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1(선조 4)∼1647(인조 3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세(命世), 호는 노헌(魯軒).
조부는 구봉(龜峯) 권덕린(權德麟) 이며,아버지는 참봉 사의(士毅)이며, 어머니는 광릉안씨(廣陵安氏)로 윤조(胤祖)의 딸이다
밀양에서 출생했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약관의 나이로 당숙인 사악(士諤)과 작은아버지 사민(士敏)과 함께 인근 주민과 노복들로 의병을 조직해 망우당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음보(蔭補)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 뒤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을 역임한 뒤, 1616년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연구와 저술에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 뒤 다시 기용되어 북부주부(北部主簿)가 되었고, 얼마 후 진천현감으로 전임되었는데, 재임 기간에 선치와 교화에 힘쓴 공로로 인조가 『동의보감』 한 질을 하사하였다.
원래 관직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양하고, 옛 집인 밀양에 돌아가서 손기양(孫起陽)과 도의교(道義交)를 맺고 학문을 강론해 지방 선비들이 종장(宗匠)으로 추앙하였다. 그 뒤 고향인 경주로 가서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
밀양과 경주에서 『여씨향약』을 본떠서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만들어 풍속 순화에 힘썼다. 만년에는 형강(兄江)에 정자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저서는 안동권씨의 세고인 『두고세고』에 합편되어 있다. 또한 진천현감으로 있을 때, 광해군의 폭정과 역륜을 탄핵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동기가 되었던 당시 상소문 유초(遺草)가 있다.
公諱應生。字命世。安東人。魯軒其號也。安東之權。皆出高麗太師諱幸。世襲簪纓。及我ㅤ朝。有諱軺。官判事。左議政文景公諱軫之弟也。始移居龍宮。有孫諱山海。號竹林。嘗以ㅤ端廟戚里。同六臣謀事。事覺自盡。其弟司正諱壽海。收屍歸葬。全家坐徙延日。有子司直諱孝忠。又移居慶州安康里。是爲公五世祖。至三世有諱繼中。軍資監僉正。於公爲曾祖。是生諱德麟。文科郡守。號曰龜峯。早遊晦齋先生門。爲高第弟子。於公爲祖。是生諱士毅。參奉。配宜人雞林金氏。參奉諱煕之女。後配宜人廣陵安氏。慕濂堂諱胤祖之女。於公爲考妣。公安氏出
也。公以隆慶辛未九月五日。生于密陽鈒浦里第。幼而岐嶷。不與羣兒遊戲。生七八歲時。能自劬書。不待課督日進。參奉公甚奇愛之。謂此兒他日。庶幾繼吾先人之業。吾可謂有子矣。長益軒豁峻整。儼然人望而畏之。平居待人接物。一出誠信。不以親疎或間。志節磊落。羞與流俗俯仰。逮壬辰倭亂。公年甫踰弱冠。聞ㅤ鑾輿播越。與從叔梅窩公士諤。庶叔梅軒士敏共扼腕雪涕。謂吾家受ㅤ國厚恩久矣。豈忍偸生。不肯死ㅤ國事乎。遂倡義旅。往從郭忘憂于火旺山城。合陣討賊。其籌畫方略。蓋多公協贊。又與諸義將會盟公山。有火旺同苦錄。及
