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3년(1170) 8월 경진(庚辰)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치고, 전왕(前王)을 복위(復位)시키고자 했다. 동북면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事) 한언국(韓彦國)이 군사를 일으켜 여기에 호응하였다. 김보당은 장순석(張純錫) 등을 거제(巨濟)로 보내 전왕(前王)을 받들고 계림(鷄林)에 나와 살도록 하였다.
(9월) 계묘일에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에서 김보당 등을 잡아 개경으로 보내 왔다. 이의방이 그들을 저자거리[市]에서 죽였으며 모든 문관을 다 살육하였다.
(명종 4년 9월) 기유일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려 모의한 후, 동북 양계(兩界)의 여러 성들에 격문을 보내어 사람을 모았다. 겨울 10월 기미일에 중서시랑평장사 윤인첨(尹鱗瞻)을 시켜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조위총을 치게 하였다. 병인일에 윤인첨이 절령(岊領)에서 싸우다가 패전하고 돌아왔다. 경술일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임명하여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서경을 치게 하였다.
(명종 6년 6월) •……(중략)…… 윤인첨(尹鱗瞻)이 서경을 격파하고 조위총을 붙잡아 죽인 다음 사람을 조정에 보내 승전을 보고하였다.
『고려사』권19, 「세가」19 명종 3년 8월 경진
이 사료는 정중부(鄭仲夫, 1106~1179)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 발생 3년 후인 1173년(명종 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 ?~1173)이 일으킨 김보당의 난과 이를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1174년(명종 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 ?~1176)이 일으킨 난을 기록한 것이다. 두 사건은 모두 무신에 대한 문신들의 반발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무신란 이후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이의방(李義方, ?~1174) 1인 체제의 무신 정권이 들어섰다. 그런데 미천한 신분이었던 이의방은 무신란 당시 크게 활약한 하급 무신들을 지방관에 임용할 정도로 대접이 남달랐다. 여기에 불만을 느낀 김보당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김보당은 전통 있는 문벌 귀족인 영광 김씨(靈光金氏) 출신의 문신이었다. 처음에는 의종(毅宗, 1127~1173) 대 이래로 문란해진 정치 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생각으로 정권에 참여하여 우간의(右諫議)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전대 정치를 문란하게 한 장본인인 이준의(李俊儀)•문극겸(文克謙)의 탄핵 과정에서 그들을 비호하는 듯한 명종(明宗, 재위 1170~1197)의 처결에 불만을 느끼고 무신 정권에도 반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는 1173년 동북면병마사로 좌천되자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韓彦國) 등과 공모하여 이의방•정중부 제거와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김보당은 장순석(張純錫)•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병마사로 삼아 군사를 일으킨 뒤, 장순석을 거제도로 보내 그곳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을 경주까지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이의방이 보낸 이의민(李義旼, ?~1196) 진압군에 의하여 패하였으며, 후에 의종 역시 처형되었다.
체포된 김보당이 “무릇 문신으로 공모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진술하여 많은 문신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 사건 이후 문신들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문신들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1174년 9월 병부상서 서경유수 조위총도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정중부•이의방 등이 무신정변 이후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우자 그는 동북 양계(兩界) 여러 성(城)에 토벌을 권하는 격문을 돌렸다.절령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하여 동조하였다.
조위총의 군대는 개경 근처까지 이를 정도로 강성하였다. 군대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의방은 서경 출신 관료들을 모조리 죽여 효수하고 직접 진압에 나섰다. 이에 조위총 군대는 서경까지 후퇴하였으나 쉽게 제압되지 않고 전투는 장기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의 아들이 이의방을 살해함으로써 정권은 정중부에게 넘어가고, 이의방의 부하들은 모두 죽거나 유배되었다. 정중부 일파는 조정 대신들을 무마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명종의 선유(宣諭) 조칙을 조위총에게 내렸고, 조위총은 이의방을 처단한 것을 축하한다는 표를 보냈다. 하지만 정중부 정권은 화해 대신 조위총 측의 사신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전투가 길어지며 식량난이 가중되자 조위총은 금나라에 이의방의 의종 시해죄를 알리고 지원군을 청하였다. 더 나아가 서경을 비롯한 40여 성을 이끌고 금에 귀속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하였으나 금나라는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난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1176년(명종 6년) 6월 윤인첨(尹鱗瞻)이 서경을 함락시키고 조위총을 잡아 처형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조위총의 군대는 김보당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컸기에 서경 근처에는 계속 잔당이 남아서 산발적으로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곤 하였다. 이 때문에 서경은 한동안 전란의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사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보당의 난과 조위총의 난은 서경을 비롯한 양계(兩界) 지역에서 일어났다. 조위총의 난은 김보당의 난과 달리 다수의 농민이 참여하였고, 진압된 이후에도 나머지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민란의 성격이 강하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본질적으로 정중부•이의방 등 무신 정권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러한 반(反)무신 세력이 토벌군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무신 정권은 그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건을 거치면서 지방 사회의 질서 체제가 무너지고 수탈과 억압이 이어졌는데, 이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천민의 봉기가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