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기
[ Italienische Reise ]| 저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
|---|---|
| 국가 | 독일 |
| 분야 | 소설 |
| 해설자 | 정서웅(숙명여자대학교 독일언어문화학과 명예교수) |
1.
유럽의 18세기는 여행에 대한 열기가 놀랄 만큼 고조된 시기였다. 루이 부갱빌(Louis Bougainville, 1729∼1811)이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초로 범선에 의한 세계 일주를 감행, 멜라네시아 군도를 발견했고, 세 번이나 세계 여행에 도전한 영국인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동쪽 해안을 탐사하고 태평양의 무수한 섬들을 찾아냈다. 여행가들 말고도 고명한 학자들까지 유럽 안팎의 새로운 땅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결과 무수한 여행 그룹이 생겨나고 많은 종류의 여행기들이 출간되었다. 영국의 소설가 로렌스 스턴(Laurence Sterne)의 여행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대한 감상적인 여행(A sentimental journey through France and Italy)≫(1768)에 자극 받은 영국인들은 유럽 여행길에 즐겨 나섰고 알프스 산까지 정복했다.
그리스ㆍ로마 등 고대국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도 많았다. 고고학자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의 저서 ≪고대 예술의 역사(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ums)≫(1764)는 오래전부터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빙켈만은 이탈리아의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대학”이라고 했거니와, 그의 글들에는 자신의 로마 탐구를 토대로 다른 여행자들의 개안(開眼)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가 중시한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깊은 체험을 통한 변화의 힘”이었다.
로마 탐구에 있어 빙켈만의 진정한 제자가 된 괴테의 경우도 첫 번째 목표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자기 수양이었다. 새로운 세계와 만나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화, 새로운 인간상을 천착해 감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삶을 확산ㆍ심화ㆍ고양시키는 것이었다. 바이마르를 탈출, 로마라는 학교에 첫발을 디딘 괴테의 첫말은, “나는 다시금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편협한 사고의 반경 속에 갇혀 지냈던 자신을 발견했으며,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식과 행동을 포함한 자아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간하기까지 상당 기간이 걸린 ≪이탈리아 여행기(Italienische Reise)≫에는 괴테의 이러한 정신적 변화와 성숙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1786년 9월 3일부터 1788년 6월 18일까지 약 22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비록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이 여행은 괴테의 표현을 빌리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혁신시키고 충실을 기할 수 있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괴테는 로마에 발을 디딘 순간이 제2의 출생, 진정한 재생이라고 생각했거니와, 새로운 세계와 문화를 배워 새로운 인간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늘 탐구적인 자세를 견지했으며 비교적 만족스런 결과를 귀국 직전의 편지에 써 보낼 수 있었다.
제 여행의 중요한 의도는 육체적ㆍ도덕적 폐해를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 다음은 참된 예술에 대한 뜨거운 갈증을 진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상당히, 후자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788년 1월 25일 카를 아우구스트 공에게 보낸 편지)
괴테에게 있어 이탈리아는 고대의 유적과 유물을 찾아보는 관광지만이 아니었다. 공사다망했던 바이마르를 떠난 그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되찾아 주고 잠자고 있던 그의 천재성을 다시 일깨워 준 장소였다. 그것은, 수년간 묵혀두었던 원고들이 현지에서 완성되거나 개작되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식물학을 위시한 자연과학의 연구에도 몰두했고 인간과 민족과 예술의 근원인 자연을 철학적으로 고찰하기도 했다. 바이마르의 지인(知人)들에게 보낸 많은 편지에 적혀 있듯이 그는 껍질을 벗는 듯한 자각의 변화를 체험했으며, 그것은 훗날 <파우스트(Faust)>와 같은 대작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에너지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젊은 시절 탐닉했던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조야함을 극복하고 예술의 참된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괴테는 고대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렸다. 빙켈만이 말한 “조용한 위대성과 고귀한 단순성(Stille Größe und Edle Einfalt)”이라는 고전주의 정신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북방의 편협성에서 벗어나 명확한 규범과 조화를 중시하는 남방 정신에 탐닉함으로써 자유분방한 정열을 구가하고 고귀한 상승을 모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쓴 연작시 <로마의 비가(Römische Elegien)>(1788∼1790)에는 이탈리아 체류 시의 삶의 모습과 감회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제 고전의 땅에서 나는 기쁘고 영감에 차 있다.
