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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연희사전

전통연희(傳統演戱)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8.02.03|조회수575 목록 댓글 0

전통연희(傳統演戱)

서지사항
서명한국전통연희사전
대분류일반용어
가나다
자료명전통연희(傳統演戱)
자료문의고려대학교 전경욱 교수
기타2010년도 한국학진흥사업 선정 연구결과입니다.



【정의 및 이칭】
전통연희(傳統演戱)는 전통공연예술(傳統公演藝術), 민속연희(民俗演戱), 전승연희(傳承演戱), 민속예능(民俗藝能), 민속예술(民俗藝術), 민속놀이, 전통예능(傳統藝能), 전통예술(傳統藝術) 등과 혼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그것이 포괄하는 연희종목들을 통해 볼 때, 정확하게 일치하는 의미는 아니다. 각각의 용어가 포괄하는 연희종목들이 상당히 또는 일부 겹치기는 하지만, 완전히 겹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통연희는 근현대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전문적인 연희자들에 의해 전승되던 줄타기․솟대타기․땅재주․환술 등 산악․백희(散樂百戱)의 종목들과 가면극․판소리․창극․꼭두각시놀이 등 연극적 양식의 종목들로서, 직업적인 연희자들이 특정한 시기와 관계없이 영리를 목적으로 관중들을 위해 연행하는 공연물을 가리킨다. 이외에 고려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조선조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교방가무희(궁중정재), 무속의례인 굿에서 연행되는 무극(巫劇, 무당굿놀이), 불교의례에서 연행되는 범패(梵唄)․작법무(作法舞), 그리고 남사당패 등 직업적 유랑예인집단들의 풍물 및 지신밟기와 두레 등에서 연행되는 농악 등도 전통연희의 범주에 포함된다.
원래 전문적․직업적 연희자들이 전승하던 전통연희 종목을 농어민․하급관속 등 비직업적인 사람들이 배워서 공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일부는 관중을 위해 공연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준전문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연희들은 민속연희와 공연예술의 중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경기도의 별산대놀이, 황해도의 해서탈춤, 경남의 야류와 오광대가 대표적인 예이다. 원래 서울의 애오개, 사직골의 산대놀이가면극은 전문적인 놀이꾼들이 전승하던 것이다. 이것을 양주와 송파의 주민들이 배워서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를 성립시켰다. 또 경남의 야류와 오광대는 대부분 합천 밤마리 시장의 전문적 놀이패인 대광대패의 가면극이 농촌 주민들에게 전파된 것이다.
그러나 줄다리기, 고싸움, 연날리기, 횃불싸움 등 세시풍속의 하나로 마을 주민인 농어민들이 자족적으로 즐기기 위해 전승하던 연희들을 전통연희라고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연희들은 민속연희 또는 민속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우리나라에서 백희․백희잡기․잡희․산대희 등으로 불렀던 연희들을 중국에서는 산악(散樂) 또는 백희 등으로 불렀고, 현대에 와서는 잡기(雜技)라고 부른다. 곤극, 경극과 같은 전통연극들은 희곡(戱曲)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잡기와 희곡을 함께 포괄하는 용어로 희극(戱劇)을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들을 산가쿠(散樂)․사루가쿠(猿樂)라고 불렀고, 현대에 와서는 이런 연희들은 물론이고 가면극인 노(能), 인형극인 분라쿠(文樂), 가무극인 가부키(歌舞伎) 등 연극적인 갈래들도 포함시켜 예능(藝能)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중국의 희극이나 일본의 예능에 해당하는 우리 용어는 전통연희 또는 전통공연예술이 가장 적당한 듯하다.

