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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변란인가, 민중의 반란인가? - 영조 무신란(4)

작성자낙민|작성시간15.10.12|조회수46 목록 댓글 0

 

정치적 변란인가, 민중의 반란인가? - 영조 무신란(4) 

 

 

 

 

 

난의 진압

 


  조정에서는 장단, 개성, 춘천 등 각지에서 근왕병을  소집하는 동시에, 18일에는 오명항을
도순무사, 박찬신을 중군,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토벌군을 출정시켰다. 영의정 이광
좌는 영병조사를 겸직하면서, 조정의 모든 군사업무를 지휘하였다.
  3월 20일에 반군의 일부는 이미  용인까지 진격해 있었다. 반군은  22일 진천에서 잔치를
벌이고, 23일에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두 갈래로 진군하였다. 한 부대는 이인좌가  인솔하여
안성으로 향하였고, 한 부대는 부원수 정세윤이 인솔하여 죽산으로 향하였다.
  오명항은 먼저 안성으로 내려가, 한밤중에 반군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 다음날 관군은 여
세를 몰아 죽산으로 진격하여 아침밥을 해먹던 반군을 간단히 궤멸시키고 정세윤 등을 참살
하였다. 이인좌 등은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26일에는 평안도에서 체포된 이사성과 서
울의 주모자였던 이유익을 처형하고, 27일에는 이인좌 등을 능지처참하였다. 이날  청주에서
는 반군들이 임시 병사로 임명하였던 신천영을  상당산성에서 결박하여 처형하였다. 이로써
충청도의 반군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경상도의 반군은 28일 함양으로 들어가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길
이 봉쇄되어 지체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경상도 각 고을의 관군이 도래하여 30일에는 성주
목사 이진혁이 합천을 탈환하였고, 4월 2일 함양에서 거창으로  돌아온 반군을 선산부사 박
필건 등이 격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희량과 이웅보 등은  부하들에게 결박되어 관군에 넘
겨져 처형되었다. 이로써 경상도의 반군도 완전히 진압되었다.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있었던 진압 작전에서는 사실상 단 한 명의 관군도 다친 사람이 없
을 만큼 전투다운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관군의  용이주도한 작전과 회유 때문
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오합지졸로 이루어졌던 소수의 반군이 대규모 관군을 보자마자 스
스로 흩어져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밀풍군은 반란의 초기부터 추대의 대상자로 거명되었다. 그는  3월 20일에 체포되어 국문
을 받게 되었으나, 자신의 관련을 부인하였다. 그는 처남인 조덕징과 이하 등을 통해 추대를
권유받았거나 통보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모반 주동자들의 심문과정에서 나온 말로서,
그들 내부의 논의였는지 밀풍군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유익 등은 미리 밀풍군에게 내통하지 않더라도 거사 후에 억지로 추대하면 그가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신란에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가담하였으므로 그들이 한결같이  밀풍군
추대에 합의하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인좌는 남인 중심의 반정을 꾀하였고, 정세윤과  같
이 개인적인 야심을 가진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역성혁명이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으므로, 임시 방편으로라도 전주 이씨의 왕족들  중에서 한 사람을 추대하여
이른바 '반정'의 형태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밀풍군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국문과
정에서도 다른 죄수들과 달리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영조는 그를 살려주고자 하였으나,  신
하들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다음 해에 사사되었다.

 


  무신란의 의미

 


  1728년의 무신란에는 서울과 경기, 강원, 삼남 및 평안도의 각지에서 소론 남인 소북의 문
무관, 명문 양반, 몰락 양반, 지방 토호, 향임층, 중인, 군교, 상민, 노비,  도적(명화적) 등 각
계각층의 인물 등을 망라하여 동조세력이 규합되었다. 그들은 충청, 전라, 경상도의 3도에서
거의 동시에 거병하여 한때 기세를 오리기도 하였다. 이는  그만큼 노론의 장기집권 때문에
소외된 계층이나 집단이 많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경종에서 영조로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무리를 처사들이 전국적인 저항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물론 모
반 주도자들의 교묘한 선전활동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당시의 왕위계승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특이한 것이
다. 그것은 또한 이 시대에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던  하층민의 성장과 중세사회의 전반적인
붕괴에 따르는 복잡한 현상들에서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난의 직접적인 요인은 왕실의
계승과 종통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음모 및 노론 독제정치에 대한 여타 양반 계층의 오랜 불
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조선후기 사회의  성장과 함께 오래 누적되어
왔던 사회적인 모순과 민중들의 고통이 깔려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변혁 여건의 성숙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거사한 반군들은 관군이  출동하자
마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단시간에 진압되고 말았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의
식에 비해 반군의 준비와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 조직의
가담자들 중에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혼잡되어  있어 통일된 이념이나 목표를  설정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소론계 주동자들이 내세웠던 경종 시해설과 복수의  의리는 어떻게 보면 하
층민들에게는 별로 절실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선전도 기만에 가까운 것이어서
민중들이 생사를 걸 만한 힘을 도출해낼 수 없었다.
  결국 당시의 조정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효율적이고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중앙정부는 지배계층의 보수적  봉건윤리와 비교적
잘 관리된 국가 조직, 그리고 신속한 대응으로 무난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는  아직
도 기층사회의 의식이나 실제의 역량이 무장봉기로 사회의 변혁을 가능하게 할 만큼 성장하
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반대로 기성의 보수적 이념이나 사회체제가 당시까지도 완강하
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글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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