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제국 사이:병자호란 전후시기 주화∙척화논쟁을 통해 본 조선 지식관료층의‘國’1) 표상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7.10.13|조회수273 목록 댓글 0

문명과 제국 사이:
병자호란 전후시기 주화∙척화논쟁을 통해 본 조선 지식관료층의‘國’1) 표상


본고는 전쟁과 반정을 경험했던 인조대를 대상으로
하여 전근대 시기 조선의 지식관료층들이‘國’을 무엇
이라고 생각했는가를 검토하는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國과 병렬적으로 사용된 범주인‘천하’를 참조점으로
하였으며 병자호란 전후의 주화-척화논쟁을 분석대상으
로 삼았다. 天이라는 보편적 질서에 의해 지배되어야 할
공간으로서의 천하는, 현실적으로는 중화제국의 모습으
로 나타났다. 즉 천하는‘中華’라는 <문명>과‘事大字
小’의 원리 하에 조공과 책봉 시스템을 강제하는 <제국>
의 형태로 조선의 지식관료층에게 인지되었다. 이와 관
련하여 본문의 전반부에서는 國은 문명을 수용하고 제
국에 대응하기 위해 모방과 적합을 각각의 전략으로 채
택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중화질서 내에 존재한 國들은 문명을 향한 모방
전략과 제국변동시의 적합 전략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했으며 양자의 긴장이 國에 대한 표상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이를 통해 주화-척화논쟁을
해석하였다. 당시의 자료들을 검토하는 것을 통해 김상
헌을 위시한 척화론은 문명에 대한 강한 모방 욕망과 제
국변동에 비적합 구도를 갖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國을
상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른 한편 최명길
을 위시한 주화론은 문명에 대한 약한 모방 욕망과 제국
변동에 적합한 구도를 갖고 있었으며 國을 절대화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 주제어: 國, 천하, 문명, 제국, 주화론, 척화론, 병
자호란
􀓛 논 문 요 약 􀓛


손 애 리
고려대학교


1) 심사과정에서 논평자는‘國’은‘國家’의 약자이며 진한시기의 國과 혼동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냥 國家로 칭하
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 해 주었다. 그러나 본고에서 사용하는 國은 분석적 개념이
라는 점에서 오해를 무릅쓰고 고수하였다. 家는 용례 상 朝家, 公家, 私家처럼 공간과 영역을 나타내는 일종의 접
미사로 쓰였다는 점에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化家爲國”의 속성을 갖는 전근대 시기의 국가
를 분석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家’와‘國’이라는 범주를 의도적으로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부연하면,
전근대 시기에는『대학』의 8조목 중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네 항목에 근거해 一人∙
一家∙一國∙天下를 사회세계의 기본 범주로 삼았다. 특히 家와 國은 親親과 尊尊으로 대별되며 그 작동원리를
달리하였고, 양자의 긴장관계가 정치적 문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王家는 이 두 가지가 포개어지는 영역이라는 점
에서 정치적 논쟁의 진원지였다. 왕가로 환원할 수 없는 전근대 국가의 정치적, 외교적 속성들을 확인하기 위해
본고는 國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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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며
본고는‘天下’라는 범주를 참조점으로 삼아 17세기 전반 인조대(仁祖, 1595~1649, 재위기간
1623~1649) 조선의 지식관료층이 정치공동체로서의‘國’을 어떻게 표상했는가를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國이란 초역사적인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가 아닌 중화주의 질서 속에서
존재한 역사적 형태로서의 조선을 말한다. 나라를 가리키는 한자어는 당시에 國, 國家, 邦國등 여
러 가지로 쓰였지만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은 國이었다.
國에 대한 표상을 검토하기 위해 이 시기를 선택한 이유는 정치공동체에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反正을 경험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자기를 반추하
는 가장 극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그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공동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건이 요청되
고, 정책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정치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내부 점검과 방향 모색이 활발히 이루어
진다. 더구나‘反正’으로 등장한 인조 정권은 반정의 명분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다른 반정의 불가
함을 설파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여 있었다. “<왕>을 지키기 위해 왕을 폐한다”라는 역설에 직면하
며, 그 역설이 자기 집단에게만 한정되고 다른 집단에게는 통용될 수 없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정치
적 정당성이 모색되어야 했던 시기이다. 당연히 정치공동체에 대한 이론적∙절차적 논쟁을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인조대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는 당시 지식관료들이 정치공동체로서의
國을 어떻게 표상했는지를 검토하는데 적절한 대상이 된다.
전근대의 國은 근대적인 국민국가(nation-state) 개념과 이질적이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로 단일


2) 일반적으로 유가 전통에서 사대부라 불리는 집단은 문인(literati)과 관료(bureaucrat)로서 학문사회와 정치사회
에 동시에 참여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학문의 연마는 修身이라는 측면 외에도 관직에 등용되어 國의 경영
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는 16~17세기에 걸쳐 國의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기피하는‘산
림세력’의 전통이 형성되면서 학문과 정치를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특히 효종대부터 산림
세력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등용되면서, 다시 학문과 정치 곧 지식인과 관료의 이중적 지위를 통일시키려는 노력
이 생겨났다. ‘사대부’가 다소 신분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점에서 본고는 사대부라는 용어를 대신해 이들을 '관료
지식층‘ 혹은‘지식관료’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손애리, “기해예송을 통해 본 17세기 중반 조선 지식관료들의 家
와 國관념,”『한국학연구』32집(2010).
3) 근대국가의 특징을 균질적인 집합의식을 갖는‘국민의 발명’에서 찾는 관점에 따르면 전근대국가는 강제적 물리
력을 매개로 치자집단과 피치자집단으로 구성되며 구성원들 간에는 운명공동체의 의식은 고사하고 집합적 소속
감을 찾기도 어려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공동체의 필수 항목인 집단적 자의식이 타자성의 경험과 소통매체
를 통해‘발견’되고 강화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국경과 언어와 문화를 공통으로 하는 집합적 단위에서 보이는
소속감과 일체감을 근대국가의 특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정치적 공동체’를 전근
대 국가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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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투명하게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전근대 시기 지식인층이 정치공동체로서의 國을 어떻게 생각
하고 표상했는가를 검토하기 위해서 어디서 출발할 수 있을까? 본고는 당시 國과 혼용되고 경쟁하
던 범주들을 제시하고, 그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國에 대한 표상을 읽어내는 방법을 취하려고 한다.
일련의 경쟁 범주들은『대학』의 팔조목 중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는‘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네
조목에 근거해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곧 王, 家, 天下를 각각 참조항으로 삼아 國과 교차시켜 설
명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잉여와 결핍을 해석하는 것을 통해 오늘날과 질적으로 다른
國에 대한 표상을 검토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다. 4)
『대학』이 帝王學과 經世論의 기본이 되는 필독서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학』의 체제는
身->家->國->天下로 확장되어가는 영역에서의 행위 규범을 설명하되, 각각의 영역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 전제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즉 이 공간에서는 王이든 國이든 家든 天下든 어느 것
도 절대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전근대 정치공동체로서의 國은 근대 국민국가만큼 강력
한 잠식력과 포획능력을 갖지 못했고, 여러 공동체 범주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즉 修身에서
平天下의 단계는 원환적으로 연결되었으며, 그 중 특정 단계가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지 않았다. 본
고에서는 병자호란과 중화질서의 변동이라는 17세기 전반기의 변동을 고려하여 천하를 참조점으로
삼아 國에 대한 표상을 살피고자 한다.