公山會盟錄可攷。丙申。丁參奉公憂。避亂竆谷。不遑寧息。而殯葬祭奠。猶一依喪禮無憾。奉慈夫人極其誠孝。遂以命應擧。中乙巳進士。壬子。以剡薦始受寢郞。轉直長奉事。丙辰。除平丘道察訪。時昏朝政亂。彝倫斁絶。公赴任未幾。棄官歸家。無意仕進。乃與一道搢紳章甫。爲永昌聯名抗疏。極論力救。人皆韙之。及癸亥ㅤ改玉。卽ㅤ除北部主簿。遷司憲府監察。俄拜鎭川縣監。𦲷縣一年。闔境稱治。自ㅤ上特賜東醫寶鑑一帙以寵嘉之。公嘗於昏朝時。與承旨黃姓人爲姻戚同年。黃方當路登庸。一日以書來。要與同事。公遂草絶交書。幷其書還之。
爲黃心腹相附者。莫不嗛之。至是公以縣官。應別擧對策。論時弊。旣登第。見拔。蓋以前日嗛公者掌其試也。公雅少宦情。遂解紱。歸凝川別墅。絶去名利。與聱漢孫公起陽。趣味相孚。契義甚密。且與一境同志。設爲鄕約。一依藍田遺法。條列成案。月朔興行。士友洽然信從。旣又返安康舊庄。日以書史自娛。愛兄江水石之勝。臨湖築亭。名曰兄江精舍。來往垂綸。優遊取適。又自號以綸巖。與士友共議修鄕約。一如在凝川時。公嘗受業于旅軒張先生之門。篤志勵學。先生深加奬許。俾述東京誌。得徵古都文獻。又結爲孝悌忠信稧。要與共勖。先生之晩
棲立巖也。公旣送三子受學。及易簀也。特致力於編輯遺文。立院尸祝等事。惟恐不逮。又嘗往遊寒岡,愚伏諸賢門下。隨處觀感。得力益深。又與樂齋徐公來往質問。特見稱尙。其所與交。皆一時名勝。在鄕。與大庵朴公惺,守庵鄭公四震,雙峯鄭公克後。契分最厚。在洛。與東岳李公安訥,碧梧李公時發,白江李公敬輿。結爲知己。迭相往復。而於疎庵任公叔英。其相許特摯。至令其仲子受業焉。故其始終德義文學樹立可見之行。蓋自由尊賢樂道師友講劘之節。而得以成就。豈惟其生質之美。家學之正而已哉。故其居家則內外斬斬。必以敬章別
爲務。其處族則敦睦怡悅。輒以勿墜先業相戒。奉先則一遵晦齋奉先雜儀。謂吾先王考之所嘗受諸師門者。而惟恐或違。敎子弟則必勉以餘力學文。而特戒愼言。雅性不喜芬華。嘗營仲子婚。疎庵爲媒。公以書遺之曰。京洛有資者。多尙世俗觀美。吾不願也。吾之素志。惟在古人云云。故凡前後男女嫁娶。不欲與勢家結姻。而惟取淸素舊族。於此亦足以知其所守也。ㅤ仁祖丁亥十月二十三日。以疾終于寢。享年七十七。始葬慶之杞溪縣駕川里山幕洞。後再移葬。末乃還窆于杞溪舊壙上負亥原。公平日所著詩章及師友答問往復文字。不幸
幷入灰燼。無以詳其從師問學規模大略。及心法精微。而惟一代諸賢所稱述傳誦。有足可据。任疎庵贈公詩。有曰惟有竹枝秋後色。可堪持贈別離時。此蓋許公志節也。蒙庵李公埰爲公精舍序若記。略曰。
風櫺躡露舃。頂岸華陽之巾。披荒逕理石田。手攜陶令之杖。銀蓴玉膾。專管張翰之風流。白酒黃花。遠繼孟嘉之芳躅。又曰。主盟魚鳥。惟適之安。浴乎風乎而爲點也詠歸之樂。憑虛御風而爲蘇仙泛舟之遊。此蓋稱公晩年高致也。樂義齋李公訥倡義錄中送子書。云權某。嶺外道學之士也。臨亂制敵。必有籌策。往問術焉。鄭雙峯侑公文。云
領袖儒院。士林肅穆。振擧頹風。一邑敬服。其他諸公書牘輓誄。擧以岳精奎彩。文章德業。立幟斯文。模範一世等語。更相推許。觀於此。蓋將彷彿公萬一。至今百載之下。足令人想像興起。知所欽尙。其一生全體影響。亦豈不當由是可尋耶。淑人驪江李氏。參奉謹齋諱慶弘女。承旨今是堂諱光軫孫。閨範夙著。先公六年以歿。與公合窆。公有三男。曰炁。通仕郞。曰㶵。參奉。號退庵。曰燾。通德郞。有三女。適朴文起,金時顔,朴協。側室有二男。曰默。僉知。曰烈。通仕生三男。垓,
,埈。參奉生五男。仲均,仲坦,仲垕,仲培,仲增。通德生三男。曰塾。武科。曰奎。曰壆。垓生
慶昌。
生慶祉,慶錫,慶泰。埈生慶億。仲均無子。以慶祚爲嗣。仲坦生慶禧,慶祚。仲垕生慶徽。仲培生慶遇。仲增生慶鉉,慶銓。塾生慶欽。奎生慶命。壆生慶後,慶遠。慶昌一男瀷。以慶祉孫相宗爲后。餘不盡錄。公之六世孫達煥。訪余于錦淵之上。謂其先祖下世已經數百餘年。文蹟蕩然無存。狀行之作。尙未屬筆。願執事之惠一言也。自惟固陋蔑識。衰病沈淹。固無以堪承是役。而旣辱謬懇有難終辭。謹据其所來文籍。而妄加櫽括。略爲序次如右。後之秉筆君子。庶或有攷信裁擇於斯文。ㅤ上之三年癸亥季秋月日。鵝洲申體仁謹狀。
노헌공 부조묘
[魯軒公不祧廟 ]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권응생(權應生)의 사당.
