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신 11년(1116), 송 정화 6년ㆍ요 천경 6년ㆍ금 수국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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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정월에 요 나라에서 대리경(大理卿) 장언중(張言中)을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 왕이 편전에 나와서 여러 왕씨들과 잔치하였는데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 천수사(天壽寺)에 거둥하여 새로 지은 당ㆍ전을 둘러보고 공인과 장인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 윤 정월에 보제사(普濟寺)에 거둥하여 국사 담진(曇眞)이 선(禪)을 강설하는 것을 듣고 보시를 많이 하였다.
○ 비서교서랑 정양직(鄭良稷)을 보내 안북도호부의 아전이라 칭하고, 공문을 가지고 요 나라 동경에 가서 절일사 윤언순(尹彦純), 진봉사 서방(徐昉), 하정사 이덕윤(李德允) 등이 오래 머무는 사실을 염탐하여 알아오게 하였다.
○ 2월에 일본국에서 감자(柑子 귤)를 바쳤다.
○ 요 나라 동경 사람 고서(高諝)가 와서 의탁하였다.
○ 특별 연등회를 시행하고, 중광전에 나아가 여러 왕씨와 대신ㆍ시신을 잔치하여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 참지정사로 치사한 고영신(高令臣)이 졸하였다. 영신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 지었으며, 문종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의논이 강개하여 굽히고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경상도에 큰 물이 났는데, 영신이 산기상시로 왕명을 받들어 가서 안정시키고, 공전의 세를 면제해 주기를 아뢰니, 백성들이 그 덕으로 살아났다. 정부에 있을 때에는 공경들이 다투어 가며 새 법을 만들려 하였는데, 영신이 "역대 조정의 법이 갖추어 있으니 어찌 개정할 필요가 있으리오. 법을 잘 지켜서 잃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다. 영신이 원래부터 청렴ㆍ검박을 스스로 지켰는데, 졸한 뒤에 집에 남은 재물이 없었다.
○ 건덕전에 나와서 새로 급제한 김정(金精) 등을 불러보고 술과 밥을 합문에서 하사하며 곧바로 나와 벼슬하게 하였다.
○ 3월에 왕이 요 나라 내원(來遠 압록강 금동도(黔同島))ㆍ포주(抱州 평북 의주)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당하여 성 중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쌀 1천 석을 보내니, 내원성의 통군(統軍)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정양직이 요 나라 동경에서 돌아왔다. 이때 동경의 발해인이 난리를 일으켜서 유수 소보선(蕭保先)을 죽이고, 공봉관(供奉官) 고영창(高永昌)을 세워 황제라 참칭하고, 국호를 대원(大元), 연호를 융기(隆基)라고 하였다. 양직이 가서 관직명을 거짓으로 칭하고, 표문을 올려 신하로 호칭하며, 고려에서 유수에게 보냈던 선물을 영창에게 주고 후한 보답을 받았는데, 돌아와서는 감추고 아뢰지 않았다. 일이 발각되니, 유사가 청하여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 왕이 천수사에 행차하여 재를 올려 낙성하니, 길에 채색한 누각과 가무와 음악이 3일간이나 잇따랐다. 여러 신하들을 절문 밖에서 잔치하여 새벽에야 파하였으며, 대궐로 돌아와서는 사면령을 내리고, 공사를 감독한 관리와 공인과 장인ㆍ역부들에게 상을 차등 있게 주었다. 어가를 거리에 멈추니 여러 왕씨와 대신들이 잔을 드리며 헌수하였다. 왕이 김경용(金景庸)의 손을 잡고 선왕과 태후의 일을 언급하며 울면서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좌우의 사람들도 오열하였다.
○ 서경에 거둥하여 이위(李瑋)와 김연(金緣)을 판행종사(判行從事)로, 이자겸ㆍ조중장(趙仲璋)을 판유수사로 삼았다. 지나는 곳마다 공급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하며 임금이 거둥할 때의 의장을 모두 간편하게 하고, 길가에 개간되지 않은 전지가 있으면 반드시 지방관을 불러 문책하였다.
○ 윤언순ㆍ서방ㆍ이덕윤 등이 요 나라 동경에서 돌아왔다. 언순 등이 동경에 구류되어 있는 동안 고영창이 칙명으로 표문을 올려 건국을 하례하라 하니, 언순 등이 모든 것을 그의 말대로 하였는데 돌아와서는 그 사실을 숨기고 자수하지 않으니, 유사가 청하여 그 죄를 다스렸다.
