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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 연구

관동대지진을 응시하는 세 개의 시선 - 郭沫若•李箕永•中島敦.

작성자낙민|작성시간15.11.20|조회수4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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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을 응시하는 세 개의 시선*

―郭沫若․李箕永․中島敦

金良守**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郭沫若,「백합과 토마토」,「닭이 돌아온 이야기」

Ⅲ. 李箕永, 『두만강』

Ⅳ. 나카지마 아츠시, 「순사가 있는 풍경」

Ⅴ.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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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이 연구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의 기억이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인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동시기 문학작품에 각각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여기서의 ‘관동대지진’이란 1923년 9월 1일 도쿄에서 진도 7.9의 강진 발생 당시 재일 한국인이 겪은 대규모 학살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지진 직후에 ‘조선인이 방화하고 독약을 뿌렸으며 온갖 폭행을 저질렀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거리에서는 일본 군인, 경찰, 자경단원이 길가는 사람에게 ‘15엔 50전(十五円 五十錢:쥬우고엔 고쥬센)’이라는 일본말을 시켜보아 잘 발음하지 못하는 이에 대해서는 ‘후테이센진(不逞鮮人)’이라 하여 학살이 자행되었다. 당시 피해자만도 6,0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미증유의 학살사건에 대하여 1945년 이전 일본에서는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고, 패전 후에야 연구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관동대지진’에 대한 일본사회의 관심은 당시 살해된 저명한 아나키스트 大杉榮 등 일본의 진보적 운동가들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재일 한국인 학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재일 한국인 학살에 대한 연구는 주로 재일교포 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姜德相의『關東大震災』(中央公論社,1975) 이래 30년간 일본 내 자료발굴과 연구결과는 일정하게 축적되어 왔다. 반면에 한국사회에서는 미증유의 재외 한국인 학살사건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서 조사를 요구하거나 자료제출을 요구한 적이 없고, 일본 정부도 문제를 인정하고 사죄한 적이 없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전 일본 立敎大學 사학과 교수 야마다쇼지(山田昭次)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의 입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적어도 그들이 범한 납치사실은 인정했고 또 사죄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 국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조선인 학살 책임에 대해 한 마디도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표명한 적이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한국과 일본의 관계 속에서만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문제는 중국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사회의 또 다른 타자 중국인 역시 일본인들의 집단적 광기에 의해 희생되어, 7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관동대지진에 대한 중국 측의 관심은 주로 王希天(1896~1923)이라는 인물에게 맞추어져 있다. 중국 연구자 楊彪의 조사에 따르면, 지진 발생 직후인 1923년 9월 3일 현재의 東京都 江東區 大島 주변에서 중국인 노동자 수백명에 대한 집단학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재일화교노동자공제회’의 회장을 맡고 있던 王希天은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大島町에 들렀다가 체포되었고, 9월 12일 새벽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王希天의 살해소식은 곧바로 중국에 알려졌고, 중국정부에서는 일본에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일본당국의 방해로 조사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3년 11월 일본 내각의 각료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진상을 은폐하고 비밀을 엄격히 지키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讀賣新聞』 등 매스컴에도 압력이 가해졌다. 사건 발생 후 80여 년이 지났지만, 王希天에 대한 중국 측의 관심 또한 적어, 아직까지 희생의 진상은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 수가 워낙 많았던 점을 고려할 때, 관동대지진은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 뿌리깊은 트라우마를 형성했으며, 이는 이미 다수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표현되기도 했다. 많은 작품 중에서 이기영의 『두만강』을 고른 것은, 작가의 직접적 체험이 작품에 반영되어 관동대지진 당시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잘 반영되어 있다는 판단에서 였다. 이에 비하여 중국문학에서 관동대지진의 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었던 것 같다. 아마도 郭沫若의 경우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그리고 「닭이 돌아온 이야기(鷄之歸去來)」,「백합과 토마토(百合與番茄)」등 郭沫若의 작품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중국인 희생자가 아니라 조선인 희생자이다. 본론에서는 일본에 살고 있는 중국인의 시각을 통해 본 관동대지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분석될 것이다. 일본문학의 경우, 쓰보이시게지(壺井繁治)의 장시 『十五円五十錢』(1948)과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의 장편소설 『關東大地震』(1973)을 위시한 여러 작품들이 있으나, 본고에서는 조선에서 다년간 생활한 바 있는 나카지마 아츠시(中島敦)의 「순사가 있는 풍경(巡査の居る風景)」을 통해서 일본인의 심리가 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郭沫若,「백합과 토마토」,「닭이 돌아온 이야기」