조선 중기의 문신 노헌(魯軒) 권응생(權應生)의 향불천(鄕佛遷) 사당으로, 1795년(정조 19)에 건립하였다.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자리한 안동권씨(安東權氏) 종가 율산정사(栗山精舍) 뒤쪽에 있다. 홑처마 3량가(三梁架)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에 판자마루를 깔아 마감하고 안쪽에 신위(神位)를 봉안하였다.
권응생은 구봉(龜峯) 권덕린(權德麟)의 손자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봉사(奉事)와 직장(直長) 등을 역임하고, 1616년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 진천현감을 지내고 광해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천회맹
문천회맹은 임진왜란 발발로 영남의 요처들이 왜군에게 침탈되자, 경주를 중심으로 영남 각지에서 거병한 유현(儒賢) 등 의병장들이 경주부윤 윤인함과 판관 박의장을 필두로 1592년 6월 9일[1] 경주 문천에 모여 마혈(馬血)을 나누어 마시고 민군이 합세하여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회합이다. 1593년 2월 문경의 당교회맹(唐橋會盟), 1593년 10월 언양의 구강회맹(鷗江會盟), 1596년 3월 대구의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 1597년 7월의 화왕산회맹(火旺山會盟)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문천회맹에 참여했던 의병장들 중 살아남은 다수가 구강회맹, 팔공산회맹과 화왕산회맹에 참여하였다. [2]
문천(蚊川)은 경주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으로 남천이라고도 부른다.
문천회맹록
문천회맹록(蚊川會盟錄)은 여러 본이 있는데, 동엄실기(東广實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3]
- 경주(慶州) 윤인함(尹仁涵) [4], 이계수(李繼秀), 견천지(堅川至), 이삼한(李三韓), 이태립(李台立), 김응생(金應生), 김득복(金得福), 황희안(黃希安), 김득추(金得秋), 최계종(崔繼宗), 권응생(權應生), 백이소(白以昭), 이용갑(李龍甲), 이여량(李汝良), 최해남(崔海南), 이팽수(李彭壽), 이눌(李訥), 손시(孫時), 최봉천(崔奉天), 손엽(孫曄), 김홍위(金弘煒), 김이관(金以寬), 권사악(權士諤), 김천석(金天錫), 김몽량(金夢良), 이원명(李元明), 서사적(徐思迪), 김춘룡(金春龍), 김광복(金光福), 이승급(李承級), 김란서(金鸞瑞), 이방린(李芳隣), 김득상(金得祥), 이몽룡(李夢龍), 박영립(朴榮立), 박인국(朴仁國), 황희철(黃希喆), 이창후(李昌後), 김만령(金萬齡), 김영수(金永壽), 오열(吳悅)
- 울산(蔚山) 유정(柳汀), 이경연(李景淵), 서인충(徐仁忠), 이승금(李承金), 이우춘(李遇春), 장희춘(蔣希春), 김흡(金洽), 윤홍명(尹弘鳴), 전응충(全應忠), 이봉춘(李逢春), 이응춘(李應春), 박언복(朴彦福), 김득례(金得禮), 박인립(朴仁立).[7]
- 영천(永川) 조이함(曺以咸), 조이항(曺以恒), 조이절(曺以節), 정사진(鄭四震), 정세아(鄭世雅), 정의번(鄭宜藩)[8], 전삼익(全三益), 조시언(趙時彦), 조덕기(曺德驥), 조경(曺瓊), 서도립(徐道立), 이지효(李止孝), 조준기(曺俊驥) [9]
- 흥해(興海) 박몽서(朴夢瑞), 정인헌(鄭仁獻), 호신수(扈臣秀)[10], 최흥국(崔興國), 이대립(李大立), 정삼외(鄭三畏), 정삼계(鄭三戒), 이화(李華), 이대인(李大仁), 진봉호(陳奉扈), 정삼고(鄭三顧)
참고문헌
- 《경주읍지(慶州邑誌)》
- 《동경잡기(東京雜記)》, 민주면(閔周冕)
- 《문옹선생실기(汶翁先生實紀)》, 김석견(金石堅)
- 《죽계실기(竹溪實記)》
- 《동엄실기(東广實紀)》, 김득복(金得福)
- 《송고실기(松皐實紀)》, 견천지(堅川至)
- 《부암실기(傅巖實記)》, 백수장(白受章)
- 《용사세강록(龍蛇世講錄)》, 1924년 곽진곤(郭珍坤)
- 《백암실기(栢巖實記)》
각주
- ↑ 죽계실기에는 '6월 19일'로 되어 있다.