○ 왕이 경유하는 사우(祠宇)에서 비[雨]를 빌었다.
○ 여름 4월에 서경에 이르러 대동강 위에서 술자리를 열었는데, 호종한 여러 왕씨와 대신ㆍ시신ㆍ서경유수 분사의 3품관 이상이 모시고 잔치하였다. 바람은 맑고 날씨가 화창하니 왕이 기뻐서 시신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화답하였다. 이때에 국가에 일이 없으니 왕이 문학을 숭상하고 잔치하며 놀기를 좋아하였다. 지제고 최약(崔瀹)이 상서하기를, “옛날 당 나라 문종(文宗)이 시학사의 관직을 설치하려하니, 재상이 아뢰어 말하기를 '시인은 흔히 경박하니 만일 고문을 한다면 임금의 총명을 동요시킬까 두렵습니다.' 하니, 문종이 그만 중지하였습니다. 제왕은 마땅히 경전의 학문을 좋아하여 날마다 선비들과 경전ㆍ역사를 토론하고, 정사하는 도리를 물어서 백성의 풍속을 교화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아이들의 수식에만 치중한 문예를 일삼아서 자주 경박한 시인들과 함께 음풍소월하여 천품의 순백하고 바른 것을 상실하는 일이 있게 할 것입니까?" 하니, 왕이 좋게 받아들였다.
○ 태조의 진전(眞殿)에 알현하였다.
○ 처사 곽여가 상경(개경)에서 서경에 오니, 자리를 상안전(常安殿) 뒤 화단에 주고, 친히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이때 문득 동남방에 흰구름 두어 조각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학 한 쌍이 배회하는 것을 보았다. 곽여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고 왕이 화답하였다.
○ 여러 왕씨와 곽여를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시 3편을 짓고 곽여에게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 금강(金剛 평양 소재)ㆍ흥복(興福 평양 소재) 두 절에 거둥하고 영명사(永明寺)로 돌아와서 누선(樓船)을 타고 여러 왕씨와 대신ㆍ시신을 잔치하였으며, 다시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
○ 금 나라 임금 아골타가 아기(阿只)를 보내왔다.
○ 중서문하에서 아뢰기를, “요 나라가 여진에게 침략당하여 위태로운 형세이니 요 나라에서 받은 정삭을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공ㆍ사문서에 요 나라 연호를 제거하고, 갑자만을 쓰도록 하소서." 하니, 좇았다.
○ 여러 신하들을 장락전에서 잔치하고 어제시(御製詩)를 돌려 보여주었다.
○ 관풍전(觀風殿)에 거둥하여 태조의 행재소를 순시하고, 다시 구제궁(九梯宮)으로 나갔다가 저녁 때에 영명사로 옮겨서 여러 왕씨와 곽여를 불러 술자리를 베풀어 노래를 부르고 화답하였다.
○ 요 나라 내원ㆍ포주 두 성의 유민이 양과 말 수백 필을 몰고 와서 항복하였다.
○ 요 나라의 유민 20여 명이 와서 항복하며 양 2백여 마리를 바쳤다
○ 제하기를, “짐이 조종조의 오랜 창업을 이어 받아 삼한의 땅을 맡게 되니, 백성과 신의 기대에 어긋나게 될까 침식을 편히 할 겨를 없이 근심하고 노력하였다. 이번에 일관의 청에 의해서 서경에 옮겨 거처하며 새 교서를 반포하니, 장차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백성들이 돌아갈 곳을 알게 하여 선왕의 옛 업을 부흥하려 한다. 선왕께서 교훈하신 음양을 순히하며 천지의 신을 받들고, 상과 벌을 분명히 하며, 관리의 등용과 내침을 공평히 하고, 학교를 높이며,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일체의 일들을 모두 그대로 시행하여 지극한 정치와 교화를 이룩하려 한다. 그대 유사는 아뢰어 시행하되, 상하의 의복제도는 예의상정소에서 조종조에 내려온 식례(式例)의 연혁에 의거하여 제정하여 알리고, 또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고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 건원전에서 작은 잔치를 하였다.