옛날과 오늘의 세계가 더 큰 소리 더 큰 매력으로 말을 건넨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여행이 붐을 이루던 시기에 이탈리아를 찾은 괴테는 내ㆍ외적으로 독특한 상황 아래서 거듭나기를 시도했다. 괴테는 이탈리아의 매력적인 과거를 관찰하는 데 한순간도 허비하지 않았다. 혼자서, 혹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로마의 유적은 물론 나폴리와 시칠리아 섬까지 답사했으며, 유명한 그림이나 조상(彫像)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러고는 편지, 메모, 일기, 스케치, 그림, 자료 수집 등을 통해 관찰의 내용을 충실하게 남겨놓았다. 이러한 자료들을 총망라하여 괴테 자신이 적절하게 편집해 놓은 것이 바로 ≪이탈리아 여행기≫다. 이 책은 빙켈만의 저서에 못지않게, 베르길리우스와 페트라르카의 나라를 동경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었다. 그의 여행기에 매료된 사람들은 괴테를 가리켜 “독일 문화 속에 이탈리아의 신화를 창조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한 동기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소년 시절부터 간직했던 남국에 대한 동경심
둘째, 바이마르의 편협성에서 도피하려는 충동
셋째,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던 예술가 정신을 되찾고 싶은 욕구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이 세 가지 소망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 성취감을 만년에 비서인 에커만(Eckermann)에게 이렇게 술회할 정도였다.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나는 로마에서만 느꼈노라고 말할 수 있네. 이러한 절정, 이러한 행복한 감정에 다시는 도달하지 못했네. 로마에서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훗날 다시는 그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어.
이탈리아에 대한 괴테의 관심은 소년 시절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기를 썼던 아버지의 체험담, 거실에 비치된 로마의 안내서와 지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곤돌라 모형, 그리고 현지에서 수집해 온 박물 표본이나 대리석상 등이 소년 괴테의 마음에 남국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주지하는 대로, 1775년(26세)부터 괴테는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공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에 와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변신해 있던 이 기간이 시인으로서의 괴테에겐 침체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산적한 국사를 돌보느라 시간을 빼앗김으로써 그 후 10년간의 창작활동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들끓던 천재 의식이 잠들고 체념과 안일에 젖어버린 감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를 구해내는 일은 떠나는 것뿐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소극적 삶을 박차고 적극적인 삶을 찾아 나선 시인 괴테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다. 1786년 11월 1일 로마에 도착한 즉시 띄운 편지에서 그는 여행을 결행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뭇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은 이 북국에만 얽매여 있다. 이곳에 대한 매력이 사라져감을 보았기에 나는 외로운 길을 떠나 제어하기 어려운 욕구가 이끌어 당기는 구심점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렇다. 그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일종의 병(病)과 같은 것이었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몇 해 전부터 괴테는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메나우 광산을 감독하기 위해 지질학 및 광산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예나 대학과 관련되는 일을 하다가 비교해부학에도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에 이미 모든 생물의 원형과 친족성에 대해 숙고했다. 자연과학 연구에 흥미를 가질수록 괴테는 자신의 모든 관심사가 정사를 돌보는 일 때문에 방해받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간행에 대해 출판업자 괴셴(Göschen)과 계약을 맺은 뒤 모든 공무와 사적인 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공작에게 미정의 휴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휴가 계획은 공작에게도, 절친한 샤를로테 폰 슈타인(Charlotte von Stein) 부인에게도 함구했다.
1786년 9월 3일 그는 공작 일행과 휴양차 머물었던 카를스바트(Karlsbad)를 “몰래” 빠져나왔다. 이 뜻밖의 행위로 일행은 수수께끼 속에 빠졌고 얼마간 그에 대해 섭섭한 감정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한 도피성 여행에 대해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기≫의 서두에서 이렇게 변명하고 있다.
새벽 3시에 나는 카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나를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일행은 8월 28일의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날 붙잡아 둘 권리를 가진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여기에서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의 하인 자이델(Seidel)에게도 말했듯이, 이 여행은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필연성을 갖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바이마르의 재상이라는 사회적 신분과도 결별했다. 필리포 밀러, 테데스코, 피토레 등 가명을 쓰면서 철저히 자신을 은폐했다. 역마차를 이용한 여정은 멀고도 외로웠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형언하기 어려운 열정이 계속해서 그를 “떠밀고 갔다”. 1주일간의 고된 여행 끝에 뮌헨, 인스브루크, 브레너를 거쳐 9월 11일에 트리엔트에서 이탈리아 땅에 들어섰다. 이 나라에 대한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내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지금 그린란드로부터 여행, 즉 고래잡이에서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그는 베로나의 원형극장에서 처음으로 고대의 건축을 접하게 되었다. 비첸차에 며칠 머물면서 팔라디오의 궁정 건물에 매혹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베네치아로 갔으며, 그곳에서는 2주 이상 머물렀다. 페라라와 첸토를 거쳐 볼로냐에 다다라서는(18일) 다시금 며칠간 휴식을 취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에 유숙을 위해 지체하는 것 말고는 여행을 서둘렀다. 피렌체에서는 세 시간밖에 머물지 않았고 페루자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시시(26일)를 거쳐 로마에 발을 디딘 것이 10월 29일, 그러니까 독일을 떠난 지 거의 2개월이 지난 뒤였다. 도착 후의 벅찬 감회를 그는 즉시 편지에 담았다.