Ⅱ. 천하질서의 두 모습: 문명과 제국


1. 문명의 위계와 모방을 향한 경쟁
“나를 알아줄 분도 오직 주자이고 나를 죄줄 분도 오직 주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송대의 성리학
자 주희(1130~1200)를 흠모한 송시열(1607~1689) 􀘳 주희(朱熹, 1130~1200)를 흠모한 송
시열(宋時􃓥, 1607~1689)은 1669년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를 종묘에 들일 것을 청하는
차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大倫을 밝히고 大法을 세우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대륜이란 父子ㆍ君臣
ㆍ夫婦이고, 대법이란 부자ㆍ군신ㆍ부부 사이에 親ㆍ義ㆍ別을 행하는 것이니, 이 세 가지에 밝지 못한


4) 이들을‘國계열체’로 명명하고 상호 비교를 시도한 작업으로는 손애리, “17세기 조선 관료지식층의‘國’관념
연구 -‘國계열체’를 중심으로 한 역사사회학적 접근-,”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 논문(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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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하나라도 있고, 세 가지 사이에 행하는 것이 하나라도 극진하지 못함이 있으면 중국은 오랑캐가
되고 인류는 禽獸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자신을 닦거나 사람을 가르치는 데 이것을 앞세우지 않
음이 없었습니다.5)
중국이란 바로 三綱으로 대변되는‘文’의 근원지이자 수호자이다. 중국의 반대말은 오랑캐이고
금수이다. 일찍이 공자가 주나라 문왕으로부터 이어받고 지키고자 했던 이‘文’6)은 동물과 구별되
는 인간의 무늬로서의‘人文’이나 특정 공동체에 고유한 생활 관념과 습속의 총체로서의‘문화
culture’의 차원이라기보다, “고대의 모범과 자연적 질서의 명백한 이치”에 기초한 배타적이고 우
월적인 차원의‘문명civilization’의 양상을 띠었다.7) 그리고 이와 같은 문명 차원의 文은 가치개념
을 내재하여, 그 文을 수용하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에 위계를 설정하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중화지역의 왕조 또한 文의 세례를 받지 않은 이민족 왕조에 의해 들어섰다면‘주∙한∙당∙송∙
명’이라는‘중국’계보에 끼일 수 없었다. 자연 지리적 구분과 상관없이 文의 수용여부에 따라 중국
과 오랑캐 곧 華夷가 구분된다는 사실은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의 나라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대외적으로는 文의 적극적 수용 덕택으로 제국의‘안보 레짐’속에 들어갈 수 있었
다.8) 대내적으로는 오랑캐로부터‘斯文’을 지켜내는 것을 國是로 삼는 國의 이념을 주조할 수 있었
다. 조선의 정통성 또한 중국으로부터 文의 혜택을 입는 계기를 통해 설정되었다.
殷師[은나라 太師기자]가 동쪽으로 오면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皇極의 도를 들을 수 있었고 고
려 말엽에 정몽주가 탄생하여 중국의 학문을 가져와 우리나라를 교화하여 대의가 밝아졌으며, 우리 태
조대왕에 이르러서는 더욱 尊周의 義를 주창하여 溫땅의 보리와 낙양의 벼도 오히려 감히 가까이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오랑캐가 됨을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9)


5)『 송자대전』(13) 疏箚,「 神德王后의 廟를 청하는 차자」.
6)“ 공자가 광 땅에 포위당했을 때 말했다.‘ 주나라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문화는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늘
이 장차 이 문화를 없애려 한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이 문화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려 하
지 않는다면,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子畏於匡曰, 文王旣沒, 文􂸝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
者􂸝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余何.)”『􂗳語』「子貢」.
7) Peter Bol, This Culture of Ours: Intellectual Transitions in T’ang and Sung China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2),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서울: 북스토리, 2008), p.22
8)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파주: 한길사, 2010), pp.168~176.
9)『 숙종실록』13년 2월 4일, 두 번째 기사. 송시열이 숙종에게 올린 상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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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자가 황극의 도를 전수해 주었고, 고려 말 정몽주가 송
대의 성리학을 도입하여 교화의 깊이와 폭이 넓어졌으며, 태조 이성계가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건국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이다. 文과 오랑캐 혹은‘문명’과‘야만’의 이원화된 코드의 한 축으로
관념화된 중국은 이 구도가 재생산되는 동안은 계속 외부의 가치로 주입될 수밖에 없다.10) 문명-야
만의 이 구도는 서양이라는 제3의 변수가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7세기 조선이라는‘변방’의 지식인층이 자의식과 정당성, 자존감 같은 것을 드러낼 수 있는 방
법은 자국의 독자성을 표출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었다. ‘중국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곧
주∙한∙당∙송으로 이어지는 정통의 문화와 제도를 얼마나 잘 숙지하고 모방할 수 있느냐에 있었
다.11) 특정 師門에서 학습한 士계층은 관직에 진출하여 조선을‘주∙한∙당∙송’의 모습으로 만들
어 가는 것을 자신들의‘소명’으로 삼았다.12) 당송은 모방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합법성과 정당성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주∙한∙당∙송’혹은‘당∙송’이라는 말은 논쟁에서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부여하는 언표였다. 그것은 역사의 표준이며, 현실의 전범이었다. 곧“당∙송의 故事에는~”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말에 역사적 근거를 부여해 주었으며, “당∙송의 諸儒는~”이라는 전거는 말하는 이
에게 현실적 우위를 가져다주었다.
양 차례의 전란을 겪고서 國의 재건을 모색하던 17세기에 지식인층을 사로잡은 것은 고대국가적
질서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은 古典과 古代에 대한 학문적 관심 속에서 재건해야 할 國의 상을 모색
하였다. 주나라의 제도와 예법을 기록한 경전인『주례』는 윤휴(尹, 1617~1680)와 허목(許穆,
1595~1682), 유형원(柳馨遠, 1622~1673) 등에 의해 연구되었고, 漢代의 정현의 주를 첨부한
『서경』또한 윤휴와 박세당(朴世堂, 1629~1703)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도되었다. 또한『자
치통감(강목)』이 편찬되어 지식인층의 필독서가 되면서 당송고사는 지식인층이 자기 논변의 정당
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10) 물론 문화수용의 차원에서 보면 성리학적인 세계관이 조선에 도입되었을 때에는 조선적인 성리학으로 내재화되
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中國=文=文明이라는 논리에서 보면, 문명은 華-夷라는 위계적 질서를 갖는
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외부적으로 주입되는 가치로 간주하였다.
11) 이러한 모방의 노력은 자국에 대한 폄하나 비하의 태도와 무관하다. 국가적 차원에서든 개인적 차원에서든 독자
성과 개성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12) 17, 18세기 조선 지식인층의 자의식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 중의 하나가 소중화주의이다. 조선이 비록 땅이 작
고 인구가 적다고 하더라도 중화의 본질을 체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화라는 자부심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소
중화주의는 본고가 다루는‘모방’과‘적합’에 상충되는 것일까? 모방과 적합은 존재론적 결핍 혹은 자의식 과잉
의 상태에서 선택하는 전략이라면, 소중화주의는 자신감과 자존감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상충적이다. 다른 한편,
모방과 적합을 향한 노력의 최대치는 이미 모방 대상물이 되어 버려 더 이상 모방할 대상이 사라져 버린 경지라
는 점에서 소중화주의는 모방과 적합 전략의 연장선이자 귀결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0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조선의 지식인층은 왜 그렇게 주∙한∙당∙송의 고사와 전거에 의존했을까. 기본적으로 자기 공
동체를 내부로부터 설명하고 대상화하는 능력의 부재 때문이다. 이것을 무능함이라고 해서는 안 된
다. 그것은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자기보존과 과시가 가능한 극소수의 공동체만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주변국인 조선이 자국 존재의 근거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런 능력을 가진 공동체에 대한 모방을 통해서이다. 모방을 향한 경쟁은 건국 세력들과 이후 신유학
자들 사이에 자기집단의 우위를 확보하는 경쟁이기도 했다.13)
이런 현상은 17세기에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지 17세기 전후에 비롯된 현상은 아니
다. 그 기원은 조선의 건국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조선의 건국 주체들은 주희가 열어놓
은 신유학의 텍스트를 통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였다. 주∙한∙당∙송으로 이어지는 도
통의 체계를 확립한 송대 신유학의 텍스트들은 고전에 주를 달고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고대 세계
의 텍스트에 접근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古制’는 요∙순∙우∙탕∙문∙무라는 고대 성왕들에 의
해 만들어진 이미 검증된 제도이므로, 그 시대를 모방, 복원하는 것은 치자와 지식관료들의 최고의
목표로 설정되었다.
실제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구상한『조선경국전』은『주례』의 􃡧典을 기초로 삼아 유
교적 이상국가를 성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정치이념과 정치제도를 제시하였다. 『주례』는 주나라의
정치제도와 예법 담은 텍스트로서, 漢代이후 출현한 國들의 정치∙경제제도의 원형으로 기능했다.
저자와 저작시기 등『주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과 무관하게『주례』는 중국에서 官制를 수립할
때마다 주요한 참고자료였을 뿐 아니라, 역사상 여러 차례 있었던 변법운동의 근거였다.14) 정도전
의 장기적이고 집요한 國의 구상은 정쟁에 의해 좌절되고 이후 그는 조선시대 내내 폄하되었지만,
그가 주례를 모방해 설계한『조선경국전』체제는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다.15)


