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윤 상 철*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공자의 출신배경
Ⅲ. 공씨 가문에서의 공자의 위상
Ⅳ. 죽음에 임박한 공자의 뿌리생각
Ⅴ. 공자의 名과 字의 유래
Ⅵ. 맺음말
<국문 요약>
공자는 “子欲居九夷”,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殷有三仁焉”, “殷因
於夏禮” 등등 殷과 東夷에 대한 언급을 했지만, 자신이 은 출신이고 동이족이
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죽음에 임박해서 자공에게 꿈 이야기를 통해
서 殷 출신임을 밝히고 그에 맞는 장례를 치러줄 것을 암시하였다. 공자는 백
대의 스승이고 만세의 성인이라고 하며, 유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출신을 밝히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하는 것이 이 논
고의 쟁점이다. 혹자는 당시가 殷을 멸한 周의 세상이므로, 시대적 환경이 은
의 후예임을 밝히기 어렵다고 하나, 필자는 공자가 부친의 가문을 잇지 못하
고 천대받으며 자란 사실에 주목했다.
공자가어 등에 의하면 공자의 형은 첩의 소생인데다 足疾이 있었으므로,
그의 부친이 60이 넘은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후사를 보고자 안씨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간절히 원해서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태어났다면
당연히 嫡長子로서 가문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공자는 선친의 산소자리도 모
르고, 적장자의 字號인 伯字도 쓰지 못했으며, 선친의 채지인 郰(또는 聊)읍을
형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東家丘’나 ‘鄹人之子’와 같은 대부의
*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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嫡長子라면 받을 수 없는 호칭으로 불리며 자랐다. 반면에 공자의 형 孟皮는
첩의 소생이고 足疾이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도 伯尼라는 적장자의
字를 씀으로써 가문을 이어받고, 그의 아들 忠(子蔑)에게까지 세습시킨 것이
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자가 숙량흘의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친을 선친과 합장하고, 형의 딸을 南容에게 시집가는 것을 주선하
는 것은 공자가 성장해서의 일이다.
그렇다면 공자 자신이 공씨의 후예인지조차 의심받는 분위기에서, 자신이
공씨의 후예이고 나아가 殷의 후예임을 드러내놓고 밝히기가 어려웠을 것이
다. 그래서 그의 字에 尼가 아닌 (夷, 仁)를 넣음으로써 은연중에 東夷족이
라는 뜻을 밝힌 것이고, 죽음에 임박해서는 더욱더 확실히 은의 후예임을 밝
힌 것이다.
그런데도 공자의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僧尼의 尼로 잘못 쓴
다면 이는 공자의 뜻에 크게 어긋난 일이 될 것이다. 나아가 공자의 뜻을 제
대로 알기 위해서는 “子欲居九夷, 子居之 何陋之有?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
也” 등의 내용을 비롯해서 殷과 夷에 대해서 후학자들이 편견을 갖고 잘못 풀
이한 것도 殷과 夷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내용으로 다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
다.
주제어 : 仲尼, 伯尼, 叔梁紇, 尼丘山, 東夷
Ⅰ. 들어가는 말
공자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이 殷의 후예임을 밝혔다. 평소에는
자신이 殷의 후예임을 밝히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禮記 檀弓에
나오는 한 구절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은의 후예이고, 또 그 후
예로서 죽고 싶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공자가 殷人이면서도 평소에
殷人임을 밝히지 않다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殷의 후예임을 밝혔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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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왜 꿈을 빌어서 이야기를 했는지 강한 의문이 든다. ‘百代의 스승
이며 유학을 집대성한 聖人’이라는 칭송을 받는 공자라면 아무리 시대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출신을 밝혔어야 옳고, 만약
출신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 것이 평소 옳다고 여기는 소신이었다면 죽
음을 앞두었다고 해서 밝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밝히
지 못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든지, 아니면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거나 밝
힐만한 계기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밝힐 필요가 없었거나 밝힐만한 계
기가 없었다고 한다면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밝히지 못할 특별
한 이유가 있었다면 이는 聖人의 言行을 바로 알고 배우기 위해서도 반
드시 규명해야 될 사실이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 공자의 출신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한 열쇠
가 될 것이다. 본 논고는 공자시대의 名 및 字를 쓰는 관습을 살펴볼 때,
그의 출신배경과 名 및 字와는 서로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판단하
고, 공자의 名과 字가 다름 아닌 자신이 東夷출신임을 나타낸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물론 이는 아직 자료들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했고, 또
공자의 名 및 字에 대한 이전의 설들에 반하는 내용이므로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본고에 밝힌 것
만으로도, 공자가 왜 東夷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
졌는지,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은의 후예임을 밝히면서 은의 풍속
대로 장례를 치러줄 것을 암시하였는지에 대해서 충분한 증거가 될 것
이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공자가 은나라의 후예가 되는 경위를 살핀 뒤
에, 숙량흘이 노나라의 대부가 되는 과정을 자료를 통해 분석해 보고,
Ⅲ장에서는 선친의 산소 위치도 몰랐고, 부친의 대부벼슬도 잇지 못한
공자를 통해서 공씨 가문에서의 공자의 위치를 분석해 보며, Ⅳ장에서
는 공자의 탄생과 부친의 죽음을 통해 殷人이면서 殷人임을 밝히지 못
하는 입장과 東夷에 대한 공자의 그리움과 죽음에 임박해서 殷의 후예
로 대접받고 싶은 공자를 살펴보며, Ⅴ장에서는 공자의 名과 字를 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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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유래를 살핌으로써 평소에는 東夷출신 또는 殷의 후예라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名과 字에 東夷출신 또는 殷의 후예라는 뜻을 담고
살았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해서 공자의 언행에
대한 풀이를 재해석하고, 나아가 공자가 추구하고자 한 이상사회에 대
한 기초를 정확히 다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Ⅱ. 공자의 출신배경
1. 공자는 은나라의 후예
공자는 은나라의 후예이다. 殷의 三仁 중의 한 사람인 微子, 그 微子
의 동생인 은중 연(미중 연)을 선조로 하였고, 그 14대 후손이 된다. 은
중 연의 아들 稽는 宋公이고, 그 아들 申은 丁公이며, 그 아들 共과 熙는
각기 湣公과 襄公으로 송나라를 다스렸다. 熙의 아들인 弗父何부터는
송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되지 못했으나 襄公 熙의 4세손인 正考父까
지는 모두 은나라 왕족의 성씨인 子를 성씨로 써왔다. 그러나 은중 연의
8세손이자 襄公 熙의 5세손인 공기보가 5服을 넘어서서 공족의 親이 멀
어졌으므로 子氏 대신에 孔氏를 성씨로 쓰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이러
한 기록은 사기 의 공자세가나 공자가어 그리고 공자의 후손이 기록
한 東家雜記 등에 자세하다.
契이 禹를 도와 治水를 할 때 功이 있어서 商에 봉해지고 子氏 성을 하사받
았다. 周나라 成王때에 이르러 商의 帝乙王의 長子인 子 啓를 宋에 도읍하게
했다. 啓가 죽자 그 아우 仲 衍을 세웠다. 仲 衍은 宋公 稽를 낳고, 宋公 계
는 丁公 申을 낳고, 丁公 申은 湣公 共과 襄公 熙를 낳았다. 熙는 ①弗父 何를
낳고, 弗父 何는 ②宋父 周를 낳고, 宋父 周는 ③世子 勝을 낳고, 世子 勝은 ④
正考父를 낳았다. 正考父는 ⑤孔嘉父를 낳았는데, 孔嘉父는 字이니, 先儒들이
當時에 하사받은 號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孔嘉父는 ⑥木金父를 낳고, 木
金父는 ⑦祁父를 낳으니, 五世는 親이 公族에 배열되기를 다한 것이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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祁父가 할아버지의 字(孔嘉父)를 따서 孔氏를 삼았다.1)
공자세계도
帝乙 → 微子 啓(송에 봉해짐)
① 은중 연 → ② 송공 계 → ③ 정공 신 → ④ 양공 희(민공 공)
→ ⑤ 불보 하 → ⑥ 송보 주 → ⑦ 세자 승 → ⑧ 정고보 →
⑨ 공보 가 → ⑩ 목 금보 → ⑪ 역이(공기보) → ⑫ 방숙(노나라로 망
명) → ⑬ 백하 → ⑭ 숙량흘 → ⑮ 공자
위의 기록은 전적에 따라 孔嘉父를 孔父嘉로 기록하는 등 몇몇 글자
의 차이는 있지만 공자의 부친 숙량흘이 은중 연의 후손이라는 것에서
는 모든 전적이 일치한다. 다만 孔氏로 성씨를 바꾼 시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로 나뉜다. 하나는 襄公 熙의 5세손인 孔嘉父(孔父嘉)에 이르러
공족의 親이 다했기 때문에 孔氏로 성씨를 삼았다는 十一經問對 등의
설이고, 또 하나는 襄公 熙의 7세손인 祁父가 공족의 親이 다했다는 이
유로 할아버지의 字(孔嘉父)를 따서 孔氏를 삼았다는 東家雜記 등의
설이다. 당시에 公族으로 배열되는 것이 五世까지라는 것이 맞다면, 襄
公으로부터 5세손이 되는 孔嘉父가 공족의 성씨가 아닌 孔을 성씨로 삼
은 것이 맞다. 따라서 孔嘉父의 孔은 성씨가 아니라 하사받은 字라고 한
東家雜記의 설은 착오가 있는 듯하다2).
1) 孔傳, 東家雜記, 巻上 姓譜 : “昔契以佐禹治水有功 封於商而賜姓子氏. 至
周成王時 以商之帝乙長子子啓 國於宋. 啓 卒立其弟仲衍. 仲衍 生宋公稽,
宋公稽 生丁公申, 丁公申 生湣公共 及襄公熙. 熙 生弗父何, 弗父何 生宋父周,
宋父周 生世子勝, 世子勝 生正考父, 正考父 生孔嘉父, 孔嘉父者 其字也 而先儒
以謂 當時所賜號者 誤矣. 孔嘉父 生木金父, 木金父 生祁父 五世親盡列為公族
祁父 因以王父字為孔氏.”
