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平仲 詩戱에 나타난
詩的 유희성에 대한 고찰
― 集句詩와 藥名詩, 藏頭體를 中心으로*
1)
2)崔晳元* *
目 次
1. 서론
2. 詩戱에 수록된 孔平仲 雜體詩에 나타난 유희성
2.1 集句, 杜詩와 文選을 集句하다
2.2 藥名, 離合을 겻들이다
2.3 藏頭, 寄詩로 활용하다
3. 遊戱를 통한 문학적 위안
4. 결론
1. 서론
전통 중국 문인들의 시에 대한 인식은 비단 “詩言志”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굳
이 明代 출현한 李贄의 “童心”과 公安派의 “聖靈”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漢과
魏晉南北朝 시기 수많은 雜體詩가 창작되었음은 전통 문인들의 관념 속에서 시란
단순히 엄숙하고 문아한 창작 행위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 본 논문은 2014년 5월 30일 숭실대학교에서 개최된 2014년 春季 中國語文論譯學會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 명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강사
朱光潛은 詩論에서 문자 유희는 시가 문학의 발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
후 문인들의 실제 창작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유희는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1) 이처럼 전통 문인들의 詩作은 한편으로는 뜻을 표출해내는
수단이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 추구를 목적으로 행해지기도 하였
다.2) 그런데 역대 문인들의 유희적 시체에 대한 인식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
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본고는 전통 문인들의 詩作에서 나타나는 놀이적 속성
을 규명하고, 유희적 시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정립하는 데 목적을 두고자 한
다. 이를 위하여 본고에서는 100여수가 넘는 雜體詩를 창작한 宋代 문인인 孔平
仲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의 雜體詩 창작 경향과 특징을 살펴보고, 이러한 雜
體詩 창작이 갖는 문학적, 문화적 함의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사실 중국문학사에서 孔平仲에 대한 언급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孔平
仲은 “二蘇三孔”이라 할 정도로 당시 명성이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여기에서 二蘇
라 함은 蘇軾과 蘇轍 형제를 가리키고, 三孔은 孔平仲의 형이었던 孔武仲, 孔文仲
을 합해 일컫는 말이다. 孔平仲은 그의 형들과 더불어 그 文才를 날렸었는데, 일
찍이 宋詩鈔에서 “무중과 그의 형 문중, 동생 평중은 모두 문장으로 이름난 자
인데, 당시 二蘇三孔이라 불렀다.”3)라고 한 언급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黃庭堅 역시 <和答子瞻子由常父憶館中故事>에서 “두 명의 소씨는 이어
진 옥과 같은 아름다움에 이르렀고, 세 명의 공씨는 천하를 삼분한 지위에 서 있
네.”4)라 하였으니, 당시 공씨 삼형제의 명성이 蘇軾, 蘇轍 형제에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孔平仲에게는 7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셋째, 넷째
였던 三孔의 명성이 가장 높았고,5) 그 가운데에서도 孔平仲의 詩才가 가장 뛰어
1) 朱光潛(2008: 4344)
2) 梁德林(1992: 1516)
3) 宋詩鈔 卷十五<孔武仲淸江集鈔>: “(武仲)與兄文仲弟平仲幷有文名, 時稱二蘇三孔.”
4) <和答子瞻子由常父憶館中故事>: “二蘇上連璧, 三孔立分鼎.”
5) 闕里文獻考: “子七, 康仲, 文仲, 武仲, 平仲, 和仲, 羲仲, 南仲, 皆自敎而學, 子多而
賢, 當時以爲盛.”(자식이 일곱이니, 康仲, 文仲, 武仲, 平仲, 和仲, 羲仲, 南仲로, 모두
스스로 가르쳐 배우게 하였는데, 자식이 많으면서도 현명하여, 당시 사람들이 흥성한
집안이라고 여기었다.)
났던 것으로 보인다.6) 그리고 王水照는 蘇軾을 배운 이 중에는 “淸江三孔”이 있는
데, 孔平仲이 蘇軾의 풍격에 가장 가까웠다고 평가한 바 있다.7)
孔平仲은 字가 義甫로, 그 생졸연도는 명확치 않다. 다만, 李春梅에 따르면 三
孔事迹編年에 慶曆 4년(1044년)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는데,8) 여
전히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孔平仲은 治平 2년(1065년)
진사에 급제하여, 秘書丞, 集賢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紹聖年間에 권력을
지닌 이들에게 빌붙고 先烈을 욕보였다는 이유로 校理직이 삭탈되었다.9) 이후에
도 孔平仲에 대한 중상모략은 끊이지 않았는데, 董必이 孔平仲이 常平法을 행하지
도 않고, 官米 60만석을 훼손케 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자, 상소문을 올려 “쌀이 창
고에 보관되었던 것이 5년 반이라, 모두 썩어 먹을 수 없을 텐데, 만약 백성들이
식량이 부족할 때를 이용해서 적당하게 나눠주지 않으면, 장차 쓰레기가 될 것입
니다. 만약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한다면, 신은 감히 죄를 피하지 않겠나이다.”라
고 한 바 있다.10) 이는 孔平仲의 강직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徽
宗이 즉위한 뒤 孔平仲은 朝散大夫, 吏部와 金部郎中에 배수되었지만, 결국 이후
다시 파직되고 만다. 이와 같이 孔平仲은 蘇軾과 마찬가지로 신법파의 정치적 공
격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로 인해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
다. 또한 宋史의 기록에 따르면, 孔平仲은 역사에 능했고, 문사도 뛰어났다고
6) 孫永選 校點(2002: 6)
7) 王水照 主編(2005: 108)
蘇軾은 孔平仲과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蘇軾이 孔平仲에게 보낸
작품으로는 <次韻孔毅父久旱已而甚雨三首>, <次韻孔毅父集古人句見贈五首>, <孔毅父妻
挽詞>, <孔毅父以詩戒飮酒, 問買田, 且乞墨竹, 次其韻> 4題 10首가 전해진다. 蘇軾과
孔平仲이 나누었던 교분에 대해서는 聶言之의 <孔平仲與蘇軾交誼考>를 참고할 것.