역사에 있어서는 한국과 중국의 관련성이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문학으로 들어오면 상황이 좀 다르다. 현대중국의 유명작가들, 혹은 그들의 작품 중 한국과의 구체적인 관련성을 언급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東北作家’들은 다소 논외로 하고, 현대문학사의 중심부에서 거론되는 ‘經典作家’들, 예컨대 魯迅․茅盾․老舍․曹禺․張愛玲․沈從文 등의 작품에서는 한국의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그나마 내셔널리즘에 비판적이었던 巴金의 경우 「髮的故事」․『火』 등에서 조선인 혁명가의 모습을 남겨놓은 정도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초기작 「목양애화(牧羊哀話)」(1919)에서 조선의 어느 귀족가문의 몰락을 통해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조선의 슬픈 국운을 묘사한 바 있고, 「백합과 토마토(百合與番茄)」․「닭이 돌아온 이야기(鷄之歸去來)」에 ‘관동대지진’을 등장시킨 郭沫若은 중국작가로서는 드물게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주목한 경우라 할 것이다.

郭沫若의 1923년작 「백합과 토마토(百合與番茄)」를 보기로 하자. 초기의 이른 바 ‘신변소설’에 속하는 이 작품에는 郭沫若을 연상시키는 주인공 ‘나’와 C군과 F군, 그리고 창조사 성원인 成仿吾가 등장한다. ‘나’의 벗 C군은 생계를 위해 농장에서 일하지만, 작품창작에 대한 열정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이다. C군은 창작원고와 편지를 보내오면서 나와 사귀게 되었고, 한 번은 成仿吾와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혼인문제에 대하여 열정적인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成仿吾는 결혼 실패로 몹시 고통을 겪은 인물이다. ‘나’는 成仿吾가 번역한 시 「Vain Hope」를 읽고, 그의 처지와 너무 유사하다는 생각에, 그가 쓴 것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화답시를 쓰기도 했다. 그 시의 내용은 백합꽃 피는 시절은 지났어도 ‘그녀’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에 관한 것이다. C군도 사랑에 관한 소설을 한 편 썼는데, 그 내용은 성탄절에 한 노인이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에게 편지를 쓰지만, 부치지 못하고 서랍 속에 넣어두고는 성탄절이 돌아올 때마다 그 편지를 꺼내어 혼자 읽으며 환상에 잠기곤 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마음 속 깊이 공감한다. 어느날 ‘나’는 멋진 서양 책들을 구경하고자 시내의 에번즈 서점에 들르지만, 초라한 행색으로 인해 점원으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화가 나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욕을 퍼부어주고 서점을 나선다. ‘나’는 농장을 찾아가 C군과 반갑게 조우하고, 토마토 2파운드를 샀다. ‘나’는 공평한 흥정을 통해 존귀한 감정을 느끼게 되며, C군과 농장의 소박하면서도 건강한 분위기에 고무되어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끝을 맺는다.

작품 속 관동대지진에 대한 언급은 ‘나’와 C군과 F군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막 도쿄에서 돌아온 F군은 관동대지진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지진 때 일어난 화재는 모두 조선 사람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불을 놓았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당시에 떠돌고 있었으니까요. 일본의 청년단이요, 자경단이요 하는 놈들은 그야말로 미친개나 다름없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을 많이 죽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노동자들도 적지 않게 죽었습니다. 내가 직접 목격한 건데, 2~3명의 경찰이 결박을 지운 100여명의 일본근로자들을 어느 지방의 유치장에 압송하는 도중, 한 무리의 청년단원 놈들이 불문곡직하고 그들을 마구 때려 죽였습니다.

