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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논문(2)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에 나타난 유배체험 형상화의 이면과 그 의미*

작성자낙민|작성시간16.05.14|조회수32 목록 댓글 0

한국고전연구32집/한국고전연구학회/2015/185~219쪽.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에 나타난 유배체험 형상화의 이면과 그 의미*


남정희** 이화여자대학교 시간강사.

 

<차 례>
1. 문제 제기
2. 창작의 배경: 을해년에서 무인년의 사이
3. <무인입춘축성가>의 구조와 유배 체험의 형상화
4. 송축과 연군의 맥락과 그 의미
5.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에서는 이광사의 <무인입춘축성가>를 대상으로 창작의 시공간을 재구
성하고 작품의 구조적인 논리와 의미지향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작자가
이 작품을 창작하게 된 외부적 동인은 1755년에 발생한 을해옥사였다. 을해옥사는
급진 소론계의 일부가 영조의 왕정에 도전했던 모의였는데, 그 주모자였던 윤지와
의 관계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면서 이광사가 연루되었다. 이 역옥의 여파로 함경
도 부령으로 유배당했고,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유배의 시련을 겪으며 이 작품을
창작하였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송축과 연군을 두 개의 중심축으로 삼아 태평성
대의 공간과 그것을 만들어낸 님에 대한 연모의 정서를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작
자가 부르는 송축의 대상인 세상은 현존하는 태평성세가 아니라 당위적으로 소망
하는 세계였다. 또한 왕을 연모하는 화자는 가시적인 연군관계를 맺지 않는 상태
에서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대부 집단의 보편 관념에 기대고 있었다. 결국 작품

 

* 이 논문 또는 저서는 2013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3S1A5B5A07046876)


 

속에서 드러나는 성대(聖代)에 대한 감격과 송영은 화자가 유배자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대사회적인 발언이었다. 화자는 왕의 치세를 강조하고 스스로도 이 가치
의 공동체 안에 있음을 반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군신의 사이에는 마땅히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고, 드러내야 하는 세
계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면적인 송축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
한 태도의 이면에는 님 혹은 왕이 대변하는 체제와의 화해라는 논리가 있었다.
주제어 이광사, 을해옥사, 유배가사, 축성, 연군, 소론(少論), 공도(公道), 태평성대

 

1. 문제 제기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는 원교 이광사(1705-1777)의 소
작이다. 이광사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소론계 양명학자의 한
사람이다.1) 이렇듯 주목할 만한 작가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많
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본격적인 연구에 앞서,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문학적 성취 여부를 차치하고 이 작품을 유배가사로 볼 수 없다
는 문제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인입춘축성가>는 작품의 제목 그대
로 축성의 노래로 간주되었고 그것을 유배가사라고 보기 어렵다는 정체
성의 혼란이 있었다.2) 실제로 작자인 이광사는 1758년 무인년 이른 봄에

 

1) 이광사와 관련된 서예론과 양명학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조했다. 강석중,
이광사 문론 연구 ,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이완우, 원교 이광사의 서예 , 미술사연구 190-191, 1991, 이완우, 원교 이광사의 서론 , 간송문화 38, 1990; 정
양원,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심경호,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서경숙, 원교 이광사의 양명학 , 양명
학 3, 1999; 나종면, 이광사 문예론의 양상 , 규장각 27, 2004; 김동준, 부령 유배
기 이광사 한시의 내면과 진정의 지평 , 한국한시연구 13, 2005.
2) 유배가사를 통시적이고 종합적으로 검토한 최근의 여러 논문에서도 여전히 유배가사
의 개념과 범주를 규정할 때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단일한 기준이


 

부령의 적소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있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는 유배의
여정이나 사실적인 체험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고, 유배자로서 왕과 국가
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무인입춘축성가>에 관한 연구는 작품이 발굴된 이후 지금까지
크게 진전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따라서 <무인입춘축성가> 자체를 세
밀하게 독해하는 연구 역시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품을 소개하
는 해제에 해당하는 논의3) 이외에는 단독의 작품론도 없었다. 그렇지만
근래의 통시적 연구에서는 점차 보다 의미 있는 연구 결과가 나타나고 있
다. 연구자들은 조선후기 유배가사의 시대적 흐름이나 지향점을 논의하면
서 <무인입춘축성가>를 유배가사의 장르에 귀속시키고 그것을 사대부
작가의 규범적인 군신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고 있다.4) 이러한 연구
는 작품에 내재한 역사성을 해명하고 후기 가사 전개의 구도를 보다 선명
하게 보여주는 일정한 성과를 가져 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무
인입춘축성가>는 조선후기 사대부 가사의 전개 과정에서도 어떤 의미 있
는 변곡점을 이루는 작품으로 평가 받지는 못했다.
<무인입춘축성가>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여전히 미진한 점이 많이 남

 


적용되고 있지 않다. 대체로 창작자가 분명하게 유배자의 신분이었고 작품 속에 유배
의 행로와 체험 양상이 드러나는 작품들은 유배가사에 귀속시킨다. 이 경우 <무인입춘
축성가>는 작품 내용 속에 유배의 현실이 지배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개
별 연구자에 따라서 그것을 유배가사로 보지 않기도 한다. 이현주( 유배가사의 연구 ,
전남대 박사학위논문, 2001), 정기철( 한국기행가사의 새로운 조명 , 역락, 2001), 우부
식( 유배가사연구 ,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2005) 등의 연구에서 <무인입춘축성가>는
유배가사로 규정되지 않았다. 반면에 이재식( 유배가사연구 , 건국대 박사학위논문,
1993), 주혜린( 조선후기 유배가사의 서술방식과 내면의식 ,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14)의 연구에서는 <무인입춘축성가>를 유배가사로 보고 논의를 전개했다.

3) 최강현, <무인입춘축성가>에 대하여: 해제 및 평가 , 시문학 24집, 시문학사, 1973.
4) 이재식, 유배가사연구 , 건국대 박사학위논문, 1993; 주혜린, 조선후기 유배가사의
서술방식과 내면의식 ,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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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다. 무엇보다도 연구의 주춧돌이라고 할 만한 작품 자체에 대한 정
밀한 독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또한 조선후기에 창작된 가사 작품에 나
타나는 주제의식 자체의 질적 변화에 주목하려면 작품 속에 내재한 의식
의 이중성이나 작가의 내면적 갈등을 읽어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래
야만 시대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 작품이 가진 의외성과 풍부함을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예컨대 <무인입춘축성가>의 경우에도 송축 일변도로 구
성되었다는 단선적인 결론은 수정되고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논
문은 과연 작가가 그려내려 한 작품 세계에 그러한 단일성만이 존재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1755년 을해옥사의 여진이 가라앉고 3년이 흘러서 1758년이 되자 화자
의 마음 속에는 태평성대를 기리는 마음만이 가득했던 것일까? 내면의 갈
등이나 대립이 없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의도나 목적이 존재하고 있거나
혹은 다른 차원의 정서적인 해소 방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어찌 되었든
화자는 이미 역옥의 심문장에서 몸으로 체험한 권력에 저항할 것인가 아
니면 그 권력의 의도에 복종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면하고 있었다. 백부
이진유와 친부 이진검의 죽음은 이광사를 포함하여 동족인 소론 가문의
후손들에게 향후에도 계속 억압적으로 행사될 권력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를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작자가
유배지에서 자신의 현실과 무관한 송축의 자세를 취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태도가 작품 내부에서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정치윤리적 문맥과 조응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의문에 대한 응답의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유배가 현실화되었던 을해년에
서 무인년 사이의 창작의 시공간을 재구성하고 작품 내부의 구성 논리를

먼저 점검한다. 결과적으로 작품에서 사대부 작자가 집중하는 군신 관계
의 이념적인 측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론할 예정이다. 이러한 시도는
작품 내외부의 문맥 속에서 작가가 <무인입춘축성가>의 창작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지향을 살펴서 후기 사대부 가사의 史的전개에서 세밀한
분화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한다.

