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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인 신도비(韓應寅神道碑) 김류(金瑬)

작성자낙민|작성시간15.09.23|조회수47 목록 댓글 0

한응인 신도비(韓應寅神道碑) 김류(金瑬)

 

이 비는 안산시 사사동에 세워진 한응인신도비(韓應寅神道碑)이다. 연화문 대석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옥개석은 팔작지붕형태이다. 비신의 석질은 양호한 편이나, 한국전쟁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총탄 흔적이 여러 곳에 있다. 한응인은 1576년(선조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어가를 호종하였다. 1597년(선조 30년)에 명나라 장수 양호를 도와 군수물자를 차질 없이 제공하여 큰 칭찬을 받았다. 1608년(선조 41년)에 선조가 운명할 때 영창대군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한 7인의 신하 중 하나였다. 그 일로 말미암아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으며,1614년(광해군 6년)에 60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과 임금에게 충성을 하는 신하의 모습을 잘 나타내준다.

 

 

유명조선국수충익모수기광국추충분의병기협책평난공신(有明朝鮮國輸忠翼謨修紀光國推忠奮義炳幾協策平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증시충정공한공신도비명(贈諡忠靖公韓公神道碑銘) 병서(幷敍)

 

 

분충찬모립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인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짓다.

男資憲大夫刑曹判書 兼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仁及 書

嘉義大夫 司憲府大司憲 金光炫 篆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즉위하신지 11년 되는 丁丑年(선조 11, 1577년)에 친히 행차하시어 선성(先聖)의 사당을 참배하고 명륜당(明倫堂) 뜰에서 많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았다. 합격하여 선발된 자가 15인이었는데, 우리 선부군(先父君)께서 으뜸 자리를 차지하였다. 청평(淸平) 한상공(韓相公)도 또한 뽑혔는데, 서로 매우 친하게 지내며 귀한 지위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도 상공과 사적(私的)으로 알게 되었다. 상공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 그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이 고상(故相) 월사공(月沙公)의 문서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욕되게도 나의 선군과 벗한 이 중에는 그대 선친만한 분이 없다. 그대가 또 우리 선군에게 배웠고 내가 또한 그대와 교유하니 내 선친의 생애를 말할 수 있는 자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감히 이것으로 그대를 번거롭게 한다.” 라고 하였다. 내가 여러번 사양하여 말하기를, “그대 선친 상공의 훈명(勳名)과 공덕(功德)은 들리어지지 않음이 없다. 세상에 또한 상공과 필적할만한 자가 많으니 불후의 사업을 도모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마땅하여야 한다. 나는 불후의 사업으로 상공(相公)의 글을 쓸 만하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이미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살펴보았다.

공의 휘는 응인(應寅), 자는 춘경(春卿)이니 청주 사람이다. 휘 란(蘭)이란 분이 있어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일하여 원공(元功)에 책훈되었고, 품계는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벼슬은 태위(太尉)를 지냈으니 그의 비조(鼻祖)이다. 10대조 악(渥)은 우정승(右政丞)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책봉되었고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악이 방신(方信)을 낳으니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방신이 녕(寧)을 낳으니 신호위록사(神虎衛錄事)를 지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녕이 영정(永矴)을 낳으니 순창군지사(淳昌郡知事)를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영정이 확(確)을 낳으니 우리 조선에 입조하여 좌의정(左議政)이 되었고 좌익정난공신(佐翼靖難功臣)에 책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장혜대왕(惠莊大王) 사당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경복(慶福)을 기르고 덕(德)을 심어 소혜왕후(昭惠王后)를 낳으니 공에게는 6대조이다. 5대조 치인(致仁)은 판돈녕(判敦寧)으로 서원군(西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4대조 건(健)은 이조참판(吏曹叅判)을 지냈고, 공의 증조, 조부, 부친 3대는 공이 귀해지자 각각 부호군세좌이조판서(副護軍世佐吏曹判書), 부호군유좌찬성(副護軍侑左贊成), 부사직경남영의정(副司直敬男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의정공(議政公)의 숙부인(淑夫人)은 김부인(金夫人)으로 현감(縣監) 만일(萬鎰)의 따님이며, 직제학(直提學) 천령(千齡)의 손녀로 바로 공을 낳으셨다.