F군은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방화를 했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대량 살육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아울러 자경단원들의 잔인무도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작품의 말미에 1923년 12월 4일 밤에 원고를 완성했다고 적혀있는데,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날이 1923년 9월 1일이니, 이 작품은 관동대지진 직후의 3개월 안에 씌어진 것이다.

郭沫若 자신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진동․ 균열․ 화재 등 지진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고, 학살의 상황 역시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정부에 의해 학살사건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사건 직후에 씌어진 이 소설 속 관동대지진의 상황은 상당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작품 자체로 볼 때, 작품 속 관동대지진 묘사가 전체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면을 생각해보면,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작품 제목의 ‘백합’은 첫사랑의 추억 혹은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하며, ‘토마토’는 노동의 신성함을 의미한다. 두 개의 어울리지 않는 명사의 결합같이 보이지만, 郭沫若은 작품을 통해 배금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예술가의 생활의 고통, 그리고 척박한 현실 속에서 더욱 빛나는 예술적․ 도덕적 가치관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해도 ‘가난한 예술가의 고뇌’와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라는 모티프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작품 속에서 ‘관동대지진에 대한 묘사’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은 도쿄에서 막 돌아온 F군이 일본 사회의 최근 뉴스를 전달하는데 있어서의 ‘생생함’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한 도시 上海에서 돈 못버는 예술가와 도쿄의 외국인 이주노동자 간의 ‘주변성’이라는 공통적 요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역시 연계의 당위성이 약하다.

다음은 「닭이 돌아온 이야기(鷄之歸去來)」(1933)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나’로, 郭沫若을 연상시키는데, 그의 일본인 부인 안나도 실명으로 등장한다. ‘나’는 도쿄 외곽의 전원주택에서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다. 집 부근의 공지에는 채소밭과 화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이웃에는 S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는데, 그 집과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왕래하는 사이이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이따금 형사가 찾아와 간섭을 하곤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 부인은 닭 기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날 H목수의 부인이 부화용으로 암탉을 빌려갔다가 5주 만에 돌려주었다. 5주 만에 돌아온 닭을 다른 닭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그 외톨이 암탉이 갑자기 보이질 않았다. 암탉의 행방을 두고 가족들의 추측이 분분했다. 다른 닭들의 따돌림 때문에 다른 곳으로 도망갔거나, 족제비에게 물려갔거나, 아니면 사람이 훔쳐갔을 거라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사흘 만에 닭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 닭이 어디에 갔다온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해졌다. ‘나’는 H목수의 부인에게 혐의를 두었다. ‘나’는 그녀가 암탉에 미련을 두고 있었고, 그래서 돌려준 후 다시 훔쳐갔지만 결국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또다시 돌려주게 된 것이라 추리했다. 그녀는 계사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구조를 잘 알고 있었고, 부근의 지리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H목수의 부인이 집으로 왔고, 옆집 S부인도 와서, 세 일본 여성이 모여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우연히 대화 도중 ‘조선인’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

“맞아요, 조선인!”이라는 S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조선인이 닭을 훔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배고픈 조선인이 닭을 훔치자, 그의 친구가 “그 닭은 중국인의 것이니 돌려주자. 중국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경찰에게 모욕당하는 인간이니.”라고 한다. 그래서 사흘 만에 닭을 돌려준 것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상상한다. 손님들이 가고난 후, ‘나’는 안나에게 여자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했었느냐고 묻는다. S부인은 조선인이 훔쳤을 거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 여성을 윤간한 후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는 물론 터무니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믿는데도 이유가 있다. 조선인들은 땅을 뺏기고 착취자 아래에서 노예로 생활한다. 그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지 못했다. 주인공 ‘나’는 그렇다 해도 일본에 사는 조선인이 모두 좀도둑이거나 소문이나 퍼뜨리는 자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작품은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행방불명된 닭의 소재를 추측하는 과정을 통해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편견”이라는 주제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주인공 ‘나’는 “맞아요, 조선인!”이라는 S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일본사회 내에서 조선인의 위치에 대한 상념에 잠긴다.

