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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만년필 -새로운 글쓰기를 만들어낸 기술 혁신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8.03.28|조회수96 목록 댓글 0

글쓰기와 만년필

새로운 글쓰기를 만들어낸 기술 혁신

글쓰기와 만년필 대표 이미지

<출처: 셔터스톡>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박인환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김수영은 이런 박인환의 시를 ‘겉멋’이라고 이죽거렸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박인환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가 갖는 의미를 직관적으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목마와 숙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한 시인 박인환.

〈목마와 숙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한 시인 박인환.

이 시에 등장하는 “목마”는 로렌스 스턴이 그의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Tristram Shandy)》에서 ‘강박 충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상징이다. 울프는 《보통의 독자(The Common Reader)》에서 스턴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주인공을 일컬어 “목마를 타고 죽음을 향해 간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목마”는 강박 충동에 이끌린 맹목성을 뜻하는데, 울프는 《제이콥의 방(Jacob’s Room)》에서 스턴의 문제의식을 패러디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제이콥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수재지만, 남성성에 대한 과도한 강박 충동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스턴 식으로 말하자면, 죽음으로 향하는 ‘목마’를 탄 남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박인환은 과연 스턴에 대해 쓴 울프의 에세이를 읽었을까? 나는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센티멘탈 쟈니〉라는 시도 썼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에서 “쟈니”는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journey’를 한국어 발음으로 옮겨놓은 말인데, 이는 스턴의 다른 소설 제목(A Sentimental Journey)이기도 하다.

18세기 소설가 스턴과 20세기 소설가 울프를 연결해주는 것은 울프의 《보통의 독자》이다. 이런 까닭에 박인환은 울프의 에세이를 읽고 스턴의 소설을 알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다. 물론 김수영이라면, 박인환이 그 내용을 어깨너머로 들었을 것이라고 힐난하면서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박인환을 통해 뜻밖에 우리는 스턴에 대한 울프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관심에서 알 수 있듯이, 울프는 18세기 센티멘털리즘(Sentimentalism, 감상주의)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문학사에서 센티멘털리즘은 이성보다 감정과 행동을 더 중시하는 문학적 경향을 의미한다. 박인환의 시에서 과도하게 드러나는 ‘통속적인 감정’은 짐작건대 이런 센티멘털리즘을 나름 한국적인 상황에서 실험해본 것이라고 선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목마’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면, 흥미롭게도 전쟁과 목마의 이미지를 연결시켜서 풍자하는 경우는 1916년에 제작한 마크 거틀러의 그림 〈회전목마(Merry-Go-Round)〉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평화주의자였던 거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그림을 통해 전쟁의 맹목성을 시각적으로 고발하고자 했다. 소설가 D. H. 로렌스는 거틀러의 〈회전목마〉를 보고 “지금까지 본 근대 회화 중에서 최고”라고 칭찬했다.

글쓰기와 그림의 대중성

마크 거틀러, ‘회전목마’

마크 거틀러, ‘회전목마’

거틀러가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고 영향을 받아서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스턴의 문제의식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거틀러는 한때 자신의 후원자였던 오토라인 모렐을 통해 블룸즈버리 동인과 친분을 쌓았고 울프와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거틀러 역시 울프와 마찬가지로 비타협적인 평화주의자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신의 후원자 중 한 명이자 윈스턴 처칠의 비서였던 에드워드 마시와 결별해버린다.

울프는 거틀러에 대한 이야기를 일기로 남겼다. 그는 거틀러에 대한 첫인상을 소상하게 적어놓았는데, 첫 만남에서 30시간 이상 대화를 나눴다고 하니 이만저만 말이 통했던 관계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프는 거틀러를 일컬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에고이스트”라고 평하기도 했다.

