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림
[ 語林 ]| 저자 | 배계(裴啓) |
|---|---|
| 국가 | 중국 |
| 분야 | 소설 |
| 해설자 | 김장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
≪어림(語林)≫은 동진(東晉)의 배계(裴啓)가 지은 지인류(志人類) 필기문헌으로, 인물 품평에 관한 고사가 그 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 자부(子部) 소설가류(小說家類)의 ‘≪연단자(燕丹子)≫ 1권’ 조의 부주(附注)에 “≪어림≫ 10권은 동진의 처사 배계가 지었으나 망실되었다(≪語林≫十卷, 東晉處士裴啓撰, 亡)”라고 저록되어 있으며, 그 이후의 사지(史志)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어림≫은 수나라 때에 이미 망실된 것으로 보인다.
≪어림≫의 집본(輯本)으로는 ≪설부(說郛)≫본, ≪오조소설대관(五朝小說大觀)≫본, ≪고금설부총서(古今說部叢書)≫본,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佚書)≫본, ≪옥함산방집일서보편(玉函山房輯佚書補編)≫본,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본(총 180조 집록)이 있는데, 이 중에서 ≪고소설구침≫본이 비교적 참고 가치가 높다. 근래에 나온 주능가(周楞伽) 집주(輯注) ≪배계어림≫(北京: 文化藝術出版社, 1988)은 등장인물을 전한인(前漢人)ㆍ후한인(後漢人)ㆍ삼국인(三國人)ㆍ서진인(西晉人)ㆍ동진인(東晉人)으로 분류하여 총 185조를 집록해 놓았는데, ≪고소설구침≫본을 보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자 배계(裴啓, ?∼?)는 ≪진서(晉書)≫에도 그의 전(傳)이 실려 있지 않고 기타 자료도 거의 없어서 자세한 생애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세설신어≫<문학(文學)> 제90조의 유효표(劉孝標) 주에 인용되어 있는 ≪배씨가전(裴氏家傳)≫의 다음 기록이 전부다.
배영(裴榮)은 자가 영기(榮期)이며 하동(河東,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 서쪽) 사람이다. 부친 배치(裴稚)는 풍성령(豊城令)이었다. 영기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품격과 재기가 있었으며 고금의 인물을 논하길 좋아하여 ≪어림≫ 수 권을 찬하여 ≪배자(裴子)≫라고 이름 했다.
이에 대하여 유효표는 “배송지(裴松之)는 배계가 ≪어림≫을 지은 것으로 여겼다고 단도란(檀道鸞)이 말했는데, 그것은 배영의 별명을 배계라고 한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세설신어≫<경저(輕詆)> 제24조 주에 인용된 단도란 ≪속진양추(續晉陽秋)≫의 기록과 ≪수서≫<경적지>의 저록에는 모두 배계가 ≪어림≫을 찬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배씨가전≫과 유효표의 안어(按語)에서 배영을 본명으로 한 것은 그의 자인 영기와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배계가 동진의 문학가로서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았으며 고금의 인물을 품평하길 좋아하여 그러한 내용이 담긴 ≪어림≫이라는 지인소설을 지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어림≫의 창작 시기와 시간 범위, 내용 특성에 대해서는 ≪세설신어≫<경저> 제24조 주에 인용된 단도란 ≪속진양추≫의 “진나라 융화(隆和) 연간(362∼363)에 하동 사람 배계가 한위(漢魏) 이래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언어응대(言語應對) 중에서 뛰어난 것을 찬하여 ≪어림≫이라 이름 붙였다”는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문을 통하여 살펴보면, ≪어림≫은 한위에서 동진까지의 왕후장상(王后將相)ㆍ고관귀인(高官貴人)ㆍ문인명사(文人名士) 등 여러 계층 인물들의 인품과 재능을 그들의 언어응대를 통하여 묘사하고 품평한 것으로, 당시에 유행했던 청담(淸談) 기풍의 시대사상적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그 언어 묘사가 비교적 정채롭다. 또한 포괄하고 있는 내용이 조정대사ㆍ정치ㆍ문학ㆍ학술사상ㆍ인정세태 등 비교적 광범위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특히 전체 185조의 고사 중에서 절반이 넘는 103조가 동진의 인물에 관한 것으로 작자가 처한 동시대의 인물을 과감하게 논평한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어림≫은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창작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환영을 크게 받았는데, ≪세설신어≫의 기록을 보면 그러한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배랑[裴郞: 배계(裴啓)]이 ≪어림≫을 지었는데 처음 세상에 나오자 원근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져서, 당시 청년들 중에 이를 전사(傳寫)하여 각각 한 권씩 지니고 있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 책 중에 왕동정[王東亭: 왕순(王珣)]이 지은 <왕공의 주막 아래를 지나며 지은 부(經王公酒壚下賦)>가 실려 있는데 그 재기와 정취가 물씬 풍긴다.
