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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논문(2)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작성자낙민|작성시간16.10.24|조회수141 목록 댓글 0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구지현*1)

 


【국문초록】
본 연구는 현전하는 2종의 승가수창록을 대상으로 하여 그 성립 과정을 추적
하고 시 수창자들의 교유양상을 분석한 것이다. 승가수창록은 1575년 여섯 명
의 젊은 성균관 유생들이 봄 한 철 승가사에 머물면서 공부할 때 주고받은 시를
수록해 놓은 것이다. 여섯 사람은 허성, 홍이상, 우복룡, 석함, 이선경, 이정우이
다. 이들 가운데 수창 기록을 남기도록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허성과 홍이
상이었고 이후 승가수창록의 형태로 수습한 이는 홍이상이었다. 승가수창록
은 20대의 유생들이 어떻게 창화를 통해 동인의식이 싹트는 지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핵심어: 홍이상, 승가수창록, 허성, 우복룡, 승가사
* 선문대
24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차례
1. 머리말
2.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 과정
2.1. 승가수창록의 체재
2.2. 승가수창록의 편찬 과정
3. 승가수창록을 통해 본 교유양상
3.1. 동인 의식의 시발
3.2. 시공간 공유를 통한 학시(學詩)
4. 맺음말

 

1. 머리말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은 1575년 허성(許筬, 1548~1612), 홍이상
(洪履祥, 1549~1615)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승가사(僧伽寺)에서 수창
한 시를 모아놓은 책이다.
승가수창록이 처음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천민 출신의 문인 유희경
(劉希慶, 1545~1636)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제일 먼저 언급한 연구자는
문희순으로, 유희경이 침류대시사(枕流臺詩社) 이전 시기 다양한 신분의
문인들과 친분을 지니고 있음을 언급하기 위해 거론하였다.1)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자는 곽정례로, 침류대시사보다 40여년 앞선 승가사의 시회를
“17세기 중엽 본격화된 서민문학 성장의 端初로서, 委巷詩社의 胎動 시기
를 훨씬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2)
특히 수창한 문인들이 화담학파에 속해 있었다는 점을 밝힌 것은 중요한
1) 문희순, 「朝鮮中期 枕流臺詩社의 形成과 展開」, 어문연구 37, 어문연구학회,
2001, 153-176면.
2) 곽정례, 「僧伽酬唱錄과 委巷詩社의 연원」, 어문연구 33권 4호, 한국어문교육연
구회, 2005, 407-4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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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성과이다.
규장각본 승가수창록의 해제에 “이러한 詩모임은 점차 詩壇의 결정
적인 세력으로 확대되어 肅宗 말기부터는 <詩社>라고 불리기 시작했는
데, 이 詩會는 詩社의 한 原型으로 생각할 수 있다.”라는 언급이 보이는
데3) 유희경의 참여로 인해 위항시사의 연원으로 파악하게 하는 하나의 단
서로 제공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반면 김은정은 승가수창록을 위항시사의 연원으로 규정하는 것에 회
의적인 입장을 표하였다. 이들의 시편을 문학적으로 분석하고, “문학사의
추향을 바꿀 만큼 새로운 시도와 역량을 보여주는 동인적 문학 집단의 성
과로 보기 어려”우나 “젊은 문사들의 문학 향유공간의 현장과 분위기를 구
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정리하였다.4) 모임의
목적과 성격을 확정하고 문학사적인 의의를 검토하여 새롭게 규정한 것은
기존 연구에서 진전된 연구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의 연구는 모두 규장각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몇 가지 사
실상의 오류를 보인다. 예를 들어 김은정은 승가수창록 소재 작품일람표
에 문집 소재의 시를 함께 표기하여 부록으로 제공하고 있는데, 규장각본
의 표기 미비로 인하여 작자 선정이 미상으로 처리된 부분이 있다.
현전하는 승가수창록은 56장의 필사본으로, 규장각 외에 장서각에도
소장되어 있다. 두 본은 서체만 다를 뿐 체재와 내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동일본을 저본으로 한 필사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단 필사기 등이
존재하지 않아 이본의 선후나, 언제 누가 필사하였는지 추정할 근거는 없다.
다만 장서각본에는 “豊山”, “洪〇善印” 등의 인장이 찍혀 있다. 아마도 이

 