2) 華督이 공보가를 죽이고 그 아들 목금보를 士계급으로 강등시켰기 때문에 祁
父부터는 자씨 성을 쓰지 못하고 공씨 성을 썼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신분이
상승할 때 성씨를 바꾼 예는 있지만 신분이 강등될 때 성씨를 바꾼 예는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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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들 孔防叔이 宋 華督(宋 戴公의 손자)의 난을 피해서 魯로 달아나 大夫
가 됨으로써 魯에 가문을 두었다. 孔防叔이 伯夏를 낳고, 伯夏가 叔梁紇을 낳았
다. 숙량흘의 長子를 孟皮라고 했는데, 병이 있어서 가문을 잇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次子는 先聖이시다.3)
2. 숙량흘은 노나라의 대부
노나라로 달아난 방숙은 숙량흘의 할아버지이고 공자에게는 증조부
가 된다. 방숙이 송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달아날 때의 신분은 대부가 아
니라 士였다. 방숙의 할아버지인 목금보가 신분의 강등을 당해서 士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징재의 부친이 딸들에게 숙량흘을 소개할
때 ‘陬大夫’라고 해서 추땅을 채지로 갖고 있는 대부의 신분임을 밝혔
다. 이는 공자가어 나 동가잡기 등 모든 기록이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방숙이 노나라로 망명했을 때 노나라에서 신분을 상승시켜주
었고 그것을 후손들이 세습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현재로써는 찾아볼 길이 없다. 다만 앞에 예문을 든 東家雜記
의 기록이나 潛夫論 등에서는 방숙이 노나라로 망명해서 방땅의 대부
가 되었고, 그래서 防叔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고 하였다.
孔父嘉가 木金父를 낳고, 木金父는 강등되어서 士가 되었다. 그러므로 宋에
게 멸망당했다고 한 것이다. 金父는 祁父를 낳고, 祁父는 防叔을 낳으니, 防叔
이 華氏의 핍박을 피해서 魯로 달아나서 防땅의 大夫가 되었다. 그러므로 防叔
이라고 한 것이다. 防叔은 伯夏를 낳고, 伯夏가 叔梁紇을 낳으니 鄹땅의 대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鄹叔紇이라고 한 것이다.4)
3) 孔傳, 東家雜記, 巻上 姓譜 : “而其子孔防叔 避宋華督之難 奔魯 為大夫 因
家於魯. 孔防叔 生伯夏, 伯夏 生叔梁紇. 長子曰孟皮, 有疾不任繼嗣, 次子則先聖
是也.”
4) 王符, 潛夫論, 卷九 志氏姓 : “孔父嘉 生子木金父, 木金父 降為士 故曰滅於
宋. 金父 生祁父, 祁父 生防叔, 防叔 為華氏所逼 出奔魯為防大夫. 故曰防叔. 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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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符는 위에 인용한 潛夫論에서 防叔도 대부고, 그의 손자인 숙량
흘도 대부라고 하였다. 그래서 防叔은 防땅의 대부라는 뜻으로 防叔이
라고 한 것이고, 숙량흘은 鄹땅의 대부라는 뜻으로 鄹叔紇이라고 한 것
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방숙이 대부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없어도
대부였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나 방숙의 아들인 백하는 대부였다는 기
록조차 없다. 당시 대부는 세습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방숙이 대부였다
면 백하도 대부였을 것이고, 방숙이 대부가 아니었다면 백하도 대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鄧名世는 숙량흘은 힘이 절륜하고 용맹이 뛰어났던 장수로 유명했고
郰를 食邑으로 해서 魯나라의 大夫가 되었다고 했다.
孔子의 부친 紇의 字는 叔梁이다. 郰를 食邑으로 해서 魯나라의 大夫가 되었
다. 그러므로 郰叔紇이라고 한 것이다. 힘이 세다고 해서 諸侯들에게 널리 소문
이 났다.5)
張萱도 그의 저서 疑耀에서 공방숙이 노나라로 도망간 것은 맞지
만, 벼슬해서 대부가 된 것은 그의 손자인 叔梁紇이라고 하였다.
父嘉의 손자는 孔防叔인데 宋으로부터 魯로 달아났으나 노에서 벼슬하지는
않았다. 그 손자인 叔梁紇에 이르러 노나라에 벼슬하여서 聊땅을 채지로 받았
다.6)
숙량흘이 제후들에게까지 용맹하다는 것이 알려졌다는 점에서, 선대
叔 生伯夏, 伯夏 生叔梁紇 為鄹大夫. 故曰鄹叔紇.”
5) 鄧名世, 古今姓氏書辯證, 卷十八 十八尤 : “孔子父紇 字叔梁. 食邑於郰 為
魯大夫, 謂之郰叔紇. 以力聞於諸侯.”
6) 張萱, 疑耀, 卷六 孔子姓氏 : “父嘉之孫曰孔防叔 乃自宋奔魯 不仕, 至其孫
叔梁紇 始仕魯 受采於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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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대부를 세습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戰功으로 대부가 되었
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해준다. 숙량흘은 춘추좌전 에 모두 두 번
등장하는 데, 첫 번째는 襄公 10년의 晉나라와 魯나라의 연합군이 벽양
을 침공할 때이고, 두 번째는 양공 17년에 제나라가 노나라의 방땅을 쳐
들어왔을 때이다. 이 두 번의 기록 모두 숙량흘에게는 力拔山氣蓋世같
은 대단한 힘과 용맹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안징재의 부친
이 그의 세 딸들에게 숙량흘에게 시집갈 사람을 묻는 과정에서 “이제
그 사람의 키가 열자나 되고 武力이 絶倫하다”고 한 말을 충분히 증명
하고 있다.
양공 10년에 노나라 孟獻子의 가신인 秦堇父가 수레를 끌고 군수물자를 나르
는 일을 하게 되었다. 偪陽사람이 성문을 여니 제후의 군사(晉과 魯)들이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성문의 기관을 발동해서 닫으니, 郰人紇(郰邑 사람 숙량
흘)이 성문을 들어 올림으로써 군사들을 나갈 수 있게 하였다.7)
양공 17년에 제나라의 高厚가 防땅에서 노나라의 臧紇을 포위했다. 노나라
군사들이 陽關으로부터 臧孫(臧紇)을 맞이하려 하였다. 旅松에 이르자 노나라
군사들이 제나라 군사를 두려워해서 감히 방땅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郰叔紇(郰
땅의 叔紇)과 臧疇 및 臧賈가 병사 300명을 이끌고 저녁에 제나라 진영을 공격
해서 臧紇을 여송으로 탈출시키고 다시 방땅으로 복귀하니, 제나라 군사가 떠
나가고 없었다.8)
위의 기록에서 양공 10년의 기록에는 숙량흘을 ‘郰人紇’이라고 호칭
하였고, 양공 17년의 기록에는 ‘郰叔紇’이라고 해서 호칭이 조금 다르다.
명나라의 학자 陳士元은 그의 論語類考의 鄹人항에서 춘추좌전 의
‘鄹人’은 공자의 부친인 숙량흘을 지칭하는 말이고, ‘人’이라고 한 것은
7) 左丘明, 春秋左傳, 襄公 10년 : “孟氏之臣 秦堇父輦重如役 偪陽人啓門 諸
侯之士門焉 縣門發 郰人紇 抉之以出門者.”
8) 左丘明, 春秋左傳, 양공 17년 : “髙厚 圍臧紇于防 師自陽關逆臧孫. 至于旅
松 魯師 畏齊不敢至防. 郰叔紇臧疇臧賈 帥甲三百 宵犯齊師 送之而復 齊師去
之.”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11
신분이 높지 않기 때문에 성명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반면
에 孔穎達은 春秋左傳注疏에서 邑의 大夫를 부를 때는 읍명을 먼저
말하고 그 뒤에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고 풀고, ‘人’이라고 한 것에 특별
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紇은 郰邑大夫이다. 公邑의 大夫들은 모두 읍의 명칭을 먼저 부르고 그 뒤에
某人이라고 부른다. 孔子 부친의 名은 紇이고 字는 叔梁이다. 옛사람들이 名과
字를 함께 말할 때는 字를 먼저 하고 名을 뒤에 쓴다. 그러므로 史記의 孔子
世家에 叔梁紇이라고 한 것이다.9)
춘추 에 邑의 大夫를 人이라고 호칭한 게 많으니, 人이라고 한 것은 微賤하
게 본 것이다. 그러므로 姓名을 써서 나타내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文公 9
년의 춘추 에 ‘許人’이라고 한 것을, 춘추좌전 에는 大夫라고 한 것이 그 예
이다. 또 춘추좌전 양공 10년조에 “성문의 기관을 작동했더니, ‘鄹人紇’이 들
어서 멈추게 함으로써 안으로 들어갔던 병사들을 나오게 했다”고 했으니, 당시
에 이미 鄹人으로 호칭된 것으로 공자의 부친이다.10)
陳士元의 의견이 맞다면 양공 10년에는 숙량흘이 대부가 아니었거나
신분이 미미한 대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부터 공을 세워서 양공 17
년에 이르러 邑大夫가 되었다는 것이다. 숙량흘이 처음부터 대부가 되
지 못했다면, 그의 부친인 백하는 물론이고 조부인 방숙도 대부가 아니
라는 뜻이다. 위에서 인용한 춘추좌전 양공 17년조의 기록에서 숙량
흘이 참가해서 방어한 防땅의 대부는 臧紇이다. 防땅의 대부의 성씨가
孔氏가 아닌 臧氏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방숙이 防의 대부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숙량흘과 臧紇의 두 조카가 防땅의 총지휘
9) 杜預, 孔穎達, 春秋左傳注疏 : “紇為郰邑大夫, 公邑大夫 皆以邑名冠之 呼為
某人. 孔子之父 名紇 字叔梁. 古人名字並言者 皆先字而後名. 故史記孔子世家
稱為叔梁紇也.”
10) 陳士元, 論語類考, 卷八 人物考 : “春秋 於邑大夫 多人, 人之者 微之也.