13) 물론 건국 당시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식관료들이 송대의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여 세계를 주조하였다고
해서‘조선적인 것’의 기원과 원형을‘중국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수용과
전파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발신자와 수용자 사이에는 엄연한 시공간적 차이가 존재하며 어떤 수용자든지 자신
들의 맥락 속에서 수용된 문화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실천한다. 한편 계승범은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이 중국
문명과 古制에 집착한 이유를‘권위의 원천’이라는 코드로 설명하고 있다. 계승범, “한국의 유교화와 17세기,”
『한국사학사학보』20(2009), pp. 191-192.
1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한국 중세의 정치사상과 주례』(서울: 혜안, 2005), pp. 6-7.
15) 정도전의 시도가 國의 제도 차원의 모방이었다면, 『가례』의 도입은 일반 사대부가 차원에서의 모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명과 제국 사이 51


2. 제국의 유형과 적합의 구도
천하는 사전적 의미로는‘普天之下’곧‘큰 하늘 아래’를 의미한다. 天이 세계질서의 근원 같은
것이라면, 천하는 그 질서에 의해 보편적으로 지배되어야 할 공간이다. 천하관은 상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인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다.16) 시황제에 의한 천하통일은 각지에 존재하던
많은 國을 秦이라는 하나의 國이 병합하는 제국의 형태를 취했다. 진이 추구한 군현제는 國이면서
동시에 천하=제국을 통치하는 형식이었다. 漢代에는 중국의 외부 곧 夷狄또한 하나의 國으로 간
주하고, 천자와의 사이에 군신관계를 설정하는‘책봉체제’가 출현했다. 唐전성기에는 황제가 천하
를 지배한다는 발상이 더욱 공고해졌다. 宋代에는 오랑캐인 遼와 􂑿이 의제적 혈연관계를 요구하며
이들도 중국=천하의 지배자라는 입장을 취하고 송과 마찬가지로 외연에 책봉관계에 있는 나라들
을 거느림으로써 천하는 양분되었다.
秦漢의 이념에 가까운 천하, 곧 하나의 國이면서 주변국들의 통일체라는 천하=제국의 의미가 다
시 회복되는 것은 明의 건국부터이다. 무엇보다도 명대 이후부터 중국적인 세계관이 명시적인 형태
로 대외적으로 선전되고 체계화되었다. 명을 대체한 淸은 정통 중국이 아니라는 점에서 천하의 보
편 질서로 상정되기가 쉽지 않았지만, 명을 대체하여‘중국’지역을 다스리며 그 어떤 때보다 번성
한 제국을 건설하였다.17)
중화사상에 근간을 둔 페어뱅크(John K. Fairbank)와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의‘조공-책
봉체제론’은 17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으로 오랫동안 학계를 지배해왔다. 근
래에는 이들의 패러다임을 극복하려는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교역에 초점을 맞춘 하마시타 다케시
(濱下武志)의‘조공시스템’이론이나, 조공-책봉체제를 동아시아 일반에 적용하는 것의 곤란함을
잘 보여준 이와이 시게키(岩井茂樹)와 후마 스스무(夫馬進)의 연구, 무엇보다 청제국의 성공요인을
적극적인 한화에서 찾는 기존 연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新淸史연구 등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
하는 대표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18)


16) 현실의 지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세계상을 표현하는‘천하’개념은 그것과 더불어 그것을 다스리는 존재인‘천
자’, 그리고 천자가 하늘로부터 받는 命인‘天命’도 성립시켰다. 이하의 내용은 溝口雄三外編, 『중국사상문화
사전』(민족문화문고, 2003), pp. 277-278, pp. 286-287.
17) 본고에서는 세계상의 질서를 의미하는 천하 개념이 현실의 중국문명 특히 17세기에는 명과 청이라는 제국으로
표상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천하=문명=제국을 통약 가능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18) 이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패러다임에 대한 최근의 소개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 계승범,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이익주 편,『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동북아역사재단, 2010); 구범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같은 책; 김한규,『 천하국가』(서울: 소나무, 2005).
52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이하에서는 명제국과 청제국이 갖는 차별성과 더불어 천하제국이라는 현실의 장이 갖는 강제성에
주목하면서, 이를 잘 드러내는 주는 것으로 판단되는 王柯의 제국구조의 틀을 통해 논의를 전개해
고자 한다. 王柯는 역사상의 중화제국을‘다중형’과‘다원형’으로 분류하였다.19) 먼저 다중적 제국
구조는 한인지배자에 의한 중화왕조로서‘일원적 천하’,‘ 삼중적 구조’,‘ 주변의 四夷’라는 세 가지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그림1). 다원적 제국구조는 이민족에 의한 중화왕조 곧‘四夷’에서 일어나고
후에‘중국’에 들어온 정복왕조가 세운 것으로서, 자신을 정통의 중화왕조라고 주장하면서도 민족
적 성격을 버리지 않고‘중화’이외에 정치적 자원으로서 순수한‘민족’의 근거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림2).
<그림1> 다중적 제국구조 (명) <그림2> 다원적 제국의 지역구조 (청)
􀓋사회문화 측면:
1.중화문화지역, 2/3.이문화지역
􀓋통치형태 측면:
1.직접지배통치지역 2.간접통치지역 3.조공지역
􀓋주권 측면:
1/2.주권영역 3.종주권영역
다중형 제국구조에서 中華와 四夷는 상대적이며, 문명공동체의 기준과 정치공동체의 기준이 반드
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고대 이래로 문화적인 것과 정치적 것이 긴밀히 연관되어 왔고 정
19) 王柯,“ 帝國と民族,”山本有造(編),『 帝國の硏究』(名古屋出版會, 2003), p. 203.
문명과 제국 사이 53