8) 李春梅(2002: 6)
9) 宋史 卷三百四十四: “用呂公著薦, 爲秘書丞, 集賢校理. 文仲卒, 歸葬南康. 詔以平仲爲
江東轉運判官護葬事, 提點江浙鑄錢, 京西刑獄. 紹聖中, 言者詆其元祐時附會當路, 譏毁
先烈, 削校理, 知衡州.”
10) 宋史 卷三百四十四: “提擧董必劾其不推行常平法, 陷失官米之直六十萬, 置獄潭州. 平
仲疏言 米貯倉五年半, 陳不堪食, 若非乘民闕食, 隨宜泄之, 將成棄物矣. 倘以爲非, 臣
不敢逃罪.”
하였는바,11) 이와 관련하여 淸江三孔集에 교점 작업을 진행한 孫永選은 孔平仲
이 이룬 문학적 성취는 이전까지 화려하고 부염한 작품이 위주였던 서곤파의 풍격
을 변화시켜 개인의 사상과 감정을 투영한 평담한 시풍에 있다고 설명하였다.12)
뿐만 아니라 詩戱에 수록되어 있는 孔平仲이 창작한 100여수의 雜體詩는 그 수
량뿐만 아니라 다양한 雜體詩의 형식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
니고 있는 바,13) 이에 본고에서는 孔平仲이 창작한 문자 유희 작품 가운데 대표
적인 集句詩와 藥名詩, 藏頭體를 위주로 그의 以戱爲詩 특징에 대해 살펴볼 것이
다.
앞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三孔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孔平仲의 작품세계에 대
한 연구는 그리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三孔의 문
학적 성취를 논하면서 부분적으로 孔平仲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고,14) 본격적으로
孔平仲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는 聶言之의 <孔平仲與蘇軾交誼考>와 蘆莹의 <孔平仲
雜體詩趣談> 뿐이다. 더욱이 聶言之는 蘇軾과 孔平仲의 작품을 통해 두 인물의 문
학적 교류에 대한 논의일 뿐이어서, 孔平仲의 놀이적 시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는 한 편에 불과하다. 물론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孔平仲의 문자 유희 작품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蘆莹의 <孔平仲雜體詩趣談>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으나,
그 내용이 매우 소략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은 孔平仲의 雜體詩의 내용과 그 문학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더 나아가 놀이
를 목적으로 창작된 시가 지닌 문학적, 문화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11) 宋史 卷三百四十四: “平仲長史學, 工文詞.”
12) 孫永選 校點(2002: 6)
13) 宋史 卷三百四十四: “著續世說, 釋稗, 詩戱諸書傳於世.”
14) 三孔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연구 성과로는 李春梅의<臨江三孔硏究>와 陳蓮香, <臨江
三孔的文學活動>, 그리고 陳蓮香, 錢耐香의 <北宋臨江三公的詩歌創作特徵>이 있다.
2. 詩戱에 수록된 孔平仲 雜體詩의 특징
四庫全書提要에서 孔平仲의 詩戱에 대해 “人名, 藥名, 回文, 集句와 같은
것으로, 대개 松陵集에서 잡체를 따로 한 권으로 삼은 것을 모방한 것이다.”15)
라고 한 바 있다. 여기에서 松陵集이란 唐代 문인인 皮日休와 陸龜蒙이 서로 창
화한 작품을 모아둔 작품집이다. 그 속에는 다양한 雜體詩가 출현하는데, 孔平仲
의 詩戱는 바로 이를 모방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孔平仲의 詩戱에는 총 101
題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속에는 四庫全書提要에서 언급하였듯 다양한
雜體詩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1]
시체 작품 수 시체 작품 수
人名4題藏頭17題
郡名1題藥名21題
卦名1題寶塔2題
宿名1題兩頭纖1題
星名1題五雜組1題
婦人名2題集句4題
八音3題平上去入2題
回文1題
총 62題16)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 孔平仲은 <詩戱>에서 다양한 방식의 雜體詩를 수록해
놓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藏頭體17)와 藥名詩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
15) “皆人名藥名回文集句之類, 蓋倣松陵集雜體別爲一卷例也.”
16) 孫永選의 校點 작업에 의거 현재까지 총 70題 작품에 대한 詩體 확인 작업이 이루어
졌을 뿐이다. 나머지 작품들의 경우 단순히 내용상 戱作인 경우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17) 辭海에서는 藏頭體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율시의
마지막 연에 작품의 주제를 밝히는 것, 두 번째는 시구의 첫 글자를 마지막에 숨겨
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孔平仲 문집에 수록된 작품이 모두 古
詩 224題, 近體詩 349題인 것과 비교하였을 때, 詩戱에 수록된 101題의 작품
은 孔平仲 작품 내에서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곧 다양한 형태의
雜體詩가 수록된 詩戱가 당시 문인들의 유희적 시 쓰기를 이해하는 데 의미 있
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본 장에서는 孔平仲의 詩戱에 가장
많은 작품 수를 차지하고 있는 藥名, 藏頭, 集句詩를 중심으로 작품들의 특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2.1 集句, 杜詩와 文選을 集句하다
宋代 王安石에 의해 본격적으로 창작된 集句는 이미 완성된 작품의 구절들을
모아 하나의 완정한 작품을 이루는 詩作의 방식을 일컫는다.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되어 있는 集句詩는 총 4편에 불과하지만, 작품의 편폭으로 본다면 孔平仲 雜
體詩 창작 가운데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중 <寄孫元忠>은 31수의
연작시로 구성되어 있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方逢原借示方干先生詩以集
句詩贈之>는 5首, <文選集句寄愼思, 交代學士. 愼思游岳, 老夫守舍, 敍述游舊, 愼
問交承與夫舍舟登陸之策, 俱在此矣>와 <集文選句贈別>도 각각 48구, 16구의 장편
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孔平仲 集句詩 가운데 <寄孫元忠(손원충에게 부치
다)>其七을 먼저 살펴보도록 한다.
雄姿逸態何崷崒, 웅장한 모습 빼어난 자태 어찌 그리 우뚝한가?
自是君身有仙骨, 본디 그대의 몸은 신선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네.
彩服日向庭闈趨. 색동옷 입고 날마다 안채로 종종 걸음 하였고,
百年未見歡娛畢. 평생 즐거움 다하는 것 보지 못하였네.
