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겸 신도비(韓百謙神道碑) 정경세(鄭經世)
1644년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가마도에 한백겸(韓百謙, 1552∼1615년)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정경세(鄭經世)가 글을 짓고 오준(吳竣)이 글을 썼으며, 김광욱(金光煜)이 전을 하였다.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판관 효윤(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민순(閔純)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79년 생원시에 합격였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 등에 제수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임진왜란 때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적군에게 아부해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역학(易學)에 해박해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주역전의 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전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서 사인(士人) 사중(思仲)의 딸이며, 후부인은 함창 김씨(咸昌金氏)로서 병절교위(秉節校尉) 정준(廷俊)의 딸이다.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호조참의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 구암선생 한공 신도비명 병서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 성균관사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세자좌부빈객 정경세(鄭經世)는 글을 짓고, 가의대부 한성부좌윤 겸 동지 의금부사 세자좌부빈객 오준(吳竣)은 글을 썼으며, 가선대부 행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세자우부빈객 김광욱(金光煜)은 전액을 하다.
만력(萬曆) 43년 을묘년(1615, 광해군7) 가을 7월에 구암(久庵) 한공(韓公)이 한성(漢城)의 서쪽 교외에 있는 물이촌(勿移村)의 사제(私第)에서 고종(考終)하였다. 부음이 나가자 어진 공경(公卿)과 대부(大夫)들이 똑같은 말로 애통해하였고, 경학자와 선비들이 덕(德)을 상고해 보고서 상심하였다. 또한 평소에 호오(好惡)를 달리하여 서로 잘 지내지 못하던 자들이나 어리석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서리(胥吏)의 무리들조차도 모두 혀를 끌끌 차면서 탄식하고 애석해하면서 ‘착한 분이 돌아가셨다.’ 하였으며, 공이 다스렸던 군읍(郡邑)의 부로(父老)와 사자(士子)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전(奠)을 올리고 부의(賻儀)를 하면서 통곡하기를 아주 슬프게 하였다. 이에 군자들이 말하기를,
“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대접을 받는 것은 대개 도(道)가 있는 것이다. 바탕이 단정하면서도 기운이 화평하였으며, 말투는 따사로우면서 용모는 공손하였다. 그 자상스러움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그 정성스러움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마음을 잡음이 공평하고 관대함은 이른바 한 사람에 대해서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데에 거의 가까웠다. 그러니 공이 죽은 데 대해 슬퍼하고 공이 없어진 데 대해 잊지 못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아, 이것은 공에 대해 잘 살펴본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공이 간직하고 있었던 바는 또 이 말로는 다 말할 수 없는 바가 있다.
공의 휘는 백겸(百謙)이고 자는 명길(鳴吉)이다. 그 선대(先代)는 청주인(淸州人)으로, 이름이 란(蘭)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고려가 흥성하던 초기에 삼한벽상 공신(三韓壁上功臣)에 훈봉(勳封)되었고, 관작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직위가 태위(太尉)에 이르렀다. 그 자손들은 대대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되었는바, 공업(功業)으로 이 세상에 이름이 난 분도 있고, 덕행(德行)으로 이름이 난 분도 있어 《고려사(高麗史)》에 이름이 서로 이어져 있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상경(尙敬)이라는 분이 있어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책훈(策勳)되었고, 관직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의정공이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를 지낸 혜(惠)를 낳았고, 관찰사공이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계희(繼禧)를 낳았고, 좌찬성공이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지낸 휘 사무(士武)란 분을 낳았다. 