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서 동 일*
연 구 논 문
1. 머리말
2. 경성에서 전해진 悲報와 지방유림의 반응
3. 김황 일행의 경성에서의 3·1운동 경험
4. 독립의 개념에 관한 신구 청년의 논쟁
5. 맺음말
1. 머리말
최근 학계의 3·1운동에 관한 주요 연구경향 중 하나는 서울 중심의 시각
에서 벗어나 개별 현장(지역) 중심의 연구가 증가하고,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라는 거시적 담론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거대한 역사흐름과 조우한 인간
내면의 미묘한 흔들림을 관찰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3·1운동에 관한 허상을 걷어내고 실재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1)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동안 외면했던 지방유림의 일기에 좀 더 많
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
1) 서동일, 「3·1운동의 연구사적 검토」, 3·1운동 및 5·4운동에 대한 사학사적 검토(한
국사학사학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2018.9.15,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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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은 그동안 3·1운동에 관한 주요 담론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들의 동
선은 3·1운동의 ‘혁명성’과 ‘근대성’에 집중하는 연구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
지 못했다. 그러나 유림은 3·1운동을 매우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지방 만세
시위에서 지도력을 발휘한 주요 토착세력이었다. 그들은 고종의 급서 소식을
접하자 깊은 충격에 빠졌고, 인산을 지켜보기 위해 무리를 지어 상경했으며,
1919년 2월 말과 3월 초 경성의 대규모 인파2)를 형성한 장본인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경남 산청의 청년유림 金榥(1896~1978, 호 重齋)이 1919년
3~5월 스승 郭鍾錫의 지시에 따라 경남 거창과 경성3)을 오가는 과정에서 남
긴 「己未日記」(1919.2.13~5.29)를 살펴보려고 한다. 「기미일기」를 통해 지방
인의 눈에 비친 3·1운동의 형상을 확인하고 지방유림이 독립운동에 접근하
는 초기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지금까지 「기미일기」는 주로
유교계의 독립청원운동인 巴里長書運動을 분석하는데 활용되어 왔다.4) 하지
만 이 일기에는 파리장서운동뿐 아니라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경성과 지
방의 동정이 매우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는 스승 곽종석으로부터 독립운
동에 관한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김황이, 보고 듣고 실행한 것들을 자세히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기미일기」에는 김황이 경성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가 다수 실
려 있다. 그중에는 김황이 수세적 위치에서 나눈 대화도 적지 않다. 이 일기
가 여타 유림의 일기에 비해 각색이 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만큼 3·1운동을 바라보는 지방인과 청년유림의 관점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
2) 고베신문은 3월 2일까지 경성에 운집한 군중의 수를 10만 명으로 추정했다(新戶新聞,
1919년 3월 2일, 「京城に集る者十萬」).
3) 이하 본문에서, 필자는 오늘날 서울로 불리는 지역을 ‘경성’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경성’
을 ‘서울’로 기재해도 맥락상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으로 기
재한 것은 식민지기라는 미세한 환경의 차이를 고려하려는 것이다. ‘경성’은 단지 지방과
대비되는 용어로서의 지역명이나 강제병탄 이후 변경된 행정구역 명칭을 가리키는데 그
치지 않고, 전 시대와 달라진 식민지 환경의 총집산물로서의 지역을 형상화한 표현으로
사용한 것임을 밝힌다.
4) 대표적인 연구는 許善道, 「三一運動과 儒敎界」, 三一運動50周年紀念論集, 東亞日報社,
1969이다.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43
다. 이런 점에 유념하여 본 논문에서는 가급적 원문을 많이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일기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분석대상을 한정했다. 파리
장서운동에 관한 부분은 이미 선행연구에서 충분히 다뤄졌으므로 언급을 최
소화하였다. 따라서 김황이 귀향(1919.3.9)한 이후 진행한 파리장서운동에 대
해서는 약술하기로 한다. 즉 유교계의 독립청원운동이 발생하기 전에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를 위주로 살펴보고자 한다.5)
2. 경성에서 전해진 悲報와 지방 유림의 반응
1) 일기의 사료적 가치
「기미일기」는 얼마나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우선 일기의 작성자와 기
록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일기의 작성자인 김황은 경남 산청에 거주하는 촉
망받는 청년이었다. 아버지 金克永은 조선 말기 3대 유학자의 한 명인 李震相6)
에게 배웠고, 스승 곽종석도 이진상의 뛰어난 여덟 제자[洲門八賢] 중 최고로
손꼽힌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김황은 이황-李象靖-李震相으로 이어지는 영
남 퇴계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스승 곽종석은 1903년 고
종의 부름을 받고 임금을 독대[野服入對]한 뒤 經筵官·書筵官에 임명되는 등
고종으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영남유림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김황은 소년시절부터 경남 거창 茶田(현 거창 伽北面 中村里)에 있는 곽종
석 집을 왕래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김황의 수학과정은 「茶上所聞」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1912년 제자가 된 이래7) 매년 한 차례 이상 곽종석을 찾아
5) 한편 본문에서는 날짜를 모두 양력으로 기술했다. 「기미일기」에는 음력으로 기재되어 있
지만, 날짜 간의 혼란을 막고 3·1운동의 추이와 비교해 보기 위해 이를 양력으로 변환하
였다.
6) 玄相允, 朝鮮儒學史, 玄音社, 1986(재판),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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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8) 특히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2월 15일
(음 1.15)부터 곽종석 집에서 기거하며 곽종석의 조카 郭奫9)과 함께 병약한
스승을 대신해 온갖 사무를 처리하고, 2월 26일에는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곽윤 등과 함께 상경했다.
여기서 필자가 3·1운동에 관한 유림의 기록 중 특히 김황의 일기에 주목
하는 이유는 그가 1919년 2~4월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그는 스승의 지시에 따라 파리장서운동의 주요 연락책으로 활동했고,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경성과 경남 일대를 왕래하면서 3·1운동의 현장을
목격하였으며, 당시 보고들은 내용을 꼼꼼히 기록했다. 무엇보다 그는 유림
이기 전에 바깥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기미일기」는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을 해방 이후 회고기의 형태로 짧게
정리한 것이 아니라 당대에 일기의 형태로 자세히 남겼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 기록이 식민지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지 않고 남
아 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일기들과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실감할 수 있다.
「기미일기」는 김황이 2월 13일(음 1.13)부터 5월 29일(음 5.1)까지 3개월
17일간 상경했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순한문체로
기록한 것이다. 분량은 활자본 문집을 기준으로 39쪽이고, 글자수는 17,000여
자에 달한다. 일기의 제목은 원래 ‘日記’인데, 다른 해의 일기와 구분하기 위
해 ‘己未’라는 간지를 붙였다.10) 4월 25일(음 3.25) 이후의 기록은 내용이 매
7) 郭鍾錫, 俛宇集 4(亞細亞文化社, 1984), 「俛門承敎錄」, 838쪽.
8) 金榥, 重齋先生文集 5(保景文化社, 1988), 권39, 「茶上所聞」, 59~60쪽.
9) 郭奫(1881~1927, 호 大淵)은 곽종석의 형인 郭珽錫의 외아들이다. 1919년 2월 26일 김황
과 함께 숙부 곽종석의 대리인으로 상경해 파리장서운동의 기획 단계부터 깊이 관여했
다. 곽종석의 대리인이라는 곽윤의 독특한 위상은 1919년 2월 말 김황과 곽윤 일행이 경
성에 도착했을 때 거사에 관심을 보인 인물들이 이 ‘조카’(곽윤)부터 찾았다고 한 데에서
도 알 수 있다. 한편 곽윤은 1925년 김창숙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
하기 위해 입국했을 당시에도 그를 적극 도왔다가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피신한 일
이 있다. 문집으로 謙窩遺稿(1933)가 남아 있지만 내용은 매우 소략하다. 최근 현손
곽상윤을 통해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문서를 조사했으나, 독립운동에 관한 문
건이나 연대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45
우 소략하고 압축적이며, 남에게 전해들은 얘기 위주이다. 김황이 파리장서
운동의 주요 연락책이 되어 여러 곳을 왕래하며 활동하느라 구체적인 기록을
남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미일기」에 기록된 내용은 대부분 3·1운동이나 파리장서운동과 관련된 것
이다. 분량만으로도 이 일기는 3·1운동 연구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
분하다. 이 일기에는 지방 유림의 고종 죽음에 대한 평가와 상복 착용 여부에 관
한 깊은 관심, 인산에 앞서 지방에 떠돌던 각종 소문, 인산을 참관하려는 지방인
의 심리, 국장예행연습 광경, 上京 유학생들의 근황, 독립선언의 상황과 선언서
의 내용, 만세시위의 상황과 일본 군경의 탄압 광경, 고종독살설의 소문, 返虞祭
광경, 인산 전후 유림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민한 움직임 등이 자세히 실려 있다.
다만 이 일기가 포괄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김황과 곽윤은 곽종석의 지
시를 받아 동반 상경했지만, 곽종석으로부터 대리인의 권한을 위임받은 인물
은 곽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황이 남긴 일기의 가치가 저감되는 것은 아
니다. 그는 곽윤과 함께 상경하여 경성에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매우
세세하게 기록했고, 곽윤의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 고종의 급서 소식과 지방 유림의 반응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사망했다.11)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더욱
이 이 소식은 사망 이틀 뒤인 1월 23일자 신문에 1월 22일 사망한 것으로 발
표되어12)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평소 고종의 건강에 뚜렷한 이상이 없었던
까닭에 사람들 사이에선 자결설, 독살설 등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13)
10) 김황의 문집에는 「기미일기」(1919) 외에도 「侍病日記」(1939~1941), 「乾乾錄(乾)」(1967~
1973), 「乾乾錄(坤)」(1974~1977), 「乾惕錄」(1978) 등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11) 李王職 編, 日誌, 191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MF16-111.
12) 朝鮮總督府官報, 1919년 1월 23일 號外, 「彙報」; 每日申報, 1919년 1월 23일, 「李太
王殿下 薨去」.
13) 金龍基, 「三一獨立運動과 巴里長書事件에 對하여」, 文理大學報, 釜山大 文理大學, 1959,
63쪽; 李昇燁, 「李太王(高宗)毒殺說の檢討」, 二十世紀硏究 10, 2009, 6~11쪽.