拖玉腰金報主身. 옥장식 매달고 금 허리띠 차고 임금께 보답할 분이니,
놓는 경우, 세 번째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시구의 첫 글자에 나누어 놓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饒少平(2009: 9596)에서 辭海에서 설명한 첫 번째의 경우에는
단순히 수사적인 측면일 뿐이라고 하면서,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를 藏頭體의 범
위로 설정하였다.
起居八座太夫人. 상서의 모친에게 문안 인사 드려야겠네.
爾家最近魁三象, 그대의 집안은 근래 三公의 으뜸이니,
文彩風流今尙存. 문체와 풍류 지금도 여전합니다.
(<驄馬行>-<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入奏行贈西山檢察使竇侍
御>-<從事行贈嚴二別駕>-<季夏送鄕弟韶陪黃門從叔朝謁>-<奉送蜀州柏二別駕
將中丞>-<贈韋七贊善>-<丹靑引>)
총 31수로 구성된 <寄孫元忠>는 모두 4句 換韻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제에 등
장하는 孫元忠(?~1100)은 이름이 諤으로, 哲宗 때에 太常博士, 左正言 등의 관
직을 지내다가 召聖 年間에 章惇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18) 그는 정치적 성향
이 蘇軾, 孔平仲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위의 작품에서 孔平仲은
孫元忠을 ‘仙骨’이라 하면서 그의 뛰어난 재주와 효성스러움을 칭찬하고 있다. 더
불어 손원충 같은 인물을 배출한 그의 집안에 대한 칭송 또한 작품 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寄孫元忠>은 杜甫의 시구만을 활용한 최초의 集杜詩라는 점에
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19) 주지하듯이 杜甫의 시는 역대 문인들에게 시학의 전
범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杜詩의 풍격을 모방하
고 학습하고자 하였다. 집두 역시 바로 杜詩에 대한 학습과 애호에서 비롯된 것으
로, 南宋 문인인 文天祥이 창작한 200수의 集杜詩가 가장 대표적이다. 文天祥은
서문에서 杜詩에는 ‘抑揚과 褒貶의 뜻이 그 가운데 빛난다.(而抑揚褒貶之意, 燦然
於其中.)’20)고 평가하면서 ‘내가 集句한 杜詩에는 내 삶이 힘들어지게 된 이후 세
상의 변함과 인사가 대충 여기에 드러나 있다.(予所集杜詩, 自余顚沛以來, 世變人
事, 槪見於此矣.)’21)라고 밝히고 있으니, 이는 곧 杜詩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杜
甫가 경험한 시대적 아픔에 대한 공명을 나타내는 것이다.22) 이후 집두의 창작은
계속 이어졌는데, 孔平仲의 위의 작품이 집두의 효시인 것이다. 孔平仲은 <題老杜
18) 張撝之, 沈起煒, 劉德重 主編(1999: 776)
19) 張明華, 李曉黎(2011, 3537)
20) 文天祥(1985, 397)
21) 文天祥(1985, 397)
22) 文天祥 集杜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최석원의 <해석의 실천-文天祥 集杜詩에 대한
고찰>을 참고할 것.
集>에서 杜詩를 “直侔造物幷包體, 不作諸家細碎詩.(다만 조물주처럼 모든 시체를
껴안았으니, 뭇 시인들처럼 자잘한 시를 짓지 않네.)”라고 하면서 “令人心服是吾師
(마음으로 복종케 하니 나의 스승이네.)”라고 하였으니, 孔平仲 역시 杜詩를 시학
의 전범으로 인식했다. 물론 孔平仲이 집두를 행한 것은 杜甫에 대한 학습과 존경
의 의미이기도 했겠지만, 더욱 결정적인 계기는 일찍이 문천상이 서문에도 언급한
‘子美가 먼저 나를 대신해 말했기(子美先爲代言之)’ 때문이다. 그러면 <寄孫元忠>
의 其十二를 살펴보도록 한다.
其十二
秋風欻吸吹南國, 가을바람 휙하고 남쪽으로 불어오니,
天地黯慘忽異色, 세상이 어둑해져 갑자기 다른 경치 되었다네.
江石缺裂靑楓摧. 강가 바위는 깨지고 갈라지고 단풍나무도 꺾이었는데,
波漂菰米沉雲黑, 물결에 떠다니는 줄 열매 먹구름처럼 잠기어 있네.
儒術于我何有哉. 儒術이 나에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口雖吟詠心中哀, 입으로는 시를 읊조리지만 마음속으로는 애달파하네.
隱居欲就廬山遠, 은거하려 멀리 여산으로 나아가고자 하니,
黃帽靑鞋歸去來. 누런 모자 짚신 신고 돌아가야겠네.
(<虎牙行>-<渼陂行>-<晩晴>-<秋興八首其七>-<醉時歌>-<晩晴>-<留別公安
太易沙門>-<發劉郞浦>)
위의 4, 5구에 인용된 시구는 각각 杜甫의 <秋興八首>와 <醉時歌>의 구절로,
이는 杜甫의 대표적인 풍격인 沈鬱悲壯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뿐만 아니
라 其十八에서도 杜甫의 <九日五首其一>과 <九日藍田崔氏莊>을 인용해 “重陽獨酌
杯中酒, 醉把茱萸仔細看.(중양절 홀로 술잔의 술 잔질하며, 취한 채 수유나무 붙
잡고 자세히 들여다보네.)”라 하며 자신의 처량함과 고독함을 표현하고 있다. 일
찍이 蘇軾이 <次韻孔毅父集古人句見贈五首>에서 “前生子美只君是(전생의 자미인
자는 단지 그대)”라고 한 것도 孔平仲 集句詩가 杜甫와의 공명 속에 창작된 것임
을 확인해 준다. 이처럼 孔平仲의 集杜詩는 杜詩만을 集句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
의 작품이라는 점과 杜甫가 경험한 비애와 울분에 대한 공명이 集句의 방법을 통
해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孔平仲의 集句詩에는 文選만을 集句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 역시 2편
이 존재한다. 그러면 <集文選句贈別(文選을 集句하여 이별하는 이에게 보내다)>의
일부분을 살펴보도록 한다.
離別在須臾, 잠깐 사이에 이별하니,
置酒宴所歡. 술을 차려 좋아하는 친구들과 잔치를 베푸네.