이분이 공의 고조가 되는데,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가 승원(承元)으로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지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고는 휘가 여필(汝弼)로 문천 군수(文川郡守)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가 효윤(孝胤)인데, 예로써 몸을 다스려 한때 중시되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졸할 때의 관직은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신씨(申氏)인데, 고려조 때의 충신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며, 예빈시 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17, 8세 때 개연히 도(道)를 추구할 뜻을 품었다. 이에 습정(習靜) 민순(閔純)이 은거해 살며 바른 행실을 하면서 옛 도(道)로 후진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는 그 문하에 나아가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민공이 공과 더불어 말을 나눠 보고는 깊이 사랑하였으며, 이에 고해 주기를, “자네는 주 부자(朱夫子)의 설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몸을 닦는 대법(大法)은 《소학(小學)》 책 속에 갖추어져 있고 정미한 의리는 《근사록(近思錄)》에 상세히 나오는데, 성인이 되는 근본 바탕은 이 두 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선비가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것으로 들어가는 첫머리를 삼아야 한다.” 하였다. 공은 그 말을 듣고 척연히 감동되어 드디어 민공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는데, 학문의 공정(工程)과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얻어 들었다. 이에 비록 일찍이 여러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거자(擧子)가 되어 상사(上舍)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으로 중하게 여기는 바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으며, 상복을 벗은 지 겨우 한 해가 지나서 또다시 할머니 상을 당하여 수중(受重)하였다. 여러 해에 걸쳐서 상을 치르느라 몸이 상하였으나 외부의 유혹을 끊어 없애고 뜻을 오로지하여 궁리 격치(窮理格致)의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먼저 《계몽(啓蒙)》 한 책을 취해 엎드려서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깊이 침잠하고 완미하면서 밤을 낮 삼아 공부하였다. 이에 상수(象數)의 근원과 변화(變化)의 오묘함에 대해 대개 마음으로 융회관통(融會貫通)해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는 맛을 얻었다. 이로부터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는 제쳐 두고 문을 닫아걸고 휘장을 내린 다음, 의리(義理)를 말해 놓은 서책에 크게 힘을 써, 위로는 육경(六經),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요지에서부터 아래로는 염락관건(濂洛關建)의 말에 이르기까지 점차 젖어 들고 자세하게 궁구하며 반복해서 참고하였다. 이에 연구의 정밀함과 식견의 통투(通透)함은 이미 세속의 학자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명성을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면서 항상 감추어 숨기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학문에 독실한 선비라는 것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병술년(1586, 선조19)에 어떤 사람의 천거로 인해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나갔으며, 또다시 얼마 뒤에는 선릉 참봉(宣陵參奉)으로 바뀌었는데, 병으로 인해 출사하지 않았다. 기축년(1589)에 역옥(逆獄)이 일어나 역옥을 담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넣기에 힘써, 한때의 사대부들이 대부분 무함(誣陷)을 받았는데, 공은 호남(湖南)에 있을 적에 이진길(李震吉)과 서로 알고 지냈다는 죄목으로 연좌되어 고문을 받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유배되었다. - 2자 원문 빠짐 -
임진년(1592, 선조25)에 은택을 받아 석방되었으나, 길이 막혀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어떤 변경 백성이 난을 선동해 왜적들에게 호응하였으므로 관군(官軍)이 궤멸되어 흩어졌는데, 아무도 감히 그 자의 죄를 캐묻지 못하였다. 이에 공은 함께 유배되어 있던 사인(士人) 한두 명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을 불러 모아 악당의 우두머리를 잡아 죽이니, 한 방면이 이로 인해 안정되었다. 이 사실이 행재소에 아뢰어지자 특별히 서용하여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으로 삼았다. 그다음 해에 비로소 조정에 나아갔으며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갑오년(1594)에 선대왕이신 선조가 강연(講筵)을 처음으로 열고서 희역(羲易)을 진독(進讀)하도록 명하였다. 