 올림이나 물건값을 올림을 인상(引上), 한 집안이나 한 민족의 옛 어른들을 조상(祖上), 위나 앞을 향해 발전함을 향상(向上), 산꼭대기나 그 이상 더 없는 것을 정상(頂上),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을 부상(浮上), 땅의 위나 이 세상을 지상(地上), 위에서는 비가 새고 아래에서는 습기가 차 오른다는 뜻으로 가난한 집을 비유하는 말을 상루하습(上漏下濕),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괸다는 뜻으로 몹시 꼬이는 일을 당하여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맞추어 나감을 상하탱석(上下撑石), 산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다는 뜻으로 당치 않은 데 가서 되지도 않는 것을 원한다는 상산구어(上山求魚), 윗사람의 명령에 아랫사람이 따름을 상명하복(上命下服), 위에 있는 하늘과 아래에 있는 땅으로 곧 천지를 상천하지(上天下地), 하늘 위와 하늘 아래라는 뜻으로 온 세상을 이르는 천상천하(天上天下) 등에 쓰인다.
▶️ 垂(드리울 수)는 ❶형성문자로 埀(수)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초목의 꽃이나 잎이 늘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드리우다'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垂자는 '늘어뜨리다'나 '드리우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垂자를 보면 식물의 가지와 잎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垂자는 식물의 잎이 늘어진 모습에서 '드리우다'나 늘어뜨리다'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후에 垂자에는 '기울다'나 '쏟다', '베풀다'와 같은 뜻이 파생되었는데,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늘어진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모습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垂(수)는 ①드리우다(한쪽이 위에 고정된 천이나 줄 따위가 아래로 늘어지다), 늘어뜨리다 ②기울다, 쏟다 ③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④전(傳)하다, 후세에 물려주다 ⑤가, 가장자리, 변두리 ⑥변방(邊方: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 국경지대 ⑦항아리 ⑧사람의 이름 ⑨거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똑바로 드리운 모양을 수직(垂直), 모범을 보임을 수범(垂範), 동자를 달리 이르는 말 수초(垂髫), 눈물을 흘리는 것을 수루(垂淚), 가지가 밑으로 축 늘어지게 자라는 버드나무를 수양(垂楊), 직선이나 평면에 수직으로 만나는 직선을 수선(垂線), 뒤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림 또는 그러한 머리를 수발(垂髮), 가르쳐 주거나 또는 가르침을 받음을 수교(垂敎), 고개를 푹 숙임을 수두(垂頭), 가엾게 생각하여 돌봄을 수련(垂憐), 창고의 곡식을 다 써서 거의 바닥이 드러남을 수경(垂罄),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움을 수년(垂年), 어떤 일이 거의 이루어짐을 수성(垂成),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낀다는 뜻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남 하는 대로 내버려 둠을 수공(垂拱), 아래로 꼿꼿하게 달려 드리워짐을 현수(懸垂), 교화를 두루 미치게 함을 편수(遍垂), 장래가 촉망되는 자식은 위험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일컫는 말을 수당지계(垂堂之戒), 발을 내리고 정사를 듣는다는 뜻으로 나이 어린 임금이 등극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왕을 도와서 정사를 돌봄을 이르는 말을 수렴청정(垂簾聽政), 밝고 평화스럽게 다스리는 길을 겸손히 생각함을 일컫는 말을 수공평장(垂拱平章), 자손에게 뒤를 이어 이루게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수성지업(垂成之業), 공을 세워 이름을 후세에 남김을 일컫는 말을 공명수죽백(功名垂竹帛), 떨어지는 빗방울이 돌을 뚫다라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적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면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우수천석(雨垂穿石), 마루 끝에는 앉지 않는다는 뜻으로 위험한 일을 가까이 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좌불수당(坐不垂堂) 등에 쓰인다.
▶️ 訓(가르칠 훈, 길 순)은 ❶형성문자로 训(훈)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川(천, 훈)으로 이루어졌다. 바른말(言)로 가르친다는 뜻을 합(合)하여 '가르치다'를 뜻한다. 순서 있게 가르치다, 알아듣게 이야기하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訓자는 ‘가르치다’나 ‘타이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訓자는 言(말씀 언)자와 川(내 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川자는 시냇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고 그 흐름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러니 訓자는 말(言)의 흐름(川)이 자연스럽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스럽다는 것은 ‘이치에 맞다’라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나 훈계라도 이치에 어긋나면 안 된다. 그래서 訓자는 마치 물이 흐르듯이 조리 있게 얘기한다는 의미에서 ‘가르치다’나 ‘타이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訓(훈, 순)은 (1)한자(漢字)의 뜻의 새김. 海를 바다 해라고 할 때의 바다를 가르킴.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가르치다 ②타이르다 ③이끌다 ④인도(引導)하다 ⑤새기다 ⑥주내다 ⑦가르침 ⑧훈계(訓戒) ⑨모범(模範) ⑩표준(標準) ⑪준칙(準則) 그리고 ⓐ길(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인도할 도(導), 가르칠 교(敎), 가르칠 회(誨),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닦을 수(修), 배울 학(學), 익힐 련(練), 익힐 습(習)이다. 용례로는 무예나 기술 등을 실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되풀이하여 연습하는 일을 훈련(訓鍊), 타일러서 경계함을 훈계(訓戒), 남이 하는 일 특히 바둑이나 장기 따위에서 좋은 수나 방법을 알려 줌을 훈수(訓手), 글방의 스승으로 교사의 낮은 말을 훈장(訓長), 알아듣도록 깨우치고 타이름을 훈고(訓告), 가르치어 훈계하는 말을 훈언(訓言), 한자의 뜻을 새기어 읽음을 훈독(訓讀), 교훈 또는 훈시하는 말을 훈화(訓話), 가르치어 보임을 훈시(訓示), 가르치어 타이름 또는 그런 말을 훈유(訓諭), 가르치고 타일러 착하게 함을 훈화(訓化), 글방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침을 훈학(訓學), 가르쳐 길러냄을 훈육(訓育), 어린아이나 처음 배우는 이에게 글을 가르침을 훈몽(訓蒙), 가르치고 깨우치고 훈계함을 교훈(敎訓), 집안 어른이 그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을 가훈(家訓), 학교의 이념을 간명하게 표현한 표어를 교훈(校訓), 학급의 교육 목표를 나타낸 가르침을 급훈(級訓), 엄격한 가르침이나 교훈을 고훈(苦訓), 한자의 우리말 새김을 자훈(字訓), 뜻글자의 음과 뜻을 음훈(音訓), 자혜로 가르침 또는 자비로운 가르침을 혜훈(惠訓), 뜰에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과정지훈(過庭之訓), 시와 예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교훈이라는 말을 시례지훈(詩禮之訓),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교훈을 이르는 말을 의방지훈(義方之訓),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 위에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에 관하여 행한 설교를 이르는 말을 산상수훈(山上垂訓), 세상을 깨우치고 사람들을 타이름을 이르는 말을 경세훈민(警世訓民), 자식을 위하여 황금을 남기느니보다 경서 한 권을 가르치는 것이 나음을 이르는 말을 일경지훈(一經之訓)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