借問此何時, 묻노니 지금은 어느 때인가?
萋萋春草繁. 봄풀 무성한 때라네.
江蘺生幽渚, 향기 나는 강리 풀은 외딴 섬에서 자라고,
山櫻發欲然. 산앵두꽃은 피어 불타는 듯하네.
游絲映空轉, 떠다니는 거미줄은 허공을 비추며 돌고,
紅藥當階翻. 붉은 작약은 계단에서 한들거린다.
飛鳥繞樹翔, 새는 나무를 뱅뱅 돌며 날고,
哀猿響南巒. 애절한 원숭이 소리 남쪽 산기슭에 울리는구나.
...(後略)...
(<與蘇武 三首>-<擬古詩十二首-擬靑靑陵上柏>-<雜詩 十首>-<石門新營所
住四面高山迴溪石瀨茂林修竹詩>-<塘上行>-<早發定山>-<三月三日率爾成
篇>-<直中書省>-<雜詩六首>-<登臨海嶠初發彊中作與從弟惠連見羊何共和之>)
위의 작품에서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전송한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
용을 통해 봄날 이별 뒤 그리울 이에 대한 감정을 文選의 구절을 활용하여 묘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작품은 봄으로 그 시간적 배경을 설정하고 있으며,
이는 “江蘺”, “山櫻”, “游絲”, “紅藥” 등과 어울려 아름다운 봄날 풍경 속에서 이별
해야 하는 孔平仲의 심정이 절묘하게 묘사되고 있다. 더욱이 16구로 이루어진 본
작품에서는 一韻到底의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如出一手’와 같은 솜씨로 봄날
이별하는 이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곧 당시 孔平仲은 文選의 구
절을 하나의 완정한 작품으로 녹여낼 수 있을 만큼 이에 정통했음을 보여주는 것
이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集句詩는 총 4
편으로 그 가운데 杜詩와 文選이라는 한 텍스트 속에서 集句의 대상을 삼아 창
작한 작품이 3편에 해당한다. 이는 곧 集句가 지니는 유희성에 杜詩와 文選에
대한 孔平仲의 학식 그리고 이를 ‘如出一手’로 풀어내는 시재가 필수적인 사항인
셈이다. 주지하듯이 宋代의 시가 문학은 당대와의 차별화를 통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학문을 바탕으로 한 창작이었다.23) 즉 宋代
문인들에게 詩作은 학력의 과시였던 셈인데, 孔平仲의 集句詩 창작은 유희를 통해
당시 시학의 전범으로 인식된 杜詩와 文選에 대한 학력은 물론이고 이를 자기화
하는 나름의 시재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2.2 藥名, 離合을 겻들이다
四庫全書提要의 설명과 같이 孔平仲의 詩戱에는 人名, 郡名, 卦名, 星名 등
을 활용한 雜體詩가 존재하는데, 이는 역사는 물론이고 천문, 지리 등에 걸친 다
방면의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창작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다방면의 지식을
활용한 시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藥名詩인데, 이는 육조시대 이후 시작되
었다. 이후 唐代에는 皮日休와 張籍 등에 의해 창작되었으며, 宋代 黃庭堅과 王安
石의 작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24) 사실 藥名詩는 雜體詩의 일종이었기 때
문에, 문인들에게 ‘不足法’으로 인식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문인들이 약초 이름을
활용하여 藥名詩를 창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면 孔平仲의 <新作西
庵, 將及春景, 戱成兩詩. 請李思中節推同賦(새로이 西庵을 지어, 장차 봄이 오니,
장난으로 두 수를 지어, 節度推官 李思中에게 함께 짓기를 청하다)> 두 번째 작품
을 살펴보도록 한다.
昨葉何搖落, 어제 나뭇잎 어찌나 흔들리며 떨어지던지.
今逢淑景天. 오늘은 맑은 날 보게 되었구려.
山椒紅杏火, 산꼭대기의 붉은 살구나무 불타는 듯 하고,
23) 송용준, 오태석, 이치수(2004, 머리말)
24) 黃庭堅의 작품 가운데 藥名詩로는 <荊州卽事藥名詩八首>와 <藥名詩奉送楊十三子問省
親淸江>이 있으며, 王安石의 작품으로는 <和微之藥名勸酒>가 남아 있다.
巖石綠苔煙. 바위에 푸른 이끼는 연기가 피어오르듯 하늘거리네.
爐火沉香烬, 침향이 타다 남은 화롯불,
琴絲續斷弦.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소래 내는 거문고 줄.
忍冬已徹骨, 겨울을 이겨내느라 이미 뼈까지 한기가 스며드니,
衰白及長年. 쇠하고 흰 머리 한 늙은이 되었구려.
위의 작품은 새롭게 지은 西庵에서의 봄날 경치와 더불어 이제는 기운도 쇠하
고 머리도 하얗게 변한 자신의 신세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孫永選이 밝혔듯 위
작품은 藥名을 활용하고 있다.25) 한 구에 하나의 藥名을 표시하고 있는데, 그 순
서대로 나열하면, 昨葉何-景天-山椒-綠苔-沉香-續斷-忍冬-白及이다. 藥名詩의 관
건은 약초의 이름을 활용하되 작품 속에서 그 자취가 은연중에 드러나야 함에 있
는데, 孔平仲의 위 작품에서도 시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약초의 이름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사실 藥名詩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약초의 이름을 교묘하게 숨겨놓는
시재는 물론이고 약초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창작이 불가능하다. 藥名 이외에도
孔平仲의 詩戱에는 郡名, 人名, 八卦 등을 활용한 시체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곧 宋代에 요구되던 문인들의 박학적 소양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주
지하듯이 宋代 대표적인 문인이라고 할 수 있는 蘇軾은 詩文에 능했을 뿐만 아니
라, 사상과 경학 그리고 차와 요리 등과 같은 영역에 있어서도 능통했다. 또한 沈
括과 같은 문인 역시 ‘無所不通’이라고 평가될 만큼 다양한 방면에 많은 지식을 소
유했던 인물이었는데, 宋代의 이러한 경향은 ‘譜錄’과 같은 저작으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藥名을 비롯한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은 바로 당시 문
인들에게 요구되었던 다방면의 지식을 활용한 시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孔平仲의 藥名詩는 약초의 이름을 시구 속에 숨겨 놓는 방식 이외에도 또 다른 형
식적 규율을 두어 유희성을 추구하고 있다.
