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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논문(2)

조선후기 문인들이 선호한 조경식물과 조경문화

작성자낙민|작성시간16.02.28|조회수138 목록 댓글 0

조선후기 문인들이 선호한 조경식물과 조경문화

 

 

 

 

심우경(고려대)

 

1. 서론
2. 조선 이전의 조경식물과 조경문화
3. 조선후기 문인들이 선호한 조경식물과 조경문화
4. 결론

 

1. 서론

 

조선후기(1700~1850)는 다양한 문화 활동이 전개된 우리문화의 난숙기로 분류되고 있는 가운데 문인지식인층에 의해 조경식물[화훼]과 이상적인 정원에 관한 저서가 다수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며, 근래 이에 대한 연구가 인문계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분야는 일반적으로 원예학자나 조경학자가 연구해야 할 대상으로 볼 수 있지만 오히려 타 분야에서 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실정에 이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낯부끄러운 점이 없지 않으나 오히려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근시안적인 연구를 탈피할 수 있지 않나 보아진다. 특히 한문으로 집필된 문헌을 인문학자들의 도움 없이는 조경학자들만이 연구하기에는 어려운 실정이라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되며, 이제부터라도 학제 간 연구를 통해 우리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데 힘을 모아야 될 것이다.


옛 조경문화를 연구하는 있어서 네 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첫째는 남아 있는 유적. 유물(remains)을 통하여 밝히는 것으로 가장 정확한 접근이 되겠으나 시대가 흐름으로써 원형을 유지하기 어렵고 훼손이 많은 문제점이 있고, 두 번째는 詩文(description)을 통하여 서술한 장면을 유추하여 고증을 받아 연구하는 방법이 있고, 셋째는 원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자료(illustration; 문인화. 진경산수화. 초충도 등)를 통한 방법이 있으며, 넷째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식물의 경우 花粉分析(pollen analysis)을 통하여 그 당시 어떤 식물이 식재되었는지 밝히는 방법이나 인공위성 사진판독을 통해 밝히고 있다. 유적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훼손되고, 특히 수목은 생명체라 수령이 다 하면 고사하기 때문에 옛 모습을 보존하기가 어려운데 당시의 모습을 시문으로 기술해 놓은 자료는 전통조경문화를 이해하고 복원하는데 귀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우리 역사상 다방면에 걸쳐 문화가 가장 활발히 발전되었다고 하는 조선후기 문인지식인들이 시문을 통해 묘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이 선호한 조경식물과 주택조경문화의 특징을 밝혀보고, 현대조경에 계승하여 한국적 조경으로 발전시키는데 일조가 되고자 하였다.  

 

2. 조선 이전의  조경식물과 조경문화
 
우리 국조 檀君에 관한 최고의 자료는 고려 충렬왕대(1275~1308)에 선술된 普覺國尊 一然의 『三國遺事』와 1287년[충렬왕 13] 선진된 動安居士 李承休의 『帝王韻記』를 들 수 있는데 두 책 모두 단군왕검이 태백산 정상의 神檀樹 밑에 神市를 건설하고 弘益人間과 在世理化를 건국이념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신단수라고 하여 박달나무 檀을 쓰고 있으나 나무의 종류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신이 깃들인 나무를 숭배하는 수목숭배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즉 우리 역사는 식물[수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인종 23년 을축(1145년)에 김부식에 의해 찬진 된『三國史記』「백제본기」제1 溫祚王 3년(기원전 16년) 10월에 ‘桃李에 꽃이 피었다(桃李華)’는 기록이 있어 최초의 조경식물로 볼 수 있으며, 「신라 본기」제1 祗摩尼師今 12년 5월(123년)에 ‘금성 동쪽의 민가가 땅이 꺼져 내려앉아 못이 되더니 거기에서 芙蕖가 싹터 나왔다’라는 연꽃에 대한 최초의 기록과 4세기 초에 축조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많은 연꽃이 묘사된 사실과 중국 연꽃 전문가 王其超가 작성한 <蓮屬世界分布圖>에 우리나라가 포함되고 있는 등으로 보아서 연꽃이 불교 전래[372년]와 더불어 중국이나 인도로부터 수입된 식물로 알려졌으나 우리나라에 자생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밝히고 있다.


또 신라 제26대 眞平王 49년(627년)에는 당나라로부터 처음으로 모란 씨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선덕여왕 때부터 궁원에 모란을 심었다는 사실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고, 신문왕 재위(579~632년) 때 薛聰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는「花王戒」에 장미와 할미꽃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한국 조경문화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三國史記』 백제본기 辰斯王 7년(391년) 춘정월 조에 의하면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여기에 기이한 새와 색다른 꽃을 심었다(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라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조경에 아름다운 조경식물을 식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유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 이어 백제본기 무왕 35년조(634년)에 의하면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 채웠으며 못가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 섬을 축조하고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 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부여 궁남지로 추측하고 있다[사진1].


신라 문무왕 14년(679년) 2월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珍禽과 奇獸를 길렀다(宮內穿池 造山種花草 養珍禽奇獸)’라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현존의 雁鴨池를 거론한 것이며, 『東國輿地勝覽』에 ‘天柱寺 북쪽에 雁鴨池가 있는데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巫山十二峰을 상징했으며 꽃을 심고 진금을 길렀다(雁鴨池在天柱寺北 積石爲山 象巫山十二峰 種花卉養珍禽)’라는 구체적인 기록이 있어 섬 안의 세 섬과 더불어 중국 사천성에 있는 명산인 무산십이봉을 상징하여 신선사상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진2]. 