 


2. 창작의 배경:을해년에서 무인년의 사이
이광사가 <무인입춘축성가>를 창작하던 때는 1758년의 입춘 무렵이
었다. 이 때 이광사는 함경도 부령에 유배된 지 삼 년이 흘러서 자신의 현
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무인년에 이광사가 겪고 있
는 현실은 바로 1755년 을해옥사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1755년에 무슨 일
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창작의 동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5)
영조 31년(1755) 2월 4일에 소론계 전라감사 조운규는 나주의 객사인
망화루의 동쪽 기둥에 왕과 왕정을 비방하는 흉서가 걸렸음을 조정에 알
렸다. 영조 당대에는 여러 차례 괘서 사건이 있었으므로 사건의 초기에는
이 사건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범인과 연루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범인을 찾는 과정

 


5) 을해옥사의 발단과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하였다. 조윤선, 영조
대 남형․혹형 폐지 과정의 실태와 흠휼책에 대한 평가 , 조선시대사학보 48호, 2009,
211~253쪽; 조윤선, 조선후기 영조 31년 을해옥사의 추이와 정치적 의미 , 한국사학
보 37호, 2009, 233~263쪽; 심재우, 영조대 정치범 처벌을 통해 본 법과 정치-을해옥
사를 중심으로 ,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4호, 2010; 이경구, 1740년(영조16) 이후
영조의 정치 운영 , 역사와 현실 53, 2004, 한국역사연구회; 김백철, 두 얼굴의 영조,
태학사, 2014; 이태진, 김백철 엮음,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상, 태학사, 2011;
이태진, 김백철 엮음,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하, 태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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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먼저 영조와 노론 세력에게 불만을 가졌던 나주 인근의 소론과 남인
계열 인물들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졌다. 2월 11일 소론인 윤지6)가 흉서를
내건 범인으로 지목되어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에 영조는 2월 20일부
터 친국에 나섰다. 윤지와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 같은 처지에 있었던 유
배자들, 그리고 소론계 관료 및 아전들이 모두 잡혀 들었고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나주목사 이하징7)이 친국을 받았다. 중앙에서 자리를 잡은 소
론계 집안들로 옥사가 확대되면서 차츰 연루자들이 늘어났으며 실제 급
진적인 소론의 내부에서 영조에 대한 반역 행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영
조는 옥사를 확대하면서 가차 없는 역률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소론 전체가 역심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자 이에 정권에 참여하고
있었던 다수의 소론 인사들이 집단으로 자송의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전
체 소론계의 위기감은 평소의 의리 명분을 잊을 정도로 다급하였다.8)
의금부와 포도청에서 이루어진 심문 과정에서 괘서 사건과 반역 모의의
내용이 드러났다. 괘서사건은 단순한 정부 비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
고, 모종의 거병 전단계의 행동이었다. 이 모의 과정에서 윤지․윤광철 부
자는 비밀결사조직인 계를 만들어 동조자를 규합했다. 그리고 참여 인물들
은 나주 지역의 아전과 유배인 그리고 서울과 충청도의 급진적인 소론계

 

6) 윤지는 신임옥사 당시에 소론 강경파였던 윤취상의 아들이었다. 윤취상은 김일경과
더불어서 노론을 축출하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인물이었고 영조가 즉위한
후에 김일경의 무리로 몰려서 주살되었다. 윤지 역시 무신난에 연루되어 제주와 나주
를 오가면서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배자의 처지에 머물러 있었다. 계속해서 그의
집안 가속은 모두 환로에 오를 수 없었고 그러한 처지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있었다.

7) 이하징은 대표적인 남인 집안의 일원이었고 그의 사위인 윤득구는 윤성시의 손자였
다. 윤성시는 영조의 반역을 격렬하게 성토했던 신축년 상소의 주동자 김일경의 소하
였다. 이하징은 김일경의 상소가 절개가 있었다고 하였고 김일경과 동배였던 윤취상
을 역적이 아니라고 한 죄로 2월 23일에 복주되었다.
8) 김백철, 두 얼굴의 영조, 태학사, 2014, 104쪽.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에 나타난
유배체험 형상화의 이면과 그 의미 191

 

인물들이었다.9) 나주 괘서 사건에서 기인한 을해역옥은 그 처리 과정에서
도 원칙에 벗어나는 법 적용이 나타났다. 첫째는 형률 적용의 무원칙과 법
규를 벗어나는 형벌의 시행이었고 두 번째는 대역률의 추시와 연좌제의
시행이었다.10) 일어난 사건 자체보다는 과거에 이미 처리가 되었던 사건을
다시 끌어냈기 때문에 그것에 연루된 후배와 후손들에게 참혹한 재앙이
되었다. 을해 역옥사건의 당사자인 윤지, 이하징 등이 김일경, 박필몽 및
윤취상, 이사상을 아꼈다고 해서 신임옥사(1721-1722년), 무신난(1728), 경
술옥사(1730)의 관련자까지 그 형률이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을해옥사가 일어나면서 이광사 역시 이 역옥에 걸려들었다. 백부 이진유
와 친부 이진검이 바로 신임옥사 및 경술옥사의 당사자였다. 1755년 3월
6일(기묘)에 이광사는 윤지와 교통한 자취가 있다는 혐의로 의금부로 끌려
와서 친국을 당했다.11) 처음 친국에서 이광사는 윤지와 자신의 교유 관계
가 극히 미미한 수준임을 호소하였다. 백부 이진유가 대정에서 유배살이를
할 때 이광사가 시종을 하고 있었는데, 윤지 역시 그곳에서 유배살이를 하
고 있었다. 이 때 이진유와 윤지 사이에 안부 편지가 오고 갔는데, 1730년
경술년 옥사에 연루된 이진유가 형장에서 물고된 이후에 윤지가 조카인
이광사에게 위로 편지를 보낸 정도였다. 이 후에는 윤지가 먼저 서신을 보
내면 부득이한 경우에만 답장을 보낸 정도였고 그것은 일상의 전례로 행동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적 윤지의 흉악한 짓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하였
다. 이러한 양자의 소원한 관계는 나주 사람인 임국훈의 심문 과정에서도

 


9) 심재우, 위의 논문, 56~57쪽.
10) 조윤선, 영조대 남형․혹형 폐지 과정의 실태와 欽恤策에 대한 평가 , 조선시대사
학보 48, 조선시대사학회, 2009, 231~232쪽.
11) 推案及鞫案 21권, 영조 31년, 3월 6일(기묘). 이 논문에서 인용되는 추안급국안
의 내용은 학술진흥재단에서 추진한 2004년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의 추안급국안
번역 및 역주의 2008년 <연구결과보고서>에서 가져 온 것이다.
192 한국고전연구 32집

 


드러나고 있다.12) 3월 8일(신사)에는 윤상백, 이만강 등이 형신을 당하는
때에 이광사 역시 형신을 당하면서 윤지와 지금껏 주고 받았던 편지의 내용
과 그 연유를 설명하고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13) 이 날 이광사는 신
장을 30대 맞는 형벌을 당하였고, 윤지의 아들인 윤광철은 자신의 죄상을
인정하고 청파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의금부와 포도청에서 연일 혹독
한 고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더욱이 3월 12(을유)일에는 이광사의 부인인
유씨가 심문 전후의 상황을 오인하고 자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14) 연이어
서 나주와 한양 땅에서 이광사 자신과 알고 지냈던 인사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옥되어서 처분을 기다리는 상태가 계속되다가 3월 25일(무술)에 와
서 이수범이 윤지의 아들인 윤광철의 경중 친구로 다시 이광사를 지목하
였고 두 인물이 서로 뜻이 맞는 절친한 사이라고 증언하고 난 이후에 물
고되었다. 결과적으로 3월 30일(계묘)에 이광사는 본율대로 流3천리에
처해졌다.15) 역모에 연루되어 의금부로 잡혀들어 온 이래로 한 달 여 동

 


12) 推案及鞫案 21권, 영조 31년, 3월 7일(경진). 임국훈의 진술; 이번에 금구(金溝)로
오는 도중에 제가 억울하다고 말했더니 이효식(李孝植)이 말하기를, “나는 괘서가 내
걸릴 기미를 알았다.” 했습니다. 이광사의 아버지가 병영에서 귀양살이 할 때 저의
아버지와 일찍이 서로 알고 지냈고 이광사가 아산에서 후취를 들이려고 왕래했을 때
저의 집에 왔으므로 서로 보았습니다. 윤지가 나주로 유배지를 옮긴 후 이광사는 일
찍이 나주로 내려가지 않았고, 윤지는 이광사가 편지를 보내지 않는 점을 가지고 늘
형편없다 했습니다.
13) 推案及鞫案 21권, 영조 31년, 3월 8일(신사).
14) 이광사, 亡妻孺人文化柳氏記實, 斗南集 권1.
婦人殉節自古無限從頌詳審以義勇決如吾孺人柳氏者幾希. 匡師被拏在三月
六日孺人見其狀已不欲生. 且謂是家人入是中豈有生理卽不得生吾下所顧待
苟活然我念先考愛育不忍刃毁遺體. 男子七日不食死女子八日不食死八日是
吾在世限. 遂不沾勻飮者六日忽譌言起謂下我捕廳將極罪孺人聞卽起以白綿
布自財於屋傍檐梁下. 先緩後急相機勇斷者求之古烈婦果有比乎.
15) 영조 31년, 3월 6일(기묘), 영조실록 83권/ 영조 31년, 3월 8일(신사), 영조실록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에 나타난
유배체험 형상화의 이면과 그 의미 193