공은 태어나면서 영특하고 빼어났다. 4세에 글자를 알았고 7~8세에 이미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15세에 경사(經史)를 거의 다 읽었고, 약관에 태학(太學)에 유학하여 시험에 응시하여 여러 번 남들을 앞섰다. 그가 지은 작품이 한번 나오면 사람들이 번번이 외워 명성이 크게 떨쳐지니, 당시 여러 선비들 중에 비록 재주로 자부하는 자들일지라도 공과 감히 나란히 할 수 없었다. 당시 대사성(大司成) 홍천민(洪天民)이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칭해졌는데 공을 매우 아껴 그를 지목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진실로 나라에 보탬이 될 그릇이니 유독 문장에서만이랴.” 라고 하였다.

丙子年(선조 9, 1576년)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다음해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여 괴원(槐阮)에 들어갔다. 뽑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경연에서 기록하는 사람으로 병들어 고생하는 자가 있어, 공의 붓이 들리는 소리에 따라 적어 내려감에 자잘한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임금께서 초록한 책을 바치게 하여 친히 열람하시고는 매우 가상히 여기셨고, 세상에서 그의 능력을 칭찬하였다. 정해진 임기를 채우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여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인제현감(麟蹄縣監)이 되었다. 이 때 선비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상호간에 세력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니, 공이 외직에서 여러번 차질을 빚은 것도 무릇 이런 이유때문이었다. 癸未年(선조 16, 1583년)에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

甲申年(선조 17, 1584년)에 조정에서 종계(宗系)로 무고를 받아 여러번 천자에게 아뢰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주청사신(奏請使臣)은 마땅히 엄격하게 뽑았는데 이 때 황정욱(黃廷彧)을 주청사(奏請使)로 삼고 공을 서장관(書狀官)에 임명하였다. 명나라 수도에 이르러 천자를 응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공이 실로 많은 일을 맡아 천자의 비준을 받아냈다. 천자가 권유하는 칙문을 내려 억울함을 씻어 줄 것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옴에 선조대왕이 크게 기뻐하시어 친히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노고를 치하하였고, 근신(近臣)들에게 수창할 것을 명하셨다. 종묘사직에 고하고 나라에 경사를 반포하며 더욱이 지팡이를 하사하셨다.

乙酉年(선조 18, 1585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황해도에서 재해를 조사하였다. 이 해에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하니 장례와 제사를 지냄에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다. 상례를 마치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이 되었다. 戊子年(선조 21, 1588년)에 신천군수(信川郡守)로 부임하여 정령(政令)이 관대하고 공평하니 아전들이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였다. 己丑年(선조 22,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하여 해서(海西)지방의 여러 적들과 몰래 결탁하여 장차 구월산(九月山)에서 병사를 모아 날짜를 정하여 대궐을 침범하고자 하였다. 그 무리중에 조구(趙球)라는 자가 일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하여 변고를 아뢰니, 공이 안악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 재령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과 더불어 논의를 하고 모든 전말을 갖추어 장계를 급히 올렸다. 임금께서 모든 도적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림에 여립(汝立)이 그의 아들 및 무리들과 함께 도망을 쳐 진안(鎭安)의 죽도(竹島)로 들어가 병장기를 들고 스스로 지켰다. 관군이 그를 추격하자 여립이 드디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체를 가져다 거리에서 처형을 하고 여러 도적들은 모두 복주시켰다. 해서지방에 숨어 있던 나머지 무리들은 공이 또 추격하여 붙잡아 압송하였다. 형벌을 바르게 하고 사건이 종결되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초수(超授)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지(承旨)로 옮겼다. 庚寅年(선조 23, 1590년)에 전후의 공을 서록하여 광국이등(光國二等), 평난일등(平難一等)에 책훈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시키고 곧 도승지(都承旨)를 제수하였다. 대개 선조대왕이 공이 바른 재주가 있다고 하여 떠나보내지 않고 가까이 두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辛卯年(선조 24, 1591년) 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이 때 일본의 우두머리 평수길(平秀吉)이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를 보내 우리나라에 서신을 전하였는데, 말이 매우 발칙하고 오만하여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침범한다고 떠들어대었다. 선조께서 여러 신하를 불러 명나라에 아뢸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논의를 하니 잡다하여 일치되지 않았다. 선조께서 대사헌(大司憲) 윤두수(尹斗壽)의 의견을 채택하여 공을 진주사(陳奏使)로 삼아 사실대로 천조(天朝)에 아뢰도록 하였다. 명나라 천자가 이미 먼저 유구국(琉球國)의 말을 들었기에 우리나라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아뢴 글을 보자 황제가 황극전(皇極殿)에 행차하여 공 등을 자리 아래로 불러 인견하였다. 천자의 말이 확고하였으나 되풀이하여 도타이 일렀더니 상을 후하게 내리고 칙서를 내려 장려하였다.