故不以姓名見. 如文公九年 經許人, 左傳 則大夫 是也. 又左傳襄公十年 縣
門發 鄹人紇 扶之以出在内者, 則當時 嘗以鄹人 孔子之父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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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격인 臧紇을 후방으로 빼돌리고 본인들은 다시 수비하러 돌아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나라 군사가 臧紇이 성 밖으로 탈출했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물렸다는 점에서 숙량흘의 지위가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런 면에서 조상의 음덕이 아닌 숙량흘 자신의 노력으로 대부가 되었지
만, 그 신분적 지위가 든든하지 않았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Ⅲ. 공씨 가문에서의 공자의 위상
1. 공자의 탄생과 부친의 죽음
사기 등의 기록에는 공자를 낳을 때 야합을 했다고 하였고, 가어
에는 “숙량흘이 顔氏에게 혼인을 구했다”고 하였다. 가어 의 표현대로
라면 정식으로 청혼한 것이고 격식을 갖춘 것인데 왜 야합이라는 표현
을 했을까? 아마도 숙량흘이 나이가 많았고, 더구나 공자가 태어난지 3
년이 못되어서 죽었기 때문에, 野合 또는 黑帝와 교감해서 낳았다고 하
는 등 그 탄생배경에 의문을 제시하였을 것이다. 안징재의 부친이 말했
듯이 숙량흘이 10척이나 되는 훤칠한 키에 무력이 절륜했다고 해도, 60
후반의 노인과 20이 안된 처녀의 결혼에 말이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史記에 “顔氏와 野合해서 孔子를 낳았다”하고, 家語에 “숙량흘이 顔氏에
게 혼인을 구했다. 顔氏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막내딸의 이름이 徴在이다.
안씨가 세 딸에게 묻기를 ‘陬大夫는 그 아버지가 士계급이나 그 선조는 聖王의
후예이다. 이제 그 사람의 키가 열자나 되고 武力이 絶倫하니, 비록 나이가 많
고 성격이 엄하나 아들 셋을 둘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가 그에게 시집을
가겠는가?’ 두 딸은 대답을 안하는데, 徴在가 말하였다. ‘아버님이 정하신대로
따를 것이니, 무슨 의문을 하겠습니까?’ 안씨가 말하기를 ‘네가 좋겠구나’하고
드디어 시집을 보냈다.”11)
11) 李鍇, 尚史, 卷八十一 孔子繫 : “史記 與顔氏野合而生孔子 家語 紇求婚于
顔氏. 顔氏 有三女 其小曰徴在. 顔父 問三女曰 陬大夫 雖父祖為士 然其先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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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이 어린 안징재가 아버님이 정하신 대로 따르겠다고 하며, 자
식이 열이나 딸리고 처첩이 있는 그것도 60이 훨씬 넘은 노인과 혼인하
겠다고 나선 것이다. 山東通志에는 다음과 같은 공자 탄생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에 의하면 숙량흘이 다스리던 추현과 안징재가 살던 곳
과는 尼山을 중심으로 아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顔母山은 尼山의 동쪽으로 3리 되는 곳에 있다. 안모산과 니산이 서로 마주
보는데, 가운데에 沂水가 가로막고 있다. 안모산의 위에는 顔母井과 祠堂遺趾가
있다.
昌平山은 尼山의 서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다. 史記에 孔子가 魯의 昌平
鄉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바로 이곳이다. 漢나라 때 이름은 昌平亭이고, 지금의
이름은 魯原村이다.
孔竇는 捜神記에 “孔子가 空桑의 땅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의 이름은 孔竇
이며, 魯나라 南山의 穴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孔瀆이라고도 한다.12)
송나라의 학자 羅泌은 공자가 空桑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 黑帝 등을
언급함으로써 공자의 야합탄생설을 은연중 내비췄다.
空桑은 東쪽에 있고 窮桑은 西쪽에 있다. 歸蔵啟莁에 “空桑이 蒼蒼해서 八
極을 이미 덮음에, 日月을 주관하는 직책인 羲和씨가 日月이 출입하는 것을 晦
와 明이라고 하였다”하니 아마도 隅夷땅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孔
子生於空桑”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春秋演孔圖에 “顔徵在가 大冡의 언덕에서
살다가 꿈에 黑帝가 말하기를 ‘네가 출산을 하려거든 반드시 空桑에서 하라’했
다”하고, 干寳가 기록하기를 “安徵在가 空桑의 땅에서 공자를 낳았는데, 지금의
王之裔 今其人身長十尺 武力絶倫 雖年長 性嚴 不足為疑三子. 孰能為之妻? 二
女 莫對, 徴在曰 従父所制 将何問焉? 父曰即爾矣. 遂以妻之.”
12) 山東通志, 巻十一之六 闕里志 : “顔母山:在尼山東三里 兩山相對 中隔沂
水 上有顔母井及祠堂遺趾. 昌平山:在尼山西五里 史記孔子生魯昌平鄉 即此 漢
名昌平亭 今名魯原村. 孔竇:捜神記 孔子生於空桑之地 今名孔竇 在魯南山之穴
一作孔瀆.”
114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이름은 孔竇로 魯나라 南山의 穴에 있다. 그러므로 孔廟禮器碑에 ‘顔育空桑’이
라 하였다”고 했다.13)
공상이 노나라의 남쪽에 있었든지 혹은 북쪽에 있었든지 간에 노나라
에 있었고, 그 지역은 지금의 곡부현에 있다고 한다. 다만 공상이 산수
가 좋아서 聖人이 나올만한 곳이라는 말은 둘째 치고도, 그 자체가 산
속에 있는 큰 동굴이어서 사람이 숨기에 좋았을 것이다. 더구나 원나라
의 江永이 지은 鄉黨圖考에 의하면, 숙량흘이 살았던 추현과 안징재
가 살았던 顔氏마을은 니구산을 중심으로 해서 2~3리밖에 떨어지지 않
은 가까운 거리였었다고 한다.
살펴보니, 孔子의 부친이 尼邱山의 줄기에 살아서 顔氏와 같은 마을이었으므
로 두 씨족의 거주지가 2~3리 정도 떨어졌을 것이다. 顔氏는 마땅히 姓이 있었
을 것이다. 좌전 의 양공 19년조에 “齊나라 侯가 魯나라에서 혼처를 구했는데
顔懿姬라고 한다고 했으니 顔氏는 姬姓이다.14)
즉 니구산과 공자의 부모가 합장된 안모산은 아주 가깝고, 공자가 태
어난 곳은 空桑 또는 孔竇(孔瀆)라고 하는 노나라 남산에 있는 굴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안징재의 꿈에 黑帝 또는 黑龍이 나타나서 교감한 후에
태어났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흑제는 “공상에서 젖을 먹여 기르라”고도
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黑帝가 누구인지가 궁금해진다. 공자의 아버
지 숙량흘은 송나라 왕족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앞서 “施氏를 아내로
13) 羅泌, 路史, 卷三 前紀三 空桑氏 : “空桑在東 窮桑在西. 歸蔵啟莁云 空桑
之蒼蒼 八極之既張 乃有羲和是主日月職 出入以為晦明 盖指隅夷之地 故記孔
子生於空桑. 春秋演孔圖云 徵在 游於大冡之陂 夢黑帝謂已汝産 必於空桑, 而
干寳所記 徵在 生子(孔子於)空桑之地, 今名孔竇 在魯南山之穴. 故孔廟禮器碑
云 顔育空桑. 空桑 魯北.”
14) 江永, 鄉黨圖考, 卷二 始生至為委吏乘田考 : “按 孔子父居尼邱山麓 與顔
氏同里. 二族相距二三里. 顔氏 當有姓. 十九年傳云 齊侯娶于魯曰顔懿姬 則
顔氏姬姓.”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15
맞이해서 九女를 낳고, 그 妾(시씨의 동생)이 孟皮를 낳으니 字를 伯尼
(伯居)라고 했다”라고 했듯이 잉첩을 맞이할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
다. 그래서 노쇠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안징재의 아버지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영향력으로 20도 안
된 처녀와 60이 넘고 처첩과 자식이 주렁주렁한 노인의 결혼을 주선할
수 있었을까? 물론 가어 에 의하면 아버지와 세 딸이 의논하는 형식으
로 이 광경이 기록되어있다. 공자의 47대손인 孔傳은 그의 東家雜記
에서 “숙량흘과 안징재가 니구산에 기도했는데, 바로 이 산에서 노닐 때
공자를 낳았다”15)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자의 부모는 鄭玄 등이 주장한
대로 이미 야합을 한 뒤에, 안씨에게 청혼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 아닐
까?
두 딸은 대답을 안하는데, 徴在가 말하였다. ‘아버님이 정하신대로 따를 것이
니, 무슨 의문을 하겠습니까?’ 안씨가 말하기를 ‘네가 좋겠구나’하고 드디어 시
집을 보냈다.”16)
여기서 공자가 임신되고 태어나서 자라게 된 空桑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空桑은 굴의 이름이다. 孔竇라고도 한다는 점에서
아주 큰 굴(또는 공자가 나온 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黑龍과 교
감했다, 孔瀆이라고도 한다’는 말로 비추어 볼 때 용이 살만한 깊고도
영험해 보이는 샘이 있는 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공자가 防山에
그의 부모를 합장했다고 했는데, 防山은 顔母山으로 니구산과 마주보고
있는 산이다. 숙량흘과 안징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
다. 따라서 野合云云의 소문이 날 여러 배경을 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15) 孔傳, 東家雜記, 巻下 : “叔梁大夫與顔母禱于尼丘 嘗遊此山而生.”
16) 李鍇, 尚史, 卷八十一 孔子繫 : “二女 莫對, 徴在曰 従父所制 将何問焉? 父
曰即爾矣. 遂以妻之.”
116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2. 숙량흘의 가문을 잇지 못한 공자
또 하나의 의문은 왜 공자가 숙량흘의 정식 후계자가 되지 못했냐는
것이다. 羅泌은 路史에서 공자의 형인 皮가 숙량흘을 이어서 추땅에
봉해졌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숙량흘의 의도가 아니라 하더
라도 공자가 숙량흘의 정식 후계자가 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량흘은 聊에 봉해졌는데, 皮와 尼를 낳았다. 그중 孟皮는 聊에 봉해져서 聊
를 성씨로 삼았다.17)
또 공자의 자를 仲尼라고 하고 형의 자를 伯尼라고 한 것에서도 공자
가 적장자를 잇지 못하고 형이 부친의 지위를 이어갔음을 표현하고 있
다. 金履祥은 적장자인 공자가 伯尼가 되어야 하는데 그 서형이 伯尼를
字로 쓴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숙량흘이 살아있을 때는 孟
皮라고 해서 서장자임을 밝혔는데, 숙량흘이 죽고 나서 지은 字에는 어
느새 적장자의 字인 伯尼를 쓴 것이다.
