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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무용지용(無用之用)

작성자장경식|작성시간18.01.14|조회수1,958 목록 댓글 0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없는 것의 쓸모라는 뜻으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無 : 없을 무(灬/8)
用 : 쓸 용(用/0)
之 : 어조사 지(丿/3)
用 : 쓸 용(用/0)

출전 : 장자(莊子) 인간세편(人間世)과 외물편(外物篇)


이 성어는 장자(莊子) 인간세편(人間世)과 외물편(外物篇)에 나오며, 또한 산목편(山木篇)에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게 되는 내용도 나온다.

장자(莊子) 인간세편(人間世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孔子)가 초(楚)나라에 갔을 때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接輿; 현인)가 공자의 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봉새여, 봉새여, 쇠잔해진 덕을 어찌하랴. 오는 세상은 기다릴 수 없고, 가는 세상은 따를 수 없어라.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은 공적을 이루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살아만 가느라. (...) 산의 나무는 제 스스로를 해치고 있다. 기름불의 기름은 제 스스로 태우고 있다. 계피는 먹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나무를 베게 된다. 옻은 칠로 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칼로 쪼갠다. 사람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만을 알고,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알지 못한다(山木自寇也, 膏火自煎也. 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는 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말했다. “자네 이야기는 실제에 있어서 아무 쓸데가 없네.”

장자가 말했다. “쓸모가 없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더불어 쓸데 있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네. 땅이 넓지만 사람이 서 있는 데는 발을 둘 곳만 있으면 되네. 하지만 발을 둘 곳만을 남기고 그 주위를 깊숙이 파 황천(黃泉)에 까지 이르게 한다면, 사람들은 그 밟고 있는 땅이 쓸데가 있다고 하겠는가?”

혜자가 말했다.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네.” 장자가 말했다. “그러기에 곧 ‘쓸데없는 것’의 ‘쓸데 있음’이 또한 분명한 것이네(然則无用之為用也亦明矣).”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장자가 어느 날 한 제자를 데리고 옛 친구를 찾아가느라 숲이 울창한 산을 지나다가 한 나무꾼을 만났다. 나무꾼은 잎과 가지가 무성한 나무 한 그루를 쳐다보더니 그냥 돌아서는 것이었다.

장자가 물었다. “나무를 베려다가 왜 그만두시오?” 나무꾼이 대답했다. “보아하니 쓸모가 없어서요(无所可用). 장자는 조금 가다가 혼잣말을 했다. “저 나무는 재목감이 되지 못함으로써 천수를 다할 수 있겠군 그래(此木以不材得終其天年).”

이윽고 친구 집에 도착하자, 몹시 반긴 친구는 장자를 대접하기 위해 하인더러 거위 한 마리를 잡으라고 시켰다. 그러자 하인이 물었다. “한 놈은 잘 울고 다른 놈은 울지 않습니다. 어떤 놈을 잡을까요?” 친구가 말했다. “그야 못 우는 놈을 잡아야겠지(殺不能鳴者).”

나중에 제자가 장자를 보고 물었다.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살아남았고, 이 댁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둘 중의 어느 입장에 서시겠습니까(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天年,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장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서고 싶네. 그러나 그 중간은 도(道)와 비슷하지만 실상은 도가 아니므로 화(禍)를 아주 모면할 수는 없지. 그렇지만 ‘자연의 도’에 입각해 여유를 가지면 괜찮아. 영예도 비방도 없고, 용이 되었다가 뱀이 될 수도 있으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한 군데 붙박이지도 않는다네. 오르락 내리락하며 남과 화목하게 지냄을 자기 도량으로 삼고, 만물의 근원인 도에 근거하여 만물을 부릴 뿐 아니라 그 만물에 사로잡히지 않으니 화를 입을 리가 없겠지(周將處乎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若夫乘道德而浮遊則不然. 无譽无訾, 一龍一蛇, 與時俱化, 而无肯專為. 一上一下, 以和為量, 浮遊乎萬物之祖, 物物而不物於物, 則胡可得而累邪).”