또한 『三國史記』列傳 第六 崔致遠(857~?)에 보면 ‘산림하와 강해빈으로 소요. 방랑하며 臺榭를 짓고 松竹을 심으면서 서책으로 베개를 삼고 풍월을 읊었으니, 경주의 남산, 강주의 빙산, 합주의 청양사,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의 別墅가 모두 그가 놀던 곳이다’하여 이때부터 소나무와 대나무가 식재되었음을 알 수 있고, 한국전통조경 가운데  독특한 분야인 별서정원이 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까지는 복숭아나무, 오얏나무, 연꽃, 모란, 장미, 할미꽃, 버드나무, 소나무, 대나무 등 약간의 조경식물이 문헌에 나타나고 있으며, 궁궐을 중심으로 신선세계를 희구하는 조경문화와 별서정원이 처음 등장 한 것이 특징으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서 많은 조경식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려시대 저술된 25종의 문집을 대상으로 실제 주거환경 속의 정원을 묘사한 내용이 담긴 서한문, 기행문, 시문 등을 조사한 결과 총 46종의 식물이 나타나고 있는데, 고려시대 대문호인 李奎報(1168~1241) 가 쓴 『東國輿地勝覽』에만 44종의 식물이 언급되고 있다.


李仁老(1152~1220)가 남긴 『破閑集』에 ‘어제 금마문을 나와 御花苑에 이르러 귤나무의 높이가 한 길이나 되고 결실이 많은 것을 보고 苑吏에게 물으니, 南州 사람이 바친 것으로 아침 마다 소금물을 그 뿌리에 주는 까닭에 무성하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인데 추위에 약한 난대수목인 귤나무를 개성에서도 키울 수 있음은 고려인들의 원예기술이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있으며, 꽃들이 무리지어 장관을 이루는 명소를 찾아 詩會를 열기도 했는데 崔忠獻(1149~1219) 정원의 꽃석류[千葉榴花]가 만개하면 문인들을 모아 시를 짓게 하고, 이때 지어진 좋은 시를 뽑아 생황으로 연주케 하여 전국에 보급했다고 하는데, 꽃석류 역시 난대 화목으로 현대 서울에서도 월동이 안 되는데도 그 당시 정원에 심어 관상했다는 사실 역시 놀랍다. 그 밖에 梁國峻 정원의 작약, 李奎報 동산의 장미, 惠首座의 자주색 모란, 金曣의 영산홍, 杏村書室의 매화가 유명했으며, 공공기관에도 많은 꽃들이 식재되었는데 賞春亭의 모란, 金明殿의 석창포, 中書省의 작약, 約義軒의 연꽃, 崇敎寺의 연꽃, 史館의 장미, 山呼亭의 모란도 꽃의 명소로 널리 알려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李承休(1224~1300년)의 ‘장미연’에도 사관 뜰 안 장미 한 그루에 꽃이 만개하면 사관의 문신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이를 감상했다는 기록도 흥미있는 대목이다.


고려시대는 조경식물을 다양하게 이용하면서 정원문화도 발전을 가져오는데 그 유적이 남한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 저술된 21종의 문헌을 통해 기록된 조경문화를 살펴보면  정원에 대한 명칭이 園林이 8회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林泉 7회, 家園  6회, 庭院 3회, 園囿 2회, 林苑 2회, 庭除1회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정원의 국부명칭도 後庭 2회, 北園 1회, 中庭 1회, 內庭 1회, 花園 1회로 후정이 중요한 위치를 찾이 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조경식물에 대한 명칭으로 園樹 2회, 庭樹 1회, 庭前樹 1회, 庭林 1회 나타나고, 화단을 花塢 6회, 曲塢 1회, 百花壇 1회가 나타나고 있으며, 고려후기에는 직업화된 정원관리인 즉, 園丁이 등장했다.그리고 고려 제25대 충렬왕 34년(1308년) 조에 모든 궁궐의 어원을 맡아 보는 관리부서인 內園署를 司膳署의 관할 밑에 둔다는 기록이 보인다.

 

3. 조선후기 문인들이 선호한 조경식물과 조경문화 

 

조선후기(1700~1850)는 우리 문화의 난숙기로 분류되는 가운데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적 문화가 활발히 발전되었는데 그 중  문인지식인층이 꽃을 심고 정원을 가꾸는 일이 크게 유행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조경식물에 가장 관심을 많이 쏟은  인물은 柳樸(1730-1787)으로 그간 『花菴隨錄』의 저자가 宋柁(1567-1597)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유박으로 밝혀졌고, 그는 유득공의 7촌 당숙이 되는 인물로 황해도 배천에 百花菴을 짓고 온갖 꽃을 길렀으며 꽃 재배의 체험을 바탕으로 『花菴隨錄』을 남겼는데 그의 백화암을 위해 이용휴, 정범조, 유득공, 이헌경, 체제공, 목만중 등 쟁쟁한 문인들이 기문과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식물을 재배하고 감상하는 소회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네 계절의 화훼를 모두 백가지 구했다. 큰 것은 재배하고, 작은 것은 화분에 담아 둑을 쌓아 백화암 가운데 두었다. 몸을 그 사이에 두고 소견하면서 세상을 잊고 기쁘게 자득하였다.粉梅와 禁醉[국화 품종]는 찬찬히 정신을 살피고, 왜철쭉과 영산홍은 멀리서 형세를 보며 웅위함을 취한다. 丹藥과 桂桃는 마치 새 여인을 얻은 것과 같다. 치자와 동백은 큰손님을 마주한 듯 아리따운 모습이 손에 잡힐듯 하다. 석류는 생각이 시원스럽다. 파초와 괴석은 마당가에 두어 명산으로 삼는다. 瘐松에서 태고의 모습을 얻고, 風竹은 전국의 기상을 띠고 있다.  섞어 심어 시자로 삼는다. 연꽃은 마치 周茂叔을 마주한 듯 공경스럽다. 기이한 것, 예스런 것을 취해 스승으로 삼고, 맑고 깨끗한 것은 벗으로 삼는다. 번화한 것은 손님으로 삼는다.

