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80)김 병 태*
1. 머리말
(1) 복음과 문화
(2)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문제
2. 예수회의 시작과 ‘전례논쟁'의 맹아
(1) 예수회의 귀족적, 인문주의적 특징
(2) 예수회와 도미니칸(Dominicans)의 신학논쟁
3. 예수회의 중국선교 전략과 발전
(1) 예수회의 중국선교 전략
(2) 南京敎案 시기 예수회의 발전
4. ‘전례논쟁’의 발생과 전개
(1) 논쟁의 내용
(2) 천주교 내부의 논쟁
(3) 중서 갈등으로의 진전
5. 청대 천주교 정책의 변화
(1) 청대의 천주교 정책
(2) 청대 종교정책의 변화
6. 맺음말
1. 머리말
(1) 복음과 문화
종교가 ‘공유와 전달’의 과정을 통해 습득되고 전달되며 사멸하는 문화
의 한 구성요소라고 보는 것은 오늘날 종교학의 일반적인 전제가 되고 있
다.1) 이에 따라 종교학은 종교와 문화 사이의 유사성을 추적하게 되었다.
* 배재대학교 전임강사 겸 교목
164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그러나 종교문화는 여타의 문화 요소와 달리 초월성, 궁극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 요소와 구별되는 면이 있다. “종교적 본질의 특색은 비
실증적인 궁극적 차원에 관한 문제로서 인간 행동에 포괄적이면서도 근본
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강력한 실천적 동기를 마련하는 근거가 된
다는 것이다.”2) 따라서 “종교의 자기를 초월하게 하는 추진력은 종국에
가서 스스로가 창조한 문화를 서슴지 않고 굴절시키거나 파괴 내지 변형
하게 하는 동기를 낳는다.”3)
그러므로 종교와 문화는 통합적이고 조화로운 관계일 뿐만 아니라, 대
립적이고 갈등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대립적인 경향은 신학에서 더욱 두드
러지게 드러난다.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종교와 문화 대신 복음과
문화라는 도식을 이용하여 기독교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로 분
류하였다.4) 여기에서 니버는 복음을 문화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움직임도
비판하지만, ‘문화의 그리스도’, 즉 복음이 문화의 한 구성요소라는 주장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를 통합시킬 것인가, 아니면 병렬적인 관계
로 파악할 것인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모든 경우가 출현하였지만, 아
마도 니버는 본인이 마지막 다섯 번째로 제시한 유형, 즉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라는 입장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서 오늘의 신
학은 교회나 기독교라는 문화요소를 복음의 빛에서 상대화시켜 보는 시각
을 얻게 되었으며 심지어 복음 자체의 변형 가능성을 얘기한다. 여기에 선
교의 신학적 기초가 있다고 할 것이다.
선교역사에서 문화에 대한 선교적 질문이 없었던 적은 없다. 때로 기독
교는 문화의 중압감으로 인하여 스스로 무너지기도 하였고, 때로는 문화를
‘선교의 도구' 정도로 여기기도 하였다. 19세기 이후 서양기독교에 대한
선교지 문화의 거센 도전이 일어나면서부터 양자는 유례없는 충돌을 경험
하였다. 이에 선교담당자들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되었고, 19세기 초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토착화 논의가 일어났
다. 애초에 토착화 논의는 복음과 문화의 연속성을 발굴하여 선교적 성과
1) 황선명,종교학개론, 종로서적, 1982, pp. 61~62.
2) 황선명, 위의 책, p. 68.
3) 황선명, 위의 책, p. 68.
4) 리차드 니버 저, 김재준 역,그리스도와 문화, 대한기독교서회, 1958.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65
를 촉진하자는 데 동기가 있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천주교, 개
신교를 막론하고, 문화적 상황에 중점을 두는 토착화모델이 발전하게 되었
고,5) 나아가서 복음과 문화 간의 변증법적 대화 또는 상호변혁을 논하게
되었다.6)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선교의 역사는 과거의 일직선적인
구속사관을 벗어나 ‘문화 속에서의 사건'을 탐구하게 되었다. 여하튼 상호
만남과 이해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의 역사가 곧 선교의 역사인 것이다.7)
(2) 명말청초 ‘典禮論爭’의 문제
철저하게 변방문화로 시작된 중국의 기독교는 애초에 입고 들어온 문화
를 주장할 수 없었고 주저 없이 중국문화의 옷으로 갈아입고 등장하였다.
중국에서 기독교와 중국문화 사이에 접촉이 있었던 역사를 개관한다면, 우
리는 먼저 당대(唐代)와 원대(元代)의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 당
정관(貞觀, 太宗) 9년에 중국에 들어 온 경교(景敎)는 도불(道佛)의 용어를 대
폭 수용하여 중국화를 꾀하였다.8) 원대의 기독교를 지칭하는 야리가온(也
里可溫)에서도 그러한 시도는 계속되었다. 대도(大都)의 십자사(十字寺)는 원
래 불교 사원이었던 곳인데, 삭발을 한 수도승 마가가 스승과 함께 수도했
던 이른바 기도원으로 이용되었고9) 원대 기독교의 융성을 증언하지만, 원
대 기독교 역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우리는 당, 원대
의 기독교에서 기독교의 독특한 특징을 찾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당, 원대의 경교와 야리가온이 불교, 도교의 형식을 빌렸다면, 명말청초
시기 천주교는 불교 또는 유교의 도전을 받았다. 애초 미켈레 루지에리
(Michaele Ruggieri, 羅明堅, ~1607)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는 모두 승복(僧服)을 입고 스스로를 승(僧)이라고 자칭하며 중국
5) 김웅태, “그리스도교 토착화의 여러 분야와 원리들,”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43호, 2003년 봄, 가톨릭대학출판부, pp. 154~157 ; 한국일,세계를 품는 선
교, 장신대 출판부2004, pp. 176~177.
6) 데오 순더마이어, 채수일 편역,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대한기독교서회,
1999, pp. 111~114.
7) 위의 책, pp. 116~121 참조.
8)
9) , “,” ,, , 1998.
166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생활을 시작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대부의 유교 복장으로 갈아입었
다. 여기에는 기독교와 유사한 내용을 가진 불교에 대한 경쟁심도 작용하
였고, 주요하게는 천주교의 국교화를 목적으로 삼았던 리치의 전략에서 비
롯된 것이었다.10) 다시 말해 리치의 관심은 천주교가 체제 내의 정통사상
으로 어떻게 편입될 수 있겠는가 함이었고, 유력 사대부 기독교인들을 탄
생시키는 등 종교적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예수신앙과 유학간의 의식적인 접촉 곧 ‘대화’(耶儒對話)가
진행되었는데, 이와 같은 명말청초의 야유대화(耶儒對話)는 오늘날의 중서
(中西)학자들에 의해 최고의 동서간 문화사상 교류의 사례로 평가되고 있
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양자 간의 신중한 접근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만남은 이전 시기와 달리 나름대로 자기전통을 의식하면서 중
국문화를 도입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리치가 속했던 예수회 내부의
보수 인사, 또는 도미니칸, 파리외방전도회 등 후발주자들의 ‘배타적인 문
화관’이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에 도전하면서 ‘전례논쟁’이 발
생하였다. 기독교 신앙과 중국문화 사이의 문제를 놓고 먼저 예수회 내부
에서 분화가 이루어졌고, 나아가서 선교회간, 중서간 갈등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이 글은 중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중국문화와 의식적으로 대화를 전개하
면서 충돌한 첫 번째 경험을 다룬 것이다. 명말청초의 예수회는 유교와의
조화를 선교전략으로 채택한 후, 중국 상층문화의 핵심과 맞닿게 되었고
적지 않은 열매를 냈지만, 결국 ‘전례논쟁’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좌절을 경험하였다. 기독교신앙과 교회는 중국의 사회와 문화
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떻게 대응했으며, 그것은 복음과 문화의 상호관
계라는 관점에서 어떤 스펙트럼으로 나타났는가에 선교 역사적으로 답변
하기 위해 우리는 ‘전례논쟁’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사에 유입된 기독교 신앙이 어떤 다양성을 가지고 한국문화에
매개되었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
된다.