【유래 및 역사】
상고시대의 연희는 상고 사회의 제천의식에서 연행된 가무활동, 그리고 여러 유물․유적과 암각화 등을 통해서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기원 전후 남만주와 한반도에 거주했던 우리 민족은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식과 종교적인 제천의식에서 가무희를 연행했다.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은 제천의식이었다. 마한(馬韓)에는 5월에 씨를 뿌리고 난 후와 10월에 농사가 끝난 후에 신에게 제사 지내는 농경의식이 있었다.
청동기시대의 암각화에서도 상고시대 연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울주군(蔚州郡) 대곡리(大谷里) 반구대(盤龜臺)의 암각화는 거대한 바위에 각종 동물과 물고기․인물 등이 2백여 점이나 조각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선사(先史)시대 조각품이다. 호랑이․사슴․고래와 같은 동물들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가 하면, 사람이 벌거벗고 춤추는 모습과 화살을 갖고 사냥하는 모습이 묘사된 것도 있다. 두 개의 가면도 있다. 이 암각화들은 수렵을 떠나기 전의 진지한 기원과 모의 연행, 그리고 수확을 하고 돌아와서의 감사제사와 마을 사람들의 즐거운 가무가 충분히 연상되는 그림이다. (도판 1)
삼국시대부터 우리의 공연예술은 주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그 독자성과 우수성을 갖추어왔다. 고구려․백제․신라는 중국과 서역의 공연예술을 받아들여, 우리의 공연문화를 풍부하게 가꾸어 나간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우리는 삼국․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외래 공연예술을 수용하여 공연문화를 풍부하게 영위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취향에 맞게 개작하여 한국화하고, 나아가 새로운 공연문화를 창출해 왔다.
동아시아에서는 불교․유교․한자 등이 동아시아 문화권 공동의 문화유산으로서, 한․중․일 각국에서 이 공동의 문화유산을 자국의 문화로 가꾸어 나갔다. 이는 공연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는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가 한․중․일 각국에서 자국의 연희로 변용․발전․재창조되었다. 중국에서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던 공연예술들을 우리나라에서는 백희․가무백희(歌舞百戱)․잡희(雜戱)․백희잡기(百戱雜技)․산대잡극(山臺雜劇)․산대희(山臺戱)․나례(儺禮)․나희(儺戱)․나(儺) 등으로 불러왔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중국․서역으로부터 산악․백희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자생적인 전통의 산악․백희 종목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도 새롭고 수준 높은 산악․백희의 종목들이 중국과 서역으로부터 다수 유입됨으로써, 기존에 존재하던 연희 종목들도 중국․서역의 뛰어난 연희자들에 의해 공연되는 수준 높은 연희의 영향으로 인해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고구려악(樂)은 중국 수나라의 칠부기와 구부기에 들어 있었고, 백제악과 신라악은 칠부기 외의 외국악(外國樂)으로 존재했다. 《수서(隋書)》 〈음악지〉에는 “고구려의 가곡(歌曲)에는 지서(芝栖)가 있고, 무곡(舞曲)에는 가지서(歌芝栖)가 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어 고구려악는 당나라의 십부기에도 들었고, 백제악은 십부기 외의 외국악으로 존재했다. 당나라의 십부기(十部伎) 중 고구려악에 호선무(胡旋舞)와 광수무(廣袖舞)라는 공연종목이 보인다. 《구당서》 지(志) 9에 의하면, 고구려악은 당나라 초에 가장 풍성했고, 무태후(武太后) 때도 25곡(曲)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삼국악은 이미 수나라 이전부터 중국에 전해졌고, 그 수준도 상당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의 악(樂)은 오늘날처럼 음악만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옛날에는 악이 춤․노래․연희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 즉 공연예술의 의미로 쓰였다.
고구려는 서역계의 악기와 가면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백제악․신라악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고려악(高麗樂, 고마가쿠)이란 명칭으로 전래되었다. 여기서 고려악은 고구려악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5세기 중엽에서 9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신라악(新羅樂)․백제악(百濟樂)․고구려악(高句麗樂)의 순서로 전래되어 병립했으나, 9세기 중엽에 이르러 외래악무(外來樂舞)를 정리할 때, 당나라와 인도 등의 악무를 좌방악(左方樂)이라 하고, 삼국 및 발해의 악무를 우방악(右方樂)이라 불렀다. 우방악은 일명 고려악이라 하여, 고구려악이 삼국악의 총칭으로 불렸다. 