장자의 눈에는 보통 사람들이 쓸모 있다고 믿는 것은 하찮은 것이고, 반대로 ‘쓸모가 없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쓸모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용지물(無用之物)이란 아무데도 쓸모없는 물건을 말한다. 그 무용지물이 때로는 유용지물(有用之物)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상보다 쓸모 있는 것이 되는 것이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다.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반대쪽에 항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도가(道家)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장자(莊子)는 역설적으로 무용지용에 대해 말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있는데 무용지용의 의미와 부합한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장자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로, 쓸모가 없는 것이 도리어 크게 쓰여진다는 뜻이다. 무용지물과는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혜시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 있는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똥나무라 부르오. 그 큰 줄기에는 혹이 많이 붙어 있어서 먹줄을 칠 수도 없고, 그 작은 가지들은 뒤틀려 있어서 자를 댈 수도 없소.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도 거들떠 보지도 않소. 지금 당신의 말도 크기만 했지 쓸 곳은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상대도 안 할 것이오."

장자가 말하였다. "지금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 데가 없다고 근심하고 있소. 어찌 아무것도 없는 고장, 광막한 들에다 그것을 심어놓고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갔다하거나 그 아래 어슬렁거리다가 낮잠을 자지 않소? 그 나무는 도끼에 일찍 찍히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그것을 해치지 않을 것이오. 쓸 데가 없다고 하여 어찌 마음의 괴로움이 된단 말이오?"

쓸 데가 없다는 무용(無用)이야말로 관점을 좀 달리 생각하면 크게 쓰일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장자의 생각은 다음의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소(支離疏)라는 사람은 턱이 배꼽 아래 감추어지고, 어깨가 머리보다 높으며, 머리꼬리가 하늘로 치솟아 있고, 오장육부는 윗쪽에 붙어 있고, 두 다리가 옆구리에 와 있었다. 그러나 바느질을 하여 입에 풀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키질을 하여 쌀을 불려 열 식구를 먹이기에 충분하였다.

위에서 군인들을 징집하더라도 지리는 팔을 휘저으며 그곳을 노닐 수 있었다. 큰 부역이 있다 하더라도 지리는 언제나 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에 끌려가지 않았다. 위에서 불구자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줄 적에는 세 종의 곡식과 열 다발의 땔감을 받았다. 그의 형체가 불완전한 사람은 그래도 그 자신을 충분히 보양할 수 있고, 그가 타고난 목숨대로 다 살 수 있는 것이다.

온 몸이 뒤틀릴 정도로 심한 곱추를 보면 보통 사람들은 '저런 놈이 사람 구실이나 하고 살까' 하고 혀를 끌끌 차거나, 아니면 동정 내지는 연민의 정을 느끼기 마련인데 장자는 여기서 지리소라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몸이 심한 불구여서야말로 부역에 끌려가지 않고, 정부에서 구휼(救恤)을 할 때 이득을 보는 등 언뜻 보면 쓸모 없어 보이는 존재가 됨으로써 쓸모없는 것도 관점을 바꾸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장자에는 특히 이런 류의 우화가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장자의 이런 일화들을 '남들 눈 밖에 나는 짓 하지 말고 튀지 않게 살아야 장생한다'는 식의 처세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장자라는 책 자체가 워낙 해석의 방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의 통찰

쓸모 없음의 지혜

1. 자르지 않는 나무 이야기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집을 짓기에도, 배를 깎기에도, 어떤 용도로도 적합하지 않았다. 목수는 그것을 보고 '쓸모없다'며 그냥 지나친다. 사람들이 묻자, 그는 말한다. "이 나무는 결이 뒤틀리고, 나뭇결 속에 빈틈이 많아 아무 데도 쓸 수가 없어."

하지만 이 나무는 아무에게도 잘리지 않았기에, 지금껏 살아남아 숲을 지키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쓰이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해를 입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쓸모 없음'이 오히려 '살아남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장자의 시선을 드러낸다.

2. 장자의 원문 해석 – 無用之用
장자는 '소요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大樹臃腫而不中繩墨.
큰 나무는 덩치만 크고 뒤틀려 있어서, 목수가 쓰는 먹줄이나 자 기준에도 맞지 않는다.
立之塗, 匠者不顧.
길가에 서 있어도 목수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今子之言.
지금 그대가 한 말도 마찬가지다.
大而無用, 眾所同去也.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버리려 하는 것이다.
終身無所用而不害者, 山木也.
그러나 평생 어디에도 쓰이지 않기에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산 속의 나무다.