이때는 실로 다시금 회복되어 새로이 시작하는 초기였는데, 유악(帷幄)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공이 역학(易學)에 정밀하다고 천거하면서 격례(格例)를 깨뜨리고 입시하게 해 강설(講說)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 일이 비록 중간에 중지되기는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또 대신(大臣)이 인재를 뽑는 데 급하여 자격에 구애받지 말고 열 조목으로 선비들을 뽑아 어지러움을 평정하는 데 쓸 인재를 갖추라고 건의하였는데, 공은 학술이 뛰어나고 시무(時務)를 잘 안다는 이유로 첫 번째로 선발되어 호조 좌랑에 탁용되어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형조 좌랑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외직으로 나가 안악 현감(安岳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다스림이 항상 으뜸이었다. 다시 승진되어 함종 현령(咸從縣令)에 제수되었는데, 안악의 백성들이 공거(公車)를 막고 하소연하니, 직질(職秩)만 승진시키고 그대로 잉임(仍任)하게 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불편한 일이 있어서 병으로 직임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자년(1600)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되었다. 신축년(1601)에 공의 동생인 상서공(尙書公)이 부체찰사(副體察使)로서 본로(本路)에 임하자, 법에 있어서 응당 피혐(避嫌)하여야 했으므로 체차되고서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선대왕이, 《주역(周易)》의 전의(傳義)가 서로 간에 같지 않은 곳이 있으니 구두(句讀)와 음석(音釋)을 마땅히 양쪽 다 그대로 놔둬야 하는데 학자들이 정전(程傳)에만 치우치게 한다는 이유로, 중외의 유신(儒臣)들을 모아 국(局)을 설치하고 바로잡게 하였다. 이때 출신(出身)이 아니면서도 그 선발에 참여된 자는 공과 홍가신(洪可臣), 정구(鄭逑) 등 몇 사람뿐이었다. 얼마 뒤에 조사(詔使)가 장차 나오게 되어 있어서 그 일을 중지하고 공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삼아 내보냈다. 조사가 돌아간 뒤에 역말을 보내어 급히 불러들여 사도시 정(司䆃寺正)으로 승진시켰는데, 토론하고 상정(商訂)하는 일이 대부분 공에게서 나왔다. 일을 다 마치자 일등연(一等宴)을 하사하였는데, 당시에 공은 이미 청주(淸州)로 부임해 있었으므로 특별히 명을 내려 올라와 참가하게 하였으니, 이 역시 특별한 은혜였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본도에서 실적을 올리니, 교서를 내려 표창하고 품계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켰다. 정미년(1607)에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으로 들어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가 호조 참의로 옮겨졌다. 무신년(1608, 선조41)에 선대왕이 승하하였다. 병란이 일어난 뒤로 의궤(儀軌)가 산실되어 예관(禮官)이 대상(大喪)을 당해 창황한 가운데 어찌할 줄을 몰랐다. 대신이 공이 예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들어와서 빈전(殯殿)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는데, 습렴(襲斂) 등에 관한 여러 의절(儀節)이 공 덕분에 잘못되지 않게 되었다.
당시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이 상서공(尙書公)의 봉양을 받느라 평양부(平壤府)에 가 있었는데, 지내기에 편안치 못하였다. 이에 공은 정고(呈告)하고 달려가 뵈었으며, 상소를 올려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면서 인하여 공물(貢物)의 폐단이 백성들에게 큰 폐해가 되고 있음을 논하였으며, 겸하여 제도를 개혁하는 계책을 진달하였는데, 절목(節目)이 아주 상세하였다. 일을 묘당(廟堂)에 내리니 상공(相公) 이원익(李元翼)이 바야흐로 정사를 총괄하고 있으면서 그 말을 좋게 여겨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먼저 기전(畿甸) 지역에서 시행해 보기를 건의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 기전의 백성들이 안도하면서 숨을 돌리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5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상복을 벗었다. 전례에 따라서 서추(西樞)에 제수되자 위연히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질병이 많아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지금은 늙은 데다가 또 어버이마저 안 계시다. 그러니 어찌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면서 남은 생을 마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서공이 서호(西湖) 아래 수이촌(水伊村)의 밭을 사서 공에게 주었는데, 공이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이때에 이르러 그곳으로 가 서실(書室)을 새로 짓고 날마다 그 속에 거처하면서 예전에 닦던 학업을 다시금 닦아 전에 이르지 못하였던 경지에 이르기를 더욱더 구하니, 조예가 갈수록 더 깊어지고 즐거움이 갈수록 더 참다운 즐거움으로 되었다. 이에 드디어 그 마을의 이름을 물이촌(勿移村)으로 바꾸고 기문(記文)을 지어서 바꾼 뜻을 드러냈다.
