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과전(科田)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8.01.24|조회수46 목록 댓글 0
영문표기 : gwajeon / kwajŏn / rank-land





고려 말 과전법에 의해 중앙에 거주하는 관인에게 준 분급수조지
고려 말 과전법(科田法)에 의해 중앙에 거주하는 관인(官人)에게 준 분급수조지(分給收租地). 대체로 휴한농업(休閑農業)의 지양과 연작농법(連作農法)의 일반화라는 지반 위에 성립된 과전법은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국가수조지로 편성하고, 일부분만 관인층을 비롯한 소수 공역자(公役者)에게 수조권(收租權)을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수조권적 토지지배관계보다도 개별소유권 중심의 토지지배관계를 기본바탕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과전법에서는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신분제적 측면이 전대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볼 때 과전은, 첫째, 중앙거주 관인의 기본적인 생활보장을 위해 설정된 전형적인 신분제적 분급수조지로서, 전시과(田柴科)의 일반전시(一般田柴 : 科田) 및 한인전(閑人田)·구분전(口分田) 계열의 속성을 이어받은 것이다.
둘째, 국가수조권의 일부를 사인(私人)에게 위임해 수조권자가 타인 소유지에서 수조권을 직접 실현하도록 설정한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가장 보편적인 유형으로, 고려 후기 사전(私田)의 토지지배 관행을 답습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전은 원칙상 절수자(折受者)가 자격을 상실하는 때는 국가에서 환수하도록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고려 후기 녹과전(祿科田)의 계열을 이어받은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과전법에 의하면, 과전은 “경기(京畿)는 사방의 근본이니, 과전을 설치해 사대부를 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경성에 살면서 왕실을 보위하는 자는 현직〔時〕·전직〔散〕을 막론하고 각기 자기 과(科)에 따라” 받도록 한 것이었다.
물론, 절급된 과전은 당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만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중앙 거주의 관인을 18과로 구분해 각기 직사(職事) 위주의 과전을 지급했으며, 1394년(태조 3) 다시 첨설직(添設職)도 실직(實職)에 따라 지급하도록 하였다.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설정, 변천되었던 대군(大君, 3백결)에서부터 상옹주부마(尙翁主駙馬, 150결)까지의 왕자, 의빈(儀賓)에게 지급된 과전을 제외한 각 과별 지급액은〔표〕와 같다.
과전은 전직자에게도 재직 당시의 실직 관품에 따라 지급하였다. 또, 그가 죽으면 그 수절처(守節妻)에게는 수신전(守信田)의 명목으로, 다시 그 처마저 죽으면 유아(遺兒)가 성인이 될 때까지 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유보되었다. 이러한 일체의 조건이 해제될 때 국가가 환수함을 원칙으로 한 이른바 사자세록(仕者世祿)의 뜻에서 지급되는 수조지였다.
즉, 관인의 직사에 대한 반대급부의 의미보다는 관인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급된 신분제적 분급수조지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므로 ‘과전은 이미 영영 사여(賜與)된 토지’(世宗實錄 元年 9月 辛酉條)라고도 인식되었다.
과전은 이른바 사전경기(私田京畿)의 원칙에 묶여 있었다. 고려시대의 사전이 지방에 절급되어 토지겸병의 폐단이 크게 자행되었다. 그러므로 과전법에서는 그러한 현상을 감안해 과전이나 공신전(功臣田) 등의 사전을 경기에 한해 지급하도록 하였다.
비록, 1417년(태종 17)에서 1431년(세종 13)까지 과전의 일부가 일시적으로 충청·전라·경상도로 이급된 적이 있었지만, 그 뒤 과전의 명목이 존속하는 동안 이 규정은 지켜졌다.
1403년(태종 3) 당시 과전의 지급총액은 8만4100여 결로, 전국 총결수(總結數)의 약 10분의 1에 달하는 큰 액수였다. 그러므로 과전운용상 절급할 수조지가 항구적으로 부족하였다.
