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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해설

은세계[ 銀世界 ] -한국 이인직(李人稙, 1862-1916)

작성자낙민|작성시간16.11.25|조회수82 목록 댓글 0

은세계

[ ]
저자 이인직(, 1862-1916)
국가 한국
분야 소설
해설자 권채린(경희대학교 교양학부 강사)

계몽의 기획과 비극적 명암

≪은세계≫는 <혈의 누>, <귀의 성>에 이은 이인직의 세 번째 신소설로서, 1908년 동문사에서 출판되었다. 상편만 발간되었으며 하편은 발간되지 않았다. ‘신연극’이라는 한자를 집자하여 작품 표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연극 공연을 염두에 두고 쓰였으며 실제로 원각사에서 장기간 공연되었다. 때문에 이 작품은 신연극의 효시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은세계≫는 문명 개화와 계몽이라는 신소설의 사회적 기능, 그리고 이인직의 소설세계의 특징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이인직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신소설의 선구자로서 한국문학의 근대화에 기여한 문학적 성과에 대한 지적이 한 축을 이룬다면, 이완용의 하수인으로서 친일적인 정치 행로를 보여주었다는 비판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이인직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표면적으로는 상반되는 듯 보이지만, 그의 작품들을 살펴볼 때 두 면모, 두 개의 평가가 상호 결합ㆍ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창작한 신소설은 개화와 계몽이라는 주제 의식과 근대적 서술기법을 담고 있지만, 주체적인 근대 담론이 아니라 일제의 제국주의 담론에 흡수됨으로써 당대의 지배적 정치구도를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은세계≫는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은세계≫를 시종일관 관통하는 것은 계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이다. 계몽 의식은 소설 전체에 걸쳐서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거나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다채로운 함의로 변주된다. 이런 점에서 ≪은세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선명한 반봉건 의식이다.

최병도는 강원도의 양반 부자다. 강원 감사가 최병도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누명을 씌워 온갖 형벌을 가하지만, 최병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다. 표면적으로 볼 때 최병도의 이야기는 부정부패한 관료와 이에 저항하는 백성의 대립, 그리고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중의 비판 의식을 드러내는 텍스트다. 최병도의 이야기가 전래하던 판소리 <최병두 타령>에서 개작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때, 이러한 반봉건 의식은 피지배층의 심판 의지가 자연스레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은세계≫에서 반봉건 의식은 단순히 봉건적 관료제와 불합리한 지배구조의 타파를 목적하지 않는다. 이인직은 최병도라는 인물에게 개화사상의 세례를 받은 지사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최병도의 이야기를 봉건질서와 개화사상이라는 신구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으로 새롭게 확장한다. 그래서 반봉건 의식의 표출은 개화와 계몽의 시대적 소명을 발의하기 위한 문제제기로서의 성격을 띤다.

갑신년 변란 나던 에 나히 스물두 살이 되얏 봄에 셔울로 올라가셔 화당에 유명 김옥균을 차져보니 본 김옥균은 엇더을 보던지 녯날 륙국 시절에 신릉군이 숀 대졉더시 너그러운 풍도가 잇이라.
최병도가 김 씨 보고 심복이 되야서 김 씨 단히 사모 모양이 잇거날 김 씨가  최병도 사랑고 긔이게 녀겨서 턴 형셰도  일이 잇고 우리나라 졍치 득실도  일이 만히 잇스나 우리  경륜은 최병도의게 하지 아니얏더라. 갑신년 십월에 변란이 나고 김 씨가 일본으로 도 후에 최 씨가 싀골로 려가셔 물 모흐기를 시 그 경영인즉 물을 모와가지고 그 부인과 옥슌이 다리고 문명 나라에 가셔 공부 야 지식이 넉넉한 후에 우리나라 붓들고 셩을 건지려 경륜이라.
최병도가 동들의게 물에 단히 굿은 사이라 을 들럿스나 최병도의 마음인즉 을 구제 일이 아니오 팔도 셩들이 도탄에 든 거슬 건지려는 경륜이 잇섯더라.

