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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7.05.04|조회수135 목록 댓글 0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31)
하 승 우**32)

목 차
I. 서론: 국가 정통성 논쟁을 넘어서
II. 아나키즘 연구 경향과 아나코-코뮨주의
연구의 필요성
III. 아나키즘과 저항하는 농민공동체
IV. 농민공동체와 아나키즘
V. 아나키즘 공동체와 그 해체
VI. 결론: 지금 이곳의 농민공동체와 아나키즘
의 의미

 


요 약
이 논문은 일제 식민지 시기의 식민권력과 그에 기반한 경제체계가 농민공동체에 미쳤던
영향과 그런 억압에 맞서 농민들이 스스로 조직했던 공동체에서 아나키즘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핀다. 그동안의 아나키즘 연구들은 주로 아나키즘 운동의 전개과정이나 몇몇
인물의 사상적 특징을 밝히는데 머물렀고 아나키즘 사상과 농민공동체의 연관성에 주목하지
못했으며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아나코-코뮨주의의 의미를 다루지 않았다.
본 연구는 식민지 시기의 한국 농민들이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에 대항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특히 식민지 시기의 농민공동체는 새로운
사상의 싹을 틔우는 배양기였다. 3․1운동 이후 농민들은 일제에 파괴된 농민공동체를 복원하
려는 다양한 노력을 펼쳤고 이는 아나키즘과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아나키즘
사상이 이런 농민공동체 형성에 미친 영향과 공동체 질서의 정치적 측면을 조명하려 했다.
주제어: 아나키즘, 농민공동체, 농민, 아나코-코뮨주의, 협동조합

 

 

* 이 논문은 2008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학술진흥
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8-327-B00013)
** 풀뿌리자치연구소 / 정치학
98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I. 서론:
국가 정통성 논쟁을 넘어서
2008년에 때 아닌 논쟁이 건국 60주년 기념행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60주년
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했고, 60주년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의 실효성을 주장했다. 찬반여부를 떠나
이 논쟁은 그동안 시민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에 물음을 던질 기회를
마련했다. 도대체 건국이란 한국사회에서 어떤 의미이고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나라를 꿈꿨을까?
그동안 이런 물음을 던지지 못한 것은 한국사회의 역사인식이 국사(國史)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해방과 건국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친일이 청산되지 못한 국가의 정통성을 인정해 왔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임시정
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이를 근거로 사회의 변화를 주장해 왔다. 그런데 정반대
의 인식을 내세우는 듯하지만 두 가지 입장 모두 자기 인식의 근거를 국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각자가 자신의 국사를 기록하고 그 정당성을 고집해
왔기에, 우리는 국가가 아닌 다른 무엇을 통해 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조선, 일제 식민지, 미군정, 대한민국처럼 국가로 이어져 내려오는
기록 사이에서 국가를 벗어난 사잇길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국사의
틀을 벗어나 풀뿌리 민중들이 살아오며 꿈꿨던 바를 엿볼 수는 없을까? 설령
그런 기록이나 꿈 자체가 진리는 아닐지라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면
그런 시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식민권력과 그에 기반한 경제체계가 한반도의
주민들의 삶 속으로 침투하던 시대를 돌이켜보려 한다. 이 논문이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리고 당시 인구의 83%를
차지했던 농민들은 해방 이후에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특히 당시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아나키
즘은 농민들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했을까? 식민지 시기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99
체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전무하기에 본 연구는 본격적인 서술보다 다양한
단초들을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려 한다.

 

II. 아나키즘 연구 경향과 아나코-코뮨주의 연구의
필요성
일제 식민지 시기 아나키즘은 사회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와 함께 주요한
사상적 흐름을 구성했고 국내와 국외에서 활발하게 정치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의 이념으로서 아나키즘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된 학문적인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어
현실에서 실현가능하지 않은 공상으로 간주되어 왔기에 진지한 학문적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성장했
던 주요한 이념이었다. 심지어 아나키즘이 1910년대 사회주의계의 주류였다는
주장(이호룡 2001, 91)도 있지만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맑스-레닌주의를 따르
는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도 당시에는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반병률
2002; 전명혁 2006, 102). 그 세력과 영향력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아나키즘이 당시에 주요한 사회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아나키즘이 이념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조세현 2003, 338). 그러다 식민지
해방 이후 정부수립 문제를 둘러싸고 아나키즘 내부에서 분열이 생기고, 남북한
의 역사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주의를 중심으로 서술되면서 아나키즘의
역사는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보여주었던 국제주의 관점과
국가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 연방주의와 지방자치, 경쟁과 사회진화론에서
벗어난 세계관 등은 소수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아 왔다. 그리고 2000년을 지나면
서 아나키즘을 다루는 논문들의 편수나 관련된 저작들의 수가 조금씩 증가하고
100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있다. 또한 2008년에는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의 《동양정치사상사》는 특집
논문으로 일제 시기 아나키즘 운동을 주목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나키즘 연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아나키즘을 다룬
책은 손에 꼽힐 정도이고, 그 중에서 한국의 아나키즘을 다룬 책들은 더욱더
소수이다. 오장환의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1998), 한국민족운동사학회의
󰡔일제하 아나키즘운동의 전개󰡕(2003), 조세현의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2001), 여러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함께 엮은 󰡔한국아나키즘 100년󰡕(2004),
박환의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2005), 방영준의 󰡔저항과 희망 아나
키즘󰡕(2006), 이호룡의 󰡔한국의 아나키즘󰡕(2001)과 󰡔절대적 자유를 향한 반역의
역사󰡕(2008)가 대표적인 저작으로 얘기될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 진행된 연구논문들은 대부분 문학과 역사학, 사회학에 집중되
어 있다. 연구 논문들 중에는 이육사나 권구현, 신동엽, 이기영, 신채호 등의
아나키즘 시와 소설을 분석한 비평 논문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김경복
2005, 2007; 조두섭 2002; 김석영 2005; 김흥식 2005; 서은선 외 2008). 이 논문들은
다양한 작품을 분석하며 당시 아나키즘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구들이지만 하나의 이념이자 현실운동으로서 아나키즘의 영향력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사상, 예를 들어 유림(김희곤 2001; 김성국
2005; 김영천 2008)이나 신채호(신순철 2003; 이호룡 2003), 이회영(이덕일 2001;
김명섭 2008), 류자명(오장환 2000; 이호룡 2004; 한상도 2008) 박열(김명섭
2003; 전상숙 2008), 하기락(김성국 1998; 배상식 2003) 등의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들을 다룬 논문들과 저작들도 있다. 이런 연구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을 복원하는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연구들은 개별 사상가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하나의 단일한 이념으로 정의되
기 어려운 아나키즘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 왔는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단점을 가진다.