1923년의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쿄는 10년을 잘 경영해온 결과, 최근 들어 더욱 확대되어 일약 일본인이 과장하는 “세계 2위”의 대도시가 되었다. 피상적인 관찰자는 일본인의 건설능력을 극구 찬양하고 그들의 도쿄를 불속에서 재생한 봉황이라고 형용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봉황을 재생시킨 불은 바로 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바로 그 조선인이 피운 것이다.

다년간 일본에서 생활한 작가 郭沫若의 세밀한 관찰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나’의 변호는 계속 이어진다. 조선인 노동자는 건설현장의 힘든 일을 맡아하고 있었는데, 위험한 작업환경과 형편없는 식사,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하루 10시간 이상씩 일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대가는 ‘실업’이라는 것이었다. 닭이 없어졌는데 왜 조선인을 의심하는 것인가. 에드워드 아이덴스티커는 『Low City, High City』에서 관동대지진시 조선인 학살과 관련하여, “조선인에 대해서 무조건 최악을 상상하는 경향, 아니 경향이라기 보다 소망은 일본 근대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고 했던 최악의 상상이 10년 후인 1933년에도 아무렇지 않게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조선인 노동자와의 사이에서 ‘정신적 유대’를 상상한다.

필자는 앞서 이 작품에 대한 선행연구로 藤田梨那의 「郭沫若『鷄之歸去來』中的變形抵抗與對韓意識」라는 글을 소개한 바 있다. 藤田梨那는 이 글에서 주로 재일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郭沫若의 동정과 연민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했는데, 이 점은 본고의 시각과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는 바, 그러한 시각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기술해 보고자 한다.

만약 조선인이 중국인에게 닭을 돌려주는 상상으로 소설을 마쳤더라면 좋았겠지만, 그 후의 마지막 제 4장의 전개는 다소 터무니 없다. 뒷부분의 내용과 결부지어 주인공 ‘나’의 정체성 문제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나’는 애초에 닭을 H목수의 부인이 훔쳐갔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맞아요, 조선인!”이라는 S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조선인이 훔친 것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조선인’이 훔쳤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단정은 애초에 ‘나’가 한 것이 아니라, 세 일본여자가 한 것이다. 근거없이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무식한 행위에서 ‘나’는 살짝 벗어나 있다. ‘나’는 다만 그 말에 동조했을 뿐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쉽게 동조했을까. 또 한편으로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 여성을 윤간하고 살해한 후 그 인육을 먹었다는 흉측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하도록 한 후, “그들이 그렇게 믿는데도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관동대지진 당시 끔찍한 살육이 전개된 가장 직접적 계기가 바로 이러한 ‘유언비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 ‘유언비어’를 그대로 반복하여 옮기고 있는 주인공의 행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 ‘나’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중국인 ‘나’는 심정적으로는 조선인을 동정하고, 조선인 노동자의 편에 서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그가 서있는 위치는 오히려 일본의 주류사회 쪽에 가깝다. 주인공 ‘나’는 자신이 일본 형사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는 집도 있고 가족도 있으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합숙소에서 생활하고 ‘함바’에서 밥을 먹는 조선인들과는 판연히 다르다. 소설 도입부에서 그의 집을 소개하면서, 이웃에 사는 일본인 가정과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왕래하는 사이라고 묘사되었던 것은 ‘나’가 일본인에 매우 가까운 중국인임을 말해준다. 작품 속 주인공은 외면적으로는 조선인을 동정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상 조선인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는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Ⅲ. 이기영, 『두만강』