4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유림은 충격에 빠졌다. 강제병탄 이후 10년간 망국의 감정은 유예되어 있
었다. 그러나 ‘왕조시대’의 실질적 ‘마지막 임금’인 고종이 사망하자 망국은
비로소 현실로 체감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지방의 유교지도자들은 長考에
들어갔다. 그들은 망국을 막지 못한 신하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하였으
며, 전통사회의 지도자로서 고종의 생애에 대한 평가, 상복의 착용 여부와 착
용 기간, 인산 준비, 독립운동 참여 여부 등에 대한 입장, 향촌사회에 대한
권고사항 등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고종의 사망 소식을 접한 유림은 우선 유교경전과 國制가 제시하는 예법
에 따라 행동했다. 지방에서는 유림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 또는 官의 주도로
고종의 유해가 있는 경성을 향해 곡을 하는 望哭禮 또는 ‘哀悼會’가 널리 행
해졌다.14) 유림과 사족은 상복에 준하는 복장을 갖추려고 했다. 인산이 임박
하자 임금의 마지막 ‘행차’를 지켜보기 위해 상경 인파가 증가했다. 이들은
너도나도 흰색 갓인 白笠을 갖추려고 애썼다. 이로 인해 백립의 품귀현상이
빚어졌다. 백립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임시방편으로 黑笠에 흰색 종이를
붙인 紙塗笠을 사용했다.15)
유교지도자들은 인산이 임박한 2월 하순까지 고종의 죽음에 대한 평가와
인산 참관 여부 그리고 상복 착용 여부에 대해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각지에서는 유교지도자들에게 여러 가지 문의가 빗발쳤
다. 상복 문제와 관련해서는, 고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견, 고종은
조선인 모두의 임금이므로 정상적인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 상복을 입
는다면 3년 또는 1년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 고종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社
稷의 죄인이므로 그를 위해 상복을 절대 입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無服論)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런 가운데 경남 산청의 유림 김극영은 2월 13일 아들 김황을 통해 곽종
석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5백년 종묘사직이 영원히 끊길 위기에 있
14) 李廷銀, 「3·1운동의 배경」,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47, 2001, 319쪽.
15) 金榥, 重齋先生文集(附錄) 13(千字族譜社, 1998), 「己未日記」, 음력 1월 15일, 9쪽; 每
日申報, 1919년 2월 14일, 「市場에서 白笠 絶種」.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47
는데 곽종석이 유림을 대표해 덕수궁 앞에 가서 한 번 울부짖고 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16) 2월 15일 김황이 곽종석 거처가 있는 거창 다전에
도착했다. 이 날을 전후해선 김극영 외에도 宋鎬坤(합천), 朴應煥(산청), 鄭載
星(거창, 寢郞), 趙貞奎(함안), 沈鶴煥(합천), 張錫英(성주), 李泰植(의령), 金
炳一(함양) 등이 상복의 착용 여부 및 착용 기간, 인산 참가를 위한 상경 여
부, 독립운동 계획에 관해 문의했다.17) 곽종석은 고심 끝에 직접 상경하지
않고 대신 조카 곽윤을 보내 경성의 사정을 살피도록 했다.18)
2월 19일 곽종석의 옛 제자인 尹忠夏(1855~1925)가 곽종석을 찾아와 유교
계의 독립청원운동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궁중의 사정, 고종의 ‘시해’
소식, 경성의 국장 준비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
고 있는 국제평화회의 소식을 전했다.19) 이 회의가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고, 이에 호응해 조선의 여러 단체가 독립운동 계획을 세우고 있
는데 반해, 유독 유림만 반응이 없다고 불만을 표했다. 그러면서 경성의 유림
이 별도로 국제평화회의에 ‘문서’를 전달할 계획을 세웠으며, 곽종석을 대표
로 추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20) 곽종석은 반신반의했지만, 인산일에 맞춰
‘젊은 아이’를 보내 상의케 하겠다고 답했다.21) 곽종석으로서는 독립운동에
참가할 명분을 얻은 셈이었다.
윤충하의 거창 방문은 경성 지역 종교·사회단체의 독립청원운동에 자극
을 받은 유림세력이 별도의 독립청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날 윤충하는 홀로 거창을 방문했지만 개인 자격이 아니었다. 후술하겠지만,
곽종석은 윤충하측과 독립청원운동의 추진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16) 「己未日記」, 음력 1월 13일, 5~6쪽. 김황도 곽종석에게 경성에 가서 총독과 담판을 벌이
거나 덕수궁 앞에 가서 한 번 부르짖고 오기를 권유했다(「己未日記」, 1월 15일, 11쪽).
17) 「己未日記」, 음력 1월 13일, 7~8쪽; 1월 15일, 10쪽, 1월 17일, 15쪽; 1월 18일, 16쪽; 1월
24일 22~23쪽.
18) 「己未日記」, 음력 1월 15일, 11쪽
19) 重齋先生文集(附錄) 13, 「記巴里愬書事」, 음력 1월, 76쪽.
20) 「己未日記」, 음력 1월 19~20일, 18~19쪽.
21) 「記巴里愬書事」, 음력 1월, 77쪽.
4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2월 말 곽윤을 경성에 파견했다. 이 때 곽윤은 윤충하를 만난 자리에서 숙부
(곽종석)가 ‘이들’과 함께 일하기 어렵겠다는 말을 꺼냈다.22) 여기서 ‘이들’이
란 「기미일기」에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 경성에 본
부를 두고 있던 유림단체인 太極敎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윤충하는 1909년 태극교 經義部長, 1920년대 초 ‘회장’을 지냈고, 1921년 태
평양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태극교 대표로 서
명할 정도로 오랜 기간 태극교의 고위 간부로 활동했다. 또한 태극교는 1921
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도래하고 일본정부와 총독부가 고종의 位
號를 ‘李太王’으로 정하려 하자 전통적인 예법대로 ‘高宗太皇帝’로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끝내 관철시킬 정도로 고종의 마지막 ‘충신’을 자처했다.23)
한편 곽종석은 인산이 임박하자 고민 끝에 고종을 위해 三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는 고종을 망국을 초래한 군주로 간주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고종의 ‘억울한’ 죽음을 갚기 위해 유림이 집단적
인 행동에 나설 수 있음을 은연중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상복에 대한 곽종석
의 입장은 鄭升謨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히 담겨 있다.
제가 생각하건대 우리 大行皇帝는 임금으로 백성에 임하신 지 40여 년이
요, 무릇 먹는 땅과 입는 옷이 그 覆育을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비록 時
運이 屯蹇을 만나 보필하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內修外攘의 실질을 다하지
는 못하였으나 그 仁心, 仁聞이 진정 이미 輿誦에까지 적시었습니다. … 家
國이 허무하게 된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망국의 임금[亡國之君]’
이라는 네 글자로 평가해서는 불가합니다. … 신민의 아픔이 평일에 배가 되
니 무릇 彝性이 있다면 어찌 감히 편안히 있고 말겠습니까? … 진실로 나라
를 팔고 은덕에 배치하는 자가 아니라면 임금을 위한 상복[君服]을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입는다면 임금을 위한 斬衰 3년은 성인이 정한 제도이
니 올리고 내리고를 용납할 것이 없습니다.24) (밑줄-인용자)
22) 각주 65) 참조.
23) 이상, 윤충하의 태극교 설립과정 및 간부 이력, 1919년 전후 활동에 대해서는, 서동일, 「한말~일제하 改新儒林 尹忠夏의 계몽운동과 태극교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4,
2005 참조.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49
곽종석은 백성들이 고종 집권 40년간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고, 대한제국
멸망의 책임도 고종에게 있지 않으므로 고종을 망국의 임금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또한 상복을 입는다면 당연히 부모와 임금에 대한 상복인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곽종석의 입장은 점차 확산되어 유교계의 주된 입장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학문과 의리의 입장을 놓고 평생 대립관계에 있던 전우가 곽종석의 입장을
지지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전우는 “太皇帝가 40년간 臨御하셨고 나라를
잃은 것이 또한 그 몸에 있지 않으니 어찌 상복을 입지 않겠는가?”라는 표현
에 대해 ‘忠厚하다’라고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25)
3. 김황 일행의 경성에서의 3·1운동 경험
1) 인산 이전의 3·1운동 경험과 고종독살설
김황 일행은 2월 26일 경남 거창을 떠나 경성으로 향했다. 이들의 상경 및
귀성과정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당시 인산을 구경하기 위해 상경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김황 일행도 몇 명과 함께 무리를 지어 상경했다.
일행은 총 6명이었다.26) 곽종석의 대리인인 곽윤과 김황, 김황의 형 金楗, 동
문 金亨來와 金誠來 그리고 신원미상의 金某(字 禧吾)였다. 이들은 상경 도
중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경북 知禮의 한 주막에서는 같은 목적으로 거창,
안의, 삼가에서 올라온 수십 명의 지인들과 반갑게 해후하기도 했다. 이어 김
황 일행은 김천역까지 도보로 이동한 뒤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24) 郭鍾錫, 俛宇集 3, 俛宇先生文集 권117, 「答鄭致賢」, 397상a~b쪽.
25) 吳震泳, 石農集 권17, 「服辨辨」, 31b쪽.
26) 「己未日記」, 음력 1월 26일, 23쪽.
5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일자(양력) 이동상황
2.26 거창 → 知禮 → 院基店
2.27 김천역 → (기차) → 경성 남대문
… …
3.07 경성 남대문 → (기차) → 김천역 → 光川店
3.08 長橋
3.09 거창(곽종석에게 보고)
<표 1> 김황 일행의 상경과 귀성과정 (2.26~3.9)
김황 일행은 2월 27일 밤 경성 남대문 밖에 도착해 주변 여관에 투숙했다.
본격적인 일정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2월 28일 일행 중 곽윤은 濟院(廣
濟院?)으로 갔고,27) 김황 등은 諫洞의 林有棟(1900~1950, 字 乃綱)과 三淸洞
의 田壎을 찾아갔다. 김황은 두 사람 모두 자리에 없어 만나지 못하고 여관
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再從姪壻 趙萬濟가 여관으로 찾아왔다. 김황은 조만
제의 권유로 종로로 나가 국장예행연습[習儀]을 구경했다.
밤이 되자 花洞 여관으로 임유동과 조만제가 찾아왔다. 간단한 인사를 나
뉜 뒤 이들은 긴 논쟁에 빠져들었다. 대한제국 멸망의 원인, 자국사에 대한
인식, 君權과 民權의 관계를 둘러싼 열띤 논쟁이었다.28) 이후 김황 일행은
이들을 포함해 경성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김황이 2월 28일부터 인산
전날인 3월 2일까지 만난 인물은 <표 2>와 같다. 이를 통해 김황 일행이 경
성에서 간접적인 경로로 얻은 정보의 출처를 가늠할 수 있다.
27) 곽윤이 왜 단독으로 濟院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없었다.
