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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번역문

고려사 2. 列傳 2 卷九十二 列傳 卷第五 > 諸臣 홍유[ 洪儒 ]

작성자낙민|작성시간15.11.09|조회수87 목록 댓글 0

고려사 2. 列傳 2 卷九十二 列傳 卷第五 > 諸臣

 

홍유[ 洪儒 ]

 

홍유(洪儒)1)는 처음 이름이 홍술(洪術)로, 의성부(義城府 :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2) 사람이다. 궁예 말년에 같은 기장(騎將)3)인 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과 함께 은밀히 계략을 꾸민 다음, 밤에 태조의 집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삼한(三韓)이 분열된 이후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봉기하자, 지금의 왕(궁예)이 용맹을 떨쳐 크게 호령하여 마침내 초적(草寇)을 평정하고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 나라 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지도 스물 네 해4) 남짓 지났으나, 이제 끝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고 잔학한 짓을 너무 제멋대로 하며 형벌을 부당하게 행하여 아내와 아들을 살육하고 신료를 죽여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그를 원수같이 미워하니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의 악정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습니다. 포악한 왕을 내몰고 현명한 왕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바라건대 공께서는 은나라와 주나라의 옛 일을 실행하소서.”

 

태조가 안색을 바꾸며 거절하였다.

 

“내가 스스로를 충의롭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에, 왕이 비록 포악하기로서니 어찌 배반하는 마음을 가지겠소? 신하가 군주를 치는 것을 혁명이라 이르는데, 나는 진실로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은나라 탕왕(湯王)과 주나라 무왕(武王)의 옛 일5)을 본받겠소? 뒷사람들이 이 일을 구실로 삼을까 두렵소. 옛 사람이 ‘하루라도 군주로 삼았으면 죽을 때까지 주군으로 섬긴다.’고 하였고, 더욱이 연릉계자(延陵季子)6)는 ‘나라를 차지함은 나의 절조가 아니다.’라 하며 이내 떠나서 농사를 지었다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연릉계자의 절조를 간과하리오?”

 

홍유 등이 다시 요청했다.

 

“때는 만나기 어려우나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는다면 도리어 하늘의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악정의 해독을 입은 나라 안 백성들은 밤낮으로 복수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며, 게다가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덕망으로는 공과 견줄 사람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의 뜻이 공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공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왕창근(王昌瑾)의 거울에 나타난 글7)이 저러한데 어찌 하늘의 뜻을 어기고 포악한 왕[獨夫8)]의 손에 죽겠습니까?”

 

이리하여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와 새벽녘에 노적가리 위에 앉히고서 군신의 예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왕공께서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리셨다!”고 크게 외치게 하였다.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 도망 가버렸다.

 

태조가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자신을 추대한 공신들을 책봉하였다.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을 모두 일등공신9)으로 삼아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수놓은 비단 옷 및 화려한 이부자리, 무늬가 있는 얇은 비단과 포백(布帛)을 내려주었다. 태조가 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10)에서 반란이 일어날까 우려하여, 홍유와 유금필(庾黔弼)을 시켜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鎭州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11)에 주둔하여 이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주는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 공으로 홍유는 대상(大相) 12)으로 승진하였다.

 

태조 2년(919)에 오산성(烏山城)을 예산현(禮山縣 :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고치고, 홍유와 대상 애선(哀宣)13)을 보내어 유민 5백여 호를 정착시켰다. 19년(936)에는 태조를 따라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며, 죽은 뒤에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1 홍유(?~936) : 홍술[洪術·弘述·弘術]·김홍술(金洪術)이라고도 하며, 의성 홍씨[義城洪氏·義城金氏]의 시조로, 태조 왕건을 추대한 일등공신이다. 농민출신으로 군대에 들어가 마군장군(馬軍將軍)·대상(大相)·태사(太師)·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냈으며, 태조의 제26비로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을 낳은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의 아버지이다. 고려 초기 의성지역이 부(府)로 승격된 것은 이 지역의 유력한 세력이 태조에게 귀부·협조했기 때문이었다. 죽은 후에는 의성지역의 성황신(城隍神)으로 추숭되었다. 한편 진보성장군(眞寶城將軍)으로 태조 5년(922) 왕건에게 항복하고 같은 왕 12년 의성부성(義城府城)에서 전사한 홍술[洪述·洪術]과는 다른 인물이다.

윤희면, 「신라하대의 성주·장군」 『한국사연구』 39, 1982, 63쪽.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124~125·248쪽.

황선영, 『고려초기왕권연구』, 동아대출판부, 1988, 140~141쪽.