또한 역사학의 관점에서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서 활약했던
한인 아나키스트의 운동을 다룬 논문들도 있다(이호룡 2001; 김명섭 2001, 2003;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01
손과지 2004; 조세현 2003, 2007; 손과지 2004; 하승우 2008). 그리고 에코 아나키
즘(구승회 2001; 방영준 2003)이나 아나키즘의 윤리관(김갑수 2007)을 다룬
논문도 찾을 수 있고, 아나키즘의 주요한 개념인 직접행동을 다룬 논문(하승우
2004)이나 연방주의를 다룬 논문(오두영 2003)도 있다. 이 연구들은 아나키즘
운동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발전하는지를 추적하는 소중한 성과들이다.
그런데 그동안의 연구들은 아나키즘의 비판적 측면, 즉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에 대한 비판,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측면을 많이
조명했지만 그것의 구성적 측면이나 하나의 정치이념으로 다루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런 관심의 부족은 아나키즘의 여러 정치원리
중에서 자율적인 권력구성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흐름인 아나코-코뮨주의
(anarcho-communism)에 대한 관심의 부족과도 맞닿아 있다. 무정부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며 아나키즘이 한국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것에는 아나키즘이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원리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오해도 한 몫을 했다. 그런 점에서
아나코-코뮨주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아나코-코뮨주의는 정치적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어떤 정치적 권위인
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아나키즘 속에서 정치적 권위가 구성되고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해 왔다. 아나코-코뮨주의는 기존의 강권적인
권력을 거부하고 부정하지만 자율적으로 구성된 권력이라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있다. 아나키즘의 지도자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크로포트킨은 지도자를
발기인이라 불렀다.1) 즉 발기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대리할(delegate) 수
있지만 공동체를 대표(represent)하며 자신의 의사를 전체의 의사로 강요할
수 없다. 정치적 권위에 관한 이런 입장은 강압적인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즘의
원칙과 어긋나지 않는다.
1) “쥐라연합 안에 지도자와 대중간의 괴리가 없었던 것도 서로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노동자는 소수의 지도자에게 지도받거나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지도자는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활동적인 사람일 뿐이었다. 아니 지도자
보다는 발기인이라고 해야 옳았다.”(크로포트킨 2003, 365)
102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그런 점에서 아나코-코뮨주의는 발기인와 대중의 관계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발기인은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 나서는 존재이
고 그는 대중의 동의 외에 다른 권위의 성격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든
필요하다면 대중은 발기인을 소환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적인 아나키스트(individualistic anarchist)를 제외하면2)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코뮨을 좋은 정치공동체로 받아들였다. 개성과 자율,
자치를 강조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코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나키즘의
개인관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근대의 자유주의 관점과 달리 개인을 분리된
단자들(monad)로 보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적 존재로 파악한다. 사회적
개인은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고 자아를 실현해 가기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그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를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몇몇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해방이 아니라 그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의 해방과 자유를 요구해 왔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바쿠닌(Michael Bakunin)은 ‘한 민족의 자유’와 ‘단 한 명의 개인적
자유’에 대한 훼손도 ‘나의 권리와 인간성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이고, ‘지상의
한 인간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고 했다(이종훈 1996, 119). 아나키즘은 개인의 이름으로 체제에 도전하
지만 그 개인의 이름 속에는 해방을 열망하는 개인들의 집합인 대중이 숨쉬고
있다.
따라서 아나코-코뮨주의는 추상적인 개인주의와 그것에 기초한 근대적인
위계질서인 중앙집권화를 거부하지만 자율적인 코뮨을 정치공동체로 받아들인
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장할 강력하게 중앙집권화
된 국가를 원한다면, 서로 돕고 보살피는 사회적 관계망을 지지하는 아나코-코뮨
주의는 연방주의(federalism)를 지지한다. 연방주의는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니라 권력이 분산된 연방공화국을 지지했고 지방자치가 실시되는 ‘非국가연
방’를 전제한다(오두영 2003). 그것은 국가와 자본이 개인의 정보를 마음대로
2) 물론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슈티르너(Stirner)나 터커(Benjamin Tucker)같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도 있다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03
관리하고 이용하지 못하도록 맞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작고 자율적인 공동체
단위로 분할하고 필요한 사안에 따라 연대할 것을 요구한다(Avrich 2003).
이런 아나코-코뮨주의는 식민지 시대에 도입된 다양한 사상 조류 중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왜냐하면 상호부조를 강조하는 동양의 정치문화적
조건이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아나코-코뮨주의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이호룡
2001; 안종수 2006, 33; 김갑수 2007, 76~103; Kropotkin 1974, 1990; 크로포트킨
2005).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아나코-코뮨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의 정치사상
적 의미를 조명하려 한다. 그동안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만 해석되어져 왔기
때문에 그것의 정치적 구성원리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 연구는 아나코-코뮨주
의의 정치적 구성원리를 중심으로 아나키즘이 정치사상의 면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사회에서 가졌던 의미를 조명하려 한다.