고구려악은 24곡(曲)이었는데, 이중 신도리소(新鳥蘇)․고도리소(古鳥蘇)․신쇼도쿠(進走禿)․다이쇼도쿠(退走禿)․나소리(納曾利)․소리고(蘇利古)․곤론핫센(崑崙八仙)․고도쿠라쿠(胡德樂)․오닌데이(皇仁庭)․기도쿠(貴德)․아야기리(綾切)․지큐(地久) 등 12곡은 가면무악(假面舞樂)이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만 가면을 쓴 인물들이 보일 뿐이고, 가면극 관련 연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헌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문헌에는 이와 같이 고구려 등 삼국의 가면희가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연희는 《수서》 〈동이전〉을 통해 투호(投壺, 병 속에 화살 넣기), 위기(圍碁, 바둑), 저포(樗蒲, 윷놀이의 일종), 악삭(握槊, 주사위놀이인 쌍륙)과 농주지희(弄珠之戱, 방울받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남조 오(吳)에서 배워 612년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伎樂)이 있다. 기악은 서역인 모습의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가면극으로서 묵극(黙劇)이었다. 기악의 내용은 일본 문헌인 《교훈초(敎訓抄)》(1233)에 소개되어 있는데, 절에서 불사(佛事) 공양의 무곡(舞曲)으로 연출되던 교훈극이다.
신라의 연희는 가무백희, 황창무(黃昌舞), 방울받기, 사자무(獅子舞), 무애희(無㝵戱), 입호무(入壺舞), 신라박(新羅狛)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연희는 처용무(處容舞)와 최치원(崔致遠, 857-?)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 묘사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의 다섯 가지 연희를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온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를 비롯하여, 수륙재(水陸齋), 우란분재(于蘭盆齋), 나례(儺禮), 수희(水戱), 왕의 행행(行幸)과 환궁(還宮), 궁중연회, 개선장군의 환영잔치 등에서 각종 연희를 연행했다. 여러 문헌에 공연종목의 명칭으로 백희가무(百戱歌舞), 사선악부(四仙樂部), 용봉상마거선(龍鳳象馬車船), 오방귀무(五方鬼舞), 사자춤, 입에서 불토해내기, 칼 삼키기, 서역의 호인희(胡人戱), 줄타기, 처용무,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수희, 우희(優戱, 골계희), 가면인잡희(假面人雜戱), 교방가무희(敎坊歌舞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례, 중국 사신 영접행사, 문희연(聞喜宴), 수륙재, 우란분재, 관아행사, 읍치제의(邑治祭儀, 군 단위로 지내는 제사), 동제(洞祭, 마을 단위로 지내는 제사), 사대부가의 잔치 등에서 공연예술을 연행했다.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유랑예인집단들이 민간에서 각종 연희를 연행하면서 돌아다녔다. 이 외에도 임금이 선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마치고 궁중으로 돌아올 때, 임금이 종묘(宗廟)에서 제사지낼 때, 공자 등 유학의 성인을 모신 문묘(文廟)를 참배할 때, 왕의 각종 행차시, 왕자와 공주의 태를 태봉(胎峰)에 묻을 때, 정월 보름에 궁중에서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모의농경의례인 내농작(內農作)을 거행할 때, 감사의 부임을 환영할 때 등에도 각종 연희를 연행했다.
그 연희의 명칭은 나희․나례․나(儺)․산대나례․채붕나례․잡희․백희․가무백희․산대희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지만, 결국 그 공연 종목들은 대부분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여러 문헌에 연희 종목의 명칭으로 방울받기, 땅재주, 줄타기, 접시돌리기, 솟대타기, 어룡만연지희, 불토해내기, 우희, 유희(儒戱), 사자탈춤, 처용무, 요요기, 검무, 인형극, 판소리, 가면극, 그리고 궁중정재로서 헌선도, 포구락, 향발, 무동, 무고, 검무, 오방처용무, 학무, 연화대, 선유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는 국가적 행사인 나례, 중국 사신 영접행사, 궁정 중심의 각종 행사들이 크게 위축되거나 소멸되었다. 반면에 국가행사와 궁정행사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민간에 퍼져 공연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의 공연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기존의 연희들을 바탕으로 혁신적으로 재창조한 본산대놀이 가면극, 판소리, 꼭두각시놀이 등 새로운 연극적 양식들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민간을 떠돌면서 공연예술을 연행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당패, 남사당패,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초라니패, 풍각쟁이패, 광대패, 걸립패, 중매구, 굿중패 등 다양한 명칭의 유랑예인집단들이 생겨났다.

