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표기 : gunhyeonje / Kunhyŏnje / county and
prefecture
전국을 몇 개의 행정구획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을 파견해 다스리던 중앙집권적
지
전국을 몇 개의 행정구획으로 나누고 여기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을 파견해 다스리던
중앙집권적 지방행정제도.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주대(周代)의 종법적(宗法的) 봉건제도에 대신해 생겨났다. 주나라가
쇠약해지면서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 군현이 설치되었다.
이때의 군현은 종래의 봉읍(封邑)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고 군이 현보다 작아 그 하위에
위치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군현이 절대 군주의 권력을 뒷받침하게 되었고, 군이 현의 상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전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그는 전국을 36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현을 설치해 각각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다.
군현제는 한대(漢代)를 거쳐 더욱 보강·강화되어 중국 지방통치의 근간을 이루었다. 주대의
봉건제에서는 제후(諸侯)나 경(卿)·대부(大夫) 등이 봉읍을 받아 그 지역을 세습한 데 반해, 진한시대(秦漢時代) 이후의 군현제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일정한 임기 동안 교대로 지방을 다스렸다.
〔신라〕
중국의 군현제는 다른 제도·문물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고대국가가
성장함에 따라 확대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목적으로 군현제가 실시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경우 파사왕대(婆娑王代 : 80∼112)에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취해 현을 설치하였고, 조분왕(助賁王) 2년(231)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해 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또 지증왕(智證王) 6년(505)에는 왕이 친히 주·군·현을 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구성과에 의하면 무열왕 이전의 중고시대(中古時代)에는 주·군은 있었지만 현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군 아래에는 현 대신 촌(村)이
설치되어 있어 중고시대의 군현제는 주군제(州郡制)라 부를 수 있다.
주·군·촌에는 각각 군주(軍主)·당주(幢主)·도사(道使)가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들 지방관은
행정적인 성격보다는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백제·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중고시대 군현제의 특징이었다.
삼국통일 이후의 중대로 접어들면서 신라의 군현제는 9주(州) 5소경(小京)을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주(州)는 지증왕 6년(505) 실직주(悉直州 : 강원도 삼척)의 설치 이래 영토확장과
더불어 계속 설치되었으며, 새로 병합·정복된 지역의 통치를 위해 옮겨지기도 했다.
따라서 중고시대의 주는 행정구역이라기 보다는 군사적인 거점이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에는
행정구역적인 성격으로 변하면서 옛 고구려·백제·신라 지역에 각각 3주씩 설치되어 경덕왕 때에 9주로 정비되었다.
즉, 고구려 지역에는 한주(漢州)·삭주(朔州)·명주(溟州)가, 옛 백제지역에는
웅주(熊州)·전주(全州)·무주(武州)가, 그리고 신라의 옛 영토에는 양주(良州)·강주(康州)·상주(尙州)가 설치되었다.
소경은 지증왕 15년(514)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을 시발점으로 하여
신문왕(681∼692)때에 이르러 국원소경(國原小京 : 충청북도 충주)·서원소경(西原小京 : 충청북도 청주)·북원소경(北原小京 : 강원도
원주)·남원소경(南原小京 : 전라북도 남원)·금관소경(金官小京 : 경상남도 김해)의 5소경으로 정비되었다. 소경제는 수도가 한쪽으로 치우친
불편을 해소하고자 하는 목적과 정복지역의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시행되었다.
한편, 통일을 전후한 무렵부터 군 아래에 현이 설치되기 시작해 중대에는 명실공히 주-군-현
체제로 정비되었다. 그리고 각 주·군·현에는 도독(都督)·태수(太守)·현령 등이 파견되었으며, 소경에는 사신(仕臣)이 파견되었다.
도독은 급벌찬(級伐0xC89F), 즉 진골(眞骨)이어야 했으며, 태수는 사지(舍知)로부터
아찬(阿0xC89F)까지의 관등, 즉 6두품 출신이어야 했다. 또한, 이들은 중고시대와는 달리 행정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도독의 전신으로 알고 있는 총관(摠管)은 주의 장관이 아니라 단위부대인 당(幢)·정(停)의 장군직에 대한 칭호였다.
이후 하대(下代)가 시작되는 선덕왕 때에는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 패강진(浿江鎭)이라는
특별군사행정 지역이 설치되었다. 그것은 북방의 개척과 방어를 위한 목적에서 였다.