여기서 '먹줄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은 나무가 기준에 맞춰 재단되기 어려울 만큼 뒤틀려 있다는 뜻이다. 즉, 목수가 다듬거나 가공해서 어떤 용도로도 사용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또한 '지금 그대가 말하는 것'이란, 앞서 장자와 대화하던 혜자(惠子)의 말을 가리킨다. 혜자는 장자의 비유를 듣고 '쓸모 없다'고 평가했는데, 장자는 그 시각 자체가 통념적인 '유용함'의 기준에 갇혀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유용함의 기준으로 볼 때 '무용'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살아남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쓸모없기 때문에 베이지 않고, 그 베이지 않음이 곧 오래 존재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고 말한다.

3. 쓰이지 않기에 존재하는 것
우리는 흔히 '어디에 쓰일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사물이나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 그러나 장자는 묻는다. "정말 모든 존재가 누군가에게 쓰이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쓸모없다는 이유로 배제된 것들은 종종 오히려 더 오래, 더 자유롭게 존재한다. 잘려 나가지 않은 나무처럼,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받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쓸모 없음'은 오히려 삶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쓸모'일 수 있다.

4. 무용(無用)의 역설
장자는 쓸모 없음의 지혜를 강조한다. 그는 말한다. "크고 넓은 나무는 그저 그늘을 만들 뿐이지만, 그래서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작은 그릇은 쓰이지만 쉽게 깨지고, 예리한 칼은 결국 무뎌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쓰이지 않는 것은 손상되지 않는다. '무용(無用)'은 해석에 따라 ‘자유’로 바뀔 수 있는 힘을 지닌다.

5. 나만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
장자는 사회의 통념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좋은 직업, 높은 연봉, 화려한 스펙…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쓸모 있는 삶'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답게 존재하는 삶'은 희미해진다.

어쩌면 우리는 자꾸만 '잘리기 위해', '쓰이기 위해' 스스로를 깎고 다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서 점점 본래의 형태를 잃어간다. 장자는 말한다. "쓰이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고, 세상에 기여하지 않는 것에도 존재 이유가 있다"고.

6. 정리하며 – 무용지용(無用之用)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쓸모없음 속의 쓸모'다. 지금 당장 누구에게도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무용함 덕분에 더 오래 살아남고, 더 넓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신을 억지로 어떤 틀에 맞추지 말자. 누구에게도 쓰이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충분한 존재일 수 있다. 세상의 가치에 자르지 않고 남아 있는 나무처럼, 우리 역시 ‘있는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변증법

장자 내편 4장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세속적인 사람이나 사물은 다 쓸모 있음으로써 요절한다(世俗人物 皆以有用傷夭其死)."

목수 장석이 제자들과 어떤 사당 앞을 지나다가 엄청나게 큰 상수리나무를 발견하였다. 제자들은 좋은 재목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스승을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살아 남아서 저렇게 큰 것이다"라고 스승은 대답한다.

세속적인 쓰임이 있는 사람이나 물건은 세속적인 수탈로 인하여 요절하게 되지만, 상수리나무처럼 세속적인 쓸모가 없는 나무는 오래도록 살아남아 사당을 지키는 큰 쓰임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수필미학'과 '선수필'에 실린 이규석의 '쓸모없음의 쓸모'에서는 장자가 말하는 '쓸모'의 의미와 함께 유용성과 무용성의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쓰임의 유무는 수용 주체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자연의 도리' 또는 '세속의 도리'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결정될 수 있다.

잡초는 세속의 도리에 따르면 무용이지만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유용하다는 것이 작가의 해석이다. 이것이 장자의 해석에 의하면 '큰 쓰임'이다. 잡초는 생명력이 강하고 고약하기에 세속의 도리에 따라 천대받는다. 작가는 잡초를 제거하려고 하지만 그 생명력 때문에 당해낼 수 없어서 난감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도리가 지켜주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잡초는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지구 자연을 지탱하는 것이다. 작가는 잡초의 쓸모없음이란 모순에서 상상을 통하여 쓸모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쓸모없음과 쓸모 있음의 상호보완으로 삶의 원리인 '더불어 살기'라는 변증법적 합일에 이르게 된다. 상생(相生)이란 '큰 쓰임'에 대한 깨달음이다.