【내용 및 특성】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연희자들이 흥행을 위해 관중을 상대로 공연하던 전통연희는 종목별로 크게 ⑴ 곡예와 묘기, ⑵ 환술(幻術), ⑶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⑷ 동물 재주 부리기, ⑸ 골계희(滑稽戱), ⑹ 가무희(歌舞戱), ⑺ 악기 연주, ⑻ 인형극, ⑼ 가면극, ⑽ 판소리와 창극, ⑾ 종교의례 속의 연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⑴ 곡예와 묘기: 곡예와 묘기에 해당하는 연희는 방울을 여러 개 공중에 던졌다가 받는 방울받기인 농환(弄丸), 칼을 여러 개 공중에 던졌다가 받는 농검(弄劍), 물구나무서기인 도립(倒立, 땅재주), 공중제비, 솟대타기인 간희(竿戱), 머리나 이마에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솟대타기를 하는 정간희(頂竿戱), 나무다리걷기, 줄타기인 주삭(走索), 접시 돌리기, 칼재주부리기, 무거운 솥을 들어올리는 강정(扛鼎), 바퀴를 쳐서 공중에 올려 돌리는 무륜(舞輪), 맨발로 불을 밟고 걷는 이화(履火), 칼이 꽂혀 있는 좁고 긴 장애물을 통과하는 충협(衝狹), 씨름인 각저희(角抵戱), 격투의 일종인 수박희(手搏戱), 나무로 만든 베개 여러 개를 가지고 줄을 맞춰 마치 하나의 기둥처럼 만들고 그 중에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목침을 하나 빼거나, 나무베개를 여러 개 쌓아 모양을 만드는 농침(弄枕), 말타기 재주인 마상재(馬上才), 뱀을 놀리는 수인농사(水人弄蛇), 누워서 발로 항아리 돌리기, 두 발을 벌린 채 윗몸을 뒤로 젖혀서 손으로 발목을 잡는 절요(折腰), 두 발을 벌린 채 윗몸을 뒤로 젖혀서 머리가 양 다리 사이로 나오게 하는 등 마치 뼈가 없는 사람처럼 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리는 재주, 몸을 뒤로 젖혀서 손을 땅에 대고 입으로 그릇을 물고 다시 일어서는 요요기(拗腰技) 등이 있었다. 이상 절요부터 요요기까지를 통칭해서 유술(柔術)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곡예와 묘기 장면은 이미 고구려 고분 벽화에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고, 이후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문헌기록과 도상 자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도판 2-3) 특히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1725)는 조선후기의 중국사신 영접행사에서 공연된 연희종목들을 잘 그려놓았다. 이중 제7폭은 모화관(慕華館) 마당에서 사신을 위해 공연한 접시돌리기, 세 명의 연희자가 행하는 땅재주, 네 명의 연희자가 추는 탈춤, 줄타기를 묘사하고 있다. 마당의 오른쪽에는 산거(山車)․산붕(山棚) 등으로 불렀던 소규모의 산대가 보인다. (도판 4) 원래 조선전기의 대형 산대는 이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산대 앞에서 연행된 공연예술을 산대희(山臺戱)라고 불렀는데, 그 공연종목들은 바로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첩의 제11폭에는 솟대타기를 하는 연희자도 묘사되어 있다. 또 감로탱(甘露幀)과 《기산풍속도첩(箕山風俗圖帖)》에도 조선시대의 각종 곡예와 묘기가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판 5)
⑵ 환술: 환술에 해당하는 종목은 연희자가 입에서 불을 토해내는 토화(吐火), 입으로 칼을 삼키는 탄도(呑刀), 사람의 가슴과 배에 예리한 칼을 찔러 넣지만 칼이 들어가지 않는 흉돌섬봉(胸突銛鋒),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끊었다가 다시 잇는 추장속단(抽腸續斷), 칼로 혀를 잘랐다가 다시 잇는 절설(截舌), 칼로 창자를 찌르는 자장위(刺腸胃), 오이씨를 심어 곧바로 열매 맺게 하는 식과(植瓜), 나무를 심어 쑥쑥 자라게 하는 종수(種樹), 바리때 안에 맑은 물을 부으면 연꽃이 무럭무럭 성장하는 발내생연(鉢內生蓮), 땅을 긋기만 하면 냇물이 되어 물이 흐르는 획지성천(畵地成川), 사람이나 말을 칼로 자른 후 다시 원상태로 복원하여 살아나게 하는 도인(屠人)과 절마(截馬), 스스로 팔과 다리를 자르는 자지해(自支解), 스스로 자기 몸을 끈으로 묶은 후 스스로 푸는 자박자해(自縛自解), 소와 말의 머리를 바꾸는 역우마두(易牛馬頭), 칼감추기, 끓는 기름에 집어 넣은 물고기가 헤엄치기, 말의 항문으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입마복무(入馬腹舞), 연희자가 이쪽 항아리로 들어갔다가 저쪽 항아리로 나오는 신라악(新羅樂) 입호무(入壺舞) 등이 있었다. (도판 6)
⑶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는 어룡(魚龍), 만연(曼衍), 공작희(孔雀戱), 표희(豹戱), 사자희, 호랑이희, 학춤 등이 있었다. 어룡과 만연은 중국 한나라 때 비롯된 본격적인 동물 흉내내기 연희이다. 물고기와 용의 동작을 흉내낸 집단 무용으로서, 물이 없는 못에 물고기와 용이 나타나면 구름이 생겨 비가 내리므로 물고기와 용의 동작을 흉내낸 집단적 춤이 연출된 듯하다. 《한서(漢書)》 〈서역전찬(西域傳贊)〉에 의하면, 어룡은 한대에 황제의 궁궐에서 행하던 공연예술이었다. 황금을 토한다고 해서 함리라 불리던 동물이 황제 앞에서 춤을 추다가, 물이 격렬하게 분출하면 비목어라는 외눈박이 물고기로 변한다. 이어 안개를 내뿜으며 점점 길이가 8장(丈)이나 되는 황룡으로 변하여,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춤을 춘다. 함리처럼 동물 가면을 쓰고 있다가 물고기와 용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어룡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만연도 어룡과 유사하다. 만연은 길이가 18장에 달하는 긴 동물이 등장하여 점차 황룡으로 변해 가는 연희였다. 어룡과 만연은 현재도 중국에서 정초에 행하는 용놀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용놀이는 천으로 길게 용의 형상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들고 뛰어다니며 연희하는 것이다.