 

안 계속해서 친국과 형신이 이루어졌고 주위에서는 특별한 증거가 없음
에도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광사 역시 실
제적인 모역의 증거 없이 형신을 받은 연루자들의 자백에 의해서 혐의가
입증되는 절차를 따라가고 있었다. 감옥과 형장에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공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유배형이 결정되고 난 후에도 그의 처리를 둘러싸고 대립이 이
어졌다. 정언 송문재가 이광사의 혐의를 지적하며 다시 국문하여 더 엄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였다.16) 이 때 송문재가 주장하는 이광사
의 혐의는 첫째, 역적 이진유의 조카라는 점, 둘째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
에서 그가 언급되었다는 사실, 셋째 윤광철과의 사적 교유가 있었다는 점
들을 차례로 거론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보았을 때, 이광사가 윤씨
집안에서 시작된 반역 모의 과정에서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관여했다고
볼 수 없었다. 이 점은 정권 주도층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송문재의 상
소가 있고 난 다음날에 지평 홍양한이 단지 윤광철의 일기에 이광사가 나
와 있다는 것만으로 연좌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17)
을해옥사와 연루되었던 이광사에게 형벌이 확정된 이후, 5월이 되자 국
왕은 나주 괘서 사건의 종결을 기념하여 춘당대에 나아가 토역정시를 실
시하였다. 그런데 이후에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고 옥사는 다시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그것은 5월 2일 임금이 친히 나가 과거를 보
는 곳에서 심정연이 시권에 직접적으로 난언을 적어낸 사건이었다.18) 이
심정연 시권 사건에 의해서 소론계 다수의 사람들이 역적으로 처단 당했

 


83권 / 영조 31년, 3월 25일(무술), 영조실록 83권/ 영조 31년, 3월 30일(계묘), 영
조실록 83권.
16) 영조 31년, 4월 1일(갑진), 영조실록 84권.
17) 영조 31년, 4월 2일(을사), 영조실록 84권.
18) 영조 31년, 5월 2일(을해), 영조실록 84권.
194 한국고전연구 32집

 

고, 5월 25일에는 우서의 저자인 유수원도 희생당했다. 가문이 연루되
었던 재야 소론들은 형장에 끌려나와 굳이 죄를 부인하지도 않았다. 6월
에 이르자 역모는 종친에게까지 확대되었고 과거의 모역까지 다시 조사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다 지나서 왕의 정국 운용 방식을 따르는 탕평 대
신을 추모하고 영조의 존호를 가상하는 사후 작업이 이듬 해 2월까지 계
속되었다.19) 그러므로 부령에 유배를 가 있었던 이광사의 신변이 유배자
로서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때라도 역모의 추율 방향이 다
르게 변화될 수 있었다. 을해년 당해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그 처벌의 규모
를 보면, 약 7백여 건의 판결 중 절반 이상이 연좌에 해당했다.20)
이광사의 유배는 결국 백부 이진유와 친부 이진검의 정치적 행위가 대
를 이어서 반역의 논리로 징치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영조 즉위
이후에 왕은 왕세제 시절의 행위를 반역으로 규탄했던 급진적인 소론 계
열에 대한 회유와 배제, 그리고 축출 작업을 진행하였다. 을해옥사가 일어
나기 전에도 영조는 전국을 뒤덮었던 반역인 무신난을 겪었고, 왕실 내부
의 하급 관속들과 소론, 남인의 일부가 연합했던 경술옥사 등을 겪었다.
한양에서건 지방에서건 빈번한 괘서 소동도 있었다. 이러한 계속되는 시
련을 겪으면서 영조는 정치 운영의 원칙으로서 탕평책을 실시하려고 하
였고 어느 정도 성과가 축적되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가 재위에 오른 지
30년이 다 되고 탕평책이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그 순간에 다시 경외의

 


19) 김백철, 앞의 책, 293쪽.
20) 김백철, 위의 책, 113쪽. 을해 역옥으로 인해서 죽은 자들은 연구자에 따라서 그 숫자가
차이가 난다. 이상배는 이 사건으로 인해 죽은 자가 77명, 유배 32명 등 110명이 형을
당했다고 집계하고 있다.(이상배, 조선후기 정치와 괘서, 국학자료원, 1999, 176쪽)
조윤선은 추안급국안의 기록을 분석하여 나주 괘서사건, 그리고 심정연 시권 사건과
관련하여 모두 150여명이 추국에서 심문을 받고 처형되거나 유배, 물고되었다고 분석하
였다(조윤선, 조선후기 영조 31년 을해옥사의 추이와 정치적 의미 , 한국사학보 37,
2009, 226쪽).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에 나타난
유배체험 형상화의 이면과 그 의미 195

 

소론 인물 다수가 관여한 반역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에 영조의 분노는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분노에 휩싸인 영조는 신하들의 면전에서 칼을 휘
두르고 참수된 자의 목을 돌려 보게 하였다.21) 그러므로 이광사가 이 역
옥 속에서 목숨을 연명한 것은 말 그대로 새롭게 다시 살아가게 해 준 왕
의 은혜였다.22) 영조의 입장에서 이광사는 잠재적 반역세력의 일부였고,
이광사의 입장에서 영조는 공포의 권력자였다. 이광사와 그의 형제 및 사
촌 형제들은 모두 이 을해옥사에 연루되어서 유배형을 받게 되었고 모두
유배지에서 죽었다.23) 개인과 가문이 겪은 최대의 비극이었다.
중앙에서는 을해년 말과 다음 해까지 역옥의 여파가 계속되었다. 그리
고 함경도 부령으로 간 이광사에게는 낯설고 거친 땅에 적응해야 하는 시
간이 남겨져 있었다. 그 속에서 이광사는 자신의 처지와 유배의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선대의 행위가 가져 온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인식했다.24)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자신과 왕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세워

 


21) 영조 31년, 5월 6일(기묘), 영조실록 84권.
22) 이광사, 到富寧謫所後寄在京子姪二條, 書, 斗南集 권1.
吾之不死全蒙聖上再生之德今歲乙亥卽聖上再生之年. 三月晦日. 卽聖上再生
之日. 佛家以度剃年謂僧臘一歲. 吾以五十一歲爲恩齡一歲以三月晦日改作生
日. 吾於孤露後每逢生日家人進一別食卽徒增愴懷却而不食次後若逢三月晦
日欲沽酒市魚以娛之聊以仰答聖恩. 五月八日.
23) 이광사의 형제와 종형제들은 모두 유배형을 당한다. 친형 광정(匡鼎, 1701-1773)은
吉州, 사촌형인 광언(匡彦, 1700-1755)은 端川, 사촌형인 광찬(匡贊, 1702-1766)은 明
川, 사촌동생 광현(匡顯, 1707-1776)은 機張, 사촌형인 광명(匡明, 1701-1778)은 甲山
으로 유배를 떠났다.
24) 이광사가 1756년에 쓴 다음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과 집 안에 닥친 재앙이 백부 때문
이기는 하지만, 실은 가문의 운명이니 탓할 마음이 없다고 하고 있다. (이광사, 寄子
姪書, 斗南集 권1. 家世覆滅至此子弟尤當益篤孝悌各勵禮義毋隊世傳遺訓.
此非有望於世故家之遭禍者道里秖然果能篤孝悌勵禮義雖至百世下比齊民
其家亡而不亡也. 無孝悌蔑禮義徒善於投合賴至揚顯致位其家之覆亡無餘矣.
況亦必無是道乎. 吾家之百日活埋專是伯父故吾之今春離萬死戹專是伯父故
196 한국고전연구 32집

 

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무인입춘축
성가>이다.