28)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일자 성명 출생(거주) 김황과의 관계 직업, 종교 행적
2.28 趙萬濟경남 함안 再從姪胥(학생) 習儀 관람, 논쟁
2.28 林有棟경남 거창 후배
儒學, 중동학교
학생
논쟁
3.01 李俊錫
곽윤의 상경목적 문의, 독
립선언 임박 예고
<표 2> 김황이 인산 이전 경성에서 만난 사람들 (2.28~3.2)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51
3월 3일에 거행될 인산을 2~3일 앞두고 경성 도처에서는 심상치 않은 분위
기가 감지되었다. 3월 1일 김황은 鄭祥煥을 만났다. 그는 주변사람들을 물리
친 뒤 김황에게 인산일에 무슨 사건29)이 발생할 수 있으니 바깥출입을 삼가
라고 조용히 전했다.30) 거사의 주체는 알 수 없으나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
가 속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황이 천도교의 계획인지 묻자 정상환은 그
렇지는 않다고 하면서 비밀 유지를 당부했다.
같은 날 韓景允이 경성에 나도는 소문을 전했다. 인산일에 백립을 쓴 사람
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暴砲’를 발사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31) 한경윤은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하지는 못 하겠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그만큼 경성에서는 인심이 흉흉한 가운데 며칠 뒤 거행될
인산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긴장감이 팽배해 있
29) 여기에서 인산일에 발생한다는 ‘사건’이 후술할 고종독살설과 관계가 있는지는 정확히 파
악되지 않는다.
30) 「己未日記」, 음력 1월 29일, 28쪽.
31) 「己未日記」, 음력 1월 29일, 29쪽.
(+3.02)
韓昶東
韓大愚
경남 삼가 (동향인)
(+3.02) 李殷赫경남 진주 친구
鄭祥煥인산일 거사 예고
韓景允(동향인)
申用九경남 단성 같은 여관 투숙객 천도교 독립선언서 전달
宋在根경남 산청 같은 여관 투숙객 경성 학생 경성 시위소식 전달
3.02 불명 조선독립신문 전달
郭鍾烈(동향인)
田壎경성 김황에게 책 판매 서점주인
유교계 독립선언 동참 주
선, 유림의 처신 조언
金昌鐸再從姪
金兢林再從兄
金昌淑경북 성주 族姪, 선배 유학 우연히 상봉
閔鏞鎬
전 승지, 여흥부
대부인의 從弟
고종독살설 전달
※참고: 일자의 ‘+’는 해당 일자에도 재차 만났음을 의미.
5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었음을 보여준다.
독립선언은 이미 3월 1일 오전부터 거리에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통해 예
고되었다. 이에 앞서 곽윤은 李俊錫이 전한 이야기를 김황에게 들려주었다.
3월 1일 오후 3시에 독립선언이 있을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곽윤과 이준석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이준석 : 무슨 일로 멀리서 왔는가?
곽 윤 : 인산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준석 : 일반 백성[士庶人]이 인산에 나아가는 것이 옛날에 그런 例가 있
었는가?
곽 윤 : 오늘날은 한결같이 前例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준석 : 어떤 이는 영감(곽종석을 가리킴-인용자)께서 이번에 城中에서
장차 일이 있어 公을 代表로 삼아 信章을 가지고 오게 했다는데,
무슨 말인가?
곽 윤 : 진정 헛소문이다. (이준석이 재삼 캐물었으나 대답을 바꾸지 않다)
…
이준석 : 우리나라가 독립한다는 뜻으로 손병희 등 여러 분들이 문서를 작
성하고 선언을 하는데 그 시기가 오늘 오후 3시[未時]에 있다. 처
음에는 단지 문서를 작성하고 낭송함으로써 ‘國民大會’를 알리며
順하고 소동은 없게 하였으나, 이제 물정을 보니 이를 보장키 어
려울 것 같다. 각 학교 학생의 학생 중 이를 미리 안 자들이 모두
등교하여 기다리지 않고 급히 추진한다고 하니, 일을 심하게 해
칠 것이다.
곽 윤 : 독립을 바랄 조짐이 있겠는가?
이준석 : (턱을 끄덕이며) 우선 알기 바란다.32) (밑줄 및 두 인물의 발언
부분 편집-인용자)
위의 대화에 등장하는 이준석이란 인물은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그가 곽
윤에게 접근한 것은 곽윤이 곽종석의 대리인 자격으로 상경했다는 소문과 관
계가 있는 것 같다. 곽윤의 임무가 한용운의 제안에 따라 곽종석의 독립선언
32) 「己未日記」, 음력 1월 29일, 29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53
서 서명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2월 중순 윤충하의 제안에
따라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
다. 다만 곽윤이 후자의 임무를 띠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김황 일행은 이준석의 당부에 따라 3월 1일 오후 바깥출입을 삼갔다. 따라
서 이날 경성에서 벌어진 사건은 오로지 전언에 의존해 파악했다. 이 전언 가
운데에는 독립선언 광경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황은 독립선언의
기획배경, 독립선언의 준비과정과 역할분담, ‘민족대표’의 독립선언과 체포과
정을 당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특히 독립선언의 배경을 파리평화회의의 및
일본유학생의 기획과 연결시킨 소문을 접했다. 일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巴里에서 平和會를 개최하여 대체로 옛날에 나라가 있었던 자들이 모두
속박을 제거하고 獨立自主[獨主]케 하니, 韓人으로 안창호·이승만이라는 자
가 왕래하며 운동을 하였고, 또 일본에 유학한 자 100여 명이 血書로 널리
알리고 옛 서울에는 오직 천도교가 가장 많은 수를 모집할 수 있다고 여겨
드디어 손병희에게 편지를 남겨 같이 거사를 시작하는데, 손병희가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으나 뒤에 마침내 여러 모임[會]과 연락하고 편지를 작성해 비밀
리에 수만 장을 인쇄했다. 먼저 1통을 가지고 태화관에 가서 2층 누각 위에
國民大會를 설치하고 그것을 朗諭하였다. 그리고 다시 나머지를 가지고 경성
부 안의 큰 거리에 뿌렸다.33)(밑줄-인용자)
즉 이 전언은 3·1운동의 기획주체로 일본유학생을 지목했다. 파리평화회
의가 개최되어 약소민족 독립의 계기가 마련되자 안창호·이승만 등 미주 한
인사회의 지도자들이 발빠르게 움직였고,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유학생들이
손병희에게 ‘血書’를 보내 교세가 강한 천도교의 협력을 유인하여 독립선언을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천도교측 최린이 도쿄 유학생 宋繼百을 통해
2·8독립선언 추진세력과 의견을 교환하고 자극을 받았다는 사실34)은 잘 알
려져 있다.
33) 「己未日記」, 음력 1월 29일, 29~30쪽.
34) 金喜坤, 「新韓革命黨의 結成과 活動」,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 1986, 167쪽; 조규태, 천
도교의 민족운동연구, 선인, 2006, 18·20쪽
5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이어 김황 일행은 같은 여관에 묵고 있던 申用九와 宋在根에게서 독립선
언서를 전달받고 경성의 시위상황을 전해 들었다.35) 김황은 우선 신용구가
전한 독립선언서를 보고, 그 요지가 자유를 얻지 못한 백성의 고통, 독립운동
의 독려, 독립의 필연성 강조 등에 있다고 파악했다. 한편 송재근은 학생시위
대가 탑골공원 → 덕수궁 → 九里街路 → 진고개를 경유하여 행진했고, 군경
을 보면 ‘개와 돼지의 새끼’처럼 여겼다고 전했다. 이어 수건에 혈서로 ‘조선
독립만세’라 쓰고 휘두르던 모습과 상인들의 撤市 그리고 학생의 체포상황
등을 자세히 전했다. 시위소식을 접한 김황은 조선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마
음이 없겠느냐고 하면서도 “갑자기 처음 들으니 결국 멍하다”라며 당시의 생
경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다.36)
3월 2일은 인산 전날이었다. 이날 김황은 우연히 조선독립신문을 받아
보았다.37) 이른 아침 여관의 앞마당을 거닐고 있는데, 우체부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집안을 엿보다가 문득 신문 1장을 날려 보내고 사라진 것이다. 그는
‘정신을 차리시오[當厲精神]’라고 외치며 곧 종적을 감추었다.
시위는 이 날도 계속되었다. 종로에서 전훈을 만나고 있던 김황은 시위참
가자들이 체포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38) 시위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서대
문 방면에서 나오자 ‘倭警’이 이들을 뒤쫓아 체포하려 하였고, 시위군중은 잡
히지 않으려고 다투어 도망하였다. 김황은 전훈의 조언에 따라 얼른 자리를
피해 여관으로 돌아왔다.
김황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서점주인 田壎을 찾아가 이 혼란한 정국에
유림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때 전훈은 김황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하면서 얼마 전 ‘민족대표’측이 자신에게 유교계의 동참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역사학자들은
‘민족대표’측이 유교계에 사전 연락을 취한적이 있다는 일부 인사의 증언39)
35) 「己未日記」, 음력 1월 29일, 31쪽.
36) 「己未日記」, 음력 1월 29일, 30쪽.
37)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1~32쪽.
38)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2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55
을 불신하였지만,40) 이제는 1919년 2월 말 한용운의 거창 방문 사실41)을 거
론치 않더라도 ‘민족대표’측의 유교계에 대한 협력 시도42)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전훈이 전한 ‘민족대표’측과의 접촉 내용과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이 내용은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다.
지난번에 손병희 등이 장차 거사할 때 내가 儒家人이라고 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서 儒門을 일으켜 달라고 요구했는데, 몇몇 公이 저와 뜻을 함께 하였
고 헤아려 보니 사양한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인용자) 또한 일찍
이 남에게 믿음을 보인 적이 없어 드디어 과감히 실행치 못했을 뿐입니다.43)
(밑줄-인용자)
즉 ‘민족대표’측이 전훈에게 유교계의 동참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민족대표’측이 전훈에게 이런 중대한 사안을 요청할 정도로
전훈은 유교계의 명망가로 인식되고 있었을까. 그는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
은 인물이다. 김황의 일기에는 전훈이 단지 유교에 대한 이해가 깊고 경성에
서 서점을 운영한 인물로만 묘사되어 있지만, 그는 1919~1920년 전국적인 유
교단체를 설립해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벌인 인물이었다. 그는 1919년 음력
11월 朝鮮古史硏究會 발기인과 1920년 음력 5월 人道公議所 발기인으로 활
동했다.44) 즉 전훈은 3·1운동 직후 유교 부흥을 목적으로 설립된 전국적 유
교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할 정도로 유교계에서는 지식, 인망, 열의를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전훈의 아들이 기호유림의 영수인 전우에게 배웠다고 한
것45)으로 보아 ‘민족대표’측은 전훈에게 전우에 대한 교섭을 요청한 것이 아
39) 金法麟, 「三一運動과 佛敎」, 新天地 1-2, 1946, 75~76쪽.
