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오년에 다시 왜와 통화(通和)하다 |
왜적이 물러가자 황신(黃愼)은 대마도의 적을 토벌하자고 청하는 소를 올렸다. 그 소에, “임진년 난리는 실상 이 대마도의 적이 인도한 것인데 이미 수길의 머리를 베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이 적이라도 모두 죽여서 종자도 남김이 없게 하여야 이 분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 해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이 섬을 경유하였으므로 익히 살펴서 가만히 기억하옵건대, 대개 주위가 수백 리에 불과하고, 중간에 배 댈 곳이 많으며, 육로는 비록 험하고 좁지만 사면이 모두 넘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지금 대병이 남쪽 바다에 있으니 만약 절강병(浙江兵) 7, 8천 명이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바다를 건너 그 대비가 없을 때 덮치면 반드시 뜻대로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10년은 무사할 것을 보장할 수 있사오나, 지금 이 기회를 잃고 도모하지 않는다면 몇 해가 되지 않아서 통상(通商)과 급미(給米)를 청함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는데, 조정 의논은 시일을 미루기만 하고 마침내 그의 말을 채용하지 않았다. 〈추포행장(秋浦行狀)〉
○ 기해년 7월에 일본이 또 사신을 보내와서 통신(通信)하기를 간청하므로 그 사신을 구금하고 명 나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일월록》
○ 경자년 《고사촬요》에는 신축년이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대마도의 왜인 평의지(平義智)가 귤지정(橘智正) 등을 보내어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3백여 명을 돌려보내면서 화친하기를 요구하고 관시(關市)를 통하도록 애걸하므로 유근(柳根) 등을 명 나라에 보내어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고 아울러 예부ㆍ병부와 군문 등 아문에도 자문(咨文)을 보냈다.동래 사람 박희근(朴希根)을 시켜 예조의 공문을 가지고 대마도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5월에 지정(智正)이 또 와서 화친하기를 청하고 명 나라 군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정탐하므로, 만 군문(萬軍問 만세덕(萬世德))에게 자문을 보내어 명 나라 위관(委官)을 보내서 엄한 말로 깨우치도록 청하였다. 《고사촬요》
○ 신축년 6월에 왜의 사신이 경상 좌수영에 왔는데 포로되었던 전 현감 남충원(南忠元) 등 2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충원의 공초(供招)에, “저 나라에 있을 때 수길은 이미 죽었고, 관동대장(關東大將) 가강(家康)이 수길의 아들 수뢰(秀賴)를 주인으로 세워서 정권을 임시로 맡겼는데, 관동에 중납언(中納言) 경승(景勝)이란 자가 성을 웅거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지난 해 6월에 가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관동으로 향하였습니다.그뒤에 서경 유진(留鎭) 대장 모리휘원(毛利輝元)이 왕성을 웅거하여 배반하고서 서로(西路)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가강의 성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이어 서쪽으로 가서 가강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크게 패하여 서로(西路)의 여러 장수 석전치보우(石田治甫部)와 승장 안국사(安國寺)ㆍ소서비(小西飛)ㆍ평행장(平行長) 등이 모두 참살을 당하였습니다.가강은 관동에서 바로 서경을 향하여 여러 고을을 모두 무찔렀으나, 유독 휘원만은 베지 않고 머리를 깍아서 중으로 만들고 식읍을 모두 빼앗은 다음 서울 성 밖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돌아온 사람은 만호 손문욱(孫文彧)이 거느리고 체찰부에 도착하자 체찰부에서는 조사하여 근방의 사람들은 곧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일월록》
○ 이 해의 의지(義智)가 잇달아 지정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고, 관시를 통하도록 청하며, 겸하여 명 나라 군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므로 사유를 갖추어 명 나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일월록》