 


3. <무인입춘축성가>의 구조와 유배 체험의 형상화

 

1) 구조적 짜임 분석
<무인입춘축성가>는 무인년 입춘에 임금의 덕을 칭송한다는 제목 그
대로 덕을 칭송하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는 142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화자는 스스로를 죄루신으로 자처하고 있
다. 서사에서 새로운 계절인 무인년의 입춘이 돌아왔음을 지적하여 말머
리를 시작하며, 본사에서는 크게는 기원과 연모의 개념을 축으로 해서 전
체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본사에서는 유배 생활이 아니라 무인년 입춘을
맞아 임금의 은혜를 갚고자 춘첩자를 올리면서 임금의 덕을 송축하는 내
용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결사에서는 화자가 꿈에서 깨어나 다시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의미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단락을 보면, 다음과 같이 6개로 분할된다.
단락 행 주요 제재
서사 턴디와 삼기시고~무인닙츈 드오리라
본사 1 현익이라 토요성이~송츅이나 오리라 군은
본사 2 텬황시 만팔천셰~안락태평 오쇼셔 춘첩자 : 미래 기원
본사 3 바다희 믈결지고~감히 유양 리녀 춘첩자 : 현재 축성
본사 4 견마 우쥰도~여한이 이실게고 연군
결사 오경의 목마소~일야숑츅 오리라 연모와 송축
其實家運也. 各人之命也不敢有一分怨尤伯父心非徒不敢亦不忍.)

전체 구조를 받치는 핵심적인 틀은 본사 안에 춘첩자의 양식으로 기원
을 제시하고25) 기원의 전후로 연군의 내용을 배치하고 있는 점이다. 연군
의 정서가 춘첩자의 송축 내용을 내부로 포함하고 있는 구조이다. 본사 2
와 본사 3은 춘첩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본사 2에서는 왕정의 지속성을
강조하며 享國無疆을 기원하고 우리 님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太平聖代
를 기원한다. 본사 3에서는 현재 향유되고 있는 태평성세가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미래에 대한 기원과 현재에 대한 송축이 이어지면서 화자가 전
달하려는 메시지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강조된다. 이러한 본사 2와 본사 3
을 아우르고 있는 외부는 본사 1과 본사4인데 그것은 임금의 군은에 대한
감사와 연군에 대한 것이다.
본사를 위해서 서사와 결사는 동심원의 바깥 쪽 원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본사에서 주요한 축을 이루는 송축과 연군의 내용을 위해서 서사
에서는 작품을 창작하게 된 동기를 전제한다. 그것은 화자가 님으로부터
얻은 은혜 덕분이었고 서사는 이점을 제시함으로써 본사에서 전개되는 내용
을 위한 전제가 된다. 서두부터 화자는 고통스러운 삶의 단면들을 나열하면
서도 그것이 죽음보다는 낫고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준 성은을 갚기를
기대한다. 서사에서 화자는 유배 온 지 3년이 지나고 입춘이 되자 비로소
말하기 시작한다.26) 화자는 임금이 자신을 다시 살려 주신 은혜 덕분에 썩어

 


25) 주혜린, 조선후기 유배가사의 서술방식과 내면의식 ,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 2014,
50쪽. 화자의 유배 현실과 별다른 관련이 없는 상황을 설정하는 방식으로서 액자식
구성 방법을 선택해서 <무인입춘축성가>의 경우에는 액자 안에서는 춘첩자에 해당하
는 서술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26) 텬디(天地)라 삼기시고 부모(父母)라 나흐시나/ 주근것 사로심은 님밧긔 뉘실고
/ 후목(朽木)의 곳히퓌고 고골(枯骨)의 이난디 / 삼년(三年)이 다나고 년(四
年)에 미처셰라 / 구밀쥭(粥) 소곰반찬(盤饌) 추환(芻豢)도군 즑업졔 / 번(百番) 즌 헌뵈오시 금슈(錦繡)도군 더둇졔 / 변토(邊土)나 참녈(慘裂)들 극낙셰계
(極樂世界)만 가 / 샹우방풍(上雨旁風) 토옥듕(土屋中)이 광하욱실(廣厦燠室) 붋
198 한국고전연구 32집

 


가던 나무에 꽃이 피었고 삭은 뼈에서 살이 나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화자가
지금 있는 곳은 비참하고 참혹한 변방의 땅이고, 그는 지붕과 벽에 비바람이
새는 토옥에 살고 있지만 호의호식하는 삶이 부럽지 않다고 하였다. 왜냐하
면 님의 은혜 덕분에 이나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역적의 친족과 후예들에게 은덕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시 반
역을 저질렀으므로 구제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화자는 님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 유배를 보내 준 것이 뼈에 사무치는 은혜였다.
서사와 결사로 이어지는 시작과 마무리는 현실에서 시작하여 하룻밤
꿈에서 깨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연결은 본사의 마지막 단
락인 본사 4와 결사의 의미적 결합을 매우 긴밀하게 만드는 반면에 작품
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과는 유기적인 일관성이 약해진다. 결사에
서 화자가 잠에서 깨어나 님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본사의 서술 내용이 화자의 꿈 속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서술
된 내용은 꿈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일상에서 이루어지길 바랐던 태평성
대에 대한 소망을 본사에서 서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인입춘축성가>는 유배의 여정과 유배지에서의 생활과 감정이 드러
나는 유배가사의 전형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화자가 여성의 목소
리로 전화하여 님을 그리워하는 미인곡류의 유배가사도 아니어서 화자 주
관의 내면적 목소리보다는 외부 세계가 작품 속에서 지배적인 양상으로
서술되어 있다. 보다 서정적인 부분이 뒷부분에 위치하고 교술적인 부분을
앞부분에 위치시켜서, 사실을 먼저 전달하고 그것으로부터 기인한 자신의
감정을 강조한다. 이러한 작품의 구조 안에서 화자가 형상화하려는 세계는
태평성대의 공간이고 그것을 만들어낸 님에 대한 연군의 정서이다.

올네 / 분골(分骨) 쇄신(碎身)들 만일은(萬一恩)을 갑흐리공 / 엄동(嚴冬)이 다
진(盡)고 무인닙츈(戊寅立春) 드오리라


2) 경험과 분리된 태평성대
<무인입춘축성가>에서는 태평성대를 소망하는 화자의 절실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춘첩자를 통해서 인간이 만들어가는 완전한 세상
을 기원하기 전에 먼저 자연과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서술한다. 즉
자연-도덕-정치가 어떻게 어우러져야 태평성대가 가능할 수 있는지를 먼
저 전제하는 것이다.
현익(玄黓)이라 툐요셩(招搖星)이 동북방(東北方)의 고든말이
음곡(陰谷)의 난뉼(煖律)불고 삼양(三陽)이 회(回泰)니
팁튱(蟄蟲)이 다동(動)고 석은풀의 비티예고
동식(動植) 함믈(含生物)이 다쓸어 의(生意)잇내
화긔(和氣)라 샹풍(祥風)이라 아니간듸 노야업
양츈(陽春) 덕(德澤)야 어의도 어의샤
우리님 인덕(仁德)의 그려도 못미츠리
텬디(天地) 너와도 셩덕(聖德)의 좁오리
일월(日月)이 디마 왕명(王明)보다 어두으리
요슌(堯舜)의 호덕(好生德)도 박시졔즁(博施濟衆) 병(病)되시데
신우(神禹)의 성교(聖敎)로도 각위심(各自爲心) 우르시고
은탕(殷湯)의 그믈품도 일면(一面)은 그잇고
쥬무왕(周武王) 무성공(武成功)도 진미(盡美)코 미진션(未盡善)테
우리님 홍공위열(鴻功偉烈) 만고(萬古)의 뉘비네
텬디간(天地間) 만〃믈(萬〃物)을 믈〃히 혜여니
외외탕탕(巍巍蕩蕩) 온 덕(德)에 방블(彷佛)것 젼(專)혀업
구듕문(九重門) 달(闥)의 츈텹(春帖字)야 셩컨마
북(北塞) 죄루신(罪纍臣)도 숑츅(頌祝)이나 오리라.
봄이 오자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모든 만물은 生意를 갖게 되었다. 만