40) 許善道, 「三一運動과 儒敎界」, 284쪽.
41) 韓龍雲, 韓龍雲全集(新丘文化社, 1980 증보), 「韓龍雲公判記」, 373쪽.
42) 崔麟에 의하면, 유교계의 경우 ‘상당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나 조직체계가 일원화되어
있지 않고 시일이 촉박하여 단체 교섭은 정지하는 것이 좋다는 것으로 의견이 일치되었
다고 한다(崔麟, 如菴文集 上, 如菴先生文集編纂委員會, 1971, 191쪽). 즉 애초부터 논
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 어느 정도 추진하다 여의치 않아 중단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43)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2쪽.
44) 「朝鮮古史硏究會趣旨書」; 「人道公議所趣旨書」(庚申5月).
5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닐까 추정된다.
한편 이 날 김황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 가서 곡을 하며 고종의 죽음에 애
도를 표했다. 먼저 작은 종이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 함에 넣은 뒤 外哭班(궁
궐 밖에서 전직 관리와 일반 백성이 곡을 하는 반열을 가리킴)에 나아가 엎
드려 곡을 하고 네 번 절하였다. 일반 백성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유교의
예법에서 벗어나지만 옛 임금을 쓸쓸히 보낼 수 없어 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한문 앞에는 엎드려 통곡하는 사람들로 첩첩산중을 이루
고 있었다.46)
같은 날 밤 김황은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47)을 접했다. 발설자는 ‘전 승
지’ 閔鏞鎬였다. 이 날 민용호는 김황·곽윤 일행, 韓昶東·韓大愚 부자, 李殷
赫 등이 묵고 있는 여관을 ‘지나가다 방문[過訪]’했다. 우연히 방문했다는 것
인데, 공교롭게도 인산 전날이었다. 마침 여관에는 곽종석의 지시로 경성의
동정을 살피고 독립청원운동 등을 논의하기 위해 상경한 곽윤·김황 일행 등
이 묵고 있었다.
일기에 의하면, 민용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驪興府大夫人 閔氏의 사촌
동생[從弟]48)이었다. 그는 여관을 방문하기 전 ‘大父 令公’과 함께 덕수궁에
45)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3쪽.
46)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3쪽.
47) 고종독살설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먼저 사실이라는 입장이 제기되었으나(李泰鎭, 「고
종황제의 毒殺과 일본정부 首腦部」, 歷史學報 204, 2009), 최근에는 허구에 불과하다
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다(李昇燁, 「李太王(高宗)毒殺說の檢討」, 2009; 윤소영, 「한일
언론자료를 통한 고종독살설 검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6, 2011).
48)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추가 고증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여흥민씨 족보를
살펴본 결과, 驪興府大夫人 閔氏의 從弟로 본명 또는 초명을 閔鏞鎬라고 쓰는 인물은 발
견되지 않았다. 8촌 이내는 물론이고 三房派 전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驪興閔氏世譜
5(回想社, 1992), 813~957쪽]. 다만 이름은 다르지만 동일인일 개연성이 있는 인물 1명이
발견되었다.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남동생 閔升鎬(930쪽)는 4從叔 閔致祿의 양자로 들어
갔는데, 양자로 들어간 집안에서 從弟가 되는 인물 중 시종원 副卿을 지낸 閔儀鎬
(1865~1945, 초명 閔鳳鎬)가 보인다(862쪽). 민의호일 가능성이 더 높은 이유는 일기의
뒷부분을 보면 그의 大父인 ‘令公’이 종2품의 武班 출신이라고 했는데, 민의호의 부친 閔
致一(1843~?)은 종2품 무관인 전라병마절도사를 지냈다(862쪽). 따라서 민용호가 허구
혹은 신분을 위조한 인물이 아니라면 민의호의 이명일 개연성이 있다. 다만 이런 추측에
는 한 가지 한계가 있다. 민치일의 사망연도가 족보에는 1892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57
들어가 조문하려 했고, 전직 관리였던 ‘대부’는 우여곡절 끝에 덕수궁에 들어
가 애도를 표했다. 김황 일행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한 민용호는 궁궐 안의
사정을 잘 안다며 고종의 죽음에 관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고종은 자연사
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죽었고, 더욱이 독살되었다는 것이었다. 일기에
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내용은 다소 길지만, 유림이 경성에서 민씨
척족으로부터 직접 들은 독살설에 관한 내용이어서 전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 승지 閔鏞鎬가 지나가다가 방문하였다. … 민용호는 京中의 貴戚으로
驪興府大夫人 閔氏[興宣府大夫人]의 從弟인데, 능히 궁중의 일을 안다고 하
면서 말하기를 “작년 12월 20일 國變(고종의 서거를 가리킴-인용자)은 사람
들을 기막히게 했다. 이에 앞서 巴里平和會가 가장 먼저 ‘한국독립사건’을 물
으니 일본공관은 ‘우리는 이유 없이 大韓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대한의 인민
[韓民]이 스스로 힘이 미약하니 自主를 할 수 없어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굳게
부속되기를 원하여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
한 이들이 못 믿겠다고 하자 일본은 마침내 은밀히 한국의 舊經 大臣인 자에
게 위촉하여 ‘民族代表’로 삼았다. 이때 李完用은 정당대표, 李載崑은 귀족대
표, 尹德榮은 종척대표, 宋秉畯은 사회대표, 趙重應은 노동대표, 金允植은 儒
林代表로 각각 도장을 찍어 신표로 삼았다.
이윽고 ‘(파리평화회의가-인용자) 국왕의 도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
자, 그 오른쪽을 비우고 太皇의 처소에 이르러 협박했다. 주상이 꾸짖으며
‘너희들이 다시 내 나라를 팔려고 하느냐?’라고 하며 밀어 내니, 이완용 등은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韓相鶴과 不軌한 일을 행할 것을 꾸며, 내시 2명에
게 밤에 식혜를 올리게 하여 주상이 받아 마시니 머지않아 아홉 구멍에서 피
가 나왔다. 새벽에 갑자기 붕어한 후 마침내 文篋을 열어 信寶를 얻고 거기
에 찍고 떠났다. 비밀로 인하여 發喪하지 않고 즉시 내시 2명을 살해함으로
써 입을 없애고, 다음날을 기다려 비로소 典醫監을 불러 검사하여 腦溢血이
라고 하니, 안팎의 모르는 자들은 ‘아, 태양이 그늘에 가리니[白日陰翳] 천지
에 아픔이 사무친다[天地痛徹].’라고 하였다.49) (밑줄-인용자)
그렇다면 1919년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이므로 민의호와 함께 덕수궁에 동행할 수 없게
된다. 이밖에 三房派에서 동일한 한자 성명을 지닌 前 郎廳 閔龍鎬(1827~1886)가 보이지
만(892쪽), 1919년 당시 이미 사망한 인물이었다. ‘승지’를 지낸 인물은 시종원 시종을 지
낸 閔濬鎬(1877~1977)(951쪽)가 있다. 한편 고종실록에는 1903년 시종원 시종, 비서승
을 지낸 閔龍鎬가 발견되는데, 삼방파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5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즉 고종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친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내용이다.
친일파 무리가 파리 국제평화회의에 조선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서한(獨
立不願書)을 고종의 명의로 제출하려고 시도하다 고종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
히자 후환이 두려워 고종을 독살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2월 중순 윤충
하가 곽종석에게 전달한 내용50)과도 일치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독살설의 진위 여부보다 독살설의 유포와
확산 경로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황 일행에게 독살설을 전달한 인물은 민
씨 척족인 민용호였다. 그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종제로 ‘승지’51)를 지냈다.
그의 신분 때문에 유림은 그의 발언을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월 1일
‘민족대표’의 독립 선언과 만세시위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민감한
내용의 소문을 유포할 경우 신변이 위태로울 수 있었지만 민용호는 그런 민
감한 소식을 외부인사에 전달했다.
고종독살설이 지하신문이나 격문 같은 선전물 형태가 아닌 황실 또는 척
족 등 궁중인사의 입을 통해 유포된 사례는 좀 더 확인된다. 예를 들어 윤치
호는 홍건이라는 인물로부터 고종이 한약탕을 마신 뒤 신체가 마비되며 사망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홍건은 이 이야기를 閔泳徽로부터 들었다고
했다.52) 이와 같이 고종독살설은 충군애국 의식이 강한 유림, 전직 관리, 학
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될 기미를 보였다.53)
한편 민용호가 고종독살설을 전달한 대상은 김황 일행 등 인산 참관 차 상
경한 영남유림이었다. 민용호는 왜 이들에게 민감한 소식을 전했을까. 영남
유림은 비록 경성과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고종
49)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4~35쪽.
50) 「記巴里愬書事」, 음력 1월, 76~77쪽.
51) 아마도 승정원의 후신인 비서원, 시종원에 속한 관리였을 것이다.
52) 윤치호,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6(국사편찬위원회, 2015), 1919년 2월 11일.
53) 윤치호는 학생들이 尹德榮의 고종암살설을 믿고 있다고 하였고[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6(국사편찬위원회, 2015), 1919년 3월 3일], 윤치호 본인도 처음에는 ‘쓸데없는 소리’라고
했으나, 나중에는 閔丙奭·윤덕영 등이 덕수궁 부지를 일본인에게 매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문을 믿고 싶어졌다’고 하여(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6, 1919년 11월 29일,
445쪽) 개연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59
의 특별한 관심과 대우를 받았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집권 초기에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영남 남인을 발탁했고, 영남유림도 한때 이들의 개혁정
치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 신뢰의 기반은 1919년이라는 시점에도 소멸되
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민용호는 이런 신뢰를 토대로 김황 일행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는 김황 일행을 재야 근왕세력의 대리인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
다. 김황의 스승인 곽종석은 田愚와 더불어 대한제국기 유교계의 원로로 인
식되었는데, 1903년 고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해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는 등
고종으로부터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이 때 곽종석 문하에는 그의 명성을 듣
고 많은 민씨 척족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54) 다음해인 1904년 고종의 첫 번
째 며느리인 純明妃 閔氏가 서거하자 곽종석은 조카 곽윤을 한성에 보내 挽
章을 제출했다.55)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이 지방에 전해지자 일각
에서는 망국의 군주에게 상복은 없다는 無服論을 제기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 곽종석은 3년복을 강력히 주장하여 망국의 책임이 고종에게 있지 않다고
단언했고, 이런 입장은 유교계에 널리 확산되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곽종
석과 고종·민씨척족 사이에는 어느 정도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56)
고종독살설을 접한 김황 일행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김황 일행도 고종
54) 곽종석의 문인록인 「俛門承敎錄」은 곽종석 사후에 제출된 挽章과 祭文을 토대로 작성되
었다. 원래 이 문인록에는 민씨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간행을 주도한 곽종석의 조카
郭奫이 민씨가 권력을 추종한 세력이라 하여 모두 빼게 했다고 한다(최인찬 구술,
1999.10.3, 경남 진주 상봉동동 二以齋). 실제로 「면문승교록」에는 민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곽종석의 문집인 면우집에는 곽종석이 閔致鶴, 閔泳夏, 閔致鴻, 閔泳殷
등 4명의 민씨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어 그 흔적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55) 「己未日記」, 음력 2월 28일, 25쪽.