壬辰年(선조 25, 1592년) 4월에 적병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성읍을 빼앗고 우리의 호수와 고개를 유린하여 흉악한 군사가 곧바로 서울을 향하였다. 선조께서 종사(宗社)를 위한 큰 계책으로 서쪽으로 파천할 것을 결정하였다. 공이 돌아오다 의주(義州)에 이르러 변고를 듣고는 눈물을 닦고 곧 길을 떠나 개성부(開城府)에서 복명하고 이에 평양(平壤)으로 호종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임진(臨津)을 끊어서 적들이 서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공을 등용하여 팔도도순찰사(八道都巡察使)로 삼아 부월(斧鉞)을 내려 군사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공이 명을 받들고 길을 떠나 채 반도 되지 않았는데 임진은 이미 함락당하였다. 어가가 이미 평양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갖은 고생을 겪으며 따라가 의주에 이르니 곧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제수하였다.

이 해 겨울에 천자께서 남북의 병사를 크게 뽑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명을 내려 군무(軍務)를 총괄케 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鴨綠江)에 주둔하자 조정에서 접반사(接伴使)를 중하게 여겨 공과 재상 이덕형(李德馨)을 뽑으니 모두 당시 최고로 명망이 있었다. 공이 원래 중국어를 알고 있어 얼굴을 마주하고 군사의 기요(機要)에 대하여 논의를 함에 충의(忠義)가 발분(發奮)하고 모두 명확하게 요점을 꿰뚫었다. 제독이 그로 인해 얼굴빛을 움직이고 크게 칭송하며 서로 하늘의 태양을 가리키며 적들을 모두 없앨 것을 맹세하였다.

당시 적들이 평양에 주둔하며 농성하고 있었는데, 군대의 세력이 매우 성하여 명나라 군대가 성을 에워쌌지만 감히 성에 오르지 못하였다. 제독이 공과 함께 화공(火攻)을 논의하여 큰 불화살과 돌을 날리며 보통문(普通門)을 깨뜨렸다. 사방에서 용감히 싸워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듯 하자 적들이 버티지 못하고 드디어 성루를 비우고 한밤중에 도망쳤으니, 癸巳年(선조 26, 1593년) 정월의 일이다. 공이 제독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적이 이미 사기가 꺾였고 남은 무리도 또한 많지 않습니다. 지금의 파죽지세를 타고 모든 병력을 몰아 추격하면 한번에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독이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적을 베고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해도 개성과 한양의 적들은 소문만 듣고 도망가니 삼경(三京)이 다 평정되었다. 공이 서울로 들어가 능묘를 참배하고 죽은 이를 조문하고 산 사람을 위로하며 시체를 매장하고 서적과 도판을 수습하였다. 국가가 옛 체제를 갖춘 것은 실로 공에게 힘입은 바였다.

이 해 여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조정에서 상중에도 벼슬에 나올 것을 청하고 임금의 부름이 점점 많아졌다. 공이 피눈물을 흘리는 상소를 올려 사양함이 더욱 확고해지니 마침내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상복을 벗자 다시 재정을 맡는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고, 곧 주청사(奏請使)에 책봉되어 명나라 수도로 갔다. 丙申年(선조 29, 1596년)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이 때 명나라 군대가 모든 곳에 가득하였는데, 공이 계책을 내어 호응하고 필요한 물품을 공급함에 빠트리는 것이 없으니 여러 장수들의 큰 환심을 얻었다.