신해년(1611) 겨울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또다시 거만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부임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해직되고서 되돌아왔다. 계축년(1613)의 변이 일어남에 미쳐서 상서공이 중하게 견책을 받자, 더욱더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이에 파주(坡州)의 해유장(解由狀)을 집에 보관해 두고는, 깊이 숨어 살면서 사람들을 사절하고 시사(時事)에 대해서 절대로 말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면서 날마다 자질(子姪)들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담론하고 의리(義理)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끼니거리가 자주 떨어져도 태연하기만 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유두일(流頭日)에 가묘(家廟)에 시물(時物)을 천신(薦新)하다가 더위를 먹어 병세가 위독해져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향년이 64세였다. 상서공이 어린아이들을 거느리고 상차(喪次)의 동쪽에 있었다. 이해 9월에 원주(原州)의 치소(治所) 서쪽에 있는 가마도(佳麻島)의 선영에 장사 지냈는데,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처음에 찬성공이 돌아가셨을 때 공이 집안일을 맡아 다스렸는데,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모심에 있어서 얼굴빛을 살피고 뜻을 받들어 곡진하게 봉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계례(笄禮)를 올리지 않은 누이동생 네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을 방도가 있게 잘 가르치고 길러 제때에 시집보냈다. 당시에 왕모부인(王母夫人)도 당(堂)에 계셨으며 기공(期功)의 친족들이 집에 가득하였는데, 능히 좌우에서 잘 주선하여 섬기고 기르는 데 필요한 용품의 마련 때문에 일찍이 조금도 정경부인에게 걱정을 끼친 적이 없었다.
공은 항상 장공예(張公藝)의 풍모를 흠모하면서 구족(九族)들과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였다. 또 사마 온공(司馬溫公) 집안의 《서의(書儀)》를 대충 모방하여 한 책을 만들어서 재용(財用)을 절제하고 물품을 지급하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비록 힘이 달리고 형세에 구애되어 능히 뜻과 같이 하지는 못하였으나, 오히려 상서공과 더불어 50년 동안 재물을 함께하여 살았다. 그러자 부인네들이나 노복들조차도 모두 그 정성에 감복하여 가정이 화목하였다. 일을 조처하고 행실을 하는 것을 대부분 옛사람이 하던 것을 법으로 삼아 하였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법은 반드시 예경(禮經)을 두루 상고하여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을 양쪽이 다 극진하게 되도록 하기를 힘썼다.
공은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정신을 모으고 말없이 있었는데, 비록 글을 읽을 때라도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에 바라보면 장중하여 마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를 접함에 있어서는 화평하고 즐거워하면서 속마음을 다 드러내 보였다. 그러므로 어진 자나 어리석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두들 좋아하였다. 후생(後生)이나 소자(小子)들을 만났을 경우에는 그들을 위해 도의(道義)에 대해 말해 주었는데, 그 말이 명백하고 간절하며 간결하고 시원하였으며, 양단(兩端)을 들어서 모두 말해 주어 반드시 선한 데로 들어가게 하고자 하였다. 이는 대개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남과 자신에 대해 차이가 없어서였다. 그러므로 군읍(郡邑)을 맡아 다스릴 적에도 역시 이러한 마음으로 정사를 행하였다. 학교를 흥기시키고 무예를 강마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가르치고 길렀으며, 백성을 다스리고 아전들을 거느림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은혜와 믿음으로 하여, 일찍이 회초리를 치거나 독촉하는 것을 일삼은 적이 없었다.
무릇 시행하는 모든 일들은 반드시 멀리까지 도모하여 힘썼으며, 당장에 눈앞의 성과를 거두기를 일삼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국가에 일이 많을 때를 당하여 모든 사람들이 앞다투어 엄하고 급하게 하기를 힘쓰는데도 능히 체통(體統)이 서로 유지되고 정의(情意)가 서로 미더웁게 되도록 하였다. 이에 일이 몰려들어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 규모(規模)와 포치(布置)는 항상 뒤에 온 자들의 법도가 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고요하고 화평하였으며 간솔하고 맑아서 마치 무능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일을 행하는 데에서 보면 반드시 상세하고 치밀하여 조리가 있게 하였으니, 이는 경전을 궁구하여 쓰임을 이룬 힘이었다.