3)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 참조(http://e-kyujanggak.snu.ac.kr)
4) 김은정, 「16세기 사대부 문인의 시문수창집 僧伽唱酬錄」, 漢文學報 25, 우리한
문학회, 2011, 73-1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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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직도서(李王職圖書)에 들어오기 전 풍산 홍씨 집안의 장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장서각본에 시의 작자가 좀 더 자세히 표기되어 있다.5) 홍씨
집안의 장서였던 장서각 쪽이 비교적 선본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2종의 이본을 대상으로 하여, 승가수창록의 성립 과정을
살피면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정리하고, 수창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당시 젊은 유생들의 교유 방식을 고찰하려 한다. 문학적으로 미숙한 시 작
품들이고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할 지라도 당시 과거를
준비하는 성균관의 유생들이 여가에 어떻게 교유하였는지 보여주는 귀중
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2.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 과정
승가수창록에는 총 351수의 시가 실려 있다. 허성과 홍이상의 시는
대부분 그들의 문집인 악록집(岳麓集)과 모당집(慕堂集)에 실려 있
다. 승가수창록 2종의 체재를 살펴보고, 여타 기록을 바탕으로 승가수
창록의 편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1. 승가수창록의 체재
승가수창록의 체재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시
회 참여자와 작자의 문제이다.
수창록의 권머리에는 「集中字號辨釋」이라고 하여 총 16인의 이름이 기
5) 규장각본에는 대가에게 준 이별시 「又」와 「用養初意戱和」의 작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장서각본에는 “功彦”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두 편의 시는 악록집에도 수
록되어 있으므로 장서각본의 표기가 옳은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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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되어 있다.6) 기존 연구에서는 이들을 모두 승가사 모임의 일원으로 파악
한 듯하다. 곽정례는 이들을 “시회(詩會)”의 참여자로 간주하였고, 김은정
은 후대 사람이 필사했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마찬가지로 “시회 참석
자”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면서도 16인 가운데 시가 실리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는 점에 모두 의문을 표하였다.
그러나 창화집 어디에도 16인의 인물을 시회 참여자, 더 나아가 시사의
일원들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集中字號辨釋」이라는 제목은 “수창
집에 나오는 자와 호의 변석”, 말 그대로 창화집을 읽는 사람이 자호로 표
6) 僧伽酬唱錄 「集中字號辨釋」: “功彦 許公筬之字也號岳麓進文吏判草堂長子
待可 徐公起之字也號孤靑遺逸 君瑞 洪公麟祥之字也後改 履祥號慕堂生文大憲
諡文敬 見吉 禹公伏龍之字也初號東溪晩號懼庵進逸監司丁未生 善應 李公順慶
之字也進文參判 養初 石公涵之字也文官 伯懼 沈公喜壽之字也號一松進文左相
諡文貞 仲瑞 姓名未詳 月梧 疑是號也姓名未詳 劉希慶 賤者故直書姓名不敢字
而敬 李公名未詳 晦父 姓名未詳柳西坰字晦父或恐是也 許信仲 名未詳恐是岳麓
族黨 僧名 戒元 印暎 益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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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된 인물이 누구인지 모를 경우를 대비하여 후대에 설명해 놓은 것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월오(月梧)”, “회보(晦夫)”, “허신중(許信仲)”과 승려인 “계원(戒元)”,
“인영(印暎)”, “익호(益浩)”는 시가 나오지는 않지만, 모두 시 제목에 언급
되어 있다. 작자는 아니어도 수창시 작자들의 증여 대상이 되었던 인물인
것이다. 전혀 등장하지 않는 “백구(伯懼)”는 심희수의 자인데 허성의 시
「大行大妃挽詞代人作」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 시의 대상인 인순왕
후(仁順王后)는 심희수(沈喜壽, 1548~1622)의 사촌으로, 허성은 심희수
와의 관계 속에서 만사를 대신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시가 있더라도 시회의 일원이 아닐 수도 있다. 승가수창집은 원시
가 실리고 그에 대한 차운시가 차례로 실려 있는 형태를 취한다. 그런데
“姓名未詳”이라고 부기되어 있는 “중서(仲瑞)”의 경우에는 2편의 차운시
뒤에 「附仲瑞元韻」이라는 제목으로 원시가 실려 있다. 창화집의 작자가
쓴 시가 차운시이기 때문에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원시를 실은 것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시회의 참여자는 공언(功彦), 군서(君瑞), 현길(見吉), 양초
(養初), 선응(善應), 이경(而敬)과 잠시 들른 대가(待可), 즉 서기(徐起,
1523~1591)와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이고, 나머지는 이들의 시에
언급된 인물이다. 「集中字號辨釋」의 순서 역시 창화집에 등장하는 순서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모임의 주최자이거나 연배가 높거나 하는 것
과는 상관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은 작자에 관한 문제이다. 승가수창록의 시편 가운데 작자의 표
기가 따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있다. 이 경우 기존 연구에서는 작자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그런데 “字闕”이라고 표기된 시도 여러 편 발
견된다. 이 “字闕”로 표기된 것이야말로 누구인지 누락되어 알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작자를 따로 표기하지 않은 것은 누락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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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표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승가수창집의 두 번째 「僧伽道中有吟示功彦君瑞」는 대가의 작이고,
이에 대한 차운시 「次韻」 2수와 「又」 1수에는 작자 표기가 없다. 그런데
“공언과 군서에게 보인다”라는 대가의 시 제목을 통해, 「次韻」 2수의 작자
가 공언이고 「又」의 작자가 군서임을 추정할 수 있다. 또 이어 나오는 시
「卽事」에는 작자 표기가 없지만, 이에 차운한 시인 「次韻」은 공언, 「又」는
군서의 시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卽事」 역시 대가의 시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留別功彦」은 대가의 시라고 밝혀져 있고 「留別君瑞」, 「留別朴都令」
은 작자 표기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대가의 시라는 것은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로 추정할 근거가 없이 작자의 이름이 비어져 있는 경우는 이처
럼 앞서 나온 사람이 작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이어 나오는 시인
「留別待可學長」과 「又」의 경우 각각 군서, 공언이라고 밝혀져 있다. 헛갈
릴 수 있는 경우에 이처럼 분명하게 작자를 표기해 놓았다.
승가수창집에 “字闕”로 표기된 시는 「夜後次功彦」, 「送君瑞返洛」,
「送君瑞」에 대한 차운시 「又」, 「二月下弦記所見」에 대한 차운시 「又」 5수,
「途中」에 대한 화운시 3수로 총 11수이다. 이 11수를 제외한 340수의 시는
작자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연구(聯句)를 제외하고 세어보면,
공언 86수, 이경 77수, 양초 59수, 군서 51수, 현길 45수, 선응 4수, 서기
6수, 유희경 6수가 된다. 편찬 순서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준을 찾을 수 없으
나, 추화시(追和詩)가 나중에 나오고 차운한 시라도 나중에 차운한 시는
다른 시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수창집의 시편은 일반적인 편찬방
법인 시간 순서를 따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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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승가수창록의 편찬 과정
「集中字號辨釋」의 인물 기록은 후대 이해의 편의를 위해 기록한 것이
라는 점은 앞서 언급하였다. 16인을 시회의 구성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승가사 수창을 행한 주축이 누구인지 접근하는 것이 모임의 성격을 좀 더
실제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승가사 모임에 대한 기록을 군서(君瑞), 즉 홍이상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연보에는 “을해년 공 27세. 봄에 악록(岳麓) 허 공, 구암(懼
巖) 우 공과 함께 승가사에서 만났다. 시축이 있다.”7)라고 되어 있다. 여기
에서의 “승가사 시축”은 승가수창록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승가사
모임의 주역은 홍이상, 허성, 우복룡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홍이상은 “함께 노닐던 사람이 여섯인데 석, 이 두 군은 이 세상에
없고 나머지 살아있는 자 역시 흩어져 있어 만날 기약이 없다.”8)라고 하였
다. 그리고 살아있는 네 사람이 지은 시 4수가 창수집 말미에 실려있다.
작자는 홍이상, 허성, 우복룡, 그리고 선응(善應), 즉 이순경(李順慶, 1549
~?)이다. 이순경은 「集中字號辨釋」에 “진사, 문과급제, 참판[進文參判]”
이라는 이력이 설명되어 있다. 이 정보는 1568년 진사시에 합격, 1600년
문과에 급제, 1617년 병조참판에 임명된 이이경(李頤慶)의 이력과 일치하
므로, 이순경이 개명한 이이경(李頤慶)일 것이라는 추정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9)
홍이상이 죽었다고 한 “石”, “李” 두 사람을 「集中字號辨釋」과 비교한
7) 윤호진 역주, 譯註 慕堂先生詩文集 하권, 371면. : “乙亥公二十七歲。 春與岳麓
許公、懼巖禹公, 會僧伽寺有詩軸。”
8) 僧伽酬唱錄, 「識」: “僧同遊六人, 而石、李二君已不在世, 餘存者亦多星離而雲
散, 會合無期。”
9) 김은정, 전게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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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석”은 석함(石涵, 1538~?)이고, “李”는 명단에 보이는 다른 이 씨인
“而敬”으로 보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양초(養初)”를 자로 사용하
는 석함은 자세한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68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579년 문과에 급제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현재 광주(廣州) 석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李公名未詳”이라는 설명이 붙은 이이경은 누구일까? 나머지 5인의 신
분을 볼 때 이이경 역시 아직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진사나 생원일 가능성
이 크다. 사마방목에 보이는 이이경의 예는 1641년에 출생하였고 본관은
신평(新平), 거주지는 서울이며, 1570년 진사시에 합격한 이정우(李庭友)
라는 인물 하나이다.
박이장(朴而章, 1540~1622)의 연보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11월 반동(泮東)에서 심경(心經)을 공부하였다. 감계공 박 경함 한,
하 원룡 응도, 이 이경 정우, 정자명, 허 공언 성, 손군립, 유 언소 영서,
유 경승 희서, 박 덕응 성 제공과 함께 절차탁마하였다.10)
위는 1574년의 기록인데, 그의 연보를 살펴보면 1573년 진사시와 생원
시에 합격한 박이장은 1574년 봄에 성균관에 갔고, 4월에는 반야사에서 공
부하였다. 그 후 성균관 동쪽에 사는 노수신(盧守愼, 1515~1590)에게 공
부하였는데, 11월에는 위 인용문에 보이듯 심경을 공부하였다. 심경은
곧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가리킨다.
10) 박이장, 龍潭集 卷5, 「年譜」: “十一月 講心經于泮東。 藍溪公及朴景涵瀚、河元
龍應圖、李而敬庭友、鄭子明、許功彦筬、孫君立、柳彦紹永緖、柳敬承熙
緒、朴德凝惺諸公, 相切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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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학문에 뜻을 두고도 방도를 몰랐다. 가정(嘉靖) 신축년(1541) 선
생이 동궁에게 시강할 때 심경부주(心經附註) 읽기를 청한 연후에 내
가 비로소 이 책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 즉시 친구 허충길에게 구하여 삼
가 통독하였다. 완독하고 체득하니 마음속에 주로 할 바가 있는 듯하였고
경전과 사서를 열독하니 문맥을 조금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악에 떨어지
지 않은 것은 선생이 주신 것이 아닌 것이 없다. 항상 스승으로 여기니 제
가 들어서 배운 스승이시다.11)
위 인용문은 허성의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의 기록으로, 이언적
(李彦迪, 1491~1553)의 문집 발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언적은 이황(李
滉, 1501~1570)의 주리설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학자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심경부주(心經附註)는 명나라의 정민정(程敏政, 1445~1499)이
송나라 때 학자 진덕수(陳德秀,1178~1235)의 심경(心經)에 주석을 붙
여 1492년 처음 간행된 책이다. 이황이 “심경(心經)을 얻고 나서, 비로소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신명(神明)처럼 믿었고, 이 책을 엄한 아버지처럼 공
경하였다.”12)라고 제자에게 말했을 정도로, 퇴계학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허성의 아우인 허봉(許篈, 1551~1588)은 「心經」이란 시에서, “한가한
창가에서 천 번을 읽으니 뜰 가득 산그늘이 옷을 푸르게 적시네.[閑擲小窓
千遍讀 滿庭山翠滴衣靑]”라고 읊은 바 있다.”13) 형보다 이른 시기 벼슬에
11) 許曄, 草堂先生文集, 「晦齋先生文集跋」: “昔者竊有志於學, 而未知其方, 嘉靖
辛丑, 先生侍講東宮, 請讀心經附註, 然後曄始知有此書, 卽求于友人許忠吉處, 敬
讀終卷, 潛玩體驗, 則方寸之間, 似有所主, 讀閱經史, 稍知路脈。 至今不下陷於惡,
無非先生之賜也。 常竊以爲先生, 曄之聞而學之之師也。”
12) 李滉, 退溪集, 「언행록Ⅰ․유편(類編)․학문(學問)」,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
13) 허봉, 荷谷集 「荷谷先生詩鈔補遺․心經」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51