둘의 대화가 항상 의견 일치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존재의 순간들(Moments of Being)》에서 울프는 사적이고 사소한 사실만 나열하는 “문학의 열등성”을 지적한 거틀러의 주장에 대해 “따끔한 비판”이라고 수긍하면서도 모두가 그림을 그려서 인물 성격을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한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아무나’ 세잔처럼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림에 비해 글은 훈련을 거치면 ‘아무나’ 일정한 수준에 오른다는 점에서 훨씬 대중적인 매체일 것이다. 근대가 평등의 원리에 따라 모든 가치를 옆으로 펼쳐놓는 것이라고 한다면, 글쓰기에 대한 울프의 생각은 거틀러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울프는 인상파 화가들과 자신의 글쓰기를 나란히 놓고자 했다. 울프에게 ‘모던 픽션’은 인상파의 그림처럼 ‘삶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삶’이란 약동하는 생명 자체를 말한다. 모던 픽션은 주관의 눈을 배제한 객관적인 대상의 움직임만을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객관적 대상화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의 주관마저도 일종의 흐름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절대적인 ‘나’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일 뿐이라는 생각이 울프의 작품을 지배했다. 일기는 계획이나 결론이 필요하지 않은 글쓰기다. 울프는 일기 쓰기를 그치지 않았고, 일기를 통해 자기를 탐구하고 세상을 파악했다. 일기야말로 울프가 예리하게 짚어냈던 근대적 글쓰기의 대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와 기술은 어떤 관계인가?

이런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 무엇도 아닌 만년필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울프는 강철 펜촉을 다루기 귀찮아서 “워터맨 만년필에 정을 붙이게 됐다”고 일기에 썼다. 만년필로 쓴다고 해서 고귀하고 심오한 생각을 더 잘 표현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꽤 만족스러운 속내를 내비치고 있다. 당시 만년필 가격이 저렴하진 않았을 터이니 작가로서 사치를 한번 부렸다고 볼 수도 있겠다.

워터맨 만년필은 1883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1913년 획기적인 기술 개선이 이루어져서 한 번 잉크를 충전하면 많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최신 필기구’ 덕분에 울프는 1918년부터 훨씬 수월하게 원고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4년에 쓴 일기를 보면 새 워터맨 만년필을 위해 잉크를 사러 갔다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이 만년필로 울프는 《보통의 독자》의 초고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워터맨 만년필은 울프의 글쓰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워터맨 만년필은 울프의 글쓰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출처: Wikimedia Commons>

이처럼 당시 워터맨 만년필은 오늘날 애플의 아이패드나 아이폰처럼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울프의 만년필 애호를 겉멋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그에게 필기구의 발전은 글쓰기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고대의 호메로스나 아이스킬로스처럼 입에서 입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라면 펜과 잉크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는 이들의 시대에 비해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해졌기에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 한 정보를 보전하고 전달하기 불가능하다. 많은 양의 필기를 용이하게 만들어준 만년필은 바로 이런 구전문학의 종언과 새로운 글쓰기 조건의 출현을 보여주는 상징적 물건인 셈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울프는 이 같은 글쓰기의 조건에서 사적인 에세이가 출현했다고 분석했다. 울프가 새로운 글쓰기를 가능하게 만든 기술적 성취라고 보았던 만년필은 나중에 타자기로,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바뀌었다.

글쓰기의 변화를 기술 발달과 관련지었다는 점에서 울프의 생각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의 의미에 대해 질문했던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의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베냐민의 문제의식은 그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세 번째 판본에 인용한 폴 발레리의 예술론에서 이어진다. 발레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기법 전체를 바꾸고 예술의 창작 과정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은 예술 개념 자체를 바꿀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예술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초월적인 것이라기보다 인간 문명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진단이다. 만년필과 글쓰기를 연결시키는 울프의 발상 역시 이런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발레리나 베냐민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을 울프가 포착해내기도 했다. 놀랍게도 울프는 당시에 이미 글쓰기 메커니즘을 두뇌 활동과 연결시켰다. 이런 관점에서 울프는 “나의 두뇌는 설명할 수 없는 기계장치”라고 말하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이미 울프는 지금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로 다가온 인공지능의 쟁점을 선구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소설가