식민지 시기에는 다수의 대중이 농민이었기에, 이 연구는 한국의 아나코-코뮨
주의와 전통적인 농민공동체의 연관성에 주목하려 한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아나키즘 연구들은 주로 아나키즘 운동의 전개과정이나 몇몇 인물의 사상적
특징을 밝히는데 머물렀고 아나키즘 사상과 농민공동체의 연관성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연구들은 아나키즘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이 어떻게 분화되
고 대립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출 뿐 (에코 아나키즘 논의를 제외하면) 산업사회로
의 발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계를 가졌다.
그렇다면 식민지 당시의 농민들이 품었던 생각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관점들은 대부분 산업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농민과 농민공동체
의 의미를 해체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본 연구가 주목하는
관점과 맞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서발턴(subaltern)의 관점에 주목하
려 한다.
1980년대 초 라나지뜨 구하(Ranajit Guha)를 비롯한 인도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을 비판하고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인식하기
위해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스스로 만든 개념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에게 빌려온 개념이지만 이들
은 이것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되짚을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김택현 2004).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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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식민권력과 토착권력을 전복시키려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석하며 농민을
다시 정치의 무대에 올려놓았다(Guha 2008).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이런 노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서발턴
개념을 빌려온 연구들이 제법 있지만 그 연구들은 주류 역사학을 비판하거나
탈근대/변경의 역사를 주장할 뿐 역사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며 농민들을
정치의 주체로 재구성하지 않았다. 기존의 국사보다 인식의 폭이 넓어졌지만
권력의 결을 거스르며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이런 관점을 받아들여 거칠게나마 농민들의 저항과 농민공동체의
형성을 살펴보려 한다.
III. 비근대 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
아나키스트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였다. 혁명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산악당은 자신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반대파들을 아나키스트라 부르면서 무질서나 혼란을 일으키는 나쁜 사람들로
몰아붙였다. 그러다 프루동(P. Proudhon)이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아나키스트라는 용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바꿨다. 프루동은 사회의 발전과 생산량
의 증가가 한 개인의 노력보다 여러 사람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며
상호주의(mutualism)를 제창했다. 이런 상호주의는 바쿠닌에게 영향을 미쳤고
크로포트킨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근대에 출현한 대다수의 사회이론은 중세 봉건제에서 근대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자연스럽고 진보적인 것이라 여겼다. 심지어 맑스(K. Marx)나 엥겔스(F.
Engels)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조차 그런 전환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발전적이라
고 보았다. 따라서 농촌이 도시로 변하고 농민이 노동자로 되는 것은 하나의
발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변화를 발전이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나키
스트들은 그런 변화가 인류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고 봤다. 이들은 산업화가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05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자극해서 경쟁을 강화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생산의
도구로 만들 것이라 우려했다. 그리고 대규모 공업화가 자율적인 공동체를
해치고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사람들에게 강요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농촌의
파괴는 인간이 자급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사회가 예정된 법칙에 따라 발전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미래사회의 조건은 현재의 사회적 조건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
들은 지금 당장 변화가 필요하다고 봤고 그러려면 미래보다 현재에 주목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당시 대중이 자발적으로 구성했던 공동체들
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농민들의 자치공동체, 농민들의 생산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그런 농민들과 연결된 도시 소비자들의 소비자협동조합 등이
평등한 정치공동체를 만들 원동력이라 여겼다(Landauer 1978).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노동계급보다 농민을 중심으로 혁명 이후의 사회를
구상했다(최초로 아나키즘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프루동 역시 프랑스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물론 아나키스트들도 산업혁명이나 과학기술의 발달
로 인한 생산양식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대규모 공장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규모 생산체제는 물건을 만드는 즐거움을 빼앗고 인간노동을 컨베이어
벨트의 기계적일 작업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한 가지의
단순한 노동만 하도록 해서 그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크로포트킨은 근대의 산업체제가 강요하는 농업과 공업의 분리,
작업능률을 강조하는 분업제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거부하고, 농업
과 공업의 일체화, 산업의 분산,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합 등을 주장했다.
만일 노동자가 임금노예제에서 해방되고 유쾌한 환경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면, 무기와 사치품의 생산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작업을 위해 폐지된다면,
이 세상 모든 이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공황은 과잉생산
때문이 아니라 강요된 빈곤에 의한 과소소비와 비생산적인 일로 낭비되는 노동력
때문이다. 만일 상호부조의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서도 최대한의 행복과 즐거움, 종의 지속과 발전을 확보할 수 있다(크로포트킨
106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1974, 1990).
아나키스트들은 근대의 과학기술에 우려의 시선을 보냈지만 그 유용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바쿠닌은 과학자와 기술전문가가 그들의 지식을
가지고서 타인을 지배할지 모른다고 경고했지만 과학에 대항한 반란이 아니라
과학의 지배에 대항하는 삶의 반란을 주장했다. 크로포트킨 역시 근대 과학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특히 크로포트킨은 최신기술을 도입하면 작은 생산단위로
전력을 분배할 수 있고 도시와 시골의 이점을 결합시킨 ‘전원도시(garden city)’
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근대의 과학기술은 도시만이 아니라 시골에도
전기를 끌어들여서 생산력을 높이고 새롭고 빠른 소통수단을 제공해 작은 공동체
의 기술수준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농업을
담당하는 농민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애브리치
2003).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와 달리 산업화를 숙명적인 발전과
정으로 여기지 않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자율적인 공동체의 연합을
구상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를 강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협동노동(집단노동과
다르다!)과 자치기구를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아나키즘은 민족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을 뿐만 아니라 사회진화론에 따른 계급의 불평등을 인정하면서 노동자
‧농민운동의 성장을 가로막던 민족주의를 비판했다(하승우 2006).
IV. 농민공동체운동과 아나키즘
한국에서도 식민지 시기까지는 농민공동체가 지금처럼 낭만적인 향수로 얘기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농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실제 현실의 버팀목이었다.