 

그는 또한 꽃을 9등급으로 분류한 「화목구등품제」에서 1등에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소나무를 꼽고 기준은 高標逸韻을,  2등에는 모란. 작약. 倭홍. 海榴. 파초 등을 꼽고 그 기준을 부귀에, 3등에는 치자. 동백. 사계. 종려. 만년송을 들고 기준은 운치를, 4등에는 華梨. 소철. 서향화. 포도. 귤을 들고 기준은 운치를, 5등에 석류. 복사꽃. 해당. 장미. 수양버들을 들고 기준은 번화함을, 6등에는 두견. 살구. 백일홍. 감. 오동을 들고 기준은 번화함을, 7등에 배. 정향. 목련. 앵두. 단풍을 들고 기준은 제 각각의 장점을 취한다고 했으며, 8등에는 무궁화. 패랭이꽃. 옥잠화. 봉선화를, 9등에 접시꽃. 剪秋紗. 금전화. 창잠. 회양목을 들고 각각의 장점을 들어 등급을 매겼다고 밝혔다. 모두 45종의 조경식물을 각각의 기준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제외된 그 외 식물 가운데는 능금. 丹柰. 산수유. 위성류. 백합. 常海棠. 산단화. 철쭉. 栢子. 측백. 비자. 은행 등 12종을 뽑아서 더 보태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45종의 식물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을 붙였는데, 예를 들어, 작약은 貴友이고 꽃의 재상이다. 金絲洛陽紅. 千葉臼. 千葉純洪이 귀한 종이다. 가을에 파종하는 것이 좋다. 작약은 한번 화가 나면 3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럴 때는 반듯이 인분을 주어 화를 풀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식물의 품종과 특성에 까지 깊은 지식과 조예를 가지고 수많은 꽃에 대하여 해박한 특성과 재배법을  적어놓고 있어, 그간 화훼서로 가장 사랑을 받아 오고 있는 조선 초기 詩畵書에 능해 三絶로 알려진 仁齋 姜希顔(1417-1464)의 『養花小錄』과 비견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화훼서이다. 


서울  명례방의 큰 길 가에 살았던 丁若鏞(1762~1836)은「竹欄花木記」란 글에서 자신이 꾸민 정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안석류는 잎이 살지고 크며 열매가 단 것을 해석류 또는 왜석류라 한다. 왜석류가 네그루다. 줄기가 곧게 한 길 남짓 오르도록 곁가지가 없고, 위에 쟁반처럼 둥근 것을 만든 것(속칭 능장류다)이 한 쌍이다. 꽃만 피고 열매 맺지 않는 석류는 꽃석류라 하는데 이것이 한 그루다. 매화는 두 그루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묵은 복숭아나 살구나무 뿌리가 썩어 골격만 남은 것을 가져다가 괴석처럼 조각해 놓고, 매화는 겨우 작은 가지 하나만 그 곁에 붙여두는 것을 기이하게 여긴다. 나는  뿌리와 줄기가 실하고 가지가 무성한 것을 가품으로 친다. 꽃이 좋기 때문이다. 치자가 두 그루다. 두보는 ‘치자를 여러 나무에 견주면 인간에 진실로 많지가 않네.’ 라고 했다. 대개 또한 희귀한 품종이다. 산다화가 한 그루다. 金盞銀臺, 즉 수선화 네 포기를 한 화분에 같이 심은 것이 하나 있다. 파초는 크기가 방석만 한 것이 한 그루다. 벽오동은 두 살짜리가 두 그루다.  蔓香이 한 그루요, 국화는 종류별로 18개 화분이 있다. 부용화 화분이 한 개 있다.  
 
이 글을 통하여 정약용의 화훼에 대한 애정을 살펴볼 수 있는데 석류를 품종별로 구분하여 그 특징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난대 식물로 서울에서 월동이 힘든 석류, 매화, 치자, 산다화[동백], 수선화, 파초를 심었다는 사실은 뜰의 절반을 대나무 울타리[竹欄]로 둘러 추위를 막고 성심껏 길렀음을 알 수 있고, 금잔은대나 만향은 식물명을 동정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부락의 뒷산 만덕산에 초당을 짓고 적거생할을 하는 동안(1808년부터 11년) 조영한 茶山草堂에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중도형 方池와 후원양식인 계단상의 菜圃와 花階를 조성하였는바, 그 정원을 「茶山花史二十首」라는 연작시로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20수는 제1수, 소나무 숲 속에 위치한 다산의 위치를 읊기 시작하여, 2) 꽃으로  둘러싸인 다산의 작은 연못, 3)대나무, 4)매화, 5)복숭아, 6)유다, 7)모란, 8)홍약[작약], 9)수국, 10)해석류, 11)치자, 12)자미[배롱나무], 13)월계화, 14)융규[촉규화], 15)국화, 16)패랭이, 17)포도, 18)세와전[밭], 19)서적, 20) 하늘이 내리신 정원조성의 복을 노래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晩春」의 시에 단풍나무, 버드나무, 살구나무, 등나무, 황매, 차나무, 연꽃 等(등) 30종류의 다양한 식물로 조경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꽃만 심어 조경한 것이 아니라 초당  앞에  茶竈石을 설치하고 초당 뒤의 약천을 이용하는 등 茶庭을 만들고 다도를 즐겼는데 인근 백련사의 惠藏禪師(1772~1811)와 草衣禪師(1786~1866)와 교류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건물보존에만 치우치고 정원은 돌보지 않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사진3].