56) 그렇다면 민용호가 고종독살설을 김황 일행에게 전달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아
직 그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를 위해서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민용호’라는 인
물의 실체에 대한 정밀한 검토와 더불어, 고종 서거 이후 황실인사 및 민씨 척족의 동향,
민씨 척족과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역학관계, 유림과 민씨 척족의 관계, 황실·척족과 독
립운동세력의 연결 가능성에 대한 폭넓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논문심사과정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지적해 주신 익명의 심사위원께 감사의 말씀을 전
한다.
6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의 죽음을 석연치 않게 생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3월 3일은 인
산일이어서 여관의 모든 투숙객들이 새벽부터 나갈 채비를 서둘렀는데, 김황
일행은 전혀 채비를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황은 일기에서 춘추의 ‘장례
를 기록하지 않는 의리[不書葬之義]’57)가 있다고 기술했는데, “임금이 시해를
당했을 때 그 범인을 토벌하지 못하면 장례에 대한 기사를 기록하지 않는다”
는 것58)을 말한다. 즉 고종을 시해한 역적들이 징벌되지 않았으므로 편안히
인산을 구경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고종독살설은 김황을 포함한 유림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와 그의 스승이
참여한 독립청원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김황은 경남 거창으로
돌아온 다음날인 3월 10일 스승 곽종석으로부터 독립청원서를 시험 삼아 기
초해보라는[試草] 지시를 받았다.59) 이때 김황이 작성한 초안에는 賊臣의 獨
立不願書 기획과 고종에 대한 서명 압박 → 고종의 완강한 반대 → 내시를
통한 시해 등의 과정이 포함되었다.60) 민용호에게 들은 내용과 일치한다. 이
문안은 증거 없이 섣불리 주장할 경우 독립청원서의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최종 수정과정에서 삭제되었지만,61) “하룻밤 잠깐 사이에 우
리 임금께서 별세하시니 온 나라 흉흉하였다”는 표현62)으로 함축되어 유림의
감정을 격발시키고 유림의 동참을 유도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 김황은 다른 소문들도 일기에 풍부하게 기술했다. 그 중의 하나는
1918년 겨울 고종이 파리평화회의에 2명을 파견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사
망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역의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氷]”는 말63)을 언급함으로써, 이미 1918년 말에 고종 시해의 조
짐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57) 「己未日記」, 음력 2월 2일, 35쪽.
58) 春秋公羊傳, 隱公 11年. “君弑, 賊不討, 不書葬”
59) 「己未日記」, 음력 2월 9일, 38쪽.
60) 「己未日記: 平和長書草」, 45쪽.
61) 「記巴里愬書事」, 82쪽.
62) 俛宇集 4, 「俛宇先生年譜」 권3, 760쪽. “一夜倉卒, 寡君卽世, 擧國洶洶”
63)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5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61
2) 인산 이후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명분
3월 3일은 인산일이었다. 일기 내용은 짧지만 일기에 깔린 전반적인 분위
기가 매우 무거웠다. 다른 여관투숙객들은 인산을 구경하기 위해 새벽부터
분주했지만, 김황 일행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여관투숙객들은
이들을 이상하게 여겼다. 김황은 원래 병도 있고 몸도 피곤해서 그렇다고 대
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투숙객이 여관을 빠져나간 오후에 일어나
동대문으로 나갔다. 동대문 위에 올라 지나가는 상여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귀성 전까지 김황이 만난 인물들은 <표 3>과 같다.
일자 성명 출생(거주) 관계 직업, 종교 행적
3.03 韓昶東경남 삼가 병석 위문
崔瑨淳강원 울진 후배 崔益翰의 從叔상업학교 학생
3.04 尹忠夏경남 거창 선배 독립청원운동 협의
金昌圭경북 영주 武人독립운동 협의
柳萬植경북 안동 柳必永의 아들
유림 움직임 전달, 독립
운동 논의
(+3.05)
(+3.06)
金昌淑경북 성주 선배 독립청원운동 논의
3.05
(+3.06)
田壎서점주인
※참고 : 일자에서 ‘+’는 해당 일자에도 재차 만났음을 의미.
<표 3> 김황 일행이 인산 직후 경성에서 만난 사람들 (3.3~3.9)
3월 4일 김황 일행은 드디어 윤충하를 만났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황 일
행의 주된 임무는 2월 19일 경남 거창에서 있었던 곽종석과 윤충하의 논의사
항을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이 날 윤충하가 김황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을
방문함으로써 양측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그런데 대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
았다. 일기의 내용을 보자.
尹忠夏 어른이 郭奫을 방문했다. 지난번 윤충하 어른이 거창에 왔을 때
6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파리에 편지를 보내는 일[巴里致書事]을 俛宇翁(곽종석-인용자)께 말하니,
면우옹이 답하기를 ‘조카 아이가 상경할 때 시국을 보고 결정하겠다’라고 했
다. 경성에 도착한 이래 大淵(郭奫-인용자)은 발병으로 문밖을 나갈 수 없
었고, 또 경성 안의 인심과 물정을 보니 대체로 우리 유림[吾儒]과 같지 않았
다. 그러므로 대연은 자못 난색을 표하며 “저는 감히 우리 아버지[吾父: 실제
는 숙부임-인용자]께서 이들과 일을 함께 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지 못하겠
습니다”라고 하니, 윤충하 어른은 “이쪽도 그렇다”고 했다.64) (밑줄-인용자)
일기에 수록된 대화 내용은 매우 짧다. 대화가 짧았을 뿐 아니라 일기의
작성자(김황)가 대화상대나 그의 발언 내용에 대해 비우호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곽종석의 대리인인 곽윤은 거창에서 예상했던 경성의 분위기와 실제로
목격한 경성의 사정이 매우 다르다고 토로했다. 윤충하가 내놓은 제안은 곽
종석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었다. 곽윤은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
고, 윤충하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이로써 2월 중순 윤충하의 거창 방문으
로 시작된 독립청원운동에 관한 논의는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이에 앞서
金昌圭라는 인물도 김황 일행을 방문해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했지만 역시 진
전된 사항은 없었다.
일기에 기술되지는 않았지만, 곽윤은 독립청원운동 참여 문제에 지나칠 정
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것은 거창 출발 전 곽종석이 전한 의사이
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2월 말 한용운이 거창을 방문해 곽종석에게
독립선언서의 서명을 제안했을 때 곽종석이 보인 태도와 유사하다. 당시 곽
종석은 즉답을 피한 채 나중에 조카를 보내 답변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곽윤
은 상경했지만, 결과적으로 곽종석의 독립선언서 서명은 불발되었다. 유림의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의 가장 큰 명분이 될 수 있는, 임금의 갑작스런 죽음이
라는 돌발변수가 발생했으나, 곽종석은 여전히 외부세력의 독립운동 제안을
극도로 경계했다.65) 이런 곽종석의 모호한 태도는 오늘날까지 그가 독립운동
64) 「己未日記」, 음력 2월 4일, 36쪽.
65) 이런 경계심은 1912년의 쓰라린 경험에서 생긴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
다. 1912년 金世東이란 인물이 곽종석을 찾아와 고종의 밀지를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은
일본에 건너가 국권을 회복할 방도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곽종석은 밀지에 대한 상소를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63
에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는 평판을 받는 배경이 된다.
3월 4일 윤충하와 김창규에 이어 柳萬植과 金昌淑도 김황 일행이 묵고 있
는 여관을 방문했다. 이들이 같은 날 곽종석의 대리인(곽윤)이 묵고 있던 여
관을 방문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날(3월 3일) 인산을 계기로 지방에 흩
어져 있던 유림이 경성에 모여 시국대응에 관한 의사를 서로 교환하는 계기
가 마련되었다. 이어 3월 4일은 返虞祭 즉 고종 시신을 홍릉에 안장하고 혼
령을 위패에 모셔오는 제사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따라서 반우제가 끝나면
바로 귀향할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림은 순종에 대한 복위
상소, 제2의 독립선언, 일본 또는 파리국제평화회의에 대한 독립청원 등 여러
대안을 내놓고 친밀한 세력끼리 합종연횡하기 시작했다.
이 때 유만식은 영남유림의 동정을 전했다. 유만식의 부친인 柳必永은 경
북 안동에 거주하는 인물로,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안동유림의 원로였
다. 유만식 역시 연로한 유필영을 대신해 상경한 것이었다. 유만식이 전한 영
남유림의 동정은 다음과 같았다.
안동 柳一初 어른[西坡 柳必永의 아들]이 내방하여 大淵(곽윤-인용자)에
게 말하기를 “금새 李校理 어른[李晩煃, 禮安]을 만났는데 나라 안의 뜻있는
자와 유림은 장차 宣言書를 발표하려 하고, 또 어떤 이는 일본정부에 長書를
보내자고 말하면서 尊翁(곽종석-인용자)과 吾翁(유필영-인용자) 모두 서
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라고 하였다. 대연
은 “아직 본의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사적으로 제가 그것을 허락할 수 있겠
습니까?”라고 하니, 유만식은 “나와 그대가 사적으로 그것을 한다면 비록 家
翁께 물어 따지더라도 그 화가 당연히 심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들이 스스로
김세동에게 주어 보냈는데, 상소의 내용은 원수의 나라에 가서 국권회복의 방도를 찾으
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라며 화를 자초하지 말고 安樂公처럼 편안히 지내면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곽종석이 사람을 시켜 김세동의 뒤를 밟았더니, 그
는 고종이 보낸 사람도 아니고, 밀지도 허위로 작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유교
계에 널리 알려지자 곽종석은 고종의 독립운동 제안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의 특
별한 예우를 받은 신하로서 임금을 욕보였다고 하여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곽종석은 이
일을 경험하면서 독립운동 제안에 대한 깊은 경계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이 사건의 전말
에 대해서는, 劉秉憲, 晩松遺稿 권1, 「與郭俛宇」, 14a~17b쪽에 실린 유병헌이 곽종석
에게 보낸 편지, 곽종석의 답장, 곽종석의 답장에 대한 유병헌의 답장을 참고.