- ↑ 문천회맹록과 문옹선생실기의 '구강회맹록'과 '팔공산회맹록', 또한 '용사세강록'을 대조해보면 이름이 겹치는 의병장들이 다수 있다.
- ↑ 동엄실기
- ↑ 죽계실기에는 경주지역에 포함하지 않고 '부윤(府尹)'으로 별도 표시하였다.
- ↑ 죽계실기에는 영해지역에 포함하지 않고 '판관(判官)'으로 별도 표시하였다.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맹활약을 하고, 뒤에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公洪道水使)를 거쳐 경상수사가 되었다.
- ↑ 자는 이강(而剛), 현룡(見龍)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 27)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 ↑ 죽계실기와 견천지의 송고실기에는 울산지역 의병장으로 '박손(朴孫), 전개(全玠), 이한남(李翰南), 유영춘(柳榮春), 유백춘(柳伯春), 전영방(田永芳), 박경열(朴慶悅)' 7인을 추가하였다. 송고실기에는 '전영방(全永芳)'으로 되어 있다.
- ↑ 죽계실기에는 '정안번(鄭安藩)'으로 되어 있다. 정안번은 정의번의 아우다.
- ↑ 죽계실기에는 '전삼달(全三達)'이 추가되었다. 전삼달은 전삼익의 아우다.
- ↑ 죽계실기에는 '호민수(扈民秀)'로 되어 있다.
- ↑ 죽계실기에는 양산지역 의병장들이 빠져있다.
- ↑ 죽계실기에는 언양지역 의병장들이 빠져있다.
- ↑ 언양지역의 거부로서 실제 전투에 참여하기 보다는 군수 지원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故通訓大夫鎭川縣監魯軒權公行狀 회병 신체인 찬
公諱應生。字命世。安東人。魯軒其號也。安東之權。皆出高麗太師諱幸。世襲簪纓。及我ㅤ朝。有諱軺。官判事。左議政文景公諱軫之弟也。始移居龍宮。有孫諱山海。號竹林。嘗以ㅤ端廟戚里。同六臣謀事。事覺自盡。其弟司正諱壽海。收屍歸葬。全家坐徙延日。有子司直諱孝忠。又移居慶州安康里。是爲公五世祖。至三世有諱繼中。軍資監僉正。於公爲曾祖。是生諱德麟。文科郡守。號曰龜峯。早遊晦齋先生門。爲高第弟子。於公爲祖。是生諱士毅。參奉。配宜人雞林金氏。參奉諱煕之女。後配宜人廣陵安氏。慕濂堂諱胤祖之女。於公爲考妣。公安氏出
也。公以隆慶辛未九月五日。生于密陽鈒浦里第。幼而岐嶷。不與羣兒遊戲。生七八歲時。能自劬書。不待課督日進。參奉公甚奇愛之。謂此兒他日。庶幾繼吾先人之業。吾可謂有子矣。長益軒豁峻整。儼然人望而畏之。平居待人接物。一出誠信。不以親疎或間。志節磊落。羞與流俗俯仰。逮壬辰倭亂。公年甫踰弱冠。聞ㅤ鑾輿播越。與從叔梅窩公士諤。庶叔梅軒士敏共扼腕雪涕。謂吾家受ㅤ國厚恩久矣。豈忍偸生。不肯死ㅤ國事乎。遂倡義旅。往從郭忘憂于火旺山城。合陣討賊。其籌畫方略。蓋多公協贊。又與諸義將會盟公山。有火旺同苦錄。及
公山會盟錄可攷。丙申。丁參奉公憂。避亂竆谷。不遑寧息。而殯葬祭奠。猶一依喪禮無憾。奉慈夫人極其誠孝。遂以命應擧。中乙巳進士。壬子。以剡薦始受寢郞。轉直長奉事。丙辰。除平丘道察訪。時昏朝政亂。彝倫斁絶。公赴任未幾。棄官歸家。無意仕進。乃與一道搢紳章甫。爲永昌聯名抗疏。極論力救。人皆韙之。及癸亥ㅤ改玉。卽ㅤ除北部主簿。遷司憲府監察。俄拜鎭川縣監。𦲷縣一年。闔境稱治。自ㅤ上特賜東醫寶鑑一帙以寵嘉之。公嘗於昏朝時。與承旨黃姓人爲姻戚同年。黃方當路登庸。一日以書來。要與同事。公遂草絶交書。幷其書還之。