최병도의 인물형은 당대의 전통적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자못 날카롭고 이색적이다. 최병도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에 김옥균의 개화당에 감화를 받고 개화사상에 눈뜬 지식인이다. 계몽적 지사인 최병도에게 ‘재물’이란 개인의 일신과 부의 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명한 나라에 가서’ 공부한 후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는 목적 속에 존재한다. 봉건사회에서 부의 축적이 오롯이 계급적 질서의 확립에 기여하는 배타성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최병도의 개화사상은 그 자체로 봉건사회에 충분히 급진적이고 위협적이라 할 수 있다.

≪은세계≫의 봉건적 관습에 대한 비판과 저항 의식은 다양한 형태로 텍스트 곳곳에서 소소하게 발견된다. 옥순과 옥남 남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후반부에서 그것은 전통과 근대의 대립구도를 통해 표출된다. 특히 가족과 혈연주의라는 뿌리 깊은 ‘전통적’ 관습을 다루는 작가 특유의 시선은 인상적인데, 옥순과 옥남 남매의 관점의 대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가 본마음을 가지고 계시더도 자식 된 도리에 여러 해를 슬나 잇스면 어머니 보고 십흔 마음이 간졀 터인 물며 우리 어머니 남다른 병환이 들러서 활의 락을 모르고 라 계시니 우리가 공부 그만하고 고국에 도라가서 어머니 젼에 병구원이 여드리자.

누님이  말을 좀 자세히 드러보시오.
람이 부모의게 효성을 려면 부모 헤서 부모 봉양만 하고 드러안졋 거시 효성이 아니라 부모의 은혜받 이 몸이 나라의 국민의 의무를 직히고 국민의 직분을 다 거시 부모에게 효성이라. (중략) 어머니를 위 각을 고만고 나라 위 도리를 시오.

미국 유학 중에 옥순이 고향과 아픈 어머니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것과 달리, 옥남은 미국의 새로운 문명을 경험하느라 고향의 기억을 잊는다. “어머니를 우리가 이럿케 나셔 잇 거시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옥순에 반해 옥남은 “부모 봉양만 하고 드러안졋 거시 효성이 아니라 부모의 은혜받 이 몸이 나라의 국민의 의무를 직히고 국민의 직분을 다 거시 부모에게 효성”이라고 말한다. 옥순이 개화된 세계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찍이 문명에 눈을 뜬 계몽적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가족주의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은, 봉건 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계몽적 자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통과 근대 사이의 갈등과 혼종화 양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작가의 전언은 옥순이 아닌 옥남의 관점에 놓여져 있다. 옥남은 누이를 타이르며 ‘개인’과 ‘가문’에 앞서 ‘나라’와 ‘백성’을 이야기하며, ‘효성’에 앞서 ‘국민의 의무와 직분’을 환기한다. 개인과 가족에게 닥친 불행과 질곡을 “나라의 졍치가 그른 곡졀”로 바라보는 옥남에게 효와 가족주의는 사사로운 전통일 뿐이다. 그리하여 위에 인용된 옥남의 발언처럼, 효ㆍ혈연ㆍ가족 등의 전통적 가치들은 ‘국가’라는 대타자와 등가적으로 취급되거나 ‘계몽’의 논리 속에 흡수된다. 전통과 근대의 대립적 관계가 근대에 의한 전통 흡수의 논리로 재편된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계몽의 정신을 설파하는 장르로서의 신소설이 놓인 어중간한, 그러나 불가피한 입지를 잘 보여준다. 전통이란 결코 타파해야 할 것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계몽의 논리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계몽을 강조하는 것이 이 소설이 풀어내야 할 하나의 전략인 것이다. 옥남의 발언이 혈연주의와 가족주의의 타파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 가치를 대타적인 부정의 항으로 설정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순ㆍ옥남 남매와 어머니가 해후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듯 가족 공동체의 복원을 새로운 국가 설립의 근간으로 설정하는 이율배반적 태도야말로 어쩌면 이인직의 계몽, 혹은 신소설이 놓여있는 전통과 근대 사이의 미묘한 균열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옥남의 ‘흡수’ 논리는 전통을 결코 삭제하지 않고서 근대의 정신과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섬세하게 피력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봉건의 기치 아래 전통마저 볼모로 하고서 그렇게도 주창하고자 했던 ‘계몽’이란 무엇이었을까. 안타깝게도 작품 속에서 계몽의 기획은 결코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최병도에서 옥순ㆍ옥남 남매로 이어지는 세대론적 플롯을 통해 계몽에 대한 아버지 대의 희구는 자식 대의 미국 유학으로 이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귀국 이후의 실천적 행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귀국하자마자 이야기가 종결되는 소설의 미완성 구조의 탓이라기보다, “태황뎨 폐하 젼위”를 “한국 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정치적 감각에 의해 본래적으로 야기된 실패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인직이 제시한 계몽의 기획은 애초에 많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부패한 나라를 개혁하고 혹세무민한 민중을 구제한다는 목적을 내세우는 이면에는 그것이 신문명에 개안한 소수의 특권층에 의해 가능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김정수로 대변되는 민중의 실천적 가능성을 최병도가 무마시킨 데서 드러나듯 이인직에게 계몽은 민중의 해방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라는 대타자의 옹립에 바쳐져 있다.