〔고려〕
군현제 면에서도 새로운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즉,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통일에 많은 협조를
한 사람들의 출신지는 주(州)나 부(府)로 승격시킨 반면 항거했거나 비협조적인 지역은 읍호를 강등시켰다. 그러나 고려 초에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성종 2년(983) 최승로(崔承老)의 건의로 전국에 12주목(州牧)을 설치하였다.
양주목(楊洲牧)·광주목(廣州牧)·충주목·청주목·공주목·진주목·상주목·전주목·나주목·승주목(昇州牧)·황주목·해주목 등이 그것이다.
또 성종 14년(995)에는 당제(唐制)를 모방해 전국을 10도(道)로 나누었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중원도(中原道)·하남도(河南道)·강남도(江南道)·영남도(嶺南道)·영동도(嶺東道)·산남도(山南道)·해양도(海洋道)·삭방도(朔方道)·패서도(浿西道)
등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도는 행정구역이라기보다 감찰구역의 성격을 띈 것이었다. 10도의 하부에는
주(州)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절도사(節度使)·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團練使)·방어사(防禦使)·자사(刺史) 등의 외관이 파견되었다.
이후 현종대에 일단 정비되고, 예종대에 이르러 큰 틀이 마련되었다. 현종대에
4도호(都護)·8목(牧)·56지주군사(知州郡事)·20현령(縣令)·28진장(鎭將)이 설치되었다. 예종대에는 전국이 5도(道) 양계(兩界)로
정비되었는데, 양광도(楊廣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와 동계(東界)·북계(北界)가 그것이다.
고려의 군현제는 신라의 군현제를 기초로 한 것이었지만
도호부(都護府)·도독부(都督府)·부(府)의 존재와 많은 주(州)의 출현 등은 새로운 특색이었다. 또한 군현의 수도 많이 증가하였다.
통일신라가 432개 내지 450여 개인 데 반해 고려는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520여 개, ≪고려사절요≫ 성종 14년조에 의하면 597개나 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고려 군현제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광범위한 속군·현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속군·현은 고려 초부터 발생하기 시작해 현종
때 정비되었다. 현종대에 속군현이 360여 개나 되었으나, 예종 원년(1105) 속군·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면서 그 존재가 점차 소멸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예종대에는 22개소, 명종 2년(1172)에는 50개소, 그리고 공양왕
2년(1390)에는 24개소에 감무가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속군·현의 존재는 조선에 와서야 정리되었다.
둘째, 빈번한 군현의 승강(陞降)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러한 경향은 역시 고려 초부터
있었으며, 시작된 것이지만 무인집권기나 원나라 지배기에 많이 발생하였다.
즉 조정에 공을 세웠거나 외적을 퇴치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의 본향, 왕의 태(胎)를 묻은 곳
등은 승격시킨 반면 반역을 하였거나 외적에 투항한 자들의 본향은 강등시켰다. 따라서 고려의 군현제는 읍의 명칭과 읍의 규모가 맞지 않게
되었다.
셋째,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이 다수 존재했다는 것이다. 농업을 위주로 하던
향·부곡은 신라시대에도 있었으나 특정 공납품을 생산하던 소는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향·부곡은 현이 될
수 없는 작은 것이라고 되어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군·현의 강등으로 향·부곡이 된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현 가운데 20정(丁) 이하의 것이 있었는가 하면 1천정 이상 규모의 향·부곡도
존재하게 되었다. 또 향·부곡은 군현의 승강에 따라 다른 군·현으로 이속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의 군현제는 그 외형만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을 뿐 그 내용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상당히 복잡하였다.
〔조선〕
조선 초기에도 고려 군현제의 특징은 계속되었으나 이에 대한 개선의 시도가 있었다. 특히
태종(太宗)의 군현제 정비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우선 고려의 5도 양계를 8도(道) 체제로 확립하였다. 8도는
경기도(京畿道)·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황해도(黃海道)·강원도(江原道)·평안도(平安道)·함길도(咸吉道)였다. 도의
명칭은 그 지역의 주된 읍명의 첫글자를 따서 붙였다.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 평안도는 평주와 안주의 첫글자를 딴 것이었다. 8도의 장관은 처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내지 안렴사(按廉使)라 불리워졌으나 세조 때에 관찰사(觀察使)로 통일되었다.
속군·현을 주읍화하는 정책도 추진되었다.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개칭해 속군·현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읍격이 맞지 않는 주(州) 단위의 읍호를 ‘산(山)’ 내지 ‘천(川)’자를 붙여 군·현으로 다시 돌리는 작업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울주(蔚州)는 울산군(蔚山郡), 포주(抱州)는 포천현(抱川縣)이 되었고
괴주(槐州)는 괴산현(槐山縣)이 되었다.