공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는바, 글자에 대해서는 그 훈(訓)을 구하고, 구절에 대해서는 그 뜻을 구하였으며, 어지럽게 뒤섞인 곳에 대해서는 융회(融會)하고자 하였고, 의심스럽고 희미한 곳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갈파하고자 하였고, 막히고 껄끄러운 곳에 대해서는 시원스레 꿰뚫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반복해서 연구하고 궁리하되, 터득하지 못하면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육경(六經)의 문자는 주소(註疏)에 가려 점점 본지(本旨)를 잃게 되었으니, 글을 읽는 자들이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마음에 있어서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바가 있으면 비록 선현이 논한 것이더라도 역시 구차스럽게 소견을 같이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맹자(孟子)》의 원모장(怨慕章)에 대해 논한 데에서는 말하기를,
“효자가 원망하는 마음은 바로 그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이는 ‘감히 질시하거나 원망하지 못한다.’는 것과는 저절로 별다른 한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 및 소반장(小弁章)에서는 모두 먼저 원망하는 뜻을 말하고서 모(慕) 자로 귀결시켰으니, 맹자의 뜻이 무엇인지 단연코 알 수가 있다. 어찌 유독 자식이 어버이에 대해서만 그렇겠는가. 신첩(臣妾)이 하늘로 섬기는 바에 대해서도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종풍(終風)과 이소(離騷)가 충신(忠臣)과 절녀(節女)의 선창(先唱)이 되는 까닭이며, 사람들이 윗사람을 헐뜯고 남편을 욕하는 것으로 허물하지 않는 까닭이다. 원망하는 데 대한 법조문(法條文)을 부도(不道)의 죄에 비긴 것은 한가(漢家)의 심문(深文)이지 선왕(先王)의 충후한 뜻은 아니다.”
하였는바, 참으로 전 시대의 사람들이 발현하지 못했던 바를 발현한 것으로, 세교(世敎)에 공이 크다고 하겠다.
북쪽 변경 지역에 있을 적에는 어렵고 위태로워 죽을 지경이었는데도 오히려 서책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즐겼으며, 생사(生死) 간에 서로 따라 죽을 뜻이 있었다. 바야흐로 악현(樂懸)을 철거할 때 상서공이 모시고 있다가 살고 죽는 이치에 대해서 물으니, 공은 기식(氣息)이 이미 거의 끊어졌는데도 오히려 《주역(周易)》의 원시반종설(原始反終說)을 들어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응답하였다. 그러고는 또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스스로 겸손하지 못하였다. 서책에 분명하게 지적해 놓은 곳이 있는데도 스스로 힘써 여기에 머무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으니, 종시토록 학문에 전념하였던 정성은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서도 변치 않아 죽음에 이르러서도 환하게 빛났던 것이다. 아, 참으로 독실하게 좋아하였다고 할 만하다.
저술한 책 몇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이치가 도달한 것으로 말하면 대부분이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다. 〈계몽설시변(啓蒙揲蓍辨)〉이나 〈다방해(多方解)〉 및 〈빈풍설(豳風說)〉 등의 편(篇)은 또 모두가 선현들이 이미 말해 놓은 이외에서 입언(立言)한 것으로, 비록 그 정밀하고 조잡함과 깊고 얕음에 대해서는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으나, 깊이 생각하고 애써 사색한 공은 책을 펼쳐 보는 자들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다.
공의 선취 부인(先娶夫人)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사인(士人) 구은중(具恩仲)의 따님인데, 일 년도 채 못 되어서 죽고 말았다. 재취 부인은 함창 김씨(咸昌金氏)로 산계(散階)인 김정준(金廷俊)의 따님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름이 흥일(興一)로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판서 오억령(吳億齡)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사인(士人) 홍비(洪棐)에게 시집갔으니, 바로 영원군(寧原君) 홍가신(洪可臣)의 아들이다.