李鈺(1760~1815)은 별호로 梅花外史, 梅庵, 桃花流水館主人 등의 별호를 썼을 만큼 꽃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인물인데 1803년에 저술한『白雲筆』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白門의 照厓에 있을때 南尙書의 淡容亭에 머물렀다. 상서가 늙어 한가롭게 되자 꽃나무를 많이 심어 사시사철 꽃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그 진품과 희귀종은 이미 흩어지고 없어져서 남은 것이 없다. 남아 있는  것 중에는 그래도 정향화. 산수유. 옥매화. 흰철쭉 등이 있었다. 배꽃이나 살구꽃. 복사꽃. 앵두꽃. 오얏꽃과 來禽花. 영춘화. 두견화 같은 것은 이미 늙었지만 새싹이 터서 꽃을 피운 것이 바위 언덕 사이에 또한 많았다. 풀꽃의 기이한 것들이 회양목이나 단풍나무의 초록빛과 붉은 빛과 어우러져, 매년 늦봄이면 꽃향기가 끼쳐오고, 진 꽃이 땅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성시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꽃 시장이 없다. 그래서 일찍이 꽃 파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필운대 아래 누각동과 도화동 청풍계 등에는 혹 가다가 吏胥輩로 늙어 일 없고 가난한 자가 꽃을 기르는 일에 종사하는 수가 많다. 그 즐거움에 맛을 들이다 보니 아예 이것으로 먹고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매화를 기이한 등걸에 붙인 것이나 화분 하나에 세 빛깔의 국화를 피운 것, 높은 곳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한 석류, 화분에 심은 대나무나 소나무, 그리고 복숭아나무 종류가 이따끔씩 나와서 거래되곤 한다. 값 또한 그다지 높지 않았다. 동백이나 치자, 영산홍과 백일홍, 종려와 왜철쭉, 유자 같은 것은 남방 사람들이 지고 오거나 배로 실어와 권세 있는 집안에 대주어서 시장이 아니어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옥은 각종 화훼 재배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을 남겼으며, 화훼 유통에 관해서도 처음으로 자세히 언급하고 있어  조선후기 원예업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沈象奎(1766-1838)의 호화저택 嘉聲閣 앞에는 별채의 온실까지 꾸며 각종 名花異卉를 진열해 놓았고, 마당에는 귀한 종려나무와 능소화 등이 심어져 있었다. 그는 멀리 동래산의 이종 국화나 떨기가 유난히 큰 일본산 국화를 일부러 구하다 울타리 가에 심고, 가을날 자신의 동산에 핀 봉선화. 옥잠화. 원추리. 패랭이꽃. 나팔꽃. 맨드라미. 추해당. 접시꽃. 국화. 연꽃. 창포. 파초 등의 각종 화훼를 노래한 연작을 남기기도 하였다.  


小楠 沈能淑(1782-1840)은 일찍이 장편 한문소설 「옥수기」의 작가로 밝혀지면서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가 소개된 바 있는데, 1836년 그의 나이 55세 때 쓴 『閤梅記』를 통해 그가 거처하는 집 정원에 각종 꽃나무를 가꾸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병신년 10월 염일 바람이 몹시 불고 날씨가 차가와 강물이 얼었다. 소남거사가 병석에 일어나 달빛을 맞으며 객을 이끌고 정원에 들어가 보니 휑하게 잎들이 다 떨어져 예전의 고운 꽃들이 보이지 않았다. 장미가 피어 있던 길을 따라 가다가 무궁화꽃이 피어있던 언덕을 지나, 정향이 피어있던 섬돌을 거쳐, 하얀 두우꽃 앞에서 침통히 읊조리고 붉은 두견꽃을 슬퍼하고,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만발했던 언덕에서 잠시 쉬노라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서글펐다. 수단과 철쭉을 찾아가니 텅 빈 낯빛으로 가지의 물을 마시고 있고, 영산홍의 소식을 물으니 혼만 돌아와 한해를 넘기고 있었다. 모란은 머리가 깍여 있고, 백일홍은 땅에 깔려 있는데, 저 가시만 남긴 채 죽어 있는 해당화와 붉은 개나리이고,  덤풀을 이루고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은 눔에 파묻힌 붓꽃이었다. 붉은 가시나무는 넝쿨이 축 늘어져 뒤엉켜 있고, 조팝나무꽃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다. 모두 서리에 놀라고 눈에 횡액을 당해 바람을 겁내고 얼어붙은 추위를 두려워하여 일체 살아있기를 잊고 있었다. 아아! 이 엄동의 추위에 어떤 나무가 시들지 않으랴?  이 대지세계에서 꽃 한 잎을 구하자고 해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으랴? 서글피 탄식하며 배회하다다 체란관으로 돌아와 거닐었다. 고요하여 아무도 없는 듯한데 체란관 안을 엿보니 빼어난 자태의 한 그루 매화가 있었다. 남쪽으로 난 가지는 잎이 나고, 북쪽으로 난 가지는 꽃망울을 토하고 있고, 동쪽으로 난 가지는 이미 꽃이 피어있고, 서쪽으로 난 가지는 반쯤 꽃이 피어 있어, 서로 들쭉날쭉 하였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안의 동지달은 곧 정월의 3월이라. 그늘 천지에 거쳐하면서 봄을 선도하고, 큰 눈을 깔보아 여느 꽃과 다르니, 이때 인간 세상의 꽃은 오직 매화 하나뿐. 매화는 꽃 중의 상산사호인가보다!
 