1923년 9월 1일 도쿄를 덮친 강력한 대지진은 이후 300회의 여진으로 이어졌고, 대규모의 화재는 과거 에도(江戶)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했던 시타마치(下町) 지역을 모두 태워버렸다. 당시 목조와 벽돌조 건물이 대부분이던 도쿄는 3분의 2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지진과 화재로 인한 사망자 수는 14만 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기영(1895∼1984)은 1930년대에는 좌익계 문학단체 KAPF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에는 ‘월북’하여 북한의 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까지 지냈던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작가이다. 이기영은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돈벌이를 하기도 했다. 1923년 9월 1일 동경대지진 당시에는 직접 조선인 학살장면을 목도했으며, 사건 후에는 곧바로 귀국한다. 『두만강』은 그가 쓴 장편 대하소설인데, 그는 이 작품으로 북한에서 인민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전 3부로 이뤄진 이 소설은 제1부에서는 19세기 말엽부터 일제 강제 침탈까지, 제2부는 3․1운동 직후까지, 제3부는 20년대 이후의 사회주의 운동이 항일 무장투쟁으로 조직화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 중 동경대지진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묘사가 매우 핍진하며, 제 7장 전체가 ‘동경대진재’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 한창복은 1922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日本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에 간 그는 유학생들의 사상단체에도 참가하고, 극장과 찻집에도 가보고, 동서양의 서적들을 광범위하게 독서하는 등, 나름 유학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고향사람들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게 된다. 고향에서 살기가 어려워지자 노동일을 해서 돈을 벌고자 일본에 온 고향사람들이 창복이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고향에서 브로커의 말만 믿고 일본에 왔으나, 넉넉지 못한 노임과 비싼 물가에 이것저것 공제하고 나면 정말 남는 게 없는 생활이었다. 창복은 그들이 살고 있는 ‘합숙소’에도 가보았고, 대화를 통해 그들의 비참한 생활을 깨닫게 된다. 郭沫若의 「닭이 돌아온 이야기」에 묘사된 조선인 노동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조선인 노동자들의 존재는 조선인 학살의 배경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상황을 설명하는 단서를 이룬다.

재일 조선인 노동자가 급증한 것은 식민지배로 인한 조선 내부의 농민 배출력과 일본 자본주의의 흡입력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인데, 재일조선인 노동자가 급속히 증가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부터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1차 세계대전 탓에 유럽의 온 나라들이 수출을 멈춘 결과, 일본 공업품에 대한 해외수요가 급증함으로써 급속히 발전해나갔다. 때문에 노동부족 현상이 생겼고, 일본 기업들은 조선에서 값싼 노동 인력 모집에 나섰다. 한편, 당시 조선에서는 농민이 빈곤해져, 경작지로부터 떠나야 하는 상태가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었다. 일본 지배하 조선 농민이 몰락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910년에서 1918년에 걸쳐 행해진 토지조사 사업이었으며, 두 번째 계기는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였다.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서는 많은 농민들이 땅을 빼앗기게 되었고, 산미증식을 통해서 쌀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쌀의 일본 수출은 그 이상으로 늘어나, 조선 농민들은 쌀을 먹기가 전보다도 더 어렵게 되었다. 이와 같이 농업으로 더 이상 생활이 불가능해진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일본과 만주로 흘러들게 되었다. 특히 1923년도에는 재일 조선인 인구가 급증했는데, 그 이유는 3․1운동 직후 조선인의 조선 내외로의 출입국을 제한하기 위해 일본이 행했던 여행증명서 제도가 1922년 12월에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몰락한 농촌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일본에 와서 헛고생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활이 상세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1923년 9월 1일 간다(神田)구에 있는 어느 음식점에 점심식사를 하러 들어간 한창복은 식당에서 지진을 맞게된다.

