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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해설

이병주 작품집 -한국 이병주(李炳注, 1921-1992)

작성자낙민|작성시간16.11.25|조회수102 목록 댓글 0

이병주 작품집

저자 이병주(, 1921-1992)
국가 한국
분야 소설
해설자 김종회(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왜 다시 이병주인가-이병주의 단편

한 작가가 생전에 그 작품으로 일정한 평가를 받은 경우, 그는 행복한 존재다. 한국문학사 또는 세계문학사에 명멸한 수도 없이 많은 작가들이 그 역사적 기록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고 스러져 간 일들을 생각해 보자. 후대의 독자들이 그 이름과 작품을 기억하고 또 작품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가는 소중한 문화적 유산에 해당하며, 우리는 그 작품을 일러 ‘고전’이라 부른다.

생전에 이름을 얻기도 어렵거니와, 사후에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작가는 훨씬 더 드물다. 예컨대 작가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그의 출신 지역에서 재조명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부각된 허먼 멜빌의 ≪모비딕≫ 같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한 세기에 걸친 시간의 상거를 뛰어넘는 재평가는, 미상불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얘기는 말을 바꾸어서 하자면 동시대에 문학 작품의 판단과 평가의 기능을 맡은 집단이 보다 신중하고 면밀하게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문화유산의 계발과 보존에 기여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들과 관련하여, 여기 우리가 다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한 사람의 작가가 있다. 나림 이병주. 1921년에 태어나 1992년에 타계할 때까지, 언론인이요 작가로서의 생애를 살았으며 근ㆍ현대사의 온갖 굴곡을 그 인생 역정 가운데 체험하고 이를 소설로 남겼다.

우리는 그의 데뷔작 <소설ㆍ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여러 사람의 글을 볼 수 있으며,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 그 작품을 다시 읽어보아도 한 작가에게서 그만한 재능과 역량이 발견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겠다는 감회를 얻을 수 있다.

산뜻하면서도 품위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구조, 낯선 이국적 정서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누구든 쉽사리 접근할 수 있도록 용해하는 힘, 부분 부분의 단락들이 전체적인 얼개와 잘 조화되면서도 수미상관하게 정리되는 마무리 기법 등이 이 한 편의 소설에 편만(滿)하게 채워져 있었으니, 작가로서는 아직 무명인 그의 이름을 접한 이들이 놀라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역사와 문학의 상관성에 대한 그의 통찰은 남다른 데가 있어, 역사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문학이 표현한다는 확고한 시각을 정립해 놓았다. 매우 오래전 어느 자리에서, 필자는 그에게 “역사적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선문답류의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서슴없이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표면상의 기록으로 나타난 사실과 통계 수치로서는 시대적 삶의 실상이 노정한 질곡과 그 가운데 스며 있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논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남겨 놓은 뛰어난 작품들과 그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당대 문단에서 그에 대한 인정이 적잖이 인색했으며 또한 그의 작품 세계를 정석적인 논의로 평가해 주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물론 거기에는 그 나름의 사유가 있다. 그가 활발하게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역사 소재의 소설들과는 다른 맥락으로 현대사회의 애정 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또 하나의 중심축으로 삼게 되었는데, 이 부분에서 발생한 부정적 작용이 결국은 다른 부분의 납득할 만한 성과마저 중화시켜 버리는 현상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지나치게 대중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문학작품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양식의 수위를 무너뜨리는 경우를 유발하면서, 순수문학에의 지구력 및 자기 절제를 방기하는 사태에 이른 감이 약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구체적인 예증으로 열거할 만한 작품이 너무 많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제해 놓고 살펴보자면,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 부여되었던 ‘한국의 발자크’라는 별호가 결코 허명이 아니었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자신의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엔 발자크가 있다’라고 써 붙여두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 오연한 기개는 나중에 극적인 재미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구성, 등장인물의 생동력과 장쾌한 스케일, 그리고 그의 소설 처처에서 드러나는 세계 해석의 논리와 사상성 등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러한 작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떠올려 볼 때, 그리고 우리 문학사에 그의 성향 및 성취에 필적할 만한 작가를 찾는 일이 거의 무망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유명()을 달리한 지 18년에 이른 그의 작품을 다시 확인하고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더욱이 시대적 사조가 점차 미소하고 부분적인 것 중심으로 흘러가고, 현란한 영상문화의 물결에 밀려 문자 매체의 전통적인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는 마당에, 이병주식 이야기성의 회복을 통해 인문적 사고의 내면 확장과 온전한 세계관의 균형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이병주의 첫 작품은 대체로 1965년에 발표된 <소설ㆍ알렉산드리아>로 알려져 있다. 작가 자신도 이 작품을 데뷔작으로 치부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첫 작품은 1954년 <부산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 ≪내일 없는 그날≫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심중에 품어왔던 작가로서의 길이 합당할지 어떨지를 시험해 본 것 같다. 물론 그 시험에 대한 자평이 어떤 결과였든지 간에, 그 이후의 작품 활동 전개로 보아 그의 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문학에의 열망을 사그라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소설이 보여 주는 주제 의식도 그야말로 백화난만한 화원처럼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예낭 풍물지≫나 ≪철학적 살인≫ 같은 창작집에 수록되어 있는 초기 작품의 지적 실험성이 짙은 분위기와 관념적 탐색의 정신,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시대성과 역사 소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숨겨진 사실들의 진정성에 대한 추적과 문학적 변용, 현대사회 속에서의 다기한 삶의 절목()들과 그에 대한 구체적 세부의 형상력 부가 등속을 금방이라도 나열할 수 있다. 더욱이 현대사회의 여러 현상을 주된 바탕으로 하는 작품들에서는, 천차만별의 창작 유형들을 만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에는 ≪허망의 정열≫,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 등의 창작집에서 역사적 사건과 현실 생활을 연계시킨 중편이나 함축성 있는 단편들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까지 이르면 이미 그의 작품에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원숙한 관점과 잡다한 일상사에서 초탈한 달관의 의식이 깃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적지 않은 분량의 수필집을 통해, 소설에서 다 기술하지 못한 직정적()인 담화들을 표현해 놓기도 했다.