 

나아갔던 허봉 역시 산에 거처하면서 심경부주를 읽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승가수창록을 보면 방문한 서기(徐起, 1523~1591)에게 허성이 “십년
세속 먼지 비로소 씻어내니 심경 1부에 진정한 한가로움 있구나.[始滌十
年塵土累 心經一部有眞閑]”14)라고 읊은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서기가
찾아오기 전 허성은 심경부주를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이장
의 기록과 함께 살펴본다면 이것은 11월 노수신에게 배운 공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황을 보면 박이장이 노수신에게 배울 때 허성과 함께 있
던 이정우가 승가사에서도 허성과 함께 한 “이경”이라고 추정된다.
승가사 모임에 대한 기록을 허성의 악록집(岳麓集)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만력 갑술년(1574) 가을, 참판 허성, 판서 홍이상, 감사 우복룡, 참판 이
순경, 교리 석함, 고청 서기, 또 두 사람은 이름을 잊었는데, 승가사에서
20여일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통독하였다. 독서하는 틈에 서로 수창하
여 시편을 모으니 각기 십여 수가 되었다. 이때 유희경 역시 따라 와서 화
운시가 많다. 한 책에 각자 써서 갑술승가창수집(甲戌僧迦酬唱集)이라
명명하고 절의 승려에게 맡겼다. 왜란 후 홍 참판이 강화부사로 있을 때
승려가 서책을 바치러 오니, 즉시 허 판서, 우 감사 등에게 전달하여 보였
다. 공들이 각기 서문을 쓰니 하나의 고적이 되었다.15)

 

14) 허성, 岳麓先生文集 卷1, 「次韻戒元」.
15) 허성, 岳麓先生文集, 「附錄」: “萬曆甲戌秋, 許判書筬、洪判書履祥、禹監司伏
龍、李參判順慶、石校理涵、徐孤靑起, 又二員忘其名, 通讀性理大全于僧迦寺
二十餘日。 讀書之暇, 相與唱和, 篇什各十餘首。 時劉希慶亦隨往, 亦多奉和。 各
自書于一冊, 名曰甲戌僧迦酬唱集, 付于寺僧。 亂後洪參判爲江華府使時, 僧來納
書冊, 卽傳示于許判書、禹監司諸公, 諸公各有序記, 爲一古蹟。 出趙滄江手錄。”
25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위 기록은 조속(趙涑, 1595~1668)의 기록에서 채록하여 악록집에 실
은 것이다. 조속은 이들보다 한 세대 뒤이기 때문에 승가사에 모였던 사람
들 가운데 몇은 파악할 수 없고 또 시간상 착오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16) 어쨌든 그가 거론한 인물은 허성, 홍이상, 우복룡, 이순경,
석함, 서기, 유희경, 그리고 성명 미상의 2인으로 총 9인이다.
승가수창록에 시가 실린 인물 역시 9인이다. 허성, 홍이상, 우복룡, 석
함, 이순경, 서기, 유희경은 이름이 밝혀져 있고,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이정우가 있다. 그리고 원운으로 시 1수가 실려 있는 “중서(仲瑞)”라는 인
물도 미상이다. 이들과 관련 있는 인물 가운데 자가 중서인 사람은 군서,
즉 홍이상의 아우인 홍난상(洪鸞祥, 1553~?)을 찾을 수 있다. 후대 조속
이 언급한 창화집은 결국 이 9인의 시가 실린 승가수창록과 동일한 것으
로 짐작된다.
이들 가운데 홍이상이 밝힌 6인, 즉 허성, 홍이상, 우복룡, 석함, 이순경,
이정우가 승가사에 머물면서 독서를 하고 있었고, 당시 공주에 머물던 서
기가 상경하여 방문하였고, 북한산 반대편 도봉계곡에 거주하던 유희경이
왕래하였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홍난상의 시는 차운시를 이끌
어낸 원운시로서 기록되었을 뿐 실제 승가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속의 기록에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전문(傳聞)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근원은 사실에 있다. 허성을 비롯한 유생들은 직접 쓴 시를 친필로 적어
창화집을 만들어 절의 승려에게 맡겼는데 왜란 후 강화부사로 있는 홍이상
에게 돌아왔다는 것이 조속이 기록한 승가수창록의 전말이다. 세세한 사
16) 김은정은 이 기록을 통해 1574년 가을에도 승가사에서 모여 공부한 것으로 추정하였
다. 그러나 이듬해 일을 기록한 홍이상의 연보에 별다른 기록이 없고, 수창집이 홍이
상의 손에 돌아온 정황과 참여 인물이 승가수창록의 상황과 일치하는 점 등을 미
루어볼 때 갑술년이라는 것은 후세의 착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53