김갑동, 『나말여초의 호족과 사회변동연구』, 고려대출판부, 1990, 281~282쪽.

정청주, 『신라말고려초호족연구』, 일조각, 1996, 122~123쪽.

旗田巍, 「高麗王朝成立期の‘府’と豪族」 『法制史硏究』 10, 1960 ;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 出版局, 1972.

•2 의성부 : 『삼국사기』 권34, 잡지3에서는 의성부가 신라의 상주(尙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문소군(聞韶郡)이 승격한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및 권50, 견훤전(甄萱傳)에는 경순왕 3년(929)에 의성부가 견훤의 공격을 받아 그 성주인 장군 홍술(洪術)이 죽었다 하고, 반면 같은 책 권12, 신라본기 경명왕 6년(922)에는 진보성장군(眞寶城將軍) 홍술(洪述)이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진보성 즉 진보현은 의성부와 같은 곳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의성부는 신라 상주 문소군 진보현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짐작되고 있다.

김태식, 「『삼국사기』 지리지신라조의 사료적검토」 『『삼국사기』의 원전검토』, 정신문화연구원편, 1995, 228~232쪽.

•3 기장 :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전(弓裔傳)에는 장군(將軍)으로만 표기되어 있으나, 마군(馬軍)을 지휘한 마군장군(馬軍將軍)과 같은 의미의 기병장군(騎兵將軍)을 지칭한다. 고려 초기 마군은 중앙군의 주력 부대였으며 그 지휘관은 요직이었다. 특히 위의 고려 개국일등공신 네 사람을 비롯하여 이등공신으로 책봉된 무장과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활약이 컸던 무장들은 대체로 마군장군 내지 기병장군출신이었으며, 태조 원년(918) 6월에 모반한 환선길(桓宣吉)과 이흔암(伊昕巖)도 각각 마군장군과 마군대장군이었다.

홍승기, 「고려초기 중앙군의 조직과 역할」 『고려군제사』, 1983, 32쪽.

황선영, 『고려초기왕권연구』, 동아대출판부, 1988, 140~141쪽.

정청주, 『신라말고려초호족연구』, 일조각, 1996, 122~123·128쪽.

김갑동, 「나말여초의 면천과 복지겸」 『한국중세사회의 제문제』, 김윤곤교수정년기념논총, 2001, 47쪽.

•4 스물 네 해 : 궁예(弓裔)가 북원(北原 :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의 양길(梁吉)에게 의탁해서 군사 행동을 수행한 신라 진성여왕 5년(891)부터 고려 태조에게 축출된 신라 경명왕 2년(918)까지 28년 동안을 말한다.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전.

•5 무왕의 옛일 : 은나라 탕왕(湯王)이 하나라 걸왕(桀王)을 친 뒤에 한 말로서, 태조 자신이 궁예(弓裔)를 축출한 행위를 핑계 삼아 후세의 신하들이 반역을 일으킬까 염려한 데서 이 말을 인용하였다.

•6 연릉계자 : 중국 춘추(春秋)시대 오나라의 공자였던 계찰(季札)로, 왕위를 사양하고 연릉(延陵)에 봉해졌다.

•7 나타난 글 : 전체 145자로 구성되어 있는 도참시구(圖讖詩句)로, 태조 왕건(王建)의 왕위 등극을 예언하였던 소위 「왕창근경문(王昌瑾鏡文)」을 말한다. 왕건 추대세력인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네 사람이 송함홍(宋含弘)·백탁(白卓)·허원(許原) 등의 문인지식인과 당나라로부터 와서 철원(鐵原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의 시전에 살고 있던 왕창근 등을 비롯한 시전 상인들의 협조를 얻어 조작·유포한 것으로, 왕건에게 인심을 모으고 정변에 자신감을 갖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918년 3월로 궁예가 축출되는 3개월 전이었다. 따라서 이 내용이 유포될 무렵에는 구체적인 정변계획이 수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건은 909년 무렵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914년 아지태(阿志泰)사건 해결을 계기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의 지원세력은 옛 고구려지역인 패서(浿西)·근기(近畿)지역 및 서남해안지역의 해상세력을 비롯하여 무장·중국 상인·유학자출신·선사(禪師) 등으로, 지방이나 변경출신과 해상무역 및 군사적 재능, 그리고 지적 능력으로 새롭게 성장한 계층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궁예의 지원세력과는 그 성향을 달리하였으며,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는 중심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신호철, 「궁예의 정치적성격」 『한국학보』 29, 1982, 46~50쪽.

김갑동, 「고려 건국기의 청주세력과 왕건」 『한국사연구』 48, 1985, 43~44쪽.