명말청초의 천주교와 서학, ‘전례논쟁’과 관련해서 중국 측의 연구성과
10) ,, : , 1994, pp. 16~17.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67
를 간단하게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최근의 역사적 연구로 장국강(張國剛)의
책이 있고,11) 기독교와 명말 유학 간의 사상적 비교서로 고전적인 손상양
(孫尙楊)의 글,12) 그리고 전문적인 ‘전례논쟁’ 연구서로는 이천강(李天綱)의
것이 있다.13) 그 밖의 국외서적으로는 히라가와 스케히로, 빈센트 크로닌,
Gernet14) 등의 글이 돋보인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조선 후기의 역사와 관련지어졌다.15) ‘전례논
쟁’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연구 외에 전문적인 연구가 많지 않은 듯한데,
기독교에 대해 항목별로 조목조목 비판한 지식인으로 유명한 양광선(楊光
善)을 장정란(張貞蘭)이 연구한 것,16) 그리고《천주실의》(天主實義)를 분석
한 것이지만, 마테오 리치의 사상과 송명(宋明) 이학(理學) 사이의 차별성을
명쾌하게 정리한 송영배(宋榮培)의 글,17) 최기복의 글18) 등이 있다. 김상근
의 글19)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전략이 유럽적 배경 이전에 남미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반해, 황종열의 글20)은 마테오 리치의 적응
11) ,, : , 2003.
12) ,, : , 1994.
13) ,, 1998 ; ,
, , 1999.
14) 히라가와 스케히로, 노영희 역,마테오리치, 동아시아, 2002 ; 빈센트 크
로닌 저, 이기반 역,서방에서 온 현자, 분도출판사, 1989 ; Stephen
Uhalley, Jr. and Xiaoxin Wu, China and Christianity, M. E. Sharpe, 2001 ;
Gernet, ,, : , 2003.
15) ,, , 1987 ; ,명청시대 중한 관
계사 , 이대출판부, 1997 ; ,그리스도의 중국 전래와 동서문화
의 대립, 부산교회사연구소, 1997 ; ,, ,
1986 ; 강재언,, , 1990. 그밖에 차기진, 금장태, 최석우,
배현숙, 최기복, 조광, 원재연, 노용필 등이 중국과 조선의 서학을 연계지어
또는 독립적으로 연구하였다.
16) , “(1597~1669)의 그리스도교 -를 으로-,”
교수 정년기념 사학논총, 1996, pp. 211~237.
17) , “유교와 기독교의 충돌과 대화의 모색 -의 분석을
으로,” 마테오 리치, 송영배 역주,교우론, 스물다섯 마디 잠언, 기인십편 -
연구와 번역, 2000, pp. 506~532.
18) 최기복, “명말청초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유론과 성리학 비판,”교회사연
구제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19) 김상근,동서문화의 교류와 예수회 선교역사, 한들출판사, 2006.
20) 황종열,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의 신학적 의의와 한계,”교회사연
구제20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168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주의 선교가 오히려 문화 도구주의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하고,
정안덕은 ‘초유’(超儒)라는 말로 그 차별성을 드러내려고 했다.21) 이 글은
그와 같은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천주실의》를 토착화와 연관시킨 송영
배의 다른 글들,22) 그리고 한국 초기감리교회의 최병헌과 리치를 비교하
면서 본격적으로 토착화 신학의 시각에서 연구한 이정배의 글23)에서 도움
을 받았다. 특히 조선 후기의 천주교사를 신앙공동체의 시각에서 고찰한
조광의 연구24)는 복음과 문화와의 변증법적 대화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
가 크다고 하겠다.
‘전례논쟁’에 관한 중국측의 연구가 주로 개혁개방 이후 종교학계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주제이긴 하지만, 명청시대를 다룬 철학서나 역사서를
통해 배경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또한 ‘전례논쟁’ 시기 서방 선교단
체와 정치권력 등 유럽 상황 역시 주로 2차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임
을 밝힌다. 이 글은 다만 ‘전례논쟁’의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복음과 문
화의 상호 대화과정과 다양한 만남의 수준을 초보적으로 숙고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이것은 장차 기독교 복음을 감싸고 있는 서구사회의 배경,
중국문화를 감싸고 있는 중국문화와 사회의 배경, 그리고 양자의 매개가
될 신앙공동체의 삶의 자리에 대한 연구로 발전되어야 한다.
2. 예수회의 시작과 ‘전례논쟁’의 맹아
(1) 예수회의 귀족적, 인문주의적 특징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2)가 진행되는 동안 천주교는 이단 재판을 강
21) 정안덕, “기독종교와 불교의 호교적 변론에서 본 명말청초 종교대화의 정신,
21세기 동아시아의 변화와 기독교의 역할, 장신대출판부, 2003.
22) , “와 토착화의 의미,교우론, 스물다섯 마디 잠언, 기인
십편 - 연구와 번역, 2000, pp. 478~505 ; 송영배,동서철학의 교섭과 동서
양 사유방식의 차이, 논형, 2004 ; 송영배, “동서문화의 교류와 실학의 현대
적 의미,”한국 실학과 동아시아 세계, 경기문화재단, 2004 등.
23) 이정배, “마태오 릿치와 최병헌의 보유론()적 기독교 이해의 차이와
한계,”신학사상122집, 2003년 가을호, pp. 82~109.
24) ,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69
화하면서, 미신의 제거와 신앙의 통일을 기도하였다. 또한 제 기독교 국가
의 통치 권력을 회복하려는 교황의 시도가 일어났다. 그것은 개신교에게
빼앗긴 영토와 권위를 회복하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회는 약화된 교황청
의 권위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적 규율을 가지고 전선(戰線)에 섰던
교단이었다. 그리하여 독일 동남부,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 빼앗겼던 고
토(故土)를 회복하고, 유럽뿐만 아니라 남미의 식민지와 미국, 모로코, 인
도, 일본, 중국으로 앞장서서 진출하였다.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cio de Loyola, 1491~1556)는 스
페인 북부 귀족 출신으로서 궁정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기사 풍의 사람이
었고, 세속적 교육과 인격 훈련을 중시하는 인문주의자였다. 예수회는 그
가 파리대학을 다닐 때 만났던 일곱 친구들과 함께 세운 것이며, 문예부흥
기의 개인주의와 전체적 목적을 위한 절대 복종 및 의지의 희생이 결합되
면서 천주교 개혁운동으로 탄생한 것이었다.25) 이들 예수회의 선교는 ‘이
냐시오 영성’(Ignatian Spirituality)으로 알려진 이냐시오의 영성에 영향을 받
았는데,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곳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으
로서, “선교지의 토착문화는 살아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선교의 접촉점이었다.”26) 그와 같은 배경을 지닌 예수회의 선교적 특징은
인도, 중국 등의 해외 선교 방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인도선교에서 예수회의 로베르토(Roberto de Nobili, 1576~1656)는
1606년 경 상류층 사람들에게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성과를 냈지만,
그 방법 문제로 교황청의 제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냐시오의 대학 동료
였던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方濟各 沙忽略, 1506~1552)는 인도와
일본 선교시기에 현지 철학과 종교를 매개로 접근하였으며, 중국으로 방향
을 전환하였던 이유도 중국이 일본 문화의 종주국이라는 생각 때문이었
다.27) 리치, 카타네오(Lazarus Cattaneo, 郭居靜 1560~1640), 롱고바르디(Nicolas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 우르시스(Sabbathin de Ursis, 熊三拔, 1575~1620),
25) 위리스턴 워커 저, 이영헌 등 역,세계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90,
p. 317.