이와 같이 그는 정원에 다양한 꽃을 심어 감상했는데 특히 그의 식물에 대한 깊은 관찰력을 표현한 부분이 실내[체란관]에 심어 놓은 매화에 관한 사항인데, 매화나무 사방의 각기 다른 미기후 영향으로 방향 마다 달리 꽃이 피는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이는 식물학자도 종래에 이와 같이 언급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그는 국화를 애호하고 국화의 종류와 생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펼쳐 보인 <菊序>를 남겼고, 특히 일본에서 들여온 ‘白雲朶’ 라는 품종을 두고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우리나라는 국화를 높이는데 三鶴 을 더욱 높이고, 삼학 중에서도 白鶴을 으뜸으로 친다. 그런데 삼학에는 해당화의 여한이 잇다. 근래 왜산 국화가 많이 들어오는데 꽃잎이 털처럼 수북할 뿐 칭상할 만한 것이 없었다. 갑오년(1834)에 일본에서 국화 한 종을 구입해 왔는데 줄기가 자주 빛이 나며 길고, 잎이 살져 五臺菊과 비슷하였다. 삼학과 때를 함께 하여 피는데, 꽃 모양이 크기는 넓고 둥근 모란 같고, 두께는 백겹 천겹 마치 조가비를 잘라서 비단처럼 묶은 듯하였다. 꽃의 색은 밝기가 수장과 옥이 푸른 빛 무리를 은은하고 곱게 띤 것 같아 너무 희지 않고 푸른빛이 돌았다. 꽃받침은 드리워져 피는데 둥글게 굽이져 마치 제 멋대로 같지만 꽃송이가 무거워서 가지가 꽃송이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꽃잎은 길어서 긴 털이 차례를 지어서 우러러 꽃심을 보호하고 있는데, 굳세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물을 주면 고운 빛깔을 더하고, 시간이 오래 될수록 색이 더욱 하얗게 된다. 땅에 꺾꽂이를 하면 뿌리가 나고 꽃이 피는데 그 꽃이 더욱 크다. 이것이 이 꽃의 성질이다. 서리를 맞은 뒤 향기는 특히 빼어나서 향기를 맡으면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하다. 이것이 또 삼학이 이 꽃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이니, 비로서 이 꽃이 국화의 종속 중에서 속세의 허물을 벗은 꽃인 줄 알겠다. 꽃의 이름은 백운타이다. 진산의 구름인가, 초산의 구름인가 희고 밝아 숭상을 그칠 길이 없다. 

 

「白雲朶記」를 통해서도 일본산 국화품종 백운타의 유래와 모양, 생리를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설명하고 있어 예리한 관찰력과 화훼벽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수목식재에 관한 전문서가 출간되기도 했는데, 1700년경 洪萬選(1643~1715)이 편찬한 『山林經濟』를 1766년에 柳重臨(1705~1771)이 두 배가 넘게 보완하여 출간한 『增補山林經濟』를 들 수 있다. 유중림은 숙종 때 내의원에  내의로 근무한 의술인 이었으나 그의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일생을 불우하게 살면서 古詩를 즐기고 마음의 귀의처를 삼고자 『增補山林經濟』를 편찬한 것이며 서문을 쓴 임희성은  경기도 안산의 詩社 동향인이었다. 그의 책은 20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조경식물과 관련된 부분만 간추려 보면, 집안에 터를 잡아 나무를 심으려면 오직 소나무와 대나무를 사방 가장 자리에 울창하게 심어야 좋다고 하였는데, 기운이 왕성할 뿐만 아니라 세속의 기운도 저절로 없어진다. 대개 집터가 陰을 좋아하고 묘터가 陽을 좋아 하는 것은 곧 음양이 서로 조화되는 이치이다.

 

뜰 중앙에 심은 나무를 閒困이라고 부르며 재앙이 생긴다.
과일나무가 무성하여 집을 좌우로 나누는 것을 꺼리니 질병이 생긴다.
큰 나무가 난간에 닿아 있는 것을 꺼리고, 또 문에 닿아 있는 것을 꺼린다.
집 꼭대기에 마른 나무가 있으면 귀신이 모인다.
대개 집안에는 오래 사는 나무를 심어서는 안 된다. 오래 지난 뒤에 없애기 어려운 걱정이 생긴다. 백년된 큰 나무를 함부로 벨 수 없으며, 베면 반듯이 재앙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무뿌리가 집 처마 밑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
대추나무를 집 서쪽에 심으면 소에게 좋다. 또 한 주를 서남쪽 모퉁이에 심으면 좋다. 또 남쪽이 좋다. 또 문 앞뜰에 두 주 심으면 길하다고 했다.
버드나무를 동쪽에 심으면 소와 말에 유익하다. 문에 드리워진 것을 꺼린다.   
느릅나무는 未方 땅에 심는 것이 좋다. 집 뒤와 서쪽에 심는 것이 좋다.
복숭아나무는 우물 옆에 심는 것을 꺼린다.
자두나무는 동쪽이 좋고  다른 쪽은 꺼린다.
살구나무는 辰方에 심는 것을 크게 꺼리고 북쪽에 심는 것이 좋다.
회화나무는 中門에 심으면 3대가 부귀하다.
능금나무는 북쪽에 심는 것이 좋다.
매화나무는 남쪽에 심어야 좋다.
무궁화는 집안에 심는 것을 꺼린다.
석류나무는 뜰 앞에 심으면 훌륭한 아들이 나오고, 후손이 많아서 크게 길하다.
대개 집은 왼쪽에 흐르는 물과 오른쪽에 기다란 길과 앞에 汚池와 뒤에 언덕이 없으면 반듯이 동쪽에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심고, 남쪽에 매화나무와 가시나무를 심고, 서쪽에 꾸지뽕나무와 느릅나무를 심고, 북쪽에 능금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어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대신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상당히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식물에 대한 지식이 다소 부족한 문인들은 이 책을 많이 참고하였을 것이며,  또 「種樹」편에 ‘10년 계획으로 나무를 심는다. 지역에 따라 알맞은 나무를 많이 심으면, 봄에는 꽃을 감상할 수 있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즐길 수 있으며, 가을에는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재목과 그릇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나무에서 재료를 취한다.’ 하고, 나무 심는 여러 가지 방법과 번식법, 그리고 53종 수목의 28종의 화목류 식재방법이 상세히 서술되어  당시 유행했던 정원 가꾸기에 크게 기여했으리라고 짐작이 간다. 