七夕一首呈席上
琥珀杯濃酒味醇, 호박 술잔 짙고 술맛 진하고,
鬱金裙轉舞腰新. 울금빛 치마 돌며 춤추는 허리 새롭네.
25) 孔文仲, 孔武仲, 孔平仲 著, 孫永選 校點(2002: 471)
鉛華第一人中白, 화장하는 연분 가운데 제일은 사람의 반백머리요,
歌響幾多梁上塵. 노래 소리는 대부분 들보 위의 먼지와 같다네.
玉漏將沉香未斷, 옥루가 장차 가라앉겠지만 향기는 끊기지 아니하고,
銀潢雖遠志相親. 은하수 비록 멀지만 뜻은 서로 가깝다네.
合歡促席留君醉, 서로 즐기며 가까이 앉아 그대 머물며 취하노니,
最苦參斜夜向晨.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참성 기울어 밤이 새벽으로
향해가는 것이지.
위의 <七夕一首呈席上>은 칠월칠석날 연회 자리에서 지은 것으로, 새벽이 되어
감에 따라 자리를 파해야 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 위의 작품 역시 매 구절마다
藥名이 숨겨져 있는데, 琥珀-鬱金-人中白-梁上塵-沉香-遠志-合歡-苦參이 바로 그
것으로, 역시 藥名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작
품은 醇-新-塵-親-晨으로 眞韻을 사용하여 압운하고 있으며, 평측의 규칙에도 부
합된다. 즉 7언 율시라는 엄격한 규칙 속에서 藥名을 교묘하게 숨겨 둠으로써, 孔
平仲은 근체시의 격률 속에서 藥名이라는 또 다른 규칙을 덧보탬으로써 유희를 이
룩해 낸 것이다. 이렇듯 孔平仲의 藥名詩는 단순히 藥名을 시구에 숨겨두는 것으
로만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규율을 만들어 둠으로써 시작의 쾌감을 만끽했던 것이
다. 이는 이합의 방법을 활용한 藥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孔平仲의 藥名詩 가
운데에는 離合의 방식으로 藥名을 드러내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한다. 孔平仲의
<藥名離合四時四首>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을 보도록 한다.
草滿南園綠, 풀 가득한 남원은 녹색 빛을 띠는데,
靑靑復間紅. 푸르고 푸른 가운데 또 사이사이 붉은 빛이네.
花開不擇地, 꽃 피는데 땅을 가리지 않으니,
錦繡徑相通. 비단이 길가에 서로 이어져 있는 듯.
위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계절 순서에 따라 읊고 있는데, 인용한 작품
은 봄에 해당한다. 추운 겨울을 지내고 녹음 짙고 그 사이에 꽃들이 만개해 붉은
빛이 섞인 봄날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본 작품은 離合의 방법으로 藥名을 드러
내고 있다. 漢 孔融에게서부터 시작되어진 이합시는 그 종류가 다양한데,26) 위의
작품에서는 앞 구절의 마지막 글자와 다음 구절의 첫 글자를 합하면 약초 이름이
완성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藥名離合四時四首> 첫 번째 작품에서는 紅
花-地錦-通草와 같은 藥名이 나타난다. 또한 紅-通의 압운을 취하고 있으니, 藥名
의 사용, 이합의 방식 채용, 동일한 운목의 운자 사용이라는 다소 엄격한 규칙을
통해 유희성을 탑재했던 것이다. 이처럼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되어 있는 藥名詩
는 단순히 藥名을 시구에 교묘하게 숨겨두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체시
의 격률 활용 또는 이합이라는 방식을 첨가함으로써 한층 수준 높은 시재가 필요
했던 것이다.
2.3 藏頭, 寄詩로 활용하다
藏頭體는 한자가 지닌 문자적 특징에 기반하고 있는, 말 그대로 단순한 유희에
가까운 시체라고 하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藏頭體 작품은 모두 다른 이에게
시를 보내거나 바치는 과정에서 창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藏頭體 작품 가운데
<呈黃仲光(황중광에게 드리다)>을 살펴보도록 한다.
寄黃仲光
早識江西黃仲光, 오래 전 江西의 황중광을 알았건만,
兀然相對鬢毛蒼. 갑자기 만나니 귀밑머리 세었구려.
口陳仁義何明白, 입으로 늘어세우는 仁義는 얼마나 분명할 것인가?
日欲經綸孰抵當. 날마다 나라를 운영하려는 포부 누가 담당할 것인가?
田父謳吟知盛德, 田夫들이 읊조리고 노래하는 것으로 그대의 성대
한 덕 알겠고,
26) 離合詩란 破字된 글자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창작된 雜體詩의 일종으로, 그 방식은 다
양하다. 첫 번째는 글자의 편방을 분리하여 두 구씩 두어, 총 4구를 글자를 합하면
하나의 글자가 되는 방식, 두 번째는 한 글자의 편방을 나누어 두 구씩 넣어두고, 여
섯 구를 합해야 하나의 글자가 완성되는 방식, 세 번째는 한 글자의 편방을 한 구의
처음과 끝에 두어, 이를 합하면 글자가 완성되는 방법,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편방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사물 이름을 한 구의 끝과 그 다음 구의 처음에 두어, 이를
합하면 하나의 사물이 되는 방법이 있는데, 顯名離合, 藥名離合이 여기에 속한다. 이
와 관련하여서는 吳訥의 文體明辨序說을 참고할 것.
心交隔闊想餘芳. 마음으로 맺은 교분 멀리 떨어져 있으매
그대의 사라지지 않는 향기 생각하노라.
方今天子求材藝, 바야흐로 천자께서 재주 있는 이를 찾으시니,
云有鋒車降寵章. 이르길 날랜 수레로 관복 하사하는 일 있을 것이리라.