26) 김상근,동서문화의 교류와 예수회 선교역사, 한들출판사, 2006, pp.
28~30.
27) ,, : , 1998, p. 40.
170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 등도 모두 귀족 출신으로서
자기들의 교육적 배경과 자존심을 중시하며, 세속 지식을 가지고 상층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선교지의 발전에 따라, 천주교가 세계적 통일을 염원하며 중국
에 주교를 임명하는 문제를 토의하는 그 사이에, 중국에서는 반(反)천주교
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고, 예수회는 그 진취적이고 세속적이며 혹은 선
교적 성과를 위해 토착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극히 현실주의적인 특징28)
으로 인하여 교회의 중심으로부터 이탈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2) 예수회와 도미니칸(Dominicans)의 신학논쟁
‘전례논쟁’은 리치 사망 직후인 1613년, 그의 중국 예수회 후계자인 롱
고바르디(Nicolas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가 하나님의 호칭 문제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예수회와 도
미니칸 등의 선교회 사이의 문제로 발전하였고, 결국 동서간 문제로 비화
되어 1720년 강희제가 금교(禁敎)를 선언함으로써 결말이 난, 중국 천주교
역사상의 일대 논쟁이다. 100년 이상 계속된 이 논쟁의 전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럽 천주교 내부에 이미 분화의 가능성이 있었음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
선교 현지의 토착문화를 중시한 예수회의 영성을 강화시킨 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선교보고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된 스페인 살라만카 대학 중심
의 제2토미즘이었는데, 그것은 16세기 후반 천주교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예수회의 핵심적인 신학기조로 받아들여졌다. 빅토리아의 프란시스코
(Francisco de Vitoria, 1485/6~1546), 프란시스코 수아레즈(Francisco Suarez,
1548~1617), 루이스 몰리나(Luis Molina, 1535~1600) 등이 포진한 살라만카 대
학의 제2토미즘은, 원주민들에게 주어진 자연적 본성 안에 ‘하나님 지
식’(Knowledge of God)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29) 이러한 가르침
은 로마대학으로 전해진 후, 리치나 로베르토와 같은 선교사들의 선교학적
패러다임으로 제공되었다.
28) 김상근, 위의 책, pp. 88~93.
29) 김상근, 위의 책, pp. 64~66.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71
그와 같은 예수회의 신학적 경향에 대한 도전은, 중국에서 ‘전례논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유럽에서 도미니칸 신학자와의 신학 논쟁 속에서 나
타났다. 살라만카 대학의 예수회 신학자 몰리나와 당시의 최고 신학자 중
한 사람인 도미니칸의 도밍고 바네즈(Domingo Banez, 1528~1604)가 그 주인
공인데, 몰리나가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한 예정 즉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반면에 바네즈는 예정론을 주장하였고, 이 논쟁은 1607년 교황 바오로 5세
가 칙령을 내려 금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양측은 스페인 종교재판정에
출두하여, 예수회는 도미니칸을 칼빈주의자로 비난하였고, 도미니칸들은
예수회원들을 펠라기우스주의자라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바네즈의 편에 선 로마 루뱅대학교의 마이클 베이유(Michael
Baius, 1513~1589)를 통해 확산되는 듯 했다가, 교황의 개입으로 일시 중단
되었는데, 1640년 코넬리우스 쟌센(Cornelius Jansenius)의 저서를 통해 다시
표면화되었다. 쟌센주의(Jancenism)는 바네즈의 주장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
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으며, 줄곧 죄악 속에 빠져 있음을 강
조하였다. 이교도의 선행과 악행은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예수의 죽음은
오직 선민(選民)을 향한 것이고, 그밖에는 징벌로 정해져 있다고 보았다.
철학은 무신론적인 인간 본성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도덕과 고행을 중시하며, 예수회의 개연주의
(probabilism)30)를 반대하였다. 그 후 잔센주의는 프랑스로 건너가 종교개혁
운동의 색채를 띠면서 엄격한 순결생활을 강조하였고, 한동안 파리 귀족층
과 지식인의 유행이 되었다.
쟌센주의는 ‘전례논쟁’에 직접적 또는 소극적 영향을 주었다.31) 이들에
의하면 철학과 비기독교인 속에서는 어떠한 선한 것도 찾아볼 수 없다.
이교도 문화는 죄악의 열매이며, 인류 이성의 산물이 된다. 쟌센은 1638년
에 사망하였고 그의 학설은 1653년 정죄되었지만, 17, 8세기 프랑스, 네덜
란드, 벨기에, 이태리, 독일 등의 주교와 신학자들에게 광범한 영향을 미쳤
으며, ‘전례논쟁’은 그와 같은 배경을 두고 발생하였던 것이다.32) 사실 리
30) 교황의 권위 아래서, 목적은 수단을 가림이 없다는 식의 행동을 옹호, 자행
함으로써 17세기 로마교회의 도덕을 매우 저하시킨 예수회의 입장을 가리킨
다.(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pp. 54~55)
31) ,, : , 1994, p. 296.
172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치를 중국에 보낸 이는 1580년에 아시아선교 관찰사로 부임한 알렉산드로
발리나뇨(Alexandro Valignano, 1539~1606)였다. 친유교적인 토착화 선교정책
역시 발리나뇨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33) 예수회의 이와 같은 현실주의
적 선교정책은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서 국왕과 맞섰던 구원(舊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거니와, 선교적 성과에서 일본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며,34) 보다 큰 문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세속권력의 갈등 사
이에서 선교가 좌우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3. 예수회의 중국선교 전략과 발전
(1) 예수회의 중국선교 전략
명말청초 시기는 중국이 서방을 이해하고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
는 시기였으며, 천주교는 그 중간에 서 있었다. 천주교 선교사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은 과학기술 지식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접촉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틀은 자연스럽게 유교적 표
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인지, 유교적
틀 안에 있는 것인지를 두고 선택되었다.
리치 등의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중국 측의 종교정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진과학기술을 소개하면서 접촉면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보다 깊은 차원에서는, 신학적으로 제2토미즘의 영향을 받은 예수
회 선교사들이, “자연계시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 확보와 하나님의 이름을
명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긍정”35)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진 과학
기술을 소개하는 한편, 유교와 도교, 불교를 분리시켜, 한쪽을 끌어당기고
다른 한쪽을 밀어내는 책략을 사용하였다.36) 초기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32) , 위의 책, p. 297.
33) 김상근, 앞의 책, p. 73.
34) 김상근, 앞의 책, pp. 71~109.
35) 김상근, 앞의 책, p. 133.
36) ,, : , 1998, p. 23.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73
리치가 정한 “보유역불”[補儒易佛(驅佛補儒)] 정책을 그대로 전개하였던 것이
다.