19세기부터 한국의 농민들은 민란(民亂)을 일으키고 면과 동리 단위로 모정(茅
亭), 농정(農亭), 농청(農廳)과 같은 공간에서 촌회(村會)나 향회(鄕會)를 열며
자치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주강현 2006).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제는 한국의 마을공동체들을 철저히 파괴하려 들었다.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07
이미 동학운동을 경험했던 일제는 자신의 지배를 위협하는 저항의 기반이 농민공
동체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파괴하기 위해 일제는 한일합방
이전인 1896년 13도 개정 때부터 군수의 역할을 보좌하던 향장(鄕長)과 향청(鄕
廳)을 폐지했고 1914년에는 부군면을 통합하고 면장을 임명했다. 마을이름도
○○동으로 바꿔서 마을의 정체성을 없앴다. 그리고 경찰과 헌병의 수를 매년
늘리고 그들에게 범죄단속이나 첩보수집만이 아니라 모종심기와 토지측량,
위생검열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을 시시콜콜 간섭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하승우 2009).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지주제도 경제적인 면에서 농민들의 삶을 뿌리째 뽑아
공동체를 해체하려 들었다. 그 과정에서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소작농
은 높은 소작료와 각종 부역에 시달리다 일고(日雇)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쌀의 생산량을 늘리려는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수리조합을 만드는 비용을
농민들에게 부담시키며 삶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심지어 일제조차도 농민층
의 붕괴를 보다 못해 1933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벌이며 농가경제의 자력갱생,
건전한 농민정신 함양을 주장할 정도로 농민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한국의 농민들은 이런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
초기부터 의병(義兵)의 전통을 따르는 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나타났다. 일본
측의 통계를 따르더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으며, 죽은 사람만 해도 17,697명, 부상자가 3,706
명, 체포된 사람이 11,994명에 달했다. 주로 해산된 군대나 지방유림의 지도를
받았지만 많은 농민들이 이 반란에 참여했다(조재희 1989, 88).
그러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일어난 사건이
고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씨의 역사”,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노명식 2002, 124). 그동안은 3․1운동을 민족이나
독립의 관점으로만 해석해 왔지만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108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벌였다(하승우 2010).
3․1운동을 통해 민중들은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와 자급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농민들은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서류철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회의를 열고 공동체의 일을
함께 돌봤다(이정은 2009).
일제가 3․1운동을 힘으로 짓누른 뒤에도 풀뿌리 민중들의 열망은 쉽게
식지 않았고, 1920, 30년대의 농민운동은 농촌공동체를 다시 세우려 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이 읽히기 시작했고
일본을 거쳐 레닌․스탈린․부하린 등의 원전들이 한국에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1928~1929년경에는 사회주의 서적 수용이 절정에 이른다. 심지어 1928년 《동아
일보》광고면에는 ‘개조사(改造社)’, ‘평범사(平凡社)’, ‘암송당(巖松堂)’ 등
동경에 소재한 일본 출판사가 펴낸 다양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이 소개되었다.
이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전집만이 아니라 󰡔크로포토킨 전집󰡕도 적지
않게 읽혔다. 1931년에 《동아일보》가 조사한 경성지역 여자 고보생 독서경향
을 보면 여학생들이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팜플랫을 즐겨 읽었다
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한다(천정환 2003).
일제 시기에 한국의 농민들은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에 대항했다. 특히 3․1운동은 단순한 저항으로 그치지 않고
행정기관을 접수하며 자치의 정신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3․1
운동이 일제의 폭력으로 진압된 이후 농민들은 일제에 파괴된 농민공동체를
복원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펼쳤고 이는 아나키즘과 연결된다.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증이 깊어지면서 다양한 사상들이
농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소작쟁의를 일으키며 지주제에 맞서던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09
농민들은 아나키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3)
기존의 국사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농민들의 저항을 기록하지 않았고,
사회주의 역사관은 농민의 저항을 개량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했다. 기존의
역사관은 임시정부의 법통이나 해방의 의미를 강조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을
무기력한 존재로 그리며 해외의 독립운동을 주로 다뤘다. 그리고 사회주의
관점은 국내의 농민운동을 혁명과 개량의 관점에서 ‘평가’하며 사회주의 계열만
을 진정한 사회운동으로 봤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관점은 천도교 계통의 조선농
민사(朝鮮農民社)나 기독교계의 농민운동, 협동조합운동 등을 일제 농민개량
화정책의 결과물로 보며 개량주의라 평가했다(지수걸 2002, 57~61).
그러나 이런 운동을 개량주의로 재단할 수 있을까? 기독교계의 손정도(孫貞
道)는 “우리가 時下를 쫏차 基督의 精神을 發揮하나니 朝鮮 內地나 滿洲나
基督敎的 新農村이 組織되여야 하겟고 압흐로는 네게 잇는 所有를 다 이
農村에 드리노켓느냐 하는 問答으로 그 이가 敎人되고 못됨이 나타나게 될거시
다”라고 말하며 소유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모색했다. 손정도는 농민호조사
(農民互助社)를 설립해 “無産農民으로서 金錢이 잇는 資本家들을 抵抗하
고 스사로 生産하기가 不能할지니 不可不 貧者 貧者끼리 協同互助하는
것으로 生産의 資本力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상촌 건설에 힘썼다(이
덕주 2008, 110~111).
그리고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던
이용도(李龍道)는 톨스토이를 스승이라 부르며 빈자와 연대하는 사랑의 공동체
를 주장했다.4) 이용도는 장로교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되는 파문을 겪으면서도
3) 1925년부터 1943년 6월까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기소된 13,288명의 직업을 보면 농업이
5,165명(38.8%)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무직 3,017명(22.7%), 노동자 1,479명(11.1%), 학생
1,170명(8.8%), 사무원 948명(5.9%), 상업 641명(4.8%), 교원 287명(2.2%)의 순이다(지수걸
2002, 74).
