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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묘지명(高玄墓誌銘)

작성자낙민|작성시간15.09.21|조회수267 목록 댓글 0

고현묘지명(高玄墓誌銘)

 

중국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墓誌銘; 묘지명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묘지(墓誌)는 사망한 사람의 행장을 새기거나 써서 무덤 속에 넣은 것을 가리키고, 묘비(墓碑)는 지상에 세워 놓은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문장은 대체로 정해진 격식이 있어서 앞부분에 산문체로 된 서문(序文)이 놓이고 운문체로 된 명문(銘文)이 그 뒤를 따른다. 이렇게 서문과 명문으로 이루어진 묘지 또는 묘비의 문장을 묘지명(墓誌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뒤의 명문만을 특정하여 묘지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고현 묘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묘지명 및 서문’이라 하였을 때에는 후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글에서 사용하고 있는 묘지명이란 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근래에는 이러한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으로는 6개가 있는데, 고자(高慈)·고진(高震)과 함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후손들인 천남생(泉男生)·천남산(泉男産)·천헌성(泉獻誠)·천비(泉毖)의 것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전부는 아닐 것이고, 앞으로도 새로운 묘지명이 알려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묘지명이 1980년대 이래로 중국과 대만에서 책으로 엮어 출간되어 왔는데, 이 가운데 당나라 때의 묘지명이 포함된 것만 해도 여러 종류가 된다.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것만 해도 다음과 같다.

 

『石刻史料新編』, 新文豊出版社, 臺北, 1982(1987, 法仁文化社 영인).

毛漢光 撰, 『唐代墓誌彙編附考』1-계속,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專刊 81, 臺北, 1984-계속.

李希泌, 『曲石精廬藏唐墓誌』, 齊魯書社, 1986.

北京圖書館金石組 編, 『北京圖書館藏中國歷代石刻拓本匯編』, 中州古籍出版社, 1989.

河南省文物硏究所·河南省洛陽地區文物處 編, 『千唐誌齋藏誌』上·下, 文物出版社, 北京, 1989.

洛陽市文物工作隊, 『洛陽出土歷代墓誌輯繩』, 中國社會科學院出版社, 1991.

周紹良 主編, 『唐代墓誌彙編』上·下, 上海古籍出版社, 1992.

中國文物硏究所·河南文物硏究所 編, 『新中國出土墓誌』, 河南(壹) 上·下, 文物出版社, 1994.

 

이러한 책들 덕택으로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묘지명이 국내에 알려져 백제사 해명에 많은 도움을 준 바 있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고현(高玄; 642-690)의 묘지명도 이번에 새롭게 국내에 소개되는 것이므로, 이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은 모두 7개에 달하게 되었다. 필자가 하바드대학에 머물 때에 옌칭도서관에 있는『당대묘지휘편부고(唐代墓誌彙編附考)』(毛漢光 撰, 『唐代墓誌彙編附考』제11책, 1991, pp.501-505)를 뒤지다가 이 묘지명을 처음 확인하였고, 이를 국내에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부기(附記)에 따르면 이 묘지석은 하남성(河南省) 신안현(新安縣) 철문진(鐵門鎭)의 천당지재(千唐誌齋) 6원(院) 2호창(號窓)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千唐誌齋藏誌』上冊 p.397에 묘지명 탁본이 실려 있음), 묘지석의 높이와 너비는 각각 59cm이고, 묘지명은 1행에(行) 28자씩 모두 28행으로 되어 있다. 글씨는 정서(正書)로 되어 있고, 천(天), 천(授), 년(年), 재(載), 월(月), 일(日), 신(臣), 정(正)자는 칙천무후(則天武后)의 제자(製字)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문장과 글씨를 쓴 사람은 묘지명에 드러나 있지 않다.