 

항을 배제하고 병란을 겪은 후 홍이상의 손에 창화집이 돌아왔다는 기본
줄기만은 사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홍이상의 후손 홍경모(洪敬謨, 1774~1851)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내
용을 찾을 수 있다.
우리 모당 선조 문경공의 수묵(手墨)은 「신성관야회시(信城館夜會詩)」
오언율시 한 편, 「제승가수창집시(題僧伽唱酬集詩)」와 서 한 편, 「약포정
상국만이십운시(藥圃鄭相國輓二十韻)」 오언배율 한 편을 함께 묶은 한
첩이다. … 을해년에 공이 악록 허성 제언과 승가사에서 노닐 때 한 축을
이룬 시가 있었다. 무술년(1598) 겨울 병란 끝에 얻었는데 완벽했던 일을
서술하였고 아래 칠언근체시 한 편을 썼으니 바로 이 본이다.17)
위 기록에 따르면 홍경모가 손에 넣은 홍이상의 육필 가운데 하나가 승
가수창록에 題한 시와 서문이었다. 서문 가운데는 왜란을 겪은 후 얻었는
데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승가사의 옛 놀이가 벌써 24년이 지났으나 산에 올라 구경하던 일과 함
께 노닐던 일이 마음과 눈에 오락가락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때 제공과
읊었던 수적(手蹟) 한 질에 “승가수창집”이라 명명하였다. 근래 변란을
겪은 후 어느 곳에 흩어졌는지 알 수 없어 항상 애석하였다. 이제 홀연히
뜻밖에 얻어 두세 번 펼쳐 보니 눈앞의 일처럼 완연하다. 아! 병화를 겪으
면서 보관해 둔 책 가운데 흩어지거나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없는데 오직
이 책만이 완벽하게 전해질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조물자가 일을 좋아하여

 

17) 洪敬謨, 冠巖全書 冊26, 「文敬公書詩帖」: “我慕堂先祖文敬公手墨, 信城舘夜
會詩五言律一篇、題僧伽唱酬集詩與序一篇、藥圃鄭相國輓二十韻五言排律一
篇共一帖。…乙亥公與許岳麓筬諸彦, 遊僧伽寺, 有詩成軸。 戊戌冬得於兵亂之餘,
叙其完璧之事, 下題七言近體一篇, 卽此本也。”
254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지켜준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그 사이 운수가 있었던 것인가? 함께 노
닐던 사람이 여섯인데 석, 이 두 군은 이 세상에 없고 나머지 살아있는 자
역시 흩어져 있어 만날 기약이 없다. 지금 나와 그대가 여기에 모여 이 책
을 볼 수 있으니 역시 우연이 아니다. 역시 이를 이어 여러 군들과 모여
옛 일을 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별은 많고
모임은 적어서 끝내 쓸쓸하게 될지 모르겠다. 이는 알 수가 없으나 역시
사람 힘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깊이 느껴 한숨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삼가 근체시 한 수를 지어 가르침을 바라니 허 군과
이 군 두 사람이 들으면 화운시를 아끼지 않으리라.18)
위는 현전하는 승가수창록에 실려있는 홍이상의 서문 전문으로, 칠언
율시가 함께 실려 있다. 본래 편집되었던 승가수창집은 여러 문인들의
친필로 엮어져 있었던 것인데 병란을 겪으면서 유실되었고, 수창이 이루어
진지 24년만에 다시 홍이상의 손에 들어왔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홍경
모가 기술한 내용, 즉 병란을 겪고 손에 넣었다는 내용이 있는 점과 칠언시
가 실린 점이 일치한다. 이는 조속이 기록한 전문과도 일치한다. 단, 1598년
홍이상은 한성부 우윤, 부제학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춘천부사로 부임하였
으나, 평생 관력에서 강화부사를 역임한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다. 이것도
전문이 지니는 오류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18) 僧伽酬唱錄, 「識」: “僧迦舊遊, 倐然已經二十有四歲, 其登覽之勝、從遊之盛,
未嘗不往來於心目。 其時有諸公吟咏手蹟一帙, 名之曰僧伽酬唱集。 近日經變之
後, 未知散落於何處, 常爲慨然。 今忽得之意外, 披翫再三, 宛然如眼中事。 噫! 兵
燹之餘, 秘書寶藏, 無不散失, 獨有此篇完璧而得傳, 是豈非造物者好事有所撝訶
守護, 而抑有數存乎其間歟。 同遊六人, 而石、李二君, 已不在世, 餘存者亦多星
離而雲散, 會合無期。 今吾與子得會於此, 得閱此編, 是亦非偶然, 亦未知繼此而能
團會數君, 以續舊事歟。 或未知萍逢浪迹, 別多聚少, 而竟歸於落莫歟。 是未可知
也, 而亦非人力所及, 念之及此, 不得不深感而興喟焉。 謹呈效拙近體一首, 因冀和
敎, 許、李二君聞之, 應不惜辱和。”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55

 

같은 시기 쓰인 우복룡의 발문에 나오는 “허우가 당시 애써 모아 기록한
뜻이 아마도 여기에 있으리라.”19)라는 구절을 통해, 본래 승가수창록은
허성이 중심이 되어 편집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허성의 시가 가장
많이 수록된 것 역시 본인의 시를 가장 많이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이해된다.
승가수창록의 뒷부분에는 “분운 이후의 작품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
으나 돌아갈 때 바쁘고 급작스러워 베껴 쓰지 못했고, 날이 오래될수록 흩
어지고 없어져 열 가운데 네댓은 없어졌다. 이에 그 대략을 추록함으로써
당시 행락의 유적을 기록한다.”20)라는 설명 하에 다음과 같은 서문이 실려
있다.
을해년 봄 승가사에서 나란히 지낼 때 한 번씩 수창한 것이 쌓여서 한
질이 되었다. 남에게 빌려주어 돌리다가 지금 비로소 돌아왔다. 살펴보니
옛 놀이가 떠올라 머리에 빙빙 도는 듯 하나 손가락을 꼽아보니 지금 이
미 7년이 지났다. 산에 오르던 흥과 뒤쫓던 자취가 어제 일인 듯 뚜렷하니
이것이 당시 모아서 엮었던 뜻이다. 그런데 책에 나오는 사람이 우리들 여
섯 일곱 명에 불과하지만 인사가 변하고 고락이 달라서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아! 이를 이어 다시 이런 놀이를 할 수 있을까. 신사년

 