4) 톨스토이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아나키즘의 폭력성을 제외하면 그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그의 말로 증명된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점에서 옳다. 기존 질서
를 부정하고, 지금까지 권력기관의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점도
역시 옳다. 하지만 그들은 아나키즘이 혁명에 의해 확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옳지 않다.”(Tolstoy 2008, 83)
110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교회를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춤추고 기도하는 공동체로 만들려 했다(최대광
2008).
또한 3․1운동 이후 점점 보수화되는 교회에 실망하던 이대위(李大偉)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YMCA를 중심으로 사회복음운동과 농촌협동조합운동
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유재기(劉載奇)는 협동조합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활
화하는 유기적인 조직체라고 평가하며 장로회 농촌운동을 이끌었다. 유재기는
독일 라이파이젠식 신용조합과 영국 로치데일식 소비조합을 만들어 소농의
자립과 협동을 유도하기도 했다(장규식 2009).
이런 다양한 흐름을 모두 개량주의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자기 재산을 모두
공동체에 바치고 서로 돕고 협동하며 살겠다는 사람들이 현실과 타협하는 개량주
의자들일까? 빈부와 계급을 넘어 사랑과 협동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떠받치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이 개량주의로 평가되어야 할까?
그리고 당시의 농민운동을 사회주의운동과 그렇지 않은 운동으로 구분하는
것도 위험한 시각이다. 일제 시기의 농민운동사를 연구한 조동걸은 사회주의운동
이 소작쟁의를 자신들의 운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제도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부러 사회주의자를 만들었던 경우도 허다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조동걸 1983, 134).
그런 의미에서 농민운동을 개량과 혁명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농민
공동체에서 싹트던 다양한 사상들을 새로이 평가할 수 있다. 가령, 톨스토이가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자급하는 농촌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음을 생각하면(Tolstoy 2008), 앞서 얘기한 기독교 사회주의운동이 지향하
는 사회주의는 소련식 사회주의보다 아나코-코뮨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상에 맞춰서 현실의 농민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농민공동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상이 재구성되고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외국의 이론을 좇아 만들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재구성되는 사상을, 그리고 농민공동체 속에서 싹트는 자치와
자급의 이념을 볼 수 있다.
그 점은 천도교에서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천도교계의 김일대(金一大)는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11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지만 동학당(東學黨)을 이어받은 천도교는 “인내천주의
(人乃天主義)로서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하겟다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가진
교정합일체(敎政合一體)라고 주장한다. 1925년에 조직된 조선농민사는 사회
전체의 행복을 얻고, 농민대중의 교양을 향상시키고 농민대중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목적을 세우고 소비조합운동, 생산조합운동, 기술향상운동, 경제
균형운동(經濟均衡運動)을 펼쳤다. 김일대에 따르면, 1930년 조선농민사가
천도교청년당과 통합하면서 불과 10개월만에 새로 들어온 사원이 3만명, 새로
만들어진 군단위 농민사가 50개소, 리단위 농민사 1,000개소라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일대는 조선농민사가 조선 전체의 경제력을 발전시키
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일대 1931).
조선농민사는 계와 두레같은 전통적인 공동노동조직을 공동경작계로 꾸리고
군단위마다 공생조합(共生組合)을 만들며 농민들이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 했다. 그리고 《조선농민》과 《농민》등의 잡지를 발행하고 강연회를
열며 계몽운동과 농민야학에도 힘썼다. 《조선농민》은 야학의 교재로 사용될
〈농민독본〉, 〈농민과학 강좌〉, 〈위생강좌〉, 〈상식문답〉 등을 연재하고
농민야학과 귀농운동에도 힘을 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조선농민》과 《농민》이 아나키즘의 경향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연구가 거의 없지만 국문학계에서 이런 논의가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조선농민사의 중농주의를 민족주의적
개량주의보다 아나키즘에 기반한 자생적인 이념의 하나로 평가하기도 한다(홍성
식 2009).
특히 이 잡지에 글을 실은 작가와 비평가들은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공동경작제를 통한 이상촌건설을 추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허문일(許文日)의 〈自主村〉은 그런 이상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얘기
된다. 김택호는 허문일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를
강조했던 인내천주의가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을 거부하고 이상촌을 지향한다
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소통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김택호 2009,
142~160).
112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사실 문학작품만이 현실의 노동조직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각 군의 농민사들은 공동경작에 관한 규약을 만들고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공동경작계는 협동노동을 공동체의 규약으로 발전시키며
서로 돕고 보살피는 자급과 공생의 체계를 마련했다. 조선농민사만이 아니었다.
1926년 6월 전진한(錢鎭漢)이 일본 동경에서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
合運動社)는 “①우리는 협동․자립 정신으로써 민중적 산업의 관리와 민중적
교양을 한다. ②우리는 이상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조합정신의 고취와
실지 경제를 기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협동조합운동사는 방학 동안 경상북도
일원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열고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그래서 1928년 11월에는
협동조합의 수가 22개, 조합원수 약 5천명에 이르렀고 자본금도 4만 5천여원에
달했다(조동걸 1983, 184~185).
그런데 이 협동조합이야말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기대를 걸었던 삶의 양식이
었다. 독일의 사상가 란다우어(G. Landauer)가 말했듯이 협동조합의 정신인
서로 돌봄(mutuality)은 빈곤-노예-노동-생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바꾸고 자연
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서로 돌봄은 돈의 지배를 없애고 일을
하고자하는 모든 사람이 일하게 하고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다(Landauer 1978, 106). 한국의 아나키스트들도 협동조합운동에
많은 노력을 쏟았을 뿐 아니라 계와 두레같은 전통적인 노동조직에서 상호부조의
가능성을 찾았다. 따라서 이런 노동조직 자체가 아나코-코뮨주의와의 강한 친화
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동학과 아나키즘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수운
최제우가 강조했던 바르게 이해하고 익히고 실천한다는 신경성(信敬誠)의
수행체계, 한울님이 네 몸 가까운 곳, 천지생명체에 모셔져 있으니 먼데서 구하지
말라는 인내천의 사상, 사물이 자기 속의 씨앗을 스스로 틔우며 조직해간다는
기화(氣化)의 사상(표영삼 2004)은 아나키즘의 근본적인 논리와 맞닿아 있다.