고현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증조(曾祖)인 고보(高寶)는 고구려에서 도독(都督)을 역임하였고, 할아버지 고방(高方)은 평양성(平壤城) 자사(刺史)를 역임하였다. 또 아버지인 고렴(高廉)은 고구려에서 어느 직책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에서 천주(泉州) 사마(司馬)로 추증되었다. 이제 주인공의 연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42년[보장왕(寶臧王) 원년] : 출생 [자(字)는 귀주(貴主)]

667년[보장왕(寶臧王) 26년] : 천남생(泉男生)을 따라 당나라로 들어가 장안성(長安城) 안에 살게 됨(천남생(泉男生)의 묘지명에 따르면, 건봉(乾封) 원년(666)에 아들 천헌성(泉獻誠)을 당에 입조(入朝)시켰고, 자신은 이듬해에 당나라로 들어갔다가 총장(總章) 원년(668)에 돌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다시 당나라로 개선하였다. 그런데 고현(高玄)이 고구려 멸망시 당나라 군대에서 활동하였으므로 667년에 당나라로 들어간 것으로 판단됨).

668년[보장왕(寶臧王) 27년] : 당나라 군대의 선봉장으로 평양성을 공격함. 이 때의 공적으로 의성부(宜城府) 좌과의도위(左果毅都尉) 총관(摠管)에 제수됨.

683년[당(唐) 홍도(弘道) 원년] : 관등이 한 계단 올라서 운휘장군(雲麾將軍)이 됨.

686년[수공(垂拱) 2년] 2월 : 신무군(神武軍) 통령(統領)으로 파견됨.

687년[수공(垂拱) 3년] 4월 : 돌궐(突厥)을 격파하여 우옥검위(右玉鈐衛) 중랑장(中郞將)으로 제수됨.

689년[영창(永昌) 원년] : 칙명을 받아서 여러 주(州)에서 고구려(高句麗) 병사(兵士)를 선발함.

이 해 7월 : 다시 칙명을 받아서 낙주(洛州)의 병사(兵士)를 선발함. 곧 신평도(新平道) 좌삼군(左三軍)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돌궐(突厥) 정벌에 나섬.

690년[천수(天授) 원년] □월 9일 :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에 제수됨.

이 해 10월 26일 : 49세를 일기로 낙양(洛陽) 합궁현(合宮縣)의 자택에서 병사(病死)함.

691년[천수(天授) 2년] 2월 : 묘지명이 작성됨.

이 해 10월 18일 : 낙양(洛陽) 북망산(北邙山)에 장례지냄.

 