다음해 丁酉年(선조 30, 1597년)에 황제가 도어사(都御使) 양호(楊鎬)를 경리동사(經理東事)로 파견하였다. 압록강을 넘자마자 이미 공의 능력을 들었는데 한 번 보고 말을 함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손을 잡고 기뻐하여 평소에 아는 사이 같았다. 서울에 도착하여 선조에게 직접 청하여 말하기를, “내 남쪽으로 가서 적을 토벌코자 하는데 군량이 군대보다 우선이니 평안포정사(平安布政使) 한모를 재정담당으로 임명하여 군량을 공급해 줄 것을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급히 전령을 보내 서울로 되돌아오게 하여 호조판서에 임명하고 제독의 남쪽 원정길에 식량을 제공하게 하였다. 공은 황폐해진 가운데에서도 심력을 기울여 근면히 일하였으니 군수물자를 차질 없이 제공하여 십 만의 병사를 구제하였다. 군대가 돌아오는 날 양공이 혀를 차며 임금에게 칭찬을 하였다. 공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안부를 묻는 서신이 그치지 않아 공은 더욱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己亥年(선조 32, 1599년) 봄에 다시 명나라 수도로 가서 군대와 식량을 다시 보내 준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돌아와 보고를 하자 특별히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제수하였다. 공이 甲申年(선조 17, 1584년)부터 己亥年(선조 32, 1599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4년간 명나라 수도에 네 번 사신으로 갔고, 한번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에 이르렀으니, 중조(中朝)의 병졸들도 모두 공의 이름을 알아 우리나라 상인을 만나면 번번이 공의 안부를 물었다. 이 때 조정의 대신이 더욱 바르지 못했거니와 순서를 정해 놓고 관원을 임명하므로 청요직(淸要職)이 빈번히 교체되는 것을 선조께서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庚子年(선조 33, 1600년)에 공을 등용하여 이조판서로 삼으니, 선비들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辛丑年(선조 34, 1561년)에 사직하였다가 다시 호조의 수장이 되었고 조금 지나 병조로 옮겼다. 정사를 행함이 또 이조를 맡았을 때와 같으니 무인(武人)들도 매우 그를 칭송하였다. 丙午年(선조 39, 1606년)에 정승에 뽑혀 丁未年(선조 40, 1607년)에 특별히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다. 대개 권력을 쥐고 있던 재상이 임금이 공을 중하게 여김을 알고 공을 데려다 인망을 얻는데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명이 있었지만 실은 공의 뜻이 아니었다. 선조가 병으로 신음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기에 감히 청하여 아뢰지 못하고 자리에 나아가 열심히 일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주장(奏章)을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상소를 일곱 번 올렸으나 선조께서 매우 아끼는 것으로 비답을 내리며 억지로 권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물러날 수 없어 지냄에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선조께서 위독하자 공을 비롯하여 일곱 명의 신하를 불러 유언을 남겨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하셨다. 대군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이날 저녁 운명하시니, 戊申年(선조 41, 1608년) 2월 초1일이었다. 국상(國喪)을 마치자 공이 또 물러날 것을 힘써 청하였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정인홍(鄭仁弘)과 몰래 모의하여 辛亥年(광해군 3, 1611년) 9월에 탄핵하여 공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이첨 등의 흉악한 계책이 날로 더해져 癸丑年(광해군 5, 1613년)에 이르러 무뢰적(無賴賊)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를 연유로 영창대군까지 끌어들여 사림(士林)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모의하였다. 이에 응서를 몰래 꾀어 거짓 상소로 밀고하게 하고 또 체포된 정협(鄭浹)을 꾀어 어지러이 끌어들여 일곱 신하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 재추(宰樞) 황신(黃愼) 등 10여인을 한꺼번에 하옥하였다. 조야(朝野)가 놀라고 두려워하니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사건이 근거가 없음으로 밝혀져 마침내 계책을 다 실행하지 못하여 몇몇은 풀려나고 몇몇은 파직되었다. 공이 일곱 명의 신하로 선조의 유언을 받은 것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시골로 쫓겨나 광주(廣州) 선묘(先墓) 아래에 우거하며 문을 닫고 세상일을 끊었다. 집안에 비록 식량이 자주 떨어졌으나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조정에 머물렀기에 무고에 연루되었다는 것으로 항상 스스로 괴로워하였다. 병이 장차 위독해지자 진지하게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서 세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였으니, 죽어서 지하에서 선왕을 뵙는 것이 내 소원이다.” 라고 하였다. 다음 해 甲寅年(광해군 6, 1614년) 3월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공이 태어난 가정(嘉靖) 甲寅年(명종 9, 1554년)으로부터 60년이 되는 해였다. 같은 해 5월 모일에 광주치(廣州治) 당수리(棠樹里) 인좌(寅坐) 신향(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뛰어난 무략(武略)으로 어지러움을 바로 잡아 흉악한 무리를 소탕하고 늙은 석학(碩學)을 불러 모았다. 일곱 신하 중에 살아 있는 자는 으뜸으로 발탁하여 등용하고 죽은 자는 아울러 그들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이에 공이 옛날 우의정이었기에 법식대로 겸대(兼帶)하도록 명하였다.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논의하여 충정(忠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공이 옛날에 욕되었던 것이 도리어 지금에는 영광이 되었으니 득실(得失)이 과연 어떠한가?