태종 때부터 여러 해 동안 사환(仕宦)해도 1결의 토지도 받지 못한 자가 있었고, 신진 관인의 경우에는 더욱 많았다. 토지는 유한한데 종사자(從仕者)는 무궁하니 과전을 고르게 지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운용상의 또 다른 문제점은 절수자가 편의에 따라 상환(相換) 혹은 체수(遞受)를 하였던 것이다. 토지의 비척도에 따라 생산력에 차이가 있으므로, 비옥한 토지를 받고자 하였다.
또한 받은 과전을 비옥한 토지로 바꾸고자 진고(陳告)하는 일이 번거롭게 대두되자, 일반적인 상환은 점차 금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전을 관인 자신의 소유 농장에 절수받는 일은 허용되었고, 부조(父祖) 이래의 체수된 과전은 그 자손에게 우선적으로 보유되어갔다.
과전이 자신의 소유지에 절수되거나 혹은 부조의 과전을 자손이 관인이 되어 체수하는 경우, 그리고 수신전·휼양전의 명목으로 체수되는 경우 환수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그것은 곧 은점(隱占)에 의한 과전 세전(世傳)의 길로 활용되었다.
이와 같은 수조권의 은점과 그 확대를 막기 위해 진고체수(陳告遞受)의 원칙을 규정하였다. 회수해야 할 과전의 구체적인 경우를 파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신고하는 관인에게 우선적으로 절급한다는 제도였다.
그런데 이 법은 결국 타인의 과실을 적발하거나 그 사망을 요행으로 여기는 풍조를 조장할 뿐, 과전의 수수(授受)를 고르게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1417년 타인의 진고 대신에 수전자의 친족으로 하여금 진고하게 하며, 또 그렇게 해서 환수한 과전의 분급도 호조(戶曹)가 직접 관장하였다.
그것은 과전의 절급에 있어서 진고자를 우선시하는 사적인 연고관계를 부정하고, 그만큼 국가지배권을 강화해갔다는 뜻이다. 더구나, 1431년부터는 종래의 직사기준의 절급제를 품계기준으로 전환, 4개 과등(科等)으로 나누어 각 과등에 번갈아 가면서 절급하였다.
즉, 종래의 과전을 체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신규 절급하는 경우 당상관을 1등, 당하관의 종4품까지를 2등, 5·6품을 3등, 그 이하를 4등으로 나누어 각 등마다 과전을 순환적으로 절급한다는 방식이었다. 이로써 과전의 절급이 한층 더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과전운용의 공적인 성격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은점은 계속되었다.
세종 때의 기록에, “호조에 비치해둔 전적(田籍)이 많이 유실, 파손되었으므로 정유년(1417) 이래로는 3년에 한번씩 각 관인의 과전 단자(單子)를 바치도록 해 전적의 수정에 참고하지만, 문안(文案)이 불명해 단자를 바치지 않는 자가 있어도 고찰하기가 어렵다.”(世宗實錄 7年 7月 壬午條)라고 하였다.
중앙거주 전·현직의 모든 관인층이 과전절수의 대상으로, 그들은 각자 부조 이래의 과전을 보전하려고 했으니 그 전적이 불분명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조잡한 전적으로는 과전의 정상적인 수수가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
15세기 후반 세조 때의 기록에도 “수신전·휼양전은 혹 타인에게 재가(再嫁)하거나 성정(成丁)·혼가(婚嫁)한 뒤에도 몰래 숨겨 수조하는 자가 있으며, 부모가 죽은 뒤에도 체수의 절차를 밟지 않고 그대로 수조하는 자가 있다.”(世祖實錄 7年 6月 辛酉條)고 하였다.
결국 신진 관인에게 지급할 과전의 액수가 항구적으로 부족한 반면에, 이와 같은 무자격자의 과전의 은점수조가 계속되었으니, 이는 과전운용상의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또 다른 문제점으로 경작자인 전호(佃戶)농민에 대한 수조권자인 전주(田主)의 가혹한 수탈이었다. 과전법은 원래 전주가 수조지의 작황을 해마다 답사 점검해 조율(租率)의 한도 내에서 수조액을 산정하도록 했으니, 이가 곧 손실답험(損實踏驗)이다.