공작희, 표희, 사자희, 호랑이희, 학춤은 각각 공작 가면, 표범 가면, 사자 가면, 호랑이 가면, 학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신라박〉,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의 〈산예〉(사자탈춤), 조선후기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의 사자탈춤과 학춤, 〈화성성역의궤〉 중 〈낙성연도〉의 사자탈춤과 호랑이탈춤을 비롯하여 현재도 각종 동물탈춤이 전승되고 있다. (도판 7)
⑷ 동물 재주 부리기: 동물 재주 부리기에는 금수어충희(禽獸魚蟲戱) 또는 동물희(動物戱)라 하여 각종 동물을 훈련시켜 묘기를 부리게 하는 연희가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동물의 흉내를 내던 것이, 직접 동물을 훈련시켜 재주를 부리게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코끼리, 말, 원숭이, 개, 쥐, 곰, 새, 염소 등 각종 동물을 직접 훈련시켜 재주를 부리게 하는 동물희가 매우 성행했다.
고구려 장천 1호 고분벽화에 이미 원숭이 두 마리가 재주를 부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조선후기 〈성시전도〉에는 원숭이 두 마리와 염소 두 마리의 공연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도판 8)
⑸ 골계희(滑稽戱): 골계희는 그동안 학자에 따라 우희(優戱)․소학지희(笑謔之戱)․조희(調戱)․화극(話劇) 등으로 불러왔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에는 대부분 우희(優戱)․배우희(俳優戱)․창우희(倡優戱)라고 되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에 우희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우희에는 임금을 풍간하는 내용, 부패한 관원을 풍자하는 시사적인 성격을 띤 내용, 흉내내기 연희(동작 및 각종 동물소리), 주유희(侏儒戱, 난쟁이놀이)가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각종잔치와 나례, 과거급제자 잔치인 문희연 등을 거행할 때와 서울의 길거리 등에서 우희가 공연되었다.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유입된 산악․백희의 한 종목인 우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희로 계승되고, 이 전통 속에서 우희가 판소리․가면극․재담․만담 등에 영향을 끼쳤다. (도판 9)
⑹ 가무희(歌舞戱): 가무희는 고구려의 호선무(胡旋舞)와 광수무(廣袖舞), 신라의 처용무와 황창무, 고려와 조선의 교방가무희(궁중정재), 조선조 말의 승무와 살풀이춤 등을 들 수 있다.
당나라의 십부악 중 고구려기에 호선무와 광수무가 들어 있다. 이 두 춤은 모두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발견된다. 호선무는 원래 서역 기원의 춤으로서 강국, 미국, 식닉 등 소그드 여러 나라들의 춤이었다. 강국악은 속칭 호선무라고 일컬었는데, 중국 서북부에 살았던 소수민족의 무용으로 선회하는 동작을 주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얻었다.
《신당서(新唐書)》 권21 〈예악지(禮樂志)〉에 의하면, 고구려의 호선무는 놀이꾼이 공 위에 서서 바람같이 빨리 도는 놀이(胡旋舞, 舞者立毬, 旋轉如風)인데, 고구려의 호선무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중국의 학자 중에는 “호선무는 놀이꾼이 공 위에 서서 바람같이 빨리 돈다(胡旋舞, 舞者立毬, 旋轉如風)”에서 구(毬)는 담(毯)의 오자로서, 놀이꾼이 서서 있는 것은 공이 아니고 담요(깔개)라고 보는 이도 있다.
교방가무희(궁중정재)는 고려시대에 송나라의 교방(敎坊, 궁궐에 속한 악사와 기생들을 관장하는 기관) 가무희를 도입한 것이다. 이를 고려와 조선의 궁중행사에서 공연했는데, 현재까지 계속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지방의 관기(官妓, 관아에 속한 기생)들이 궁중행사에 동원되었다가 귀향했는데, 이를 통해 헌선도, 포구락, 향발, 무동, 무고, 학무, 연화대, 선유락, 검무, 오방처용무 등 교방의 가무희가 지방 관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단원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 중 〈부벽루연회도〉에 묘사된 무고․포구락․검무․오방처용무(도판 10), 〈연광정연회도〉에 묘사된 학무, 연화대, 선유락 등은 교방가무희가 지방관아의 행사에서 연행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또 조선말기에는 승무, 살풀이춤 같은 춤도 생겨나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⑺ 악기 연주: 삼현육각 연주, 시나위 합주, 각종 악기의 산조 연주, 풍물, 사물놀이 등이 있다. (도판 11)
⑻ 인형극: 인형극은 고구려의 인형극이 중국에서 유명했고, 고려시대에도 이규보의 시에 인형극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꼭두각시놀이, 발탈, 만석중놀이 등이 있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도판 12)
⑼ 가면극: 가면극은 고구려 안악 3호분 고분벽화에서부터 나타나고, 고구려 등 삼국이 일본에 전한 우방악 24종목 가운데 12종목이 가면희이다. (도판 13) 그리고 백제인 미마지가 612년 일본에 전한 불교가면극 기악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가면극 관계 연희는 《삼국사기》 잡지(雜志) 중 최치원(崔致遠, 857-?)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 묘사된 〈대면〉, 〈속독〉, 〈산예〉를 들 수 있다.