공의 용모와 자태는 풍성하고 빼어났으며 도량과 지식은 매우 깊었다. 남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온화한 기운이 무성하였고, 관직에 나아가 일을 처리함에 만약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면 곧바로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가 이로움과 해로움이 관계된 일을 당하면 확고하여 뽑아낼 수 없었으니, 공은 진실로 이인(異人)이로다. 아아! 세상에서 공을 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존귀함은 재상이 되었으나 스스로 존귀함에 거하지 않았고, 공로가 사직에 있었으나 스스로 공로에 거하지 않았다. 화복 때문에 자기가 지켜온 것을 바꾸지 않았고, 순탄함과 험함 때문에 자기의 지조를 고치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만 이미 드러난 자취일 뿐이다. 공의 자취임은 분명하나 민멸되어 사라진 자취의 경우에는 세속에서 가히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을 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공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공을 알지 못한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공을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소자가 비록 감히 공을 안다고 스스로 말할 수는 없지만 또한 공을 알지 못한다고도 말할 수도 없다.

공은 별도의 첩은 두지 않고 이부인(李夫人)과 함께 늙도록 서로 존경하며 지냈다. 부인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아들 의창군(義昌君)의 6대손이니 집안이 옛날부터 존귀하였다. 공에게 시집을 오니 공이 또 존귀해졌다. 공손함과 검소함으로 집안을 지키고 시부모님을 섬기고 제사를 받듦에 정성과 효성을 다하였다. 성품이 또 어질고 후덕하여 먼 친족일지라도 빈천할수록 공손함과 공평함을 더하였다. 무릇 위급한 일이나 변고가 있어 청하면 반드시 재물을 헤아리지 않고 주선해 주었으니, 공의 덕이 또 집안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피눈물을 흘리며 삼년상을 마쳤다. 상기(喪期)를 마쳤지만 흰 옷을 벗지 않았고 공보다 12년 후에 세상을 떠나니 아무개 언덕에 따라 장사지냈다.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長子)는 덕급(德及)으로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고, 차자(次子)는 신급(信及)으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지냈으나 요절하였고, 막내는 인급(仁及)으로 형조판서를 지냈다. 딸 셋을 두었는데, 첫째는 현감(縣監) 이건(李楗)에게, 둘째는 군수(郡守) 안대남(安大楠)에게, 셋째는 부사(府使) 남두첨(南斗瞻)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덕급은 참판(參判) 김장생(金長生)의 딸을 아내로 맞아 3남3녀를 낳았다. 아들은 수원(壽遠), 지원(智遠), 지원(志遠)이다. 수원은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이다. 첫째 딸은 유학(幼學) 이여홍(李汝洪)에게, 둘째 딸은 김민성(金敏成)에게, 셋째 딸은 진사 이시정(李時楨)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신급은 참의(叅議) 강찬(姜燦)의 딸을 아내로 맞아 일남(一男) 기원(器遠)을 낳았으나 요절하였다. 인급은 부솔(副率) 노병준(盧並俊)의 딸을 아내로 맞아 2남1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원(振遠), 명원(命遠)인데, 진원은 성균관 생원(生員)이다. 딸은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이호징(李好徵)에게 출가하였다. 이건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문병(文炳), 문황(文煌), 문욱(文煜)이다. 문황은 성균관 진사이다. 안대남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정섭(廷燮)으로 현감이다. 남두첨은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선(翧)은 성균관 생원이며, 딸은 진사 박수현(朴守玄)에게 출가하였다. 명(銘)은 아래와 같다.

 

 

하늘이 보우하사 나라를 흥하게 하여

어진 재상을 내셨으니

임금을 보좌하면서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네.

옛날 주나라 선왕(宣王) 때에

병사(兵事)를 용맹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여

왕실을 보존하게 하였네.

양절공(襄節公)의 먼 후손이나

오히려 선조의 운수를 불러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았네.

일찍이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고

과장(科場)에 나아가 급제하여

스스로 높은 반열에 이르렀네.

좌절과 재기를 겪었으나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으며

한결같이 천명(天命)에 의탁했네.

전후에 세운 공을 통해

두 번이나 충훈부(忠勳府)에 오르니

높은 지위가 재상의 반열이었다네.