그렇다. 나는 마침내 이 세계의 수도에 도착했다! 15년 전에 유능한 안내자를 동반하면서 이 도시를 보았다면 복에 겨웠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 홀로 방문해 내 눈으로 본다고 해도 이러한 기쁨이 늦게나마 부여된 것이 다행이다. (…) 우리가 부분적으로밖에 몰랐던 전체를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는 듯하다. (1786. 11. 1.)
처음에 괴테는 로마와 나폴리만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폴리를 찾아 그 기막힌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한 달가량이나 머물다가 시칠리아 섬까지 나아갔으며, 결국은 이탈리아 체류를 연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개월 이상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면서 괴테는 명랑하고 자유로운 나그네의 정취를 마음껏 만끽했다. 1787년 6월 6일 다시 로마로 돌아온 그는 이 위대한 세계의 학교에 1년 이상 더 체류하게 되었다.
두 번째 로마 체류 시에 이미 여행자로서의 그의 안목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그는 발길이 닿는 명소들을 빠짐없이 찾았고 귀중한 조각품이나 그림을 관찰한 후 그 감회를 일기나 편지 속에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고대예술에 깃든 혼을 자신의 것으로 변용시키고자 심혈을 기울였거니와, 그것은 로마 체류의 연장을 알리며 쓴 편지의 한 구절처럼, “예술에 대한 지식과 조그만 재능이 여기에서 완전히 단련되고 성숙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괴테는 로마에서 친분이 두터웠던 화가 티슈바인(Tischbein)의 집에서 기거했다. 코르소(Corso) 가 20번지에 있는 이 집에서는 활기 넘치는 로마 거리를 내다볼 수 있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괴테는 극소수의 사람들하고만 교제했다. 유적을 답사할 때마다 안내자가 되어준 앙겔리카 카우프만(Angelika Kaufmann), 그녀의 남편으로 고고학자이자 예술품 수집가인 라이펜슈타인(Reiffenstein), 그 밖에 야코프 하케르트(Jakob Hackert), 카를 모리츠(Karl Moritz), 하인리히 마이어(Heinlich Meyer) 등은 항상 그의 주위에 머물면서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교사 노릇을 해주었다. 이러한 친구들의 안내와 조언을 받으면서 괴테는 일찍이 자신의 열정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모든 것을 찾아다녔다. “고전의 토양 위에 존재하는 현재” 속에서 날마다 새롭고 놀라운 대상을 접하는 희열을 맛보았다. 로마에 남아 있는 옛 문화의 숨결은 그로 하여금 지금껏 집착해 왔던 사고의 틀, 그 “껍질”에서 벗어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찰만큼 사고하는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존재지만 가장 깊은 골수까지 변화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1788. 1. 5.)
흔히 괴테의 문학이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새로운 변모를 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여행기 곳곳에 진술된 기록들을 통해서도 확연히 증명된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는, 자신의 삶이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예감에 차 있었다.
지금 내 젊은 날의 모든 꿈들을 생생하게 바라본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동판화들을 지금 실제로 보고 있다(아버지는 로마의 조감도를 복도에 걸어두었다). 그림과 스케치, 동판화와 목판화, 석고와 코르크 세공 등을 통해 오래전에 알고 있던 것들이 모두 내 눈앞에 늘어서 있다. 어디를 가건 새로운 세계 속에서 눈에 익은 것을 발견한다.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이며, 그것들은 모두 새롭다. (1786. 11. 1.)