(1581) 동짓달 홍이상 군서 쓰다.21)
19) 僧伽酬唱錄 : “許友當時眷眷葺錄之意, 其亦有在於是矣!”
20) 僧伽酬唱錄 : “分韻以後之作, 蓋不止此, 而歸時忙遽, 不及謄寫, 日久散落, 十亡
四五。 玆用追錄其大槪, 以識當時行樂之遺跡也。”
21) 僧伽酬唱錄 : “乙亥春, 聯棲僧伽寺, 一唱一酬, 積而成秩, 被人轉借, 今始見還,
覽閱之餘, 追念舊遊, 有若轉頭, 而屈指今已七經年矣。 登臨之興、追逐之蹤, 了
了然如前日事, 是則固當日緝錄之意也, 然卷中之人, 吾輩不過六七人, 而人事推
遷, 憂樂不同, 使人不能不興嘆。 噫! 未知繼此而能復爲此遊夫。 辛巳至月洪履祥
君瑞識。”
256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위와 동일한 내용이 허성의 악록집에도 실려 있으나 글을 쓴 사람이
따로 기재되어 있지 않다. 승가수창록과 악록집은 모두 필사시기를 알
수 없는 정서본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런데 “雨後宜返照”라는 구절을 분운(分韻)한 시 가운데 “返” 운에
대해 “이것은 바로 군서의 차운시인데 초고를 잃어버려 베껴 쓰지 못하니
한스럽다.”22)라고 부기되어 있다. 이것은 위 인용문의 베껴쓰지 못했다는
상황과 일치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악록집에는 허성이 지은 「送許信仲
還洛」이 실려 있는 반면 승가수창록에는 석함, 우복룡, 이정우, 홍이상의
시만이 실려 있다. 만약 허성이 원고를 수습했다면 후대 문집에도 편집해
넣은 자기 시를 승가수창록에 빠뜨릴 리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 지
(識)의 작자는 승가수창록의 기록대로 홍이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창화시를 수습한 사람이 홍이상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손에 전전하다가 8년 후 홍이상에게 돌아왔고 또 병란 후에도 다시 홍이상
에게 돌아온 것이다. 다만 시고를 적극적으로 수집했던 사람이 허성이었기
때문에 악록집 편찬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23)
이상의 기록을 정리하여 보면, 승가수창록의 편집과 보존에 가장 능
동적으로 움직인 인물은 홍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승가수창록을 통해 본 교유양상
승가사 모임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시를 읊었던 시사(詩社)의 형태
가 아니었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 유생들이 승가사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22) 僧伽酬唱錄 : “得返字, 此乃君瑞之次而草失, 不及寫可恨。”
23) 우복룡의 시로 표기된 「善應歸戱贈養初」가 허성의 문집인 악록집(岳麓集)에 실
려 있는 예도 찾을 수 있다.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57

 

어울리는 과정에서 창화가 일어났다. 여기에서는 시를 짓는 모임이 생겨난
과정과 함께 창화시의 양상에서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3.1. 동인 의식의 시발
승가사에서 머문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시를 쓴 6인
외에도 서기가 이별시를 써준 「留別朴都令」의 박도령, 이정우가 이별시를
써준 「別朴少年」의 박소년과 「別晦夫」의 회보, 「夢見月梧示諸友」와 「碑
殿卽事憶月梧」에 등장하는 월오, 네 사람이 송별시를 써준 허신중(許信
仲)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이 가운데 박도령, 박소년과 회보의 경우는 시의
정황상 승가사에 함께 머물던 인물로 보인다.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1575년 11월 박이장, 허성, 이정우와 함께 심경
을 공부했던 인물은 10명 정도였고 이에 앞서 박이장이 반야사에서 강습할
때도 10명 이상의 유생이 함께 머물며 공부하였다. 비슷한 시기 승가사에서
함께한 유생들도 박이장의 반야사 강습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다. 작자들
이 시제목에 언급한 인물들은 함께 공부했던 다른 유생들이었지만 이들이
모두 창화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승가수창록에 처음 등장하는 차운시는 서기의 「僧伽道中有吟示功彦
君瑞」에 차운한 허성과 홍이상의 시이다. 「卽事」 시에도 허성과 홍이상의
차운시가 있다. 서기가 돌아갈 때 홍이상은 “고인이 이틀 묵고 돌아가는데
해는 지고 천 봉우리 황혼이 드네[故人信宿歸 落日千峯夕]”라고 하였고,
허성은 “나는 공산옹을 사랑하노니 명성은 천 길 나는 봉황이라네[我愛公
山翁 名聲千仞鳳]”라고 읊었다. 당시 공주에 살던 서기가 서울에 올라오
면서 이들을 만나러 잠시 승가사에 들렀던 것이다. 이때는 친분이 있던 허
성과 홍이상만이 그와 창화를 하였다.
서기가 돌아간 후 석함이 승가사 창화에 합류하였다. 석함의 「登碑峰北
258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望有懷」와 허성의 「用養初意戱和」를 보면, 집을 그리워하는 석함의 시에
허성이 장난삼아 놀리는 것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암
(東巖)에 올라 안개 낀 풍경을 보고 허성과 홍이상이 시를 지어 석함에게
보여줌으로써 석함과의 창화가 이어졌다.
허성은 잠시 집에 다녀와 「呈諸彦求和」를 써서 본격적으로 화운시를
구하였다. 여기에 석함, 우복룡, 홍이상이 응답하였다. 홍이상이 잠시 하산
했을 때 허성의 「碑峰卽事」에 우복룡과 이정우가 차운하면서, 이정우도
창화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허성이 잠시 하산할 때는 우복룡의 「別功彦
歸家」에 석함, 홍이상, 이정우, 허성이 차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허성의
「路中留別寄諸君」과 그에 대한 차운시를 보면, 허성은 떠나있으면서도
시를 부쳤고 남은 사람들은 이에 응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旣望南
臺集句」는 허성이 부재했던 2월 16일 지은 집구시로, 이정우, 석함, 홍이
상, 우복룡이 참가하였다. 홍이상과 석함의 「次碑峰韻」은 앞서 이정우와
우복룡이 차운하였던 허성의 「碑峰卽事」에 차운한 것이다. 허성의 「次諸
益有懷韻」은 그가 부재시 홍이상, 우복룡이 차운했던 이정우의 「夜坐有
懷」에 차운한 것이다.
이처럼 잠시 승가사를 떠나더라도 남은 사람들끼리 창화를 이어가고 다
시 합류하고 나면 이어서 차운시를 짓기도 하였다. 허성과 홍이상으로 시
작된 창화모임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석함, 우복룡, 이정우가 합세한 다섯
사람으로 고정되었다.
허성이 돌아온 후 곧 홍이상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정우의 「寺之東西南
皆有臺焉西最居下而東與南相低昻焉各賦所見以相詬笑云」, 허성의 「霽
後」, 석함의 「二月下弦記所見」과 그에 대한 차운시 등을 보면 네 사람이
가장 활발하게 창화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복룡의 「君不來 二首」와
그에 대한 차운시는 함께 하지 못한 홍이상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들이다.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59

 