○ 임인년에 지정이 세 차례나 나와서 비밀히 명 나라 군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탐문하였는데, 그 정상을 헤아릴 수 없으므로 명 나라의 수군장 한 사람에게 날랜 군사 수백 명을 추려서 본국의 변장(邊將)과 함께 병졸을 훈련시켜서, 명병이 있다는 소문이 멀리 퍼지게 해주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하절사(賀節使) 김득(金玏)에게 부쳐서 아뢰었다. 《고사촬요》
○ 계묘년에 의지가 지정을 보내어서 포로되었던 남녀 수백 명을 돌려보내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사촬요》
○ 갑진년 봄에 지정이 또 와서 통신하기를 청하므로, 승 총섭(僧總攝) 유정(惟政)에게 명하여 가서 정세를 염탐하도록 하엿다. 《일월록》
○ 대마도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곤궁하여, 순전히 공선(貢船)의 상으로 주는 물품을 도로 팔아서 살아갔던 것인데, 임진년부터 화친이 끊어짐에 따라 이 이익을 잃게 되었으므로 섬의 왜가 화친을 통해 예전대로 회복하고자 하여, 일본에 말할 적에는 ‘조선에서 화친을 회복하기를 청한다.’고 하고, 우리나라에 말할 적에는 ‘만약 화친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갑진년 봄에는 대마도에서 포로된 김광(金光)을 몰래 도망쳐 온 것처럼 하여 보내어서 ‘왜가 다시 침입하려고 한다.’ 하였다.이때 김광이 경인년에 황윤길(黃允吉) 등이 가지고 갔던 문서를 신표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대개 섬의 왜가 경인년의 문서를 일본의 고물을 관장한 자에게서 도적질해 내어 몰래 김광에게 주어 일본의 신임을 얻은 것처럼 해서 공갈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과연 크게 두려워하여 중 유정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형세를 염탐하여 왔는데, 이것이 화친할 의논이 일어난 연유였다. 그 뒤 김광은 일이 발각되어 고문을 받아 죽었고, 그 가속들은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하담록》
○ 유정이 두루 진신(搢紳) 사이에 전별하는 글을 구하였는데, 이수광(李睟光)의 시에,
성세에 명장이 많지마는, 기이한 공은 오직 늙은 대사님 뿐이네 / 盛世多名將奇功獨老師
배는 노련의 바다에 가고 / 舟行魯連海
혀는 육생의 말솜씨를 쏟아내리 / 舌聘陸生辭
요리 조리 속이는 오랑캐는 만족함이 없는데 / 變詐夷無厭
기미(羈縻)하는 것은 일이 위태로울까 염려함이로다 / 羈縻事恐危
허리에 찬 한 자루의 긴 칼이여 / 腰間一長劒
오늘날 남아 되기 부끄럽구나 / 今日愧男兒
하였다. 《지봉유설》
○ 그때에 작자를 알 수 없는 시 한 구가 있었는데,
조정에 삼로(三老)가 있다고 말하지 마라 / 莫道廟堂三老在
나라의 안위(安危)는 모두 한 중의 돌아오는 데 맡겼다 / 安危都付一僧歸
하였다. 《일월록》
○ 유정이 일본에 도착하여 여러 지방에 놀러다니며 산천을 구경하겠다고 핑계하니, 왜인이 기이하게 여겨서 거의 거르는 날이 없이 가마로 맞아 청하였다. 대판(大阪)에 이르러서는 먼저 강화하는 것의 이로움을 말하고, 다음으로 포로되어 간 사람을 전부 돌려보내 달라는 말을 꺼내었더니 가강은, “임진년의 싸움을 나는 실상 알지 못하니 두 나라가 서로 태평을 누리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고, 잡혀간 사람들을 전부 찾아서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오직 요시라(要時羅)의 한 사건만은 그 잘못을 우리에게 돌리므로 유정은, “우리나라로서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하고 대답하였다.이리하여 을사년 여름 4월에 유정이 돌아올 때 우리나라 남녀 3천여 명도 돌아오게 되었다. 먼저 탐선(探船)을 보내서 조정에 일일이 보고하고 아울러 바다를 건너는 날짜도 알리면서 수군에게 진을 엄중하게 하여 위엄을 과시하게 하였는데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역풍을 만나서 그대로 하지 못하였다. 유정이 찾아 온 포로들을 경준에게 맡기면서 편리한 대로 나누어 보내라고 하였는데 선장들이 앞을 다투어 나누어서 인수하고 구속하는 것이 포로된 것보다 더 심하였다.그 출생한 곳을 물어도 어릴 때 포로가 되어서 본계(本系)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모두 자기의 종이라 칭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그 남편을 묶어서 바다에 던지고 마음대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 일이 발각되어 경준은 파면되고 이운룡(李雲龍)이 후임이 되었는데, 각 도의 수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사실대로 아뢰도록 하였으나 끝내 실상을 조사하지 못하였다. 《일월록》
○ 가강이 강화를 청한다는 사유를 갖추어서 자문으로 명 나라의 진무 등의 아문에 보고하였다.