이 개념은 원래 서광계(徐光啓)가 기독교의 기초에 대한 사대부들의 질
문에 답변할 때 사용한 것으로서,《천주실의》를 쓸 무렵 리치에게 제기한
것이었다.37) 리치는《천주실의》속에서 “불교, 도교가 무(無)요, 공(空)이요,
천주(天主)의 이치와는 크게 다른 것이며, 받들 만한 것이 못되노라”고 혹
평하였다. 반면 유교에 대해서는, 당시의 이른바 속유(俗儒), 후유(後儒)에
대해서 의심스런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긍정하였고 특히
선유(先儒)에 대하여 그러하였다. 정안덕은 ‘초유’(超儒)에서 ‘부유’(附儒)로
나아간 불교와 달리, 천주교는 장성요(張星曜)의 저작에서 보듯이, ‘합유’(合
儒)에서 ‘보유’(補儒)를 거쳐 심지어는 ‘초유’(超儒)로까지 나아갔다고 해석
하고 있다.38)
(2) 南京敎案 시기 예수회의 발전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천주교 교세가 광주, 조경, 남창, 남경, 북경 등
으로 확대되어 가자 곳곳에서 반(反)천주교 운동도 일어났다. 이들은 천주
교가 역법(曆法)을 문란케 하고 조상 제사를 금지하였으며, 사설(邪說)로 군
중을 미혹하여 암암리에 모반을 조장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와 같은 논
리를 전면에서 펼쳐 나갔던 사람은《파사집》(破邪集)을 저술한 황정(黃禎)
등 불교를 신봉하는 신사(紳士)들이었는데, 여기에는 천주교의 “보유역불”
론에 대한 반발심, 그로 인한 위기감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39) 그리하여
리치, 서광계 등이 참여하여 비교적 예의를 갖추어 진행된 천주교, 불교
간의 논쟁이 고조되었다.40) 그런데 리치 사후 롱고바르디가 예수회의 교
무(敎務)를 주관하면서 경천제조사공(敬天祭祖祀孔)이 제약을 받게 되자, 신
37) / , ,, : ,
1983, p. 485.
38) 정안덕, “기독종교와 불교의 호교적 변론에서 본 명말청초 종교대화의 정
신,”21세기 동아시아의 변화와 기독교의 역할, 장신대출판부, 2003, pp.
154~171.
39) 김형석, “의 ,” 경희대 박사논문, 1995, pp. 150~151.
40) 정안덕, 위의 논문, pp. 134~136.
174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사들의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가운데 1616
년과 1622년 두 차례에 걸쳐 남경의 예부(禮部) 관리 심각이 주도한 남경
교안이 발생하였다. 역시 불교계의 이익을 보호하자는 것이 중심적인 계기
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와 천주교간의 대대적인 종교논쟁이 일어났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천주교 자체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개혁파에
대한 환관파(宦官派)의 정치적 공격이 목적이었다는 견해41)이다. 제르네(J.
Gernet)는 리치가 양명학 좌파42)로서 사회적으로 적극적이었던 태주학파(泰
州學派)와 교제하고 있었다는 점을 중시한다.43) 리치는 1600년 남경에서
서광계를 만난 직후 태주학파의 이지(李贄, 李卓吾)를 만났으며 밀접한 교제
를 나누었다.44) 김상근 역시《천주실의》를 분석하면서, 리치가 16세기 예
수회가 채택한 제2토미즘에서 비롯된 “양능”(良能) 개념을 가지고 양명학
좌파(現成派)의 “양지”(良知)개념과 연결시키고 있다고 말한다.45) 리치는 또
한 강남지역의 재야 개혁세력인 동림당(東林黨)46)의 장문달(張問達), 풍기(馮
琦) 등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서광계, 이지조(李之藻), 양정균(楊廷筠) 등 천
주교의 이른바 삼주석(三柱石)도 모두 1624년 이전에 무석(無錫)의 동림서원
(東林書院) 강학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위충현(魏忠顯) 등이 대규모로 동림당을 탄핵하던 1625년에 서
광계도 탄핵을 받았는데, 그의 개혁적 사상과 관계가 있었다.47) 앞에서 얘
41) 김형석, 위의 논문, p. 152.
42) 양명학 좌파는 출신의 를 시조로 하여 명 중기 이후 의
조류를 타고 서민층에게까지 확대되었으며, 지식인의 사회적, 실천적 책임을
강조하였던 학술 조류이다. 측에서 그들을 불온시하고 탄압하게 된 것
은 의 후계자들이 욕망 긍정의 논리를 펴고 계층간의 상향 이동을 정당
화하면서부터였다.(, “양명학의 성립과 전개,”강좌 중국사(IV), 지
식산업사, 1996, pp. 74~88)
43) 김형석, 위의 논문, p. 152.
44) 김형석, 위의 논문, p. 147.
45) 김상근, 위의 논문, pp. 133~141.
46) 은 의 , 중앙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등이 으
로 귀향하여 10여 년간 준비 끝에 1604년( 32년) 문을 연 을 중
심으로 이루어진 재야 정치세력이다. 이들은 스스로가, 당시 발전하던 강남지
역의 상공업자들로서 , 반대운동 등을 통하여 지방의 이익을 대변
하였다.
47) 김형석, 위의 논문, p. 159.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75
기한 대로 서광계 등은 기독교를 유학 전통의 완성자[補儒者]로 이해하곤
했는데, 이것은 양지와 사회적 관심 사이에서 씨름하며 신유학 전통에 반
기를 들었던 왕양명 사상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48) 서광계는 개인 수
양과 공적 생활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
를 통해 이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삼주석의 호교사상은 결국 기독
교를 통해 유학을 보충하여 나라의 개혁에 보탬이 되게 하겠다는 신앙 실
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49) 이러한 과정 속에서, 좌절을 경험하
기도 하였지만, 예수회의 가르침이 이미 강남 유교 지식인들 가운데 자리
잡고 사회개혁의 추진력으로까지 착근하여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4. ‘전례논쟁’의 발생과 전개
위와 같이 중국에서 예수회가 활발한 사회적 의미를 찾아가던 17세기
초에 발생한 ‘전례논쟁’은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회의 중국선교가 갑자기
중단된 것을 말하거니와, 동시에 유럽에서의 배경을 따라 중국 내에서 선
교적 분화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례논쟁’의 전개과정은 그
와 같은 분화가 복음과 문화 간의 다양한 대화 국면을 통해 복음의 풍성
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선교회 간 또는 중서 간에 통일적 대오를 형성
하기 위한 정치적 경쟁으로 귀결되었음을 보여준다.
(1) 논쟁의 내용
‘전례논쟁’의 내용은 하나님의 호칭과, 공자 및 조상에 대한 숭배 문제
였다. 대부분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天主), ‘상제’(上帝), ‘천’(天)이 같
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천주교 용어를 맨
먼저 번역하여 사용할 때, ‘하나님’에 대해 라틴어 ‘Deus’를 음역하여 ‘두
사’(陡斯)라고 하였는데, 리치보다 앞서 들어온 루지에리가《사기》에서
‘천주’라는 말을 차용하였고, 다시 리치가《서경》과《시경》에서 ‘상제’
48) Bob Whyte, Unfinished Encounter, Fount Paperbacks: London, 1988, p. 73.
49) 김형석, 위의 논문, pp. 163~180.
176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그리고 주희의 저작으로부터 ‘천’이라는 말을 찾아내어 사용하게 되었다.
반면에 나중에 들어 온 도미니칸과 프랜시스칸 선교사들은 ‘천주’라는 호
칭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다음으로 예수회는 공자 및 조상 숭배를 중국 전통의 의례행위로서 조
상과 선현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며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는 것이니
금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신자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보호
하여 선교의 장애를 제거하자는 생각에 조상의 위패를 마련하고 향을 피
우도록 허락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반면에 도미니칸과 프랜시스칸은 “이런
예의와 습속에 종교적 성분이 없을 수 없다”고 보고 그것을 우상숭배로
받아 들였다.
(2) 천주교 내부의 논쟁
①
예수회의 귀족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였던 리치는
1589년에 권면을 받은 후, 1595년(萬曆 23)에 ‘사’(寺)를 ‘성당'(聖堂)으로 고
치고, 승복을 유복으로 갈아입었으며, 이후 이른바 ‘유교화된 천주교’ 노선
을 걷게 되었다. 이것은 ‘학술 선교’, ‘지식 선교’, ‘문화 선교’라는 이름으
로 일컫는 예수회의 선교 방향이 되었으며, 이른바 문화적응 선교전략이었
다.