괴테의 과제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온갖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며 오랫동안 고국에서 지녔던 생각을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그는 되도록 있는 그대로 이탈리아를 보려 했으며 자신의 견문과 감흥의 내용을 바이마르의 친구들에게 충실히 적어 보냈다. 그 편지는 아우구스트 공에게 보낸 몇 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헤르더와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괴테는 바이마르 사람들의 정체성(停滯性)과 편협성을 내심 걱정했었다. 새롭게 다가오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를 예견하면서 19세기에 진입하는 동향인들에게 정신적 이상향이었던 고대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개안과 개선을 시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로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여기선 무언가가 된다. 비록 그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의 범상치 않은 개념을 얻게 된다. (1786. 12. 13.)
이러한 비상한 생각들은 괴테에게 잠들고 있던 시심(詩心)을 일깨워 침체되었던 창작활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작품이 구상되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미완의 원고들이 로마에서 결실을 맺을 수가 있었다. <이피게니에(Iphigenie)>가 아름다운 운문 형식으로 개작되었고, <에그몬트(Egmont)>, <에르빈과 엘미레(Erwin und Elmire)>, 그리고 <벨라 별장의 클라우디네>를 완성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대작 <타소(Tasso)>와 <파우스트>를 완성하기 위한 구상이 마음속에 발효되고 있던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스스로 미술 공부를 자청해 열심히 노력했고 자신의 그림을 여러 장 남기기도 했다. 미술사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로마의 화랑, 박물관, 그리고 건축물들을 방문했다. 이러한 노력은 제2의 탄생을 원했던 그의 소망을 이루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가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에너지가 되었다.
3.
괴테가 이탈리아 체류를 주관의 새로운 형성과 개혁의 기회로 삼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괴테의 모든 견문은 북쪽 고향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의미가 있다. 이 여행이 “일시적인 편안함과 즐거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본 것, 여행을 통해 얻은 세계상, 아주 적극적이었던 견문의 결실을 고국으로 갖고 가기 위한 것이었다.
오랜 뒤(68세)에 쓴 ≪나의 식물학 연구사(Geschichte meines botanischen Studiums)≫(1817)에서 그는 그 즐거웠던 이탈리아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자신이 관찰하고 숙고하고 찾아낸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그 2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수집하고 나의 모든 생각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고대 민족이 자기 나라의 최고의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했는지 어느 정도까지는 살펴볼 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차츰 전체를 조감하고 편견 없이 순수하게 예술을 즐길 수 있었다. 나아가 자연을 보고 그것이 유물들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어떻게 모든 예술작품들의 전범(典範)으로서 생생한 상들을 이루어내는가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탐구했던 세 번째 것은 그 민족들의 관습이었다.
이 글귀에는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얻은 사상적 소득이 종합되어 있다. 그가 이 “세계의 학교”에서 관심 깊게 살펴본 세 가지는 자연, 인간 사회, 그리고 예술이었다.
자연과학에 대한 괴테의 연구는 로마 체류 중 더욱 고조된 듯이 보인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식물학뿐만 아니라 기상학, 지질학, 광물학, 동물학, 색채학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영역이었다. 자연 현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은 당시의 편지나 일기들 속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경우에나 자연의 개체, 혹은 복합체 속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파악하고 그를 통해 생명의 비밀을 알아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베네치아의 바닷가에서는 바다 뱀장어와 꽃게를 관찰하여 생명력의 경이로움에 찬탄하고, 파도바(Padova)의 식물원을 둘러보고는 소위 ‘원형식물(Urpflanze)’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유기체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진보하여 마침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발전적인 경지, 즉 자연의 모든 자료가 천재적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진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괴테의 인간상은 역사나 신학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로마라는 고전적 토양에서 자연과 그것의 상승된 형태인 인간의 형상을 관찰하면서 괴테는 그 오묘한 유기적 관계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는 자연뿐만 아니라 예술작품들, 예컨대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를 위시한 옛 거장들의 조각과 그림에도 깊은 관심을 보낸다. 여기서 귀결되는 점은, 자연 관찰과 예술 고찰이 즉시 하나로 합일된다는 사실이다. 자연 속에서도 그렇듯이 그는 최고의 예술이 모든 자의적인 것, 공상적인 것을 떠나 내적인 진실과 필연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만 실현됨을 확인했다.
나는 자연을 관찰할 때처럼 지금 예술을 관찰한다. 또한 나는 오랫동안 추구했던 것, 즉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의 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얻는다. 나의 정신은 이런 방향으로부터 더욱더 수양되며, 보다 자유로운 영역을 내다보고 있다.