치구조의 이해를 위해서는 문화적인 것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지만 양자가 중화제국 영역 내에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위 <그림1>에서 보면 제3지대가 四夷인데, 이때는 제1지대와 제2지대가 中國이 된다. 그러나 제
1지대와 제2지대만을 보면, 제2지대가 四夷가 되며, 제1지대가 中國이 된다. 중화제국은 제1지대
와 제2지대에 대해 주권을 갖지만, 제3지대에 있는 屬國에 대해서는 종주권을 갖는다. 제1지대가
중화문명 지대와 왕조의 직접통치 영역인 것에 대해, 제2지대는 중화문명이 통용되지 않는 이민족
지대이다. 그러나 이민족지대라고 해서 제3지대와 같을 수는 없다. 제2지대는 중화의 문명과 문화
를 공유할 수 있다.20)
세 지대 중의 한 곳에 조선의 위치를 부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제2지대는 소중화라는 점에서는
맞지만 내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거부된다. 제3지대는 조공과 종주권 영역이라는 점에서는 맞지만,
四夷의 지역이라는 점에서 거부된다. 즉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는 중화와 이문화 사이에 있으며, 통
치형태 측면에서는 조공지역, 주권측면에서는 종주권 영역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국의 시선
으로는 조선의 위치를 설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제국 안에서의 조선이 갖는 위
상과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역사상∙현실상의 중화에 대해 단순한 모방만이 아니라 시의적절한‘적합’의
구조에 관심을 가져야 했던 이유는 이처럼 제2지대와 제3지대 사이에서 동요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
문이다. 제3지대는 이문화 지역이라서 조선의 영역이 아닌 것 같지만, 제3지대의 특성인 조공과 중
국종주권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이 제3지대에 속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다른
한편 제2지대는 중국이 주권을 갖는 중국의 간접통치지역이지만, 소중화의 문명권에 해당하므로 조
선은 제2지대에 편입될 필요가 있었다. 곧 제국의 직접통치로부터의 자율성(=제3지대)과 문명권
으로의 편입(=제2지대)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양자를 오가면서 생존에 가장
적합한 상태를 취하고자 했다. 조선이 건국과 함께 武를 포기하고 文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건설하
면서 자국을 文弱과 事大義理의 나라로 만들어나간 것은 명의 건설과 함께 다중형 제국으로 변모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명 전후의 원과 청은 지역과 민족의 독자성을 인정하여 설립된 다원형 제국이었다. 다원형 중화
제국의 경우에는 제국의 주권영역이 중화와 민족이라는 2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국의 주
권영역이 주변 민족지역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문명의 확장으로는 불가능했고 무력의 개입을 통해
서만 가능했다. 명∙청제국의 변동기에 조선의 지식관료층은 건국세력들이 원∙명교체기에 변화하


20) 王柯(2003), 앞의 글, (2003), p.201.
54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는 제국구조의 변모를 살피고 그에 적합한 구조를 찾았던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역사상의 다원형 제국구조는 그 정치지배 메카니즘에 의해, 다중형으로 이행하는 경향이 있었
다.21) 동심원적 다중형 제국구조 안에 자의든 타의든 포획되어 있는 나라들은 그에 적합한 태도를
취해야 했다. 잠시 무력의 복수를 꿈꾸던 조선은 다중형 제국으로 변모해가는 청의 군사적 위력과
문명적 파급력에 복속하게 되고 결국 그에 적합한 태도를 찾게 된다. 원명교체기에 취해진 文弱의
태도는 곧장 변환이 가능했지만 의리의 문제는 짧은 기간에 전환되기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이 글의
범위는 아니지만 18세기 등장한 북학파의 태도는 다중형 제국구조에 적합한 형태를 찾아가는 한 경
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천하질서의 변동과 병자호란 전후
16세기 말부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여진족의 누르하치(1559~1626)는 1616년 명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후금을 세우고 명에 대해 노골적으로 공격적 태도를 드러냈다. 명은 조선에게 원
군을 청하여 금을 공격하지만 1619년 사르허(深河) 전투에서 완패하였다. 누르하치에 이어 제2대
칸이 된 홍타이지(1592~1643)는 중원지배의 기초를 닦았으며, 명을 공격하기 전에 조선과 몽고
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은 이미 사르허 전투에서도 명을 도와 군대를 파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위험요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조선의 지원을 받아 철산 앞 바다의 가도에 군영을 개
설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 1576~1629) 세력을 정벌할 필요가 있었다. 1627년 후금 군대
는 3만여 명의 팔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했다. 평양이 함락되자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인조는 사신을 보내 정묘강화조약을 체결한다.22)
후금은 조선 정벌에 이어 몽고 정벌까지 나서며 더욱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1635년에는 원의 傳
國玉璽를 입수하면서 만∙몽∙한을 아우르는 다민족 제국으로의 발전을 추진해갔다. 1636년 홍타
이지는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국호도 금에서 대청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후금은 만주족 뿐 아니
라 다른 민족들로부터 추대 형식을 취하기를 원했고 조선도 여기에 가담해 주기를 요구했다.23)
1636년 2월에 후금과 몽고의 사신이 국상을 핑계로 황제 추대문제를 의논하러 왔지만, 조선 내 분


21) 王柯(2003), 앞의 글, p. 202.
22) 임계순,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서울: 신서원, 2001), pp.58-59
23) 김용흠,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서울: 혜안, 2006), p.229.
24)『 인조실록』14년 2월 21일. 14년 2월 24일-25일. 나덕한 등이 춘신사로 청에 파견되어 용골대가 조문을 온 것
에 대한 감사와 접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해명을 하였다. 이때 마침 황제즉위식이 거행되어 어쩔 수 없
문명과 제국 사이 55