즉 몸소 겪고 부딪치며 현실 속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직접행동(direct action),
자기 밖의 본질에 갇혀버린 고대와 근대의 정신을 비판하며 참된 자아(ego)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Stirner 1995, 62~89), 정신과 육체, 사물과 본질을 구분하지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13
않고 통합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동학과 유사하다.
이처럼 식민지 시기의 농민공동체는 새로운 사상의 싹을 틔우는 배양기였다.
농민들은 각 마을의 ‘촌계’, ‘동계’를 디딤돌로 삼아 민간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동회’나 ‘리회(里會)’같은 공동체적 연대를 이용하여 ‘면민대회’나 ‘촌민대회’를
열며 새로운 사회를 준비했다. 농민들은 “상호부조의 원칙에 의하여 정의를
지지하며 이상에 資할 과학으로 호상부조의 원리 아래 생존권 확립을 期하는
‘이상향’을 지향”하기도 했다(홍영기 2006, 201~250). 이상은 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경향은 사회주의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명식(金明植)과 김사국(金
思國) 등이 활동했던 서울청년회는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서울청년회와 교류했던 전라도 지역의 사회주의운
동들은 농민공동체를 디딤돌로 삼았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완도 근처의 작은
섬인 소안도(所安島)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소안노동대성회(所安勞動大成
會)가 조선농민사의 공동경작계를 받아들여 함께 밭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완도 주변에서 조직된 ‘필연단’과 ‘살자회’도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인
진화법칙에 의하여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일치단결
로써 민중운동의 충실한 역군이 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우리는 신사회건설의 속성을 도모”하자는 강령을 결의하기
도 했다. 아나키즘의 주요 노선인 상호부조가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의 주요한
강령이 된 것은 농민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다양한 사상의 흐름을 놓치고 그동안 역사를 아주
좁은 관점으로만 해석해 왔다. 당시 농민공동체에서 움트던 사상을 어떤 하나의
경향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농민들 자신이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했고 공동체라는 기반이 그런 저항과 새로운 창조를 뒷받침
했다는 점이다. 다만 일제가 그 싹을 무참히 짓밟았으면서 미처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뿐이다.
114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V. 아나키즘 공동체와 그것의 해체
그렇다면 아나코-코뮨주의의 이념을 실제로 구현한 농민공동체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일제 하의 한반도에서는 그런 이상촌을 찾기 어렵다. 춘천
신북면 천전리지역, 양주군 봉안촌지역, 북간도 어복촌, 안희제(安熙濟)의 발해
농장 등의 이상촌 운동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조동걸 1983), 그 이상촌과 아나코-
코뮨주의와의 연관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연관성의 단초들을 찾을 수는 있다.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도의
사례가 그 중 하나이다. 작은 섬이지만 소안도는 일제 시기 경찰과 말도 섞지
말자는 불언동맹(不言同盟)을 조직했고, 1928년에는 약 4천 명의 주민 중
800명이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기도 했다. 일제 시기 동안 섬 주민들이 감옥에
갇힌 기간을 모두 합치면 300년이 넘을 정도로 저항의 기운이 높았던 곳이다.
주민들은 “슬프도다/ 감옥에 있는 우리 형제들/ 이런 고생 저런 고생 악행
당할 때/ 두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하나/ 장래 일을 생각하니 즐거웁도다”라는
‘옥중가’를 부르며 한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소안항일운동
기념사업회 1990). 그리고 일본과 만주 등지의 항일조직과 사람과 물자를 주고받
으며 수많은 활동가를 배출했던 ‘해방의 땅’이었다.
소안도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1905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소유가 분명하지 않은 토지를 몰수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친일파, 일본이주민
에게 팔아넘겼다. 당시 소안도에는 왕실에 세를 내던 궁방전이 많았는데, 친일파
이완용의 아들인 이기용이 토지조사 과정에서 이 땅을 가로챘다. 이에 주민들은
소유권을 반환받으려는 소송을 제기했고 무려 13년 동안 소송이 이어진 끝에
1922년 2월 14일 소유권을 되찾았다. 이것이 ‘소안도 토지계쟁사건(土地係爭事
件)’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때로 치면 엄청난 돈인
1만 4백원을 모아 기존의 중화학교를 발전시켜 1923년 5월 16일에 소안사립학교
를 세웠다. 당시 일본노래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던 공립학
교의 학생수는 30명에 그쳤지만, 소안사립학교에는 학생들이 넘쳤다. 1920년
중반에는 멀리 제주도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와 약 15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15
이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토지소유권의 확보와 학교설립은 소안도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궁방전의 소유권을 가짐으로써 소안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일굴 땅을 얻었다.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일제의 농장과 지주들이 높은 소작료와 갖은 부역으로
소작민들을 괴롭혔다면, 소안도에서는 땅을 가진 자작농이 늘어났다. 더구나
이 자작농들은 13년 동안의 오랜 소송을 통해 땅을 얻었기 때문에 공동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달은 농민들이었다.
농민만이 아니라 어민들도 섬 지역의 특성상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바다에
경계선을 긋고 각자의 소유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어장은 공동체의 토의와
회의를 통해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촌에서는 마을총회와
어촌계 총회를 통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이 결정되고 있다. 소안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김양식으로 유명한데, ‘단’이라는 특유의 공동어장을 운영했다. 자연산
톳이나 미역 등을 채취하고 공동분배하는 조직인 ‘단’은 한 마을 내에 같은
수의 가구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공동성은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구조를 만들었다(정근식․김준 2004).
배움과 생활의 공동체가 가진 중요성은 소안사립학교 출신 활동가들이 조직했
던 단체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14년에 송내호가 만든 수의위친계(守義爲親
契)는 완도만이 아니라 전라도, 경상도까지 조직망이 이어진 전국 조직이었다.