○ 홍복사(弘福寺)에 거둥하였다가 당포의 옛성 문루로 옮겨 술자리를 베풀고, 구경하고 즐기면서 문루를 다경(多景)이라 이름하고, 어제시를 써서 문신들로 하여금 화답하여 바치게 하였다.
○ 어가가 서경을 떠났는데 도중에 늙은 부인이 술을 드리니 왕이 그 정성을 어여삐 여겨 한 번 맛볼 것을 허락하고 곧 시를 지었다.
○ 왕이 경도로 돌아와서 사면령을 내리고, 지나온 지방 고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때 경도에 유수하던 백관이 의장ㆍ악부를 갖추어 어가를 마천정(馬川亭)에서 맞이하였는데, 대악(大樂)과 관현(管絃) 두 부에서 다투듯이 기이하고 사치한 것을 힘썼으며, 부녀들로 말을 달리며 공을 치게까지 하니 왕이 명하여 물리쳤다.
○ 서경 반룡산(盤龍山)에서 보옥을 얻었다. 옥공에게 명하여 먼저 제기를 만들어 신의 은혜에 보답하니, 대신들이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 5월에 문하시랑 평장사 오연총(吳延寵)이 졸하였다. 연총은 해주 사람으로 집이 대대로 한미하여 어려서 빈천하였는데, 힘써 공부하고 글을 잘 지어 일찍 과거에 뽑혔다. 몸을 닦고 부지런하며 공손한 태도로 충성과 검소에 힘썼다. 관직에 있으면서 의로운 주장으로 애써 당시의 폐단을 제거하려 하였으며,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공적인 일을 해치는 일이 없으니 왕이 중히 여겼다.
○ 배우(裵祐) 등 38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6월에 왕자지(王字之)ㆍ문공미(文公美)가 송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송 나라에서 왕에게 의복과 은그릇 등을 보내왔다. 자제의 입학을 허락하는 조서에 이르기를, “짐이 선왕의 법을 이어 닦고 삼대의 법을 받아 학교를 창설하니, 교화가 만방에 넘쳐서 글읽는 소리가 먼 지방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너희 나라는 좋은 풍속으로 옛날의 유풍이 있으니, 여러 학생을 보내어 상국을 관광하여 묵은 습속을 모두 버리고, 천지의 큰 이치를 알고, 중국의 풍속으로 변화하여 옛날의 예의를 미룰려고 하여 길이 중국을 사모하니 감탄하고 가상히 여긴다."고 하였다. 또 대성악(大晟樂 송 나라 휘종(徽宗) 때에 만든 아악(雅樂))을 주는 조서에서 이르기를, “삼대 이후로 예법이 폐지되고 음악이 무너졌는데, 짐이 옛것을 상고하여 계승하여 밝혔다. 덕을 쌓은 지 백 년 만에 재생시켜 대성악을 이루니, 천 년 후에 선왕을 따랐도다. 음률이 조화로워 봉황새가 오게 하고, 맑고 바른 소리가 천하에 가득 차니 손님을 위안하고, 먼 지방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먼 너희 나라는 동해를 차지하고 우리를 섬겨 사신이 와서 뜰에 있으며 옛날에 제후 중 교화가 높고 덕이 성하면 천자가 음악으로 상을 주었는데 여기서 음악 기구를 내려주어 너희 나라의 복이 되게 한다. 무릇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나의 명을 공경히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 국토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함께 태화(太和)에 이르게 되면 그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고 하였다.
○ 김경용(金景庸)을 수태사 낙랑후(守太師樂浪侯), 이위(李瑋)를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이자겸을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 김연ㆍ조중장을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강증(康拯)을 수사공 참지정사, 김준(金晙)을 병부상서 추밀원사로 삼았다.
○ 회경전에 나아가서 대신과 시신들을 불러 대성악을 구경하였다.
○ 가을 7월에 상춘정에서 잔치하고 활을 쏘았다.
○ 이자량(李資諒)ㆍ이영(李永)을 송 나라에 보내어 대성악을 보내줌에 사례하였다.
○ 8월에 동여진의 아이(阿伊) 등이 내조하였다.
○ 경령전(景靈殿)을 알현하였다.