고현과 그의 선조들은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묘지명을 통하여 고보(高寶)·고방(高方)·고렴(高廉)·고현(高玄)이란 4명의 고구려인을 새로 찾아냈다는 점에서 우선 그 의의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에 시사점이 되는 다음 몇 가지 점을 더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고현(高玄)을 ‘遼東 三韓人’이라 한 점이 눈에 뜨인다. 기왕에 알려진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명을 검토해보면, 천남생(泉男生)은 ‘遼東郡 平壤城人’, 고자(高慈)는 ‘朝鮮人’, 천헌성(泉獻誠)은 ‘其先高句驪國人’, 천남산(泉男産)은 ‘遼東 朝鮮人’, 천비(泉毖)는 ‘京兆 萬年人’, 고진(高震)은 ‘渤海人’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고현을 요동 삼한인(遼東 三韓人)이라 한 것은 천남생(泉男生)과 천남산(泉男産)의 예에 비길 수 있는 것으로서, ‘遼東(郡)에 속한 三韓人’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요동군(遼東郡)은 진(秦)나라 때부터 설치되어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맺다가 385~405년 사이에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는데, 그 뒤에도 중국에서는 고구려 왕을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책봉해왔다. 예를 들어 520년에 안장왕(安臧王)을 안동장군(安東將軍)·령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고, 624년에 영류왕(榮留王)을 상주국(上柱國)·요동군왕(遼東郡王)·고려왕(高麗王), 643년에 보장왕(寶臧王)을 요동군왕(遼東郡王)·고려왕(高麗王)으로 책봉하였다. 한편, 멸망 후인 677년에는 고장(高藏)[보장왕(寶臧王)]을 요동도독(遼東都督)·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686년에는 그의 손자인 고보원(高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당나라인들이 고구려인들을 지칭할 때에 요동(遼東)이나 조선(朝鮮)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검토할 것은 고구려인(高句麗人)을 삼한인(三韓人)으로 호칭한 점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7세기 초반부터 삼국(三國)을 삼한(三韓)이라 불러 왔는데, 이것은 3개의 한(韓)과 3개의 국(國)을 각각 일대일로 대응시킨 것이 아니라 3한과 3국을 뭉뚱그려 포괄적으로 인식하면서 나타난 결과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盧泰敦,「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韓國史硏究』38, 1982 pp.130-133). 그렇지만, 645년에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인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을 마한(馬韓) 추장(酋長)이라 한 사례를 염두에 둔다면, 적어도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마한(馬韓)으로 인식한 전제 위에서 삼한(三韓)이란 용어를 사용한 듯하다. 이렇게 고구려를 마한으로 부르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682년에 작성된 부여융(扶餘隆)의 묘지명(墓誌銘)에 시사되는 점이 있다. 서문(序文)에 “그의 기개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에 드날렸다”고 하면서, 명문(銘文)에는 고구려와 관련된 ‘河孫[하백(河伯)의 자손]’, ‘㴲水(淹㴲水)’, ‘桂婁’, ‘遼川(遼河)’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백제와 고구려를 동일 계통의 국가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아마 이러한 인식을 저변으로 하면서 종래에 마한(馬韓)을 백제와 동일시하던 것이 고구려에까지 점차 확대되어 갔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면 고현을 삼한인이라 한 것은 고구려는 마한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 고구려 유민의 당나라에서의 행방과 활동에 관한 것이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로는 기왕에 몇 편이 발표되었는데, 고현(高玄)의 묘지명은 여기에 새로운 사실을 보충해주고 있다. 우선 주목되는 점은 돌궐(突厥)이 당나라를 공격해 왔을 때인 영창(永昌) 원년(689)에 칙명을 받들어 ‘제주(諸州)에서 고구려(高句麗) 병사(兵士)를 선발’하였던 사실이다. 이것은 고구려 병사들을 당나라로 잡아간 뒤에 여러 주에 분산시켜 수용하였던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개원(開元) 25년(722)에 편찬된『당육전(唐六典)』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이 편찬된 8세기 초반까지도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지역의 6개 주(州)에 고구려 병사를 강족(羗族) 병사와 함께 단결병(團結兵)으로 분산시켜 놓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현(高玄)은 감숙성에 분산 배치되어 있던 고구려 병사들을 다시 수습하여 돌궐(突厥)을 방어하는 군대에 편입시켰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고현(高玄) 자신의 행적도 고구려 유민의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그는 당나라로 망명한 뒤에 천남생(泉男生)처럼 장안성(長安城) 안에 거주하는 우대를 받았다. 그 뒤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데에 선봉장으로 나섰고, 돌궐(突厥)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에도 참가하였다. 특히 687년에 돌궐을 격퇴시킬 때에는 백제 유민인 흑치상지(黑齒常之)도 참가하였던 사실로 보아서,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이용하여 돌궐을 격퇴시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흔히 구사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로써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에서 주로 군사적 활동에 참여하였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셋째, 고구려 지방제도와 관련된 문제이다. 고현(高玄)의 증조는 도독(都督)을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는 평양성(平壤城) 자사(刺史)를 역임하였다고 하였다. 고구려 말기의 지방제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녹살(傉薩)을 당나라의 도독(都督)에 비교하고 처려근지(處閭近支)[도사(道使)]를 당나라의 자사(刺史)에 비교한 기록을 따른다면, 증조는 대성(大城)의 책임자인 녹살(傉薩)을, 할아버지는 그보다 아래의 처려근지(處閭近支)[도사(道使)]를 역임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자국(自國)의 고유 관직을 당나라 관직으로 대응시켜 서술한 예는 흑치상지(黑齒常之)와 흑치준(黑齒俊)의 묘지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흑치상지 묘지명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달솔(達率)을 역임하였다고 하였는데, 그의 아들 묘지명에는 각기 자사(刺史)와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자(高慈) 묘지명에 그의 할아버지가 삼품(三品)·책성도독(柵城都督)·위두대형(位頭大兄)을 역임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책성(柵城) 도독(都督)이라고 하여 구체적인 지명과 함께 도독(都督)이 등장하는 것은 고현(高玄)의 할아버지가 평양성(平壤城) 자사(刺史)였다는 표현과 상통하는 것으로, 마치 고구려에서 실제로 도독(都督)과 자사(刺史)의 관직명이 쓰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묘지명을 작성할 때에 고구려 고유의 관직 대신에 이에 해당하는 당나라 관직명으로 대체하였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 말기에 자체적으로 고유의 관직명과 함께 중국적인 관직명을 병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기록이 워낙 빈약하여 어느 쪽이 옳은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므로 추후의 과제로 남기도록 하겠다.