먼저 과학 지식이 접촉의 매개가 되었으며, 이어 천주당이 세워졌고, 유
교 지식인과의 사상적 교류가 뒤따랐다. 만남은 호의적이었으며 서로간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왕조 말기의 혼란스런 사회상
황50) 아래서 젊고 개혁적인 재야인사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러한 정치
적 배경 속에서 남경교안이 일어난 것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제 신학적
인 문제제기가 선교사 내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번역의 정확성
문제 그리고 허용할 수 있는 이방인의 습속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로
50) 은 명말에, 궁궐 내분, 환관 횡행, 붕당 싸움, 정권의 피로, 변방의 사
건들, 만주족의 궐기, 천재지변, 유민 등으로 인해 이단이 자생할 수 있었고
천주교도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 : , 1994, p. 7)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77
제기되었다. 이것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이미 선교현장에서 종종 발생하는
문제였다.51)
‘전례논쟁’은 리치가 사망한 직후인 1613년 롱고바르디가 교황청에 편지
를 보내 ‘상제’와 ‘천’의 사용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남
경교안을 거친 이후 1627년에 예수회는 중국인 지식인 천주교인들을 참석
시킨 가운데, 하나님의 호칭문제와 제조사공(祭祖祀孔)를 가지고 남경 근처
의 가정(嘉定)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그 결과 후자는 문제 삼지 않기로 하
였으며, 호칭은 그 다음 해 다시 교황청의 조사를 거쳐 ‘상제’, ‘천’을 사
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롱고바르디는 다시 라틴어 음역인 ‘두사’(陡
斯)를 고집하였고, 제조사공(祭祖祀孔)을 우상숭배로 받아들였다. 또 1633년
에 예수회는 다시 ‘상제’, ‘천’을 사용하기로 함으로써 논쟁의 불씨가 되살
아났다.
②
예수회 내부의 문제이던 초기 ‘전례논쟁’은 1633년(崇禎 6)에 신학적 차
이와 함께 스페인의 지지를 받고 등장한 도미니칸 선교사 모랄레스(Juan
Morales, 黎玉范, 1567-1644)가 중국에 들어왔다가, 1643년 일시 로마를 방문
하면서 교황 이노센트 10세에게 17개 항목으로 예수회를 고소함으로써, 선
교회 간의 문제가 되었고 교황청도 참여하는 형태로 확산되었다. 특히 포
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에서 제국주의적 경쟁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사실
1565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점령한 후, 스페인에 기반을 둔 도미니칸, 프랜
시스칸, 어거스틴회 선교사들이 필리핀, 나중에는 대만을 거점으로 광동성,
복건성을 통과하는 중국선교를 모색해 왔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중국문화
와 문자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과학을 반대하였으며, 보수적인 입장을 지
니고 있었다.52)
이후에도 프랜시스칸은 산동, 강남, 강서, 복건, 광동, 도미니칸은 절강
과 복건을 중심으로, 그리고 어거스틴회는 광동 지역, 파리 외방전도회는
사천, 광동, 광서지역 등에서 제한적으로 발전하였는데, 후발 주자였던 이
들의 선교 지역은 비교적 낙후한 지역이었고, 비지식인 대상이었던 관계
51) 신약성경 사도행전 15장 참조.
52) ,(), : , 1991, pp. 917~918.
178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로, 지나치게 황실에 의존하며 지식인 선교에 주력하는 예수회의 문화 적
응 선교 전략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1643년, 모랄레스는
먼저 교황 우르반 8세에게 17개 조항을 제출하여 예수회의 잘못을 지적하
였는데, 그 중에는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과 함께 하나님의 호칭, 제조사
공의 문제가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우르반 8세를 뒤이은 이노센트 10세는
1645년 ‘상제’와 ‘천’의 사용과 제조사공을 금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예수회가 1654년 마르티니(Martin Martini, 衛匡國,
1614-1661)를 파견하여 중국의 전통습속에 대한 이해를 구함으로써 교황은
제조사공에 대한 판단을 교인 각자에게 맡기기로 하였다.(1656년) 이에 다
시 도미니칸은 1645년과 1656년의 두 가지 결정 사이에 모순이 있음을 지
적하는 질의를 하였고, 클레멘트 9세는 1669년에 두 가지 결정이 모두 유
효하며, 현지 정황에 따라 선교사가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1664년 중국에서 ‘역옥’(曆獄)53)이 발생하면서, 예수회, 도미니
칸, 프랜시스칸, 어거스틴회 선교사들이 모두 광주(廣州)에 압송되어 자연
스럽게 함께 토론할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대부분에게 1656년의 법령이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도미니칸을 중심으로 예수회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계속되었
다. 모랄레스가 사망한 이후, 팔랑코(Palanco, 鮑朗高)가 1669년에 다시 문제
를 제기하여 1645년의 법령을 복구시켰으며, 파리외방전도회에서 福建省으
로 파송(1693)받아 일하던 마이그로(Charles Maigrot, 顔璫, ~1730)는 1693년
‘천주’의 호칭만을 사용할 것, 두 달 안에 ‘敬天’이라는 액자를 떼어낼 것,
1656년의 법령을 양심적으로 무시하고 祭祖祀孔을 중지할 것, 죽은 자의
위패를 모시지 말 것, 천주교 신앙을 중국 古書의 교훈에 부합시키지 말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목회서신을 발송하였던 것이다.54) 따라서 논쟁은
53) 강희 초년(1661~1669) 섭정대신들의 배외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 아담
샬(Adam Shall, , 1592~1666) 등 예수회 선교사의 서양역법에 대해 정
치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가 광동으로 돌려보낸 사건(구
웨이민, “청초 대천주교 정책의 변천,”교회사연구제18집한국교회사연구
소2002, pp. 54~57). 양광선의 천주교 비판에 대해 분석한 글은, , “
(1597~1669)의 그리스도교 -를 으로-,”
, 1996.
54) , 앞의 책, pp. 107~108.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79
국가적 경쟁관계에 있던 선교회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선교전략의 차이를
조장하는 형태로 진행된 것이다.
(3) 중서 갈등으로의 진전
①
1693년 목회서신을 발표한 후 마이그로는 두 명의 예수회 신도를 제적
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로마의 종교법정으로 몰고 가게 한 후,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신학 토론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급기야 예수회는
1700년 11월 19일 강희제의 의견을 물어 종교적 의미가 없다는 대답을 들
었지만, 이로써 교황과 황제 모두 ‘전례논쟁’에 개입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앞서 양광선(楊光先)에 의해서 촉발된 ‘역옥’(曆獄, 1664)은 청조의 국내문
제로서 청조의 종교정책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전례논쟁’은
결국 유럽의 신학계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또한 중국의 황제와 지식인 사
회에도 반향을 일으킴으로써. 당사자 간의 대화가 진행되기 전에, 각기 국
내 문제의 형태로 먼저 확대되었으며, 결정적으로 국내 환경의 영향을 받
는 국제 문제가 되고 말았다.
파리대학의 토론은 마이그로를 지지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그리고
1704년 말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추기경 회의를 거쳐 ‘천주’라는 호칭만을
사용할 것, ‘경천’ 액자를 뗄 것, 제조사공을 중단할 것, ‘상례’를 행하지
말 것, 이름 외의 ‘패위’(牌位)를 두지 말 것 등을 명시하며 이단적 행위를
엄금하였다.55)
이 결정을 중국 측에 전하기 위해 파견된 교황의 특사 투르논 주교
(Charles Thomas Maillard de Tournon, 鐸羅)를 만날 때 강희제는 중국 측의 예
의와 습속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교사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였으며,
나름대로 천주교와 중국 사상, 예의와의 유사점을 제시하였고, 1706년 마
이그로를 접견하면서는 그의 낮은 한어 수준을 지적하면서 강하게 비판하
였다.56)
55) , 앞의 책, pp. 108~109.