《사피엔스(Sapiens)》로 유명한 유발 노아 하라리는 한 인터뷰에서 “만일 우리 모두가 동일한 허구의 이야기를 똑같이 믿는다면, 전혀 모르는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수백만 명이 함께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을 초능력의 존재로 만드는 힘은 협력이고 이 협력은 ‘픽션’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로클란 블룸 같은 영국 작가는 앞으로 인공지능이 우리의 생활방식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보다 기계가 사실 판정을 더 정확하게 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픽션’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훨씬 더 완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인공지능은 소설가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기계가 소설가를 대신해서 글을 쓴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공지능이 인간의 두뇌 작용과 연동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감정선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뜻이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흥행요소를 분석해서 차기 작품에 적용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 시대의 작가는 사라진다기보다 기계를 이용해서 창작의 목표에 가장 부합하는 이야기들을 속속 찍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울프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인공지능은 소설가를 대체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소설가를 대체할 수 있을까?<출처: 셔터스톡>

울프는 이미 대답을 해놓은 것 같다. 〈모던 픽션(Modern Fiction)〉이라는 에세이에서 울프는 “소설의 예술성이 살아서 우리 가운데 서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소설의 여신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을 부수고 괴롭히라고 말할 것”이라면서 “그래야지만 소설은 다시 젊어지고 힘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을 위해 정해진 소재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어떤 느낌이나 생각도 소설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두뇌의 작용이나 정신의 특징도 소설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울프의 생각이었다.

이런 울프의 생각은 한때 유행했던 물리주의(physicalism)을 떠올리게 한다. 물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마음은 곧 두뇌의 상태이다.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 등장하는 램지 교수야말로 이런 생각을 하는 전형적인 물리주의자인데, 그는 흥미롭게도 “마음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라고 발언한다.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판단하자면, 분명 울프에게 자연주의적 요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울프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사물 자체의 흐름으로서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은 결코 한곳이나 한 시점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하는 기억의 기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울프는 소설을 회화보다 더 중요한 의식의 탐구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소설은 사적인 글쓰기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여줄 수 있는 자연의 창문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진리일 것이다. 사적 에세이와 달리 소설의 목적은 바로 ‘진리의 드러냄’이다. 자아의 허위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로 흐르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을 길어 올리는 것이 소설가의 일이라고 울프는 생각했다.

블룸이 서늘하게 제시하는 인공지능 시대에 이런 ‘진리’는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을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일개 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더 많은 독자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독자가 즐기면 즐길수록 이야기는 일정한 패턴으로 단순화하기 마련이다. 이른바 한류를 보더라도 그렇다. 하나가 성공하면 비슷비슷한 내용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진다.

울프 역시 이런 상황을 썩 반기지 않겠지만, 아마도 인공지능이라는 조건이 만들어낸 변화한 글쓰기의 방식 자체를 거부하진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만년필과 글쓰기의 변화에 대한 통찰이 잘 보여주듯이, 울프는 분명히 새로운 글쓰기로 인해 초래되는 문제를 날카롭게 짚었을 것이다.

울프가 생각한 “모던 픽션”은 특정한 형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특정한 형식을 허물고 자유롭게 대상에 다가가는 글쓰기야말로 모던 픽션이다. 이 “픽션”이 지향하는 것은 더 많은 이들과 공감하는 것이다. 이 공감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 향상을 전제한다. 기술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울프의 생각은 당대의 진보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울프는 〈모던 픽션〉에서 H. G. 웰스와 아놀드 베넷 같은 “유물론자들”을 비판했다. 이때 울프는 “소설 구조의 견고함”에 너무 집착하는 앞 세대 소설가들의 완고함을 염두에 두었다. 울프는 전통적인 소설 작법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에게 근대는 단단한 구조를 가진 소설로 담아낼 수 없는 흐르는 세계였다.