공이 졸한 지 5년이 지난 뒤에 상서공이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경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형을 아는 사람은 많으나 깊은 부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대만 한 이가 없다. 그러니 묘갈명을 지어 준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 하였다. 아, 내가 공을 따라서 종유(從遊)한 것이 오래여서 들어 보지 못했던 설을 들은 것이 아주 많았다. 이에 뒷날 학문이 조금 진보되기를 기다려서 나아가 질정(質正)을 받고자 하였는데, 지금은 이미 그 계획이 어그러졌다. 오직 공의 평생을 바르게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고해 주는 것이 바로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글을 쓰는 자의 책무이다. 그러니 어찌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삼가 상서공이 보내 준 가장(家狀)에서 뽑고 내가 평소에 보고 들은 것을 덧붙여서 대강 이상과 같이 쓴 다음, 이어 명을 붙인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온공함이 덕의 기본 되는 것이니 / 溫恭德基
대아에 그 가르침이 쓰이어 있네 / 大雅有訓
지난날에 공이 이를 거론하면서 / 昔公擧此
학문함의 근본이라 말을 하였네 / 曰學之本
내가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보니 / 我繹思之
그 말 바로 학문공부 요지였었네 / 亶其旨哉
서로 함께 말을 하면 합치됐나니 / 與說言合
뜻 낮추어 공 이루는 일을 닦았네 / 志遜修來
얼마 뒤에 공의 행실 살짝 엿보니 / 旣而覵公
이 말 정말 제대로 잘 실천하였네 / 允蹈斯語
생각함과 배움 둘 다 진보시키며 / 思學兩進
겸손하고 공손하게 닦아 나갔네 / 謙謙作所
그윽하고 밝은 것과 크고 작은 걸 / 幽明鉅細
구색 찾고 분전 뒤져 궁구하였네 / 索丘典墳
깊숙한 걸 하나하나 다 탐구하여 / 靡賾不探
이를 모아 한 본원에 합치시켰네 / 會之一源
이미 속에 꽉 들어차 충실한데도 / 旣有而實
없는 것과 같았었고 빈 것 같았네 / 若無若虛
신명스러운 기운 안에 넉넉하여서 / 神明內腴
따순 기운 밖으로 다 불어내었네 / 和煦外噓
사람들은 그 광채를 좋아했지만 / 人悅其光
속에 쌓여 있는 것은 못 보았다네 / 莫窺其蘊
속에 쌓여 있는 것이 무엇이었나 / 其蘊伊何
시행하여 운용할 수 있는 거였네 / 可施而運
고을 수령 맡아 조금 펼치었으나 / 小施于邑
잠깐 펼쳐 보이고는 금세 거뒀네 / 兆而未究
재주 도로 품고 훌쩍 떠나갔나니 / 卷懷長逝
공에게야 그게 무슨 병통이 되랴 / 在公奚疚
장수하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라 / 莫久匪言
영원토록 썩지 않는 것이 있다네 / 不朽者存
이 뒷날에 상고하려 하는 사람은 / 後欲有考
이 묘갈명 읽어보고 징험하시게 / 徵此刻文
숭정 17년 2월 일 세움.
韓百謙神道碑