별안간 지층이 들썩하더니만 상하동(上下動)으로 큰 지진이 시작되는데 창복이는 처음에는 그게 웬 영문인지도 몰랐다. 뒤미처 2층집이 마구 흔들리며 삐걱삐걱 요란스런 소리를 내었다. 얼마나 ‘강진’이었던지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그릇들이 펄쩍 뛰어올랐다가 상 밑으로 떨어진다. 그 바람에 그릇들은 맞부딪쳐서 웽강뎅강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지진은 다시 좌우동(左右動)으로 마치 맷돌질을 하듯 뒤흔들었다. 2층집이 금방 쓰러질 것처럼 요동을 하며 천장이 무너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작가의 직접적 체험이 바탕이 되었던 듯, 지진 당시의 상황을 몹시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진동 직후에 이어진 폭풍과 화재, 앞다투어 도망치는 군중들, 교통두절의 상황,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한 도쿄 시내,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는 유언비어, 자경단원등의 조선인 사냥 등 극도의 혼란상황이 잘 묘사되었다. 히비야공원으로 발길을 옮기던 한창복은 피난민들이 흩어진 가족들을 찾느라 가족의 이름을 쓰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저렇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인의 이름을 쭉 써놓은 성명패를 갖고 있으면, 조선인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본인으로 행세한 한창복은 히비야공원에서 일본인들을 통해 조선인 학살의 끔찍한 증언을 전해 듣게된다. 조선인 노동자를 다마가와(多摩川) 강물에 빠뜨린 후 헤엄쳐 나오는 사람을 도끼로 찍어 강물이 온통 빨갛게 물든 이야기, 길거리에 널린 조선인 시체에 몽둥이질을 해대는 이야기 등 온갖 끔찍한 이야기가 다 있었다.

『두만강』은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국내와 만주에서 일어났던 민중들의 반제반봉건 투쟁을 그린 대하소설로, 사실상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 사건은 작품 전체의 전개와 관련하여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는 없다. 한창복은 작품 속 반면인물인 악덕지주 한길주의 서자로, 관동대지진 후 귀국하게 된다. 일본에 유학가서 관동대지진을 겪고, 곧바로 귀국하는 대목은 작가 이기영의 경험과 일치한다. 金應敎는 「1923년 9월 1일, 도쿄」에서 한국의 적잖은 문인들이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귀국하게 되는 문제에 주목하고, 일본유학생들의 대거 귀국 상황이 한국 프로문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유학갔던 나라에서 자신들에게 가해진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고 어찌 질려버리지 않겠는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 이기영은 24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하며, 25년에는 한국의 좌익작가 단체 KAPF에 가입하여 주류 멤버로 활동한다. 1933년에는 친일작가 이광수가 좌익진영을 폄훼하기 위해 쓴 소설 「혁명가의 아내」를 반박하는 소설 「변절자의 아내」를 쓰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하기도 한다. 1933년에는 대표작 『고향』을 쓰기 시작한다. 1944년에는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협력하지 않고 버티었으며, 산골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는다. 1946년에 월북했고, 1960년에는 『두만강』으로 인민문학상을 수상했다.

Ⅳ. 나카지마 아츠시, 「순사가 있는 풍경」

나카지마 아츠시(中島敦,1909~1942)는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조선에 와서 살았던 적이 있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부친이 경성의 용산중학교로 전근함에 따라,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소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4학년까지 6년간 경성에서 학교를 다녔다. 귀국 후 東京帝大 국문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여고 교사를 하면서 창작에 전념했다. 1941년에는 교사를 퇴직하고 정부기관에 근무하게 되는데, 남양청(南洋廳) 소속으로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팔라우 섬에서 1년간 생활하기도 했다. 1942년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나카지마 아츠시는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그가 일본문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본격적으로 작가생활을 한 것은, 죽기 직전의 채 일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가 남긴 작품도 그다지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산월기(山月記)』가 2차대전 후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에 실리게 됨으로써, 생전에는 무명이었던 나카지마 아츠시는 ‘국민작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지명도를 갖게 되었다.