이병주는 분량이 크지 않은 작품을 정교한 짜임새로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인식되기로는 부피가 창대한 대하소설을 유연하게 펼쳐나가는 데 탁월한 작가라는 점이다. 일찍이 그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그 마력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 것도 이 점에 견주어볼 때 자못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관부연락선≫, ≪산하≫, ≪행복어사전≫, ≪바람과 구름과 비≫, ≪지리산≫ 등이 그 구체적인 사례에 속하는 작품들인데, 이는 단순히 작품의 분량이 엄청나다는 외형적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도도히 흐르는 시대적ㆍ역사적 현실과 그것에 총체적인 형상력을 부여할 때 얻어지는 사상성이나 철학적 개안()의 차원에까지 이른 면모를 보인다.

이병주의 역사 소재 소설들을 통틀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하나의 요체는, <지리산>에서의 이규와 같은 해설자의 존재다. 그 해설자는 이름만 바꾸었다 뿐이지 다른 작품들에서도 거의 유사한 존재 양식을 갖고 나타난다. 예컨대 <관부연락선>에서 이 군 또는 이 선생으로 불리는 인물, <산하>에서 이동식으로 불리는 인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서 <쥘부채> 같은 초기 작품에 나오는 대학생 동식이라는 인물도 모두 본질이 동일한 ‘이 선생’이다.

작가는 이 해설자에게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자기 자신의 시각을 투영했으며, 그런 만큼 그 해설자의 작중 지위는 작가의 전기적 행적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은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만약에 그 해설자가 불학무식하거나 당대의 한반도 현실에 대해 사상적이며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면, 작가는 애초부터 스스로의 심중에 맺혀서 울혈이 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불학무식한 부역자를 주인공으로 한 조정래의 ≪불놀이≫와 좌파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한 같은 작가의 ≪태백산맥≫이, 한 작가의 작품이면서도 역사와 현실을 읽는 시각의 수준에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여기에 좋은 보기가 됨 직하다.