○ 제하기를, “문과 무의 도는 어느 하나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근래 여진[蕃賊]이 점점 성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는 신하와 무장이 모두들 병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고 있으나, 무력만을 전용할 수는 없다. 옛날 순임금께서는 문덕(文德)을 크게 펴서 양쪽 섬돌에서 간우(干羽)의 춤을 추니 70일 만에 유묘(有苗)가 와서 항복하였는데, 짐은 이를 매우 사모한다. 더구나 지금 송 나라 황제가 특별히 대성악의 문무무(文武舞)를 하사하였으니 마땅히 먼저 종묘에 쓰게 하고 다음 연회에 써야 하겠다."고 하였다.
○ 궁궐 안에 청연각(淸讌閣)을 짓고, 학사ㆍ직학사ㆍ직각 한 명씩을 임명하여 아침저녁으로 경서를 강론하게 하였다.
○ 금 나라 장수 살갈(撒喝)이 요 나라의 내원ㆍ포주 두 성을 쳐서 거의 함락하자 그 통군 야율녕(耶律寧)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려 하였다. 왕이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韓皦如)를 보내어 야율녕을 불러 효유하니, 야율녕이 왕의 전지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교여가 급히 보고하니 왕이 추밀원에 명하여 차자를 갖추어 보내려 하였다. 재신과 간관이 아뢰기를, “저들이 왕의 전지를 요구하는 뜻을 알기 어려우니 중지 하옵소서." 하였다. 왕이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청하기를, “포주는 원래 우리나라 옛땅이니 돌려보내기를 원한다."고 하자, 금 나라 임금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스스로 빼앗으라."고 하였다.
○ 9월에 동계(東界) 예주(豫州 함남 정평군(定平郡))에 성을 쌓고 방어사를 두었다.
○ 겨울 10월에 대성악을 건덕전에서 사열하였다.
○ 친히 종묘에 제사 지내고 대성악과 서도(西都)에서 얻은 보옥 제기를 올리고, 새로 지은 구실등가(九室登歌 종묘의 9실(室)에 각각 악장을 올려 노래하는 것)도 함께 연주하였다.
○ 한림학사 좌간의대부 박승중(朴昇中)이 청연각의 시신을 놀리고 희롱하였다는 말이 왕에게까지 미치니 곧 판장작감으로 좌천되었다.
○ 11월에 청연각이 궁궐 안에 있어 학사들의 숙직과 출입이 불편하다고 하여 홍루 아래쪽 남랑을 수리하여 학사들이 모여 강론하는 처소로 하고 이름을 하사하여 정의당(精義堂)이라 하며 그 좌우편으로 휴식하는 곳을 만들고, 이름을 고쳐 보문각(寶文閣)이라 하고, 청겸각의 학사를 옮겨 충당하고 대제(待制)를 더 두고 금자(金紫)를 하사하였는데, 거기에 뽑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이었다.
○ 새로 급제한 임허윤(林許允) 등이 알현하니, 그대로 나와서 벼슬하게 하고, 각각 옷 한 벌씩을 주며 합문에서 주식을 대접하였다.
○ 청연각에 나가서 한림학사 승지 박경인(朴景仁)에게 명하여《서경》의 이전(二典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을 강의하게 하였다.
○ 눈이 많이 내렸다. 지주사 한교여(韓皦如), 보문각 직학사 정극공(鄭克恭), 우부승선 문공미(文公美), 직보문각 윤해(尹諧)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고 눈을 읊는 시를 지었다. 전 예부낭중 곽준목(郭俊穆)이 일찍이 숙종을 보도하였으며 전중내급사 김원여(金元輿)는 왕이 즉위하기 전의 옛 스승이기에 명하여 불러 여러 학사의 윗자리에 앉게 하였다.
○ 왕이《편년통재(編年通載)》를 열람하고 보문각학사 홍관(洪灌) 등에게 명하여, 삼한시대 이래의 사실을 모아서 속편을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다.
○ 12월에 보문각교감 고선유(高先柔)에게 명하여《서경》삼모(三謨 고요모(皐陶謨)ㆍ대우모(大禹謨)ㆍ익직(益稷))를 강의하게 하였다.
○ 내시 양온령(良醞令)ㆍ지창흡(池昌洽)에게 명하여, “《예기》의 〈중용〉ㆍ〈투호(投壺)〉두 편을 강의하게 하고, 보문각 학사 등에게〈투호〉는 고례(古禮)인데 폐한 지 이미 오래이다. 송 나라 황제가 보내준 기구가 매우 정밀하게 갖추어 있으므로 장차 시험하려 하니, 경등은 투호의 의식을 정하고 아울러 그림으로 올려라."고 하였다.