孔子의 庶兄은 孟皮이다. 叔梁紇이 먼저 施氏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九女를
낳고 그 첩이 孟皮를 낳으니, 뒤에 字를 伯尼라고 하였으며 足病이 있었다. 옛
날에는 庶長의 字를 孟이라 했고, 嫡長의 字는 伯이라고 했으니. 여기서 반드시
孔子가 伯자를 써야 하는 것이다.18)
사기 에는 공자가 어려서 미천하였다고 했다. 공자가 처음 태묘에
참석할 때 주변사람에게 일일이 묻자 “누가 鄹人之子가 예를 안다고 했
17) 羅泌, 路史, 卷十九 髙辛紀下 : “叔梁紇(字叔梁 姓解有叔梁氏 妄) 紇封聊
生皮及尼 孟皮襲聊為聊氏.”
18) 金履祥, 論語集註攷證, 巻三 公冶長 : “孔子庶兄 孟皮也. 叔梁紇 前娶施
氏 生九女 其妾生孟皮, 後字 伯尼 有足病. 古者 庶長 字孟, 嫡長 字伯. 此必孔
子伯之也.”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17
는가? 태묘에 들어가서 매사를 묻는구나!”19)라고 한 논어 의 구절은 너
무나 유명하다. 여기서 ‘鄹人之子’라고 한 말에 유의해야 한다. 孔子는
20세에 委吏가 되었고 21세에 乗田吏가 되었다. 주례 에 의하면 委吏는
제사에 쓰는 땔감을 공급하고 乗田吏는 제사에 쓸 희생을 공급하는 일
을 한다. 때문에 태묘에 참가했다는 것은 21세가 훨씬 넘었을 때이고,
또 일일이 묻지 말아야 할 정도로 태묘를 주관하는 신분이었다면 더욱
더 신분이 높고 나이가 많았을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鄹人之子’라
고 했다는 것은 공자의 신분상 뒷 배경이 든든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鄹人之子’라고 할 때의 鄹는 노나라의 읍이름이니, 지금은 鄹縣의 지역에 포
함되어있다. ‘鄹人之子’는 공자가 어려서 천하게 자랄 때의 호칭이다.20)
秦蕙田의 ‘鄹人之子’에 대한 위와 같은 주석이 아니더라도, ‘鄹人之子’
속에는 공자의 선친인 추대부를 비하하겠다는 뜻 뿐만 아니라, 누구 자
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숨어있다. 또 공자는 ‘東家丘’라는 호칭으로
도 불렸는데, 공자가 대부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다면 부를 수 없는 호칭
이다.
蘇子의 말 중에서 “모든 사람의 성인일지라도 어렸을 때는 미천해서 천하가
그가 성인이 됨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노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애는 우리
마을 동쪽집에 살던 丘라는 아이다.’ 또 말하기를 ‘애는 鄹人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21)
歐陽詢이 沈約의 辯聖論을 인용한 것에 의하면 ‘東家丘’뿐만 아니고
19) 論語, 鄕黨 : “子 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 知禮乎? 入大廟 每事
問!
20) 秦蕙田, 五禮通考, 卷二百十 嘉禮八十三 體國經野 : “鄹人之子 鄹魯邑名
今則在鄹縣界. 鄹人之子 乃孔子少賤時之稱.”
21) 葉山, 葉八白易傳, 卷六 : “蘇子之言曰 夫人之聖 其少也賤, 天下莫知其為
聖人. 魯人曰 此吾東家丘也, 又曰此鄹人之子也.”
118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喪家犬’이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물론 ‘喪家犬’은 어려서 불렸던 호칭
이 아닐 수도 있다. 커서 제자들을 데리고 주유천하를 할 때의 모습을
표현한 말에 가깝기 때문이다.
梁나라 沈約의 辯聖論에 말하기를 “仲尼가 살아계실 때에는 그 당시 사람들
이 聖人이라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무의 가지를 치고 발자취를 폄하하
기를 70명의 임금이 지나도록 한결같지 않았으니, 혹은 ‘동쪽 집에 살던 丘’라
하고, 혹자는 ‘상가집 개’라고까지 폄하했다. 만약 鳥가 나타나지 않음을 높
이 탄식하지 않고, 周公을 꿈에서 봄을 일컫지 않고, 아악이 바르게 되어서 雅
와 頌이 각기 제자리를 찾게 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찌 聖人임을 알겠는가?”22)
당시에 대부는 세습되는 벼슬이었다. 그런데 공자가어 에서 형인 皮
가 병이 있어서 세습할 아들을 구하고자 안징재에게 청혼했다고 하였고,
그 결과로 공자를 낳았는데도 세습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그의 모친
을 선친과 합장하고 혹 산소의 위치를 모를까봐 주나라식으로 봉분을
했을 때도 4尺의 높이로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4尺의 높이로 봉분을
한 것은 대부가 아닌 士계급의 예절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23). 이에 대해
서 張萱은 공방숙이 송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도망갔지만 벼슬은 하지 않
았다. 그의 손자 숙량흘이 벼슬을 해서 추(또는 요)땅을 채지로 받았는
데, 공자가 숙량흘의 벼슬을 이어받지 못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
이라고 하였다.
父嘉의 손자는 孔防叔인데 宋으로부터 魯로 달아났으나 노에서 벼슬하지는
않았다. 그 손자인 叔梁紇에 이르러 노나라에 벼슬하여서 聊땅을 채지로 받았
다. … 叔梁紇의 시대에는 大夫들이 모두 世官이었는데, 孔子가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또 귀해졌기 때문에 성씨를 하사받은
22) 歐陽詢, 藝文類聚, 卷二十 人部 : “梁沈約辯聖論曰… 當仲尼在世之時, 世
人 不言為聖人也. 伐樹削迹于七十君 而不一值, 或以為東家丘, 或以為喪家犬.
若不髙歎鳥 稱夢周公 樂正雅頌 各得其所 則當世安知其聖人乎?”
23) 江永, 鄉黨圖考, 先世考 : “聚土曰封 封之周禮也. 高四尺 盖周之士制.”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19
것은 자손이 고치지 못하는 것인데, 孔子가 부친의 성씨로 성씨를 삼지 않고 다
시 또 孔으로 성씨를 삼은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24)
‘鄹人之子, 東家丘, 喪家犬’ 등의 표현에서 공자가 邑大夫의 직위를
세습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자랄 때 아주 미천하게 자랐음을 쉽게 추
측할 수 있다. 앞서 沈約의 말에 의하면 어려서뿐만 아니라 생존 당시,
심지어는 후세의 임금이 70명이 지나갈 때까지도 폄하되고 무시되었음
을 알 수 있다. 李冶가 그의 저서에서 “공자는 성인이고, 숙량흘은 성인
의 부친이며, 안징재는 성인의 모친이다. 그 처음 成婚한 것이 孔子家
語에 실린 것이 이와 같이 상세한데, 司馬遷이 경솔하게 들은 것으로써
깔봐서 말했으니, 그 죄가 큰 것이다.”25)라고 논했듯이 성인의 출생을
깔보며 말하는 풍조가 한나라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공자 당
시에 당한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Ⅳ. 죽음에 임박한 공자의 뿌리생각
1. 선친의 산소 위치를 모른 공자
사기 에는 숙량흘과 안징재의 혼인을 野合이라고 하였다. 정식 혼인
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부친의 산소 위치도 정확히 몰랐다
는 것이다. 즉 공자가 세 살 때 숙량흘이 죽었기 때문에 선친의 산소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모친에게 선친의 산소를 물어보았는데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鄭玄 등 많은 학자는 ‘안징재가 야합해서
24) 張萱, 疑耀, 卷六 孔子姓氏 : “父嘉之孫曰孔防叔 乃自宋奔魯 不仕, 至其
孫叔梁紇 始仕魯 受采聊. … 叔梁紇時 諸大夫皆世官 而孔子不復世父之
官 此既不可曉. 且貴而賜氏 子孫不復改者, 孔子又不以父之氏為氏 乃復以孔為
氏 此尤不可曉也.”
25) 李冶, 敬齋古今黈, 卷三 : “孔子聖人也 紇則聖人之父也 徵在則聖人之母
也. 其始成婚 家語載之 如此其詳, 司馬遷 輕以所聞誣之 其罪大矣.”
120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공자를 낳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26)’고 풀이하였
다. 이에 대해서 史記索隠에는 안징재가 정확한 위치를 몰랐기 때문
에 못 가르쳐준 것이라고 하였다.
孔子가 어려서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산소 위치를 정확히 몰랐던
것이지 무덤이 있는 지역을 몰랐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徵在가 15세에 叔梁紇
에게 시집을 갔고 얼마 안되어서 숙량흘이 늙어 죽었다. 젊어서 과부가 되어서
싫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례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덤이
있는 곳을 몰랐고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지 諱해서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아니
다.27)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어서 남편이 죽었고, 그래서 자신도 청상과부가
된 것을 싫어했고, 또 먼저의 처첩들과 그 자식들에 의해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장례식에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공자가 가난하고 비
천했기 때문에 장성해서도 季氏의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는 사기
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숙량흘의 지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가난하거
나 비천할 리가 없는 것이다. 숙량흘과 야합을 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
에, 친가로부터 안징재와 공자의 존재가 무시되고 인정받지 못했을 것
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紇이 魯나라의 施氏를 아내로 맞이해서 九女를 낳고, 그 妾(시씨의 동생)이
孟皮를 낳으니 字를 伯尼라고 했다(儀禮의 疏에는 孔子兄曰伯居라고 했다). 孟
皮는 足疾이 있었기 때문에 顔氏와 혼인했다(家語).28)
26) 禮記注疏, 卷六 檀弓上 : “孔子之父郰叔梁紇 與顔氏之女徴在 野合而生孔
子 徴在恥焉 不告.”
27) 司馬貞, 史記索隠, 卷十四 孔子系家 : “謂孔子少孤 不的知父墳處 非謂不
知其塋地. 徵在笄年適於梁紇 無幾而老死 是少寡葢以為嫌 不從送葬 故不知墳
處 遂不告耳 非諱之也.”