또한, 경작자는 5식(息)의 한도 내에서 수조권자가 지정하는 장소까지 전조(田租)를 가져다 바칠 의무를 지고 있었다. 그것은 고려 이래의 오랜 관행으로서, 관인의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농민의 소유권적 토지지배관계를 그만큼 강하게 규정되고 있었다.
과전이 규정대로 환수, 절급되지 않은 채 수조권이 일정한 토지 위에 지속적으로 행사되고, 더구나 세력을 가진 관인에 의해 직접 실현될 때, 토지의 소유권은 완전하게 보존될 수 없었다. 결국, 수조권을 매개로 소유권의 탈점까지 자행되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수조권자의 전호농민에 대한 횡렴(橫斂) 자체도 큰 물의를 일으켰다. 손실답험이 수조권자 자의에 맡겨지면서 피해를 입은 토지에서도 실조(實租)를 바쳤다.
1석(15斗)을 바쳐야 하는 경우 실제로는 23.4두를 바쳤으며(太宗實錄 15年 8月 甲戌條), “수조의 폐단이 공전보다 갑절이나 되며, 고초(藁草)니 시탄(柴炭)이니 행전(行纏)·마량(馬糧)을 취해가지 않는 것이 없고, 실어다 바치는 폐단 또한 적지 않다.”(太宗實錄 16年 5月 乙巳條)는 것이었다.
특히, 1416년(태종 16) 경기지역의 혹심한 한발이 과전을 비롯한 사전 수조권자의 횡렴에 시달린 농민들의 원한이 쌓여 야기된 재해라고까지 하였다(太宗實錄 16年 5月 辛亥條). 이는 곧 소유권에 입각한 농민의 토지지배권이 관인층의 수조권적 토지지배권에 대항해 그만큼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의 반영인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오랜 논의를 거친 끝에 1419년(세종 1)을 기점으로, 전주의 자의에 일임되어온 과전의 손실답험권을 국가기관으로 이속시키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1444년(세종 26)에 확정된 공법(貢法)이 시행됨에 따라, 그것은 전분(田分)과 연분(年分)의 적용을 받는 공적인 책정으로 일괄되어갔다. ‘과전은 영영 사여된 토지’라는 관인층의 주장이, 모두가 국가의 토지라고 하는 국가의 보편적인 토지관리권 앞에 굴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전의 손실답험권을 국가로 이관하게 된 것은 수조권에 입각한 관인층의 토지지배관계가 그만큼 쇠퇴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또한, 그것은 국가의 직접지배에 속해 있는, 곧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공민(公民)으로서의 농민의 토지소유권이 수조권보다도 우선시되어 가는, 이 시기 토지지배관계의 일반적인 변천사실의 바탕 위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그러나 손실답험권이 국가로 이관되었지만, 과전에서의 수조권의 행사는 그대로 전주의 직접 장악 아래 놓여 있었다. 그래서 국가가 책정한 조액(租額)일망정 수취과정에서 관인의 전호에 대한 경제외적 수탈은 여전하였다. 그것은 곧 크게 약화되고 있던 수조권적인 토지지배가 소유권적 토지지배와 공존할 수 없는 모순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상과 같이, 과전은 절대액수가 항상 부족하였고, 체수관계가 적체되어 무자격자의 은점수조가 계속되면서 현직자에의 절급조차 어려운 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토지지배관계의 대세와도 어긋나는 법외(法外)의 수조권적인 횡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세조 때 현직자에게만 수조지를 절급하는 직전법(職田法)으로 바뀌었고, 다시 성종 때 직전세(職田稅)의 관수관급제도(官收官給制度)로 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高麗史節要
<<참고문헌>>太祖實錄
<<참고문헌>>太宗實錄
<<참고문헌>>世宗實錄
<<참고문헌>>世祖實錄
<<참고문헌>>近世朝鮮史硏究(千寬宇, 一潮閣, 1979)
<<참고문헌>>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金泰永, 知識産業社, 1983)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