물을 있게 하는 것은 살려는 의지 生意이고, 이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드
러날 때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덕이다. 이러한 삶의 의지는 봄이 되
자 따뜻한 기운과 상서로운 바람으로 어느 곳에나 이르고 그것은 님의 인
덕으로 연결된다. 화자는 “양츈 덕야~~왕명보다 어우으리”의 연속되
는 4줄에서 님의 덕성을 仁德, 聖德, 王明으로 거듭 찬양하고 그것이 자
연의 덕성보다도 우월함을 강조한다. 즉, 자연 생성의 덕으로부터 인간의
윤리 그리고 통치자의 덕을 이끌어내고 있다. 만물의 덕과 그 氣를 함께
하는 임금의 덕은 위대한 공업을 이루어낼 수 있고 그것이 바로 仁君의
정치가 된다. 다음의 5줄에서부터는 우리 님이 이룬 공덕의 위대함을 고
인과 견주어서 말한다. 요순의 백성을 살리는 덕과 우의 가르침,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의 현실적인 공업을 병렬하면서 위대한 군주가 이루
어낸 정치적 공업을 우리님의 덕으로 환원한다. 자연의 덕과 인간의 도덕,
그리고 그것이 구현된 정치적 공업 사이에서 누구와도 비할 데 없는 임금
의 공덕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사물에
정을 투사하여 드러나는 생동감을 지니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화
자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전제로 해서 그
것을 임금의 덕성으로 옮기고 있다.
님의 덕에 대한 찬양이 가중되면서 이 감격이 춘첩자로 이어진다. 이러
한 덕 있는 임금을 위해서 그것이 영원하도록 기원하는 춘첩자를 쓰게 된
다. 화자는 현재 이 땅에서는 태평성대가 실현되고 있다고 거듭해서 서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성대가 계속 지속되어야 하고 왕업은 계승되
어야 한다고 보았다.

 

텬황시(天皇氏) 만팔쳔셰(萬八千歲) 디황시(地皇氏) 만팔쳔셰(萬八千歲)
우리님 녁년슈(歷年數) 텬황디황(天皇地皇) 겸(兼)쇼셔
회(子會)에 하 열고 튝회(丑會)예 따히 열시
십이회(十二會) 온나츤 일원(一元)이 인다데
이텬디(天地) 아디고 후텬디(後天地) 개벽(開闢)도록
그 우리님은 향국무강(享國無疆) 오쇼셔

삼만년(三萬年)의 번퓌 요디반도(瑤池蟠桃) 쳔번(千番)퓌고
삼천년(三千年) 샹뎐(桑田)되 동슈(東海水) 만번변(萬番變)코
슈미산(須彌山) 의딜(蟻蛭)고 황하슈(黃河水) 실갓고
듀셰불(住世佛) 쳔(千)이 석고 댱션(長生仙) 만(萬)을 뭇늬
우리님 다시보고 안락태평(安樂太平) 오쇼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을 모두 헤아려 보니 그 높고 넓은 님의 덕
에 비슷한 것도 전혀 없다. 입춘이 오자 북쪽 변방의 죄에 연루된 신하도
임금의 덕을 송축하고자 한다. 앞 선 서술에서 화자는 우리 님의 인덕, 우
리 님의 홍공위열, 그리고 이어서 향국무강을 이야기한다. 덕을 쌓고 공을
이루어서 시간적으로 중단 없고 끝없는 님의 통치를 기원한다. 님의 다스
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천 년에 한 번 피는 복숭아가 천 번을 피고,
삼천 년 뽕나무 밭이 동해의 물이 되는 변화가 만 번이 일어나고 수미산
이 개밋둑처럼 되고 황하수가 실낱 같이 되고 본존불이 천이 녹아들고 신
선이 만이 되도록 우리 님이 평안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기를 축원한다. 현
실에서 불가능한 상상의 시공간을 병렬하면서 우리 님이 마치 그러한 시
공간을 초월하여 태평성대를 이루기를 축원한다. 현실에서 볼 수 없고 상
상으로만 가능한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시공간을 끌어와서 그것에 빗대
어 현실적인 소망을 드러냈다.
이러한 태도는 고래로 있어왔는데, 화자의 간절함이 가진 밀도와 폭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한자어의 나열만이 계속 이어지고 그
것에 투사되는 화자의 감정이나 심리를 기술하지 않았다. 향국무강에 이
어서 안락태평이 나타났으니 의미망은 사대부 화자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형편없는 화
자의 삶의 공간 역시 이 가치관 속에서 해명되어야 할 요소인데, 그것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즉, 화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실질적인 삶의 공간보
다 오히려 우리 님이 만들어갈 혹은 만들어가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당위
적인 긍정만을 계속하고 있다.

 

바다희 믈결쟈고 변(四邊)의 봉화(烽火)긋고
오곡(五穀)이야 곡(百穀)이야 흙이런가 딋글인가
집〃이 도쥬의돈(陶朱猗頓) 사마다 조악전(彭祖偓全)
강구(康衢) 연월(煙月)의 격양가(擊壤歌)도 하도할샤
셩(聖子) 신손(神孫)이 만억셰지(萬億世之) 무궁(無窮)일
북원(北苑)의 닌(麟)이놀고 아각(阿閣)의 봉(鳳)짓들고
팔도(八道)의 올닌글월 녕어(囹圄)가 다뷔거고
녕대(靈臺)의 알왼말이 남극셩(南極星) 반달만
하의 오(五色)빗히 구룸인가 긔운인가
양 당셩 어릐여셔 거들졸을 모다
어화 이셰계(世界) 젹(載籍)의도 못듯왜
텬하(天下)의 듁(竹帛)으로 다어드리 긔록며
텬하(天下)의 금셕(金石)으로 다어드리 사기릿던
믈며 죄루신(罪纍臣)이 감(敢)히 유양(揄揚) 리녀

 

이어지는 본사3에서는 화자가 주장하는 현재 태평성대의 현실이 드러
나고 있다. 집집이 부자가 되었고 사람들도 장수하게 되었다. 강구연월에
격양가를 부르게 되니 성자와 신손, 즉 세자와 세손으로 이어져서 그 왕
조가 만 억 년을 연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절은 궁궐에서는 기린과 봉
황이 놀고 감옥이 빌 정도의 안정된 세상이 온 것이다. 사대부의 이상 속
에 등장하는 태평세월과 왕실의 모습이 바로 현재 지금의 모습이라고 서
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기록으로 한 번도 있어보지 못한 있을
수도 없는 그런 곳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 이 시기 조선사회의 현실이 이러한 완벽한 태평성대는 아
니었다. 화자를 포함해서 권력에서 소외된 백성과 지식층의 현실은 녹록
하지 않았다. 없는 세상을 있다고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화자가 서술하는
세상은 상상 속에서 구체화 되었던 규범적인 태평성세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화자는 현재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그려내지 않고 이
미 내면 속에 선험적으로 갖고 있던 공간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
러므로 <무인입춘축성가>에 나타나는 반복되는 태평성대를 향한 찬양과
송축은 화자가 그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하기 때문에 나오는 자연스러움이
없다. 그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화자의 삶과 생활이 투사된
언어가 나타나지 않고 상투적인 한자어가 반복되었다. 이것이 가지는 실
질적인 의미는 오로지 외부를 향해 있고 그 외부로 돌리는 화자의 시선은
복합적이지 않고 매우 단일적이다. 갈등의 요소 자체를 제거한 채 하나의
목소리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죄루신이 중앙을 향해 부르는 송축은 현실로부터 미래를 예측하여 기
원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 전기에 악장을 불렀던 시인들은 현실 권력과
신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뚜렷했다. 그런데 이광사의 송축은
이러한 정치적 목적이 없고 권력 유지를 원하는 권력자의 입장도 아니었
고 단지 생존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주류적 인물이 체제의 유지
를 위해 부르는 성격의 송축이 아니었다. 비주류적인 인물이 사적인 생존
을 위해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송축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송축의 이면에는 다른 의미가 상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태평성세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이루고자하는 소망
이 반영된 세계이다. 당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세계이고 그 세계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반복하는 것은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이루어져 있지 않
다고 하는 화자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태평성대는
나와 님만이 아니라 나와 님, 백성이 함께 사는 세상을 서술한 것이다.
3) 公道로서의 연군
기원과 송축의 귀결점은 이와 같은 태평성대를 가능하게 만든 임금에
게로 돌려진다. 그리고 임금에 대한 연모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견마(犬馬)의 우쥰(愚蠢)도 년쥬(戀主)줄 절노알고
규곽(葵藿)의 무지(無知)도 향일(向日)줄 뉘시긴동
곤튱(昆蟲) 초목(草木)인들 나졍셩(精誠) 금(禁)리쇠
졍셩(精誠)이 감발(感發)야 몽듕(夢中)의 핏득뫼셰
금난(金欄) 옥계샹(玉階上)의 홍약(紅藥)은 번득이고
어탑(御榻) 향안젼(香案前)의 뎐연(篆烟)은 어릐엿
댱냑(長樂)의 북소 곳밧긔 구울면서
금호(金壺)의난 누슈(煖漏水) 드므리 뎐(傳)듸
룡안(龍顔)을 바라올듯 옥음(玉音)을 듯올듯
고아(孤兒) 얼(孽子)조 부모(父母)얼골 첨뵈온듯
궁곡(窮谷) 폐질인(癈疾人)이 일월(日月)비츨 우러온듯
즑업기하 극(極)니 감누(感淚)만 죵횡(縱橫)니
일만번(一萬番) 죽온들 여한(餘恨)이 이실게고