이에 더하여 평양성(平壤城)이 도성(都城)이었으므로 변방의 책성(柵城)보다 위상이 분명히 높았을 터인데, 왜 도독(都督)보다 한 단계 아래인 刺史라 하였는지도 의문이다. 그동안『수서(隋書)』고려전(高麗傳)에 “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이란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구려 후기의 지방제도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수도를 중심으로 다시 정리해본다면, 수도가 전국 5부(部)의 하나인 내부(內部)에 해당한다는 설과 수도에 5부(部)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설로 나뉜다. 따라서 수도에 몇 명의 책임자가 있었는지는 이 가운데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문제는 그 책임자가 당나라의 도독(都督)에 해당되는 녹살(傉薩)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녹살(傉薩)과 고현의 묘지명에 나오는 평양성(平壤城) 자사(刺史)를 어떻게 연계시켜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 남게 된다. 이미 수도에 최고 책임자인 녹살(傉薩)이 있었으므로, 그 아래에 자사급(刺史級)에 해당하는 처려근지(處閭近支)[도사(道使)]가 따로 두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여러가지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일단 문제를 제기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이상으로 묘지명(墓誌銘)과 관련하여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보았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묘지명이 더 발견되어 고대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고현묘지명(高玄墓誌銘)

 

대주(大周)의 고인(故人)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표도위(行左豹韜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고부군(高府君) 묘지명(墓誌銘) 및 서문(序文)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이다. 옛날 당나라 왕실이 일어나 천하를 병탄하자 사방이 호응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투항해왔지만, 동이(東夷)는 복종하지 않고 청해(靑海)를 점거하여 나라를 유지하였다. 공(公)은 올바른 법도에 뜻을 두었고 다가올 일을 미리 아는 지혜가 있어서, 저 백성들을 버리고 천남생(泉男生)을 따라와 교화를 받들었고, 황제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동쪽으로부터 귀순해오니, 서경(西京)을 본향으로 삼고 적현(赤縣)에 이름을 올렸다. 증조(曾祖)는 고보(高寶)로서 본주(本州) 도독(都督)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고방(高方)으로 평양성(平壤城) 자사(刺史)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고렴(高廉)으로 당나라에서 천주(泉州) 사마(司馬)로 추증되었다. 모두 삼한(三韓)의 귀족으로 누대에 걸쳐 현달하였고, 동이(東夷)의 이름난 현인(賢人)으로 계속해서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이렇게 공(公)과 후(侯)가 필시 반복되는 것은 대대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리라.