작가가 짧은 수필 한 편에서 삶의 원리로 상상해 나가는 전략이 매우 독창적이다. '쓸모없음과 쓸모 있음'이라는 자연현상과의 상관성을 인류사회의 상생원리로 개념화하여 독자에게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구성의 참신함이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나만 잘났다고 거들먹 거릴것도 없고,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의 힘으로는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찾아낸 것이다.

자연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축복처럼 햇볕을 쏟아 내리고 때맞춰 단비를 내려준다. 그러니 쓸모가 없든 있든 다 같은 '풀'이며 때와 형편에 맞추어 상호보완하며 상생하는 것이 자연의 원리이고 삶의 원리이다.

이 작품은 육화된 노장사상을 현대 인류사회에 맞게 해석하여 변증법적 상상으로 인류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찾아낸 작품이라 평가할 만하다.

쓸모없음의 쓸모 / 이규석

잡초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나는 주말마다 고향으로 달려간다.
봄이 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잡초의 계절인가, 이를 증명하려는 듯 대문을 열자마자 기세등등한 잡초들이 안기듯 달려든다. 하지만 텃밭 채소들을 비실거리게 만든 잡초가 여간 밉살스러운 게 아니다.

장맛비 잠시 그친 사이 겉 자란 풀밭으로 뛰쳐나가 선무당 칼춤 추듯 낫을 휘두르자 목이 날아가고 허리가 잘린 잡초들이 초록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개선장군처럼 돌아서지만, 잡초들은 금세 되살아난다. 이긴 것이 아니었다. 끝난 것도 아니었다. 뽑고 또 뽑고, 자르고 또 잘라도 끝없이 살아나는 잡초는 기어이 내 마음조차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망초, 명아주, 엉겅퀴, 쑥부쟁이, 냉이, 억새, 강아지풀, 며느리밑씻개 등 우리의 산과 들, 논밭에는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이 칠백 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도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었다. 사전을 뒤졌더니, 대수롭지 않은 풀이라서 잡초라 부른다고 했다. 감자밭에 난 상추도 잡초라고 괄시당하는 판에 어찌 제 이름이 호명되기를 바라랴.

잡초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역적 귀양 보내지듯 텃밭에서 멀리 내쫓기고 만다. 넝쿨로 뻗어가면서 나무의 숨통을 조이는 고약한 환선덩굴이야 미움을 받아도 싸지만, 일찍 봄을 알려주기 위해 맨몸으로 겨울을 견뎌낸 냉이는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꽃보다 더 상큼한 표정으로 벌 나비를 부르는 개망초나 귀엽고 깜찍한 애기똥풀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비록 하찮은 풀이라도 나름대로 사명이 있고 저마다 개성 넘치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무심한 사람들은 그냥 잡초라고 불러 재낀다. 어느 시인은 '내 이름 모른다고/ 잡초, 잡초라고 하지 마라// 내가 당신 이름 모른다고/ 잡것이라 하더냐'(정진용의 풀)고 절규했다.

그리 무시당하고 홀대 받으면서도 잡초들은 마른 땅 젖은 땅 가리지 않고 잘도 자란다. 도대체 누가 잡초의 씨앗을 이리도 야무지게 뿌려대며 어떻게 돌보았기에 저리도 씩씩하게 자랄까. 질기지 않으면 잡초가 될 수 없었던지, 바랭이는 오체투지 하듯 전진하면서 마디마다 사방으로 뿌리를 내린다. 잠시 한눈을 팔면 뜨거운 너럭바위도 타고 오른다.