작품 「순사가 있는 풍경」은 1929년에 발표한 소설이지만, 「1923년의 한 스케치」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작가가 관동대지진을 염두에 두고 썼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작품은 1923년 겨울, 지저분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조교영(趙敎英)은 조선인 순사이다. 그는 전차를 타고 퇴근하면서 예전에 전차에서 마주친 어느 일본인 중학생을 회상한다. 그 중학생은 운전수 바로 뒤에 서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운전수의 말에 조교영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면 나도 싫어”라고 당돌한 눈빛으로 쳐다봤었다. 그 어린 학생의 당돌함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갑자기 전차 안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와, 자세히 들어보니 일본여성이 조선 청년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은 좋은데 “여보”라는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자존심 상한 조선 청년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일본여성이 대비를 이룬다. 출세를 하려면 조선인이 일본어를 해야 하고 일본인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다. 남대문 역앞에 운집한 군중들이 일본에서 조선총독을 기다리고 있다. 차에서 내린 총독이 군중에게 답례하고 승용차에 타는 순간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나 총독을 저격한다. 남자는 저격에 실패했고, 경찰과 대치하다가 자포자기한 듯이 껄껄거리며 권총을 내던진다. 경관들은 그를 체포하려 달려들자, 그는 경찰들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낸다.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은 김동련(金東蓮)으로, 그녀는 막 일을 시작한 창녀이다. 그녀는 어느날 손님과 대화를 하던 중 남편이 관동대지진 때 죽었다는 말을 한다. 손님은 그녀에게 관동대지진 때 있었던 조선인 학살사건을 들려준다. 그제까지 남편이 지진으로 인한 사고로 죽은 줄만 알았던 그녀는 큰 충격을 받고 거리로 뛰쳐나간다.

몇 시간 뒤, 겨우 날이 샌 회색 보도를 동연은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 질렀다. “여러분 알고 있어요? 지진 때 일을.” 그녀는 큰소리로 어젯밤에 들은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들려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눈은 핏발이 서있고 게다가 이 추위에 잠옷 바람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어이없어 오히려 그녀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래서, 놈들이 다 같이 이 사실을 숨기고 있는 거야. 정말로 놈들은.” 마침내 순사가 와서 그녀를 잡았다. “야, 조용히 하지 못해. 조용히.” 그녀는 그 순사에게 달려들더니, 갑자기 슬픔이 북받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외쳤다. “뭐야, 너도 같은 조선인인 주제에. 너도 너도 …… .”

조교영은 패싸움한 학생들의 처벌문제를 두고 경찰서의 과장과 작은 언쟁을 했다가 해고를 당하고 만다. 거리를 방황하던 조교영은 어느 이층집에서 보았던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 자기 처지를 비교해보고, 너무나 큰 자괴심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조교영은 식산은행 앞에서 길바닥에 누워 자는 지게꾼들을 깨우려 하지만, 그들이 아랑곳하지 않자 설움이 솟구치듯 울먹인다. “너희는, 너희는, 이 반도는 ……, 이 민족은 …….”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제국의 순사노릇을 해야 하는 주인공의 비참한 상황을 부각시키고 있다. 늦게나마 지진의 진상을 알게 된 창녀는 실성하듯 저항했고, 이름모를 남자는 총독을 저격했고, 2층집 젊은이들은 혁명을 논하고 있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라는 절규이다. 일본인이 쓴 소설인데, 오히려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를 묻고 있는 점은 색다르게 느껴진다. 이 작품 속 관동대지진은 조교영이라는 인물에게 있어 강력한 트라우마를 형성하게 된다. 학살의 참상을 전해주던 남자는 겁에 질려있다. 그의 대화는 “너의 남편은 아마 ……. 불쌍하게.”라고 무언으로 처리된다. 이야기를 들은 동연의 눈앞에는 벌벌떨며 도망다니다 횃불에 비춰진 남편의 피흘리는 얼굴이 가물거린다. 작가가 1923년 경성을 스케치하는데 있어서 비록 일본인이라고 하는 시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만, 가해자의 죄책감으로 관동대지진의 이야기를 끼워 넣었던 듯하다.