급변하는 근대의 디테일을 잡아내려면 소설이 형식을 허물고 유연해져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울프는 에세이 곳곳에서 오래된 것과 단절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울프만큼 모더니즘의 이념을 비타협적으로 주장하고 실현해나갔던 아방가르드도 드물 것이다. 인상파의 피사로와 후기 인상파의 고갱 정도가 울프에 필적하지 않을까.

모던 픽션, 인공지능 시대를 예견하다

지금 우리는 기술 혁신에 따른 글쓰기의 변화 과정을 목도하고 있다. 오랜 세월 이야기 전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책이라는 매체가 쇠퇴하고 그 자리를 전자기기들이 차지하고 있다. 나 역시 이 글을 연필이나 펜이 아니라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쓰고 있지 않은가. 머지않아 자판을 두드릴 필요도 없이 의식의 작용을 신호로 전달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술 발달로 인해 “의식의 흐름”이 그대로 글쓰기로 옮겨진다면, 울프를 비롯한 모더니스트가 생각했던 미학적인 목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울프는 인간의 고유성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했던 미학은 주관을 배제한 객관의 운동이었다. 운동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예술이어야 한다고 울프는 생각했다. 거틀러의 말과 달리, 의식을 더욱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이런 목표에 부합하는 장르였다.

마음 깊이 박혀 있는 고통의 병증을 통해 울프는 질서정연한 정신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가 에드워드 시대의 작가들을 비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비판의 백미는 바로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Mr. Bennett and Mrs. Brown)〉이다. 이 에세이에서 울프는 아주 선명하게 근대의 특징 중 하나인 ‘익명의 세계’와 소설에서 그려지는 인물 성격의 문제를 다룬다.

논쟁의 발단은 베넷 씨가 신진 작가들을 품평하면서, 요즘 작가들에게서 대가로 성장할 가능성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고 한 발언에 있었다. 울프는 이런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 에드워드 시대의 베넷 씨가 알던 세상은 더 이상 없고 이미 현실이 바뀌었다고 대꾸하면서, 기성의 관념에 맞춰 요즘 소설을 읽으니 제대로 변화를 포착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울프의 반박은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 낯설지 않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당시에 울프도 겪었던 것이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고 재단하기 마련이다. 괴테의 말처럼 전통의 숙달 뒤에 새로운 것이 온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정작 새로운 것이 출현했을 때 무엇이 새롭고 무엇이 낡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문제적일 것이다. 오히려 브레히트가 말했듯이, 새로운 것은 낡은 세계의 환영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 울프의 생각을 이해하기에 더 적절할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낯선 것이고, 기성세대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간단한 역사의 교훈을 우리는 종종 망각한다.

브레히트는 새로운 것은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떨까?

브레히트는 새로운 것은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떨까?<출처: Wikimedia Commons>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렇지 않을까. 울프는 기계의 발전에 대해 굳이 그렇게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다고 말해줄 것 같다. 글쓰기는 시대에 따라 바뀔 것이다. 소설의 목적이 ‘진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면, 기술의 발달과 글쓰기의 변화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담담하게 울프는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 옛날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면서 호메로스와 아이스킬로스의 시대보다 진보한 자신의 시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피력했던 울프였으니, 문명의 발전을 더 나은 글쓰기의 조건으로 바라볼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매 순간 비산하는 현실의 파편들을 따라잡는 기억의 기계로서 소설은 언제나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인공지능이야말로 그 소설의 본질을 구현한 기계적 작동일지 모른다. 울프가 말한 “모던 픽션”의 시대는 이미 인공지능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었다.

발행일

발행일 : 2018. 03. 15.

출처

제공처 정보

  • 저자 이택광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워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에서 문화비평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 한국의 숨겨진 문화 구조, 사회적 문제와 모순 들을 드러내고 분석하는 글을 써왔다. 지은 책으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마녀 프레임》,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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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지식백과] 글쓰기와 만년필 - 새로운 글쓰기를 만들어낸 기술 혁신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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