이병주가 너무 많은 작품을 간단 없이 제작해 낸 관계로, 곳곳에 비슷한 정황이 중첩되거나 중ㆍ단편의 내용이 장편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어 있는 양상도 적잖이 발견된다. 이러한 측면은 정작 한 사람의 작가로서 그를 아끼고, 그와 더불어 가능할 수도 있었던 한국의 ‘발자크적 신화’를 아쉬워하는 이들에게 만만치 않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그가 보다 미학적 가치와 사회사적 의의를 갖는 주제를 택해 힘을 분산하지 아니하고 집중했더라면, 빼어난 문필력과 비슷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극적인 체험들로써, 그 자신이 마력적이라고 언급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같은 웅장한 작품을 생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쉽사리 내버리지 못하는 것은, 일부의 부정적 측면이 상존하는 채로 그의 소설 세계가 우리 문학사상 유례 드문 성취와 비교할 데 없는 분량을 자랑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그가 불혹의 나이에 시작해 온 생애를 두고 구축해 놓은 서사적 구조물들을 외면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작고 사소한 허물을 덮고 크고 유다른 성과를 올곧게 평가하는 대승적 시야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이병주인 것이다.

마흔네 살의 늦깎이 작가로 시작해 한 달 평균 200자 원고지 1000매, 총 10만여 매의 원고에 단행본 80여 권의 작품을 남긴 이병주의 문학은, 그 분량에 못지않은 수준으로 강력한 대중 친화력을 촉발했다. 그와 같은 대중적 인기와 동시대 독자에의 수용은 한 시대의 ‘정신적 대부’로 불릴 만큼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 작가를 그 시대의 주요한 인물로 부상시키는 추동력이 되었다.

또한 이는 작가의 타계 이후 20년이 가까운 지금, 이제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으로 진행되고 있는 작품의 대중적 수용 및 실용성, 곧 문화 산업의 활발한 추진과 더불어 다시 살펴보아야 할 면모를 여러 방면에서 촉발한다. 이병주 문학이 갖는 독특한 내용 및 구성은 이 대목에 있어 매우 효율적인 요인으로 기능하는 장점이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재미, 박학다식과 박람강기, 체험의 역사성, 지역적 기반 등 여러 요소가 그의 문학 가운데 잠복해 있는 까닭에서다.

여기 소개할 세 편의 소설 <철학적 살인>,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 <예낭 풍물지>는 이병주의 작품 가운데서도 수발()한 중ㆍ단편들이다. 세 작품은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에 발표되었으니,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18년, 그리고 데뷔한 지 7년째부터 씌어진 것으로, 언론과 문학 양면에 걸쳐 뛰어난 문장가였던 그의 문필이 한결 유장해졌을 무렵이다. 뿐만 아니라 지천명()을 넘긴 파란만장한 삶의 풍파가 세상살이의 문리()를 틔워, 한 작가가 가장 의욕적으로 작품을 쓸 만한 지점에 도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살인>은 법과 제도를 넘어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작가의 사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간음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물리적 치죄를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 법원의 판례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이를 설득력 있게 피력하는 작가의 변설()이다.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은, 작가의 감옥 체험에 잇대어 한ㆍ중ㆍ일의 근대사에 얽힌 여러 조각의 이야기 모자이크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풀어 보인 작품이다. 그 각기의 조각마다 따로 한 편씩의 소설이 될 만한 중량을 가졌는데, 이를 ‘겨울밤’이라는 이야기의 얼개 아래에 한데 묶었다. <예낭 풍물지>는 그야말로 현란한 소설적 잡학사전이다. 감옥ㆍ병ㆍ사랑ㆍ가족ㆍ고향ㆍ죽음 같은 온갖 재료를 버무려 한 편의 소설을 만들고, 그 가운데서 참된 인간의 자아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물론 이 세 소설은 이병주의 전체 작품 세계 가운데 극히 일부분이며, 거기에 담긴 바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들도 작가의 사상ㆍ체험ㆍ상상의 방대한 부피 중 미소한 대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단단한 세부들은 우리에게, 이 작가가 정녕 소중히 알고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생각이 무엇이며, 그 생각의 통로를 되짚어 작가의 작품 한복판으로 진입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지시한다. 작가의 전체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영역이 있는 만큼, 공들여 제작한 개별의 작품을 공들여 읽어야 할 영역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병주의 세계에는 그런 대표성을 가진 소설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참조어
철학적 살인,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 예낭 풍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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