뭍사람들의 발걸음에 밟히고 수레바퀴에 깔려 시퍼렇게 멍이 든 질경이는 다른 풀들과의 다툼이 싫어서 아예 길바닥에 나와 산다고 했다. 배고픈 시절에 구황식품 노릇을 톡톡히 해왔던 쇠비름은 뿌리째 뽑혀 열흘을 뙤약볕 아래 내던져졌다가도 소낙비 한줄기에 되살아날 만큼 끈질기다. 내가 그들 근성의 반의반만이라도 지녔더라면 우리 집 텃밭은 이미 낙원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채소에 물을 주고 있는 농부에게 "왜 채소는 정성껏 보살피는데도 시들하고 잡초는 돌보지 않아도 왕성하게 잘 자라는가?"고 물었더니, "잡초는 대지의 여신에게 친자식이고, 사람이 심은 채소는 의붓자식이기 때문이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이솝우화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래서 부모 잘 만난 잡초는 떵떵거리며 살아가는가. 하지만 햇볕과 물, 바람이 어찌 그들에게만 부모 노릇을 하였을까 싶다.

나만 잘 났다고 거들먹거릴 일이 못 된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사람도 제 혼자의 힘으로는 쌀 한 톨 만들 수 없고, 대추 한 알도 붉게 익힐 수가 없다. 그런데도 햇볕은 잘난 사람에게도 못난 사람에게도 축복처럼 쏟아지고, 비는 선한 사람의 논에도 악한 사람의 논에도 똑같이 단비로 내린다.

모든 생명체가 싱싱하게 살아가라고 때맞춰 바람까지 설렁설렁 불어댄다. 얼마나 너그러운 하늘인가. 그런데 나는 내 안의 자그마한 악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잡초를 뿌리 뽑지 못해 안달이다. 어쩌면 초지일관 제 뜻대로 살아가는 잡초가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산불이 난 산은 언제까지나 민둥산이 아니었다. 불난 자리에는 항상 잡초들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이어서 관목, 교목의 순으로 나무들이 들어서고 해를 거듭하며 산은 다시 숲을 이룬다. 실처럼 가는 뿌리로 지구를 움켜쥔 잡초들이 토양의 유실을 막아가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유용하고 무엇이 무용한 것인가? 민들레는 꽃만 고와서 살아남은 것은 아닐 것이다. 가시투성이인 엉겅퀴는 여린 순을 나물로 내주고 뿌리는 한약재로 귀히 쓰인다. 청려장이라는 명품 지팡이는 흔해 빠진 잡초, 명아주로 만들어진단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유익하지 않은 잡초가 없다.

정신없이 풀을 뽑다가 얄궂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누군가가 세상의 풀을 모조리 뽑아버린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땅덩어리는 양철지붕처럼 뜨거워질 테고, 수온이 높아진 바다는 허구한 날 크고 작은 태풍을 몰고 다닐 것이다. 이상고온으로 이미 지구 한쪽에선 대형 산불이 이어지고, 반대쪽에선 폭우가 그치지를 않아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바이러스의 창궐로 코로나 같은 괴질이 또 나타날까 두렵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벌이 사라지면 과일도 함께 사라질 텐데 그러면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나. 간 큰 가해자였다가 어느새 대책 없는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인간의 탐욕과 오만은 어디까지일까, TV에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도 이젠 풀과 그만 다투고 더불어 살기로 했다. 텃밭에는 자갈밭에서도 잘 산다는 메밀 씨앗을 뿌렸다. 연둣빛 여린 싹들은 힘겹게 고개를 내밀었지만 포기마다 핀 꽃들이 봉평의 메밀밭처럼 울안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담장 아래는 잡초만큼 번식력이 강하다는 맥문동을 구해다 심었다.

아름드리 왕버들 아래 보랏빛 꽃바다를 이룬 성주의 '성 밖 숲' 처럼, 우리 집에도 담장 따라 꽃물결이 일렁이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호미질 했다. 봄 향기 으뜸인 취나물도 꾹꾹 눌러 심었다. 한 해만 지나도 배 이상 번진다는데 어떻게 제초제를 뿌려댈 것인가, 어림없는 일, 더 굳세게 자라라고 퇴비를 듬뿍 뿌려주었다.

멀리서 바라본 초록은 평화였으나 가까이 다가가서 본 수풀은 전쟁이었다. 잡초는 비록 거칠게 살지만, 짐승들에게는 먹이가 되고 벌레들에게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나는 언제 한 번이라도 유익하였던가? 이제부터라도 지구를 꽉 잡고 있는 잡초에게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배워야겠다.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

쓸모 있는 나무와 쓸모 없는 나무
쓸모 있는 나무는 쓰임새 때문에 쉽게 잘린다. 쓸모 있는 나무는 사람에 비유하면 잘나가는 나무다. 나무는 쓰임새가 클수록 불안하고 위태하다.