공은 많은 것을 차지하지 않았으니

마치 나무에 오른 듯

삼가고 조심하였다네.

나라의 어려움을 당해

부지런히 일을 하였으니

공로는 기록할 만하였네.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며

인재를 공평히 선발함에

터럭만큼의 실수도 하지 않았네.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글을 지음에

대체(大體)를 중히 지녔으니

명망이 실제와 들어맞도다.

뜻에 맞지 않는 자리에서 많은 시기 받았으니

마음과 자취가 어그러져

근심하며 우울해 했다네.

선조(宣祖)가 승하하여

세사(世事)가 갑자기 변하니

천지가 갇혀버렸네.

우리에게 의리를 재촉하고

우리에게 칼날을 맡겼으니

움푹 패인 귀신의 안목이었다네.

시골집으로 쫓겨나

사방이 다 쓸쓸하니

허름한 집에 쑥만 가득하였네.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병에 걸려 위독해지니

60년의 삶이었다네.

하늘은 어찌 온전한 사람 내려주고는

진흙탕과 같은 험난함을 베풀어

끝마치지 못하게 하였는가!

저 동쪽 언덕 바라보니

삼엄히 서있는 소나무와 잣나무

바로 공의 정신이 깃든 곳이네.

좋은 돌에 글을 새겨

그 명성 대대로 전하노니

내 말은 과장이 아니노라.

 

韓應寅神道碑

 

有明朝鮮國。輸忠翼謨修紀光國推忠奮義炳幾協策平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淸平府院君。贈諡忠靖。韓公神道碑銘。幷敍

 

 

奮忠贊謨▨紀明倫靖 社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昇平府院君金瑬撰

男 資 憲 大 夫 刑 曹 判 書 兼知 義 禁 府 事 五 都 摠 府 都 摠 管 仁 及 書

嘉 義 大 夫 司憲府大司憲 金光炫 篆

 