홍이상이 돌아오고 우복룡과 석함이 차례로 떠난 2월말, 유희경이 승가
사를 방문하였다. 남아있던 허성, 홍이상, 이정우는 유희경과 비봉에 올라
시를 주고받았다.
이후 이정우가 잠시 떠났다 돌아오고 석함도 돌아왔다. 3월의 승가사에
서 우복룡을 제외한 네 사람이 주로 시를 주고받았다. “雨後宜返照”라는
구절에서 각기 하나씩 분운(分韻)을 하여 시를 지었는데, 석함, 이정우, 허
성, 홍이상이 참여하였다.
비가 그친 후 승가사에 있던 사람들은 등산에 나섰다. 이때 우복룡과 이순
경도 함께 하여 「還到中興寺」에 차운한 시가 남아있다. 홍이상의 「自城到
僧伽聞諸益登山有寄」를 통해 등산을 놓친 그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어
제 문수로를 지났고 오늘은 고수암 사이에 머문다 하네.[昨過文殊路 今留古
峀間]”라는 구절을 보면, 이들의 산행은 며칠 걸리는 여정이었다. 절에 남아
있던 홍이상에게 허성, 이정우, 석함, 우복룡이 답시를 보내왔다.
3월 등산 이후 사람들은 짐을 꾸려 떠났다. 「送許信仲還洛」을 제목으로
한 석함, 우복룡, 이정우, 홍이상의 시가 마지막으로 실려 있다. 1575년 3월
하산함으로써 승가사의 창화는 끝이 났다.
시가 많지 않더라도 교유가 친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를 이순경
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승가사에서 지은 시는 단 3수만이 실려
있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준 시는 더 많다. 그리고 허성의 「戱贈善應」
과 「戱善應婦人嘆」, 허성, 석함, 홍이상, 이정우의 「戱善應深夜讀書」, 홍
이상의 「戱贈功彦善應」 등 제목에서도 보이듯 대부분이 희작(戱作)이다.
「戱善應深夜讀書」의 경우는 밤새 독서에 매진하는 이순경을 놀리는 내용
으로, 스스럼없이 장난을 칠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260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始識消愁莫過詩근심 삭이는 데 시만한 게 없는 줄 알았으니
善應今日自題詩선응이 오늘 스스로 시를 지었네
春風若作連旬雨춘풍이 만약 열흘 비를 연이어 만든다면
應向東村千首詩동촌 향해 천 수 시를 짓겠구나24)
위는 이정우가 이순경에게 지어준 시이다. 이 시기 봄비가 자주 내렸던
사실은 “雨後宜返照”를 분운한 일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3월 들어서는
비 때문에 돌아갈 기일을 늦추기까지 하였다. 위 시는 비가 내리던 중 소일
거리 삼아 시를 짓는 모습을 엿보게 한다. 두 번째 구에서 보듯 이순경이
자발적으로 시를 짓는 일이 이정우에게는 새삼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3구와 4구에서는 비가 많이 내린다면 집을 그리워하느라 천 수 시
도 짓겠다는 장난스러운 놀림의 내용이다. 이순경 스스로가 시 짓기에 적
극적이지 않았던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서기의 방문을 통해 촉발되었던 허성과 홍이상의 창화는 석함, 우복룡,
이정우가 합류하면서 모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모임은 시사(詩社)
처럼 규정된 것이 아니었다. 승가사 주변을 유람하거나 며칠간 등산을 가
는 일에 다른 유생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창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들이었던 것이다. 시작에 소극적인 이순경도 이들과
함께 몇 수의 시를 남기게 되었다.
함께 창화했던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동인의식이 싹 텄던 것으로 보인
다. 1581년 홍이상은 승가수창록에 보이는 사람을 “吾輩不過六七人”라
고 표현하였다. 1598년에는 “同遊六人”이라 표현되어 있다. 승가사 시절에
는 다수의 유생들이 함께 노닐었으나 창화시를 수습하여 기록하는 과정에
서 교유 인물은 이 여섯 명으로 정리되었다. 1598년 홍이상이 살아있는 사
24) 僧伽酬唱錄, 「見善應述懷以示慰之」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61

 

람들에게 차운시를 요구하였을 때 우복룡과 허성은 물론이고 시작에 소극
적이었던 이순경도 “승가사 옛 자취가 오랜 책에 있어 살펴보니 희미하게
옛날이 떠오르네.[僧伽遺跡在陳編 披閱依俙憶舊年]”라고 읊어 추억에 동
참한다. 젊은 시절 한 때 승가사에서의 창화모임이 말년에는 더 확실한 동
인의식으로 묶이게 되었던 것이다.

 

3.2. 시공간 공유를 통한 학시(學詩)
승가사 창화시에 대해 후대 우복룡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창화한 것 가운데 승묵을 더한다면 버리지 않고 남길
것이 과연 몇 수이겠는가? 경승지를 찾아 노닌 것은 방종함에 가깝고 송별
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말이 지나쳤다. 이것이 내가 뒤늦게 부끄러워 마지
않는 까닭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그 당시 함께 노닐던 사람들이 모두
곧고 진실하며 아는 것이 많은 벗들이었고 함께 강습한 것이 모두 시서와
예악이었는데 함께 바로잡아주고 도움이 되며 산속에서 자리를 나란히 하
여 다닐 때나 머물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샘 소리와 산 풍경에서 떠난
적이 없었으나 회포를 풀고 흥을 부친 작품들이 도리어 광대를 닮아있다는
것이다.25)
위 인용문을 보면 우복룡은 당시의 창화시들에는 지나친 과장과 감정의
과잉이 있었다고 본 것 같다. 같은 글월에서 그는 “시는 성정에서 근본하니
발현되는 바가 마땅히 우유(優游)하고 평중(平中)해서 바름을 잃지 말아
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지 않으면 곧 “玩物喪志”가 되어버린다고 하였다.
25) 僧伽酬唱錄 : “今日吾輩唱和之中, 若加繩墨, 則其可存而不去者, 果幾首也? 窮
遊選勝, 則殆於漫浪; 送別懷人 則淫於辭志, 此余之所以追愧而不能自已者也。 尤
所慨然者, 當其時所與同遊者, 皆直諒多聞; 所與講習者, 皆詩書禮樂, 蓬麻麗澤,
簪篕匡山, 行住坐臥, 不離乎泉聲山色之中, 而遣懷寓興之作, 反類於俳優。”
262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그러나 승가사에서의 창화는 “殆於漫浪”, 곧 절제 없는 자유분방함과 “淫
於辭志”, 곧 감정을 쏟아내는 지나친 말들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흥을
돋우는 “배우(俳優)”, 즉 광대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젊은
유생들에게 자유분방한 시어를 쏟아내게 했던 제재는 바로 승가사에 머물
면서 겪었던 “窮遊選勝”과 “送別懷人”이었다.
허성과 홍이상의 시에 석함이 처음 차운시를 짓게 된 경위를 다음 시
제목에서 알 수 있다.
봄잠에서 일어나기 전 홀연 승려가 들러 “나루 안개가 매우 기이하다”
고 말하였다. 옷자락을 쥐고 일어나 절문에 기대 남쪽을 바라보니 흰구름
이 흘러넘쳐 파도처럼 솟구쳤다. 지난번 눈 아래에 있던 저자도, 노량진,
율도가 아득하여 있는 곳을 도통 알 수 없었고 청계산, 관악산, 광릉산이
큰 바다에 섬들처럼 어슴푸레하게 봉우리 몇 개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매
우 즐거웠으나 시력이 좋지 않아 기이한 광경을 다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군서와 함께 동암에 올라 서쪽으로 해구를 바라보니 또 절에서 보
던 것과 달랐다. 드디어 동파의 “此間不可無我吟” 구를 읊고서 각자 시를
지어 양초에게 보여주었다.26)
위는 허성이 지은 오언율시의 제목이다. 새벽에 안개 낀 포구를 절에서
바라보았다가 다시 동암(東巖)까지 올라 구경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
때 홍이상이 지은 칠언절구가 창화집 뿐 아니라 문집에도 「與功彦同登東
巖望浦霧有吟」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석함이 지은 화답시는 이들과 함
26) 僧伽酬唱錄 : “春眠未起, 忽聞有僧過而言曰: “浦霧甚奇。” 遂攬衣而起, 倚沙門
而南望, 則白雲彌漫, 洶湧如波濤, 向來楮子島、露梁、栗島, 羅列在眼底者, 茫然
渾不知其處所, 但見靑溪、冠岳、廣陵諸山, 蒼然露數峰, 如島嶼之點大洋也。 余
甚樂之, 但目力之不廣, 或不能以盡其奇觀也。 遂與君瑞登東巖, 西望海口, 則又非
沙門之所有也。 遂吟東坡“此間不可無我吟”之句, 而各有詩以示養初。”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63