○ 청연각에서 잔치하였다. 학사들에게 이르기를, 짐이 "일찍이《정관정요》를 보았는데 태종이 이르기를 '천하가 태평하고 집집마다 사람마다 넉넉하기만 하다면, 비록 상서가 없다 할지라도 덕을 요ㆍ순에게 비길 수 있을 것이나, 만일 백성들이 넉넉하지 못하고 오랑캐가 침노한다면, 비록 상서인 지초(芝草)와 봉황새가 있다 하더라도 걸ㆍ주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하였는데, 이 말이 지극히 옳으니 내가 우러러 사모한다."고 하며, 드디어 김연ㆍ박경인 및 보문각 학사에게 명하여《정요》를 주석하여 올리게 하였다.
○ 크게 나례(儺禮)를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내시들이 나례를 좌우 편으로 나누어 승부를 다투게 하였는데, 왕이 또 여러 왕씨에게 명하여 분담하여 주관하게 하니 모든 광대ㆍ잡기와 지방의 기생들까지 모두 불러 올려 사방에서 혼잡하게 모이니, 깃발이 길에 잇따르고 궁중에 가득하였다. 이날 간관이 합문을 두드리면서 간절하게 간하니 그 중 심히 괴이한 것만을 물리치도록 명하였다. 날이 저물어서는 다시 모여들어 왕이 음악을 구경하려 하자 좌우가 어지럽게 다투어가며 먼저 연기를 보이려 하여, 다시 4백여 명을 물리쳤다.
○ 거란사람 33명과 한인 52명, 해인(奚人 열하(熱河) 지방의 한 종족) 1백 55명, 숙여진(熟女眞) 사람 15명, 발해인 44명이 와서 의탁하였다.
| [丙申十一年 宋 政和六年,遼 天慶六年,金 收國二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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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正月,遼,遣大理卿張言中,來賀生辰。○御便殿宴諸王,夜分乃罷。○幸天壽寺,巡視新創堂殿,賞賜工匠有差。○閏月,幸普濟寺,聽國師曇眞說禪,襯施優厚。○遣秘書校書郞鄭良稷,稱爲安北都護府衙前,持牒,如遼東京,詗知節日使尹彥純,進奉使徐昉,賀正使李德允等,稽留事。○二月,日本國,進柑子。○遼,東京人高諝,來投。○行別例燃燈御重光殿,宴諸王宰樞侍臣,夜分乃罷。○參知政事,致仕高令臣,卒,令臣,少孤力學,善屬文,文宗朝擢第,歷仕中外,議論慷慨,無所屈撓,慶尙州道,大水,令臣,以散騎常侍,奉使安撫,奏蠲公田之稅,民,賴蘇息,其在政府,公卿,爭進新法,令臣,以爲,祖宗之法,具在,何必改作,但守而勿失可也,令臣,本以淸儉自守,及卒,家無羡財。○御乾德殿,引見新及第金精等,賜酒食于閤門,仍令釋褐。○三月,王,聞遼,來遠,抱州二城,爲女眞所攻,城中食盡,送米一千石,來遠統軍,辭不受。○鄭良稷,自遼,東京還,時,東京渤海人,作亂,殺留守蕭保先,立供奉官高永昌,僭稱皇帝,國號大元,建元隆基良稷至,詐稱官御,上表稱臣,以國家所遺,留守土物,贈永昌,得厚報,及還,匿不奏,事覺,有司,請下獄治之。○王,如天壽寺,設齋以落之,綵棚伎樂,連亘道路者三日,宴群臣于寺門外,至曉乃罷,還宮,赦,監督官吏,工匠,役徒,賞賚有差,駐駕都市,諸王宰樞,稱觴獻壽,王,執金景庸手,語及先王太后,泣下霑襟,左右嗚咽。