楓石 徐有榘(1764~1845)의 『林園經濟志』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30여년에 걸쳐 114권으로 완성된 임원경제지는 아주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록한 실학서로 유명한데, 저자는 불명하나 元代(1271~1368)에 저술된 『居可必用』을 인용하여 「나무를 심어 四象을 대신하는 법」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택에서 왼편에 흐르는 물이 없고, 오른 편에 큰 길이 없으며, 앞 편에는 연못이 없고, 뒤편에는 구릉이 없다면, 동쪽에는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심고, 남쪽에는 매화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으며, 서쪽에는 치자나무와 느릅나무를 심고, 북쪽에는 사과나무와 살구나무를 심는다.
주택의 가장자리 네 곳에는 대나무와 수목이 푸르러야만 재물이 모여든다.
안마당에 나무를 심으면 주인이 이별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서유구의 『林園經濟志』는 먼저 발행된 『增補山林經濟』를 참고하였고, 『增補山林經濟』는 元代에 저술된 『居可必用』을 많이 참고하지 않았나 보아진다.
18세기 중반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문집 총간에 실려 있는 작가들의 문집 속에 많은 정원들이 등장했는데, 曺園. 吳園. 李園. 徐氏園. 南氏園. 梁園. 崔氏園. 尹氏園. 南園. 洪園. 姜氏園. 劉氏園. 安氏園. 鄭園. 許園. 張氏園. 金園. 白氏園, 尙氏園 등 주인의 성씨를 딴 정원이름이 각종 문헌에 빈번히 등장하고, 梅竹園. 三松園. 蘭園. 梨園. 栗園. 七松園 등 조경수 이름을 딴 정원, 駱園. 東園. 南園 등 위치를 나타내는 정원, 和肥園. 率更園. 眞泠園. 日涉園. 逍遙園. 積翠園. 花開園 등 의미를 딴 정원 등 수많은 정원이 경쟁적으로 조성되는 유행을 낳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많은 花園이 경영되니 문인들이 탐방을 하고 견문내용을 시문으로 쓴 ‘園記’가 다수 전하고 있어당시의 조경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조선후기의 남인 인맥에서 ‘華國手’로 알려진 蔡濟恭(1720~1799)의 여러 花園記가 전해지고 있는데, 주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인 성씨가 曺氏여서「曺園記」로 명명된 원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마침내 온 길을 따라 작은 골목으로 비스듬히 들어가니 板으로 만든 문이 있어 삐끔히 열려 잇다. 주인은 내가 꽃을 찾아서 온 것을 알고는 나를 인도하여 屋 뒤의 後園으로 들어갔다. 화원에는 돌을 모두 8, 9급 가량 깔고 갖가지 奇花를 덮어서, 붉은 것, 자주빛인 것, 노란 것이 이루다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난만하게 다투어 피어서, 눈이 현란하여 주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원기에 따르면  후원에 花階를 조성하여 아름다운 꽃을 많이 식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인데 상류주택 정원에서 조경처리는 남자들이 거처하는 사랑마당과 부녀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후원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현존하는 정원 가운데 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례가 드물어 연구에 어려움이 있어왔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겠다.


南公轍은 54세 때인 1815년에 간행한 문집 『金陵集』에 수록된 「城東李元佐小園記」와 「東園花樹記」두 편의 원기를 남겼으며, 李用休(1708~1782)와 李家煥 부자는 「栗園幽居記」와 「綺園記」를 남겼고, 丁若鏞의 「寄園記」, 沈魯崇의 「新山種樹記」등이 전해지고 있어 현재는 정원유적이 없으나 전통조경문화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정원을 가꿀 형편이 안 되는 경우에는 상상속의 정원[意園]을 글로 남기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서울을 배경으로 활동한 문인 張混(1759~1828)의 『평생의 소망(平生志)』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푸른 회화나무 한 그루를 문 앞에 심어 그늘을 드리우고, 벽오동 한그루를 바깥사랑채에 심어서 서쪽으로 뜬 달빛을 받아들인다. 포도시렁을 그 옆에 얹어서 햇볕을 막고, 측백나무를 바깥채의 오른편에 심어서 병풍처럼 문을 막는다. 파초 한 뿌리를 그 왼편에 심어서 빗소리를 듣고, 울타리 아래에는 뽕나무를 심으며, 그 사이에 무궁화, 해당화를 심어 빈틈을 메운다.


구기자, 장미는 담장 모서리에 바짝 대서 심고, 매화는 바깥채에 숨겨 심는다.  작약, 월계화, 사계화는 안뜰에 놓아두고 석류와 국화는 안채 바깥채에 나누어 기른다. 패랭이꽃, 맨드라미는 안채의 섬돌에 씨를 뿌리고, 두견화, 철쭉, 붓꽃은 정원에 섞어 심는다. 해아국, 고의 같은 화초는 언덕에 흩어 피게 한다. 자죽은 자라기에 알맞은 땅을 골라 기르고, 含桃는 안채의 서남쪽 모서리를 둘러친 다음 복숭아와 살구를 그 밖에 심는다.