 

께 구경을 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풍경을 다른 시어로 그려내고 있다.27)
동파의 「往富陽新城李節推先行三日留風水洞見待詩」는 “봄 산에 짹짹
봄새가 우니 이 사이 내가 시를 읊지 않을 수 없고 길은 길게 강나루 옆으
로 이어졌으니 이 사이 그대는 말이 없을 수 없네[春山磔磔鳴春禽 此間不
可無我吟 路長漫漫傍江浦 此間不可無君語]”라는 구에서 인용하여 시 지
을 것을 제안하는 허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변경관을 탐닉하는 모습은 이정우의 시 「寺之東西南皆有臺焉西最居
下而東與南相低昻焉各賦所見以相詬笑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 제
목에 보이는 대로 절의 동쪽과 남쪽에 있는 대(臺) 가운데 어느 곳이 더
훌륭한지 자기의 의견을 내는 시이다. 이정우와 허성은 동쪽이, 우복룡과
석함은 남쪽이 낫다는 의견을 내었고, 이정우는 다시 한 번 동쪽이 더 낫다
는 의견을 차운시로 개진한다.28)
「二月下弦記所見」은 홍이상이 부재했던 시기에 석함, 우복룡, 이정우,
허성 등 네 사람이 창화한 시이다. 운자를 달리하여 7번 창화가 이루어지

 


27) 허성의 시는 “晨起啓曙扉 迢迢望平楚 宿雲滿近遠 村墟迷處所 江湖失遠帶 遙岫
露孤嶼 勢如懷襄時 波濤相盪處 忽協雲夢胸 巖頭重延佇”, 홍이상의 시는 “夜來風
雨曉來收 起向東臺霽色稠 宿霧欲沉平萬壑 銀海浩渺碧螺浮”이다. 이에 대한 석
함의 화답시는 각각 “夜雨霽巖扉 宿雲漲遠楚 城門失歸路 九陌迷其所 嶙峋藏半
腹 俯見疑島嶼 波濤浩眇平 漁村在何處 奇觀聳玉樓 吟詩更延佇”, “夜雨初晴雲未
收 朝來忽見壯觀稠 尖峰半入烟濤裏 疑是三山點點浮”이다.
28) 이들의 시는 순서대로 “一石崔嵬古寺東 客來於○思無窮 山連睥睨金城壯 水接平
蕪眼界空 造物當年豪且縱 詩人今日句難工 相看莫道南臺勝 到底風煙自不同”;
“千秋遺意慕登東 八極茫然眼力窮 山勢直連天宇闊 湖光遙接海門空 風光淡蕩靑
陽盡 境界高孤造化工 莫把南邱相比幷 壤霄難與語年同”; “臺在於南又在東 若論
觀覽儘無窮 端嚴正大平臨遠 詆訐孤危獨峙空 喜險人情多險境 觀天高眼詫天工
道存坦蕩還輕易 自愧憑君說異同”; “細泉鳴玉小溪東 峭壁蒼崖路亦窮 雨後山容
來榻淨 風邊松影落庭空 孤危正合留仙客 勝絶端宜倩畵工 到此風煙儘可樂 所嗟
猶未與南同”; “誰把南邱較此東 此東奇勝話難窮 詩人最喜臨滄海 俗子偏倩近碧
空 坦蕩縱云宜異境 高孤其奈自天工 春風十載山川眼 爭說憐渠管見同”이다.
264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면서, 그날 구경한 경관을 적극적으로 시의 제재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吟詩銷日酒銷愁시 읊으며 날 보내고 술로 시름 녹이면서
行盡淸溪坐石流맑은 시내 머물러 물가 바위 앉았네
春光淡蕩眞堪賞봄 풍경 온화하여 감상할 만 하기에
收拾風煙入唱酬경치를 거두어서 창화시에 넣었어라
위는 28수의 시 가운데 한 수로 작자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다른 시의
내용을 통해 이들은 비가 그친 후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봄산의 정취를 구
경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복룡이 “자유롭게 그윽한 흥취 찾았고 정처
없는 유람은 해 저물어 끝났네[漫浪探幽趣 雲遊限日斜]”라고 할 정도로,
이들은 편한 마음으로 승가사 일대를 산보하였다. 위 시에 보이듯 물가에
앉아 쉴 때나 봄 풍경을 구경할 때나 시를 짓는 일이 수반되었던 것 같다.
같은 공간에서 향유하는 풍경을 각자의 시로 드러내어 감회를 공유하는
일이 창화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공간의 공유는 다른 시간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승가사에 머물던 이들
은 탕춘대를 거쳐 도성을 오갔다. 이때 연산군과 관련이 있는 탕춘대는 시
의 좋은 소재로 사용되었다. 허성의 「過蕩春臺有吟」을 필두로 하여, 얼마
후 이곳을 지난 홍이상과 우복룡이 비슷한 주제로 차운시를 지었고, 더 나
중에 이정우와 다른 한 명이 허성의 시에 차운시를 지었는데, 시가 다루는
주제는 모두 연산군의 고사를 활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기 탕
춘대를 오갔으나, 허성의 원시에 비슷한 주제로 차운시를 지어 같은 주제
를 다른 시어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65

 