위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 ≪어림≫이 얼마나 유행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중에 사안(謝安, 320∼385)이 배계와 지도림(支道林, 314∼366)을 품평한 대목이 있었는데,1) 당사자인 사안이 그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바람에 ≪어림≫은 하루아침에 그 명성을 잃고 마침내 폐해지고 말았다. 이것은 배계가 정말 거짓으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사안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자신이 한 말을 나중에 고의로 부정한 것인지 그 자세한 내막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2) 사안은 당시의 재상이자 명사계(名士界)의 영수 지위에 있었으므로 그의 말 한마디가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어림≫은 더 이상 세상에 온전하게 유전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후 남조 송나라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와 양(梁)나라 유효표의 ≪세설신어주≫와 은운(殷芸)의 ≪소설(小說)≫ 등에 그 고사의 상당한 분량이 실려 있으며, 수ㆍ당의 유서(類書)에도 그 유문이 많이 남아 있어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림≫은 특히 인물 묘사에 뛰어나 짤막한 편폭에 간결하고 정련된 필치로 수많은 인물의 각기 다른 형상을 핍진하게 그려냈으며, 지인소설의 가장 큰 내용 특성 중의 하나인 인물 품평의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래서 위진남북조의 가장 완벽한 지인소설이자 중국 지인소설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세설신어≫에 ≪어림≫의 고사 82조가 채록되어 있다.
각주
- 1) ≪세설신어≫<경저> 제24조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유도계[庾道季: 유화(庾龢)]가 사공[謝公: 사안(謝安)]에게 의아한 듯이 말하길, “배랑이 (그가 지은 ≪어림≫에서) ‘배랑은 분명히 나쁘지 않으니 어찌 다시 술을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사안이 평했다’고 했으며, 배랑이 또 ‘지도림[支道林: 지둔(支遁)]은 구방고(九方皐)가 말을 볼 때 그 털빛은 문제 삼지 않고 그 준일(儁逸)함만을 취한 것과 같다고 사안이 평했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자, 사공이 말하길, “나는 그 두 가지 말을 전혀 한 적이 없으니, 배씨가 스스로 그런 말을 지어낸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유도계는 마음속으로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여, (배계의 ≪어림≫에 실려 있는) 왕동정[王東亭: 왕순(王珣)]의 <주막 아래를 지나며 지은 부(經酒壚下賦)>를 인용했다. 유도계가 읽기를 끝냈지만 사공은 어떠한 비평도 전혀 하지 않은 채 다만 이르길, “그대도 결국 또 배씨의 학문을 하는구먼!”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어림≫은 마침내 폐기되었다. 지금 있는 것은 모두 그 이전에 써 놓은 것으로 사안의 말이 없다.庾道季詫謝公曰: “裴郞云: ‘謝安謂裴郞乃可不惡, 何得爲復飮酒?’ 裴郞又云: ‘謝安目支道林如九方皐之相馬, 略其玄黃, 取其儁逸.’” 謝公云: “都無此二語, 裴自爲此辭耳.” 庾意甚不以爲好, 因陳東亭<經酒壚下賦>. 讀畢, 都不下賞裁, 直云: “君乃復作裴氏學!” 於此≪語林≫遂廢. 今時有者, 皆是先寫, 無復謝語.
- 2) 옮긴이는 배계가 거짓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당시 엄연히 생존해 있고 정계와 문학계의 거물이었던 사안의 품평, 그것도 배계 자신에 대한 품평을 날조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양나라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 권4 <지둔전(支遁傳)>에 사안이 지도림을 품평한 동일한 내용이 분명히 들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사안이 왜 일부러 자신이 한 말을 부정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주능가는 사안이 ≪어림≫의 명성이 너무 높아지는 것을 시기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지만, 당대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차지한 사안이 일개 처사인 배계의 저작물에 대하여 시기했다는 것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다른 내막이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