쓰임새가 많은 나무보다 쓰임새 적은 나무가 훨씬 많다. 상수리나무는 쓰임새가 없는 편이다. 배를 만들면 쉽게 가라앉고 관을 짜면 빨리 썩는다. 그릇을 만들면 빨리 닳고 진액 때문에 문짝으로도 못쓴다. 기둥을 세우면 좀이 슬어 빨리 썩는다. 상수리나무는 잘 써야 사당을 지키는데 쓰인다. 사당을 지키는 일도 중요한 쓰임새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장자(莊子)와 혜시(惠施)의 대화에서 비롯됐다. 무용지용은 쓸모없는 것의 쓰임이란 의미다. 혜시가 장자에게 불평하듯이 얘기한다. "우리 집에 큰 가죽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몸체가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하다. 그러니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다. 먹줄을 튀길 수도 없고, 가지가 꼬불꼬불하다. 재목감으로 전혀 쓸모 없으니 있으나 마나한 나무다."

장자가 혜시에게 제안하며 질문한다. "아무것도 없는 마을에 그 나무를 심으면 어떠한가? 아니면 아주 넓은 들판에 심어 두게. 나무 밑에서 한가로이 드러누워 잠자면 좋지 않은가? 나무는 도끼에 찍힐 일도 없을 걸세. 쓸모 없다는 게 어찌 근심거리가 될 수 있겠는가?"

쓸모 있는 사람만 필요한 사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쓰임새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나무는 떡잎을 보면 안다고 했다. 유치원 입학 전에 성패가 정해진다고 한다. 쓰임새 있는 자리가 적으니 경쟁이 치열하다. 쓰임새만 키우며 사는 인생이다.

명문대 진학과 사회적 성공을 최고로 여긴다. 평범한 가정에서 성공한 아이로 키우는 게 쉽지 않다. 개인의 노력보다 중요한 게 따로 있다. 집안의 노력과 가족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명문대 진학에는 엄마의 정보력이 가장 기본이다. 부모와 조부모의 경제력까지 동원해야 가능하다. 한 사람의 배경이 그 사람의 미래까지 결정한다. 명문대 진학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다. 명문대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정해진 트랙을 달려야 한다. 그 트랙을 달리려면 충분한 배경이 필요하다.

사회적 성공은 이미 정해졌다고 믿는다. 성공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정해진 트랙을 연대하여 독점하며 성공을 대물림한다. 그 때부터 탄탄대로를 내달리며 호사스런 삶을 누린다. 성공가도를 달리다 장애를 만나면 혼자 일어서지 못한다. 성공가도를 질주하다 이탈하면 회복하지 못한다.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달리기 때문이다. 성공의 정점에는 언제나 천길 절벽이 기다린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성공한 사람의 특징은 진중하고 빠르다. 경험까지 자산으로 축적하며 재투자한다.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으며 다시 일어서서 달린다. 성공을 예약해 둔 사람처럼 많은 것을 이룬다. 많은 것을 이루는 대신에 자기를 잃어버릴 수 있다. 누군가 미리 준비한 길을 달리는 아바타를 연상하게 한다. 성공에 취하면 자기 삶을 놓칠 수 있다.

모두가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한다. 쓰임새가 클수록 성공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유용지용을 이루려고 자신의 전부를 불태워 버린다. 그래서 유용지용의 삶은 오래가지 못한다. 쓰임새가 다한 사람이나 사물은 쉽게 폐기되기 마련이다.

스스로 쓸모 없다고 생각하면 속수무책이다. 쓸모 없는 것의 쓰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퇴사나 퇴직을 쓸모 없음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희망과 열정은 모두 사라진다. 쓸모 없는 곳에는 실의와 좌절과 불평이 가득하다.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삶은 하루도 한없이 길다. 쓸모 없는 하루가 끝나기를 바라지만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쓸모 없다는 생각 때문에 쓸모 있는 역량이 한없이 줄어든다.