與子相知晩그대 안 것은 늦었지만
心期獨許親마음으로 친하기를 기약하였네.
看經共討論경전을 보며 함께 토론하였고
覓句好吟呻시구 찾으며 신음하기 좋았네.
泮水三冬雪반수에서 한겨울 함께 겪었고
空山二月春공산에서 이월 봄 함께 지냈네.
無端聚又散끝없이 모였다가 또 흩어지니
淚濕丈夫巾29) 눈물이 장부의 수건 적시네.
위는 이정우가 우복룡에게 준 이별시이다. 이 시를 통해 창화를 함께 한
사람들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이정우와 우복룡은 세교(世交)가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반수(泮水), 즉 성균관에서 함께 지내던 유생들이고 또
봄에는 승가사에서 함께 독서를 한 사이이다. 2월에 잠시 우복룡이 귀가하였
고 3월에는 돌아와 함께 등산을 하면서 시를 주고받았다. 거의 한달 간격으
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절박함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점이 바로 우복룡이 지적한 “淫於辭志”의 한 면모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시에 왜 이런 지나친 면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까?
이 점은 잠깐의 방문이었던 서기와 유희경 시의 비교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서기는 멀리 공주에서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留別待可學長」에 보이는 이별은 실제 이별인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흘
리거나 밤새 그리워한다거나 하는 과장된 표현 없이 이별의 슬픔을 글자
사이에 숨겨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유희경은 함께 비봉에 올라 풍경을 감
상하고 시를 주고받았지만 이별시가 아예 없다. 북한산 반대편 도봉계곡에
살고 있는 유희경은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인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9) 僧伽酬唱錄, 「送見吉」.
266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그러나 이 시의 함련에서 보이듯 이들은 승가사에 독서를 하러 온 사람
들인 동시에 “覓句”, 즉 시구를 찾아 고심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
다. 주변 경관을 찾아 여러 차례 창화를 반복하고 잠시 자리를 비우는 헤어
짐에서 절절한 이별시를 주고받는 것은, 성정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작시의
수련이라는 데 더 중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간 날이 지나갔고 올 날은 경계할 만하다. 만약 이를 통하여 깨달아서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다면 남아있는 이 시편은 실로 징창(懲創)과 감발
(感發)의 시초이니 억계시를 거의 이을 수 있으리라.30)
위는 우복룡이 미숙하고 부끄러운 기록인데도 창화집을 남기는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다. 공자가 시경시에 대해 “思無邪”라고 하였던 데 대해, 주
자는 “선한 시는 인간의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악한 시는 인간의 방종한
뜻을 경계하게 한다.[善者可以感發人之善心 惡者可以懲創人之逸志]”고
주를 단 바 있다. 우복룡은 자신들이 남긴 시를 “懲創”과 “感發”의 시작이
라고 하였다. 곧 승가수창록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시작에 들어간 기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초기 지은 시들을 위무공(衛武公)이 여왕(厲
王)을 풍자하여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시경 시편인 억계시에 비
유하였다. 잘못된 부분도 있으나 그 점을 경계하기 위해 평생 읽어야 할
시이기도 한 것이다.
젊은 시절 한 때를 공유한 사이지만 창화를 통한 본격적인 시 수련도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운격(韻格)과 지취(志趣)에 볼 만한 것이 없어도
처음 시작할 때를 떠올리고 경계하게 만드는 기록이 승가수창록이었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 僧伽酬唱錄 : “往者已矣, 來者可戒, 若因玆惕悟, 毋吝於改轍, 則是篇之存實懲
創感發之權輿, 而庶乎有繼於抑戒之作矣。”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67

 

4. 맺음말
이상으로 승가수창록의 성립과정과 창화를 통한 교유 과정을 살펴보
았다.
1575년 봄 승가사에는 여러 명의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하고 산천을 유
람하였다. 이 가운데 본래 친분이 있었던 허성과 홍이상을 중심으로 시문
창화가 시작되었고, 석함, 우복룡, 이정우, 이순경 등이 함께 하였다. 서기
와 유희경이 방문하여 이들과 시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시를 기록
하여 엮은 것이 승가수창록이다. 권머리의 「集中字號辨釋」에 기재된
16인의 인명은 후세를 위한 참고사항일 뿐 승가사 모임의 구성원으로 추단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창화를 주도한 사람이 허성이기는 하지만 승가수
창록의 편집과 보존 과정에서 가장 능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홍이상임
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승가수창록은 시사(詩社) 혹은 시회(詩會)의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
규정된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진 창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승가사라는 공간
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 창화시가 수습되어 문헌으로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창화에 참여하여 시를 주고받고 승가수창
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시를 쓴 여섯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동인의
식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시문은 문학적으로 높은 수준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젊은 유
생들이 본격적으로 시작을 연마하는 과정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승가수창록이다. 창화를 통해 형성된 시 그룹은 주변 사물과 경관을
관찰하여 시로 형상화하고 이별시를 통해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출한다. 같
은 제재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같은 시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일도 종종 일
어난다. 경전 공부와 아울러 시로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학시의 과정
268 洌上古典硏究 제42집 (2014. 12)

 

이 함께 행해졌기 때문이다. 만년에 다시 돌아온 승가수창록은 그 시절
과 공간을 공유했던 작자들 사이에 동인의식을 다시 한 번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승가수창록은 20대의 유생들이 어떻게 학시를 진행하고 창화를 통해
동인의식이 싹트는 지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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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滉, 退溪集,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
許曄, 草堂先生文集.
許筬, 岳麓先生文集.
洪敬謨, 冠巖全書.
윤호진 역주, 譯註 慕堂先生詩文集 하권, 민속원, 2012.
곽정례, 「僧伽酬唱錄과 委巷詩社의 연원」, 어문연구 33권 4호, 한국어문교육연
구회, 2005, 407-429면.
김은정, 「16세기 사대부 문인의 시문수창집 僧伽唱酬錄」, 漢文學報 25, 우리한
문학회, 2011, 73-122면.
문희순, 「朝鮮中期 枕流臺詩社의 形成과 展開」, 어문연구 37, 어문연구학회, 2001,
153-176면.
논문투고일 : 2014. 10. 30. 게재확정일 : 2014. 12. 11.
승가수창록(僧伽酬唱錄)의 성립과 교유양상 269

 


Abstract
The Making of Sŭnggasuch'angnok(僧加酬唱錄) and the Social
Intercourse of its Poets
Koo, Jea-hyoun*
31)
This research traces the making of the extant two volumes of Sŭnggasuch’angnok
(僧加酬唱錄) and analyzes the poets’ social intercourse. Sŭnggasuch’angnok is an
anthology of poetry exchanged among six Sŏnggyungwan Confucian scholars, Hŏ
Sŏng, Hong Isang, U Pokryong, Sŏk Ham, I Sŏnkyŏng, and I Chŏngu, studying at
Sŭnggasa Temple in the spring of 1575. Hŏ Sŏng and Hong Isang sought to record
the poems and Hong collected them in the form of the Sŭngga Such’angnok. While
the six studied Neo-Confucianism, appreciated natural landscapes, and exchanged
poetry, they also actively included members of the lower class Sŏ Ki and Yu Hŭikyŏng
in their gatherings. Despite their status, they shared a poetic space with the members
of the Sŭnggasa Temple and were respected as seniors and poetry companions for
their learning and poetic themes. Through these sources, one can examine the daily
lives of sixteenth century Confucian scholars studying and associating freely back
and forthin the walls a Buddhist temple away from the confines of Sŏnggyungwan
Academy.
key words Hong Isang, Sŭnggasuch’angnok(僧加酬唱錄), Hŏ Sŏng, U Pokryong
* Sunmoon U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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