恭惟我宣祖大王卽位之十一年歲丁丑。親擧玉趾。謁先聖廟。試多士于明倫之庭中。選者十五人。余先府君居其首。淸平韓相公亦在選最。相得驩甚。及貴不替。故余藐小子。仍得私於相公。相公卒廿年所。而其胤判書公以故相月沙公狀來曰。所辱與吾先子友。亡若子先人。子又習於吾先子。吾又與子游。能道吾先子始終。非吾子而誰。敢以是累吾子。瑬屢辭曰。先相公勳名德烈靡不聞。世亦多及相公者。圖不朽者。宜於其人。吾亡以不朽爲先相公藉也。旣不獲辭。則謹按公諱應寅。字春卿。淸州人。有諱蘭者。佐麗祖統合三韓。策元功。階爲三重大匡。爵爲大尉。其鼻祖也。十世祖渥。右政丞上黨府院君。諡思肅。渥生方信。僉議贊成事西原君。方信生寧。神虎衛錄事贈兵曹判書。寧生永矴。知淳昌郡事贈領議政淸城府院君。永矴生確。入國朝。爲左議政。策佐翼靖難功。封西原府院君。配享惠莊大王。諡襄節。毓慶種德。誕生昭惠王后。於公六代祖也。五代祖致仁。判敦寧西城君諡恭安。四代祖健。吏曹參判。公曾祖考祖考考三世。以公貴贈副護軍世佐吏曹判書。副護軍侑左贊成。副司直敬男領議政。議政公有淑配曰金夫人。縣監萬鎰之女。直提學千齡之孫。寔生公。公生而穎秀。四歲知文字。七八歲。已能如成人。十五。讀經史殆遍。弱冠。游太學。應課試屢詘人。所製作一出。人人輒成誦。名聲大振。一時多士雖故以才自負者。不敢與公齒。時大司成洪天民素稱有人倫鑑。甚重公。目之曰。此子眞公輔器。獨文乎哉。丙子。俱中生員進士。明年。闡大科。入槐院選也。俄而用薦。拜承政院注書。筵中注記人病難者。公筆隨聲應。纖悉不遺。上命進草冊。親閱而嘉賞之。世稱其能。仕滿陞司憲府監察。由刑曹佐郞。爲麟蹄縣監。是時士論分岐。互相消長。公之屢躓于外。凡以此也。癸未。入爲禮兵曹佐郞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甲申。朝廷以宗系受誣。歷累聖未白。奏請使臣宜極擇。於是以黃廷彧爲使。以公充書狀官。至京師應對周旋。公實居多。獲蒙准可。降勑勤諭。快許昭雪。及還。宣祖大王大悅。御製四韻詩以勞之。命近臣賡和之。告廟社。頒慶中外。錫賚有加。乙酉。以敬差官審災傷于黃海道。是年丁議政公喪。喪葬杞事。一遵禮制。制除爲成均直講。戊子。出守信川。政令寬平。吏懷民安。己丑。鄭汝立謀大逆。陰結海西諸賊。將聚兵九月山。約日犯闕。其黨趙球懼事泄上變。公與安岳守李軸,載寧守朴忠侃會議。具以狀馳啓。命逮捕諸賊。汝立及其子徒黨。亡走入鎭安之竹島。摻兵自衛。官軍迫之。汝立遂自刃。取其屍戮于肆。諸賊俱伏誅。餘黨之匿于海西者。公又逐捕械送正刑獄完。超授戶曹參議。俄遷承旨。庚寅。敍前後功。置光國二等。平難一等。晉階資憲。仍授都承旨。蓋宣廟雅才公。不欲離近密也。辛卯春。拜禮曹判書。時日本酋平秀吉遣玄蘇,平義智。致書于我。辭極悖慢。聲言假途入犯天朝。宣廟召諸臣雜議奏聞當否。議多不一。宣廟用大司憲尹斗壽議。以公爲陳奏使。據實具奏。天朝已先入琉球言方疑我。及見奏本。皇帝御皇極殿。引公等立之殿陛之下。天語丁寧。反覆敦諭。厚其賞賚。降勑奬勵。壬辰四月。賊兵渡海。蕩覆我城邑。蹂躪我湖嶺。兇鋒直指京輔。宣廟爲宗社大計。決策西幸。公還到義州。聞變雪涕。兼程復命于開城府。仍扈駕至平壤。廷議以爲宜截臨津。以遏賊西。用公爲都巡察使。授鉞督師。公受命行未半。臨津已不守矣。聞車駕已離平壤。間關跋涉。追及義州。則拜工曹判書。是年冬。天子大發南北兵。命提督李如松總制軍務。師次鴨綠。朝廷重接伴使。簡畀公與李相德馨。皆極一時望也。公素習華語。面論兵機。忠義奮發。咸鑿鑿破的。提督爲之動容。大加稱譽。相與指天日。誓共滅此賊。時賊屯據平壤。嬰城拒守。兵勢甚盛。天兵薄城不敢登。提督與公議火攻。用飛礮撞破普通門。四合奮勇。雷轟電擊。賊不能支。遂空壘宵熸。癸巳正月也。公請於提督曰。賊已破膽。餘衆亦不多。乘此破竹之勢。悉甲而追。可一擧盡殱。提督用其策。斬殺鹵獲甚多。黃海,開城,漢都之賊。望風而遁。三京悉平。公入京城。展掃陵廟。弔死問生。掩骼埋胔。收拾書籍版圖。國家掌故。實有賴焉。是年夏。丁內艱。朝廷請起復。宣召益勤。公上泣血疏。辭益堅。竟不能奪其志。制除。復長度支。旋以冊封奏請使如京。丙申。拜平安道觀察使。是時天朝兵馬。充塞一路。公策應供頓。左右亡失。甚得諸將心。明年丁酉。