藏頭體를 활용한 위의 작품은 黃仲光에게 보내는 시이다. 황중광의 이름은 隱으
로, 福建 출신이다. 그는 治平 4년(1068년) 진사과에 급제한 뒤, 國子監司業 및
殿中侍御史를 역임하였고, 황정견과 친밀한 관계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작품에
서 孔平仲은 천자가 구하는 인의와 덕을 지닌 인물로 황자평만한 이가 없음을 칭
송하면서, 조만간 황중광에게 벼슬이 내려질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하
였듯 인용한 작품은 藏頭體를 활용하여, 각 구절의 마지막 글자의 윗부분을 破字
하여 그 다음 구절 처음 글자로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위의
작품에서 첫 번째 구절의 光에서 윗부분을 제거하여 남는 ‘兀’字를 두 번째 구절의
첫 글자로 놓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蒼-口, 白-日, 當-田, 德-心, 芳-方, 藝-云
이라는 글자가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8구의 章은 立을 제거하여 남
는 早를 작품 첫 구 첫 번째 글자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光-蒼-當-芳-
章으로 韻字 역시 지키고 있으니, 고도의 기교와 언어 구사력이 필요한 셈이다.
이처럼 藏頭體를 상대방 문인과의 교류 과정 속에서 활용한 예를 살펴보면, 아래
의 표와 같다.
[표-2]
寄詩呈詩
<寄江西同官> <寄何君表> <呈魏道輔>
<寄方逢原> <寄張天覺> <呈張子平>
<寄黃仲光> <寄向公美使君> <因來詩有題橋之句呈陸農師>
<寄張江州> <寄呂汝州> <呈陸農師>
<寄張解州> <寄王滑州> <愼思移日至月望交割, 口占奉呈>
<寄賈宣州> 총 11題총 5題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된 총 17題의 藏頭體 가운데 寄詩와 呈詩의 형태로 창
작된 작품이 총 16題에 해당한다. 또한 <累約愼思視事, 今已入境, 盤桓不進, 欲以
十四日交承. 又云六甲窮日. 戱作藏頭一首>는 寄詩 또는 呈詩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시제를 통해 문인 상호 교류 과정 속에서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
다. 이처럼 문인 간의 교류 과정에서 창작된 孔平仲의 藏頭體는 위에서 예로 들었
던 <呈黃仲光>와 같이 상대방에 대한 칭송과 권면 또는 <寄江西同官(江西의 동료
에게 부치다)>의 ‘天涯回首思高會, 日落烟昏今自悲.(하늘 끝에서 고개 돌려 성대한
잔치 자리 생각하다가, 해 떨어지고 연기에 어둑해지자 지금 절로 슬퍼진다네.)’와
같이 지난날의 추억과 그리움이 묘사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는 상대방에 대한 그
리움과 더불어 자신이 처한 신세와 이에 대한 슬픔이 보이는 작품도 존재한다.
<愼思移日至月望交割, 口占奉呈(愼思가 시간이 지나 15일에 업무를 교대함에 입
에서 나오는 대로 써 받들어 보내드리다)>을 살펴보도록 한다.
日日高樓倚望君, 날마다 높은 누대에서 그대 바라보며,
口吟心想跂淸塵. 입으로 읊조리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수레 뒤 일어
나는 맑은 먼지 기대하고 있다네.
土膏著雨蒼葭出, 비옥한 토지에 비 뿌려 푸른 갈대 돋아나고,
山色凝雲翠黛顰. 산 빛에 구름 어려 푸른 눈썹 찡그리게 하네.
卑冗一官誰羽翼, 보잘 것 없는 관직이니 누구들 날개 달 수 있으리오.
異同千狀極艱辛. 같고 다른 온갖 모습에 고생스러움이 극에 달한다오.
十分明月迎新守, 분명하고 밝은 달 새로운 해를 맞이하고,
寸步江村老盡春. 강촌 천천히 걸으며 늙은 몸으로 봄을 보내네.
위의 작품에서는 愼思27)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덧없이 늙어가는 자신의 신세
가 함께 묘사되어 있다. 더욱이 ‘卑冗一官誰羽翼’구는 순탄치 않았던 관직 생활 속
에서 시련의 세월을 보냈던 孔平仲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자 체념의 표현으로 다가
온다. 이 역시 매 구의 끝 글자를 破字하여 다음 구의 첫 글자로 사용하는 유희를
보이고 있지만, 실상 그 내용은 결코 해학적이지 않다. 이렇듯 孔平仲은 다른 문
인 간의 상호 과정 속에서 藏頭體를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송시가 지니고 있는
27) 愼思에 대해서는 주석 36)을 참고할 것.
교유적 시 쓰기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태석은 송시를 설명하면서 이는 당
시의 감회나 기행시, 묘사시와는 다른 인식적 표현으로서, 주로 문인들 간의 교유
와 세계관의 피력을 위한 사회적 자아표현 방식의 유력한 도구로 인식되었다고 지
적한 바 있다.28) 이러한 宋代 문인들의 시 쓰기에 대한 인식은 藏頭體를 활용한
孔平仲에게도 해당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藏頭體라는 유희적 시체를
통해 문인들에게 시를 보내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로제 카이와가 설명하고
있는 놀이의 개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속성 가
운데 하나로 사회성을 지목하면서, 비록 연, 팽이, 요요와 같이 혼자 노는 경우라
도 이는 다른 사람이 따라 하기 힘든 기록을 달성해서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
명하였다.29) 즉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데, 孔平仲은 문인 간의 상호 작용 과정에서 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雜體詩 창작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친밀감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드러나는 문자 활용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시재를 뽐내고자 했던 것이다.
3. 遊戱를 통한 문학적 위안
일찍이 陳應申은 <亞愚江浙紀行集句詩跋>에서 “시를 짓는 것은 원래 어려운데,
集句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30)라고 한 바 있다. 이는 비록 集句詩 창작의 어
려움을 설명한 것이지만, 비단 集句詩만의 어려움은 아닐 것이다. 주지하듯이 전
통적인 詩作 속에는 유희를 목적으로 그 형식적 특이함에 기댄 다양한 시체들이
존재하는데, 이를 雜體詩라 한다.31) 雜體詩는 유희를 목적으로 창작되긴 하였지
28) 오태석(2001: 360)
29)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2012: 71)
30) 陳應申, 江湖小集 卷九: “作詩固難, 集句尤不易.”