괴테는 또한 인간을 개별적 존재뿐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공동체적 삶에 접근하기 위하여 어딜 가나 주민의 행동, 생활양식, 관습, 특성 등을 파악하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거리, 학교, 상점, 극장, 시장, 교회 등을 재삼재사 관찰하고 그 지역의 자연과 문화를 유추해 내었다. 괴테에게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탈리아인들의 감각적 생활 태도였다. 그는 연극 공연과 재판에도 참관했고 1788년 1월에는 유명한 로마의 사육제를 구경했다. 그 열띤 광란의 와중에서 그의 눈이 직시한 것은 자연적 존재인 인간과 그 집합체인 민족의 삶과 숨결이었다. 괴테는 민족을 역사가 아닌 자연으로 이해했다. 몰락과 죽음도 자연현상에 속하는 것인즉 인간의 역사 역시 자연 속에서 이해하려 했다. 따라서 현재의 로마에 발을 딛고서도 지난 역사의 정신을 통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연관에 입각해 괴테의 예술관도 재정립되었다. 인간의 예술 역시 최고의 단계에 이른 자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의 고귀한 예술은 괴테에게 있어 진정한 자연법칙에 의한 인간 최고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1788년 로마에서 아우구스트 공에게 쓴 편지에는 예술의 새로운 본질을 터득한 기쁨에 넘쳐 있다.
로마에 와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지금껏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구나, 예술작품 속에 일반화된 자연의 반영만을 놀라워하고 즐기고 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여기엔 다른 자연이, 넓은 예술의 장(場)이 눈앞에 전개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술의 심연이 있습니다.
로마는 시인 괴테가 진지한 탐구를 벌인 장소였다. 이러한 학문적 연구는 향후 그의 창작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로마는 괴테의 사상이 개발되고 신장될 수 있었던 토양이었다. 그 고전적 분위기에서 그의 충만한 창의력이 되살아났고 구체적인 결과로 가시화되었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얻은 결실을 점검하면서 미래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는 자서전의 한 토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주관적인 글이다. 제일 나중에 출간된 <두 번째 로마 체류>에서는 자기 수신서 같은 면모마저 보인다.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자아의 성숙, 내면화와 보다 큰 확산, 요컨대 부단히 탐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여행기의 중요한 자료는 이탈리아 체류 시 써놓았던 <여행일기>다. 괴테는 여행기를 일찍 출간하려 했으나 귀국 후 얼마 동안 의욕을 상실했다. 20년도 훨씬 더 지나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모을 때 이 기록은 자서전의 자료로서 다시금 관심을 끌게 되었다.
1814년 페르시아 시인 하피스(Hafis)의 시집 ≪디반(Divan)≫을 읽고 괴테의 마음속엔 유년기부터 지녔던 동방 세계에 대한 동경이 되살아났다. 그해 여름 라인 지방과 마인 지방을 여행하면서 17세 이후 발길을 끊었던 고향을 찾았다. 새로운 눈으로 고향의 풍광과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는 동안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다음 해 한 번 더 찾았을 때에도 고향의 매력은 여전했다. 이것은 그의 이탈리아 회상을 재현하는 데 결정적인 동인이 되었다.
1816년 괴테는 친구 하인리히 마이어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논문 <신독일의 종교적ㆍ애국적 예술>을 발표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이탈리아 여행기≫ 1권을 출간했다. 이탈리아 체험에서 얻은 교훈이 퇴색해 가고 있음을 절감했던 괴테는 이 내적 투쟁의 기록을 재생하면서 다시 한 번 삶의 깊이와 고전주의 이념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저한 준비 작업을 거쳐 괴테는 1811년부터 자전적인 글의 집필에 매달렸다. 1812년 10월에 이미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 1, 2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3부는 1년 뒤에 완료되었고, 이것을 합쳐 ≪나의 삶으로부터, 제1편≫이라 명명했다. ≪시와 진실≫과 ≪프랑스 종군기(Kampagne in Frankreich)≫(1822) 사이에 나온 중요한 자전적 기록이 바로 ≪이탈리아 여행기≫다. 이 기록은 세 번에 걸쳐 출판되었다. 1816년 10월에 1권, 1817년 10월에 2권이 나왔고, 두 번째의 로마 체류를 기록한 3권은 1819년에 착수하여 무려 10년이나 경과된 1829년 8월과 9월에 걸쳐 완간을 보았다. 1, 2권을 합본해 출간할 때에도 책의 제목은 ‘이탈리아 여행기’가 아니었다. ‘나의 삶으로부터, 제2편 1부와 2부’였다. 제1부는 카를스바트에서 로마까지의 여행, 그리고 1787년 2월까지의 로마 체류를 기록한 것이요, 제2부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섬을 다녀온 기록이었다. ‘이탈리아 여행기’라는 제목이 정해진 것은 1829년 <두 번째 로마 체류>를 씀으로써 여행기 전부가 완성되었을 때였다. 옛 기록을 수집하여 편집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괴테에겐 지난 세월의 기쁨과 감동이 되살아났다. 풍경과 유적과 사람들이 생동감 있게 눈앞에 나타났다. 그의 기억과 상상력은 과거를 재현하기 위해 부심했고, 그의 언어는 다시 한 번 예리한 통찰 속에 번득였다.