28) 李鍇, 尚史, 卷八十一 孔子繫 : “紇 取魯之施氏 生九女, 其妾 生孟皮 字伯
尼(儀禮疏孔子兄曰伯居). 孟皮 有足疾 乃婚于顔氏(家語).”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21
孔子가 3세가 되었을 때 叔梁紇이 卒해서 防山에 장사지냈다. 孔子의 모친이
죽었을 때 五父之衢에서 빈소를 차렸다. 郰 땅 사람 중에 輓父(紼引棺)의 母가
孔子 부친의 墓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뒤에야 방산에 모친과 합장할 수 있었
다.29)
이에 대해서 공자의 후손인 孔傳은 예기 의 檀弓편 등의 글을 인용
해서, 공자가 선친의 산소자리를 몰랐다기보다는 은나라의 풍속이 아닌
주나라의 풍속을 따라서 모친의 시신을 선친과 한 묘혈을 쓰기 위해서
라고 하였다. 또 은나라 방식대로 평평하게 하지 않고 봉분을 한 것에
대해서도, 선친의 산소를 찾지 못해서 고생했기 때문에 당시의 풍속대
로 봉분을 함으로써 언제든 쉽게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孔子가 태어난지 2년 만에 숙량흘대부가 卒해서 防땅에 장례지냈다. 孔子의
모친이 죽었을 때 五父之衢에서 殯을 하고 장차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郰人
輓父之母가 孔子에게 부친의 묘소를 가르쳐주었다. 孔子가 말하기를 “옛날에
합장을 하지 않은 것은 먼저 죽은 사람을 다시 볼까봐 어쩌지 못해서이다. 시
경 에 ‘죽어서는 한 곳에 묻히리라’고 했으니, 周公때부터 합장했던 것이다. 그
러므로 衛人의 합장은 묘혈을 따로 쓴다고 했으니 중간에 간격을 둔 것이고, 魯
人의 합장은 한 묘혈을 같이 쓴다고 하니 좋은 방법이다. 나는 魯나라 방식을
따를 것이다.” 드디어 防땅에 합장을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옛날(은나
라)에는 산소에 봉분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東西南北으로
떠도는 사람이니 표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30)
그러나 공전의 위와 같은 글은 邵泰衢가 檀弓疑問에서 제시했듯이
29) 孔傳, 東家雜記, 巻下 : “孔子三而叔梁紇卒 乃葬於防山. 孔子母死 殯于
五父之衢 郰人輓父之母告孔子父墓 然後往合葬於防焉.”
30) 孔傳, 東家雜記, 巻下 齊國公墓 : “孔子生二而叔梁大夫卒 葬於防. 孔子
之母 既 殯於五父之衢 將立葬焉. 郰人輓父之母 誨孔子父墓. 孔子曰 古者
不祔葬 為不忍先死者之復日也. 詩云 死則同穴, 自周公以來 祔葬矣. 故衛人之
祔也 離之 有以間焉. 魯人之祔也 合之 善夫 吾從魯. 遂合葬於防曰 吾聞之 古
墓而不墳, 今某也 東西南北之人 不可以弗識也.”
122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여러 의문이 일어나게 한다. 특히 어떻게 자신이 成人이 되고 모친이 죽
을 때까지 선친의 산소 위치를 모를 수 있고, 郰의 曼父之母는 누구이길
래 그 말을 믿고 모친과 합장을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禮記大全의 주석에 “안씨가 죽었을 때 夫子가 立한지 오래되었다. 聖人은
人倫의 至極함인데, 어찌 모친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부친의 塟地를 몰랐고, 더
욱이 모친을 殯할 때에 이르러서도 모른단 말인가? 또 모친을 衢路에 殯했다고
한다면 室廬 等이 없어서 道路에서 죽었단 말인가? 聖人은 禮法의 宗主이신데
차마 그렇게 했겠는가? 사마천 등이 野合之說을 말해서 顔氏가 諱해서 不告했
다고 하고, 鄭玄이 사마천의 글을 인용해서 後世에 미혹됨을 끼쳤고, 이 말들이
諸子들의 기록에서 나와서 증거하지 못하는데도 사실이 되었다.”고 한다. 나 邵
泰衢는 “郰의 曼父之母에게 물은 뒤에야 防에 합장했다고 하니, 郰의 曼父之母
는 누구의 어머니이길래 聖母가 夫子에게는 알리지 않고 도리어 郰의 曼父之母
에게 알리셨는가? 또 曼父之母는 어떤 연유로 진실을 알고 있고 夫子는 어떤
까닭으로 그것을 간절하게 믿어서 마침내 合塟을 하셨는가? 혹시나 진실이 아
니었다면 夫子의 罪는 무엇과 같은가? 曼父之母가 聖母에 앞서서 죽었다면 聖
母를 道路에 염을 했을 것인가? 夫子께서 모친이 살아계실 때 선친의 산소 위
치를 묻지 않고 모친이 亡할 때에 이르러 道路에서 염을 하면서 僥倖히 曼父의
母에게 가르쳐주기를 바란 것이 옳은가? 지금 질문하는 것이 옳았다 하였으면
또 어찌 염을 하기 전에 묻지 않고 五父에서 염을 하며 비로소 물었단 말인가?
夫子를 夫子가 되게 한 까닭이 이러한 것인가? 마땅히 극도로 분별해서 바로해
야 할 것이다.”31)
31) 邵泰衢, 檀弓疑問, 檀弓 : “註曰顔氏之死 夫子成立久矣 聖人人倫之至, 豈
有終母世而不知父塟地, 至母殯而猶不知乎? 且曰 母殯于衢路, 必無室廬等于死
道路? 聖人禮法之宗主 忍為之乎? 馬遷為野合之說 遂謂顔氏諱而不告,鄭注因
之 以滋後世之惑, 此出諸子所記 不足據為實也. 衢曰問于郰曼父之母然後得合
塟于防 夫郰曼父之母何母也, 聖母不告之夫子 豈反告之郰曼父之母乎? 且母
何由知之眞 而夫子何故信之切 竟漫然合塟乎? 倘冒昧不真 夫子之罪何似乎?
倘母先聖母而捐館焉 将聖母終殯道路乎? 夫子 不詢之母在之日 迨母亡而殯之
道路 而僥倖于郰曼父之母之一問可乎? 今曰既可問之 又何不先殯而問之 乃殯
于五父而始問之? 夫子之所以為夫子者 如此乎? 宜亟辯而正之.”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23
그래서 ‘孔子少孤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라고 하는 예기 단궁편의
글을 江永 등 학자는 산소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른 것이 아니고, 다만 깊
이 묻혀있는지 혹은 낮게 묻혀있는 줄을 몰랐던 것뿐이라고 하였다. 즉
낮게 묻혀있다면 합장이 가능하고 깊이 묻혀있다면 이미 體魄이 안정되
어 있으므로 합장이 불가능한데, 낮게 묻혀있으므로 합장을 했다는 뜻
이다.
‘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의 열 글자는 마땅히 연속해서 한 구절로 읽어야 하
고, ‘葢殯也問於郰曼父之母’에 와서 구절을 이루어야 예절에 도움이 되고 예기
가 얕은 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대개 옛 사람이 구덩이에 관을 매장하는 것이
殯인데, 殯은 낮고 葬은 깊이 매장하는 것이다. 孔子父의 墓가 五父之衢에 淺葬
되어 있지만 어려서 고아가 되었기에 그 실상을 자세히 모르고, 다만 墓가 五父
之衢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殯으로 되어있는 것을 모른 것이다.32)
孔穎達이 “墓의 處所를 다 몰랐다는 것이 아니고 柩의 所在를 몰랐다”고 한
것이 옳다. 殷 이전은 墓를 하되 墳을 하지 않았다. 鄹大夫는 비록 魯에 벼슬했
으나 그 벼슬이 낮았고, 스스로 殷의 禮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봉분도 하지
않고 표식의 나무도 심지 않았기 때문에 墓祭도 없었다. 聖母는 어려서 과부가
되었고 禮法을 삼갔기 때문에 자주 묘소를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래됨에 잘
몰랐던 것이니, 이것은 사리에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다.33)
위의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선친의 시신 위치를 몰랐던 것이라는 설
과 산소 자체의 위치를 몰랐었다는 두 가지 설이 대립한다. 그러나 공자
가 모친과 합장을 하고 자신은 “동서남북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표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산소의 위
32) 江永, 禮記訓義擇言, 卷二 檀弓上 : “不知其墓殯於五父之衢十字 當連讀為
句 而葢殯也問於郰曼父之母 為倒句 有於禮 經者不淺. 葢古人 埋棺於坎為
殯 殯淺而葬深. 孔子父墓 實淺葬於五父之衢 因少孤不得其詳 但見墓在五父之
衢 不知其為殯也.”
33) 方苞, 禮記析疑, 卷三 檀弓 : “穎逹謂 非全不知墓之處所 乃不知柩之所在
是也. 自殷以前 墓而不墳. 鄹大夫 雖仕於魯, 其官卑 自當守殷禮 不封不樹 古
無墓祭. 聖母少寡 謹於禮法 無為數適墓所. 故久而失迷 此事理之無足怪者.”
124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치를 몰랐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성인이 되도록 선친의
산소 위치를 몰랐던 것일까?
2. 九夷와 殷人으로 돌아가자
사람이 어렵고 힘들 때, 그리고 자랑할 일이 있을 때 고향을 그리워하
듯이, 공자도 때로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중국에서 뜻을 펴지 못했
을 때면 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공자께서 구이에 가서 살고자 하시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누추한데 어떻
게 하시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군자가 거주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34)
이 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특히 ‘君子居之’에 대해서는 ‘군
자가 거주한다면’이라는 해석과 ‘군자가 거주하니’로 나뉜다. 전자는 내
가 가서 거처한다면 그곳이 교화되어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텐데 무슨
걱정이냐는 뜻이 된다. 후자는 九夷에 이미 군자가 거처해서 교화가 되
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해서 張載 역시 둘로
나누어 풀이하고 있다.