공(公)은 솥을 들어 멜 정도로 굳센 재질을 지녔고, 산을 뽑아낼 만큼 장한 기운을 품었으니, 그의 용맹을 높이 사 요동(遼東)을 토벌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공(公)은 과연 고구려의 옛 신하로서 형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평양(平壤)을 크게 격파하는 데에 최선봉(最先鋒)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공을 세워 의성부(宜城府) 좌과의도위(左果毅都尉) 총관(摠管)에 제수되었다. 아울러 공(公)의 지혜와 용기를 사서 행군(行軍)을 주관하도록 따로 주천(奏薦)되었다. 이리하여 변방에서 그의 자취를 두려워 하였고, 그가 쏜 화살이 돌다리에 깊숙이 박혀 있으니, 여러 번 발탁되어 관직과 관품을 제수받았다. 또 홍도(弘道) 원년(683)의 유제(遺制)를 받들어 외관(外官)의 등급을 하나씩 높여주게 되자, 관직은 그대로인 채 관등만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올랐다. 한 번 정벌을 따라 나서면 10년이 되어서야 돌아와도, 충성스런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힘써 수고함에 오히려 남음이 있었다. 수공(垂拱) 2년(686) 2월에 칙명을 받들어 신무군(神武軍) 통령(統領)으로 파견되었고, 3년(687) 4월에 적(돌궐)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여 계주(薊州) 북쪽에 그의 명성을 날렸고 연산(燕山) 남쪽에서 그의 업적을 우러러 보았으니, 곧이어 우옥검위(右玉鈐衛) 중랑장(中郞將)으로 제수되었다. 또 영창(永昌) 원년(689)에 칙명을 받들어 여러 주(州)에서 고구려(高句麗) 병사(兵士)를 선발하였고, 그 해 7월에는 다시 칙명을 받들어 낙주(洛州)의 병사(兵士)를 선발하였으며, 곧 신평도(新平道) 좌삼군(左三軍)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정벌에 나섰다. 천수(天授) 원년(元年)(690) ▨월 9일에 제서(制書)의 은택(恩澤)을 받아 좌표도(左豹韜) 행중랑장(行中郞將)으로 다시 제수되었다. 그의 집안은 왕실 가문이었으니 먼저 곽거병(霍去病)의 반열을 따른 것이요, 벼슬은 표도위(豹韜衛)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염파(廉頗)가 조(趙)나라에서 등용된 것과 같음이로다. 생각컨대, 공은 오랫동안 장한 절개를 품었고 일찍이 웅대한 계책을 짊어졌구나. 두헌(竇憲)이 연연산(燕然山)에 공적을 새겼어도 그의 원대한 방략에 수치를 느꼈고, 마원(馬援)이 교지(交阯)의 동고(銅鼓)를 녹였어도 그의 크나큰 재주에 부끄러워 하였다. 이미 천년이 되어도 뒤따르기 어려운 공적을 세웠으니 백년이 지난들 쉽게 사라지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돌이 부러지는 슬픔을 맛보게 되었고, 홀연히 태산(泰山)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도다. 천수(天授) 원년(元年)(690) 10월 26일에 병을 얻어 신도(神都) 합궁현(合宮縣)에 있는 자택에서 운명하니 이 때 나이 49세였다. 아, 덧없는 인생은 머물지 않아 현명한 사람이 멀리 떠나버리니, 슬프고 슬프구나. 대주(大周) 천수(天授) 2년(691) 신묘년(辛卯年) 10월 18일에 북망산(北邙山) 언덕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무덤 속이 어둡고 깊으니 마침내 다시 볼 기약이 없고, 상여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니 다시(?) 말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졌구나.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것을 탄식하고,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뀔 것을 두려워 하여, 돌에 공적을 새겨 명(銘)으로 삼고자 한다.

옛날에 연(燕)의 보배가 되었다가 이제 진실로 한(漢)의 보물이 되었구나. 대당(大唐)의 날랜 장수였고 무주(武周)의 장한 신하였도다.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도다. 넉넉함이 있다고 칭송되니 대대로 인재가 끊이지 않았도다. 이것이 첫째이다.

엄정하고 공경스럽도다 용맹스런 장부여, 높고 뛰어나도다 훌륭한 문장(?)이여. 어릴 때부터 특출나게 뛰어나더니 북방에서 충성스러움과 올바름으로 드날렸도다. 귀신과 같이 사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려 거짓을 버리고 천자(天子)께 귀순하였도다. 종횡으로 기개를 떨치니 어찌 곽거병(霍去病)을 부끄러워 하겠는가. 이것이 둘째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에 출정하여 강한 오랑캐 장수들을 목베었도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전장에 나가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구나. 어찌 활과 말뿐이겠는가 높은 지략(智略)의 덕택이라. 그에게서 용맹과 강건함을 취하는 것은 썩거나 마른 나무를 꺾어내는 것만큼 쉬운 일이로다. 이것이 셋째이다.