56) “중국어 한 도 모르는 사람이 감히 중국의 를 논한다” 또 특사 투르논
180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② 禁敎
투르논이 1707년 2월 남경에서 클레멘트 11세의 금령을 공포하자, 이것
은 강희제의 강경책을 자아냈다. 강희제는 곧바로 조서(詔書)를 내려, “교
황이 중국 사무를 간섭할 수 없음, 투르논을 마카오로 압송하여 구금할
것, 마이그로 일행과 절강의 선교사를 추방하고 사천의 선교사를 구금할
것, 리치의 입장에 동의하는 중국 내 선교사는 내무부에 영거표(永居票)를
신청하여 발급받을 것이며 그밖에는 추방할 것”57) 등을 지시하였다.
이후 선교사들은 확실히 분열되었고, 예수회의 대표는 강희제의 뜻을
들고 로마로 갔으며, 중국의 지방 관원들은 反천주교 운동에 나서기 시작
하였다. 그리하여 악화된 상황 속에서, 새로운 교황의 특사 마자바르바
(Carlo A. Mazzabarba, 嘉樂)가 1720년 12월 북경에 도착하였다. 우여곡절 끝
에 마자바르바가 강희제를 만나 공손하게 다시 1704년의 교황 법령을 호
소하였지만, 강희제는 오히려 천주교를 불교, 도교와 동일시하고, 금교의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58)
이에 예수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마자바르바가, 비종교적 사공예의(祀孔
禮儀) 및 주로 장례와 위패 관련사항에 대하여 요구 조건을 완화시킨 8개
항의 타협안을 냈으나, 강희제의 태도는 완강하였다. 교황청에서도 1742년
한 번 더 강경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선교사 내부 또는 중서 간 논쟁의 여
지를 막았으며, 중국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이후 황포조약(1843)을 통해 강
제적으로 다시 문을 열게 되기까지 100년 넘게 중단되고 말았고, 전례에
대한 금령의 해제는 1939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을 향해 마이그로를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이그로는 글자도 모
르고 회화도 제대로 못하여 통역을 써야 한다. 이런 사람이 감히 중국
의 도를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문밖에 서서 집안의 일을 토론하는 것
과 같으니 그의 말하는 것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
,” ,, :
, 2005, p. 122)
57) , 앞의 책, p. 113.
58) “이 조약을 보건대, 서양인 등 소인배가 중국의 큰 도리를 어떻게 말하는
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서양인 등이 를 전혀 아는 바가 없이 논하고 있
으니 우리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다. 오늘 조약을 보니, 오히려 승려와
의 이단적이고 협소한 가르침과 비슷하다. 말이 난삽하기가 비슷하다. 이후
서양인이 중국에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니, 금교하여 복잡한 일을 면
하는 것이 좋겠다.”(, 앞의 논문, p. 122)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81
5. 청대 천주교 정책의 변화
(1) 청대의 천주교 정책
애초 청조가 천주교 선교사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새로운 왕조 권력
을 확립해 가는 시기에 국적을 불문한 인재가 필요해서였다. 순치제(順治
帝)는 아담 샬에게 선무문(宣武門)의 천주당을 중건(順治 7)하도록 해 주면서
쓴 비기(碑記)에서, 아담 샬의 치역(治曆)을 치하하고 있지만, 이른바 ‘성교’
(聖敎)와 유사하다는 단순한 이해 외에 천주교 교리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는 않고 있다.59) 그것은 강희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양광선(楊光先)
의 ‘역옥’(曆獄)과 저작60)에도 불구하고, 강희제는 재위에 있는 동안 선교
사들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하며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고, 아담 샬의 명예
를 회복해 주고, 페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88)를 등용하여 흠
천감(欽天監)을 맡겼으며, 천주당을 복구해 주었는데, 이 모든 것이 인재를
중시하는 순치제의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체로 유럽과 선교회 내부에서의 ‘전례논쟁’이 중국 당국에 미치게 되
는 강희 39년경(1700년)까지는, 선교사들의 과학적 지식을 매개로 하여 중
국 천주교의 발전이 계속되었다. 하사되는 천주교당을 놓고 선교사들은 기
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아담 샬은 성 도마와 경교와 사베리오와 리치의 연
장선상에서 천주교의 교세 확대를 이해하였으며, 황제에게 전도할 기회를
찾고는 하였다.61) 강희제는 선교사를 통해 병을 낫는 경험을 하고서는 기
쁜 나머지 천주당을 하사하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상당한 정도
로 천주교 신앙 자체를 지지하였다고 알려져 있고,62) 부베(J. Bouvet,
1656~1730) 등의 색은파(索隱派, figurism)에 의해서 기독교의 중국적 흔적을
59) ,, : , 1999, pp. 194~195.
60),등 천주교 문집.
61) , 위의 책, pp. 195~196.
62) , 위의 책, p. 2. 또 김종구 역, , 민중사, 1999, pp.
70~71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강희제의 시가 소개
되어 있다.
182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제시된다.63)
그러나 그러한 성과의 기초는 여전히 천주교가 경천제조사공(敬天祭祖祀
孔)을 내용으로 하는 유교를 보완할 수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대화할 수
있는 외래 종교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천주
교와 중국의 천도사상에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받아들여진 것이 천주교
에 대한 관용 정책 또는 어느 정도의 애정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었
던 것이다. 천주교 신앙이 장려된 것은 아니며, 선교사들과 황실 또는 광
범위한 중국 지식인들과의 사이에는 아직 엄연한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었
다.
(2) 청대 종교정책의 변화
청조는 동북시절에 발전시켰던 샤머니즘을 북경의 황궁 내에서도 계속
간직하였지만, 성경(盛京, 심양)에서 건국할 무렵부터 이미, 중국 역사상 계
속되어 온 경천제조사공의 종교정책을 기본으로 삼았으며, 명조의 제도를
참고하여 더욱 다듬어냈다. 경천제조사공의 전통은 중국에서 아주 오래된
것이다. 존천(尊天)과 제조(祭祖)는 원시 자연종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사공(祀孔)은 한대 이후 출현하여 당대에 확정됨으로써, 전통적 경
천제조사공의 최종 형식이 마련되었다.64)
천주교에 대한 관용의 정책이 바뀌게 된 것은 ‘전례논쟁'을 경과하면서
부터였다. 강희제는 ‘전례논쟁’에 의하여 비로소 천주교의 신앙내용과 중
국의 ‘천도’(天道) 사이에 큰 차이가 있으며 문제의 소지가 큰 것임을 알았
고, ‘금교’의 칙령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강건성세(康乾盛世) 시대에
유교는 여전히 치세의 근본으로서 통치 지위에 놓여진 반면, 천주교의 지
위는 급전직하되었다. 이미 불교와 도교는 송명을 거치면서 민간화, 세속
화된 후 유교와 비교될 수 없는 보조적 위치로 전락하였지만, ‘전례논쟁'
이후 건륭시기에 불교와 도교가 이단으로 간주될 때 천주교의 지위는 더
욱 낮았다.65) 그리하여 유교를 기준으로 성교(聖敎)와 비성교(非聖敎), 정학
63) ,, : , 2000, pp. 291~317.
64) , 위의 책, pp. 3~8.