여러 개의 소현(小縣)을 병합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이
병합되어 해미현(海美縣)이,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이 병합되어 무장현(茂長縣)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또 속현이나 향·소·부곡과 같은
임내(任內)의 혁파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군현제의 개혁은 세종대를 거쳐 세조대에도 계속 추진되었다. 또 군현의 하부 단위에서는
면리제(面里制)가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중앙집권책과 군현제 개혁의 결과 지방관의 수도 고려에 비해 대폭 증가하였다.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의하면, 부윤(府尹) 4,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4, 목사(牧使)
20, 도호부사(都護府使) 44, 군수(郡守) 82, 현령(縣令) 34, 현감(縣監) 141로 총 329명의 외관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속현과 향·소·부곡의 존재는 조선 후기인 17세기 이후에 와서야 소멸되었다. 또
군현에 대한 임의적인 승강도 계속되어 이이(李珥)나 유형원(柳馨遠)의 군현제 개혁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근대〕
조선의 군현제는 갑오개혁기인 1895년 8도제가 없어지고, 소구역주의에 입각해
23부제(府制)가 실시됨으로써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때의 개혁은 종래 부(府)·목(牧)·군(郡)·현(縣)을 총337군으로
단일화하였다.
이리하여 현이라는 행정구역명이 없어지게 되었고, 그에 대신하여 조선초기부터 실시된
면리제(面里制)가 하부행정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면·리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하였고 하나의 자치구역으로서 상급행정구역인 군을 보좌하는 구실만
담당하게 되었다.
1897년 23부제는 행정이 불편하고 번거로우며 재정상의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폐지되고
13도제(道制)가 실시되었다.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북도·경상남도·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강원도·함경남도·함경북도
등이 그것이다. 13도 밑에는 8부(府)·1목(牧)·332군(郡)이 존재하고 있었다. 1913년에는 13도 12부 218군으로
재정비되었다.
〔의의〕
한국의 군현제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기는 하였지만 실제 운용의 측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운용과정에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향리들에 의해 많은 폐단이 노출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군현제가 유교사상과 더불어 중앙집권국가를
유지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지적해 둘 만하다.
<<참고문헌>>三國史記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高麗史節要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韓國古代史의 新硏究(申瀅植, 一潮閣, 1984)
<<참고문헌>>羅末麗初의 豪族과 社會變動硏究(金甲童,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90)
<<참고문헌>>高麗地方制度의 硏究(河炫綱, 韓國硏究院, 1977)
<<참고문헌>>高麗時代 部曲制硏究(朴宗基, 서울대출판부,1990)
<<참고문헌>>高麗政治制度史硏究(邊太燮, 一潮閣, 1971)
<<참고문헌>>高麗時代史 上(朴龍雲, 一志社, 1985)
<<참고문헌>>朝鮮時代 地方行政史(李樹健, 民音社, 1989)
<<참고문헌>>朝鮮時代 地方行政制度硏究(李存熙, 一志社, 1990)
<<참고문헌>>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李鍾旭, 歷史學報 64, 1974)
<<참고문헌>>新羅郡縣制의 硏究動向 및 그 課題(金甲童, 湖西史學 14, 1986)
<<참고문헌>>韓末地方制度改革의 硏究(尹貞愛, 歷史學報 105, 1985)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高麗史節要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韓國古代史의 新硏究(申瀅植, 一潮閣, 1984)
<<참고문헌>>羅末麗初의 豪族과 社會變動硏究(金甲童,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90)
<<참고문헌>>高麗地方制度의 硏究(河炫綱, 韓國硏究院, 1977)
<<참고문헌>>高麗時代 部曲制硏究(朴宗基, 서울대출판부,1990)
<<참고문헌>>高麗政治制度史硏究(邊太燮, 一潮閣,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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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朝鮮時代 地方行政史(李樹健, 民音社, 1989)
<<참고문헌>>朝鮮時代 地方行政制度硏究(李存熙, 一志社, 1990)
<<참고문헌>>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李鍾旭, 歷史學報 64, 1974)
<<참고문헌>>新羅郡縣制의 硏究動向 및 그 課題(金甲童, 湖西史學 14, 1986)
<<참고문헌>>韓末地方制度改革의 硏究(尹貞愛, 歷史學報 105,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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