엄성용, 「고려초기왕권과 지방호족의 신분변화」 『고려사의 제문제』, 삼영사, 1986, 39쪽.

황선영, 『고려초기왕권연구』, 동아대출판부, 1988, 48~49쪽.

정청주, 「왕건의 성장과 세력형성」 『전남사학』 7, 1993.

전기웅, 『나말여초의 정치사회와 문인지식인층』, 혜안, 1996, 108쪽.

•8 독부 : 독신남(獨身男)·필부(匹夫)의 의미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악역 무도한 군주를 일컫는다. 『채전(蔡傳)』에는 “독부는 하늘의 운명이 다하여 사람의 마음이 이미 떠나 한 독부일 따름이다(獨夫 言天命已絶 人心已去 但一獨夫耳).”라고 하였다.

•9 일등공신 : 태조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창한 개국일등공신을 말한다. 홍유를 비롯하여 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 네 명 전부 또는 복지겸을 제외한 세 명은 농민출신으로 마군(馬軍)에 소속되었다. 또한 개국이등공신 7명 가운데 중화 김씨(中和金氏) 김락(金樂)과 봉성 염씨(峰城廉氏) 염상[廉湘·廉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사람도 대개 마군출신의 무장이다. 고려 초기의 공신에는 개국공신 이외, 후삼국통일에 기여한 삼한공신(三韓功臣), 성종 때 제정된 배향공신(配享功臣)이 있다. 또한 경순왕 김부(金傅)의 경우와 같은 중국식 공신도 있었다. 삼한공신 가운데는 두 등급의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있었으며, 태조의 배향공신인 위의 네 사람과 유금필(庾黔弼), 그리고 현종 때 추가된 최응(崔凝)을 합쳐서 조대(祖代) 6공신이라 한다. 이들은 공로의 대가로 토성(土姓)을 분정 받았고, 출신지역의 사심관(事審官)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에게는 경제적인 혜택으로 녹읍(祿邑)이 지급되었으며, 후삼국통일 이후에는 삼한공신의 제정과 함께 역분전(役分田)이 지급되었다. 또한 공신의 후예들에게는 음서의 혜택이 주어졌으며, 조대 6공신과 삼한벽상공신의 후손들은 더욱 우대되었다.

김광수, 「고려태조의 삼한공신」 『사학지』 7, 1973.

김갑동, 『나말여초의 호족과 사회변동연구』, 고려대출판부, 1990, 281~282쪽.

정청주, 『신라말고려초호족연구』, 일조각, 1996, 122~129쪽.

•10 청주 :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이며, 신문왕 5년(685)에 서원 소경(西原小京)이 되었다가 경덕왕이 서원경(西原京)으로 올렸으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청주(淸州)로 고치고, 성종 2년(963)에 12목(牧)의 하나가 되었다는 『고려사』 지리지 및 『세종실록』 지리지의 관련 기록으로 보아 청주(淸州)로 명명된 시기는 태조 23년 이후이며, 태조 원년에는 아직 청주(靑州) 또는 청주(淸州)로 불리지 않았다. 한편『삼국사기』 권50, 열전 궁예전에는 “청주 혹은 청천이라 이른다(靑州或云靑川).”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권12, 효공왕 4년(900) 10월의 기사에는 궁예가 왕건을 보내어 광주(廣州 :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충주(忠州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괴양(槐壤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등을 정벌하니 국원(國原)·청주(菁州)·괴양의 적장들이 투항했다고 한다. 하지만 청주(菁州)는 지금의 경남 진주이고 청천(靑川)은 경북 김천시로, 당시 궁예세력이 이들 지역에까지는 미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청주(菁州) 혹은 청천(靑川)은 청주(靑州)의 오기라 짐작된다.

김갑동, 『나말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연구』, 고려대출판부, 1990, 28쪽.

•11 진주 :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 초 강주(降州)라 칭하였다가 뒤에 지금 이름인 진주(鎭州)로 고치고 성종 14년(995)에 자사(刺史)를 두었다 하였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고려가 진주(鎭州)로 고쳐서 성종 을미년에 자사를 두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태조 원년(918)에는 진주(鎭州)가 아니라 강주(降州)라는 군현명으로 표기되어야 옳다. 한편 청주(淸州)는 고려초 환선길(桓宣吉)의 반란 이후에도 고려와 후백제와의 향배가 불분명한 지역으로, 진주는 단순한 군사거점이 아니라 청주 주변 성주들의 거점으로, 청주세력권을 분할하고 성주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윤경진, 『고려군현제의 운영과 구조』, 서울대박사학위논문, 2000, 52~54쪽.