爲黃心腹相附者。莫不嗛之。至是公以縣官。應別擧對策。論時弊。旣登第。見拔。蓋以前日嗛公者掌其試也。公雅少宦情。遂解紱。歸凝川別墅。絶去名利。與聱漢孫公起陽。趣味相孚。契義甚密。且與一境同志。設爲鄕約。一依藍田遺法。條列成案。月朔興行。士友洽然信從。旣又返安康舊庄。日以書史自娛。愛兄江水石之勝。臨湖築亭。名曰兄江精舍。來往垂綸。優遊取適。又自號以綸巖。與士友共議修鄕約。一如在凝川時。公嘗受業于旅軒張先生之門。篤志勵學。先生深加奬許。俾述東京誌。得徵古都文獻。又結爲孝悌忠信稧。要與共勖。先生之晩
棲立巖也。公旣送三子受學。及易簀也。特致力於編輯遺文。立院尸祝等事。惟恐不逮。又嘗往遊寒岡,愚伏諸賢門下。隨處觀感。得力益深。又與樂齋徐公來往質問。特見稱尙。其所與交。皆一時名勝。在鄕。與大庵朴公惺,守庵鄭公四震,雙峯鄭公克後。契分最厚。在洛。與東岳李公安訥,碧梧李公時發,白江李公敬輿。結爲知己。迭相往復。而於疎庵任公叔英。其相許特摯。至令其仲子受業焉。故其始終德義文學樹立可見之行。蓋自由尊賢樂道師友講劘之節。而得以成就。豈惟其生質之美。家學之正而已哉。故其居家則內外斬斬。必以敬章別
爲務。其處族則敦睦怡悅。輒以勿墜先業相戒。奉先則一遵晦齋奉先雜儀。謂吾先王考之所嘗受諸師門者。而惟恐或違。敎子弟則必勉以餘力學文。而特戒愼言。雅性不喜芬華。嘗營仲子婚。疎庵爲媒。公以書遺之曰。京洛有資者。多尙世俗觀美。吾不願也。吾之素志。惟在古人云云。故凡前後男女嫁娶。不欲與勢家結姻。而惟取淸素舊族。於此亦足以知其所守也。ㅤ仁祖丁亥十月二十三日。以疾終于寢。享年七十七。始葬慶之杞溪縣駕川里山幕洞。後再移葬。末乃還窆于杞溪舊壙上負亥原。公平日所著詩章及師友答問往復文字。不幸
幷入灰燼。無以詳其從師問學規模大略。及心法精微。而惟一代諸賢所稱述傳誦。有足可据。任疎庵贈公詩。有曰惟有竹枝秋後色。可堪持贈別離時。此蓋許公志節也。蒙庵李公埰爲公精舍序若記。略曰。
領袖儒院。士林肅穆。振擧頹風。一邑敬服。其他諸公書牘輓誄。擧以岳精奎彩。文章德業。立幟斯文。模範一世等語。更相推許。觀於此。蓋將彷彿公萬一。至今百載之下。足令人想像興起。知所欽尙。其一生全體影響。亦豈不當由是可尋耶。淑人驪江李氏。參奉謹齋諱慶弘女。承旨今是堂諱光軫孫。閨範夙著。先公六年以歿。與公合窆。公有三男。曰炁。通仕郞。曰㶵。參奉。號退庵。曰燾。通德郞。有三女。適朴文起,金時顔,朴協。側室有二男。曰默。僉知。曰烈。通仕生三男。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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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래 작성시간 17.10.24 권응생이 권사민 등과 기의(起義)하여 대구 팔공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곽재우가 화왕산성에 들어간 즈음하여 곽재우의 휘하로 들어간 것임.
처음부터 곽재우와 함께한 것은 아님. -
작성자이종문 작성시간 18.09.06 權希正(文靖公)-軺-寬-壽海(向日齋)-孝忠-命錘-繼中-德麟(龜峰,文科)-士毅-應生(魯軒,不祧)-燾-塾-壻 鄭碩達-重器((梅山)-一鑽-夏瀾-壻 李鼎休-壻 李相烈-壻 南夏朝-孝永-洪鎭-浩蒼-壻 李炳恩-弘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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