○ 유영경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왜가 또 강화를 청하므로 영경은, “만약 왕릉을 침범한 적을 묶어서 보낸다면 화친할 수 있다.”고 답하면서 첨지 김계신(金繼信)을 시켜 답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게 하였다.
○ 병오년 10월에 왜국에서 두 사람을 묶어 보내면서 능을 침범한 적이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이 함께 국문하였더니 왜가 공초하기를, “우리의 얼굴을 보십시오. 우리는 아직도 젊으니 나이가 모두 20여 살이었다. 임진년이면 어린애들인데 어찌 능히 능을 발굴하였겠습니까.” 하였다. 대신에게 논의하라고 명하니 윤승훈(尹承勳)이 말하기를, “이들이 능을 침범한 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명(神明)을 속이는 짓입니다.” 하니, 임금이 노해서 꾸짖고 그 왜를 저자거리에서 베었다. 《하담록》
○ 그때 귤지정(橘智正)이 두 명의 왜를 묶어 왔는데 영경은 그 왜적을 종묘에 바치고 하례를 하려 하였고, 이항복은 국경 가에서 죽여 왜의 사신에게 보이기를 청하였다. 이정귀(李廷龜)는, “지정이 두 적을 데리고 왔는데, 미리 국경에 있는 여러 신하에게 지정과 대좌하여 함께 능을 침범한 절차를 문초하도록 명하여, 만약 공초한 바가 사실이면 우리[檻車]에 가두어서 서울로 보내어 바로 포로를 종묘에 드릴 것이고, 자복하지 않을 것 같으면 곧 지정을 힐책하고 돌려보내도록 하였으면 처리가 마땅하였을 것입니다.이제 변신(邊臣)은 이들을 인수받았고, 묘당에서는 화형(火刑)과 압슬(壓膝)로써 문초하였어도 오히려 하늘을 가리키며 굳게 자백하지 않고 있는데, 만약 참인지 거짓인지를 논하지 않고 바로 그 머리를 벤다면 저놈들은 반드시 우리가 속았다고 비웃을 것이니, 이 왜를 죽이기 전에 그의 공초한 자를 가지고 지정에게 급히 알리고 그런 사실이 없음을 책망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면 저들은 할 말이 없어지고 우리는 말이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저놈들이 만약 성심으로 화해를 구한다면 반드시 다시 진짜 적을 보낼 것이며, 비록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은밀히 그 간사함을 꺾을 수 있어서 후일에 말을 잡을 수 있는 여지가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마침내 영경의 의논을 따랐다. 《월사집》
○ 여우길(呂祐吉) 등을 보내어 사유를 갖추어 명 나라 조정에 아뢰었더니 화친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영경이 임금의 의사를 보아가면서 논의하였으므로 앞뒤가 같지 않아서 마치 두 사람의 논의 같았다. 《하담록》
○ 정미년 1월에 첨지 여우길, 교리 경섬(慶暹), 좌랑 정호관(丁好寬)을 통신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들어가게 하였더니 온 조정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동지(同知) 윤안성(尹安性)의 시에,
사신의 명칭을 회답사(回答使)라 하니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 / 使名回答向何之
오늘의 화친이란 것을 나는 알지 못하겠네 / 今日交隣我未知
시험삼아 한강에 가서 강 가를 바라보라 / 試到漢江江上望
두 능의 송백에 가지가 나지 않는 것을 / 二陵松栢不生枝
이라고 하였다. 이덕형 시의 한 연에는,
신자(臣子)는 능침의 치욕을 씻지 못하였는데 / 臣子未湔陵寢辱
간서(簡書 편지)는 먼저 견양(犬羊)의 하늘(오랑캐의 나라)에 가는구나 / 簡書先入犬羊天
하였으므로, 그때 재상이 듣고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지봉유설》
○ 통신이라는 것이 혐의스럽다고 하여 회답사라 명칭을 고치고, 서장관(書狀官)은 종사관이라고 명칭을 고쳤다.