위기는 이들을 국문에 들이지 말고 국서를 불태우며 심지어 효수하라는 상소가 연이었다.24) 결국
이들은 인조를 접견하지 못한 채 떠나야 했으며, 조야는 강경한 척화론이 팽배했다.
결국 그해 12월에 청나라 태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인조와 조정 대신
들은 강화도로 옮겨갈 사이도 없어 남한산성에서 항전태세를 갖추었으나, 1637년 정월 청 태종이
국서에서 제시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을 끝냈다. ‘兄弟之交’를 확인한
것으로 끝난 정묘호란과 달리, 그 사이 국호를 大淸으로 바꾸고 황제에 오른 태종의 변화에 따라,
병자호란의 국서는‘君臣之交’를 요구하고 있었다. 패전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25)
􀓋명나라가 준 誥命과 冊印을 헌납할 것.
􀓋명나라와의 수호를 끊을 것.
􀓋명나라의 연호를 버릴 것.
􀓋일체의 공문서에 청의 正朔을 받들 것.
􀓋인조의 장자 및 다른 한 아들을 인질로 삼고, 대신들은 아들 혹은 동생을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나라를 정벌할 때 보병∙기병∙수군을 보낼 것.
􀓋가도를 공격할 때, 배 50척과 수병과 포병, 활병을 준비할 것.
􀓋聖節∙正朝∙冬至∙中宮千秋∙太子千秋및 慶吊때 예를 올리고 表文을 받들 것. 이들 예를 행
함에 명나라의 구례와 다름이 없도록 할 것.
􀓋조선인 포로가 도망해 오면 체포해 보내야 하지만, 속환은 허락함.
􀓋내외의 신하들이 혼인을 맺어 和好를 굳게 할 것.
􀓋新舊의 성벽을 수리하거나 신축하지 말 것.
􀓋조선에 있는 본국인은 모두 쇄환 할 것.
􀓋일본과의 무역은 허락하나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할 것.
이처럼 요동을 차지한 후금의 부흥, 명의 쇠퇴와 몰락, 정묘∙병자호란의 발발, 청의 건국 등 짧
은 시기동안 몰아친 중화지역 판도의 변화는 조선의 지식관료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갈등을 불
러일으켰다. 이하에서는 연호와 파병 문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제국질서


24) 이 참석하고 돌아오자, 그 의식에 참여했으면서도 자결하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고 하여 이들을 효시할 것을 삼
사와 유생들이 연이어 상소하였다. 이에 이들은 3년간 유배에 처해졌다.
25) 이하의 내용은『인조실록』15년 1월 28일 네 번째 기사에 나온 내용을 정리한 것임.
26) 파병문제에 대한 최근연구로는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서울: 푸른역사, 2009)를 참고할 것.
56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의 균열 과정에서 나타난 조선의 지식관료층의 분위기를 개략하도록 하겠다.26)
조선은 정묘호란(1627) 이후에도 명의 연호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청의 건국과 함께 청이 숭덕
의 연호를 요구하면서, 연호사용은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조정 내 공문서는 명의 연호를 사용
해도 외부에 알려질 위험이 적었지만, 관상감의 􃒭書는 청에게 보고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
다. 이에 예조는 임진년 이전의 예를 따라 중국 연호를 쓰지 말고‘某年􃒭書’라고 쓸 것을 제안하
고 인조도 이를 따랐다.27) 병자호란 후 맹서에 따라 조정은 청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지만, 지방
관료들의 합의를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南의 감사들이 이를 쓰지 않는 것에 대해 인조와 조정대
신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28)
민간에서 청 연호를 거부하는 분위기는 병자호란 몇 년 후까지도 지속되었다. “광주목사 송국택
과 전라병사 황즙이 탄일 진하 전문에 청국의 연호를 쓰지 않아서 상이 파직을 명하였다”는 기록이
인조 19년(1641)에 보인다.29) 명이 완전히 망한 인조 23년(1645)에는 일본에 보내는 書契를 비
롯해 서식을 고쳐 써야 할 필요가 생겼고 더구나 곧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돌아오는 것을 이
유로 청나라 연호를 쓰기로 결정했다.30)
청의 건국과 병자호란의 패전, 그리고 명에 대한 청의 총공격이 이어지면서, 조선은 임진왜란에
서 자신들을 위해 싸워주었던 명을 치기 위해 助兵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조병문제는 병자호
란의 항복문서에도 쓰여 있었고 청이 절실히 요구하는 현실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조선이 이 문제를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이는‘연호’문제보다 훨씬 민감하고 중대한 사안이었다. 검열 신면(申冕,
1607~1652)은“신종황제가 재조해준 國으로서 신종황제가 살려준 백성을 몰아”라는 자극적 표현
을 쓰면서 차마 조병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이미 미봉책이 없으니, 마땅히 대의로 재량하여‘義’자 한 자를 성취할 수 있다면 國
이 비록 전복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천지에 죄는 짓지 않습니다. 어떻게 차마 신종 황제가 재조한 國으
로서 신종 황제가 살려준 백성을 몰아 강을 건너가게 하겠습니까. 지금 만약 우리나라의 사세로 말을
잘 만들고 대신들은 온 나라 신민들의 정상으로써 신포서(申包胥)의 통곡을 본받으면 성의가 이르는
바에 금석이라도 깨뜨릴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도모하지 않고 갑자기 조병하는 거사를 행한다면 전
하께서 장차 무엇으로 국민을 가르치며 천하 후세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31)


27)『 인조실록』15년 5월 25일, 두 번째 기사.
28)『 인조실록』15년 10월 12일, 세 번째 기사.
29)『 인조실록』19년 11월 7일, 첫 번째 기사.
30)『 인조실록』23년 3월 9일, 첫 번째 기사.
31)『 인조실록』16년 8월 1일, 여섯 번째 기사.
문명과 제국 사이 57


물론 조정 원로대신인 우의정 신경진(申景, 1575~1643)은“어찌 필부의 절개를 따를 수 있
겠느냐”며 정세상 어찌 할 수 없음을 호소하기도 하였다.32) 파병논의는 조정대신만의 문제가 아니
라 민간의 유생들에게도 대명의리의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병논의가 조정에서 전개되
자 관학유학생 수십 명은“신종 황제가 재조해준 은혜를 생각하고 조종이 명나라를 섬긴 의리를 생
각하여 빨리 조병의 의논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33)를 올리면서 조병과 관련한 문제로 조선
은 뒤숭숭한 상황에 처한다.
결국 파병을 하지만 거의 고의적으로 조병시기를 늦추어 군사들이 기한내 당도하지 못하는 상황
을 연출한다. 이에 인조는“명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으니, [그 책임을 물어 청으로부터] 지금
비록 은을 추징당하더라도 또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34)라며,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더라
도 명을 치는데 조병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을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조선의 지식관료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 준 것은 청을 방문한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면서이다.


Ⅳ. 모방과 적합 사이
17세기 중화질서 변동기에 조선의 지식관료층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문명은 제국의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모든 제국이 문명의 옷을 걸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중화문명으로서의 명제국과
달리, 새롭게 등장한 청제국은 문명의 요소가 생략되어 있었다. 이는 문명을 향한 모방과 제국질서
의 적합을 통해 천하=중화제국과 관계를 유지해 오던 조선이 모방과 적합의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관료들은 중화질서의 중심부와 자국의 거리감을 확인하
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국에 대한 표상을 드러내었다. 중화적 천하질서에 내재하면서 동
시에 외재하는 조선의 위상은 이 시기 모방과 적합의 스펙트럼을 오가면서 끊임없이 이중성을 표출
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방은 문명을 수용하는 전략이고, (최)적합은 제국에 대응하는 태도이다. 문
명에 대해서는 모방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모방하느냐의 문제로 드러난다. 즉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모방은 기정사실이다. 제국에 대해서는 최적합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제
국의 변동 시기에는 적합과 비적합이라는 근본적인 대립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하에서는 주화-척화


32)『 인조실록』16년(1638) 8월 1일, 일곱 번째 기사.
33)『 인조실록』16년 8월 9일, 두 번째 기사.
34)『 인조실록』16년 11월 6일, 두 번째 기사.
58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론의 대립이 단지 전쟁이라는 긴급한 상황에서 벌어진 현실적 타협과 이념적 비타협이라는 시각을
넘어서 문명과 제국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이 표현된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사안을 가지고 주화론과 척화론의 주장들을 살펴보면서 각 주장이 문명의 모
방과 제국의 적합 차원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세 가지 사안은 첫째 명과의
관계설정 및 명에 대한 태도이다. 둘째, 의리의 문제에 대해서이다. 셋째, 華夷의 변동가능성에 대
한 태도이다. 이상의 논의를 짚어보는 가운데 이것이 모방과 적합 전략의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검
토하고 이를 통해 國에 대한 표상을 끄집어 낼 것이다.