의를 지켜 서로 가까이한다는 그 이름부터가 공동체성을 반영하고, 계라는
전통적인 생활조직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수의위친계는 특별함을 지녔다.
1919년 3․1운동이 지난 뒤 1920년 4월에 송내호, 정남국 등은 마을주민
100명을 회원으로 모아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를 만들었다. 이 배달청년회
는 마을자치단위였던 리(里)를 중심으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1924년에는 소안노동대성회(所安勞動大成會)가 결성되어 공동경작계와 공
동어장계를 만들어 공동노동에 힘썼다. 그리고 독서회와 강연회를 열고 생산조합
방식으로 협동노동을 실시했다. 노동대성회는 당시의 사회주의노선과 달리
천도교 노선의 조선농민사가 추진하던 공동경작계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특별
하다.
116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이렇게 소안도는 전통적인 마을단위의 조직형태를 근대적인 사상과 결합하는
실험장이었다. 계급노선과 공동체노선이 서로 어울렸고 그 속에서 강력한 연대의
힘이 만들어졌다. 완도 주변에서 조직된 ‘필연단’(1925년 창립)와 ‘살자회’(1928
년 창립)는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인 진화법칙에 의하여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일치단결로써 민중운동의 충실한 역군이 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우리는 신사회건설의
속성을 도모함”이라는 강령을 결의했다. 아나키즘의 주요 노선인 상호부조가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의 주요한 강령이 된 것은 이런 어울림과 연대를 반영했다.
그리고 전남 지역과 잦은 교류를 갖던 사상단체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함께
수용했던 서울청년회였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일본 경찰의 대응에서 읽을 수 있다. 1928년
소안도의 활동가 최평산 외 12명이 구속되었는데, 그 심리 과정에서 일제 경찰은
“약 100명의 회원으로 배달청년회를 조직하고 서울에 있는 모모 청년회와 모든
단체 등과 연락을 취해 소안도에다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그 섬 하나를 완전한
공산주의 이상향을 만들고자 계획하고 착착 그 운동을 실행하면서 한편 면장배척
의 봉화로부터 경관에 대한 불언동맹을 조직 실행하고 또 소안학교를 설립하여
도민에게 공산주의적 교육을 실시하였는바 대정 13년에는 도민 거의 전부인
800여명을 회원으로 하고 그 후에도 남자는 청년회에서 여자는 여성회에서
공산주의의 역사상을 선전 실행하여 소안도 안에서는 경찰과 군의 행정이 잘
시행되지 않을 지경까지 되었던 사건이라는바 실로 근래에 드문 조직적 공산주의
운동”(《조선일보》1928년 10월 18일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공동체에서 연대는 의식적이고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자들을 찾는 방법 중 하나가 ‘누가 회의했다’였다고 한다. 사실 회의는
사회주의자들의 특징이 아니라 마을공동체의 특징이었다. 촌회나 동회, 계 등
여러 공동체 조직에서 회의는 일상화되어 있었고 서로의 삶이 얽혔다. 그 속에서
연대는 자연스러운 힘이었다.
그리고 한반도 밖의 북만주에서는 잠깐 동안 아나코-코뮨주의를 따르는 공동
체가 만들어졌던 적이 있다. 무장항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를 이끌던 김좌진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17
(金佐鎭)이 김종진(金宗鎭), 유자명(柳子明), 이을규(李乙奎) 등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가 만들던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24년 4월에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1927년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
1929년 7월 북만주 해림(海林)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크로포트킨의 농업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농촌
을 건설하려 했고 항일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와 협동전선을
펼치려 했다(오장환 1998, 150).
이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노작(共同勞作)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영농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는 당면강령을 세우고
자신의 뜻을 실현할 공동체를 찾았다. 때 마침 당시 신민부는 무장투쟁노선을
주도하는 군정파와 일상적인 정착을 시도했던 민정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군정파
를 주도하던 김좌진이 정착과 투쟁을 병행하기로 결심하고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1929년 여름에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되고 이들은 상호부조
와 자유연합이라는 아나코-코뮨주의의 조직원리에 따라 자치적인 농민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한족총연합회는 자신이 만주에 사는 한국 교민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항일구국의 완수를 위하여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족총연합회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①교포들의 집단정착사업, 교포의
유랑 방지 및 집단부락 촉성, ②영농지도와 개량․공동판매․공동구입․경제적
상호금고 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사업, ③교육․문화사업, 즉 소학․중학
의 설립운영, 각지조직의 연락 및 교포들의 소식․교포들의 생활개선․농업기술
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발행, 순회강좌․순회문고설치, 성인교육과 장학제
도, ④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군사훈련, ⑤중학출신자로써 군사간부양성
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운영, ⑥항일게릴라부대의 교육 훈련․계획지도를
맡으며, 지방치안을 위한 지방조직체의 치안대의 편성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
118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설치.”(이을규 1963, 90~91) 실제로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도정
하기 위해 직접 정미소를 차리고 위탁판매까지 담당했다.