옥슌이와 옥남이가 자라나  졍신에 마다 듯나니 국가를 위인 고로 옥순이와 옥남이 나라이라  말이 뇌()에 히고 졍신에 져젓더라.

여보 동포들 드러보시오.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 각이 잇거든
황뎨 폐하 통치하()에서 부지런이 버러먹고 자식이나  가르쳐서 국민의 지식이 진보될 도리만 시오. 지금 우리라에 국리민복() 될 일은 그만 일이 시 업소.
 개혁
황뎨 페하의 만셰 브르고 국민 동포의 만세나 부르고 쥭소.

여기서 국가란 국민 혹은 민중을 배제한 철저한 ‘국가주의’의 논리 속에 포섭되어 있으며, 일종의 정치적 논리로 채색되어 있다. 최병도가 ‘김옥균의 개화당’에 감화되거나 옥순ㆍ옥남 남매가 ‘대황제 폐하 전위’ 등에 감격하는 모습은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특정한 정치적 노선을 명료히 보여준다. 그러한 정치적 노선이 노골적인 ‘친일적’ 성향을 바탕으로 한 결과, 이 소설은 종국적으로 계몽의 논리를 친일적인 정치노선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소설의 결말에서, 일본에 의해 주도된 융희년의 ‘대개혁’에 감응하여 귀국한 옥순ㆍ옥남 남매가 의병 활동에 혹독한 비판을 가하는 장면은 반봉건 의식에서 출발한 계몽의 기획이 민족 주체성을 헌납하고 철저하게 식민주의 담론으로 귀결하고 만 비극적인 말로를 보여준다. 이로써 이인직의 ≪은세계≫는 ‘친일 정치소설’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친일문학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김재용에 따르면 ‘재산ㆍ지위를 위해서나 외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적ㆍ객관적 판단에 따른 자발성’에 의한 행위가 친일이다(≪협력과 저항≫, 소명, 2004, 98쪽). 즉 강요에 의한 비자발적인 문학 행위와, 나름의 내적 논리와 신념의 체계로서의 문학 행위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인직의 문학은 명백하게 후자 쪽에 두어진다. 계몽과 국민정신 개조의 시대적 당위를 일본의 식민화 정책과 제국주의 담론에서 찾고자 했던 한 작가의 내적 신념과 열망의 흔적이 이인직의 ‘신소설’이자 ‘친일문학’인 것이다.

이인직 소설의 한계는 아마도 자기의 시대를 규정짓는 조건과 한계상황을 타자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이미 결정화된 체계로 받아들인 지식인의 한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인직의 ≪은세계≫를 다시 읽는 지금의 우리가 곱씹어 봐야 할 점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작품 자체의 내적인 감상과 이해에 있지 않고, 텍스트가 시대와 역사 속에서 공감 혹은 불화를 일으키는 접촉 면을 오늘의 시각에서 음미해 보는 데 있다. 그럴 때 이인직의 ≪은세계≫가 지닌 공과() 역시 명료히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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