횡거가 말하기를 “子欲居九夷는 중국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九夷에서 살고
자 하는 것이니, 중국이 누추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말하기를 “말을 忠信
하게 하고 행실을 篤敬하게 하면 비록 蠻貊이라도 도를 통하게 할 수 있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35)
張載의 말은 공자 당시에 중국이 누추해졌기 때문에 군자가 교화해서
34) 論語, 子罕 : “子 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35) 朱子, 論語精義, 子罕 : “横渠曰 子欲居九夷 不遇於中國 庶遇於九夷, 中
國之陋為 可知. 又曰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 可行 何陋之有?”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25
살기 좋게 된 九夷로 가고자 한다는 뜻이다. 다만 또 말과 행실을 군자
답게 한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교화될 것이라는 도덕적인
말을 더함으로써 후학들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나 范祖禹는 공자가 거처하면 비록 누추한 九夷일망정 교화된다
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范祖禹가 말하기를 “말을 忠信하게 하고 행실을 篤敬하게 하면 비록 蠻貊이
사는 나라라도 도를 행하게 할 것이다. 君子가 거처하면 교화되어 도덕국가가
될 것이니, 안과 밖도 없고 땅을 선택해서 거처할 것도 없으니, 비록 九夷라도
거처할 수 있는 것이다. 夫子는 끝내 거처하지 않으시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道를 밝힌 것이다.36)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자는 노나라에 오랫동
안 거처했는데도 노나라가 교화되어 왕도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주유천하를 하면서 사방의 국가를 다녔으나 이렇다 할 교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공자 자신도 말했듯이 聖德과 지위를 동시에 갖추지 못
했기 때문이다. 지위와 聖德을 동시에 갖췄다면 도덕국가를 이루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조건이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논어 에 말
했듯이 100년이라는 긴 교화와 두 세대 이상의 교화가 행해져야 도덕국
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선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백 년 동안 하면 잔
학한 사람을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다.’라고 하니, 참으로 옳다! 이 말이
여!” 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만일 왕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인해질 것이다.”37)
36) 朱子, 論語精義, 子罕 : “范曰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君子所居
則化道 無内外不擇地而處 則雖九夷 可居也. 夫子終不居之 而以告人者 所以
明道也.”
37) 論語, 子路 : “子曰 善人 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矣 誠哉 是言也! 子曰
如有王者 必世而後仁.”
126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그런데 范祖禹식으로 풀이한다면, ‘말을 忠信하게 하고 행실을 篤敬
하게 하는 것’으로 모든 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고, 더구나 공자 스
스로 자신을 지칭해서 ‘九夷라도 교화할 수 있는 君子’라고 했다고 한
것이다. 이는 공자를 칭송하는 말이 아니고 공자를 비방하는 말이다. 그
런데도 역대의 학자들이 范祖禹식의 풀이를 해왔다. 공자를 위해서 밝
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원나라 사람 何異孫이 지었다고 추측되는 十一經問對
의 내용이다. 논어 에 공자가 군자를 일컬은 것이 모두 42번이지만 공
자가 자칭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묻기를 “ 논어 20편에서 군자를 일컬은 것은 몇 번입니까?” 대답하기를 “42
번이다. 범칭한 것은 ‘説樂不愠’으로부터 시작해서 16번이고, 사람을 취해서 말
한 것은 ‘子賤’으로부터 시작해서 세 명이고, 사람을 책망한 것은 ‘冉子請粟’을
시작으로 해서 9번이고, 질문에 답을 한 것은 ‘子貢’으로부터 시작해서 6번이고,
소인에 대비해서 일컬은 것은 ‘周比’로부터 시작해서 8번이다.”
묻기를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은 몇 번입니까?” 대답하기를 “없다.
‘君子之道四’에서도 ‘丘未能一焉’이라 했고, 蘧伯玉이 혼자만 군자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하시니, 聖人께서 칭찬을 좋아하고 도를 즐기신 것이다
.”38)
즉 공자 스스로 君子라고 자칭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시 군자를
칭찬하고 만나기를 기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또 十一經問
對에 의하면 九夷가 군자의 교화를 받아 덕이 있고 예절이 있는 나라
이며, 그 구체적인 지역 및 호칭은 東夷이고, 공자가 말한 군자는 箕子
38) 何異孫, 十一經問對, 卷一 論語 : “問論語二十篇 稱君子者 ? 對曰 四十
有二. 泛言者 自説樂不愠而下一十有六, 取人者 自子賤而下有三, 責人者 自冉
子請粟而下有九, 荅問者 自子貢而下有六, 與小人對稱者 自周比而下有八. 問
孔子自稱君子者 ? 對曰 無之. 君子之道四 且曰 丘未能一焉, 蘧伯玉 恥獨為
君子 聖人之所以喜稱而樂道也.”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27
라는 것이다.
묻기를 “자한편에 공자께서 구이에 거처하고자 하시니, 혹이 묻기를 ‘누추한
데 어찌하시렵니까?’라하자, 공자께서 ‘군자가 거처하였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
겠는가?’라 하셨으니, 이것이 자칭한 것이 아닙니까?” 대답하기를 “ ‘欲居’의
‘居’는 부자께서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고, ‘居之’의 ‘居’는 군자가 거처한다
는 것이지 자칭하신 것이 아니다.”
…묻기를 “옛날의 군자로 구이의 방국에 거처하면서 그 풍속을 교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하기를 “…집주에 말하기를 ‘구이는 동이다. 부
자께서 거처하고자 했다는 것은,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뜻이다.’라고 했
다.…”
묻기를 “예로부터 참으로 있었습니까? 또 동이를 말한 곳의 군자는 누구입니
까?” 대답하기를 “동이라고 한 것은 주나라의 조선땅이다. 기자가 조선에 봉함
을 받아서 도를 미루어서 풍속을 가르치고 백성을 교화시키며, 예의로써 농사
짓고 누에를 쳤으니, 지금에 이르러 먹고 마심에 籩豆를 사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衣冠과 禮樂이 中州와 같은 것은 기지가 교화를 시켰기 때문이다. ‘君
子居之’라는 구절은 아마도 기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공자께서 자칭해서 군
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39)
箕子가 교화한 東夷는 도가 행해지는데, 공자가 거처하고 있는 중국
은 누추해졌다. 그래서 乘桴浮海해서라도 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는 뜻
이다. 그러나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니 자신도 모르게 한탄이 나와서 이
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39) 何異孫, 十一經問對, 卷一 論語 : “問子罕篇 子欲居九夷 或曰陋如之何 子
曰君子居之 何陋之有 如何 不是自稱 對曰欲居之居屬夫子 居之之居屬君子 恐
非自稱. … 問古之君子 處夷方 而能變其俗者 誰? 對曰 …集註曰 九夷者 東夷
也. 夫子欲居之者 此 乗桴浮海之意…. 自古 固有之, 且説處東夷者 君子為誰?
對曰東夷者 周朝鮮之地. 箕子 受封於朝鮮 能推道訓俗教民 以禮義田蠶 至今
民飲食以籩豆為貴 衣冠禮樂與中州同 以箕子之化也. 君子居之一句 恐指箕子
言之 非孔子自稱 為君子也.”
128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묻기를 “공자께서 거처하고자 했다는 것이 이것을 위해서입니까?” 대답하기
를 “佛肸이 공자를 부름에 가고자 했지만 어찌 일찍이 갔겠는가? ‘欲’이란 것은
장차라는 것이니 아직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고, ‘居’라는 것은 이것을 버리고
저리로 간다는 뜻이니, ‘乘桴浮海’하시려는 뜻이 슬프구나!”40)
공자는 죽을 때 임박해서야 본인이 은나라의 후예임을 밝히고 은나라
식으로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구하였다. 지팡이를 끌면서 지난밤의 꿈
을 생각하며 뜰을 거니는 노철학자의 모습에서 죽음을 감지한 자공에게
말한 것이다. 네가 늦게 와서 이 말을 못할 뻔 했다는 공자의 말에서, 조
상을 생각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아픔이 배어나온다.
부자가 말씀하시기를 ‘사야 너의 옴이 왜 이리 늦었는가? 하후씨는 동쪽 계
단에서 시신을 모시니 주인이 자리한 것과 같고, 은나라는 두 기둥 사이에서 시
신을 모시니 손님과 주인을 양쪽에 모신 것과 같고, 주나라 사람은 서쪽 계단에
모시니 손님과 같다. 나는 은나라 사람인데 내가 지난밤에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서 음식을 대접받는 꿈을 꾸었다. 明王이 일어나 정치를 하지 않는데 천하에 그
누가 나를 그렇게 받들 수 있겠는가? 내가 장차 죽을 꿈이로다.’ 침실에 누워서
7일을 앓은 뒤에 돌아가셨다.41)
Ⅴ. 공자의 名과 字의 유래
1. 니구산 유래설
공자의 이름은 출생 후 3개월째에 부친이 지어주었고, 관례를 치를
40) 十一經問對, 卷一 論語 : “問孔子欲居之者 為此乎? 對曰 佛肸召子欲 何
嘗也? 欲者 将然未然之辭, 居者 捨此彼之意, 乘桴浮海志 可悲哉!”
41) 鄭玄 注, 孔穎達 疏, 禮記注疏, 檀弓上 : “夫子曰 賜! 爾來 何遲也? 夏后
氏殯於東階之上 則猶在阼也, 殷人殯於兩楹之間 則與主 夾之也, 周人殯於西
階之上 則猶之也. 而丘也 殷人也, 予疇昔之夜 夢坐奠於兩楹之間. 夫明王不
興 而天下其孰能宗予? 予殆將死也. 蓋寢疾七日而沒.”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29
때 字를 지었다고 한다. 衛湜은 그의 禮記集説에서 葉石林의 말을 인
용해서 숙량흘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고, 魏了翁은 그의 儀禮要
義에서 “孔子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丘라고 이름지었다”고 하였다.
공자가 태어난지 3개월 만에 숙량흘이 이름을 지었는데, 부모만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이름을 불렀다. 관례를 치를 때에 이르러서는 성인이
되었으니, 다른 사람만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부모도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字를 쓰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 이름을 높인 것이
다.42)
스무살에 冠禮를 할 때 字를 지어서 준다. 孔子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丘
라고 이름했고, 스무살에 관례를 할 때 이르러 仲尼라고 자를 썼다. 兄이 있어
서 伯居라고 했으니 둘째이기 때문에 仲이라고 한 것이다.43)
위의 인용으로 볼 때 공자의 名은 부친이 지어주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名과 字는 아주 독특하다. 그래서 공자의 名과 字의 유래에 대해
서 여러 설이 존재하여왔다. 李鍇는 “尼丘山에서 기도하여 孔子를 낳았
기 때문에 이름을 丘라 하고 字를 仲尼라 하였다.”라는 대목에 주석을
하면서 사기 , 백호통 등등 여러 서적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에 의하
면 ①尼丘山에 빌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尼丘山의 尼丘를 썼다는 설과
②정수리가 오목한 짱구였기 때문에 丘자를 썼다는 두 가지 설이 유력
하다.