유용지용과 무용지용 중에 하나만 선택하려 한다.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보이는 것만 선택하려 한다. 보거나 보여 지는 것만 중요하게 여긴다.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외면해 버린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중구조로 생각하며 구분하려 한다. 한편에 서있기를 좋아하는 대신에 다른 편을 밀어내려 한다.

무용지용, 쓸모 없음의 쓸모
인생은 이리저리 굽이치며 돌아가는 강물과 흡사하다. 어느 한 순간도 전부가 될 수 없다. 어느 한 순간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르막 끝에는 절벽이 있지만 내리막길에는 세상이 훤히 보인다. 절벽에서 떨어져도 감당하면 그만이다. 내리막은 세상과 자신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존재를 크게 하는데 오르막과 내리막은 차이가 없다. 무용지용을 감당하면 유용지용은 보너스와 같다. 유용지용을 고집하면 무용지용은 의미 없는 삶이다. 무용과 유용을 모두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의 일화는 유명하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고생하며 살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태어날 때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항상 운동을 해야 했다. 날마다 운동을 한 덕분에 한평생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배워야 했다.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으며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 쓰임새를 압도하는 가치를 찾아야 한다. 길이 없으면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하는 일 없이 바쁘기만 함을 무사분주(無事奔走), 한울님은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슨 일에나 함부로 다 참여함을 무사불참(無事不參),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물러서 더 뜻 있는 일을 망각한다는 무사안일(無事安逸), 아무 탈없이 편안함을 무사태평(無事泰平), 재미나 취미나 없고 메마르다는 무미건조(無味乾燥) 등에 쓰인다.

▶️ 用(쓸 용)은 ❶상형문자로 감옥이나 집 따위를 둘러싸는 나무 울타리의 모양 같으나 卜(복; 점)과 中(중; 맞다)을 합(合)한 모양이니 화살을 그릇에 넣는 모습이니 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물건을 속에 넣는다는 뜻에서 꿰뚫고 나가다, 물건을 쓰다, 일이 진행되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用자는 ‘쓰다’나 ‘부리다’, ‘일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用자는 주술 도구를 그린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걸개가 있는 ‘종’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用자의 쓰임을 보면 이것은 나무로 만든 통을 그린 것이다. 用자가 ‘나무통’을 뜻하다가 후에 ‘쓰다’라는 뜻으로 전용되면서 여기에 木(나무 목)자를 결합한 桶(통 통)자가 ‘나무통’이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用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다만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나무통’이라는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用(용)은 (1)용돈 (2)비용(費用) (3)어떤 명사(名詞) 뒤에 붙어서 무엇에 쓰이거나 또는 쓰이는 물건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쓰다 ②부리다, 사역하다 ③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시행하다 ④일하다 ⑤등용하다 ⑥다스리다 ⑦들어주다 ⑧하다, 행하다 ⑨작용(作用), 능력(能力) ⑩용도(用度), 쓸데 ⑪방비(防備), 준비(準備) ⑫재물(財物), 재산(財産), 밑천 ⑬효용(效用) ⑭씀씀이, 비용(費用) ⑮그릇 ⑯도구(道具), 연장(어떠한 일을 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 ⑰써(=以)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버릴 사(捨)이다. 용례로는 볼 일을 용건(用件) 또는 용무(用務), 무엇을 하거나 만드는데 쓰는 제구를 용구(用具), 기구를 사용함을 용기(用器), 쓰고 있는 예를 용례(用例), 용도에 따라 나눔을 용별(用別), 사람을 씀을 용인(用人), 쓰는 물품을 용품(用品),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일을 용역(用役), 어떤 일에 쓰기 위한 토지를 용지(用地), 사용하는 방법을 용법(用法), 사용하는 말을 용어(用語), 돈이나 물품 따위의 쓸 곳을 용처(用處), 쓰이는 곳을 용도(用途), 대변이나 소변을 봄을 용변(用便),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다 함께 사용함을 용장용단(用長用短), 돈을 마치 물 쓰듯이 마구 씀을 용전여수(用錢如水), 대롱을 통해 하늘을 살핀다는 용관규천(用管窺天), 마음의 준비가 두루 미쳐 빈틈이 없음을 용의주도(用意周到), 일자리를 얻었을 때에는 나가서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고 버리면 물러나 몸을 숨긴다는 용행사장(用行舍藏)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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