개선한 지 오래지 않았고, 전장에서 돌아온 말이 아직 가까이에 있구나. 옆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아직(?) 아름답고, 즐거움도 미처 그치지 않았도다. 갑자기 고질병에 걸려 혼백이 무덤 위에 날게 되었구나. 흰 수레 나아가고 붉은 깃발 홀연히 세웠도다. 이것이 넷째이다.

무덤 길 쓸쓸하고 저승 길 아득하구나. 나무는 비통해하고 바람이 이는데 산은 차갑고 날이 저무는도다. 친척들이 구슬피 우니 나그네도 슬퍼하는구나. 한 번 무덤 문이 닫히니 천년으로 기약하도다. 이것이 다섯째이다.

신묘(辛卯)(?) 2월.

 

大周故冠軍大將軍行左豹韜衛翊府中郞將高府君墓誌銘幷序」

 

君諱玄字貴主遼東三韓人也昔唐家馭曆幷呑天下四方合應啓顙來」

降而東夷不賓據靑海而成國公志懷雅略有先見之明棄彼遺甿[從]男」

生而仰化慕斯 聖敎自東徙而來王因而家貫西京編名赤縣曾祖寶」

任本州都督祖方任平壤城刺史父廉唐朝贈泉州司馬竝三韓貴族積」

代簪纓九種名賢蟬聯冠冕公侯必復代有人焉負扛鼎之雄材鬱拔山」

之壯氣有 勑▨其驍勇討以遼東公誠舊人實爲諳億大破平壤最以」

先鋒因之立功授宜城府左果毅都尉摠管以公智勇別奏將行關塞悚」

其餘塵石梁飮其遺箭頻蒙擢用授以官班又奉弘道元年遺 制外官」

各加一階蒙授雲麾將軍本官如故一從征討十載方還忠赤無虧劬勞」

有裕至垂拱二年二月奉 勑差行爲神武軍統領三年四月大破賊徒」

薊北振其英聲燕南仰其餘烈俄而蒙授右玉鈐衛中郞將又以永昌元」

年奉 勑差令諸州簡高麗兵士其年七月又奉 勑簡洛州兵士便充」

新平道左三軍摠管征行天授元年▨月九日 恩制改授左豹韜衛行」

中郞將門題鶴禁先從去病之班衛▨豹韜終得廉頗之選惟公久懷壯」

節早負雄圖刻石燕然竇憲慙其遠略[鑄]銅交阯馬援媿以宏材旣千載」

難追百年易盡俄悲石折奄見山頹以天授元年十月卄六日遘疾終於」

神都合宮之私第春秋四十有九嗟乎風燭不停悊人長逝嗚呼哀哉粤」

以大周天授二年  辛卯十月  朔十八日  遷窆於北邙之原」

禮也泉臺杳杳終無再見之期蒿里[綿][綿]永絶▨言之會歎桑田之有革」

懼陵谷之將移勒石紀功遂爲銘曰昔爲燕寶今誠漢珍大唐驍將」

隆周壯臣早從簪紱傳之搢紳時稱有裕代不乏人其一肅肅勇夫昻昻詞」

▨弱齡岐嶷北齒忠正知機其神背僞歸 聖縱橫倜儻何慙去病其二出」

▨絶域斬將强胡不惜身命戰必忘軀豈唯弓馬全高智謀取彼驍健拔」

朽摧枯其三旋凱非遙歸鞍尙邇爪牙▨佳歡娛未已俄纏固疾魂飛蒿里」

素車就駕朱旗忽起其四蒿塗寞寞泉路[悠][悠]樹悲風起山寒日收親戚慟」

哭行旅傷憂墓門一掩期以千秋其五」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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