○幸西京,以李瑋,金緣,判行從事,李資謙,趙仲璋,判留守事,所歷,供給務從省約,鹵簿儀仗悉令簡便,沿路,田有不墾者,必召守令,責之。○尹彥純,徐昉,李德允等,自遼東京還,彥純等,拘留東京,高永昌,勑令上表稱賀,彥純等,一如所言,及還,匿情不首,有司,請治其罪。○禱雨于所過祠宇。○夏四月,至西京,置酒大同江,扈駕諸王,宰樞,侍臣,西京留守,分司三品以上,侍宴,風日淸和,王悅懌,與侍臣唱和,時,國家閒暇,王,尙章句,好遊宴,知制誥崔瀹上書曰,昔,唐文宗,欲置詩學士宰相,奏曰,詩人,多輕薄,若承顧問,恐撓聖聰,文宗,乃止,帝王,當好經術,日與儒雅,討論經史,咨諏政理,化民成俗之無暇,安有事童子之雕蟲,數與輕薄詞臣,吟風嘯月,以喪天衷之淳正耶,王優納之。○謁太祖眞殿。○處士郭輿,自上京來,賜坐於常安殿後花壇,親賜酒食,時,忽見東南方,有白雲數片,其中,雙鶴徘徊,因命輿賦詩,王,亦和之。○召諸王,及郭輿,置酒,製詩三篇,命輿和進。○幸金剛,興福兩寺,還至永明寺,御樓船,宴諸王,宰樞,侍臣,復以御製詩,宣示臣僚。○金主,阿骨打,遣阿只,來。○中書門下,奏,遼爲女眞所侵,有危亡之勢,所稟正朔,不可行,自今,公私文字,宜除去年號但用甲子從之。○宴群臣于長樂殿,仍宣示御製詩。○幸觀風殿,巡視太祖行在所,遂御九梯宮,及晩,移御永明寺,召諸王,及郭輿,置酒唱和。○遼,來遠,抱州二城流民,驅羊馬數百,來投。○遼,流民二十餘人,來投,獻羊二百餘口。○制曰,朕,承祖宗積累之緖,保有三韓,懼無以稱人神之望,宵旰憂勞,不敢遑寧,今以日官所請,徙御西京,以頒新敎,將以與物更始,使民知歸,以興先王之舊業,其先王所訓,順陰陽,奉神祗편001,信賞罰,公黜陟,崇學校,美風化,一切之事,皆欲遵行,期至于治,惟爾有司,奏聞施行,尊卑服飾,禮儀,詳定所據,祖宗式例沿革,制定以聞,又改中外官制。○曲宴于乾元殿。○幸弘福寺,移御唐浦古城門樓,置酒歡賞,名樓曰多景,御製留題,命詞臣和進。○駕發西京,路上,有老嫗,進酒,王憐其誠,許賜一嘗,因賦詩。○王,還京都,赦,蠲所過州縣租稅,時,留守百官,備儀仗樂部,迎駕於馬川亭,大樂,管絃兩部,爭務奇侈,以至使婦女,馳馬擊毬,王,命黜之。○得寶玉於西京盤龍山,命玉人,先造祭器,以答神貺,宰臣,表賀。○五月,門下侍郞,平章事吳延寵,卒,延寵,海州人,家世寒素,少貧賤,力學,善屬文,早擢科第,飭躬勤行,恂恂然,以忠儉自許,當官,持論務祛時弊,未嘗以私害公,故,王重之。○賜裴祐等三十八人,及第。○六月,王字之,文公美還自宋,賜王,衣著,銀器等物,許子弟入學,詔曰,朕紹述先猷,遹追三代,肇興學校,誕彌萬邦,絃歌之聲,無遠不屆,惟爾雅俗,有古遺風,乃遣諸生,觀光上國,盡捐宿習,欲見天地之全,於變華風,亦推禮義之舊,永言向慕,旣用歎嘉,又賜大晟樂,詔曰,三代以還,禮廢樂壞,朕若稽古,述而明之,百年而興,乃作大晟,千載之下,遹追先王,比律諧音,遂致羽物雅正之聲,誕彌率土,以安賓客,以悅遠人,逖惟爾邦,表玆東海,請命下吏,有使在庭,古之諸侯,敎尊德盛,賞之以樂,肆頒軒簴,以作爾祉,夫移風易俗,莫若於此,往祗厥命,御于邦國,雖疆殊壤絶,同底大和,不其美歟。○以金景庸,守太師,樂浪侯,李瑋,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李資謙,爲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兵部事,金緣,趙仲璋,守司徒,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康拯,守司空,參知政事,金晙,爲兵部尙書,樞密院使。