31) 明代 문인인 徐師曾은 詩體明辯에서 雜體詩를 雜句詩, 雜言詩, 雜體詩, 雜韻詩, 雜
數詩, 雜名詩, 雜合詩, 詼諧詩로 나누고, 다시 각 항목에 속하는 시체들을 열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徐師曾 纂(1972: 6267)
만, 앞서 설명하였듯 문자를 운용하는 고도의 능력과 學力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결코 작품을 완성할 수 없는 일종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사실 여전히 역대 많은
문인들이 雜體詩 창작을 평가 절하했음에도 불구하고32), 孔平仲이 무려 101題에
이르는 雜體詩를 창작했음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앞서 孔平仲의 集句와 藥名 그
리고 藏頭體는 모두 宋代 문인들의 ‘以學爲詩’와 교유적 시 쓰기 그리고 박학적 소
양의 추구라는 시대적 경향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런
데 주목해야 할 것은 集杜詩에서도 드러나듯이 유희라는 시적 체계 속에 孔平仲이
경험한 개인적 비애와 좌절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살펴
본 宋史에 기재되어 있는 孔平仲의 생애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孔
平仲은 진사과에 급제한 뒤 秘書丞, 集賢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이후 신
법파의 정치적 공격으로 인해 그의 삶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휘종의 즉
위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지만 元祐黨籍에 이름이 올라가면서 다시금 파직되
는 일을 겪어야만 했는데, 이러한 정치적 부침은 그의 작품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는 雜體詩 창작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닐 것인데, 앞서 살펴본
<寄孫元忠> 其十二에서 杜甫의 시구를 인용하여 ‘儒術于我何有哉. 口雖吟詠心中
哀.(儒術이 나에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입으로는 시를 읊조리지만 마음속으로는
애달파하네.)’33)라고 한 것에서도 孔平仲이 경험한 현실에 대한 좌절과 비애를 확
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蘇軾이 孔平仲의 集句詩에 차운한 <次韻孔毅父集古
人句見贈五首(孔毅父가 옛사람의 구를 모아 보낸 온 시에 차운하다)>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32) 雜體詩에 대해 皮日休는 “鄙而不爲(비루하여 창작해서는 안 될 것)”라 하였고, 嚴羽는
滄浪詩話에서 “至於建除, 字迷, 人名, 卦名, 數名, 藥名, 州名, 只成戱謔, 不足法
也.(建除, 字迷, 人名, 卦名, 數名, 藥名, 州名은 단지 재미를 위한 것이니, 법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으며, 沈德潛은 說詩瑣語에서 “雜體有大言小言兩頭
纖纖五雜組離合姓名五平五仄十李辰回文等項, 近於戱弄, 古人偶取之, 然而
大雅不取.(雜體에는 大言小言兩頭纖纖五雜組離合姓名五平五仄十李辰
回文등이 있는데, 유희에 가깝다. 옛 사람들은 우연히 이를 취하였으나, 시의 정격으
로는 취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33) 위의 두 구는 각각 杜甫의 <醉時歌>와 <晩晴>의 구절을 集句한 것이다.
次韻孔毅父集古人句見贈五首 其三
天下幾人學杜甫, 천하에 몇 사람이 杜甫를 배웠던가,
誰得其皮與其骨. 뉘가 그 가죽과 뼈를 얻었을 텐가.
劃如太華當我前, 갑자기 태화산이 나의 앞으로 다가왔는데,
跛欲上驚崷. 절음발이 양이 올라가고자 하나 험준함에 놀라는
것과 같네.
名章俊語紛交衡, 이름난 문장 뛰어난 시어가 어지러이 엇섞여 있으나,
無人巧會當時情. 당시의 정 만나게 할 이는 없구나.
前生子美只君是, 전생의 자미인 자는 단지 그대일지니,
信手拈得俱天成. 손이 가는대로 집어도 天成을 갖추네.34)
위의 작품에서 蘇軾이 차운한 孔平仲의 원 작품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
지만,35) 蘇軾은 위의 작품을 통해서 “無人巧會當時情” 상황 속에서 孔平仲이 杜甫
의 “皮骨”을 얻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이는 곧 杜甫가 겪은 현실에서의 좌절과 비
애에 대한 공명 때문으로, 蘇軾이 孔平仲을 “前生子美只君是”이라고 평가한 이유이
기도 했던 것이다. 앞서 잠시 설명하였듯 杜甫가 경험한 비애와 불운에 대한 공명
은 곧 집두를 행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集杜詩뿐만
아니라 詩戱에 수록된 雜體詩 전반에 孔平仲의 비애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면
文選을 集句하여 완성한 <文選集句寄愼思, 交代學士. 愼思游嶽, 老夫守舍, 敍述游
舊, 愼問交, 承與夫舍舟登陸之策, 俱在此矣.(文選으로 集句하여 愼思에게 부치
니, 學士에서 교체되어. 愼思는 嶽을 유람하고, 늙은이는 집을 지키고 있으매 옛
날 노닐었던 것을 서술하고, 삼가 사귐을 묻고, 받들어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오르
는 계책을 드리니, 이 모든 것을 여기에 갖추어 두었다.)>의 일부분을 살펴보도록
한다.
...(上略)...
今我唯困蒙, 지금 나는 곤경에 빠졌으니,
處身孤且危. 이내 몸 고독하고 위태롭네.
34) 王文誥 輯註, 孔凡禮 點校(1999: 1157)
35) 張明華와 李曉黎의 集句詩嬗變硏究에서는 蘇軾이 차운한 孔平仲의 원작 集句詩는
실전되어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顧影悽自憐, 그림자 돌아보며 스스로 가련히 여기나니,
悄悄令心悲. 근심스레 가슴 슬프게 하네.
一心抱區區, 일편단심 사랑의 마음 품고 있지만,
知音世所希. 나를 알아주는 이 세상에 적구나.
塊然守空堂, 나 홀로 텅 빈 방을 지키고 있는데,
高窓時動扉. 높은 창 때때로 문짝 흔들리네.
...(後略)...