○ 우길 등이 갈 적에 양재역(良才驛)을 지나는데 큰 바람이 갑자기 불어서 깃대를 부러지게 하여 일행이 놀랐다. 《일월록》
○ 우길 등이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왜인도 공경히 대접하지 않고서 금쟁반에 똥을 담고 금가루를 뿌려서 올렸는데, 경섬이 진짜 금이라고 하며 손으로 쥐었더니 더러운 것이 손에 가득하여 왜인이 포복절도하였다. 이렇게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고, 수모를 받은 형상에 대해 사람들이 다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 우길 등이 돌아올 적에 포로되었던 1천 3백 4십여 명도 돌아왔다.
○ 그때 원가강(源家康 덕천(德川))이 수길의 아들을 폐하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가 그 아들 수충(秀忠)에게 자리를 전하였다. 영경은, “가강이 평씨(平氏)를 패하였으니, 우리나라와 원수가 아니다. 가히 화친을 허락할 것이다.” 하여 아뢰고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수충의 답서에, “억지로 화친을 허락한다.”는 뜻을 보였는데도 우길 등은 두려워하여 감히 반박도 하지 못하고 왔지만 전례를 원용해서 가선에 올리니, 사람들의 의론은 시끄러우면서도 영경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못하는데, 오직 장령 최유원(崔有源)이 소를 올려 우길 등의 가자(加資)를 빼앗게 하니, 영경이 매우 미워하여 그 뒤 공적인 모임에서 예절관계로 서로 다투다가 유원을 끌어내어 욕을 보였다. 《하담록》
○ 일찍이 수길이 죽을 적에, 두 대신이 있어서 좌우 정승 같았는데 하나는 동(東)이라고 하고, 하나는 서(西)라고 하였으니 바로 가강과 휘원(輝元)이었다. 두 사람이 수뢰(秀賴 수길의 아들)를 추대하여 함께 66주를 다스리다가, 동ㆍ서로 각각 33주씩 나누어서 가강은 동을 맡고 휘원은 서를 맡았다. 휘원에게 안국사(安國寺)라는 꾀 많은 중이 있었는데 휘원에게 유세하기를 “천하에 두 임금이 있음은 듣지 못했소. 청컨대 전쟁하여 이기는 자는 임금이 되고 지는 자는 신하가 되게 하시오.” 하였다.휘원이 처음에는 듣지 않다가 7월에서야 그의 말을 좇아서 편지로 가강에게 알렸더니, 가강이 33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므로 휘원도 군사를 모두 일으켰다. 휘원이 가강을 관백의 궁전에서 만나 안국사의 말대로 고하니 가강도, “그렇다. 진실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두 사람이 물러나서 그 군사들을 정돈하니 나라 안이 떨며 겁내었다. 휘원이 대오에 살마주(薩摩主) 의홍(義弘)이란 자가 있어서 용맹스럽고 사나워 싸움을 잘하므로 모든 왜가 그를 두려워하였는데 가강이 편지로 의홍을 유혹하기를, “내가 만약 내응(內應)이 되어준다면 다섯 개의 도를 더 봉하겠다.” 하였더니 의홍이 알리기를, “큰 일이어서 편지만으로는 불가하니 맹서를 하면 따르겠소.” 하였다.가강이 부모로 맹서하였더니 의홍이 말하기를, “내가 뒤에서 공격할 터이니 그대는 포소리를 듣고 진격하시오.” 하였다. 이리하여 싸움이 한창이고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의홍이 뒤에서 포를 쏘자 가강이 군사를 독려하여 진격하게 하니, 휘원의 군사가 크게 놀라서 휘원의 사랑하던 장수와 안국사 두 사람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하였으므로 휘원이 드디어 패하였다.