史記에 “태어나면서 머리 위에 정수리가 오목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丘라
하였다”하였고, 史記索隠의 주석에 “정수리 위가 낮고 비뚤었다(窳). 孔子의
정수리가 反宇같았는데, 反宇는 지붕 위의 反이라는 뜻으로 가운데는 낮고 사
42) 衛湜, 禮記集説, 卷十八 : “石林葉氏曰 子生三月而父名之, 非特父名之 人
亦名之也. 至冠則成人矣. 非特人不得名 父亦不名焉. 故加之字而不名 所以尊
名也.”
43) 魏了翁, 儀禮要義, 卷三 士冠禮 : “…二十冠時與之作字 猶孔子生三月名之
曰丘 至二十冠而字之曰仲尼 有兄曰伯居. 第二則曰仲.”
130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방의 곁은 높은 것을 말한다”고 하였으며, 白虎通에 “孔子는 反宇라서 尼甫
라고 불렀다. 丘는 徳澤이 일어나는 곳으로 샘과 같이 근원을 저장했다가 유통
시키는 것이다”고 했고, 論衡에는 “孔子는 反羽”라 하였으며, 荀子에는 “仲
尼의 형상은 얼굴이 蒙倛(섣달에 疫鬼를 몰아내는 데 쓰는 험상궂은 얼굴에 머
리털이 산발한 神像)와 닮았다.”하였고, 史記에 “孔子는 魯의 昌平鄉 陬邑에
서 태어났다”고 하니, 孔安國이 “陬는 叔梁紇이 다스리던 읍이다.”고 했다. 干
寳三日紀에 “徵在가 孔子를 空桑之地에서 낳으니, 지금은 空竇라고 하는 곳으
로 俗名은 女陵山이다”고 했으며, 新論에 “顔徵在가 黒帝와 교감해서 孔子를
낳았다.”고 하였다.44)
孫 역시 春秋演孔圖를 인용하면서 니구산에 빌어서 태어났고 또
頭狀이 니구산을 닮았기 때문에 尼丘라고 이름했다고 하였다..
孔子의 모친 顔徴在가 太冡의 언덕에 있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 黑帝가 너와
이미 교감했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空桑에서 젖을 먹여라.” 깨어
나니 생생하였다. 공구를 空桑에서 낳았는데, 그 머리통이 尼丘山과 같았기 때
문에 尼丘로 이름을 하였다.45)
이상의 인용들은 尼丘山과 孔子의 이름 丘, 그리고 字의 尼를 연결시
키고 있다. 공자의 모친이 니구산에 빌어서 낳았기 때문에 니구산의 이
름을 이름과 자에 썼다는 것이다. 심지어 머리의 생김새를 상형해서 이
름을 지었다고까지 하였다. 특히 荀子에는 공자의 얼굴이 험상궂게
44) 李鍇, 尚史, 卷八十一 孔子繫 : “因禱尼丘之山 生孔子 故名丘 字仲尼. ‘史
記 生而首上圩頂 故名丘, 索隠注言 頂上窳也 孔子頂如反宇 反宇者 若屋宇之
反 中低而四傍髙也. 白虎通 孔子反宇 是謂尼甫 丘徳澤所興 蔵元通流. 論衡
孔子反羽, 荀子 仲尼之状 面如蒙倛. 史記 孔子生魯昌平鄉陬邑, 孔安國曰 陬
叔梁紇所治邑. 于寳三日紀 徵在生孔子空桑之地 今名空竇 俗名女陵山. 新論
顔徵感黒帝而生孔子’.”
45) 孫, 古書, 卷八 春秋演孔圖 : “孔子母顔氏徴在 遊太冡之陂 睡夢黑帝
使請與已交語曰 女乳必於空桑之中. 覺則若感 生丘於空桑 首類尼丘山 故以為
名.”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31
생긴 蒙倛와 닮았다고까지 한 것이다.
2. 東夷유래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유명한 설은 공자를 폄하하는 말에 가깝다. 그의
형 맹피가 몸이 아팠기 때문에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이 장가를 들어서 지위를 이어받을 아들을 낳고자 하였다고 하면서
도, 공자의 名과 字에 대해서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는다는 뜻도 없고,
단지 생김새 혹은 기도한 산의 이름을 따서 名과 字를 지었단 말인가?
이야말로 ‘東家丘’나 ‘鄹人之子’라고 호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더
구나 名을 지은 사람이 대를 이을 자식을 낳고자 갖은 노력을 다한 그
의 부친이라면 더욱더 말이 안 되는 이름이다. 누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
들 이름을 ‘짱구’라는 생김새를 보고 ‘짱구’라고 짓겠는가?
앞서 말했듯이 공자는 은나라의 후예이고, 그 서형의 이름은 皮이고
字는 伯尼이다. 皮는 ‘절름발이 跛’나 ‘비탈 陂’자와 비슷하므로, 공자가
‘언덕 丘’자를 이름으로 쓴 것과 뜻이 유사하다. 또한 앞서 언급한대로
이름은 공자가 태어난지 세 달 만에 부친이 지은 것이므로, 형이나 동생
모두 언덕의 뜻을 살려서 皮 또는 丘로 이름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字는 관례를 치를 때 짓거나 인군으로부터 하사받아서 쓰는 호칭
이다. 이미 성인이 되었다는 뜻이고 사회적으로 충분히 존경을 받는다
는 뜻이다. 공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부친이 죽은 지 17년 이상이 지
난 때이다. 그러므로 임금이나 스승 등 제3자가 지었거나 본인이 지었을
것이다. 공자가 20이 되었을 때는 아직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스스로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례를 치를 때에 이르러서는 성인이 되었으니, 다른 사람만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부모도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字를 쓰고 이름
을 부르지 않았으니 이름을 높인 것이다. 50세에 大夫가 되었으니 더욱 높아졌
132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다. 조정에 지위가 있는 것이니, 다른 사람만 字를 부르지 못한 것이 아니고 부
모와 인군 역시 자를 부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伯 또는 仲이라 하고 字
를 부르지 못했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字를 높인 것이다.46)
공자 형의 字인 伯尼의 尼는 孔尼의 尼자를 쓴 이유와 같을 것이다.
다만 형이므로 伯尼로 쓴 것이고, 동생이므로 仲尼라고 쓴 것이라고 본
다. 이렇게 보면 이름의 丘는 몰라도, 字의 尼는 尼丘山에서 이름을 취
했다고 보기 어렵다. 형도 니구산에 빌어서 낳았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
이다. 丘光庭은 仲尼의 尼와 僧尼의 尼는 다르다고 하면서, 仲尼의 尼는
본래 (仁 또는 夷의 古字)였는데, 후에 잘못해서 尼로 정착되었으므로,
성인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仲尼:지금 사람은 仲尼의 尼와 僧尼의 尼를 읽을 때 음을 같이 하지만 밝혀
서 말하면 그른 것이다. 仲尼의 尼는 夷로 발음해야 마땅하니 夷字의 古字이다.
尚書의 古文을 살펴보면 “隅 島 莱”에 모두 로 썼고, 今文에는 모두
夷로 썼으니, 그렇다면 夷와 는 音과 義가 같은 것이다. 또 左傳을 살펴보
면 魯 哀公이 孔子를 조문하면서 “嗚呼哀哉 父!”라 했는데 晉의 王衍의 字가
夷甫(音甫)이니, 父를 今文으로 쓴 것이다. 또 漢에 諌가 있고, 晉에 潘가
있는 것은 아직도 古字를 쓴 것이다. 字書를 살펴보면 仲尼의 에는 尸자 밑
에 二자가 있고, 僧尼의 尼에는 尸자 밑에 工자로 되어있으니, 文字가 같지 않
은 것이고, 音과 義 또한 구별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分别을 하지 못하고 한 글
자인 것처럼 부르니, 실로 성인의 이름을 어긋나게 부르는 것이로다!.47)
46) 衛湜, 禮記集説, 卷十八 : “石林葉氏曰至冠則成人矣. 非特人不得名 父亦
不名焉. 故加之字而不名 所以尊名也. 五十為大夫 則益尊矣. 有位於朝 非特人
不字 父與君亦不字焉. 故但曰伯仲而不字 所以尊字也.”
47) 丘光庭, 兼明書, 孝經 : “仲尼 今人 讀仲尼之尼與僧尼之尼 音同, 明曰非
也. 仲尼之尼 當音夷 古夷字耳. 按尚書古文隅 島莱 並作, 今文皆作
夷 然則夷 音義同也. 又按左傳 魯哀公誄孔子 曰嗚呼哀哉 父! 晉王衍 字
夷甫(音甫) 是用今文耳. 又漢有諌 晉有潘, 猶用古字. 按字書 仲尼之 從
尸下二, 僧尼之尼 從尸下工, 文字不同 音義亦别. 代人不能分别 乃一槩而呼
實乖聖人之音也.”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33
구광정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尼丘山에서 한 글자씩 따서 名과 字를
썼다는 것은 잘 납득이 안 간다. 마치 시냇물에서 시와 내를 나누어, 시
는 名으로 쓰고 내는 字로 썼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또 당시 名과 字를
쓸 때는 서로 연관된 뜻이 있는 글자를 써온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曾子의 명은 參(참)이고 자는 子輿이다. 이름에 참말(驂)이라는 뜻이 있
기 때문에 자를 쓸 때 ‘수레 輿’자를 쓴 것이다. 공자도 맏아들 이름을
지을 때 ‘잉어 鯉’자를 쓰고 자를 ‘伯魚’라고 한 것이다.