(<感舊詩>-<贈山濤>-<赴洛道中作二首>-<詠懷詩十七首其七>-<古詩十九
首>-<爲顧彦先贈婦二首>-<雜詩>-<學省愁臥>)
위의 작품에서는 鄧愼思36)와의 옛 노님을 추억하면서 지금 자신이 곤경에 처해
고독하고 위태로움을 묘사하고 있다. 더불어 ‘一心’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음을 개탄하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 위의 작품은 文選을 集
句하였다는 점에서 유희성을 나타내고 있지만, 실상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신의
불운과 비애를 묘사하고 있다. 앞서 孔平仲의 藏頭體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愼思
移日至月望交割, 口占奉呈>의 ‘卑冗一官誰羽翼, 異同千狀極艱辛.’구와 藥名詩인
<新作西庵, 將及春景, 戱成兩詩. 請李思中節推同賦>의 ‘忍冬已徹骨, 衰白及長年.’,
그리고 <新作西庵, 將及春景, 戱成兩詩. 請李思中節推同賦>에 이어 지은 <再賦>에
서 ‘老翁須自白, 積雪草方夭.(늙은이는 수염 절로 하얗게 변하는데. 쌓인 눈 속에
서 풀은 바야흐로 파릇파릇해지네.)’라 한 것도 비록 유희라는 시체를 활용하였지
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신이 경험한 비애와 불운이 나타나 있다. 이렇듯 유희
속에 표출된 비애와 불운은 일찍이 唐代 杜甫의 시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杜甫의 작품 가운데 그의 유머를 엿볼 수 있는 戱題詩는 총 34首가 존
재하는데, 杜甫의 戱題詩에는 다양한 표현수법을 활용하여 杜甫가 평생 겪은 인생
의 비애와 좌절을 드러내고 있다.37) 이처럼 유머를 통한 비애의 표출이라는 일종
36) 시제에 언급한 愼思는 본 작품의 첫 구절인 ‘鄧生何感激’을 통해 鄧愼思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孔平仲의 형이었던 孔武仲의 작품 가운데 <次韻和鄧愼思謝劉明復畵道
林秋景>과 <次韻和鄧愼思與太守同登淸湘樓>, <次韻瀛倅鄧愼思見寄>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37) 蔡錦芳은 <論杜甫的戱題詩>에서 杜甫의 戱題詩를 표현수법에 따라 ‘戱言寫哀’, ‘戱言寫
樂’, ‘戱言寓諷’으로 나누어 설명하였고, 이영주와 강민호는 <杜詩 속에 나타난 비애
의 아이러니는 독자들로 하여금 한층 더 핍진하게 느끼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한
다.38) 孔平仲의 雜體詩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서 설명한 바 있듯 孔平仲은 평생
신법파의 정치적 공격에 자유롭지 못했고, 그로 인한 비애와 좌절을 겪은 바 있
다. 이는 곧 詩戱에 수록된 다양한 雜體詩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재미를 목
적으로 하는 유희적 시체의 활용은 그가 경험한 삶의 비애에 대한 나름의 위안이
었던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集句詩, 藥名詩, 藏頭體를 비롯한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된 다양한 雜體詩 창작은 단순한 웃음과 재미가 아닌 사회적 모순에 대한 나
름의 위안과 해소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일찍이 임형택은 조선 말 문인들의 희작화 경향을 설명하면서, “희작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희작화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역사적인 인식이 없이 속단
해서는 안될 것”39)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비록 集句와 藥名을 비롯한 雜體詩 창
작은 시체가 지니고 있는 유희성으로 인해 역대 문인들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된 100여수의 雜體詩는 宋
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 창작 기제가 투영된 것이며, 단순한 유희가 아닌
그가 경험한 비애에 대한 문학적 위안이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
다.
4. 결론
근대 이후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놀이적 속성에 대한 발견은 지금까지 계속
되어 왔다.40)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는 심지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속의 유머에 대한 고찰>에서 蔡錦芳의 설명을 한편으로 동의하면서, 희제시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통해 유머 속에 杜甫가 간직한 비애감이 스며들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38) 이영주, 강민호(2002: 19)
39) 임형택(1985: 13)
40) 근대 학자들의 놀이 담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효의 <놀이에 관한 인문학적 고찰>
을 참고할 것.
문화는 인간의 놀이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라 설명하였는데, 비록 그의 논의는 특
수한 놀이적 속성을 일반화하였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그간 홀시되었
던 놀이가 지닌 문화적 의미를 규명하였다는 점에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본고에
서는 이러한 놀이적 속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雜體詩의 유희성을 규명하기 위하
여 북송 시대 孔平仲의 詩戱에 수록되어 있는 集句詩와 藥名詩 그리고 藏頭體에
대해 고찰하였다. 集句와 藥名詩, 藏頭體에서 나타나는 유희성이란 기존 유지되고
있던 시 창작의 규율 속에서 좀 더 엄격한 또 다른 규율을 덧보탬으로써 생성되는
쾌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에 본고에서는 孔平仲의 雜體詩에 나타나는
유희성을 시체별로 고찰하고, 이를 통해 孔平仲이 경험한 현실에 대한 좌절과 비
애가 투영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는 곧 지금까지 유희적 시체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
을 수 있겠다. 다만, 본고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孔平仲 詩戱에 담겨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雜體詩의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宋代에 창
작된 훨씬 더 다양한 雜體詩에 대한 정밀한 연구 역시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이는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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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平仲诗戏所體见的游戏性考察
崔晳元
中文提要
“诗言志”的观念产生以来中国文学史上一直强调了诗歌的道德教化作用功利功
能但是在中国传统文学作品创造过程中不难发现出于游戏目的而创造的作品
本文就着眼这一点以宋代文人孔平仲诗戏中藏头诗药名诗集句诗为研究对象进
行研究本文首先考察了孔平中诗戏所载的杂体诗之特征第一是大部分的作品是为
了文人相互之间的交流创作的第二是诗戏中如药名诗人名集杜集文选等虽然
其目的在于游戏但必须诗人的多方面上学识由此可见孔平仲之杂体诗创作目的是
不仅仅为了文人之间交流而且表现出自己的学识和诗才在孔平仲之杂体诗内容来
看大部分是以悲哀感叹为主这是由于他对现实上挫折失败其实孔平仲用游
戏的诗体来表现出自己的悲哀感
关键词孔平仲诗戏药名诗藏头诗集句诗以學爲詩
투고일: 2014. 5. 30. / 심사일: 2014. 6. 9.6. 27. / 게재확정일: 2014.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