가강이 세 사람을 함께 사로잡아서 뜰 아래에 나란히 앉히고 직접 수죄(數罪)하여, “틈을 얽어 난리를 주장한 자는 두 사람이다.” 하고 장수와 안국사의 얼굴에 회칠을 하고 옷을 벗겨서 우거(牛車)에 싣고 군중에 돌린 다음 드디어 베었다. 휘원은 사면하여 상좌에 앉히고, “그대는 실상 죄가 없으니 그대가 다스리던 한 고을과 또 나의 두 고을을 더 주겠다. 그대는 이 세 고을만 있으면 족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휘원은 두려워하여 사례하였다. 이로부터 자신의 땅을 모두 잃었고 오직 세 고을만으로 살았다. 《염헌집(恬軒集)》
○ 가강은 의정(義政)의 11대 손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지혜가 많아서 군사를 잘 부렸다. 일찍이 평행장(平行長)과 더불어 서로 관원(關原)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행장은 군사가 7만이고, 가강은 군사가 20만이었는데도 가강이 행장에게 항복하기를 빌면서, “묶든지 포로로 하든지 귀양을 보내든지, 모두 오직 명령대로 하겠소.” 하니, 행장은 본래 가강을 가볍게 여기던 터라 이 말을 듣고는 더욱 교만하여 마침내 마음이 해이해졌다.이에 가강이 그 군사를 나누어서 한 패는 급히 강을 막아서 군사가 건너게 하여 상류를 먼저 점령하게 하고, 한 패는 자신이 거느리고서 행장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하류를 따라가서 바로 행장의 군사와 충돌하니 행장의 군사는 패하여 죽었다. 《풍암집화(楓岩輯話)》
○ 가강이 수뢰를 공격하려고 하여, 대판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므로 수뢰와 화친하기로 약속하고, 은밀히 기이한 계책으로 그 성을 불살라서 드디어 멸망시키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처음에 평씨(平氏)와 원씨(源氏)가 각각 군사를 일으켜서 강약을 다투다가 뇌조(賴朝) 때에 이르러, 군사가 더욱 강해졌고 만력(萬曆) 중에 수길에 이르렀는데, 수길의 모습은 개와 같았으므로 스스로 얼굴이 도참(圖讖)에 맞는다 하여 자신의 강대함을 자부하고, “천하도 통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수길이 죽고 수뢰가 새로 즉위하였더니 국인들이 이에 반란을 일으켰다. 《미수기언》
[주D-001]배는 …… 가고 : 전국 시대에 위 나라와 조 나라가 진(秦)을 맹주로 모시려 하니, 노중련(魯仲連)이 반대하기를, “차라리 동해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진을 맹주로 모신다는 말은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다.
[주D-002]육생의 …… 쏟아내리 : 한 나라 때에 말 잘하는 육가(陸賈)가 남월(南越)에 가서 유세하여 항복을 받았다.
[주D-002]육생의 …… 쏟아내리 : 한 나라 때에 말 잘하는 육가(陸賈)가 남월(南越)에 가서 유세하여 항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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