제1부는 기행문으로서의 시간적 연계성이 가장 강하다. 일기 형식으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대한 인상과 생각, 특히 ‘세계의 수도’ 로마와 친화되어 가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방의 답사 기록인 제2부는 주로 바이마르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 연계성이 한결 느슨하다. 편지와 함께 괴테의 말을 빌려 “회상으로부터 이끌어낸” 단편적 기록이 삽입되어 있다.
10년이나 걸려 쓴 제3부, 즉 <두 번째 로마 체류>는 앞서 출간된 여행기들과는 아주 색다른 구성을 보여준다. 체류 일정에 맞추어 그날에 일어난 일과 생각을 기록한 서신(書信)들이 편집되고, 한 달 간격으로 그달 중 특히 기억되는 사건이나 정신적 감흥을 ‘보고(報告)’라는 형식으로 기술하여 삽입했다. ‘보고’는 물론 당시의 기록을 참조하고 기억력의 도움을 빌려 노경의 괴테가 새로 작성한 글이다. 거기에 또 사이사이 괴테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중요한 논문과 편지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인상기를 추가로 기술해 넣었다. 화가 티슈바인의 편지, <교황의 융단>, <방해받은 자연 관찰>, <어원학자 모리츠>, <유머러스한 성자 필립 네리>, <로마의 사육제>, 그리고 모리츠의 논문 <아름다움의 조형적 모방에 관하여> 등이 그것들이다. <두 번째의 로마 체류>는 그런 의미에서 여행 일지에 충실한 앞부분과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옛 이탈리아의 젊은 괴테와 훗날의 노대가가 서로 만나는 듯 편지와 보고가 교차되는 구성 속에 보다 심오해진 괴테의 삶의 변화와 그 종합을 보는 듯한 만족감을 선사해 준다.
이탈리아 체류가 괴테의 삶과 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캄파냐의 폐허에서, 베드로 성당의 중정(中庭)에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그림 앞에서, 또는 광란하는 사육제의 군중 속에서 괴테는 다른 세계의 삶을 호흡했고 그 감흥을 자신의 삶과 예술의 자양분으로 만들었다. 그는 티슈바인과 하케르트에게서 미술에 관한 지도를 받았고, 앙겔리카 등의 안내로 옛 로마의 유산을 하나씩 하나씩 답사해 나갔다. 이러한 심미적 관찰과 자유분방한 생활을 통해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예리해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음으로써 작품 창작을 위한 재충전에 성공했다.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고 있자니까 내 젊은 시절의 사소한 것까지 되살아나고 있다. 그러자 사물의 고귀함과 품위가 생존의 마지막에 달하기라도 한 듯 나를 다시금 높게, 멀리 이끌어 올린다.
괴테는 1788년 4월 23일 음악가 카이저와 함께 귀로에 올랐다. 피렌체(5월 6일 도착)를 거쳐 5월 22일에는 밀라노에 도착, 며칠간 머무르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볼 수 있었다. 코모(28일), 슈필겐(30일)을 경유해 마침내 바이마르에 귀환한 것이 1788년 6월 18일, 출국한 지 1년 9개월여 만이었다. 로마와의 작별은 괴테에게 있어 삶의 한 중요한 시대와의 결별인 셈이었다. 남국의 도시를 떠나며 애석해했던 심경은 여행기 말미의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괴테는 인생의 한 전환기에 동경했던 나라 이탈리아를 찾음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기≫는 이러한 재충전과 자아 성찰의 모습을 기록한 기행문학으로 독일문학사상 여러 가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당대의 신세대, 즉 낭만주의자들은 괴테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지나치게 과시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시인이자 과학자의 눈으로 진지하게 사물을 대하고 거기에서 유로되는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 태도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흥미 위주의 여행기가 아닌, 대시인이 겪은 삶의 일대 전환기적 체험의 기록으로 보아야 더 큰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