 

사대부가 임금을 연모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짐승이 주인을 절로
알게 되고,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게 되고, 곤충이나 초목도 모두 저절
로 알아서 하는 일이 있다. 연주, 향일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며 연군 역
시 자연스러운 정성이다. 그러므로 화자 역시 님을 바라보고 만나서 자신
의 충심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러한 화자의 충심이 꿈 속에서나마 님
을 잠깐 만나게 하였다. 꿈 속에서 화자는 궁궐로 들어가 님의 얼굴을 본
듯하고 님의 목소리를 들은 듯하다. 고아와 얼자가 부모를 만남이 감격이
듯이 궁벽한 골짜기의 병자에게 해와 달의 빛은 치유의 서광이다. 임금을
그리는 화자는 이 어버이 잃은 고아이자 어둠에 묻힌 병자와 같다. 어버
이는 자식의 근본이므로 그 자식은 도리를 다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임금
의 얼굴과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끝없는 즐거움이자 일 만 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감동이 된다. 그런데 화자인 이광사와 임금은 현실에서는 서
로 만난 적이 없었다. 오직 역옥에 걸려 들어 친국장에서 심문 받을 때 임
금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에 대한 연군의 정서는 충
직한 신하의 위치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상감의 어짊은 하늘과 같아 햇빛 같은 은혜 이 몸에도 되돌아왔네. 만 번
죽어 싼 목숨 살려주시고 특별히 이 목숨을 보전케 허락하시니 하찮고 천한
이 몸, 이 은혜 어이 갚으리요? 더구나 나이조차 먹어 문득 근력조차 부실함
에랴? 보잘 것 없는 정성만 그칠 줄 몰라 아침마다 공경스레 목욕하고 향
피우고 대궐 향해 정성스레 사배하고 상감 은혜 기리기에 침식도 잊어 감히
상감의 장수 축수하거니 부디 천지 같이 무한하시기를. 또한 바라건대 國運
이 길고 굳건하기 태산과 곤륜산과 같길. 벽이며 바라지엔 온통 이것만 쓰고
입으로 외운다네 새벽부터 땅거미까지. 예전에 어떤 초야에 묻힌 이가 임금
은혜 느꺼워 미나릴 바치려 했고 또한 가난한 백성 정성이 복 바쳐 봄볕도
바치려 했다더니만 신의 정성 역시 이와 같으니 산을 지겠다는 모기와 뭬
다르리오?…임금 섬김은 말로만 들었을 뿐 언제 한 번 뵙기나 했던가만 조
정에 벼슬하건 초야에 묻히건 마음가짐 똑 같아라. 받들고 심복하는 정성으
로 한 끼 밥인들 그 은혜 잊을 손가? 남북에 만약 변고라도 난다면 온 집
안이 앞장서서 활등개 메고 맨주먹으로 서슬 푸른 칼날 밟더라도 전진할지
언정 후퇴는 말라. 깜냥에 의당 肝腦를 발라도 시원찮거늘 감히 공훈에 봉해
206 한국고전연구 32집
지기 바랄까보냐? 당쟁의 화는 필경 나라를 망칠 것이니 그 기세는 하늘도
뒤흔들 지경이니 영웅이 평지에서 일어나 온 천지에 어수선히 피를 헤쳤네.
우리 집은 더욱 삼가야만 하니 두렵거니 너희들 한마디라도 터뜨릴세라. 집
안에서도 말조심 않다가는 그 말이 당장에 천리길을 달리느니라.27)
위의 글은 이광사가 쓴 訓家篇의 서이다. 집안의 모든 어른들이 유
배를 떠나고 난 후 서울과 그 인근에 남은 집안의 젊은 자질들에게 생활
의 지침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사대부로서 임금과 맺게 되
는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임금을 섬김은 조정에서 벼슬하건 초야에 묻혀
있건 마음가짐은 똑같다. 마음으로 복종하는 정성으로 다만 한 끼라도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임금이 곤경이 처하면 맨주먹으로도
나가서 푸른 칼날 아래 밟히더라도 전진해야 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우
리 집안이 당쟁에 기울어서 나라를 어지럽힘이 있었으니 더욱 조심하고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환로에 오르지 않더라도 사대부로서 충은 公道이
고 이 충의 윤리적인 기준이 화자의 일상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오경(五更)의 목마(牧馬)소 든날 오거이
틴후(後) 의슈간(衣袖間)의 어로향(御爐香)이 그잇
벼개우 근눈물 쳔항(天行)이 만항(萬行)일

 

27) 정양완, 원교 이광사론 ,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367~370쪽 번역 인용. 이광사, 訓家篇有序, 圓嶠集 권2. 聖明仁如天太陽回
覆盆求生萬死中特許保其元賤臣螻蟻類何由報此恩. 况復齒已老遽見愆膂筋
微誠不能已朝朝敬沐薰面闕勤四拜頌恩忘寢飧敢祝聖人壽願得齋乾坤且願
寶祚長鞏固比岱崑壁牖遍書此口誦竆晻昕. 聞昔有野人義激請獻芹且聞貧窶
子誠發思貢暄臣忱亦如此何異負山蚊.…君只耳聞何曾見一番在朝在草野處
心齋兩斤愛戴嚮誠一飯俾可諼南北若有警擧族先櫜鞬空拳蹈白刃有進莫旋
跟分宜塗肝腦敢望策功勳黨禍必亡國氣勢天可掀龍䖳起平陸玄黃血披紛吾
家尤可懲恐汝一辭噴居室不三緘晷刻千里奔樞機儻不愼.


늬(生來)에 틴원(願)을 몽듕(夢中)의 일온거시
이몸이 일식(一息) 미민젼(未泯前)은 일야숑츅(日夜頌祝) 오리라
작품은 결사에서 임금에 대한 끝없는 송축의 념을 강조하면서 종결된
다. 화자가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그 주위에는 임금의 향기만이 남아 있
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간절했던 소원을 꿈 속에서만 겨우 이룬 것이
다.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님을 위해서 밤낮으로 송축하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었다. 여기서 화자가 서술하는 님과 나의 연모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고 일방적이다. 그러나 이 일방성이 왕이건 화자이건 어느 일방이 마음
대로 규정할 수 있는 지극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공적
이고 보편 윤리적인 측면에 기대어 있다. 즉 이것은 사대부 집단의 전통
적인 보편 관념에 기댄 것이다.
원래 연군의 노래는 충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화자의 충이
충의 대상에게 수용되지 않고 있다. 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심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사대부에게 강조되었던 전통적인 모랄폴리틱이었
고,28) 화자는 그것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군신 관계는 양반 개개인
이 갖는 심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명분론적인 의리로써 맺어진 것이다. 유
학의 성군 이데올로기에서 충 개념은 忠經 천지신명 편에 나타난다.
충을 정의하기를 “마음의 중심이며 사를 버리고 지극한 公에 이르는 것
(忠者中也至公無私)”이라 한다. 유학자의 충성의 목표는 恣意가 아니
라 반대로 그러한 왕의 자의를 길들일 윤리-도덕적 이상이었던 것이다.29)
그런데 이 충성심의 근저에 원망과 분노가 영역을 넓혀간다면 그것은 흔

 

28) 김석근, 조선시대 군신관계의 에토스와 그 특성-비교사상적인 시각에서 , 한국정
치학회보 제29집 제1호, 한국정치학회, 1995, 116쪽.
29) 김상준, 조선시대의 예송과 모랄폴리틱 , 한국사회학 35집 2호, 2001, 한국사회학
회, 217~218쪽.
208 한국고전연구 32집

 