햇볕이 드는 곳에는 능금과 단내[능금나무 일종], 잣나무, 밤나무를 죽 이어 심는다. 남아도는 건조한 땅에는 옥수수 씨를 뿌리고, 오이 밭 한 뙈기, 동아 한 뙈기, 마늘 한 뙈기를 동쪽 담장의 동쪽에 섞어서 간다. 아욱과 겨자, 갓, 자소는 집 앞쪽에 구역을 나누어 가로세로 심는다. 무우와 배추는 집 서쪽에 심되 한두 자리쯤 두둑을 띄운다. 가지를 남새밭 가장자리에 심으면 자줏빛과 흰 빛이 눈에 뜨일 것이다. 참외와 호박은 사방의 울타리에 올려서 나무를 타고 오르게 한다.


이렇게 하여 꽃이 피면 구경하고, 나무가 자라면 그 아래서 쉬며, 과실이 열면 따고, 채소가 자라면 삶아서 먹는다. 참으로 한가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다.  날마다 그러한 생활을 즐긴 뒤에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내 평생의 소망이다.
 
이 글을 통하여 장혼은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한 삶의 공간을  염원하였고, 주거공간 주변에 구석구석 제 위치에 맞게 식물을 심고 기르려는 꿈을 피력하고 있다. 특히 뜰에 과수와 채소를 심어 자족하려는 의지가 돋보이며, 정원을 관상의 대상만인 아닌 실용적인 목적으로 가꾸려는 의지가 엿보여 우리나라 주택정원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하겠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주택정원들은 후손들이 흩어지면서 원래 모습이 크게 변질되기도 하고, 특히 일제시대와 근대사회를 거치면서 원형을 찾아보기 힘든 형편인데 이런 글을 통하여 상류주택의 정원문화를 유추해 볼 수 있어 다행이다. 


李用休(1708~1782)는「九曲幽居記」를 통하여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선호한 주거지가 농촌이 아닌 도회지 한적한 곳에 幽趣가 넘치는 곳을 이상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단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한 가지 상상한 적이 있다. 깊은 산 속 인적이 끊겨진 골짜기가 아닌 도상 안에 외지고 조용한 곳을 골라 몇 칸 집을 짓는다. 방안에 거문고와 서책, 술동이와 바둑판을 놓아두고, 石壁을 담으로 삼고, 약간 평의 땅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멋진 새를 부른다. 그 나머지에는 남새밭을 가꾸어 채소를 심고 그것을 캐서 술안주를 삼는다. 또 콩시렁과  포도나무 시렁을 만들어 서늘한 바람을 쏘인다. 처마 앞에는 꽃과 수석을 놓는다. 꽃은 얻기 어려운 것을 구하지 않고 사시사철 묵은 것과 새것이 이어 피도록 할 것이며,  수석은 가져오기 어려운 것은 찾지 않고 작지만 야위어 뼈가 드러나고 괴기한 것을 고른다. 뜻이 맞는 한 사람과 이웃하되 집을 짓고 집안을 꾸밈이 대략 비슷하다. 대나무를 엮어 사립문을 만들고 그리로 오간다. 마루에 서서 이웃을 부르면 소리가 미쳐 끝나가도 전에 그의 발이 벌써 토방에 올라와 있을 테지. 아무리 심한 비바람이라도 방해받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넉넉하게 노닐며 늙어 가리라. 이제 九曲洞 에 들어가서 徐氏 와 廉氏가 사는 데를 보니 완연히 내 마음 속에 그려보았던 곳이다. 이에 그것을 글로 써서 기문을 삼는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주거문화의 특징으로 전원 보다는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도시를 선호함이 나타나는데,  오늘날 서울이 이렇게 거대도시로 발전된 역사는 이미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음을 찾아 볼 수 있고,  도시에서도 한적한 외곽에 거주하면서 이상적인 정원을 꾸미고 삶으로써 幽趣를 숭상하고도 俗氣를 거부한 환경을 꾸리고자 염원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意園을 본격적으로 꿈꾸면서 그 내용을 소상히 밝힌 사람은 柳慶種으로 1756년에 「意園誌」를 쓰고서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意園은 마음속에 꾸며 본 정원이다. 정원을 만들지 않고 마음으로 먼저 꾸며보는 것이 가능한가? 마음에 그려 보니 정원이 곧 내 눈 앞에 나타나 하나하나 또렷하다. 정원을 소유한 자라고 해서 마음에 정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정원을 마음에 둔자라고 꼭 정원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이 두 경우 모두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마음에도 없는데 정원을 소유한 자 보다는 차라리 정원이 없으나 마음으로 꿈꾸는 자가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엉성할 뿐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군들 잠시 살 곳을 빌려 사는 것이 아니랴? 그런데도 구구하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필요가 있으랴?