1. 적극적 모방과 제국변동에 비적합
조선이 명에 대해 갖는 감각은 주한당송의 계보를 이은 중국이라는 것과 함께 조선을 멸망의 위
기에서 구해준 은인이라는 것이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은 효종에게 명나라 왕실에 밀사
를 파견할 것을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조정이 3백 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왔으니, 그 정이나 의리는 참으로 말할 겨를도 없습니다. 우
리나라의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신종황제의 은혜는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또한 전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선조 대왕께서 이른바‘의리로 보면 임금과 신하이고, 은혜로 보면 아비와
자식 사이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실로 참되고 간절한 말씀입니다.35)
심지어 임진왜란 때 살아남은 것에 대해 명에게 갖는 감사의 마음은 수사의 차원이라고 할지라도
“풀 한 포기, 백성 머리털 하나도 황은을 입은 것”이라고 표현되었다.36) 조선은 임진왜란 때 거의
망국의 지경에 이르렀지만 신종황제의 출병으로 살아남았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35)『 효종실록』8년 10월 25일, 첫 번째 기사.
36)『 송자대전』(5) 封事,「 己丑封事」. 발화된 언표들이 모두‘진심’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명을‘부모
의 나라’라고 상찬한다는 것이 정말로 부모처럼 받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효종대에 북벌을 주장
하던 다수의 서인들이 실제로 북벌을 도모하고 꿈꾸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북벌이 가능해질까
봐 두려워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공간에서 발화된 언표들은 발화자들의‘진심’과 무관하게 존경과 비난의 기
능을 수행하며 현실에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가 가능하다거나 전쟁 후에 북벌이 가능
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척화와 북벌이라는 언표는 의리와 소중화라는 언표와 겹쳐지며 다른 언표들보다 우위
를 점하게 된다. 이에 대해 조선사회가 대의명분 사회였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조선 뿐 아니
라 현대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문명과 제국 사이 59


당시에는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모두들, “나의 피와 살이 누가 내려 준 피와 살인가”하면서 모
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더구나 우리 선묘의 충심으로서 황
제의 은덕에 감사해하여 보답할 방도를 생각한 것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명나라가 있는 서쪽을
등지고 앉으신 적이 없었고‘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서 사모하는 정성을 나타내셨습니
다.37)
조선이 명을 섬기는 것은 단지 은혜의 차원만이 아니라, 군신의 의리에 기반한 것이었다. 소국은
事大하고 대국은 字小하는 것이 유교적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국제관계의 기본 룰이지만, 대국이 힘
을 잃었다고 해서 곧장 다른 대국을 섬기는 것은 잘못이다. 대국을 섬긴 것은 그들의 힘만이 아니라
그들의 힘에서 나온 德을 섬긴 것이며, 그 덕이란 힘의 소진에 따라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명과 조선을 부자관계와 군신관계로 간주하며 은혜와 의리에 호소하는 태도는
명∙청제국 전환기에 조선이 제국에 대해 갖는 적합의 구도를 고민하는데 있어 취약함을 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國과 의리의 문제를 보자.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을 도와 명나라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대표적인 척화론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國의 존망과 의리의 문제를 대비시
킨다. 사람이 죽고 國이 망하는 것은 인지상정의 일인데, 그 자연스러운 일을 인위적으로 막기 위해
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의리’를 지키지 않고 반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에 갇혀 있던 상황에서도 정온(鄭蘊, 1569~1641)은 설령 國을 보존할 수 있더라도 그것은“부녀
자와 소인의 충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國을 보존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며, 어차피 國은 망하
기 마련이므로 군신의 의리를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윤방(尹昉,
1563~1640)은“國이 망할지언정 의리상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38)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國이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
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
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
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오늘날
계획하는 자들이 예의는 족히 지킬 것이 못 된다고 하니 신은 예의로써 분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해만 가지고 논한다 하더라도 강포한 이웃의 일시적인 사나움만 두려워하고 천자의 六師를 두려워


37)『 송자대전』(19) 疏,「 論大義仍陳尹拯事疏」.
38)『 인조실록』5년 2월 5일, 세 번째 기사.
60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하지 않는다면 원대한 계책이 못 됩니다.39)
國은 망하기 마련이지만 國과 國사이의 의리는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의 감각으로는 받아
들이기 쉽지 않다. 그런데 상국에 의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도리상 지켜야
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곧 의리가 불이익으로, 배신이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김상헌은 事
大의 의리 덕분에 나라를 세우고 임진왜란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상국에 대한 의
리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그 보답이 예비 되어 있다. 문명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로부터 군신의 의
리를 다하도록 만들어진 제국의 위계구조는 앞서 말한 것처럼‘안보 레짐’의 기능을 수행했다. 의
리가 자발적으로 강제되는 또 다른 이유는 대내적 차원에서이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하여 2백 년의 공고한 基業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
왕께서는 지성으로 사대하여 임진왜란 때에 구원해 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만일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일을 한다면, 천하 후세의 의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
에 계신 선왕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들에게 國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40)
상국에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조정 관료들에게도 國에 의리를 지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
이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처럼 오랑캐와 교류하면서 명
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다면“반란을 생각하는 백성들이 그것을 구실로 삼을까 두려워”41)진다. 상국
에 대한 의리는 아래 단위의 충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신민 􀘳 왕 􀘳
황제’의 의리의 연쇄 구조를 상정할 수 있겠다. 이는 동심원으로 구조화된 세계이다. 일국의 왕이 제
국의 황제에 대해 갖는 의리는 일국의 신민이 왕에 대해 갖는 의리에 연동되는 구조에 들어가 있다.
조선의 국왕이 황제에 대해 편의적으로 태도를 바꾼다면, 조선의 신민들은 조선의 국왕에 대해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아진다.
제국에 대한 國의 의리는 중화질서를 유지하는 장치일 뿐 아니라 신민의 배신 가능성을 차단함으
로써 國이 안으로부터 붕괴되는 것을 막는다. 바깥을 향한 의리는 내부의 배신 가능성에 대한 두려
움에 의해 더욱 공고화되면서, 의리의 연쇄구조로 고착되어 유연성을 잃어버리고 변동에 능동적으
로 대처할 힘을 잃는다. 곧 국과 제국의 연속적 구조를 상정한 이들의 의리론은 제국의 변화에 최적


39)『 인조실록』17년 12월 26일, 첫 번째 기사. 김상헌의 상소.
40)『 인조실록』17년 12월 26일, 첫 번째 기사. 김상헌의 상소.
41)『 인조실록』14년 9월 22일, 첫 번째 기사.
문명과 제국 사이 61