65) , 위의 책, p. 3.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83
(正學)과 비정학(非正學), 정통과 이단 혹은 사교가 구분되어질 때, 한쪽 편
에 경천제조사공을 내용으로 하는 유교가 있었고 다른 한쪽 편에는 불교,
도교, 자연종교, 천주교 등이 있었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찍이 명말에 이러한 중국 측의 종교적 분
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나온 것이 “보유역불”(補儒易佛)의
지식인 전략이었음을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리하여 예수회의 선교전략은
지식인 사회에서 상당한 성과를 얻었으며, 황실 내에서도 뚜렷한 지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계 인사들이 유교적 례의 문제를 중심문제로 삼
아 지식인들에게 호소하면서 일어난 남경교안이 그 이면에 정치적 이해관
계가 섞이면서, 건설적인 학술논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
었다. ‘전례논쟁'은 결국 그와 같은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천주교에
대한 관용의 정책을 중단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6. 맺음말
우리는 먼저 중국에서의 대립이 이미 유럽의 신학적 논쟁 안에서 비롯
되고 있었음을 주목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선교경험을 수용하여 신학적 입
장을 형성한 예수회와 달리 쟌센주의는 이교도의 철학과 문화에 대해 배
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그러한 태도는 후발 주자로서 중국에 입국
하여 낙후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교단체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
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중국의 주류 문화와 지식인을 설득하고자 했던 대
부분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달리, 농촌 현장의 이방문화 속에서 복음을 선
포해야 했다. 물론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정치적 경합 역시 주요한 원
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명말청초 중국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예
수회의 노력이 도전을 받은 측면도 있다. 결국 왕조 초기의 필요에 의해
용인되면서 자리를 잡아가던 중국 천주교는 ‘전례논쟁'을 거치면서 이단으
로 규정되고 말았다.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복음이 문화와 만나는 관계는 크게 적응과 변형의
두 형태로 제시된다. 이것은 문화에 대해 복음이 갖는 이중적 과제를 의미
한다. “복음은 한 문화권에서 문화순응적인 문화화의 과정을 거치지만 동
184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시에 그 문화로부터 거리를 보유하여야만 문화 변혁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66)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진행시킬 수 있는 역할을 모색하는 것
이 선교해석학이다. 오늘날의 선교해석학은 서구문명화를 기독교 선교의
목표로 오해하여 나타난 서구문화 우월주의, 또 반서구화 토착화 과정에서
복음을 상대화시키고 만 급진적 토착화론을 모두 문화적 낙관주의로 비판
하고 있다. 그 모두는 문화의 역기능을 간과한 것들이다. 그러나 또 한편
문화를 떠나서 복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 안에 한계를
지닌 문화가 복음을 매개하면서 어떻게 복음의 풍성함을 드러내는지 주목
해야 한다. 따라서 선교학은 문화로부터의 거리(Distanz)를 존중해야 하지
만, 복음의 편향적 이해를 극복하고 풍성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복음과
문화와의 상호해석을 도모하게 된다.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전개과정은 기독교의 복음과 문화 이해가 본격
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이전에 중국에서 기독교는 줄곧 비
주류의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당대나 원대의 기독교처럼 아예 정통 기독
교 신앙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은 채 중국 문화의 옷으로 바꾸어 입은 모
습만 두드러지는 경우가 전부였고, 또 비슷한 이유로 해서, 19세기 제국주
의 시기에는 중국문화에 극히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비
하면 명말청초의 예수회에 의한 선교는 의식적인 대화가 진행되었고, 상당
한 진전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의 천주교는 그 정체성을 드러냄으
로 말미암아, 기독교와 중국문화 사이에 일정 정도의 장력(張力)이 조성되
었고, 그 기초 위에서 조화와 대립의 다양한 국면을 보여주었다. 예수회의
문화적응 선교는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출발하여, 불교 및 유교 지식인과의
대화가 진행되었고, 남경 교안 시기에는 문화변혁의 자리로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복음의 초월적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덧붙일 것이 있다. 정안덕의 경우처럼 예외가 있기는 하
지만, 명말청초 예수회와 관련된 역사는 주로 기독교 복음이 중국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으로 파악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때문에 예수회의 적응
노력이 좌절된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관숙의 책67)은 그 전형적인 사
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전례논쟁'의 전개과정에서 예수회 내부에서 또는
66) 한국일, 앞의 책, p. 168.
67) 이관숙,기독교와 중국문화의 충돌, 쿰란출판사, 1997.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85
예수회에 도전한 탁발수도회 등에서 나타난 문화비판적 태도에 주의할 필
요가 있다. 그리하여 문화변형을 위한 거리를 확보하고자 하였던 노력 역
시 균형감 있게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바네즈로부터 이어
진 도미니칸 등의 예수회 비판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중국문화와의
차별성, 즉 복음의 초월적 성격을 견지한 자세는, 오늘날 본색화(本色化)
또는 본토화(本土化)에 주력하고 있는 중국 종교학자들68)에게 토착화의 내
용을 명료하게 하는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테오 리치 등의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도 역시 문화우월주
의적인 태도가 남아 있어,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신학적 문제가
있었다는69) 문제제기가 있다. 당시 신앙공동체를 통해 사회문화적 맥락이
얼마나 수렴되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겠는데, 적어도 성리학을 극복하여
선진유학을 회복하려고 하였고, 남경교안 시기 양명학 좌파와 연계된 개혁
적 움직임을 보인 것을 보면, 초기 예수회의 복음은 중국문화와 사회의 도
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례논쟁’은 그러한 도전 앞에서 분화되
어 가는 예수회 내부, 또는 선교사 간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고, 결국 스
스로 선교의 장애물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선교 역사적 사
건은 오늘날까지도 복음과 문화의 만남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해 주고 있
다. 그들은 공동체의 구원은 물론, 이정배의 말대로 하자면, 리치 등은 보
유론적 포괄주의를 넘어서서 오늘날 토착화신학의 주요 주제가 되고 있는
생명신학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70) 물론 성리학에 대한 정
확한 이해가 없었다는 점을 전제했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노용필(盧鏞弼)의 논문은 조선에
처음 천주교 서적이 소개된 당시의 정황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71) 17세기 초부터 한역서학서가 중국을 거쳐 들어오면서, 조선의
68) 은 예수회의 문화적응 선교가 본색화운동으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 앞의 책, pp. 130~131)
69) ,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의 신학적 의의와 한계,”제20
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참조.
70) 이정배, “마태오 릿치와 탁사 최병헌의 보유론()적 기독교 이해의 차
이와 한계,” pp. 103~108.
71) , “ 의 수용과 마테오리치의”
,, 1996 참조.
186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천주교 역시 중국천주교의 적응정책의 우산 아래 있었다. 학문적, 사상적
인 자학(自學)의 역사를 200여 년 가까이 지나면서 공통성과 차별성이 추
구되었고72), 프랑스외방전도회 등을 통해 복음의 정체성과 초월적 성격이
제시되었으며, 동시에 보다 더 평민적이고 공동체적인 자주적 교회를 통해
또는 중국에서처럼 양명학73)을 통해 사회문화적 의미를 획득하여 갔다.
그러나 풍성한 의미지평의 가능성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또 무너진 것은
역시 전례에 관한 논란에서요, 1791년의 ‘진산사건’(珍山事件)74)으로부터 이
어진 일련의 교난(敎難)에서였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조
선에서도 ‘진산사건’과 같은 전례논쟁이 정쟁(政爭)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75)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복음의 다양성, 복음 수용의 수준(受耶
또는 排耶) 그리고 특히 조선에서 두드러지는 신앙공동체(매개체)의 역할은,
중국 ‘전례논쟁’의 역사적 배경, 전개과정과 비교 연구될 수 있다. 문화적
도전 속에서 복음의 풍성함을 드러내고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유사한 선
교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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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마태오 릿치와 최병헌의 보유론(補儒論)적 기독교 이해의 차이와 한
72) 흔히 (, , 등)와 사이의 논쟁으로 일컬어지
는데, 좌파는 당시 소위 신문화 수용운동에 나선 이들이다.