6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그것을 마땅하다고 여긴다면, 또한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대연은 또
한 그렇다고 여기지 않고 “아직 일이 돌아가는 형세가 해야 할지 말아야 할
지를 몰라서 父兄의 이름을 맘대로 사용하는 것을 저는 감히 하지 못하겠습
니다”라고 하니, 유만식 어른이 이윽고 떠났다.66) (밑줄-인용자)
영남유림, 적어도 유만식이 접촉한 인사들은 선언서를 발표하거나 총독부
에 長書를 제출하되 곽종석과 유필영의 이름을 반드시 문건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언서 발표나 총독부에 대한 장서 제출은 당시 인산을 참관하기
위해 상경한 유림이 시도한 적극적인 항일의지의 표현이었다. 선언서 발표는
유림에게 생소한 형식이었지만 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아 추진한 것이었다.
기독교와의 연대도 시도되었다. 총독부에 장서를 보내는 것은 문제의 당사자
인 총독부(일본)에 부당한 식민지배와 식민통치의 실책을 엄중히 항의하고 떳
떳하게 독립을 요구해야 한다는 유림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곽윤의 입장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독립을 요구하는 문건에 곽종
석의 이름을 넣는 문제는 단순히 서명자 한 명을 추가하는데 그치지 않고 강
제병합 이후 ‘아직 죽지 못한 신하[未死臣]’로 자처하던 곽종석이 생애 마지막
에 내놓는 최종적 입장이고, 이것이 영남유림의 입장으로 간주될 것이기 때
문이었다.
그럼 영남유림은 왜 유교계 전체의 독립운동을 계획하지 않고 영남유림만
의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孟
輔淳 등은 유교계 전체를 아우르는 독립청원운동을 기획했지만 결국 성공에
이르지 못했다. 기호와 영남의 양대 세력을 통합해 독립(청원)운동을 추진하
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지역·학맥별로 독자적인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일어
났다. 실제로 기호 율곡학파 내부에서는 柳濬根, 宋柱憲 등 崔益鉉과 宋秉璿
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3월 5일 순종에게 復位를 요청하는 상소를 제출하
기로 결정했다.
김황 일행의 귀성이 임박한 시점에 김창숙은 김황 일행을 찾아가 자신이
66) 「己未日記」, 음력 2월 3일, 36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65
추진하는 독립청원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기존 연구에서
충분히 언급된 바 있다. 김창숙은 파리 국제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청
하는 서한을 보낼 계획인데, 이 서한에 전국 유림의 서명을 담을 예정이며,
이 계획을 이미 안동유림의 원로인 이만규에게 알려 동의를 얻었다고 했다.
김황 일행은 처음으로 독립운동 참여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김창숙은 동
문 대선배이자 김황의 族姪로 신뢰할 만한 인물이며, 더욱이 이만규의 보증
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3월 5일 김창숙은 다시 김황 일행을 만나 그간의 추진 경과를 설
명했다. 이 사업은 점차 구체화되고 있고 동참하려는 자가 많다고 하였다. 그
런데 이 계획은 처음부터 곽종석을 대표로 염두에 두고 시작한 것이므로 얼
른 거창으로 내려가 곽종석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독립청원서의 작성도 요
청해 달라고 부탁했다.67) 김황 일행은 마침내 3월 7일 귀성길에 올랐고, 3월
9일 드디어 거창 다전에 도착해 곽종석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68) 곽종
석은 김창숙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로써 후일 파리장서운동으로 불리
게 된 유교계의 독립청원운동은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4. 독립의 개념에 관한 신구 청년의 논쟁
1) 국권상실 원인에 관한 논쟁
「기미일기」에서 주목되는 내용의 하나는 일기의 작성자인 김황이 임유동
과 벌인 논쟁이다. 이들은 모두 1900년 전후에 태어난 20대 초·중반의 청년
이었다. 김황은 당시까지 줄곧 유학을 연마하고 있었던 반면, 경성에서 만난
옛 후배들은 유년시절 유교적 소양을 쌓았으나 경성으로 유학해 신학문을 연
67) 「己未日記」, 음력 2월 4일, 36쪽.
68) 「己未日記」, 음력 2월 9일, 37쪽.
6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마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국권상실의 원인, 君權
과 民權의 관계 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 대화는 단순히 젊은이
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1919년 경성의 학생운동 주도세력과 지방의 대
표적인 청년유림 간에 벌어진 이념논쟁이고, 1920,30년대 독립운동, 청년운
동, 유교운동을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들의 논쟁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황 일행은 경성에 도착했을 때 임유동을 가장 먼저 만나려고 했다. 임유
동69)은 곽종석의 제자로 김황의 네 살 연하 후배였다. 당시 중동학교에 재학
중인 임유동이 경성 사정에 어두운 김황 일행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으로 기
대했을 것이다. 임유동은 유년시절 고향에서 곽종석의 제자가 되어70) 유교적
소양을 쌓았다. 그의 집안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葛川 林薰의 후손으로, 부친
林苾熙는 곽종석의 제자였고,71) 형 林有樑도 곽종석의 제자이자 사위였다.72)
즉 임필희와 임유동·임유량 부자는 모두 곽종석의 제자일 정도로 이황-이
진상-곽종석으로 이어지는 학통에서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김황과 임유동의 만남은 2월 28일 즉 독립선언 발표 하루 전날 이루어졌다.
당시 종로에서는 인산 준비를 위한 예행연습이 한창이어서 어수선한 분위기
가 계속되었다. 김황은 간동에 있는 임유동의 숙소를 찾아갔으나 임유동은 자
리에 없었다. 얼마 뒤 김황의 재종질서인 조만제와 임유동이 화동에 있는 김
황의 숙소로 찾아왔다. 임유동과 조만제는 마치 그동안 쌓은 식견을 토대로
여전히 시골 유생의 때를 벗지 못한 선배들을 일깨우려 작심한 듯 발언했다.
임유동과 조만제는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친척이 반가웠지만, 민족의 운명
69) 임유동은 1919년 3·1운동 참가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했
다.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던 1924년 잠시 귀국하여 조선학생총연합회 발기인으로 정치
부 집행위원이 되었다. 사범대학 졸업 후인 1927년 귀국했다가 조선학생총연합회와 관
련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28년 조선공산당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가 베이징한인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선전원
으로 재입국했다. 1928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중외
일보사에 들어가 1930년 상무 취체역이 되어 경영에 관여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인
터넷판), 「임유동」, 2018.8.6. 검색].
70) 「俛門承敎錄」, 841쪽.
71) 尹榮善, 朝鮮儒敎淵源圖 권上(東文堂, 1941), 25a쪽.
72) 「俛門承敎錄」, 839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67
이 위태로운 시기에 한가롭게 인산을 구경하기 위해 상경한 김황 일행이 반
가울 리 없었다. 유교가 진부하다는 임유동의 지적에 김황이 진부한 유교도
소생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펴자, 임유동은 유교의 현실을 ‘마른나
무의 죽음[枯木死]’에, 그 미래를 ‘재[灰]’에 비유하며 유교의 소멸이 임박했는
데도 여전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우매하고 망령된 태도가 사람을 기막히
게 한다고 맹렬히 비난했다.73)
이어 임유동은 국권상실의 원인에 대해 질문하면서 김황 일행을 논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논쟁의 초점은 중국문화와 자기문화에 대한 인식이었
다. 유림의 중국문화에 대한 예속성과 의존성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임유동 : 우리들이 예전에는 나라가 있었으나 지금은 나라가 없습니다. 예
전에는 의기양양하여 진정 萬國의 일원이었으나 지금은 위축되
어 남의 하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 때
문입니까? …
김 황 : 군은 누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가?
임유동 : 예전에 우리나라가 교육을 시행할 때 중국의 글을 읽고 중국의
역사를 기록하며 중국의 성인을 칭찬하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일단 정신이 모두 중국인에게 빼앗겼는데, 다행히 ‘小中華’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하면 과장입니다.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입니
까? 우리나라에 본래 聖人이 있고 우리나라에 본래 역사책이 있
고 우리나라에 본래 제도가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반드시 중
국을 섬깁니까? ‘事大’라는 한 글자는 그 화가 오늘에 이른 것이
그대들의 죄입니다. …
김 황 : 事大하는 자라고 어찌 本心인들 편안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형
세가 그랬던 것이다. … 어찌 홀로 중국이겠는가? 만방에 하나라
도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취한들 무슨 해인가?
임유동 : 소위 남에게 취한다는 것은 반드시 내게 부족함이 있은 뒤에 그
것을 취하는 것이지, 우리나라에 본래 부족한 것이 없는데 중국
이라고 하면 비록 쓸데없는 구멍에서 나오더라도 역시 장차 그
것을 취하려 합니다. 그 취한다는 것은 큰 모자[大冠]와 넓은 소
73) 「己未日記」, 음력 1월 28일, 26쪽.
6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매[廣袖]에 불과하여 출중하게 하루 종일 새끼줄 하나를 잡게 하
니, 이미 잃었는데 그것을 취함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74) (밑줄
-인용자)
임유동은 국권상실의 원인을 뿌리 깊은 사대주의에서 찾고, 중국문화를 맹
종하는 유림의 태도를 지적했다. 김황은 외국 문화에 대해 배울 점이 있어
배우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하자 임유동은 자기 나라의 문자·역사·
제도에 부족한 것이 없는데 사대주의에 빠져 중국문화를 맹종하는 것은 강대
국에 의존하는 습관을 낳고, 결국 그런 습관이 누적되어 국권상실을 초래했
다고 반박했다.
임유동은 중국으로부터 배운 것이 ‘큰 모자(갓)’와 ‘넓은 소매’에 불과하다
고 꼬집었다. 임유동의 눈에 비친 중국의 ‘선진문명’이란 백성의 생활을 풍요
롭게 만드는 과학과 기술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한낱 의복
제도에 불과했다. 나아가 유림이 목숨을 걸고 반대한 變服令(1884)과 斷髮令
(1894)이 유교문화 지키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은연중에 비판한 것이다.
다음 대화는 자국사 인식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임유동은 유림이 중
국문화와 역사에는 해박하지만 자국사에 대해서는 몰이해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여 김황이 설득하려는 ‘사대주의’의 맹점을 공박하려고 했다.