19세에 宋의 幵官氏의 딸을 아내로 삼았고 1년 뒤에 伯魚를 낳았다. 伯魚가
태어날 때에 昭公이 鯉를 하사하였다. 孔子는 인군의 하사품을 영광으로 알았
기 때문에 이름을 鯉라 하고 字를 伯魚라 하였다.48)
夷는 人과 통하고, 人은 仁과 통한다. 공니의 니를 로 보아 夷 또는
仁의 古字라고 하면, 공자가 동이의 후손이라고 한 말과 名과 字가 잘
맞는다. 仁을 숭상하는 민족이고, 하늘의 뜻을 유순하게 받들며 사는 민
족이라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또 는 어질다 평평하다는 뜻을 갖고 있
는데다 글자 그대로 東夷를 나타낸다. 孔丘의 丘를 분지 또는 평지로 보
고, 仲尼의 尼는 ‘평평할 夷’ 또는 ‘어질 인仁’으로 보면 丘와 尼가 서로
연결된다. 이렇게 보면 名과 字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뜻이 하나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尼丘山 역시 동이가 근거로 삼아 살던 산이라는 뜻
일 수도 있다. 앞서 羅泌이 공자가 태어난 空桑은 隅夷땅을 가리키는 말
일 것이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산동지역은 동이 또는 隅夷의 지역이었
기 때문이다.
名과 달리 字는 성장해서 붙이는 호칭임을 감안하면, 공자 자신이 동
이출신이라는 자신의 의지가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공자의 성씨
48) 李鍇, 尚史, 卷八十一 孔子繫 : “十九娶于宋之幵官氏 一而生伯魚. 伯
魚之生也 昭公以鯉賜 孔子 榮君之貺. 故名曰鯉 字伯魚 史記世家家語”
134 儒敎思想文化硏究 第48輯
인 孔은 와 子의 합성자로 되어있다. 는 玄鳥를 뜻하는 글자로 공
자의 조상이자 殷의 조상인 契이 태어날 때 알을 물어다 주어서 簡翟으
로 하여금 임신하게 한 새이다. 또 子는 殷이 우임금을 도와 치수를 한
공으로 하사받은 성씨이다. 결국 ‘孔’자는 玄鳥와 契이 결합한 글자이고
이는 殷의 후예임을 드러낸 성씨로, , 丘 등과 더불어 공자가 동이의
후손임을 알리는 姓氏·名·字임을 알 수 있다.
내가 ‘孔’字를 고찰해보니, 子와 乙을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 子는 商나라가
봉지로 받은 데서 연유한 것이고, 乙은 玄鳥이다. 契의 모친이 玄鳥의 알을 삼
키고 契을 낳아서 商의 鼻祖가 됨으로써 성씨를 하사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孔
이라고 한 것은 玄鳥의 상서로움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지금 字書에는 모두
孔을 嘉美한 호칭이라고 하니, 乙(玄鳥)로써 子를 낳게 된 것이 嘉美한 것이
다.49)
說文解字 [ 部]에 “孔은 통한다는 뜻이다. 와 子를 구성요소로 한다.
아들을 낳게 해주는 철새(候鳥)이다. 가 이르러서 아들을 얻었기에 嘉美의
뜻이 있다. 옛 사람들은 名이 嘉인 사람은 字를 子孔이라고 했다. 孔은 康과 董
의 反切로 공으로 읽는다.”50)
Ⅵ. 맺음말
이상으로 공자의 탄생배경을 살펴보았고, 또 공자의 名과 字에 대해
그 쓰게 된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았으며, 아울러 공자의 殷에 대한 그리
움의 근원처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공자는 殷나라의 후손임을 항상 생
각해왔고, 평소에 名과 字에 殷의 후손임을 드러낼 정도로 殷에 대해 자
49) 張萱, 疑耀, 卷六 孔子姓氏 : “…余按孔字, 从子 从乙. 子者 商之所以封也,
乙者 玄鳥也. 契之母 吞玄鳥卵而生契 為商之鼻祖 賜姓, 孔者 所以紹祥玄鳥也.
今字書 皆以孔為嘉美之稱, 以乙之生子為嘉美.”
50) 許愼, 說文解字, 部 : “孔 通也. 从从子. 請子之候鳥也. 至而得
子 嘉美之也. 古人名嘉 字子孔. 康董切”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35
부심을 느껴왔고, 죽음을 맞이할 때 역시 殷나라 사람임을 밝힘으로써
殷나라식 장례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哀公이 宰我에게 三代의 사당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가 탄식하기는 하였지만, 공자의 묘당에 잣나무
를 가득 심게 된 이유도 공자가 殷나라의 후예임을 안 제자들이 은나라
방식으로 모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본 바대로 공자가 어렸을 때는 같은 씨족으로부터
환영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부친이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열 자
녀를 두고도 또 姓이 있는 명문의 처녀에게 혼인을 요구할 정도로 부와
권세를 누린 것에 비해 사기 의 “가난하고 천했다”는 기록은 너무 차
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 그의 모친이 남편의 산소자리도 몰랐다, 혹은
알았어도 아들에게 가르쳐줄 형편이 못되었다는 것도 친족으로부터 대
접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東家丘’나 ‘鄹
人之子’와 같은 호칭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숙량흘이 지위를 잇기 위
해서 낳았다고 하지만, 적장자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伯字를 쓰지 못하
고 仲字를 쓴데 반해서, 庶兄이 伯字를 쓰고 부친의 채지 역시 庶兄이
물려받은 것도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공자가 태어났다는 空桑이라는 굴과 黑帝와의 교감에서 느껴지는 은
밀함, 공자부모가 살았던 추읍과 안씨의 집성촌이 가까운 이웃 마을이
라는 것, 그리고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 자식을 낳은지 2년이 못되어서
죽었기 때문에, 그 자식을 낳은 것에 대해서 친척은 물론이고 주변에 살
았던 사람들이 野合 云云하며 숙량흘의 자식임도 의심했을 것이다. 그
결과 당연히 물려받아야 될 부친의 지위를 庶兄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공자 자신도 공씨의 후예인지조차 의심받는 분위기에서 자신이 공씨
의 후예이고 나아가 殷의 후예임을 밝히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공자의 마음속에는 조상에 대한 그리움과 소외감이 같이 우러났을 것이
다. 또 당시 지배계급이 殷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은의
후예임을 드러내고 은의 습속대로 살기가 어려웠다고도 볼 수 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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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가 장성해서 명성을 얻게 돼서는 모친을 부친하고 합장할 수 있었
고, 또 서형인 孟皮의 딸을 제자인 南容에게 시집보낼 만큼 친족사회에
서의 권위도 있었으며, 때때로 제자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은나라의 후
예임을 밝힐 수 있었다고 본다.
공자의 字를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나, 본래의 글자가 夷 또는 仁의 古
字인 라고 한다면 이 역시 자신의 출신을 은연중 드러낸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훗날 공자의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자의 자를
쓸 때 한결같이 僧尼의 尼로 쓴 것과, 서형 맹피의 자 역시 伯尼로 쓴
것은 공자의 뜻을 크게 거슬린 것이므로 孔와 仲 그리고 伯로 각
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논어 등에 나오는 공자의 三代 또는
‘君子居之 何陋之有?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와 같은 東夷에 관한
내용에 대해 후학자들이 풀이한 것도 東夷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내용으
로 다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 투고일: 12.5.31 심사일: 12.6.12 심사완료일: 1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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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Ethnic Origin of Confucius and Its Interrelationship with His Given
Name(名) and Courtesy Name(字) / Yoon, Sang-cheol
Confucius himself did not directly mention he is of Yin(殷) and Dongyi(東夷) ethnic
origin, although his Yin and Dongyi related comments are found in the Analects:“The
Master was wishing to go and live among the nineYis(子欲居九夷),” “Yidi(夷狄) with
rulers are not like the states of Xia without them(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the Yin dynasty possessed these three men of virtue(殷有三仁焉),” and “the Yin
dynasty followed the regulations of the Xia(殷因於夏禮).”
However, as death approached, when told about his dream to Zigong(子貢), he
implied that he is of Yin ethnic origin and his funeral should be held in accordance
with Yin funeral manners. Confucius has been regarded as the teacher of one hundred
generations, the lord of ten thousand years, and the synthesizer of Confucianism.
Nevertheless, “what were the reasons why he was unable to reveal his ancestry?” This
is the main issue of this paper. Some have argued that due to living under the Zhou
(周) dynasty, established after overthrowing Yin dynasty, it was difficult for him to
disclose his ethnic origin as a Yin descendant. This paper, however, focuses on the fact
that Confucius was not accepted as the eldest son and looked down upon during his
childhood because of his birth.
According to Confucius House hold Sayings(孔子家語), Confucius’ father married
Yan(颜氏) to have a son despite his age over 60 since Confucius’ elder brother was not
only born of a concubine but suffering from foot disease. If Confucius had been born
with a bang, he should have carried on the family line as the eldest legitimate son;
however, he did not know the location of his father’s grave, could not use the
character bai(伯) used as courtesy name for the eldest legitimate son, and had to yield
Zou 郰(or Liao 聊) inherited from his father to his elder brother. Moreover, in his early
days, he was called “Qiu of the Eastern house(東家丘)” or “ the son of the man of
Zou(鄹人之子)” incompatible with the position of the Dafu’s eldest legitimate son. On
공자의 출신과 그 名 및 字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39
the other hand, Mengpi(孟皮), his elder brother carried on the family lineage by using
Baini(伯尼), style name for the eldest legitimate son and handed down the family line
to his son Zong 忠(Zimie 子蔑) in spite of having fatal weaknesses such as being born
of a concubine and having foot illness.
What does this mean? It means that Confucius was not accepted as the son of
Shulianghe(叔梁紇). He buried his mother’s body together with his father’s and
arranged a marriage for his brother’s daughter to Nanrong(南容) only after becoming
an adult. It would have been hard for him to disclose the truth that he is a descendant
of Kong family(孔氏), and furthermore posterity of Yin under the circumstances of
having been even doubted whether to be the son of Kong family. Therefore, he put (yi
夷 or ren 仁) instead of ni 尼 to tacitly declare that he is of Dongyi ethnic origin. He
also more clearly mentioned that he is a descendant of Yin than before as death
approached.
Nevertheless, if disciples of Confucius constantly misspell his name as “ni(尼)” as
seungni(僧尼), they go largely against his will. Not only that, but misinterpretations
regarding Yin and Yi, including the content of “the Master was wishing to go and live
among the nine Yis(子欲居九夷),” “wherever a gentleman lives, will there be anything
low?(君子居之 何陋之有?)” and “Yidi with rulers are not like the states of Xia
without them(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done by biased scholars, need to be
reconsidered in the direction of accepting and respecting Yin and Yi.
Key words : Zhongni(仲尼), Baini(伯尼), Shulianghe(叔梁紇), Niqiu Mountain(尼丘
山), Dongyi(東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