합의 구도를 취하는데 취약한 모델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척화파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교리 조빈(趙贇, 1587~?)의 상소로부터 화이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자.
국가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 근본이 있습니다[國家之興, 必有其本]. 三代로 말하면 하나라가 일
어난 것은 水土를 다스린 데 근본하였고, 은나라가 일어난 것은 五敎를 널리 베푼 데 근본 하였으며,
주나라가 왕업을 일으킨 것은 실로 后稷과 公劉가 어렵게 농사지은 데서 근본 하였습니다.
우리 왕조가 왕업을 일으킨 것도 근본이 있습니다. 고려 말에 난신의 모략을 듣고서 명조의 洪武正
朔을 폐하고 北元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병기를 들어 반란하여 위화도에 진군하였으니, 당시의 생민의
화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성조께서 의리를 들어 회군하여 크게 동방 사민의 소망을 위로하였
으므로, 천심과 인심이 함께 돌아와 曆數가 자신에게 돌아왔고 寶命과 景福을 사양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마침내 억만년 무강한 왕업을 열었으니 저 고려가 망녕되게 군사를 일으킨 것은 마침 우리를 위
해 백성을 몰아준 것입니다. 이로부터 대대로 그 공을 지키어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上國의 협공책을
받들어 마침내 일부의 군사를 일으켜 李滿住를 주멸하여 義聲을 천하에 드날리고 큰 복이 國에 돌아오
게 하였습니다. 그러한즉 우리나라가 왕업을 일으킨 근본은 중국을 높이고 이적을 배척한 데 있지 않
겠습니까[然則我國興王之本, 其不在於尊中國, 攘夷狄乎]. 오직 이런 까닭으로 임진년 변란에 우리 선
왕께서 거듭 명조가 구제해 준 힘을 입어 위태롭던 國의 운명을 다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의리를 들어 회군하여 尊周의 의리를 밝힌 것은 우리나라가 왕업을 일으킨 근본
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손이 이 도리를 배반하면 반드시 천의와 민심을 거슬러서 國을 보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三綱을 부식하고 조종조의 업적을 거듭 빛내는 것이 전하가 왕업을 계승하는 근본입니다.
오늘날 혹시라도 이 도리를 배반하면 반드시 천의와 민심을 거슬러서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
다. 그런즉 천명의 거취와 민심이 이합하는 기미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42)
역사상 수많은 國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國이 일어나는 데에는 반드시 근본이 있다는 것이
다. 하∙은∙주의 경우는 각각 治水와 五敎, 농업이며 조선의 경우는 바로‘尊中國, 攘夷狄’의 의리
이다. 곧 중국 고대 문명을 향한 경외와 모방 동시에 문명에 반하는 오랑캐에 대한 배척이 바로 조
선의 이념이라는 것이다. 조선이 존속하는 한 華와 夷에 대한 입장은 바뀔 수 없으며, 양자의 경계
가 모호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문명에 대한 강한 존숭과 이적에 대한 거부감은 새로운
제국질서에 적합한 구도를 취하는데 경직된 자세를 갖게 하였다.


42)『 인조실록』14년 9월 22일, 첫 번째 기사.
62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2. 소극적 모방과 제국변동에 적합
척화파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명나라의 은혜와 임란 때의 원조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과
달리,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조선의 자발적 노력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우리 동방이 비록 명나라에 신하 예를 행하고 만력황제[신종]의 은덕을 많이 입기는 했으나, 그 내
력을 궁구하여 보면 우리 태조 대왕은 창업한 성군으로서 천시를 헤아리시어 명나라에 귀순해 복종하
신 것으로, 이는 해외에서 執贄[조공]하는 藩臣이요, 진실로 본토 안에 봉지를 베어 받은 친신이 아니
다. 신종황제가 임진년에 베푼 은혜는 가히 잊을 수 없지만 태조가 창업한 신령스런 터전 또한 차마
망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의리이다. 또 해동 사람은 이미 해동의 신하이니,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
지 않는 길이 옳은가, 아니면 명나라를 위하여 우리 임금에게 권하여 우리나라를 망하도록 함이 옳은
가.43)
조선은 안에서 봉토를 받은 내복의 신하가 아니라 밖에서 조공하는 번신이라는 사실을 특기하고
있다. “옛날부터 外服의 제후로서 상국을 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의리에 죽은 경우가 어디에 있느
냐”44)라는 반문도 가능하다. 외복제후가 천자를 위해 죽는 일이 없다면, 조선의 신하는 중국황제가
아니라 조선의 군부를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으로 이어진다. <춘추>의 의리를 상고하더라도 각
기 제 임금을 위할 뿐이다.45) 이로부터 조선의 군주를 지키기 위해 오랑캐와 화의하는 것이 의리에
위배된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우리는 이 조선의 신하이므로, 나의 군부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 조정만 위하는 것은 越津의
혐의가 있습니다. 만력 황제가 재조시켜 준 은덕은 아국의 군신 가운데 누가 감격하여 추대하지 않겠
습니까. 다만 아국이 생사의 위기에 즈음하여 어찌 옛날에 재조시켜 준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가야 합니까. 조선을 위하는 신하로서는 반드시 명을 위하여 아국을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리로서 당당하여 실로 성현의 교훈에도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정 두 선생은 도리어
이 의리에 어두워 나라를 보전한 후에 다만 청론만 숭상하고 있으니, 의리 면에서 중도를 지키는 것은
과연 어렵습니다.46)


43)『 지천선생집 속집』(4) 書信,「 答仲弟參判惠吉書二書」정축년.
44)『 인조실록』15년 1월 20일, 두 번째 기사. 김류의 말.
45)『 지천선생집 속집』(1) 書札,「 答􃤚延陽敦詩詩白書」.
46)『 지천선생집 속집』(1) 書札,「 答張谿谷持國維書八書」.
문명과 제국 사이 63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동안 김상헌은 주화론자들이“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강구
하고 있다고 주화론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최명길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范와 大夫種이 자기
임금을 위하여 원수인 적에게 화친하기를 빌었던 일을 언급하며, “국가가 보존된 뒤에야 바야흐로
와신상담도 할 수 있[國家保存然後, 方可爲臥薪嘗膽之地矣]”47)기 때문이라고 응수하였다. 또한 중
국 五代시기 後晉의 桑維翰과 景延廣이 거란에 대해 취한 논의를 언급하면서, 척화건 주화건 나라
가 망하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강조하였다.48) 남한산성에서 인조에게 조언을 하는 과정에서도 그
는“인군과 필부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어떻게든 보존될 수만 있다면 최후의 방법이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다”49)라고 주장하였다.
화친을 주장하느냐 척화를 주장하느냐는 최명길에게 관건이 아니다. “예전에는 화친을 주장해 나
라를 망하게 한 자가 있었는데, 이제는 화친을 배척하여 나라를 그르치게 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
다. ‘大義’또한 언제나 지지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대의”도 있지만“나라의 존
망을 헤아리지 않는 대의”도 있기 때문이다.50) 앞서 척화론자들이 강조한 의리는 이들에게는‘필부
의 의리’로 폄하된다. 필부에게는‘사사로운’의리가 중요하지만 國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
람들이 그런 사사로운 의리에 얽매인다면 종묘사직과 백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화
론은 國과 의리의 문제에 있어, 國의 보존을 의리보다 상위 개념으로 둔다. 이로부터 모방의 욕망은
약화되지만 변화하는 제국질서에 최적합의 태도를 취하는데 더 유연한 전략을 취할 수 있다.
문명제국과 거리감을 유지하는 태도는 다른 한편으로 오랑캐가 천자의 호를 참칭하거나 말거나
우리의 일이 아니라는 의견으로 이어진다.
저들이 이미 황제를 칭하고 우리를 비례로 대접한다면 논하는 자가 명호가 달라졌다고 하는 말은 옳
은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황제의 칭호를 참람하게 사용하더라도 이웃나라와 맺은 형제의 의를 어기
지 않고 우리를 전과 다름없이 대접한다면 저들이 감히 황제를 칭하든 말든 우리나라가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저들이 황제를 칭하는 불의를 제어할 수 없는 까닭에 잠시 그대로 내버려두
어 참견하지 말고 전과 같이 형제의 약조를 지키면서 내치와 국방을 다져나가는 것이 참으로 우리나라
가 취해야 할 좋은 정책입니다. 어찌 저들에 순종하여 허여하는 것이 곧 저들의 아래에 굴복하는 것이
라 따진단 말입니까.51)