《고려사》 권124 〈전영보(全英甫)〉 전에 “우리나라 말로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자를 광대라고 한다(國語假面爲戱者 謂之廣大)”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 전문적으로 가면을 쓰고 노는 가면극이 있었고, 그 연희자를 ‘광대’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서울 근교에 산대놀이라는 가면극이 애오개(아현), 사직골, 노량진, 구파발 등에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대신에 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서울과 경기도의 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퇴계원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경남의 수영야류․동래야류․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진주오광대, 그리고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생겨나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서낭제와 같은 마을굿에서 생겨난 하회별신굿탈놀이, 강릉관노가면극 등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⑽ 판소리와 창극: 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이 있었다. 송만재의 〈관우희〉(1843)에서는 판소리 열두 마당으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무숙이타령(왈짜타령)〉, 〈장끼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을 기록하고 있다.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1940)에서는 판소리 열두 마당으로 〈가짜신선타령〉 대신에 〈숙영낭자전〉을 들고 있어, 〈관우희〉와 차이를 보인다. (도판 14)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흥보가)〉, 〈토별가(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의 여섯마당을 정리했다.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이 전승되고 있다.
최초의 창극은 1902년 가을, 고종의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신식 극장인 원각사에서 김창환이 전국의 남녀 명창을 불러들여 공연하려 했던 〈춘향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행사는 두 번 연기된 끝에 유야무야되었고, 1903년 가을 강용환에 의해 창극 〈춘향전〉이 공연되었다. 무대 천장에 전등을 밝히고, 흰 포장을 둘러친 다음, 여러 창자들이 포장 앞에 둘러서서 각자 맡은 배역의 소리를 했다.
원각사가 해체된 후, 명창들은 협률사를 구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창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1933년에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면서부터 창극은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다. 1935년에 공연된 정정렬 편극의 〈춘향전〉은 무대를 제대로 갖추고, 새로운 대사를 많이 삽입하여 연극적 면모를 갖추었다. 그 후 조선성악연구회는 직속으로 ‘창극좌’를 두고 여러 편의 창극을 공연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현재는 국립창극단에서 창극의 현대화, 창극의 한국적 뮤지컬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즉 창, 음악반주, 춤, 잡기, 연기 등 다방면에서 현대인들이 좋아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작하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판소리 작품을 개작하여 창극으로 무대에 올릴 뿐만 아니라, 〈시집가는 날〉, 〈산불〉, 〈로묘와 주리〉 등 새로운 창작 창극도 제작하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⑾ 종교의례 속의 연희: 무속의례인 굿과 불교의례 속에서도 전통연희적 요소가 발견된다. 이런 연희들은 종교의례의 일부로 연행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연희자들이 흥행을 목적으로 공연하는 연희와는 구별된다. 즉 앞에서 다룬 열 종류의 공연예술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연희들 속에도 전통연희적인 요소가 있고, 앞으로 우리가 전통연희를 계승하여 현대연극을 창작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으므로 여기서 함께 다루기로 한다.
무극(巫劇)은 흔히 무당굿놀이라고도 부르는데, 무녀(巫女) 또는 무부(巫夫)가 굿을 하는 가운데 행하는 연극을 가리킨다. 무극의 연희자는 무당 집단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무극 자료로는 서울과 경기도의 〈뒷전〉, 〈양주소놀이굿〉, 황해도의 〈영산할멈 할아범거리〉․〈도산말명에 방아놀이〉․〈사냥굿〉․〈사또놀이〉․〈소당애기씨놀이〉․〈평산소놀이굿〉․〈마당굿〉․〈중놀이〉, 평안도의 〈자리곰방놀이〉․〈방아놀이〉, 동해안 지역의 〈거리굿〉․〈도리강관원놀이〉․〈중도둑잡이놀이〉․〈호탈굿〉․〈광인굿〉․〈탈굿〉, 거제도(巨濟島)의 〈망석놀음(탈광대)〉, 전남의 〈삼설양굿〉․〈진도다시래기〉, 제주도의 〈전상놀이〉․〈영감놀이〉․〈세경놀이〉․〈입춘굿놀이〉등이 있다. (도판 15)
불교의례인 영산재(靈山齋),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수륙재(水陸齋) 등에서 연행되는 범패(梵唄), 작법무(作法舞)도 전통연희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범패는 불교 음악으로서 가곡(歌曲), 판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삼대 성악곡 중의 하나이다. 범패는 재를 올릴 때 사용하는 의식음악으로 장단과 화성이 없는 단성선율(單性旋律)이다. 문헌을 통해 범패가 이미 8-9세기 경부터 한반도에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법은 불교의식에서 동작이나 율동으로 법열을 표현하는 춤인데, 크게 바라춤, 착복무, 법고춤, 타주무로 나눌 수 있다.