김 황 : 우리들(유림-인용자)이 제대로 實踐과 實操를 하지 못해 군들에
게 조소를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군이 이것을 가지고 儒
者가 쓸모없다고 완전히 말한다면 불가하다. 또 군의 말에 따르
면, 新說을 논하는 자는 어찌 능히 다 유용하여 배운 것을 저버
리지 않겠는가?
임유동 : 비록 그렇지만, 우리 東國의 인민은 우리 동국의 역사를 물으면
알지 못하고, 중국을 물으면 눈앞에 있는 듯하니 … 일찍이 儒者
가운데 本國의 역사를 안 자가 있었습니까?
김 황 : 어찌 알지 못한다고 여기는가? 돌아보건대 군이 그것을 처음 보
았다고 여길 뿐이다. …
74) 「己未日記」, 음력 1월 28일, 26~27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69
임유동 : 檀君이 堯舜을 이기고 箕子가 湯武를 떠났는데 우리나라 사람들
은 겸손하게 물러나서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 도리어 이상하지
않습니까? 辯說이 복잡하여 충분히 다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곽 윤 : 요컨대 오늘날 人士는 각기 소견을 따른다. 훗날을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떤가? 그것을 찢는 자가 없을 수가 없고 그것을 보완하는
자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
조만제·임유동 : (크게 탄식하며) 쯧쯧, 이미 부패하여 일찍이 종기가 더
욱 심해졌는데 보완한다고 합니까?
곽 윤 : 천하의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이 세 가지니, 正德과 利用과 厚生
이다. 지금의 시기에 이용과 후생은 굳건히 군들에게 의지함이
있을 것이고, 正德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당연히 저절로 적
합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 군은 단지 물의 末流가 때때로 어
지러운 것을 보고 탁하다고 여기고 드디어 그 근원은 본래 맑은
곳이 없다고 하면 지나친 것이다.
조만제·임유동 : (서로 돌아보고 비웃으며) 쯧쯧, 더 이상 말할 수가 없겠
군요.
김 황 : 군들은 말하기를 우리들(유림-인용자)이 中華의 잘못을 배워 祖
國精神을 잃지 않았는지 강요하지만, 도리어 군들의 장 속에는
西國精神이 있어 그것이 조국정신에 병통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다. … 그리고 한 번 물어보자. 우리나라 5백년이 어떻게 그것이
공고하다가 하루아침에 開化가 되어 결국 과연 어떻게 됐는가?
조만제·임유동 :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쯧쯧.75) (이상 대화 편집 및 밑
줄-인용자)
즉 임유동은 유림이 자국사에 대한 이해가 없을 뿐 아니라 중국사 속에 등
장하는 자국사76)에 대해서도 중국인의 시각으로 왜곡하여 마치 중국사처럼
인식한다고 하였다. 김황은 유림도 자국사에 대해 잘 안다고 강변하지만 구
체적인 내용으로 반박하지 못했다.77) 대화가 극단으로 치닫자 곽윤은 유교와
75) 「己未日記」, 음력 2월 28일, 27~28쪽.
76) 임유동 역시 자국을 ‘대한’ 또는 ‘조선’으로 표현하지 않고 ‘東國’이라고 표현하였다.
77) 다만 이런 영향 때문인지 후일 김황은 東史略, 東國歷年圖捷錄(1959), 獨立提綱
(1959), 歷代紀年附 東國紀年 등 한국사, 寰瀛對照(1947) 등 세계지리에 관한 저술
을 많이 남겼다.
7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구미사상의 기능적 제한성을 지적하며 양자의 입장을 중재하려 했으나, 임유
동은 더 이상 대답의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김황은 신식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유림에 대해 사대주의에 함몰되어 ‘조국정신’을 잃었다고 비판
하지만, 신식교육을 받은 청년들이야말로 ‘서양정신’에 함몰되어 조국정신을
배양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김황은 개화의 결과가 대한
제국의 멸망이 아니었느냐고 반문했다.
2) 君權과 民權의 관계에 관한 논쟁
임유동은 유림의 임금에 대한 지나친 숭배의식을 비판했다. 사실 이 점은
임유동과 조만제가 김황 일행과의 만남에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던 근
본적 이유였다. 양측은 드디어 감정의 바닥을 드러냈다. 임유동·조만제와
김황·곽윤은 군권과 민권의 관계에 대해 상이한 시각을 드러냈다.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임유동 : 금번에 왜 人士들이 많이 왔습니까? 因山 때문입니다. 인산이 진
정 무슨 구경거리입니까? 지방 사람들이 임금을 보기를 중요하
다고 여기는데[視君爲重] 이런 습관을 없애지 않는다면 끝내 회
복될 운명이 없을 것입니다.
김 황 : 무슨 까닭인가?
임유동 : 임금은 ‘민족의 대표[民族之代表]’입니다. … 대표가 좋지 못하다
면 당연히 바꿔야 합니다. 어찌 존중의 대상이라고 하여 대대로
지킴이 있겠습니까?
김 황 : 君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오히려 다시 어찌하겠는가? (두 사람과
인사하고 대화를 끝냈다)
곽 윤 : (눈으로 그들을 보내며) 진정 突兀漢이다.78) (밑줄-인용자)
임유동은 민족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림이 한낱 과
78) 「己未日記」, 음력 1월 28일, 28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71
거에 대한 감상에 젖어 한가롭게 인산을 구경하기 위해 상경했다고 질타했
다. 특히 지방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이 심하다고 하면서, 이런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국권 회복은 비관적이라고 단언했다.
임유동이 김황을 각성시키기 위해 꺼낸 유교논리는 맹자의 ‘民爲重’說이
었다. 맹자는 임금도 정치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면 교체할 수 있다고 하여
易姓革命의 이론을 창출했고, 이런 인식은 “인민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은 다
음이며, 임금은 가볍다”는 문구79)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 문구는 역사적으로
爲民政治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었고, 1919년 고종의 사망과 독
립 선언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던 시기에도 유림 일각에
서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는 근거로 활용했다.80)
임유동은 지방 사람들이 맹자의 ‘民爲重-君爲輕’의 가르침을 망각한 채
‘君爲重’의 논리에 함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김황은 임유동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유교의 전통과 의리를 충실히 실천하고자 노
력하는 인물이며, 임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것은 부모의 마지막 길을 배
웅하는 것과 같이 인륜을 따르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민위중’의 논리는 맥락상 공화주의와 닿아있다. 임유동은 ‘民爲重’에서 ‘民’
에 ‘民族’을 대입해 민족이 가장 중요하고, 임금은 민족의 대표로서 민족의 생
존과 유지에 기여할 때만 존재 가치가 있다는 논리를 폈다. 따라서 임금이
무능하거나 사망할 경우 당연히 다른 인물로 교체되어야 하고, 그런 제한적
권력을 지닌 임금의 죽음에 과도한 관심과 물력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는 인
식이 깊게 깔려 있다. 임유동은 시종일관 임금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김황
의 입장에서 임유동은 ‘이적’의 정치제도인 대통령제 또는 공화주의를 주장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임유동의 대답에 김황 일행은 더 이상 대화를 진
행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임유동은 ‘민위중’의 논리를 발전시켜 공화주의를 수용하는 단계
79) 孟子 盡心 下. “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80) 이런 사례가 같은 일기에 수록된 곽종석과 尹秉洙의 대화에서도 확인된다(「己未日記」,
음력 2월 12일, 39쪽).
7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로 나아갔을까. 그런 의식의 발전과정을 사료를 통해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베이징 국립사범대학에 입학하여 혁명사상을 접하고 조선의 대표적인
청년운동가로 성장하며 조선공산당사건에 연루된 과정을 감안할 때 그런 사
상적 변화는 충분히 감지된다고 하겠다.
반면 우리는 김황 일행이 경성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나 독
립운동의 의지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김황 일행은
유교지식인으로서 경성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의 명분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들은 1919년 3~4월 독립청원
운동(파리장서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25~1926년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을
기획한 김창숙을 도울 정도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대화에 드러나지 않은 의식의 내면을 관찰할 필요
가 있다. 김황은 경성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낯선 사람의 접근에는 거리를
두었지만, 신뢰할 만한 인물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고 자문을 구하
기도 했다. 경성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김황과 교류해온 전훈이 바로 그런 인
물이었다. 김황은 임유동 일행과의 대화에서 격한 감정을 쏟았던 것과는 달
리 전훈과의 만남에서는 매우 차분하고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였다.
우선 전훈은 유림이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은 이해하지만, 국가와 관련된
일마저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에 김황은 전훈이 경성에 오래 거
주해 바깥사정을 잘 알테니 세상의 추이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81) 전훈은
우선 유림의 사회에 대한 시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자신과 다
르다고 하여 ‘社會人’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유림은 자
기 한 몸을 편안하게 하는데 몰두하면서 민족의 운명이 달린 시기에 사회운
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종교세력에 대해 ‘邪道’로 배척한다면 종교세
력이 유림을 어떻게 평가하겠느냐고 하였다.82) 유림이 ‘민족대표’를 구성한
기독교, 천도교, 불교세력을 전통적 시각에서 ‘이단’이라고 하여 폄하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81)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3쪽.
82)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2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73
이어 전훈은 1919년 당시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림의 은둔을 신랄히 비판
했다. “士子로서 몸을 쉬고 용기 내지 못하는 자가 책을 읽어 장차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83) 이에 김황은 배운 것을 활용하는 것은 모든 이
의 희망이지만, 道를 실현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도를 굽혀 합치됨을 구하
려는 태도는 온당치 않다고 반박했다. 또한 유림은 도에 거처하는[道居] 사람
인데 어찌 숨어 산다[隱居]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전훈은 자신의
깊은 뜻[深意]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대화를 중단했다.
지방에서 상경한 청년 유림 김황은 약 10일간 경성에 체류하면서 독립운
동의 당위성과 유림으로서의 명분 사이에서 깊이 고뇌했다. 그런데 김황 일
행은 경성의 사정에 대해 어두웠지만, 여러 인물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소
통의 어려움을 겪었다. 심지어 현재 유교를 신봉하고 있는 인물이나 과거에
유교를 학습한 인물들과도 이념적 거리감은 물론 개념상의 충돌을 경험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경성의 ‘시간’과 지
방의 ‘시간’의 충돌84)을 의미하였다.
결과적으로 김황 일행은 전훈 등의 간곡한 충고와 따가운 비판에도 불구
하고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
했지만, 독립운동의 목표에 대해서는 이질감을 해소하지 못했다. 김황 일행
은 ‘무엇을 위한 독립운동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스승 곽종석의 시각
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김황 일행은 3월 1일 경성의 맹렬한 만세시위 소식
을 듣고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83) 「己未日記」, 음력 2월 1일, 34쪽.