有明朝鮮國通政大夫戶曹叅議 贈嘉善大夫吏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久庵先生韓公神道碑銘并序
正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事 世子左副賔客鄭經世 撰
嘉 義 大 夫 漢 城 府 左 尹 兼 同 知 義 禁 府 事 世 子 左 副 賔 客 吳 竣 書
嘉 善 大 夫 行 承 政 院 左 承 旨 兼 經 筵 叅 賛 官 春 秋 館 修 撰 官 世 子 右 副 賔 客 金 光 煜 篆
萬曆四十三年乙卯秋七月。久庵韓公考終于漢師西郊勿移村之私第。訃出。賢公卿大夫以同道慟。經生學子以考德傷。雖平日異好惡不相樂與愚無知如吏胥之輩。亦皆齎咨歎惜曰。善人亡矣。所涖郡邑父老士子爭來致奠賻。哭之甚哀。君子以爲公之得此於人。蓋有道矣。質端而氣和。言溫而貌恭。其慈詳足以利物。其悃愊足以動人。其秉心平恕。幾乎所謂無怨惡於一人。是宜其死之哀而其沒之不忘也。嗚呼。此可謂善觀公者。而公之所存。則又有非此言所及者。公諱百謙。字鳴吉。其先淸州人。有名蘭。當麗興初。勳壁上三韓。爵三重大匡。位太尉。子孫世冠冕。有以功業顯。有以德行名。相望於麗乘。入我朝。有名尙敬。策開國勳。官至領議政。諡文簡。議政生咸吉道觀察使惠。觀察生左贊成繼禧。贊成生漢城府判官諱士武。是於公爲高祖。贈左參贊。曾祖諱承元。旌善郡守。贈左贊成。祖諱汝弼。文川郡守。贈領議政。考諱孝胤。以禮治躬。爲時所重。不幸早世。卒官鏡城府判官,春秋館記注官。贈左贊成。妣貞敬夫人申氏。麗朝忠臣壯節公崇謙之後。禮賓寺正健之女也。公生有美質。幼而耽書。年十七八。慨然有求道之志。聞習靜閔公純隱居行誼。以古道訓後進。造其門請敎。閔公與語而愛之。乃告之曰。子不聞朱夫子之說乎。修身大法。小學書備矣。義理精微。近思錄詳之。作聖根基。不外二書。士欲爲學。當從此入頭去。公惕然感發。遂從而卒業。得聞學問工程。師友淵源甚親切。雖嘗隨衆作擧子陞上舍。所重不在焉。庚辰。丁外艱。外除纔閱歲。又受重王母憂。積年㷀疚。絶無外誘。乃得專意於窮格之功。先取啓蒙書。俯而讀仰而思。沈潛觀玩。夜以繼日。其於象數之原。變化之妙。蓋有心融神會。欲罷不能之味。自是屛去科業。杜門下帷。大用力於義理之書。上自六經語孟之旨。下逮濂洛關建之言。無不漸涵尋繹。反復參考。其硏索之精。見識之透。已非世儒所及。而專於爲己。恥於求聞。常以韜斂爲務。故人亦鮮知爲篤學之士也。丙戌。有薦者。授中部參奉。尋換出慶基殿。未幾又換宣陵。病不就。己丑逆獄起。柄讞務入人。一時縉紳多見誣衊。公坐在湖南與震吉相知。被收栲幾死。責配▣▣。壬辰蒙大霈。路梗不得歸。適有邊民煽亂以應倭。官軍潰散。莫能何問。公與同謫一二士人洒泣號召。得首惡者誅之。一方以定。事聞行在。特敍爲內資直長。明年始趨朝。移拜漢城府參軍。甲午。先大王闢講筵。命進讀羲易。寔重恢更始之初也。帷幄諸公共薦公精於易學。請破格入侍以資講說。上許之。事雖中寢。時以爲榮。大臣急人才。建請勿拘資格。以十條取士。以備撥亂之用。公以有學術識時務應首選。擢拜戶曹佐郞。尋移刑曹。出補安岳縣監。治常最。陞授咸從縣令。安岳民詣公車號訴。命增秩而仍之。己亥。有不便。謝病歸。庚子。以刑曹正郞除寧越郡守。辛丑。弟尙書公貳體府臨本路。法應避。遞授工曹正郞。先大王以周易傳義互有不同。句讀音釋當須兩存。而學者偏主程傳。命聚中外儒臣。設局而釐正之。未出身與其選者。公與洪公可臣,鄭公逑數人而已。尋以詔使將至停其事。出公爲延安府使。詔使回。馳驛召還。陞司導寺正。討論商訂之事多出於公。事完。錫一等宴。時公已赴任淸州。特命進參。亦異數也。甲辰。本道上實績。下敎書褒之。進階通政。丁未考滿。入爲掌隷院判決事。遷戶曹參議。戊申。先大王昇遐。兵火之後。儀軌散失。禮官當大喪。倉皇罔措。大臣知公習於禮。趣令入治殯殿事。襲斂諸儀。賴以不愆。時貞敬夫人享尙書公榮養。在平壤府不安節。公呈告馳省。上章乞解職。因極論貢物之弊爲生民大瘼。