73) 노용필, 앞의 책, pp. 516~522.
74) 1791년 전라도 진산군에서 조상제사 문제로 일어난 전례문제. 관료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론적 이해에 타격을 입혔으며, 그 결과 조선 천주교
지도층의 변화를 가져왔다.(,3,
, 2001, pp. 253~258)
75) 위의 책, 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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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ㆍ접수일 : 2007년 12월 5일 / 심사완료일 : 2008년 1월 28일)
철저하게 변방문화로 시작된 중국의 기독교는 애초에 입고 들어온 문화를 주장
할 수 없었고 주저 없이 중국문화의 옷으로 갈아입고 등장하였다. 唐代와 元代의
기독교는 도불(道佛)의 용어를 대폭 수용하여 중국화를 꾀하였다. 반면에 명말청초
시기의 천주교는 이전 시기와 달리 나름대로 자기전통을 의식하면서 중국문화를
도입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하여 예수신앙과 유학간의 의식적인 접촉 곧 ‘대화’
(耶儒對話)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복음과 유교사상과의 접촉면 즉 유사성이 추구
되었고, 나아가서 ‘보유’(補儒), ‘초유’(超儒) 등의 개념에서 보이듯 ‘남경교안' 시기
강남지역의 사회개혁사상으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에 처음 천주교 서
적이 소개된 당시의 정황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리치가 속했던 예수회 내부의 보수 인사, 또는 도미니칸, 파리외방전도
188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회 등 후발주자들의 ‘배타적인 문화관’이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에 도전
하면서 ‘전례논쟁’이 발생하였다. 그와 같은 배경은, 유럽에서 예수회가 시작될 때
이미 배태된 것이었다. 스페인 살라만카대학의 제2토미즘은 남미에서의 선교경험
을 바탕으로 선교지 현지의 토착문화와 사상을 중시한 것인데, 바네즈 등 도미니
칸의 소위 칼빈주의에 의해 크게 도전을 받았던 것이다. ‘전례논쟁’은 그러한 논쟁
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그밖에 유럽 열강 간에 그리고 선교회 간의 경쟁, 중서간의
갈등이 그러한 갈등을 가속화시켰다. 문화적응 선교와 문화비판적 선교 사이의 논
쟁은 선교적 시야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공격적 분위
기는 ‘전례논쟁’을 거치면서 청조의 관용적 종교정책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복음이 문화와 만나는 관계는 크게 적응과 변형의 두 형
태로 제시된다. 이것은 문화에 대해 복음이 갖는 이중적 과제를 의미한다. 복음은
한 문화권에서 문화순응적인 문화화의 과정을 거치지만 동시에 그 문화로부터 거
리를 보유하여야만 문화 변혁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선교해석학은
서구문명화를 기독교 선교의 목표로 오해하여 나타난 서구문화 우월주의, 또 반서
구화 토착화 과정에서 복음을 상대화시키고 만 급진적 토착화론을 모두 문화적 낙
관주의로 비판하고 있다. 그 모두는 문화의 역기능을 간과한 것들이다. 그러나 또
한편 문화를 떠나서 복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문화로부터의 거리
(Distanz)를 존중해야 하지만, 복음의 편향적 이해를 극복하고 풍성한 의미를 드러
내기 위해, 복음과 문화와의 상호해석을 도모하게 된다.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전개과정은 기독교의 복음과 문화 이해가 본격적으로 개
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당대나 원대, 그리고 19세기 제국주의 시기와는 달리 명
말청초의 예수회에 의한 선교는 의식적인 대화가 진행되었고,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의 천주교는 그 정체성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와
중국문화 사이에 일정 정도의 장력(張力)이 조성되었고, 그 기초 위에서 조화와 대
립의 다양한 국면을 보여주었다. 명말청초의 ‘전례논쟁’은 복음과 문화의 유사성,
그리고 토착화의 내용을 명료하게 할 복음의 초월적 성격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오늘날 본토화에 주력하고 있는 중국 종교학자들에게, 상호해석학적 가능성을 열
어주는 역사적 사례인 것이다.
주제어 : 명말청초, 천주교, 예수회, 전례논쟁, 복음과 문화, 토착화
김병태 /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189
明末清初“礼仪之争”宣教史之理解
作为彻底属于的边缘文化而开创的中国基督宗教,由于无法主张自己从西方带来的
文化,就不得不披上了中国文化的行装上阵起先,唐朝和元朝的基督宗教试图使自己
中国化而大幅度地使用道教和佛教的用语,明末清初时期的天主教却与从前的时代有所
不同,在认识自己所独具的传统的同时,吸取了一些中国文化因此,耶稣基督信仰和
儒家思想之间的有意地接触,即‘耶儒对话’,就在那时得以进展明末清初的天主教在
追求福音与儒家思想有所‘类似’的同时,进一步出现了“补儒”,“超儒"等概念,这种概
念在江南地区阳明学左派的社会改革思想当中体现出了福音与儒家思想有所‘差别’的观
点后来,在朝鲜时期,天主教书籍最早被介绍给朝鲜知识分子的时候,也有类似的情
形
利玛窦所属的耶稣会保守人士和多明我会,巴黎外邦传道会等后进入中国的差会,
用‘排他性的文化观’对早期耶稣会宣教士的宣教策略进行挑战,从而导致了明末清初的
“礼仪之争”事件其实,如此矛盾的起因,早在耶稣会在欧洲初创的时候就孕育了西
班牙萨拉曼卡大学的第二托马斯主义原本以南美宣教经验为基础,重视宣教当地的本土
文化和思想,却受到了巴乃兹等多明我会士所谓天主教加尔文主义者的挑战“礼仪之
争”事件就是这种论证过程的延续战线除此以外,欧洲列强之间和宣教会之间的竞
争,以及中西之间的矛盾加速了这种矛盾的深化文化适应宣教和文化批判宣教之间的
论争,就能成为拓展宣教视域的契机但是当时攻击的气氛最终借着“礼仪之争”事件,
结束了清朝宽松的宗教政策
在基督教宣教史上,福音和文化的相遇大致以适应与改革的这两种形态显现,这意
味着福音对文化具有双重性课题福音在一个文化圈中经历文化适应的过程同时,也应
当与其文化抱有一定的距离今天的宣教解释学对误解西方文明化就是基督教宣教目标
的西方文化优越主义进行批判,同时, 对反西方化的本土化过程中将福音相对化的激进
本土化论点都进行批判二者都被批评为文化的乐观主义这一切都太轻视文化的反面
作用但是,另外一方面,脱离了文化,就不能经历福音因此,虽然应当尊重从文化
的距离, 但为了克服对福音的偏向理解,显露福音的丰富涵义,应当试图寻求福音和文
化的相互解释
明末清初“礼仪之争”的展开过程,显示了基督教福音和文化理解的正式介入与唐
朝,元朝和19世纪帝国主义时期不同,明末清初由耶稣会所进行的宣教进行了有意的对
话,并有了相当的进展这一时期的天主教,因在中国显现了其正體性,从而构成了基
督教和中国文化之间一定程度的张力,并在这基础上显现了调和与对立的多样局面明
末清初的“礼仪之争”事件,将福音与文化的类似性,和对本土化内容进行简明规范的福
190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8호
音之超越性,一次全显明了对于今天致力于本土化的中国宗教学者来说,“礼仪之争”
事件是打开相互解释学可能性的历史事例
主題語 : 明末淸初, 天主敎, 耶蘇會, 禮儀之爭, 福音與文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