김종진은 “농민들의 조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자신들이 필요에
의하여 상호단결하여 맺어져야한다는 것”이라고 봤고 한족총연합회를 지도자
의 조직이 아니라 “농민자신의 자의적인 조직”으로 만들려 했다. 김종진은
“주민자신들의 생활을 위한 공동체로서 그들의 경제적 협력기구를 조직하고
그것을 중심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하는 농촌자치체”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북만주의 지배권을 다투던 화요파 만주총국의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
1월 이후 한족총연합회의 핵심인 김좌진과 김종진, 이준근(李俊根), 김야운(金
野雲) 등을 연이어 암살하고5)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한족총연합
회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영향을 받아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해방 이후에 농민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46년 3월 10일에 조선농촌자치연맹(朝鮮農村自
治聯盟)은 “①오등(吾等)은 자주 자치적 생활의 실천으로 농촌의 조직화를
기함. ②오등은 농촌의 합리적 경영을 위하여 공동경작, 생산수단 및 시설의
공동화를 기함, ③오등은 농공의 균형 발전을 위하여 농촌 실정에 적합한 공업
시설의 완비를 기함, ④오등은 농촌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협동조합적 기관의
철저 보급을 기함, ⑤오등은 비경제적 제 생활양식을 개선하여 생활의 과학화를
기함, ⑥오등은 우리의 교육급 문화기관의 완비를 기함, ⑦오등은 오등의 보건을
위하여 후생시설의 충실을 기함, ⑧오등은 상호부조적 윤리관의 실천에 의하여
국민도덕의 앙양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 조선농촌자치연맹의 기원(祈
願)은 그 강령을 이런 마음으로 노래했다. “사람살이의 터닦은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땀과 눈물은/ 온 사람의 겨레의 살터를 닦았다. 사람들의 온 겨레를
길러내인 그대들이여/ 그들의 땀과 눈물은/ 온 세상을 입히고 먹이었다. 터닦고
5) 당시 직접 그 일에 뛰어들었던 아나키스트 정화암(鄭華岩)은 “영안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은 해림(海林)을 근거로 한 신민부나 그 후의 한족총연합회가 자신들의 활동과 사상전파
에 지장을 주는데다가 한족총련이 차츰 기반을 굳혀가자 이에 겁을 먹고 김좌진을 살해한
것”이라 주장한다(정화암 1992, 98).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19
길러내인 그대들이여/ 이 자유의 씨를 그터에 뿌리고 가꿔라/ 온 세상의 겨레는
그 가을을 기다린다”(이정규 1974, 173~213).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해방 이후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자치․자급의 농민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들이 계속 있었지만 그
시도들은 국가의 개입과 자본주의의 침투로 좌절되었다. 그러니 공동체는 자연적
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힘으로 파괴되었다. 그런 경험을 반복해
왔기에 지금 우리에게 공동체는 국가보다 훨씬 낯설 뿐 아니라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국가를 통하지 않고 다른 대안을 사유하지 못하고 국가를
통한 것만이 현실적이라 믿는다.
VI. 결론:
지금 이곳의 농민공동체와 아나키즘의 의미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농민공동체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한국사회
에서 농촌은 ‘식민지 속의 식민지’인 이중의 식민지라 얘기될 수 있다. 한국이
아직도 사상과 이념의 식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도시가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촌은 이중의 식민지이다. 이중의 식민지
이기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손쉬운 과제일 수 없다.
지금 농촌의 실제 모습은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와 같은 TV 프로그램에
서 묘사되는 낭만보다 한미FTA라는 무시무시한 파국을 눈앞에 두고 떠날 수도
남을 수도 없는 무기력함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제 인구의 7% 정도로 줄어든
농민들이 세상의 능동적인 주체로 나서기는 어려운 듯하고 그들이 꿈꾸던 세상
역시 이미 옛날 이야기로 변해버린 듯하다.
그러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만 농민이 아니다. 지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는 농민이었듯이, 지금 도시에서 뿌리를 잃고 헤매는 존재들은 ‘미래의
농민’들이다. 농촌이 몰락하면 그 다음은 소도시가, 식민지의 대도시가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과거의 농민들이 협동과 관계라는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120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면, 미래의 농민들은 홀로 고립된 채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먹고 입고 자는
곳, 어느 하나 안심할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우리가 직접 짓고 만드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대안을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대안을 살아야 한다.
혼자서 살기는 어려우니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니 농민공동체는 가능성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농업은 단순히 1차 산업으로
분류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농업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먹거리를 스스로 생산하지 못한다면
먹거리를 수입해야 하고, 그럴 경우 만일 수입이 안 된다거나 수입품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가난한 사람들은 먹지 못하게 되고 살아남을 수 없다. 먹거리
를 자급하지 못하는 나라는 먹거리를 공급하는 나라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농업의 중요성은 단순히 ‘식량안보’를 넘어 ‘식량주권(food sovereignty)’
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과거의 농민공동체가 저항의 기반이자 미래의 이념을 배양하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현재의 온갖 위기를 헤쳐가려면
우리는 다시 삶을 꿈꿀 수 있는 기반을 찾아야 한다. 무서운 속도로 식민화
과정을 밟아온 한국사회가 식민성에서 벗어나 자아를 되찾으려면 다시 공동체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아나키즘 사상이 이런 농민공동체 형성에 미친 영향과 공동체
질서의 정치적 측면을 조명하려 했다. 분명히 식민지 시대 아나키스트들이
꿈꿨던 농민공동체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가 아니라 ‘작게 나눠진 농민공동
체들의 연방주의’라는 또 다른 대안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치열한 노력에도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은 그 이상을 좌절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하지만
실패했다는 이유로 그 노력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들의
사상과 실천을 정치사상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은 남과 북이 걷지 않았던
제 3의 대안을 뒤늦게나마 조명함으로써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인 길을 찾는 것이라 얘기할 수 있다.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과 농민공동체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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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정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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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6일
2010년 12월 15일
2010년 12월 19일
2010년 12월 21일
126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This essay is the study of anarcho-communism and peasant community during
colonial period. Kropotkin criticized Statism and capitalism, and he suggested federalism
and small garden city based on peasant.
Korean society was in accorded with anarcho-communism, because it had mutual
aid tradition and cooperative labor culture. And then anarcho-communism was getting
more mainstream of social movement. In the darkness of Japanese period, the many
peasant communities struggle against coercive colonial power. 3.1. Independence
Movement is the typical instance of peasant movement.
I notice the diversity of social movements during that period and focus on its variation.
Though anarcho-communism was the original thought, there are many mixtures in
peasant communities. In this paper, it is very important to examine how anarchism
interact with other ideologies.
Key words: anarchism, peasant community, peasant, anarcho-communism, coope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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