○御會慶殿,召宰樞侍臣,觀大晟樂。○秋七月,宴射于賞春亭。○遣李資諒,李永,如宋,謝賜大晟樂。○八月,東女眞,阿伊等來朝。○謁景靈殿。○制曰,文武之道,不可偏廢,近來,蕃賊,漸熾,謀臣武將,皆以繕修甲兵,訓鍊軍士爲急務,然,不可專用武事,昔者,帝舜,誕敷文德,舞干羽于兩階,七旬,有苗格,朕甚慕焉,況今,宋帝,特賜大晟樂,文武舞,宜先薦宗廟,以及宴享。○禁中,作淸讌閣,選置學士,直學士,直閣,各一員,朝夕,講論經籍。○金將,撒喝,攻遼,來遠,抱州二城,幾陷,其統軍耶律寧,欲率衆而逃,王,遣樞密院知奏事韓皦如,招諭寧,以無王旨,辭皦如,馳奏王,欲令樞密院,具箚子送之,宰臣,諫官,奏曰,彼,求王旨,其意難測,請止之,王,乃遣使如金,請曰,抱州,本吾舊地,願以見還,金主,謂使者曰,爾,其自取之。○九月,城東界豫州,置防禦使。○冬十月,閱大晟樂于乾德殿。○親享于大廟,薦大晟樂,及西都所得瑞玉,祭器,幷奏新製九室登歌。○翰林學士,左諫議大夫朴昇中,譏戲淸讌閣侍臣,語侵上,卽左遷判將作監。○十一月,以淸讌閣,在禁中,學士,直宿,出入爲難,乃修紅樓下南廊,爲學士會講之堂,賜號曰精義,就其左右,爲休息之所,改號寶文閣,移淸讌閣學士充之,加置待制,直賜金紫,充其選者,皆一時豪彥。○新及第林許允等,朝見,許令釋褐,各賜衣一襲,閤門酒食。○御淸讌閣,命翰林學士承旨朴景仁,講書二典。○大雪,召知奏事韓皦如,寶文閣直學士鄭克恭,右副承宣文公美,直寶文閣尹諧等,置酒詠雪,以前禮部郞中郭俊穆,嘗輔導肅宗,殿中內給事金元輿,潛邸舊學,命召,賜坐於諸學士之右。○王,覽編年通載,命寶文閣學士洪灌等,修集三韓以來事實,續編以進。○十二月,命寶文閣校勘高先柔,講書三謨。○命內侍良醞令池昌洽,講禮記,中庸,投壺二篇謂寶文閣學士等曰,投壺古禮也,廢已久矣,宋帝,所賜其器,極爲精備,將試之,卿等,可纂定投壺儀,幷圖以進。○宴淸讌閣,謂學士等曰,朕嘗覽貞觀政要,太宗,曰,但使天下太平,家給人足,雖無祥瑞,可比德於堯舜,若百姓不足,夷狄內侵,縱有芝草鳳凰,何異於桀紂,斯言至矣,庶幾景行,遂命金緣,朴景仁,及寶文閣學士,註解政要,以進。○大儺,先是,宦者,分儺爲左右,以求勝,王,又命諸王,分主之,凡倡優雜伎,以至外官遊妓,無不被徵,遠近坌至,旌旗亘路,充斥禁中,是日,諫官,叩閤切諫,乃命黜其尤怪者,至晩復集,王將觀樂,左右紛然,爭先呈伎,更黜四百餘人。○契丹,三十三人,漢兒,五十二人,奚家,一百五十五人,熟女眞,十五人,渤海,四十四人,來投。
[주D-001]간우(干羽) : 순(舜) 임금이 삼묘(三苗)를 치다가 불복(不服)하므로, 돌아와서 문덕(文德)을 펴서 간우(干羽)의 춤을 추니 삼묘가 복종하여 왔다. 간우는 문무(文舞)이다.
[주D-002]금자(金紫) : 재상(宰相)의 복색(服色)은 금자(金紫)ㆍ금청(金靑)ㆍ은자(銀紫)ㆍ은청(銀靑)의 구별이 있다.
[주D-002]금자(金紫) : 재상(宰相)의 복색(服色)은 금자(金紫)ㆍ금청(金靑)ㆍ은자(銀紫)ㆍ은청(銀靑)의 구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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