히 반역으로 의심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소신, 그리
고 행위 때문이 아니라 연좌에 의해서 유배의 신분이 되었다면 자신의 무
관함을 좀더 강한 어조로 반복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4. 송축과 연군의 맥락과 그 의미
<무인입춘축성가>는 유배의 맥락 위에서 연군과 송축의 개념이 결합한
작품이다. 사대부 유배가사에서 일반적으로 유배의 경험과 연군의 정서가
공존하고 있다면, 이광사의 <무인입춘축성가>에서는 유배의 경험은 최소
화되고 송축과 연군이 연속되어 있다. 그런데 송축은 왕과 국가의 안녕과
수복을 기원하기에 일종의 연군의 성격을 띤다.30) <무인입춘축성가>에서
화자는 임금을 향해 연군의 마음을 드러내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틀은 사회
적인 행사로 절기에 행하는 풍속과 관련을 맺는다. 일종의 공식적인 의례의
틀 안에서 드러내는 연군인 것이다. 대개 유배가사에서 임금이 그리움의
대상으로 인식될 때 화자는 사적인 감정을 표출하기 쉽다. 유배자인 화자에
게 유배에서 기인한 절망과 연군으로 비롯된 사모의 마음은 이중적이다.
그래서 작품 안에서 이 두 정서적 충동은 적절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반면
에 <무인입춘축성가>에서 송축과 연군이 함께 할 때는 화자 개인이 겪는
실제 유배의 현실이 부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송축과 연군은 사적이기보다
는 공적인 담론이 된다. 그리고 찬미의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진술이 주가
되면서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윤리적 담론이 된다.
이 때 임금은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어떤 가치를 대표한다. 공적인 대상
인 님을 향해서 공적인 역할을 강조하며 님과 화자가 모두 소속된 세계의

 

30) 최지연, 조선후기 송축가사 연구 ,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17쪽.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에 나타난
유배체험 형상화의 이면과 그 의미 209

 

기준을 강조한다. 왕은 개인으로서 실체하는 동시에 권력 자체이자 집행자
였다. 즉 왕은 화자를 유배시킨 자이며 윤리적․정치적으로 복종의 대상이
었다. 작품 속에서 화자가 드러내는 감정은 원망이 아니라 동조이며, 분노
보다는 체념이나 수용에 가까웠다. 이광사가 작품 속에서 마주 하는 님인
왕은 개인이기도 하지만 왕이 상징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왕 개인이 아니라
‘왕권의 윤리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왕권의 윤리성에는 왕만이 아
니라 이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 속에 살아가는 신하의 윤리도 포함된다. 그
러므로 <무인입춘축성가>에서 화자는 임금과 동일성을 추구한다. 그 동일
성은 화자와 임금이 서로 같은 의식적 지향을 하며 동일한 주자학적 의리론
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무인입춘축성가>에서 화자는 자신의 사정과 의도
를 조목조목 밝혀서 설득력을 높이려 하지 않고 그보다는 임금의 우월함과
그의 치세가 갖는 성대를 나열하고 있다. 즉 작자의 내면을 드러내기보다는
있었으면 하고 소망하는 현실을 반복해서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현실이
태평성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평성대의 공간이 중첩되고 있다. 분노,
원망, 연모와 같은 감정을 통해서 님과 소통하려 하지 않고, 님과 님의 세계
를 송축하는 신민이 되어 그 세계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는 내
내 낙관적인 어조를 유지하면서 님이 실현하는 세상에 대한 감탄과 이해가
설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유배자의 신분으로서 할 수 있는 대사회적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작자는 님과 님을 둘러싼 다른 청중들에게 자신의 충을 확신
시키려고 한 것이다. 세상의 평화로움과 왕권의 정당성을 의심할 바 없이
강조하는 화자의 태도는 왕이 형벌을 통해서 의도했던 신하의 자세였다.
영조는 을해역옥에 대한 대사면을 반포하는 자리에서 삼종혈맥의 후계자
로서 자신이 큰 기업을 이어받았고 이에 다스리는 도리의 근본을 仁이라
생각하여 포용하는 정사를 베풀었다고 단언하고 있다.31) 더욱이 형벌과
관용이 동시에 정치자원이 될 수 있었던 시대에 범법의 혐의자들이 다다
르게 되는 막바지 단계는 사법적 판정과 형의 집행을 피해갈 용서의 ‘빈
터’가 과연 마련될 수 있느냐는 극한의 질문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을 유배
로 낮춰준 행위는 왕의 시혜였고 유배자에게는 하염없는 감은이었다. 이
은혜를 수용한 자는 감읍하였고, 차후에는 배전의 충성을 서약할 것이었
다.32) 이광사는 이러한 왕의 관용을 통해서 죽음을 피해서 유배를 갔다.
그러므로 <무인입춘축성가>는 송축을 통해서 연군을 강조하여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분명히 하려는 정치적인 맥락으로 읽혀질 수 있다. 작자가
가사를 짓고 그것을 노래하는 것은 중앙의 권력자들에게도 들려질 수 있
었다. 1762년에 이광사는 다시 남해 절도인 신지도로 이배가 확정되는데,
그 이유가 부령 땅에서 인근 사람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쳤기 때문이었
다.33) 이 때 그가 가사를 창작하는 행위는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외부에
알려지고 소통되는 고리가 되었다. 공인된 사회적 발언을 통해서 작자 역
시 그 가치의 공동체 안에 있음을 반복해서 제시함으로써 님의 의심과 불
신을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광사는 소수자 혹은 비주류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는 현실을 주류적 입장에서 재구성했다. 유배자의 고통은 사라지고
번성하는 태평성대의 기쁨이 드러났다. 이광사는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 성세에서 님과의 관계를 전통적인 관념과 방식으로 규정짓고 있다. 일반
적으로 성리학적인 군신 관계에서 중심축은 수직성과 상호성에 있다. 유교
윤리에서 오륜은 상하질서 수직적 관계 속에서 지배의 논리가 형성되지만

 

31) 영조 31년, 4월 13일(병신), 영조실록 84권.
32) 박종성, 조선은 법가의 나라였는가- 죄와 벌의 통치 공학, 인간사랑, 2007, 1000~
1001쪽.
33) 영조 38년, 7월 25일(을유),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 9월 6일(을축), 영조실록
100권.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에 나타난
유배체험 형상화의 이면과 그 의미 211

 

하부를 지배하는 상부의 정당성은 자발적 복종과 수용을 전제로 했을 때
합리화된다. 이광사의 경우에 부령의 유배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처벌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면 벌을 준 자에게 윤리적
결함이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와 님 사이에서 누구의 과오도 아니
라는 인식의 틀을 설정했다. 그것은 화자가 처한 비참한 현실이 화자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당쟁의 몰입으로 인한 가문의 폐망임을 지적하는 것이었
다.34) 이러한 가문이 처한 외부 상황에 대한 지적은 바로 왕권에 의한 탕평
을 주장했던 왕의 논리와 괘를 같이 하였다. 영조는 시비에 몰입하는 붕당의
폐단을 왕정을 어렵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붕당에 몰입하
는 집단이나 개인은 왕과 군신의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조는 을해역옥을 완전히 정리하면서 왕권의 정통성을 위협했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였고 정국의 운영 과정에서 유교적 성군인 요순을 추구하였
다. 그는 사족에게는 치통과 도통을 겸비한 군사의 권위를 바탕으로 한 절대
적인 심복을 요구하는 엄격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35)
그러므로 왕의 결정은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작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유배자의 신분이 되었을 때 자신의 해배를 소망하는 작자
는 왕의 주장이 가진 정당성을 받아들였다. 이 때 이광사의 입장에서 君
이 君다운 정치를 실현하는 주체로 되어 있다면, 그 체계에서 신은 마땅
히 지켜야 할 위치와 역할이 있는 것이다. 군과 신은 함께 마땅히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고 그것을 재천명함을 통해서 당위적인 군신 공유의 공간
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 공간에서는 덕의 실현을 통해서 태평성대를

 