【인접 국가 사례】
내몽골 후허하오터(呼和浩特) 허린거얼(和林格爾)의 동한(東漢)시대 고분벽화, 중국 산둥성 텅저우시(滕州市) 출토 동한 만기(晩期, 147-189)의 화상석, 고구려 팔청리 고분벽화의 행렬도에 묘사된 연희장면은 매우 유사하여 동아시아 전통연희의 교류양상을 잘 보여 준다.
우선 내몽골 허린거얼의 고분벽화에 채색으로 그려진 연희 장면에서 중앙의 두 사람이 북을 치는 건고무(建鼓舞)를 중심으로 농환(弄丸, 방울받기), 무륜(舞輪, 수레바퀴 쳐올리기), 장간희(長竿戱, 솟대타기), 도립(倒立, 물구나무서기), 안식오안(安息五案, 여러 개의 탁자를 쌓아 놓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칼재주부리기, 도검(跳劍, 칼 던졌다가 받기) 등의 연희와 그것을 반주하고 있는 악사들이 보인다. (도판 16) 안식오안의 안식은 페르시아로서, 이 연희가 페르시아로부터 유래했음을 알려 준다. 중국 산둥성 텅저우시(滕州市) 출토 동한시대의 화상석에는 중앙의 두 사람이 북을 치는 건고무, 방울받기, 안식오안, 칼재주부리기 등이 묘사되어 있다. (도판 17)
고구려 팔청리 고분벽화의 행렬도에는 왼쪽부터 북 연주, 말 타고 뿔나팔 불기, 칼재주부리기, 방울받기, 서역악기인 완함을 연주하는 가운데 나무다리걷기 등이 그려져 있다. (도판 18) 특히 이 셋은 북을 치는 가운데 여러 연희와 함께 칼재주부리기가 연행되고 있으며, 셋 모두 무덤 안에 그려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동아시아 전통연희의 교류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저명한 연극학자인 가와타케 시게토시(河竹繁俊)는 이미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문화인 산악․백희가 일본에 유입된 이후 변화․발전하여, 후대에 일본의 대표적 전통연극인 노가쿠(能樂)․노교겐(能狂言)․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가부키(歌舞伎) 등을 성립시켰음을 밝힌 바 있다.
이는 중국과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서 산악․백희는 후대에 발전된 공연예술의 모태가 되었다. 2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대의 산악․백희 종목들은 근현대의 잡기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왔다. 송(宋)․원(元) 이후의 희곡은 그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미 수․당(隋唐)시대에 〈참군희(參軍戱)〉와 〈답요랑(踏搖娘)〉처럼 연극적인 형태가 산악․백희 안에서 존재했고, 이런 것들이 다방면으로 발전하면서 후대 연극의 성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연극의 기원을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우맹(優孟)이 손숙오(孫叔敖)로 분장하고 장왕(莊王)을 찾아가서 연기했던 우희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우맹이 제삼자의 행위를 모방하여 연출했기 때문이다. 우희는 산악․백희의 한 종목인데, 우희 외에도 산악․백희와 중국 전통연극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산악․백희는 시대에 따라 변천했으며, 신축성이 커서 여러 가지 잡기와 연극도 포괄했다. 송대 이후 산악․백희는 연극 속에 융합되었다. 송 잡극은 기본적으로 골계희인 우희를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완숙한 잡극(雜劇)과 전기(傳奇) 등의 극종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삽과타원(揷科打諢)’, 즉 ‘우스꽝스런 동작과 말’도 바로 이 우희의 영향이다.
이러한 산악․백희의 발전 과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불리는 연희들은 삼국시대에 중국과 서역으로부터 유입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가무백희․백희잡기․잡희․산대잡극․산대희라고 불리던 연희들도 바로 이 산악․백희이다. 한국에서는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가 변화․발전하여, 민간에서 전승되어온 자생적 연희들과 함께, 조선후기의 본산대놀이 가면극․판소리․꼭두각시놀이 등을 성립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의의】
전통연희 가운데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종목들은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동으로 보유했던 동아시아 공동의 공연예술 유산이다. 산악․백희에 주목함으로써 한국 전통연희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각종 문헌에 정착된 전통연희 자료들을 일관되게 꿰뚫어 해명할 수 있다. 아울러 산악․백희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연희들을 담당했던 연희자들에 대한 일관된 해명도 가능하다. 그리고 전통연희는 요즘 우리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류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현대공연예술의 한국화를 위해 창작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이다.
지금과 같은 한류열풍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삼국시대에도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류가 있었다. 고구려의 고대 한류는 당나라의 십부악(十部樂) 가운데 고구려기인 호선무와 광수무, 중국에서 유명했던 고구려 인형극, 고구려춤을 흉내 냈던 당나라 재상 양재사의 경우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백제인 미마지가 중국 남조 오나라에서 배워 612년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은 백제의 대표적 고대한류이다. 신라의 경우는 신라악 입호무와 신라박이 대표적인 고대 한류이다.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외래 연희를 수용하여 공연문화를 풍부하게 영위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취향에 맞게 개작하여 한국화함으로써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해 왔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제는 전통연희가 영화, 연극, 애니메이션, 서커스, 무용 등 여러 분야의 문화콘텐츠로 활용되고 있고, 앞으로 그 수요가 더욱 증대될 것이다. 2005년 영화 〈왕의 남자〉가 크게 히트하여 1,0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는데, 이 영화는 조선후기의 떠돌이 놀이꾼인 두 연희자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많은 전통연희 종목들이 공연되었다. 영화 〈서편제〉는 판소리를 다룬 내용으로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사물놀이는 전통적 양식의 풍물을 개작하여 크게 성공한 사례이다. 북한의 경우, 1952년 설립된 평양교예단이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이 서커스는 바로 우리의 전통연희를 창작자원으로 활용한 것이다.
더욱이 전통연희는 새로운 한국적 현대연극의 창출을 위한 창작자원으로서의 의의도 갖고 있다. 현재 연극계에서는 우리의 전통연희를 활용한 한국적 현대연극을 창작하여 공연하는 연극단체들이 여럿 생겨났고, 이들 중 일부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즉 국립창극단의 창극, 극단 목화(오태석)․연희단 거리패(이윤택)․민족예술단 우금치(류기형)․극단 민들레(송인현)의 연극, 극단 민예(손진책)의 마당놀이,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산하 단체들의 민족극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아직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전통연희를 창작자원으로 활용하여 좀더 수준 높고 재미있는 한국적 현대연극을 창출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가와타케 시게토시(河竹繁俊) 저, 이응수 역, 《일본연극사》상, 도서출판 청우, 2001.
권영필, 《실크로드미술》, 열화당, 1997.
김학주, 《한․중 두 나라의 가무와 잡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서연호, 《한국 전승연희의 원리와 방법》, 집문당, 1997.
송방송, 《한국음악학의 현단계》, 민속원, 2002.
양회석, 《중국희곡》, 민음사, 1994.
이두현, 《한국연극사》(신수판), 학연사, 2000.
이혜구, 《한국음악연구》, 국민음악연구회, 1957.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傅起鳳․傅騰龍, 《中國雜技史》,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91.
董錫玖․劉峻驤, 《中國舞蹈藝術史圖鑑》, 湖南: 湖南敎育出版社, 1997.
廖奔, 《中國戱劇圖史》, 鄭州: 大象出版社, 2000.
朝倉無聲, 《見世物硏究》, 京都: 思文閣, 1999.
古河三樹, 《圖說庶民藝能 - 江戶の見世物》, 東京: 雄山閣出版, 1993.