幷陳改絃之策。節目甚詳。事下廟堂。李相公元翼方聽總已。善其言。建置宣惠廳。先試于畿甸。至今畿民之按堵息肩。實自此始。五月丁憂。庚戌服闋。例授西銜。喟然歎曰。吾素多疾病。不樂仕進。今老矣。親又不在。盍亦從吾所好以終餘年耶。先是。尙書公買田西湖下水伊村以餉公。公築小屋以居。至是就其地闢書室。日處其中。溫理舊業。以益求其所未至。則造詣愈深而樂愈眞矣。遂改村名爲勿移。作記以見志。辛亥冬。除坡州牧。又不欲偃蹇。黽勉赴之。未幾解紱歸。至癸丑之變。尙書公被重譴。則益無意人世。藏坡州解由於家。却掃深居。絶口時事。日與子姪輩談說經史。紬繹義理。甁粟屢空而晏如也。越二年。以流頭日薦時食家廟。因傷暑疾革。遂不起。享年六十四。尙書公挈其孤以喪東。用是年九月。葬于原州治西佳麻島先兆次。用顧言也。始贊成公旣歿。公幹家蠱。奉貞敬夫人承顏養志。無不曲盡。室妹未笄者四人。敎養有方。婚嫁以時。時王母夫人亦在堂。期功滿室。而能左右周旋。未嘗以事育之具少貽貞敬憂。常慕張公藝之風。欲與九族同居。略倣司馬家儀。草成一書。以爲制財用給裘餁之規。雖力詘勢拘。未克如意。猶與尙書公半世同財。娣姒僮僕皆服其誠。家庭穆然。處事制行。動以古人爲法。如冠婚喪祭之儀則。必博考禮經。務要情文兩盡。平居終日端坐。凝神靜默。雖讀書。聲不出口。望之莊重。若不可親。而及其接人則和平樂易。披露誠悃。人無賢愚。皆得其歡心。如遇後生小子。則爲之陳說道義。其言明白懇惻。簡易條暢。叩竭兩端。必欲其入於善。蓋其好善之誠無間人已。故其爲郡邑。亦以是心行之。興學講武。必先敎養。治民御吏。一以恩信。未嘗以鞭箠督責爲務。凡有施設。必拳拳於遠圖。而不欲求效於目前。故方當國家多事。競爲嚴急之日。能體統相維。情意交孚。事集而民不怨。規摸布置。常爲後至者所取法。公爲人恬夷簡靖。若無所能。而見諸行事。必詳密有條理。窮經致用之力也。公之學以思爲主。字求其訓。句求其義。錯綜處欲其融會。疑晦處欲其破綻。窒礙處欲其通透。反復硏窮。不得不措。嘗謂六經文字爲註疏所掩。寢失本旨。讀者不可太泥。於心有所未安。則雖先賢所論。亦不苟同。如論孟子怨慕章曰。孝子之怨。正所以慕其親。自與不敢疾怨別是一義。故此章及小弁章。皆先言怨意。而歸宿以慕字。孟子之意。斷可見矣。豈獨子之於親爲然。臣妾之事所天。莫不如此。此終風,離騷所以爲忠臣節女之先唱。而人不以訕上詈夫疵之也。怨望之律。擬之不道。乃漢家深文。非先王忠厚之意也。眞所謂發前人所未發。而有功於世敎者大矣。在北塞。艱危瀕死。猶以書籍自娛。有生死相殉意。方徹懸。尙書公侍。叩以死生之理。則公氣已不續。而猶擧大易原始反終之說。作喉中語以應之。且曰。吾誠不自遜。於書有一點明處。恨病不能自力止於此耳。其終始典學之誠。顚沛不貳。至死炳然。嗚呼。眞可謂篤好矣。所著書若干卷藏於家。其言理到。多可傳者。啓蒙揲蓍辨,多方解,豳風說等篇。又皆立言於先賢成說之外。雖其精粗淺深有不可易言。而覃思力索之功。開卷者當自知之矣。公先聘綾城具氏。士人思仲之女。未一年而歿。再娉咸昌金氏。散階廷俊之女。有一男一女。男曰興一。進士。娶判書吳億齡之女。女適士人洪棐。卽寧原君可臣之子也。公卒之五年。尙書公在謫所。以書來徵銘於經世曰。知吾兄者多矣。其深者莫如子。幸卒圖之。噫。經世從公遊久。聞所未聞者甚多。覬異日學少進。得以就正。今已失所圖矣。惟是直敍平生以告來世。乃不華者之責。其忍辭諸。謹掇尙書公之狀。而參以平日所見聞。書其大者如右。系以銘。銘曰。
溫恭德基。大雅有訓。昔公擧此。曰學之本。我繹思之。亶其旨哉。與說言合。志遜修來。旣而覵公。允蹈斯語。思學兩進。謙謙作所。幽明鉅細。索丘典墳。靡賾不探。會之一源。旣有而實。若無若虛。神明內腴。和煦外噓。人悅其光。莫窺其蘊。其蘊伊何。可施而運。小施于邑。兆而未究。卷懷長逝。在公奚疚。莫久匪言。不朽者存。後欲有考。徵此刻文。
崇禎十七年二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