작가는 1929년에 쓴 작품에 “1923년의 스케치”라는 부제를 넣고, 1919년에 있었던 총독저격사건을 삽입함으로써, 조선을 더욱 가공할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 냈다. 그 배후에 있었던 것은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의 조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Ⅴ. 맺는 말

관동대지진을 그린 세 편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일단 이 세 편의 작품에는 서로 다른 민족(Nation)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작가 이기영의 『두만강』에는 진동․ 균열 등 자연현상으로서의 지진의 모습과 겁에 질려 대피하는 사람들의 아비규환의 상황, 그리고 지진 직후에 이어진 자경단원들의 광란적 학살과 공포에 떨며 도망다니는 조선인의 모습이 골고루 잘 묘사되었다. ‘피해자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품에 묘사된 바, 지진 직후 조선인들이 방화를 했다고 하는 유언비어가 생겨났고, 이를 구실삼아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상황은 관동대지진을 다루고 있는 전문저작 등에도 이미 밝혀져 있는 사실이다. 이산가족을 찾는 표찰을 만들어,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에는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의 「순사가 있는 풍경」에는 ‘가해자로서의 공포감’이 전편을 둘러싸고 있다. 창녀 김동련의 ‘손님’은 김동련이 학살의 상황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데에 경악한다. ‘손님’이 김동련에게 조선인 학살을 설명하는 상황은 묘사되지 않고 지나가는데, 이는 작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치적 검열을 의식한 탓도 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차마 구체적으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작가의 공포감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동련의 실성한 듯한 모습에서도 전해진다. 아마도 이런 공포감은 관동대지진 당시 작가가 일본이 아닌 조선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에 보복당할지 모른다’는 의식 때문에 더욱 심해진 것이 아닐까.

郭沫若의 「백합과 토마토」에는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서 관동대지진이 언급되고 있지만, 작품 전체의 주제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화제거리로 그치고만 느낌이다. 대화 도중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중국인도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내셔널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닭이 돌아온 이야기」에서의 관동대지진은 좀 더 작품의 주제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일본사회의 주변인으로서 조선인을 바라보는 郭沫若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따뜻하다. 하지만 작품 속 조선· 일본· 중국의 위치는 너무 고정되어 있다. 조선인이 닭을 훔쳤다고 하는 일본 여성의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을 주인공은 왜 그렇게 쉽게 믿어버리는가. 조선인에 대한 악성루머에 대하여, 그러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나게 된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작품 속 주인공은 일본인의 의식에 가깝지 않은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 일본인들의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일국적 범주를 넘어, ‘동아시아’를 하나의 연구적 패러다임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활발해지고 있다. 물론 대승적․ 발전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과거사를 잘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20세기 동아시아는 불행한 시기를 거쳤고, 그 역사 속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와 혹은 방관자의 모습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과거사를 보는 데에는 서로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내셔널리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분명하게 아는 것. 그리고 또 동시에 나 자신을 돌이켜보는 것. 그것이 동아시아적 공동체를 지향해가는 출발점이 아닐까.

일제 강점하 몰락한 농촌에서 살 수 없어 일본으로 건너가 공사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노동자들, 근대적 신학문을 배우고자 일본으로 유학간 학생들. 그들은 처음 느껴본 지진의 공포와 곧바로 이어진 학살로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을 것이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였고, 고국의 가족들은 이유도 모른 채 오랜 세월을 답답한 심정으로 기다렸을 것이다. 앞에서 다룬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상황이다. 비극의 당사자는 자기가 객관적으로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갔고, 가해자는 학살의 죄에 은폐의 죄를 더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날의 일도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과거’는 기억 속에, 사진 속에, 그리고 이렇게 문학작품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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