【사진 및 도판】
도판 1.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석기시대, 2백여 점의 각종 동물과 물고기․인물 조각.

도판 2. 수산리 고분벽화, 고구려, 5세기, 수레바퀴 쳐올리기, 방울받기, 나무다리걷기의 공연 장면.

도판 3. 장천 1호분 벽화, 고구려, 4세기말-5세기 초, 방울받기, 수레바퀴 쳐올리기 장면.

도판 4. 아극돈, 《봉사도》, 1725, 제7폭줄타기, 땅재주, 접시 돌리기, 탈춤 등의 공연 장면.

도판 5.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조선말, 민족학박물관, 독일 함부르크, 솟대타기와 죽방울치기 공연장면.

도판 6. 《신서고악도》의 신라악 입호무.

도판 7. 《화성성역의궤》 〈낙성연도〉의 사자탈춤과 호랑이탈춤.

도판 8. 〈태평성시도〉,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원숭이와 염소의 공연 장면.

도판 9. 길거리의 재담 공연, 1884, 서울.(퍼시빌 로웰, 조경철 역,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예담, 2001))

도판 10. 김홍도, 〈평안감사향연도〉 중 〈부벽루연회도〉에 묘사된 헌선도․무고․포구락․검무․오방처용무.

도판 11. 김홍도, 〈무동〉, 《단원풍속화첩》,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삼현육각 연주 장면.

도판 12. 꼭두각시놀이 공연 장면. 1930년대 송석하 촬영. 왼쪽부터 피조리, 박첨지, 피조리, 홍동지.

도판 13. 안악 3호분, 고구려, 가면희도, 긴퉁소, 완함, 긴 퉁소의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연희자.

도판 14. 작자 미상, 〈평양도〉, 연대 미상, 서울대박물관, 평안감사의 능라도 연회장에서 모흥갑이 판소리를 연행하는 모습.

도판 15. 〈입춘굿놀이〉, 1914, 제주도 관덕정 앞.

도판 16. 내몽골 후허하오터 허린거얼 고분벽화, 동한, 방울받기, 칼받기, 수레바퀴쳐올리기, 안식오안 등의 공연 장면.

도판 17. 산둥성(山東省) 텅저우시(滕州市) 출토 화상석, 동한, 건고무, 방울받기, 안식오안, 칼재주부리기 등의 공연 장면.

도판 18. 팔청리 고분벽화, 고구려, 5세기, 행렬도의 공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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