84) 윤해동은 3·1운동을 ‘조선의 시간’이 ‘제국의 시간’과 만나 발생한 ‘열광’의 ‘불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식민지 조선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을 ‘교차’하고
‘중첩’하며 ‘압축’시켰다고 하면서, 이런 ‘시간의 압축’이 없었다면 3·1운동은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고 하였다(윤해동, 「‘압축된 시간’과 ‘열광’: 3·1운동 연구를 위한 시론」, 동
아시아문화연구 71, 2017, 128·141쪽). 마찬가지로 김황이 경성에서 겪은 혼란은 ‘지방
의 시간’에 구속되어 있던 김황이 경성에 산재해 있는 ‘제국의 시간’과 접촉하는 과정에
서 겪은 혼란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혼란과 방황의 경험은 한편으로는 서구사상에 대한
불신을 환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림이 주도하는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을 모색
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7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곽 윤 : 우리 유림을 위한 계획은 장차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
김 황 : 이 한 몸은 애석하기가 부족하고 부모님이 계셔서 애석하지 않
을 수가 없지만, 의리를 위반하여 구차하게 사는 것은 불가할 따
름입니다. 그러나 전번에 ‘선언서’를 보니 우리 유림[吾儒]이 참
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점이 있었습니다. 그 首題에서 곧장 군
주의 고통85)을 말하였는데 일반적으로 독립이라 하는 것은 우리
들이 나라가 없었다가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누구인들 奮
昻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예로부터 ‘獨立國’이라는 것은 있었지만
반드시 ‘사람마다 독립해야 한다’[必人人獨立]는 말은 들어본 적
이 없습니다. 사람은 막대하고 여기에는 君臣과 上下가 있습니
다. 지금 ‘사람마다 독립 한다’고 하면 강상은 의지할 곳이 없습
니다. 이것은 전 세상이 함께 그런 것인데, 불행히도 이와 함께
텅 빈 상황을 빚는다면 천고의 죄인이니 우리 유림은 아마도 사
양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굳건히 깊이 강마해야 할 것입니
다.86) (밑줄-인용자)
김황은 의리를 저버리고 구차하게 사는 것은 불가하지만 독립선언서 내용
에는 유림으로서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다. 선언서 서두에서 군
주의 고통과 국가의 독립을 언급했다면 당연히 국권이 침탈되기 이전의 체제
인 군주제 국가로의 회복을 천명해야 하는데, 오히려 개인의 권리를 내세운
다면 불변의 인간질서인 군신의 의리가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는 논리이다.
독립운동의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자유인권과 공화주의를 거부하는 이념적
지향성이 분명하게 담겨있다.
85) 독립선언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장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독립선언서에서
직접적으로 고종 또는 고종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킨 문장은 없고, “舊來의 抑鬱을
宣暢하려 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 하면, 將來의 脅威를 芟除하려 하면”이라는 문
장에서 ‘時下의 苦痛’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현재의 고통’이라는 표현은 추상적이어서 고
종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86) 「己未日記」, 음력 1월 28일, 31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75
5. 맺음말
본 논문에서는 지방 청년유림의 눈에 비친 3·1운동의 형상을 확인하고 지
방유림이 독립운동에 접근하는 초기경로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경남
산청에 거주하는 20대 청년 金榥(1896~1978)이 스승 郭鍾錫의 지시에 따라 경
남 거창과 경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남긴 「己未日記」(1919.2.13.~1919.5.29.)를
검토했다. 이 일기에는 경성과 지방의 3·1운동에 관한 많은 목격담과 소문
이 실려 있어 3·1운동에 대한 지방인의 인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김황과 郭奫 일행은 1919년 2월에 경험한 경성의 상황이 지방에서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다고 느꼈다. 이들은 출발 전 스승 곽종석으로부터 독립운동
에 관한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고, 상경과 경성 체류 그리고 귀성에 이르는
동안 평정심과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경성의 거리에서 접한 독립선
언서와 조선독립신문 등 수많은 독립운동에 관한 선전물, 여관투숙객이 전한
청년·학생들의 격렬하고도 희생적인 만세시위 소식은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면서도 일순간 ‘멍’하게 만들었다. ‘지방의 시간’과 ‘경성의 시간’이
교차하고 충돌하며 가치의 진동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3·1운동 현장을 목격한 김황 일행은 유교 ‘의리’의 차원에서 3·1운동의
가치에 공감했지만, 독립선언서의 내용과 이념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못했다.
국가의 독립은 군주제의 회복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개인의 자유를 중시
하는 내용은 유림으로서 수긍하기 어려웠다. 또한 경성으로 유학 온 후배 林
有棟이 맹자의 ‘民爲重’이라는 구절에서 ‘民’ 대신 ‘民族’을 넣어 임금은 민족
의 대표로 기능할 때 존재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자 대화를 중단하였다. 이
는 유교계가 독립선언서의 이념을 공유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민족대표’에
합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황 일행이 독립운동의 참여의지가 부족했다고 볼
수 없다. 김황 일행은 상경 직전 스승 곽종석으로부터 尹忠夏와 독립청원운
동에 관해 논의를 구체화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다만 이들은 경성이라는
7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낯선 시공간 속에서 독립운동 참여의 명분을 찾는데 큰 어려움을 겪은 것으
로 보인다. 결국 이들은 다른 경로로 독립운동의 동기와 명분을 찾아갔다. 그
것은 유교적 방식이었다.
김황 일행이 상경 이전 행적에서 주목할 부분은 고종의 갑작스런 서거 소
식을 접하고, 고종을 위해 3년의 상복을 입기로 결정했다는 점이었다. 고종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은 지방유림을 경성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유인하고, 망국
의 슬픔과 분노를 폭발시킨 즉각적 요인이었다. 이와 관련해 「기미일기」에는
1919년 1~2월 유림의 관심이 상복의 착용 여부와 기간에 대해 집중되어 있었
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황 일행의 스승인 곽종석은 유교계 일각에서 제기된
無服論에 반대하고 3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고종을 망국의 군
주로 간주하려는 세간의 비판을 차단하고, 고종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기 위
해 유림이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다는 논리로 진전될 가능성을 잠재하였다.
실제로 3년복을 주장한 유림은 만세시위와 독립청원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이어 김황 일행은 경성에서 얻은 경험과 정보를 토대로 독립운동에 관심
을 보였다. 우선 민씨 척족 閔鏞鎬가 전한 고종독살설은 김황 일행의 내면을
흔들고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김황이 귀성 후 곽종석의 지시에 따
라 작성한 독립청원서(일명 巴里長書) 초안에는 고종독살설에 관한 언급이
들어갔다. 한편 독립선언서의 내용에는 동조할 수 없었으나, 종교·사회단체
의 奮起와 청년·학생의 희생적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고종에 대한 추모의 감
정에 빠져 있던 유림을 더욱 각성시킨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3월 5일
返虞祭를 계기로 경성에 결집한 지방유림이 지역·학맥별로 세력을 규합해
순종에 대한 상소와 총독부 투서 등을 추진한 점도 김황 일행과 김창숙 등
영남유림의 독립청원운동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계기였다.
▪ 투고일 : 2018. 9. 30. / 심사완료일 : 2018. 10. 17. / 게재확정일 : 2018. 11. 6.
▪ 주제어 : 식민지 조선의 시간과 공간, 3·1운동, 경성, 지방유림, 김황, 기미일기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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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79
❂ 국문요약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서 동 일
이 논문은 지방유림의 눈에 비친 3·1운동의 형상을 확인하고, 지방유림이 독
립운동에 접근하는 초기 경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자료는 김황의 일기인 「기
미일기」(1919)를 주로 활용했다. 김황 일행은 스승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1919년
2월 말 상경하여 약 10일간 3·1운동의 진원지인 경성에 체류했다. 「기미일기」
에는 김황이 경성 체류 당시 보도 듣고 경험한 3·1운동에 관한 많은 정보가 실
려 있어 3·1운동에 대한 지방인의 인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우선, ‘사건’의 발단과 관련해 김황 일행이 상경하기 전인 1919년 1~2월 고
종 급서에 대한 지방유림의 인식과 반응을 주목하였다. 이어, 김황 일행이 2
월 27일부터 3월 7일까지 경성에서 직, 간접적으로 얻은 정보들을 확인하였
다. 마지막으로, 김황 일행이 임유동 등과 나눈 대화를 통해 유림의 독립운동
노선과 목표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기미일기」에 따르면, 1919년 1~2월 지방유림은 고종을 위한 상복의 착용
여부와 착용 기간을 놓고 깊이 고심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김황
의 스승인 곽종석은 3년복을 강력히 주장하여 고종을 망국의 군주로 간주하
려는 움직임을 차단하고, 고종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경성에 도착한 김황 일행은 인산 전야에 고종독살설을
접했고, 청년·학생들의 희생적인 만세시위와 체포 광경을 목격하며 깊은 충
격에 빠졌다. 그런데 김황 일행은 3·1운동의 가치에는 공감하면서도 지도이
념에 대해서는 이질감을 느꼈고, 이로 인해 보다 유교계가 추진하고 있는 독
립운동 즉 김창숙이 기획한 독립청원운동(파리장서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8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4집
❂ Abstract
Understanding Korean Confucian’s Experiences
of March first Movement and the Viewpoints of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a Diary of
Young Korean Confucian
Seo, Dong-il
March first Movement is called ‘the first whole nation independence
movement’ in Korean history. If so, did all the nation people participate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same environment, and for same
purpose? To say frankly, it’s not so. They lived in the different environment,
and participated in it for the different purpose.
To study this respect of March first Movement, Kimi-ilgi(己未日記 : Diary
written in 1919) was used. Kim Hwang(金榥, 1896~1978), who was a young
and brilliant confucian, went to Kyeongseong(京城) by his old teacher’s
instruction. He met many persons and saw many things for nine days staying
there, and wrote a long diary. That is called Kimi-ilgi. This diary give us
help to understand what happened in Kyeongseong and how local people
understanded the independence movement.
For this purpose of studying, the responses of sudden death of King
Gojong in local community, the informations Kim Hwang gained during the
days to stay in Kyeongseong where the center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Kim Hwang’s viewpoint on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several dialogues between him and Yim Yu-dong(林有棟), who had been his
김황의 일기에 나타난 유림의 3·1운동 경험과 독립운동 이해 81
junior once but was a student of modern school in Kyeongseong, were
analysed.
Key Words : times and spaces in colonial Korea, March First Movement,
Kyeongseong, local confucian, Kim Hwang, Kimi-il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