47)『 인조실록』15년(1637) 1월 2일, 첫 번째 기사.
48)『 지천선생집』(11) 疏箚,「 丙子封事第三」.
49)『 인조실록』15년 1월 16일.
50)『 지천선생집 속집』(2) 書札,「 上北渚􂑿相國書三書」.
51)『 지천선생집 속집』(1) 書札,「 與趙浦渚飛卿翼書􃡧書」.
64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심지어 아래와 같이 華夷를 상대화시키는 발상도 제기하고 있다.
대저 천리의 성쇠는 華夷에 대해 거역하느냐 순종하느냐에 있지 않고 제왕의 흥망은 크고 작음, 강
함과 약함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자가 되고 저들이 신하로 예속되는 일이 천하에 어찌
그럴 이치가 없겠으며, 저들이 천자가 되고 우리가 신하로 예속되는 일이 천하에 어찌 그럴 이치가 없
겠는가. 우리가 천자가 되는 것도 한때요 저들이 천자가 되는 것도 한 때이다.52)
화이를 상대화시키는 이런 관점은“남조는 자기만이 천자이고 각국 사람은 하인이라 하여 온갖
방법으로 속이고 해치므로 이에 참을 수가 없어서 하늘에 고하고 저들을 정벌하였다”는 정묘호란
당시 누르하치의 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華夷가 상대화될 수 있다면 華에 대한 모방에 적극
적일 수 없으며, 이는 변동하는 제국질서에 최적합 구도를 형성하는데 유연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척화론(김상헌 등) 주화론(최명길)
明과의 관계 􀓋부자관계, 군신관계
􀓋봉토를 받은 내복의 신하가 아니라, 조
공하는 외복의 번신
國과 의리의 문제
􀓋의리의 적용범위를 일국적 차원을 넘어선 􀓋의리의 적용범위를 일국 내로 한정
천하의 단위로까지 확장하여 적용함
華夷의 변동가능성 􀓋변동불가 : 尊中國攘夷狄이 건국의 근본 􀓋변동가능: 華夷의 상대성
􀙨 􀙨
문명과 제국에 􀓋문명에 대한 강한 모방 욕망 􀓋문명에 대한 약한 모방 욕망
대한 태도 􀓋제국변동에 비적합 구도 견지 􀓋제국변동에 적합 구도 견지
􀙨 􀙨
國표상 􀓋國의 상대성 􀓋國의 절대성


52)『 지천선생집 속집』(1) 書札,「 與趙浦渚飛卿翼書􃡧書」.


Ⅴ. 나오며
본고는 전쟁과 반정을 경험했던 인조대를 대상으로 하여 전근대 시기 조선의 지식관료층들이
‘國’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國과 병렬적으로 사용된 범주인
‘천하’를 참조점으로 삼았으며 병자호란 전후의 주화-척화논쟁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天이라는
보편적 질서에 의해 지배되어야 할 공간으로서의 천하는, 현실적으로는 중화제국의 모습으로 나타
났다. 즉 중화라는 <문명>과‘事大字小’의 원리 하에 조공과 책봉 시스템을 강제하는 <제국>의 형태
로 조선 지식관료층에게 인지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장에서는 國은 문명을 수용하고 제국에 대응
하기 위해 각각 모방과 적합을 전략으로 채택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문명은 제국의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모든 제국이 문명의 옷을 걸치지
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17세기 중화질서 변동기에 조선의 지식관료층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 또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4장에서는 병자호란 전후에 벌어진 주화-척화논쟁이
단지 대의명분론과 현실론의 대립이라는 기존의 설명을 넘어서, 중화질서 내의 國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모방 전략과 적합 전략의 긴장과 충돌이 표출된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이 논쟁을
해석하였다.
그 결과 척화파는 명과 조선의 관계를 부자관계와 군신관계로 보았고, 國과 의리의 문제에 있어
서는 천하질서에 대한 의리를 더 중시했으며, 華夷의 변동가능성을 부정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주화파는 명과의 관계에 있어 조선을 조공하는 외복의 제후로 보았고, 國과 의리의 문제에 있어 의
리는 國에 한정됨을 강조했으며, 華夷의 변동가능성을 인정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을 문명과 제
국에 대한 태도에 비추어 살펴보면, 척화파는 문명에 대한 강한 모방욕망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제
국 변동에는 비적합하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반면 주화파는 문명에 대한 약한 모방욕망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제국 변동에 적합하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로부터 김상헌을 위시한 척화파는 천하와 國의 관계에 있어 國의 상대성을, 주화파는 國의 절
대성을 상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명길의 입장은, 본고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國을 의리와
이해가 일치되는 곳으로 본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의 주장을 수용하면서53) 國을 절대적인
단위로 상정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향후 좀 더 면밀한 검토를 요한다.


투고일자: 2011년 8월 15일 / 심사완료일자: 2011년 9월 16일 / 게재확정일자: 2011년 9월 16일


문명과 제국 사이 65
53)『 지천선생집 원집』(11) 疏箚,「 丙子封事第三」.
66 동양정치사상사 제10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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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Civilization and Empire :
Chosun's Intellectual-Bureaucrats' representation of 'guk(國)' in the reign of
King Injo(仁祖)
Sohn, Aelee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Chosun's Intellectual-Bureaucrats' idea of 'guk( )' in the reign
of King Injo( ) who experienced Restoration( ) and wars. It draws the category of
‘Cheonha( )’ and concretely analyze the controversy between the advocacy of peace(
) and the rejection of negotiations( ) before and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 ‘Cheonha( )’ took the shape of the empire of China in reality. That is, ‘Cheonha
( )’ was recognized as the civilization of China and the empire consisted of the system
of the tribute and the investiture. In order to accept the civilization and cope with the
empire, 'guk( )' adopted a strategy of mimesis( ) and convenience( ) respectively. I
find that the rejection of negotiations( ) including Kim Sangheon( ) had a strong
desire of mimesis for the civilization and was not convenient in the variable empire. And I
also find that the advocacy of peace( ) including Choi Myungkil( ) had a weak
desire of mimesis for the civilization and was convenient in the variable empire.
key words: guk( ), civilization, empire, mimesis, Convenience, advocacy of peace( ),
rejection of negotiations( ), Kim Sangheon( ), Choi Myungk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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