폭이 몇 畝, 넓이가 몇 무인 땅에 장소와 향배, 원근과 넓이를 가리지 않고 내 몸이 맞는 곳에 정원을 배치하면 된다. 그곳에는 산봉우리와 고개가 있고, 계곡과 폭포도 있다. 밭이 있고 남새밭이 있으며, 울타리. 담장. 사립문을 설치한다. 누대가 있고, 집이 있고, 대청. 부엌. 안방. 바깥채. 사랑. 별채가 있고, 정자와 누대, 제단과 뜰이 있다. 소나무, 녹나무, 느릅나무, 버드나무, 두충나무, 적목나무, 박달나무, 회화나무, 비자나무, 대나무, 파초, 매화, 오동, 무궁화, 석류나무, 회화나무, 살구, 복숭아, 오얏, 앵두, 배, 밤, 감, 대추, 구기자, 포도, 난초, 국화, 뽕나무, 닥나무, 옻나무, 오이, 호박, 파, 생가, 마늘, 토란, 무, 겨자, 아욱, 가지, 부추, 배추 등의 채소, 특이하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콩, 약 모종, 창포, 원추리, 등나무, 머루, 당귀, 이끼, 연꽃, 지초, 순채, 마름과 같은 식물을 심는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폭포가 흐르며,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눈이 나린다. 날이 맑고 비가 오고 어둡고 밝음에 따라 경물은 제각기 바뀌는데 그 어느 것이나 승경 그윽한  아취라 아니할 수 없다. 바람이 불면 서늘한 바람을 쏘이고, 추우면 햇볕을 쏘인다. 아침에는 꽃에 물을 주고, 저녁이면 오이 밭을 맨다. 새벽에는 산을 보기 어울리고, 밤에는 달 구경 하기에 알맞다. 낮에는 독서하고 글쓰기에 알맞은데 틈이 나면 거문고를 뜯고, 차를 끓이며, 그림을 보고 바둑을 둔다. 어떤 때는 물가에 나가 물고기를 낚고, 산에 올라 약초를 캔다. 시를 읊어 자연을 노래하고, 초목을 심어 잘 기른다. 경물을 꾸며 승경을 만들어서 산림의 경제로 삼으니, 알맞지 않은 것이 없다.  바위에 걸터앉고 나무에 기대어 그름을 바라보고 즐겁게 듣기에 좋은 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하여 평생 마친다면 넉넉하겠다. 내가 원하는 바는 이와 같다.    
 
여기서 유경종은 자기가 꿈꾸는 이상향은 내 몸에 맞는 곳이라 하여 분수를 알아 위치를 선정함이 옳고, 밭과 남새밭을 강조한 것은 자족의 생활을 즐기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며, 상류층 주거공간을 소상히 밝히고 목본류 28종과 초본류 26종을 심되 다양한 과수나 채소가 상당부분을 차지하며, 계절에 따라 자연을 즐기고자 하는 의도를 찾아 볼 수 있고, 단지 시각적인 경관뿐만 아니라 폭포 소리, 바람소리와 더불어 시시각각 변화는 자연의 모습을 관조하면서 한가히 보내는 일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丁若鏞(1762-1836)은 강진에서 적거생활을 할 때 가르쳤던 제자 黃裳이 幽人의 주거지 환경에 대하여 부탁하자「題黃裳幽人帖」을  통하여 이상적인 정원을 자세히 제시하였다.
 
뜰 앞에는 높이가 몇 자인 響檣을 치고, 담 안에는 갖가지 화분을 놓아둔다. 석류, 치자 만다라화 등을 온갖 종류를 갖추되 국화를 가장 많이 준비하여 모름지기 48가지는 되어야 겨우 구색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뜰 오른편에는 작은 연못을 파는데, 사방 수십 걸음을 넘지 않을 정도로 한다. 연못에는 연꽃 몇 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기른다. 따로 대나무를 쪼개어 홈통을 만들어서 산의 물을 끌어다가 연못에 대고, 넘치는 물은 담장 구멍을 통해 남새밭으로 흐르게 한다.


남새밭은 수면처럼 고르게 잘 갈아야 한다. 밭두둑을 네모반듯하게  구획해서 아욱. 배추. 파. 마늘 등을 심되, 종류를 구별하여 서로 섞이지 않게 한다. 고무래를 사용하여 씨를 뿌리되 싹이 날 때 알록달록 비단물결이 넘실되어야 남새밭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이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남새밭 둘레에 장미 수천그루를 심어 울타리를 삼는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때 남새밭을 둘러보러 나온 사람의 코를 장미향기가 찌를 것이다......


집 뒤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있어 용이 잡아당기고 범이 나꿔채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소나무 아래에는 흰 학 한 쌍이 서 있다.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작은 남새밭 하나를 마련해서 인삼. 도라지. 천궁. 당귀 따위를 심는다.
 
이와 같이 주거환경에 조경을 하는데 있어서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을 감상하는 동시에 실생활에 필요한 과수나 채소도 심어 자족과 다양성 환경을 가꾸고자 함을 의원기를 통하여도 찾아 볼 수 있다.

 

4. 결론
 
조선후기는 우리 역사상 사회 전반에 걸쳐 문화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으며, 특히 문인지식층에서 꽃과 정원문화를 즐기고 이에 대한 많은 시문을 저술했다는 연구가 근래 인문학자들에 의해서 상당수 발표되고 있어, 기 발표된 문헌들을 고찰해 본 결과 전통조경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첫째 지금은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상세히 묘사된 문헌을 통하여 상류층이 주거환경을 꾸리는데 있어서 이들이  선호한 조경식물과 조경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둘째  중국은 명나라[17세기]때 간행된 『園冶』가 있고 일본은 헤이안 시대[11세기]에 간행된 『作庭記』가 있어 두 나라는 체계적인 이론 하에 정원문화를 발전시켜 왔지만 우리나라는 전통조경에 관한 전문 서적이 없어서 단편적인 자료에 의지해 한국조경문화를 논할 수밖에 없었는데 조선후기 많은 시문에서 정원조성의 의도와 방법이 제시되고 있어 한국전통조경문화를 규명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사료된다.


셋째 문인들이지만 식물에 대한 지식이 전문가 못지않게 해박했으며, 특히 품종을 구분하여 명시하거나 난대식물을 방한 시설이나 온실을 지어 월동하게 하는 등 과학적인 지식과 기술을 동원한 점 등은 현대 조경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게 되었다.


넷째 주거환경을 조성하는데 있어서 화려한 모습 보다는 俗氣를 벗어난 소박하고 실용적인 측면[채소. 약초. 과수]을 중요시했다는 점은 현대 주거단지 조경설계에도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사항으로 볼 수 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하여 한국전통조경문화를 정립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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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실학학회 2007.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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