帝遣都御史楊鎬經理東事。才渡江。已聞公能。及一見談論。亡弗中窾。握手驩然。有若平素。到京面請于宣廟曰。吾將南討賊。糧在軍先。請授平安布政使韓某以度支。俾給餉。遂以急傳促還。差分戶曹判書。督餉南路。公於蕩殘之餘。焦心拮据。濟十萬兵。士亡乏興。師還之日。楊公嘖嘖稱謝于上。逮至還朝。問信不絶。公能益著。己亥春。復如京謝皇上再發兵糧恩。復命。特陞授議政府右贊成。公自甲申至己亥首尾十四年。四朝京師。一赴遼廣。中朝走卒。亦皆誦公名。遇我國行李。輒問起居。是時朝著益不靖。宣廟益厭一番人。於淸路多所更置。庚子。用公爲吏曹判書。士類倚以爲重。辛丑。辭遞。復長戶曹。俄遷兵曹。爲政又如東銓時。武士翕然稱之。丙午。卜相。丁未。特拜右議政。蓋柄相揣知上重公。欲援公爲助。以收人望。故有是命。實非公志也。宣廟違豫已久。不敢請告。黽勉就列。未久乃露章乞休。章七上。宣廟寵答勤眷。敦迫不允。公不獲已還出。居悒悒不自得。宣廟大漸。命召公等七人。下遺敎。托以保護永昌大君。大君始三歲。是夕賓天。戊申二月初一日也。因山甫畢。公又力辭遞免。賊臣李爾瞻陰與鄭仁弘謀。辛亥九月。劾罷公職。爾瞻等兇計日益深。至癸丑。因無賴賊朴應犀獄。謀欲延及大君。以爲網打士林計。乃潛誘應犀使誣疏密告。又嗾被逮者鄭浹亂引七臣及國舅金悌男,宰樞黃愼等十餘人。一時就獄。朝野震恐。禍將不測。事出無據。卒不得盡竹其計。或放或罷。而坐公以七臣受遺敎。削官爵。放歸田里。寓居廣州先墓下。杜門絶人事。家雖屢空。弗以爲意。唯以偶居廊廟。橫被構誣。恒自疚心。病且革。諄諄語子弟曰。吾生而無益於世。死而覲先王於地下。是吾願也。明年甲寅三月。竟卒。距公生之嘉靖甲寅。一周甲也。以同年五月某日。葬于廣州治堂樹里寅坐申向之原。今我聖上神武撥亂。蕩戮兇孼。徵召耆碩。七臣之在世者。首蒙敍擢。死者竝復其官。乃命公仍故爲右議政。兼帶如式。太常議諡。諡曰忠靖。公之辱於曩時者。反爲榮於今日。得失果如何耶。公神姿豐秀。器識凝遠。待人接物。和氣藹然。居官莅事。若不自勝。直是逡巡退讓也。及其臨利害遇事變。確乎其有不可拔者。公眞異人也哉。噫。世之論公者皆曰。貴爲卿相而不自居貴。功在社稷而不自居功。不以禍福而易其守。不以夷險而變其摻。此特其已露之跡爾。若乃近乎迹而泯乎亡迹者。則非世俗之所可窺。安知其所謂知公者非不知公也。其所謂不知公者非知公也耶。然則小子雖不敢自謂知公。亦不可謂不知公者也。公無他媵侍。與李夫人白首相莊。夫人。世宗大王子義昌君六世孫。家故貴也。歸于公。公又貴也。能恭儉持其室。事舅姑奉祭祀。盡其誠孝。性又仁厚。宗族之疏遠者愈。貧賤尤益敬與均。凡有緩急。請必斥訾而周之。於是知公之德又行於家也。公歿泣血終三年。服闋猶不去白衣。後公十二年而卒。從葬于某原。男三人。長曰德及。永川郡守。次曰信及。翊衛司洗馬。蚤夭。次曰仁及。刑曹判書。女三人。長適縣監李楗。次適郡守安大枏。次適府使南斗瞻。德及娶參判金長生女。生三男三女。壽遠,智遠,志遠。壽遠成均進士。女長適幼學李汝洪。次適金敏成。次適進士李時楨。信及娶參議姜燦女。生一男器遠夭。仁及娶副率盧竝俊女。生二男一女。男振遠,命遠。振遠成均生員。女適承文院正字李好徵。李楗有三男。文炳,文煜,文煌。成均進士安大枏有一男廷燮。縣監。南斗瞻有一男一女。男翧成均生員。女適進士朴守玄。銘曰。

天佑興邦。篤生良弼。用扶顚越。昔在周宣。虎敏戎公。俾極王室。公后襄節。猶召祖命。而多前伐。蚤以藝名。進取科第。自致顯列。或躓或起。不加喜戚。一寓於物。讎庸前后。再登盟府。峻之卿秩。公不居多。如集于木。惕惕怵怵。險阻艱難。拮据經營。事功可述。入長兩銓。遴揀公明。毫髮不失。逮贊辨章。持重大體。輿望協實。寄坐群忌。心迹謬盩。公所悒鬱。弓劍喬山。時事倏變。天地罩罼。速我于理。注我以刃。鬼眼䆕䆷。屛黜田廬。環堵蕭然。衡門蓬蓽。惟天不弔。疹瘁斯酷。甲子周一。胡畀之全。胡施之泥。而不之卒。瞻彼東岡。松柏丸丸。維神之佚。刻之貞珉。以世厥聲。余言匪溢。

 

 

崇禎十五年壬午至月 日 諡 解 危身奉上曰忠好廉自克曰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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