•12 대상 : 관료들의 공적의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중국식 문산계(文散階)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사용한 우리 고유의 관계(官階) 가운데 한 종류로, 4품·7등위에 해당되는 관계이다.

 

•〈고려 초기 관계〉

 

1품

1위 삼중대광(三重大匡)

2위 중대광(重大匡)

2품

3위 대광(大匡)

4위 정광(正匡)

3품

5위 대승(大丞)

6위 좌승(佐丞)

4품

7위 대상(大相)

8위 원보(元甫)

5품

9위 정보(正甫)

6품

10위 원윤(元尹)

11위 좌윤(佐尹)

7품

12위 정조(正朝)

13위 정위(正位)

8품

14위 보윤(甫尹)

9품

15위 군윤(軍尹)

중윤(中尹)

 

고려 초기의 관계는 태봉 궁예 때의 제도를 수용하여 태조 원년(918)부터 몇 종류를 사용하다가 통일 전후에 9품·16등위의 관계로 정비되었으며, 성종 2년(983) 이후 중국식 문산계가 도입되면서 같은 왕 14년에는 향직으로 개편되었다. 수여 대상은 지방의 귀부(歸附)·내투자(內投者), 무인이나 전공자, 문인·유신(儒臣)들과 함께 국왕의 비부(妃父)들이었다. 특히 귀부해 온 지방세력들에게는 그 세력의 대소에 따라 차등적으로 수여되었으며, 충성도에 따라 관계의 등위가 결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통일 이후에도 지방세력들은 한동안 전부터 보유하던 관계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이들 지방세력이 고려왕조에 대해 독자성을 띤 것으로 이해하지만, 오히려 왕조의 지배체계 속에 존재하였다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 당시 홍유와 애선(哀宣)이 가진 대상의 관계는 그들의 최종 관계이다.

황선영, 『고려초기왕권연구』, 동아대출판부, 1988, 228~229쪽.

김갑동, 「고려전기 정치체제의 성립과 구조」 『한국사』 5, 한길사, 1994, 149~150쪽.

武田幸男, 「高麗初期の官階—高麗王朝確立過程の考察」 『朝鮮學報』 41, 1966, 22~23쪽.

•13 애선(?~924) : 태조 때 대상(大相)·장군을 역임한 무신관료이다. 태조 2년(919)에는 홍유와 함께 유민 5백여 호를 예산현(禮山縣 :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에 안집시켰으며, 같은 왕 7년 7월 견훤(甄萱)이 그의 아들 수미강(須彌康)·양검(良劒) 등을 보내어 조물군(曹物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을 공격해 왔을 때에는 왕충(王忠)과 함께 그 지역을 구원하러 갔다가 전사했다.

 

○ 洪儒, 初名術, 義城府人. 弓裔末年, 與裴玄慶·申崇謙·卜智謙, 同爲騎將密謀, 夜詣太祖第, 言曰. “自三韓分裂, 群盜競起, 今王奮臂大呼, 遂夷滅草寇, 三分遼左, 據有大半. 立國定都, 將二紀餘, 今不克終, 縱虐太甚,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僚. 民墜塗炭, 疾之如讎, 桀·紂之惡, 無以加也. 廢昏立明, 天下之大義, 請公行殷周之事.”

太祖作色, 拒之曰, “吾以忠義自許, 王雖暴亂, 安敢有二心? 以臣伐君, 斯謂革命, 予實不德, 敢效湯·武之事乎? 恐後世以爲口實. 古人云, ‘一日爲君, 終身爲主.’ 况延陵季子曰, ‘有國非吾節也.’ 乃去而耕焉, 吾豈過季子之節乎?” 儒等曰, “時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國中民庶受毒痡者, 日夜思欲復之, 且權位重者, 並遭虐殺, 略無所遺. 今之德望, 未有居公右者, 衆情所以望於公也. 公若不從, 吾等死無日矣. 况王昌瑾鏡文如彼, 豈可違天, 死於獨夫之手乎?” 於是, 諸將扶擁而出, 黎明坐於積穀之上, 行君臣之禮. 令人馳且呼曰, “王公已擧義旗矣.” 裔聞之, 驚駭亡去.

太祖卽位, 詔策推戴功. 以儒·玄慶·崇謙·智謙, 俱爲一等, 賜金銀器·錦·繡綺被褥·綾羅·布帛. 太祖慮靑州反側, 儒與庾黔弼, 率兵千五百, 鎭鎭州以備之. 由是, 靑州不克叛, 遷大相. 二年, 改烏山城爲禮山縣, 遣儒及大相 哀宣, 安集流民五百餘戶. 十九年, 從太祖擊百濟, 滅之. 卒謚忠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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