34) 이광사, 叔兄艾叟先生記實文, 원교집 9권 我家自孝敏公來, 世以忘身殉國爲
心, 至伯父澤軒公, 竟陷黨籍, 門戶廢僇. / 이광사, 祭恒齋從兄文, 원교집 6권
至于庚戌, 璿潢世家, 百口活埋, 埳壈抑屈, 離此百憂, 兄遂杜戶, 獨愛其廬, 築亭
于園, 扁曰園逋, 惟是之園, 處于闤闠, 突然而高.
35) 김백철, 앞의 책, 141쪽.
212 한국고전연구 32집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군신 간의 수직적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전면적인 송축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 태도의 이면에는 님 혹은
왕이 대변하는 체제와의 화해라는 논리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광사가 <무인입춘축성가>에서 거듭해서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은 성세이고 그것에 대한 감탄과 감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
내기 위한 과정에서 임금과 현실을 경험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선험적인
당위로서 긍정했다. 이러한 긍정의 바탕에는 어려운 현실을 감당해야 하
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이광사의 관점이 내재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광사
는 맹자가 말하는 養氣를 강조한다. 그것은 마음의 불건전한 과잉, 이를
테면 대학에서처럼 불합리한 분치(忿懥)와 호오(好惡), 우환(憂患), 공
구(恐懼)를 덜어낼 뿐 마음을 억지로 강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자
기 마음의 仁의 자연성을 믿고 그것에 어긋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보았다.36) 이러한 심(心)의 발현에 대한 이해는 자연과 도덕, 그리고 인간
사회의 실현태로서 정치로도 연결된다.
이광사는 자신의 이기론에서 자연의 생의를 인간의 도덕 법칙과 연결
했다.37) 이광사는 정호의 ‘생지위성’을 거론하며 모든 만물은 천지로부터
나고 그것들은 모두 생생의 리를 갖고 있으며 이것이 비로소 성이 된다고
한 것이다.38) 이 때 성은 개체가 형성된 이후를 말한 것이므로, 구체적 사

 

36) 한형조, 기질은 선한가- 아버지 원교의 양명학과 아들 신재의 주자학 , 정신문화
연구 제34권 제2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1, 91쪽.
37) 이광사의 理氣論은 사촌 형인 항재 이광신의 先藁에 남아 있는 편지 왕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734년 경에 쓴 與道甫書, 答道甫書와 1742년에 쓴 辨道甫理
氣說, 그리고 書先世言行錄後壬子에서 이광신이 이광사의 말이나 글을 인용하
는 부분에서 원교의 이기론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었는지 추론할 수 있다.
38) 이광신, 辨道甫理氣說, 先藁 人性皆善氣有善惡是經童小生所能知者而道
甫以爲人性皆善氣亦皆善云道甫眞不知而然耶.…第原其本意則看得一性字太
局. 蓋性是人生形以後之名孔子曰成之者性, 程子曰生之謂性, 邵子曰性者道之
<무인입춘축성가(戊寅立春祝聖歌)>에 나타난
유배체험 형상화의 이면과 그 의미 213

 


물로서의 생은 반드시 氣에 의거하여야 하기 때문에 氣는 곧 性이 된다.
이 생의 의지가 인간 정서에 나타날 때 그것이 곧 仁이라고 하였다. 그러
므로 仁者는 곧 천지만물과 일체가 되고, 자연의 덕을 사람들 사이에서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임금이 된 자는 이 덕을 이어서 인정을
베풀어야 하는 책무가 생긴다. 이광사는 性은 형태가 있게 된 뒤의 이름
이며, 性과 氣와 生은 구분할 수 없으므로, 性이 善이면 氣도 善이라는
논리를 전개한다.39) 자연 만물 속에 운행하는 리와 기는 하나이고, 그 기
가 발현된 것이 성이다. 이러한 성이 인간의 도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仁이고, 仁者인 왕이 정치를 통해서 그 인을 실현한 것이 태평성대였다.
<무인입춘축성가>에는 이러한 성세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있
다. 실제 삶에서 이광사는 태평성대에서도 소외된 유배자였고, 군신관계
에서도 자신의 충이 왕에게 닿을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다. 그러나 이
러한 자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작자는 현실과 화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성대를 송축하면서 현실 속에서 仁政이 실현되
어가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자신에게도 미치길 강력하게 소망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5. 맺음말
이광사의 처지는 기존의 유배가사 작자와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여타
의 작자들은 유배를 통해서 자신이 현재 살아가던 현실로부터 또 다른 낯
선 공간으로 옮겨졌지만, 그 두 공간은 모두 현실정치와 관련이 있었다.

 

形體氣本乎理而理附乎形理卽性性與氣與生俱生衾同妙合實未見其那個爲
性那個爲氣善則皆可善惡則皆可惡.
39) 서경숙, 원교 이광사의 양명학 , 양명학 3호, 한국양명학회, 203~204쪽.
214 한국고전연구 32집

 

반면에 이광사는 이미 정치현실로부터 밀려나 있던 사람이 유배를 통해
서 다시 정치적 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정치현실의 결과가 자
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사람에게 다시 정치현실이 생존의 문
제와 연결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그나마 평온한 삶을 유지하던 사
람이 다시 정치적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소용돌이 속으로 이광
사 가계의 다수가 휩쓸렸다. 이들 중에서 공식적인 역안에 유일하게 형신
의 기록이 남아 있는 사람이 이광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유배의 정치
적 상황을 가장 혹독하게 겪어냈던 사람이었다.
이 글에서는 이광사가 <무인입춘축성가>를 짓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
치사회적 현실을 어떻게 드러내려고 했는지 주목했다. 작자는 축성을 통
해서 연군의 정서와 사대부가 갖는 보편적인 충의 관념을 드러내고자 하
였다. 그런데 작품에 나타나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私的이지 않다. 일
반적으로 미인곡 계열의 가사에서 화자가 여성의 목소리로 나타날 때, 작
품 외부에서 존재하는 임금은 매우 사적인 대상이 되어서 작품 속에 관여
한다. 이러한 관여 속에서 군신관계는 남녀관계가 된다. 이 남녀 관계 속
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관념은 사적인 것이 되고 私欲이 된다. 그런데 이
사욕으로는 내 마음 속의 진정, 양지가 드러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작자는
이것을 공도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주관의 정서보다는 공
도를 실현하는 과정에 주목한 것이 이 작품에서 화자가 연군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18세기에 유배 경험을 서술한 여타의 작품들과 분명
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무인입춘축성가>에서 드러나는 이런 특성은 18세기 유배가사의 구도
에서 전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지점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논의가 좀더
심도 있게 전개되려면 동일한 정치적 변동을 겪고 창작된 다른 작품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이에 을해옥사의 여파가 창작의 동인이 되었던 이광명
의 <북찬가>를 함께 거론하는 정치한 독해를 다음 과제로 남겨 둔다. 이
러한 검증을 통해서 18세기 소론계 유배가사 작자들에게 가사 창작이 의
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더욱 설득력 있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의의 확장을 통해서 조선후기 사대부 유배가사의 변곡점들을 좀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16 한국고전연구 32집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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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식, 유배가사연구 ,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2005, 1~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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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Background and Meanings of the Configuration of Exile
Experiences Observed in Muinipchunchukseongga(戊寅立春祝聖歌)
Nam, Jeong-hee
The purposes of this study were to restructure the time and space of
creation for Lee Gwang-sa’s Muinipchunchukseongga, and to explain the
structural logic and meaning orientation of the work. An external drive
that led the author to write this work was the treason case in 1755. In
the case, some of the radical Soron sect conspired to revolt against King
Yeongjo’s rule, and Lee Gwang-sa was involved in the incident through
his connection to Yoon Ji, the ringleader. Because of this happening, Lee
was exiled to Buryeong, Hamgyeong-do, and he wrote this work there while
experiencing the sufferings of exile in the unstable political situation. In
the work, the speaker described the space of peaceful reign and his yearning
emotion toward the king who had created the space, centering on two
central axes, namely, eulogy and yearning for the king. The world, which
was the object of eulogy recited by the author, was not an existing peaceful
world but a dreamed ideal world. What is more, the speaker who was
yearning for the king, without making a visible sovereign‐subject relationship,
relied on the general ideology of the literati group rather than on personal
relationships. The author’s gratitude and praise for the peaceful reign was
his utterance to the society as an exile. The speaker emphasized the king’s
reign and suggested repeatedly that he himself was in the community of
this value, and by doing so, clarified his political position. In order to
emphasize that there were principles to be observed between the ruler and
the subjects and that there was a world to be exposed, the author assumed
the attitude of whole‐hearted eulogy. In addition, behind this attitude
was the logic of reconciliation with the regime represented by the master
or king.

Key Words Lee Gwang-sa, treason case in 1755, exile gasa, blessing the king,
yearning for the king, Soron sect (少論), tao(道), peaceful reign

 

논문투고일 : 2015. 11. 10
심사완료일 : 2015. 12. 10
게재확정일 : 2015.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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